#Article 1: 지미 카터 (446 words)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 1924년 10월 1일 ~ )는 민주당 출신 미국 39대 대통령 (1977년 ~ 1981년)이다.

지미 카터는 조지아주 섬터 카운티 플레인스 마을에서 태어났다. 조지아 공과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해군에 들어가 전함·원자력·잠수함의 승무원으로 일하였다. 1953년 미국 해군 대위로 예편하였고 이후 땅콩·면화 등을 가꿔 많은 돈을 벌었다. 그의 별명이 땅콩 농부 (Peanut Farmer)로 알려졌다.

카터 대통령은 에너지 개발을 촉구했으나 공화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카터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조정하여, 캠프 데이비드에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수상과 함께 중동 평화를 위한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것은 공화당과 미국의 유대인 단체의 반발을 일으켰다. 1979년 백악관에서 양국 간의 평화조약으로 이끌어졌다. 또한 소련과 제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에 조인했다.

카터는 1970년대 후반 당시 대한민국 등 인권 후진국의 국민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취임 이후 계속해서 도덕정치를 내세웠다.

그러나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에서 인질 구출 실패를 이유로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져 결국 재선에 실패했다. 또한 임기 말기에 터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사건으로 인해 1980년 하계 올림픽에 반공국가들의 보이콧을 내세웠다.

지미 카터는 대한민국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대통령 중 하나다. 인권 문제와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한때 한미 관계가 불편하기도 했다. 1978년 대한민국에 대한 북한의 위협에 대비해 한미연합사를 창설하면서, 1982년까지 3단계에 걸쳐 주한미군을 철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주한미군사령부와 정보기관·의회의 반대에 부딪혀 주한미군은 완전철수 대신 6,000명을 감축하는 데 그쳤다. 또한 박정희 정권의 인권 문제 등과의 논란으로 불협화음을 냈으나, 1979년 6월 하순,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관계가 다소 회복되었다.

퇴임 이후 민간 자원을 적극 활용한 비영리 기구인 카터 재단을 설립한 뒤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제 3세계의 선거 감시 활동 및 기니 벌레에 의한 드라쿤쿠르스 질병 방재를 위해 힘썼다. 미국의 빈곤층 지원 활동, 사랑의 집짓기 운동, 국제 분쟁 중재 등의 활동도 했다.

카터는 카터 행정부 이후 미국이 북핵 위기, 코소보 전쟁, 이라크 전쟁과 같이 미국이 군사적 행동을 최후로 선택하는 전통적 사고를 버리고 군사적 행동을 선행하는 행위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 하며 미국의 군사적 활동에 강한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특히 국제 분쟁 조정을 위해 북한의 김일성, 아이티의 세드라스 장군, 팔레인스타인의 하마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정권 같이 미국 정부에 대해 협상을 거부하면서 사태의 위기를 초래한 인물 및 단체를 직접 만나 분쟁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힘썼다. 이 과정에서 미국 행정부와 갈등을 보이기도 했지만, 전직 대통령의 권한과 재야 유명 인사들의 활약으로 해결해 나갔다.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 문제, 세계의 인권문제에서도 관심이 깊어 유엔에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의 제도를 시행하도록 노력하여 독재자들의 인권 유린에 대해 제약을 하고, 국제형사재판소를 만드는 데 기여하여 독재자들 같은 인권유린범죄자를 재판소로 회부하여 국제적인 처벌을 받게 하는 등 인권 신장에 크나 큰 기여를 했다.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에 발목이 잡혀 실패한 대통령으로 평가를 받지만 이란 사태는 미국 내 이란 재산을 풀어주겠다는 조건을 내세워서 사실상 카터가 해결한 것이었고, 사랑의 집짓기 운동 등으로 퇴임 후에 훨씬 더 존경받는 미국 대통령 중에 특이한 인물로 남았다.

그는 2002년 말 인권과 중재 역할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다.




#Article 2: 수학 (1011 words)


수학(數學, )은 양, 구조, 공간, 변화 등의 개념을 다루는 학문이다. 널리 받아들여지는 명확한 정의는 없으나 현대 수학은 일반적으로 엄밀한 논리에 근거하여 추상적 대상을 탐구하며, 이는 규칙의 발견과 문제의 제시 및 해결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수학은 그 발전 과정에 있어서 자연과학을 비롯한 다른 학문들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며, 다만 엄밀한 논리와 특유의 추상성, 보편성에 의해 다른 학문들과 구별된다. 특히 수학은 과학의 여느 분야들과는 달리 자연계에서 관측되지 않는 개념들에 대해서까지 이론을 추상화시키는 특징을 보이는데, 수학자들은 그러한 개념들에 대한 추측을 제시하고 적절하게 선택된 정의와 공리로부터 엄밀한 연역을 거쳐 그 진위를 파악한다.

수학의 개념들은 기원전 600년 경에 활동하며 최초의 수학자로도 여겨지는 탈레스의 기록은 물론, 다른 고대 문명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인류의 문명과 함께 발전해왔다. 오늘날 수학은 자연과학, 공학, 의학, 경제학, 사회과학 등 다른 여러 학문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된다.

수학을 의미하는 'mathematics'라는 단어는, '아는 모든 것', '배우는 모든 것'이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máthēma'(μάθημα) 및 그 활용형 mathēmatikós(μαθηματικός)에서 유래되었다.

역사적으로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명에 필수적인 건축, 천문학, 정치, 상업 등에 수학적 개념들이 응용되어 왔다. 교역·분배·과세 등 인류의 사회 생활에 필요한 모든 계산에 수학이 관여해 왔고, 농경 생활에 필수적인 천문 관측과 달력의 제정, 토지의 측량 또한 수학이 직접적으로 사용된 분야이다. 고대 수학을 크게 발전시킨 문명으로는 이집트, 인도, 그리스, 중국 등이 있다.

특히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는 처음으로 방정식에서 변수를 문자로 쓰는 등 추상화가 발전하였고 유클리드의 원론에서는 최초로 엄밀한 논증에 근거한 수학이 나타난다. 수학의 발전은 이후로도 계속되어 16세기의 르네상스에 이르러서는 과학적 방법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수학과 자연과학에 있어서 혁명적인 연구들이 진척되었고, 이는 인류 문명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수학의 각 분야들은 상업에 필요한 계산을 하기 위해, 숫자들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토지를 측량하기 위해, 그리고 천문학적 사건들을 예견하기 위해 발전되어왔다. 이 네 가지 목적은 대략적으로 수학이 다루는 대상인 양, 구조, 공간 및 변화에 대응되며, 이들을 다루는 수학의 분야를 각각 산술, 대수학, 기하학, 해석학이라 한다. 또한 이 밖에도 근대 이후에 나타난 수학기초론과 이산수학 및 응용수학 등이 있다.

산술은 자연수와 정수 및 이에 대한 사칙연산에 대한 연구로서 시작했다. 수론은 이런 주제들을 보다 깊게 다루는 학문으로, 그 결과로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등이 유명하다. 또한 쌍둥이 소수 추측과 골드바흐 추측 등을 비롯해 오랜 세월 동안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는 문제들도 여럿 있다.

수의 체계가 보다 발전하면서, 정수의 집합을 유리수의 집합의 부분집합으로 여기게 되었다. 또한 유리수의 집합은 실수의 집합의 부분집합이며, 이는 또다시 복소수 집합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사원수와 팔원수 등의 개념을 생각할 수도 있다. 이와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자연수를 무한대까지 세어나간다는 개념을 형식화하여 순서수의 개념을 얻으며, 집합의 크기 비교를 이용하여 무한대를 다루기 위한 또다른 방법으로는 기수의 개념도 있다.

수 대신 문자를 써서 문제해결을 쉽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학적 법칙을 일반적이고 간명하게 나타내는 것을 포함한다. 고전대수학은 대수방정식 및 연립방정식의 해법에서 시작하여 군, 환, 체 등의 추상대수학을 거쳐 현대에 와서는 대수계의 구조를 보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선형대수학으로 전개되었다. 수의 집합이나 함수와 같은 많은 수학적 대상들은 내재적인 구조를 보인다. 이러한 대상들의 구조적 특성들이 군론, 환론, 체론 그리고 그 외의 수많은 대수적 구조들을 연구하면서 다루어지며, 그것들 하나하나가 내재적 구조를 지닌 수학적 대상이다. 이 분야에서 중요한 개념은 벡터, 벡터 공간으로의 일반화, 그리고 선형대수학에서의 지식들이다. 벡터의 연구에는 산술, 대수, 기하라는 수학의 중요한 세개의 분야가 조합되어 있다. 벡터 미적분학은 여기에 해석학의 영역이 추가된다. 텐서 미적분학은 대칭성과 회전축의 영향 아래에서 벡터의 움직임을 연구한다. 눈금없는 자와 컴퍼스와 관련된 많은 고대의 미해결 문제들이 갈루아 이론을 사용하여 비로소 해결되었다.

공간에 대한 연구는 기하학에서 시작되었고, 특히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비롯되었다. 삼각법은 공간과 수들을 결합하였고, 잘 알려진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포함한다. 현대에 와서 공간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개념들은 더 높은 차원의 기하학을 다루기 위해 비유클리드 기하학(상대성이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함)과 위상수학으로 일반화되었다. 수론과 공간에 대한 이해는 모두 해석 기하학, 미분기하학, 대수기하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리 군도 공간과 구조, 변화를 다루는데 사용된다. 위상수학은 20세기 수학의 다양한 지류속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한 분야이며, 푸앵카레 추측과 인간에 의해서 증명되지 못하고 오직 컴퓨터로만 증명된 4색정리를 포함한다.

변화에 대한 이해와 묘사는 자연과학에 있어서 일반적인 주제이며, 미적분학은 변화를 탐구하는 강력한 도구로서 발전되었다. 함수는 변화하는 양을 묘사함에 있어서 중추적인 개념으로써 떠오르게 된다. 실수와 실변수로 구성된 함수의 엄밀한 탐구가 실해석학이라는 분야로 알려지게 되었고, 복소수에 대한 이와 같은 탐구 분야는 복소해석학이라고 한다. 함수해석학은 함수의 공간(특히 무한차원)의 탐구에 주목한다. 함수해석학의 많은 응용분야 중 하나가 양자역학이다. 많은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양과 그 양의 변화율의 관계로 귀착되고, 이러한 문제들이 미분방정식으로 다루어진다. 자연의 많은 현상들이 동역학계로 기술될 수 있다. 혼돈 이론은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현상을 탐구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다.

수학의 기초를 확실히 세우기 위해, 수리논리학과 집합론이 발전하였고, 이와 더불어 범주론이 최근에도 발전되고 있다. “근본 위기”라는 말은 대략 1900년에서 1930년 사이에 일어난, 수학의 엄밀한 기초에 대한 탐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수학의 엄밀한 기초에 대한 몇 가지 의견 불일치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수학의 기초에 대한 위기는 그 당시 수많은 논쟁에 의해 촉발되었으며, 그 논쟁에는 칸토어의 집합론과 브라우어-힐베르트 논쟁이 포함되었다.

오늘날 수학은 자연과학, 공학뿐만 아니라, 경제학 등의 사회과학에서도 중요한 도구로 사용된다. 예를들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미적분학과 선형대수학은 자연과학과 공학, 경제학을 하는데에 필수적 과목으로 여겨지며, 확률론은 계량경제학에 응용된다. 통계학은 사회과학 이론에 근거를 마련하는데 필수적이다. 16세기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자연이라는 책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주장과 함께 물리학에 수학적 방법을 도입하였고, 17세기에 아이작 뉴턴이 고전 역학의 기본 물리학 법칙들을 수학적으로 기술하고 정립하여 물리학 이론에서 수학적 모델링은 필수적 요소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과학적 방법이 정립되는 시기이기도 한데, 많은 과학적 현상들이 수학적 관계가 있음이 드러나면서 과학적 방법에도 수학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유진 위그너는 그의 에세이 The unreasonable effectiveness of mathematics in natural sciences에서 인간 세상과 동떨어져있고 현실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여겨지던 수학 중 극히 일부는 뜻밖에도 자연과학과 연관성이 드러나고 과학이론에 효과적인 토대를 마련해 주는데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하였다. 예를 들어,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3차원 이상의 임의의 차원에서 기하학을 탐구했던 미분 기하학은 당시에는 현실과 연관성을 가지지 않았으나 먼 훗날 일반상대성이론이 4차원 기하학을 필요로 함에 따라, 물리적 세상과 연관이 있음이 밝혀졌다. 또한 게이지이론, 양자장론 등에도 미분 기하학은 필수적이다.

또한 수학은 음악이나 미술 등 예술과도 관련이 있다. 피타고라스는 두 정수의 비율이 듣기 좋은 소리가 난다는 점을 가지고 피타고라스 음계를 만들었다. 중세시대에도 음악과 수학을 밀접하게 연관시켰으며 성 빅토르의 후고는 “음악은 조화다”라고 했고, 성 트론드의 루돌프는 “음악은 조화의 토대(ratio)다”라고 쓴 바 있다. 조화가 반드시 소리로 표현될 필요는 없고 소리의 음악은 음악의 형식 중 하나에 불과했다. 소리에 대해 다루었던 중세의 저술가들이 있는가 하면, 조화와 비례의 추상적 이론만을 다루고 소리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저술가들도 있었다. 청각적인 면과 추상적인 면이라는 음악의 이런 이중적 측면은 고대의 음악이론보다는 중세의 음악이론에서 큰 특징이 되었다. 또한 현대 음악을 군(群,group)같은 수학적 대상을 이용해 분석하기도 한다. 원근법은 사영 기하학에 해당한다. 미술 사조 중 하나인 입체파도 기하학의 영향을 받았다.




#Article 3: 문학 (489 words)


문학(文學, )은 언어를 예술적 표현의 제재로 삼아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여, 인간과 사회를 진실되게 묘사하는 예술의 하위분야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언어를 통해 인간의 삶을 미적(美的)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학은 원래 문예(文藝)라고 부르는 것이 옳으며, 문학을 학문의 대상으로서 탐구하는 학문의 명칭 역시 문예학이다. 문예학은 음악사학, 미술사학 등과 함께 예술학의 핵심분야로서 인문학의 하위범주에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문학의 정의는 텍스트들의 집합이다. 각각의 국가들은 고유한 문학을 가질 수 있으며, 이는 기업이나 철학 조류, 어떤 특정한 역사적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한 국가의 문학을 묶어서 분류한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어, 성서, 베오울프, 일리아드, 그리고 미국 헌법 등이 그러한 분류의 범주에 들어간다. 좀 더 일반적으로는 문학은 특정한 주제를 가진 이야기, 시, 희곡의 모음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이야기, 시, 그리고 희곡은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띨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문학의 한 부분으로서 특정한 아이템을 구분 짓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문학은 어떠한 상징적인 기록의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미지나 조각, 또는 문자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또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문학은 오직 문자로 이루어진 텍스트로 구성된 것만을 포함한다. 좀 더 보수적인 사람들은 그 개념이 꼭 물리적인 형태를 가진 텍스트여야 하고, 대개 그러한 형태는 종이 등의 눈에 보이는 매체에서 디지털 미디어까지 다양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보면, 문학과 몇몇 인기있는 기록형태의 작업들, 소위 대중문학 사이에는 인식가능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이때 문학적인 허구성과 문학적인 재능이 종종 개별적인 작품들을 구별하는 데에 사용된다. 예를 들어, 찰스 디킨즈의 작품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문학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제프리 아처의 작품들은 영문학이라는 일반적인 범주 아래 두기에는 다소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예를 들어 문법과 어법에 서투르거나, 이야기가 혼란스러워 신뢰성을 주지 않거나, 인물들의 성격에 일관성이 없을 경우에도 문학에서 제외될 수 있다. 로맨스, 범죄소설, 과학소설 등의 장르 소설도 때로 문학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대부분 대중문학의 범주에 포함된다.

문학은 분류하는 방법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이 외에도 편의에 따라 발생적으로 대별하기도 한다.

문학은 처음은 유일한 종류, 즉 노래하고, 말하고, 춤춘다는 것이 분화되지 않은 것이었다. 이 춤추는 것을 중심으로 발달한 것이 연극(演劇)이며, 노래하는 것이 발달하여 시(詩), 말하는 것이 발달하여 산문(散文)의 이야기가 되었다. 시는 정형시·자유시·산문시로, 또한 서사시와 서정시로 나뉜다. 산문은 사건을 중심으로 그려진 이야기, 근대 리얼리즘의 수법 이후 인물의 성격을 묘사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 소설이 있다. 이야기나 소설과 같이 특별한 구상에 의하지 않고, 작자의 흥미에 의해서 씌어지는 것이 잡문(雜文) 또는 수필이며, 이것이 날짜에 따라 씌어지는 것이 일기, 여행의 과정에 따라 씌어지는 것이 기행문이다. 일기와 마찬가지로 발표의 의도가 작은 것에 서간(書簡)이 있다. 이 밖에 사건의 경험에 따른 회고록, 사건 등의 특정시(特定時)에 한정되지 않는 자서전, 제삼자에 의해서 씌어지는 전기(傳記)가 있다. 또한 이것들을 포함하는 예술작품의 가치평가를 시도하는 것이 평론(評論)이다.

대중문학이란 상업성을 띠며 대중을 겨냥하여 그들의 통속적인 흥미와 욕구를 채워주는 문학을 말한다. 대중문학의 하위장르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문학을 창작하는 예술가를 문예가라고 부른다. 문예학을 연구하는 사람을 문예학자라고 부른다. 문학을 창작하는 사람을 따로 저술가라고 한다. 문예학자와 언어학자를 합쳐 어문학자로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언어와, 언어를 사용한 예술인 문학은 현격한 차이가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반영론적 관점에 의한 감상은 작품을 창작된 당시 시대 정황과 연결시켜 감상하는 입장이고, 내재적 관점의 감상은 작품의 형식, 내용에 국한하여 감상하는 것이다. 표현론적 관점의 감상은 작가의 전기적 사실과 작품을 연결시켜 감상하는 것이고, 수용론적 관점의 감상은 독자와 작품을 연결시켜 감상하는 것을 말한다.




#Article 4: 나라 목록 (212 words)


이 문서는 나라 목록이며, 전 세계 206개 나라의 각 현황과 주권 승인 정보를 개요 형태로 나열하고 있다.

이 목록은 명료화를 위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두 목록은 모두 가나다 순이다.

일부 국가의 경우 국가로서의 자격에 논쟁의 여부가 있으며, 이 때문에 이러한 목록을 엮는 것은 매우 어렵고 논란이 생길 수 있는 과정이다. 이 목록을 구성하고 있는 국가를 선정하는 기준에 대한 정보는 포함 기준 단락을 통해 설명하였다. 나라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는 국가 문서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 목록은 주권을 주장하고 점유한 영토를 실제로 관리하고 있으나, 많은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지 못한 나라를 설명하고 있다. 극소형 국가는 이 목록에 포함하지 않는다.

이 목록에 실린 국가 기준은 1933년 몬테비데오 협약 1장을 참고로 하였다. 협정에 따르면, 국가는 다음의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특히, 마지막 조건은 국제 공동체의 참여 용인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승인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목록에 포함된 모든 국가는 보통 이 기준을 만족하는 것으로 보이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국가이다. 하지만 몬테비데오 협약 기준을 만족하는지의 여부는 많은 국가가 논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몬테비데오 협약 기준만이 국가 지위의 충분한 자격이든 아니든, 국제법의 견해 차이는 존재할 수 있다. 이 물음에 대한 다른 이론에 대한 고리는 아래에서 볼 수 있다.

위 기준에 논거하여 이 목록은 다음 206개 국가를 포함하고 있다.

위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다음 국가는 몬테비데오 협약의 모든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거나, 자주적이고 독립적임을 주장하지 않는 국가이다.




#Article 5: 화학 (1465 words)


화학(化學, )은 물질의 성질, 조성, 구조, 변화 및 그에 수반하는 에너지의 변화를 연구하는 자연과학의 한 분야이다. 물리학도 역시 물질을 다루는 학문이지만, 물리학이 원소와 화합물을 모두 포함한 물체의 운동과 에너지, 열적·전기적·광학적·기계적 속성을 다루고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통일된 이론을 구축하려는 것과는 달리 화학에서는 물질 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한다. 화학은 이미 존재하는 물질을 이용하여 특정한 목적에 맞는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는 길을 제공하며, 이는 농작물의 증산, 질병의 치료 및 예방, 에너지 효율 증대, 환경오염 감소 등 여러 가지 이점을 제공한다.

영어 ‘케미스트리(chemistry)’는 연금술을 뜻하는 단어 ‘알케미(alchemy)’에서 비롯하였다. 이는 다시 아랍어 ‘알 키미야(, al-kīmiyāʾ)’에서 왔는데, 이 단어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고대 화학

인간에 의해 발견된 최초의 기록된 금속은 금인 것으로 보이며 구석기 후기(BC 40,000)에 스페인 동굴에서 소량의 천연 금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은, 구리, 주석 및 유성 철 또한 고대 문화에서 일부 제한된 양의 금속 가공을 허용하면서 고대문화로 발견 될 수 있었다. 기원전 3000년경 유성 철제로 만든 이집트 무기는 천국의 단검으로 높이 평가 받았다.

아마도 통제 된 방식으로 사용 된 최초의 화학 반응은 불이였다. 그러나 천년 동안 불은 단순히 열과 빛을 생성하면서 한 물질을 다른 물질 (타는 나무 또는 끓는 물)로 변형시킬 수있는 신비한 힘으로만 알려졌다. 불은 초기 사회의 여러 측면에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요리 및 서식지 조명과 같은 일상 생활의 가장 단순한면에서 도기, 벽돌 및 금속을 녹여 도구를 만드는 것과 같은 고급 기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유리의 발견과 금속의 정화로 이어지는 불로 인해 야금이 부상했다. 야금의 초기 단계에서 금속의 정화 방법이 요구되었고, 금은 BC 2900 년 초기의 고대 이집트의 귀중한 금속이되었다.

영국계 미국인 화학자 로버트 보일 (Robert Boyle, 1627-1691)은 연금술에 대한 현대의 과학적 방법을 정제하고 화학을 연금술과 분리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연구가 연금술 전통에 뿌리를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일은 오늘날 현대의 화학자이자 현대화학의 창시자이자 현대 실험 과학 방법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불리고 있다. 보일이 원래 발견자가 아님에도 보일은 1662 년에 제시한 보일의 법칙으로 가장 잘 알려져있다. 보일의 법칙은 온도만 폐쇄된 시스템 내에서 일정하게 유지된다면 가스의 절대 압력과 부피가 반비례함을 의미한다. 보일은 또한 화학 분야의 초석으로 간주되는 1661 년의  에 대한 획기적인 저서로 인정받고 있다. 작품에서 보일은 모든 현상이 움직이는 입자의 충돌의 결과라는 가설을 제시한다. 보일 (Boyle)은 화학자들에게 실험을 호소했으며 실험은 지구, 화염, 공기 및 물과 같은 고전적인 4 가지 원소만으로 화학 원소를 제한한다는 것을 부인했다. 그는 또한 화학이 의학이나 연금술에 종속되어 과학의 지위로 부상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중요한 것은 과학 실험에 대한 엄격한 접근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이론이 사실로 간주되기 전에 실험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 작품은 원자, 분자 및 화학 반응의 가장 초기의 현대적인 아이디어를 포함하고 있으며 현대 화학의 역사의 시작을 나타낸다. 보일은 또한 화학 물질을 정제하여 재현 가능한 반응을 얻으려고 시도했다. 그는 재료 물질의 물리적 특성과 상호 작용을 설명하고 정량화하기 위해 René Descartes가 제안한 기계 철학의 보컬 지지자였다. 보일은 원자핵론자 였지만 원자보다 더 많은 입자를 선호했다. 그는 속성이 유지되는 물질의 가장 정밀한 부분은 미립자의 수준에 있다고 논평했다. 그는 또한 공기 펌프로 수 많은 조사를 수행했으며, 공기가 펌프로 퍼져 나감에 따라 수은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또한 컨테이너에서 공기를 펌핑하면 화염을 없애고 내부에 있는 작은 동물을 죽일 수 있음을 관찰했다.

과거 화학에서 더 이상 나뉘지 않는 기초적인 요소가 존재한다고 했는데, 이 기초적인 요소를 원자(atom)라 한다. 원자란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입자로 고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에서부터 그 존재가 주장되었는데, 1803년 존 돌턴에 의해서 원자론으로 정리되었다. 20세기 초, 화학자들은 원자를 구성하는 더 작은 입자들, 즉 전자, 양성자, 중성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전자는 음전하를 띠고 있고, 양성자는 양전하를 띠고 있으며, 중성자는 전하를 띠지 않고 있다.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는 원자핵을 가지고 있으며 전자는 이 주변에 오비탈을 이루며 분포되어 있다.

원소(element)는 일반적인 화학적, 물리학적 방법으로는 분해되지 않는 물질을 의미한다. 원소는 원자핵에 존재하는 양성자 수로 정의되는 원자 번호로 구별된다. 산소, 황, 주석, 철 등은 원소이다. 19세기 중엽까지 약 80가지의 원소가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주기율에 따라 배열될 수 있다.

동위원소는 아이소토프 또는 동위체라고도 한다. 서로 화학적으로는 거의 구별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의 질량이 서로 다른 원소를 동위원소라고 한다. 영어의 isotope는 그리스어인 isos(같은)와 topos(장소)의 합성어인데, 질량은 서로 달라도 원소의 주기율표에서 같은 장소에 배열되는 데서 1901년 영국의 화학자 F. 소디가 isotope라는 명칭을 붙였다. 대부분의 원소는 동위 원소를 가진다. 동위 원소는 원자 번호는 같으나, 중성자수가 다른 원소를 뜻한다. 동위 원소는 화학적인 성질은 동일하나, 원자량의 차이를 이용하여 분리할 수 있다. 자연에서도 발견되는 92개의 원소 중 88개는 동위 원소가 지표면 상에 존재한다. 자연에서 발견되지 않더라도 동위 원소는 핵반응을 이용하여 만들어낼 수 있다. 어떤 동위 원소는 방사능을 가지기도 하는데, 이 경우 동위 원소의 원자핵은 불안정하고 방사선을 방출하며 자연적으로 붕괴된다.

동중 원소(isobar)는 원자 질량은 같으나, 양성자수가 다른 원소를 뜻한다. 동중 원소는 화학적, 물리적 성질이 다르며 40S, 40Cl, 40Ar, 40K, 40Ca등이 있다.

분자란 원자의 결합체 중 독립 입자로서 작용하는 단위체이다. 일정한 개수의 원자가 특정하게 정렬되어 서로 결합해 분자가 형성된다. 원자가 원소의 최소단위이듯, 분자는 화합물의 최소단위가 된다. 원자가 결합될 때 전자의 재배치가 일어나는데, 이는 화학에서의 중요한 관심사중 하나이다.

화학 반응은 원자 혹은 분자가 화학적인 변화를 겪는 일을 말한다. 화학 반응은 원자간의 결합이 끊어지는 일과 다시 이어지는 일을 포함한다. 결합이 끊어질 때는 에너지가 흡수되고, 결합이 이어질 때는 에너지가 방출된다. 화학 반응의 간단한 예로는 수소와 산소가 반응하여 물이 되는 것을 들 수 있다. 반응식은 다음과 같다.

반응식에서 알 수 있듯이, 화학 반응에서는 원자가 새로 생성되거나 나타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ΔH는 에너지 또는 엔탈피 변화를 뜻한다. 반응은 발열반응일 수도 있고, 흡열반응일 수도 있다. 발열반응은 주위로 열을 방출하는 반응으로 엔탈피 변화가 음수로 나타난다. 반면에 흡열반응은 주위 열을 흡수하는 반응으로 엔탈피 변화가 양수로 나타난다. 위 반응의 경우는 발열반응인데, 이는 계로부터 주위로 열이 이동하였다는 의미이다.

화학 결합을 주된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보면 이온 결합, 공유 결합 그리고 금속결합으로 나눌 수 있다. 이온이란 전하를 띤 원자 또는 분자를 뜻한다. 이온 결합은 양전하와 음전하의 전기적인 인력에 의해서 생성되는 화학 결합이다. 예를 들면 염화 나트륨은 양전하를 띤 나트륨 이온(Na+)과 음전하를 띤 염화 이온(Cl-) 사이의 전기적인 결합으로 이루어진 이온 화합물이다. 이러한 물질을 물에 녹이면 이온은 물 분자에 의해 수화되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수용액은 전기전도도를 가진다.

공유 결합은 오비탈이 겹쳐진 결과 두 원자가 전자쌍을 공유하게 되어 생성되는 결합을 의미한다. 공유 결합이 형성되는 결합은 발열반응인데, 이때 방출되는 에너지의 양이 그 결합의 결합 에너지이다. 결합 에너지만큼의 에너지를 그 결합에 가해주면 결합은 끊어질 수 있다.

금속 결합은 금속 원자에서 전자들이 떨어져 나와 자유전자를 생성하게 되어 생성되는 결합을 의미한다. 금속의 특성인 연성과 전성이 생성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화합물은 구성하고 있는 원자의 종류, 수, 배치에 의해서 그 특성이 결정된다. 자연에서 찾을 수 있거나 인공적으로 합성할 수 있는 화합물의 수는 엄청나고, 이들 중 대부분은 유기 화합물이다. 유기 화합물을 이루는 주된 화학 원소인 탄소는 다른 화학 원소와는 다르게 매우 긴 사슬 형태로 정렬될 수 있으며, 같은 수많은 이성질체를 형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분자식 C8H16O는 약 천 개의 서로 다른 화합물을 뜻할 수 있다.

화학은 취급 대상 및 대상의 취급 방법에 따라서 몇 가지 분과로 구분될 수 있다. 물질을 분석하는 분석화학은 크게 물질의 존재를 취급하는 정성 분석과 물질의 양을 결정하는 정량 분석으로 나눌 수 있다. 탄소를 포함한 유기 화합물을 다루는 유기화학과 유기 화합물을 제외한 무기 화합물을 다루는 무기화학도 있다. 물리학과 화학의 경계에는 물리화학이 있고 생물학과의 경계에는 생화학이 있다. 물리화학에서 특히 분자의 구조와 성질과의 관계를 다루는 부분을 구조화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방사성 물질을 다루는 방사화학이 발전하였고 화학 공업을 다루는 공업화학도 있다. 이 외에도 화학의 분과는 매우 다양하다.

화학의 분과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5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각각의 분과는 더욱 세분화될 수 있다.

파일:Tetraamminecopper(II)-3D-balls.png|섬네일|right|250px|무기 화합물의 예([Cu(NH3)4]2+
무기화학은 유기화학에서 다루지 않는 물질을 다루며 주로 금속이나 준금속이 포함된 물질에 대해서 연구한다. 따라서 무기화학에서는 매우 넓은 범위의 화합물을 다루게 된다. 초기에는 광물의 구성이나 새 원소의 발견이 주요 관심사였고 여기서부터 지구화학이 분기되었다. 주로 전이 금속 등을 이용한 촉매나 생물에서 산소 수송, 광합성, 질소 고정 등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금속 원자들에 대해 연구하며 이 외에도 세라믹, 복합재료, 초전도체등에 대한 연구를 한다.

물리화학은 화학적 현상에 대한 해석과 이를 설명하기 위한 물리적 원리들에 대해 다루는 분과이다. 화학반응에 관련된 열역학적 원리와 물질의 물리학적 성질에 대한 설명은 물리화학이 다루는 고전적인 주제이다. 물리화학은 양자화학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분광계나 자기 공명, 회절 기기 등 물리화학에서 사용하는 실험 장비나 실험 방법들은 다른 화학의 분과에서도 매우 많이 사용된다. 물리화학이 다루는 대상은 유기 화합물, 무기 화합물, 혼합물을 모두 포함한다.

분석화학은 물질의 조성이나 혼합물의 구성요소 등을 결정하는 방법에 대해서 연구하는 화학의 분과이다. 혼합물을 이루고 있는 성분의 탐색, 분리, 정량과 분자를 이루고 있는 원자의 비율을 측정하여 분자식을 결정하는 일 등이 분석화학에서 행해진다. 1950년대의 분석화학의 발전은 많은 질량 분석계를 포함한 분석 기구의 등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외에도 고해상도 크로마토그래피, 전기화학에서의 많은 실험방법 등은 분석화학에 있어서 중요한 분석법이다. 분석화학에 있어서 최종 목표는 더 정확한 측정법이나 측정기기 등을 개발하는 것이다. 분석화학의 발전으로 인해 환경오염 물질 등을 피코그램의 수준에서도 감지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생화학은 생물을 화학의 관점에서 다루는 학문이다. 식물이나 동물의 세포에서 발견되는 물질이나 일어나는 화학 반응들이 주 관심사이다. 생명체에서 발견되는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핵산, 호르몬 등은 유기 화합물이라서 유기화학에서도 다루어지기도 하나, 이들 화합물에 관련된 물질대사 과정이나 조절 과정에 대한 연구는 생화학의 고유 분야이다. 효소와 조효소, 그리고 이들의 작용 과정에 대해서도 연구하며, 세포막을 통과하는 이온과 분자, 신경전달물질과 다른 조절 물질들의 작용에 대해서도 연구한다. 생화학은 내분비학, 유전학, 면역학, 바이러스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기화학은 탄소로 이루어진 화합물을 연구하는 분과이다. 원래 유기 화합물은 식물이나 동물로부터 추출해낸 화합물을 뜻하였으나 지금은 유기 화합물의 범위가 크게 넓어져 탄소 사슬 또는 탄소 고리를 가진 모든 화합물을 뜻한다. 유기화학의 오랜 관심사는 유기 화합물의 합성 메커니즘이다. 현대에 들어서 핵자기 공명법과 X선 결정학 등이 개발되어 유기 화합물 분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방법으로 자리잡았다. 플라스틱, 합성섬유등의 고분자물질 등도 유기화학에서 다루어진다.




#Article 6: 체첸 공화국 (122 words)


체첸 공화국(, , ), 또는 줄여서 체첸(, , )은 러시아의 공화국이다.

체첸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체첸어와 러시아어이다. 체첸어는 캅카스제어 중, 북동 캅카스제어로 불리는 그룹에 속하는데 인구시어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거의 대부분이 체첸인이다. 일부는 러시아인, 인구시인과 기타 북코카서스계 민족도 섞여있다.

체첸 공화국은 일반적으로 러시아 연방 중에서도 젊은 층이 가장 많은 인구 구성을 가진다. 1990년대에는 몇몇 지방에서 인구증가가 있었다.

다게스탄 지역을 통해 16세기에서 19세기를 기점으로, 체첸인들은 절대다수가 수니파 이슬람교를 믿으며 러시아 정교회도 소수 존재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소비에트 정부는 체첸이 나치군과 협력했다고 맹비난하였다. 스탈린은 체첸 국민 전체에게 카자흐스탄으로의 강제이주를 명령했다. 그 후 스탈린이 사망한 지 4년 후인 1957년에 이르러서야 체첸인의 귀환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체첸전쟁 때 러시아의 엄청난 공세로 인해 체첸 전역은 초토화 되었다. 그 이후 친러파 성향의 대통령이 세워지고, 러시아가 체첸을 다시 세워주었다.




#Article 7: 맥스웰 방정식 (742 words)


맥스웰 방정식(-方程式, s)은 전기와 자기의 발생, 전기장과 자기장, 전하 밀도와 전류 밀도의 형성을 나타내는 4개의 편미분 방정식이다. 맥스웰 방정식은 빛 역시 전자기파의 하나임을 보여준다. 각각의 방정식은 가우스 법칙, 가우스 자기 법칙,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 앙페르 회로 법칙으로 불린다. 각각의 방정식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종합한 이후 맥스웰 방정식으로 불리게 되었다.

전자기역학은 맥스웰 방정식과 로런츠 힘 법칙으로 요약된다. 로랜츠 힘은 맥스웰 방정식으로부터 유도될 수 있다.

맥스웰의 방정식은 네 개의 법칙을 모아 종합하여 구성한 것이다. 맥스웰의 방정식은 빛과 같은 전자기파의 특성을 설명한다. 각 방정식의 수학적 표현은 공식 부분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은 방정식의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맥스웰의 방정식에 나타난 각 식은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된 전기와 자기의 특성을 종합한 것이다. 인류는 고대 시대부터 이미 정전기에 의한 인력과 방전 현상을 알고 있었고 자석의 특징을 이용한 나침반을 만들어 사용해 왔다. 근대에 이르러 전기와 자기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쿨롱 법칙,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 앙페르 회로 법칙과 같은 법칙들이 발견되었다. 맥스웰은 이러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전기와 자기가 하나의 상호작용, 즉 전자기력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면서 빛역시 전자기파라는 것을 밝혔고, 전자기 복사의 발견을 예언하였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두 전하 사이에 인력과 척력이 작용한다는 것은 고대 이후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두 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관계와 크기는 측정하기 매우 어려웠는데, 그 까닭은 작용하는 힘의 크기가 매우 작기 때문이었다. 1784년 샤를 드 쿨롱은 비틀림 저울을 이용한 실험장치를 고안하여 대전된 두 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었다.

샤를 드 쿨롱은 금속공과 비틀림 저울을 이용하여 두 점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하고, 두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전하 크기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쿨롱 법칙을 발견하였다.

쿨롱 법칙을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한편, 쿨롱 힘은 전하 사이의 작용뿐만 아니라 자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두 자극의 세기를 각각 mA, mB라 할 때, 이 두 자극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자극의 세기 단위는 웨버(Wb)로 쿨롱은 세기가 같은 두 개의 자극을 1m 떨어뜨려 놓았을 때 작용하는 힘의 세기가 인 경우를 1Wb로 정의했다. 따라서 상수 k의 값은 다음과 같다.

자극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크기는 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크기와 같은 방식으로 계산할 수 있으나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즉, 전하는 양전하이든 음전하이든 단독으로 존재할 수 있는 데 반해 자극은 홀극으로 존재할 수 없고, N극과 S극이 언제나 쌍으로 존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각각 독립적으로 다루어져 오던 전기와 자기의 법칙들을 종합하여 맥스웰 방정식을 수립하였다. 맥스웰은 마이클 패러데이의 역선(力線) 개념과 앙드레마리 앙페르의 회로 이론을 근간으로 방정식을 정리하였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은 이 방정식에 비하면 남북전쟁조차 큰 의미없는 지엽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맥스웰 방정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당시 이 방정식은 헤르츠-헤비사이드 방정식 또는 멕스웰-헤비사이드 방정식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사이언스에의 기고문에서 이를 맥스웰 방정식이라 부르며, 이 방정식들이 이론물리학의 기초라고 설명하였다. 맥스웰은 방정식을 정리하면서 헤비사이드의 전위와 벡터 위치 등 위치 요소를 중요한 개념으로 도입하였다. 1884년 맥스웰은 전자기파의 전달을 중력과 같이 원격에서 상호작용하는 힘이 아닌 전자기장에서 빛의 속도로 전파되는 전위로 파악하였다. 라디오 안테나에 대한 현대의 분석에서도 맥스웰의 백터와 스칼라 위키에 대한 수식만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안테나 사이에 작용하는 전파의 영향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

맥스웰 방정식과 관련한 헤비사이드의 업적은 맥스웰이 여러 논문과 책에서 서술한 맥스웰 방정식을 오늘날과 같은 4개의 방정식으로 정리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4개의 방정식으로 정리된 맥스웰의 방정식은 1861년 발표된 논문인 《물리적 역선에 대해》에 기반한 것이다. 이 논문에는 전자기장에 대한 다수의 방정식이 실려있다.

방정식 56번 .
방정식 112번은 멕스웰이 앙페르 회로 법칙을 확장하여 전류와의 거리에 따른 자기력선의 세기를 표현한 것이다. 이 방정식에서 표현된 원격 전류의 개념은 전자기학의 핵심 개념이 되었다. 맥스웰은 1865년 《전자기장의 역학 이론》에서 전자기 파장 방정식을 정립하여 이를 보충하였다. 구스타프 키르히호프는 특히 이 방정식에서 원격 전류의 개념을 제거한 방정식을 수립한 뒤 이를 전신수 방정식이라고 불렀는데, 이 방정식이 전신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전자기 복사가 발견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키르히호프는 자신의 방정식이 전선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 유도에 국한된다고 생각하였다. 
방정식 115번은 가우스 법칙을 정리하고 있다.
방정식 54번을 올리버 헤비사이드는 패러데이 법칙이라 불렀다. 그러나, 패러데이 법칙의 원형이 자기장과 전류의 변화를 모두 반영하는데 비해 54번 방정식은 자기장의 변화에 따른 전류의 변화를 반영하지는 않는다. 맥스웰은 자기장의 변화만을 고려하여 v × B로 표기한 대신, 방정식 77번에서 오늘날 로런츠 힘 법칙으로 알려진 F  = q ( E + v × B ) 을 제시하였다. 맥스웰이 이 방정식을 발표한 때에 헨드릭 로런츠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이 때  는 전하 밀도이다. 는 축을 이루어 회전하는 자기 전류이고 는 그 주위를 돌게 되는 자기력선의 자기 선속이다. 투자율 µ는 결국 자기장 에 의해 유도되는 자기 선속 의 비가 된다.

전류 방정식은 전하의 대류 전류가 선형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자기 방정식은 유도 전류의 회전에 의해 발생하는 자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벡터의 방향성으로 인해 비선형 방정식이 된다. 따라서 자기 유도 전류는 역선으로 표현된다. 자기력선은 역제곱 법칙에 의해 전류에서 멀어질수록 약해지게 된다.

현대 벡터 표기를 사용하여 정리한 멕스웰의 8개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Article 8: 초월수 (160 words)


초월수(超越數, )는 계수가 유리수인 어떤 다항 방정식의 해도 될 수 없는 복소수이다. 다항 방정식의 해가 될 수 있는 수인 대수적 수와 반대 개념이다.

실수인 초월수는 모두 무리수이다. 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는 무리수이지만 이차방정식

의 해이므로 초월수가 아니다.

대수적 수의 집합이 가산 집합인 데 비하여 복소수의 집합은 비가산 집합이다. 따라서 초월수의 집합은 비가산 집합이 된다. 이것은 대수적 수의 개수보다 초월수의 개수가 많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초월수는 많지 않고, 어떤 특정한 수가 초월수임을 증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초월수의 존재는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예상하였으나, 최초의 초월수는 1844년에 조제프 리우빌이 발견하였다. 그는 초월수의 예로서 다음과 같이 정의되는 리우빌 상수를 제시하였다.

초월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수가 아닌 수 중에서 처음으로 초월수임이 증명된 수는 상수 e로, 샤를 에르미트가 1873년에 증명하였다. 1882년에는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이 원주율 또한 초월수임을 증명하였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의 난제였던 원적문제가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힐베르트는 이 문제의 구체적인 예로 를 들었다. 이 문제는 1934년에 겔폰트-슈나이더 정리에 의해 참임이 밝혀졌다. 이 결과는 1960년에 앨런 베이커에 의해 확장되었다.




#Article 9: 음계 (151 words)


음계(音階)는 음악에서 음높이(pitch) 순서로 된 음의 집합을 말한다. 악곡을 주로 구성하는 음을 나타낸 것이며 음계의 종류에 따라 곡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음계의 각각의 음에는 위치에 따라 도수가 붙는다.

음계는, 음계가 포함하고 있는 음정(interval)에 따라서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또는 음계가 포함하고 있는 서로 다른 피치 클래스의 수에 따라서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온음계와 반음계(半音階)는 서양 음악에서 쓰이는 용어이다. 자체로는 음계에 관한 말이지만, 온음계적·반음계적인 선율, 화음, 화성 진행 등의 표현으로도 쓰인다. 대부분의 경우 온음계는 7개 음으로 이루어진 장음계를 말한다. 20세기 음악론에서는 반음계가 아닌 모든 음계(이를테면 팔음음계)를 말할 때 쓰이기도 한다.

반음계는 12개의 반음으로 이루어진 음계를 말한다.

계이름은 음계를 기준으로 한 음의 이름이다. 장음계를 이루는 음의 계이름은 으뜸음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각각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가 된다.

서양 음악에서는 도·레·미·파·솔·라·시로 된 7음계가 많이 쓰이지만 한국 전통 음악에는 황종(黃鍾)-미♭·태주(太蔟)-파·중려(仲呂)-라♭·임종(林鍾)-시♭·무역(無射)-레♭으로 된 5음계가 많이 쓰이고, 중국 전통 음악에는 궁-도·상-레·각-미·변치(變徵)-올림화(Fa )·치-솔·우-라·변궁(變宮)-시로 7음계를 많이 쓴다.

한국 전통 음악에서는 5음계 외에도 3음계 또는 악계통에서는 7음계 등이 쓰인다.




#Article 10: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1334 words)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는 2002년 12월 19일 목요일 한국의 새로운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로 치러졌다.

대선 재수생인 이회창 후보는 경험이나 세력 면에서 노무현 후보보다 대권 고지에 좀 더 유리할 것으로 점쳐졌으나, 이전 대선부터 불거진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의 병역기피 논란, 노사모를 비롯한 네티즌들의 열성적인 노무현 지지,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성공 등에 힘입어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만 20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은 선거권이 있었다. 즉, 1982년 12월 19일 이전에 태어난 사람은 투표를 할 자격이 있었다.

만 40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은 피선거권을 가졌다. 즉, 1962년 12월 19일 이전에 태어난 사람은 후보자가 될 자격이 있었다.

새천년민주당은 3월 9일부터 4월 27일까지 한국 정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 참여 경선을 실시하고 과반 득표자인 노무현 전 해양수산부 장관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한나라당은 4월 13일부터 5월 9일까지 국민 참여 경선을 실시하고 최다 득표자인 이회창 전 당 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민주노동당은 9월 8일 당원들에 의한 단일 후보 찬반 투표를 통해 권영길 당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통합21은 11월 5일 창당대회를 열고 정몽준 의원을 당 대표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

사회당은 10월 27일 전당대회를 열고 김영규 전 인하대학교 교수를 당 대표 및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김영규 후보는 대의원 찬반투표 결과 전체 투표수의 95%를 득표하였다.

하나로국민연합은 11월 15일 재적 대의원 8,500명 중 8,125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열고 이한동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를 당 대표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

개혁당 추진위는 독자 후보를 내는 대신 노무현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기로 하고 이를 10월 12일부터 18일까지 창당 발기인 28,5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인터넷·모바일 찬반 투표에 부친 결과 총투표수 16,733표 중 15,723표가 찬성으로 나와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와의 대선 연대가 결정되었다. 개혁당 추진위는 10월 20일 창당 발기인 대회에서 이를 발표하였으며, 대회에 참석한 노무현 후보는 수락을 선언하였다.

박근혜 한나라당 부총재는 2001년 12월 11일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였다. 그러나 박근혜 부총재는 2월 28일 이회창 총재의 리더십을 비판하며 한나라당을 탈당하였으며, 이후 신당을 창당하여 독자적으로 대선에 출마할 뜻을 밝혔다. 결국 5월 17일 박근혜 대표가 이끄는 미래연합이 창당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미련은 6·13 지방선거에서 대참패를 당한 뒤 동력을 잃었으며, 그 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다가 대선 한 달 전 한나라당에 흡수 합당되었다.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은 10월 21일 무소속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장세동 후보는 12월 18일 당선 가능성이 없다며 사퇴를 선언하였다.

호국당은 11월 25일 재적 대의원 645명 중 539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열고 김길수 법륜사 주지를 당 총재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

제16대 대선은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 두 후보의 양자 대결 구도로 진행되어, 1971년 제7대 대선 이후 최초로 3자, 4자가 아닌 양자 구도로 치러진 대선이 되었다. 그러나 제15대 대선에서 패한 후 차근차근 대권 재도전을 준비해오던 이회창 후보가 한나라당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진보 성향 인사이면서 보수 정당 민주당의 후보가 된 노무현 후보는 끊임없이 당 내부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이회창의 당선이 유력시되고 있었으나, 제15대 대선과 마찬가지로 아들 병역기피 의혹에 시달리며 난관에 봉착한데다 노무현 후보가 이른바 '노풍'을 일으키며 선풍적 인기를 끌어 승패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 통합21 후보와 극적으로 단일화에 성공, 이를 발판 삼아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을 맹추격했다.

선거 결과 새천년민주당은 호남과 제주의 광역단체장만 당선되는 등 참패를 기록했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 대로 후보 재신임을 물었고, 민주당 당무회의는 만장일치로 재신임을 의결했다. 민주당 내 최대 계파 모임인 중도개혁 포럼은 이를 인정할 수 없다며 ‘후보·지도부 즉각 사퇴론’을 주장했다.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이인제 등 민주당 내 반노무현 세력의 후보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대한축구협회장이던 정몽준 무소속 의원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유치해내고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국민들 사이에 선풍적 인기를 얻어 유력 대권 주자가 되었다. 정몽준이 대선에 출마하자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은 토막났고, 안 그래도 노무현 후보와 갈등이 있던 당내 상당수 의원들은 노무현 후보를 더 적극적으로 배척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이거니와 ‘후보 교체론’까지 나왔다. 노무현은 경쟁력이 없는 만큼 정몽준을 수혈해 대선 새판 짜기에 나서야 하지 않느냐는 정치공학적 판단이었다.

그러던 10월 17일 김민석 전 민주당 최고위원이 민주당 탈당 및 통합21 합류를 선언했는데, 노무현에게 큰 타격이 되리라는 관측과 달리 오히려 이는 노무현 후보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노무현 후보에 대한 동정론이 불었고, 결국 답보 상태였던 그의 지지율은 20%대를 회복하고 후원금도 크게 늘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단일화 방안으로는 크게 3가지가 제시되었는데, 국민 경선과 여론 조사, 협상 담판이었다. 정몽준 캠프는 11월 1일 양 캠프가 협상·담판을 통해 단일 후보를 정할 것을 제안했고, 노무현 캠프는 11월 3일 국민 참여 50%, 당원 참여 50%로 국민 경선을 실시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또한 여론조사상 노무현 후보에 우위를 점하고 있던 정몽준 후보 측은 여론조사로 단일 후보를 정하는 방안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통합21은 노무현 캠프의 국민경선 실시 주장에 대해 “국민 경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반대를 표했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꾸준히 회복해 이미 판세는 이회창 후보가 독주하고 노·정 두 후보가 2위 싸움을 벌이는 1강 2중 구도로 재편되고 있었으므로, 정몽준 캠프로서도 하루 빨리 단일화를 성사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노무현 후보는 11월 11일, 자신에게 불리한 것으로 여겨지던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정식으로 제의하였다. 또한 여론조사 결과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일정 수준에 미달할 시 그 여론조사는 무효 처리하자는 정몽준 캠프의 주장을 수용하였다. 이에 따라 11월 23일부터 25일까지 주요 언론사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중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가장 낮게 나온 결과보다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더 낮게 나올 시 그 결과는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역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무효 처리하기로 하였다. 11월 23일부터 25일까지 실시된 여론조사 중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가장 낮게 나온 것은 국민일보-월드리서치가 11월 25일 실시한 결과에서의 30.4%였다. 따라서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30.4%보다 낮을 시 그 조사 결과는 무효 처리하도록 했다.

단일화 협의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가 단일화 방식 등 쟁점 사항에 있어 통큰 양보를 하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고, 이는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하는 효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단일화의 방식은 합의되었으나, 여론조사의 설문 내용을 두고도 논란이 일었는데,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 중 누가 더 마음에 드느냐'는 지지도 질문에는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높게 나오는 반면, '어느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이길 수 있겠느냐'는 경쟁력 질문에는 정몽준 후보의 지지율이 높게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양 캠프는 조율을 거친 결과 지지도 질문과 경쟁력 질문을 조금씩 섞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견주어 경쟁력 있는 단일후보로 노무현·정몽준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십니까를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두 후보는 여론조사 실시에 앞서 텔레비전 토론을 가지기로 했는데,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사전 선거 운동이 될 수 있다며 텔레비전 토론을 허용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한 차례에 한해 텔레비전 토론을 허용하였고, 두 후보 간 토론은 11월 22일 실시되었다.

후보 단일화를 위한 여론조사는 11월 24일 오후 1시부터 8시 30분까지 7시간 반에 걸쳐 실시되었다. 여론조사는 월드리서치와 리서치앤리서치, 2개 업체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한 업체가 각각 2,000명, 총 4,000명을 상대로 실시되었다.

민주당과 통합21은 11월 24일 자정 공동으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리서치앤리서치 조사는 응답자 중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32.1%가 나와, 무효 처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월드리서치 조사는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28.7%로 무효화 기준인 30.4%에 미달하여 무효 처리되었다. 리서치앤리서치 조사 결과 노무현 후보가 46.8%, 정몽준 후보가 42.2%를 얻음으로써 노무현 후보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무효 처리된 월드 리서치 조사 결과 또한 노무현 후보가 38.8%, 정몽준 후보가 37.0%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몽준 후보는 단일화 여론조사 결과에서 패배함에 따라 사퇴를 선언하고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다.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계기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를 역전하였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2위를 했던 이인제 전 민주당 최고위원은 12월 1일 민주당 탈당을 선언한 데 이어 이틀 뒤인 12월 3일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였으며, 입당과 동시에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지명을 받아 총재 권한대행으로 취임하였다. 이인제는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할 계획으로 자민련에 입당했으나, 김종필 총재의 강력한 의지로 자민련은 12월 12일 당 차원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기로 선언하였다. 다만 당원 및 당직자들이 개별적인 지지를 하는 것은 막지 않기로 해, 이인제는 다수 자민련 의원들과 함께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고 이회창 후보 지원 활동에 나섰다.

정몽준 역시 대선 전날인 12월 18일 밤 10시 긴급 발표를 통해 민주당과의 선거 공조를 파기를 선언하였다. 정몽준은 지지 철회 발표문에서 그 날 유세에서 노무현 후보가 ‘미국과 북한과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는 표현을 한 것에 노무현 후보의 외교안보 의식에 문제를 느껴 지지를 철회했다고 밝혔다. 노무현 후보와 정대철 민주당 선대위원장 등은 정몽준을 만나기 위해 정몽준의 자택 앞까지 찾아갔으나, 정몽준 대표는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모습이 전파를 타며 당시 진보 진영이 민노당 권영길 후보 대신 민주당 노무현 후보로 결집하는 의외의 효과가 일어났다는 분석도 있었다.

이 선거는 본격적인 세대론의 대두와 함께 노사모의 등장 등 인터넷 정치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는 점에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회창 후보는 선거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으나, 2007년 전격적으로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

노무현 후보의 당선으로 새천년민주당은 정권 연장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을 위시한 신주류 소장파와 구주류파가 중심인 민주당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고, 결국 임기 중이던 2003년 9월 30일 노무현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함으로써 민주당은 야당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새천년민주당은 2004년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키지만, 오히려 민심의 역풍을 맞고 총선에서 참패하며 몰락하고 만다.




#Article 11: 함석헌 (699 words)


함석헌(咸錫憲, 1901년 3월 13일 ~ 1989년 2월 4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종교인, 언론인, 출판인이며 기독교운동가, 시민사회운동가였다.

광복 이후 비폭력 인권 운동을 전개한 민권운동가이자 언론인, 재야운동가, 문필가 활약한 그의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호는 신천(信天), 씨알, 바보새이다.

그의 종교는 초기에는 일본 유학 중에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자였다가 중기에는 기독교였으나 후기에는 장로회로 바꾼것이다,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당숙 함일형(咸一亨)이 세운 한학 서당인 삼천재(三遷齋)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덕일소학교(德一小學校)에 입학, 1914년에 덕일소학교를 수료하고 그 해에 양시공립소학교에 편입하였다가 1916년 양시공립소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며 1917년에 황득순과 결혼하고, 1919년 평양 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에 숭실학교 교사로 있었던 6촌 형 함석은 등의 영향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3·1 운동에 참가한 후, 3.1운동에 대한 반성문을 쓰면 복학시켜 준다는 일본인 교장의 제의를 거부하고 퇴학되어 2년간 학업을 중단한다. 이 시기에 함석헌은 수리조합 사무원과 소학교 선생 등을 하게 된다.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金敎臣), 송두용(宋斗用), 정상훈(鄭相勳), 유석동(柳錫東), 양인성(楊仁性)등과 함께 교회에 다니지 않고도 신앙을 유지하는 무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1927년 동인지 《성서조선 聖書朝鮮》 창간에 참여하고 논객으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38년 3월까지 오산학교의 교사로 있다가 사임하였다.

해방 후에는 반공 시위인 신의주 학생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소련군에게서 풀려난 후 1947년 3월 17일 월남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탈출 전 그는 조만식을 만나고 오기도 했다.

이 일로 그는 우익 인사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는 또 1959년 6.25 전쟁 관련자들에 대한 훈장 서훈 이야기가 나오자 형제를 죽이고도 무슨 훈장이냐라고 비판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한국전쟁에 대해 비판하고 전쟁하는 국가와 거리를 두어보려는 목사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것이 놀라운 일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제3공화국 출범 후에는 종교인으로서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등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제5공화국을 거치면서도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가 1984년에는 민주통일 국민회의 고문을 지냈다. 1985년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 고문이 되었다.

그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대하였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민족통합을 참으로 하려면 우리의 대적이 누군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분열시킨 도둑이 누구입니까? 일본? 미국? 소련? 중공? 아닙니다. 어느 다른 민족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닙니다. 국민을 종으로 만드는 국가지상주의 때문입니다. 이제 정치는 옛날처럼 다스림이 아닙니다. 통치가 아닙니다. 군국주의 시대에조차 군림은 하지만 통치는 아니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참 좋은 군주는 그래야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 시대에, 나라의 주인이 민중이라면서 민중을 다스리려해서 되겠습니까? 분명히 말합니다. 남북을 구별할 것 없이 지금 있는 정권들은 다스리려는 정권이지 주인인 민중의 심부름을 하려는 충실한 정부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설혹 통일을 한다해도 그것은 정복이지 통일이 아닙니다. 민중의 불행이 더해질 뿐입니다. 나는 그래서 반대합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국가주의와 민족지상주의는 개인으로 하여금 권리와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성서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각 고전을 섭렵하여 자신의 사상으로 소화하여, 씨알사상이라는 비폭력, 민주, 평화 이념을 제창하였다. 비폭력주의 신조로 말미암아 “한국의 간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사회 평론뿐만 아니라 《도덕경》 등의 각종 동양 고전 주해도 행하였고, 그리고 시를 창작하기도 했다. 1989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입원, 그해 서울대 병원에서 별세하였다(향년 87세).

장지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간파리의 가족산에 매장되었다가, 2002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건국포장 수훈 이후 묘소가 대전 현충원(애국지사 제3-329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일본 유학 시절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였던 함석헌은 김교신, 송두용 등과 함께 초창기 한국 무교회주의 기독교 운동을 하였고, 퀘이커 모임(1961년과 1967년)을 계기로 퀘이커 신자가 되었다. 상훈으로 1987년 제1회 인촌상과 2002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일대기로 《내가 본 함석헌》, 《함석헌 평전》이 있다.

그는 김교신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 운동을 하기도 했다. 이는 일본 유학 시절,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金敎臣), 송두용(宋斗用), 정상훈(鄭相勳) 등과 함께 교회에 다니지 않고도 신앙을 유지하는 무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귀국 후에도 무교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일본인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집회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이후 줄곧 무교회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함석헌이 창간한 잡지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인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씨알의 소리' 2010년 1~2월호에 반론인 '함석헌과 사회진화론의 문제'를 실어 “함석헌의 철학과 사회진화론은 물과 기름처럼 양립할 수 없는 사상”이라고 반박했다. 김상봉 교수는 “사회진화론은 전쟁으로 열등한 종족이 도태되고 상대적으로 우수한 종족들만이 살아남아 인류가 발전했다는 것”이라며 “사회진화론자들은 약자가 도태되는 것은 자연적인 필연이므로 이를 인위적으로 막는 것은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만물을 짓고, 만물을 유지하고, 뜻을 이뤄가는 것은 힘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한 함석헌의 글을 인용하며 함석헌 사상은 ’힘의 철학’이 아니라 '사랑의 철학'이기 때문에 사회진화론과 양립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김상봉은 이어 함석헌이 ’생명은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하나’라고 지적하였다. 김상봉은 함석헌이 평소 민족이기주의와 국가지상주의를 비판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함석헌에게) 사회진화론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함석헌은 '누가 나처럼 수줍은 놈을 미친놈을 만들어 놓았느냐'라고 하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를 역임한 철학자 김용준은 함석헌이 철학자라고 하였다. 그는 나는 화학 빼고는 다 함선생님한테 배웠다고. 요즘 사람들은 함석헌하면 마치 주먹질만 하는 사람으로 아는데 그것은 넌센스야. 그건 함선생님의 일부분이고 80퍼센트는 도를 찾아 헤맸던 구도자라고 하였다.




#Article 12: 백남준 (146 words)


백남준(白南準, , 1932년 7월 20일 ~ 2006년 1월 29일)은 한국 태생의 세계적인 비디오 아트 예술가, 작곡가, 전위 예술가이다. 본관은 수원(水原)이고, 출신지는 서울이다.

생전에 뉴욕, 쾰른, 도쿄, 마이애미와 서울에 주로 거주한 그는 여러 가지 매체로 예술 활동을 하였다. 특히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의 범주를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예술가로서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구 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서린정) 출신이다. 친일파인 아버지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후 종로구 창신동 197번지 소위 큰대문집에서 18세까지 살았다. 수송국민학교와 경기제1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피아니스트 신재덕에게 피아노 연주를, 이건우에게 작곡을 각각 배웠다. 이때 한국이 낳은 작곡가 김순남을 사사했다. 1949년 그는 홍콩 로이덴 스쿨로 전학했으며,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가족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52년 도쿄 대학교 문과부에 입학했다. 2년 후 미술사학 및 미학으로 전공을 정했지만, 실제로는 일본 당대의 작곡가 모로이 사부로, 미학자 노무라 요시오 등에게서 작곡과, 음악사학을 공부했다. 졸업 논문은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이다.




#Article 13: 우크라이나 (604 words)


우크라이나(, )는 동유럽의 국가이다. 남쪽과 남동쪽으로는 흑해와 아조프 해, 동쪽과 북동쪽으로는 러시아, 북쪽과 북서쪽으로는 벨라루스, 서쪽으로는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남서쪽으로는 루마니아, 몰도바와 접한다. 키예프가 수도이며 가장 큰 도시이다. 동유럽 평원과 이어져 있으며 기후는 비교적 온화한 편이다. 법적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며 인구의 절반(주로 동부 지역과 동남부 지역, 오데사 지역)이 러시아어 사용자이며 일반적으로 학교/회사나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두 언어 모두 사용하고 있다. 주요 도시로는 키예프, 도네츠크, 드니프로, 하르키우, 리비우, 오데사, 자포리자가 있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함에 따라 행정력이 크림반도에 미치지 못하지만, 국제사회는 대체로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의 일부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루스 카간국으로부터 키예프 대공국으로 이어진 우크라이나는 튀르크족·몽골족 등의 오랜 지배를 받았다. 19세기까지 우크라이나의 가장 큰 부분이 러시아 제국에 통합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통제하에 놓였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혁명 후의 혼란과 끊임 없는 전쟁 속에서 여러 차례 독립을 시도하여 1917년에 민족국가를 건설했으나, 1922년에 소비에트 연방에 강제합병되었다. 1923년 소비에트 연방 헌법의 적용을 받았다.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독립하였다. 군사력 운영의 질적 수준은 아직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중간사이다. 지하자원도 풍부하여, 도네츠 탄전의 석탄, 크리보이로그의 철광석, 카르파티아 유전과 천연가스, 그 밖에 망간, 우라늄, 식염, 칼리염, 석회석 등을 산출한다. 주민은 73%가 우크라이나인, 22%가 러시아인이다. 산업으로는 석탄·철광·선철의 생산에 있어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풍부한 수력전기를 이용하여 기계제조공업·화학공업이 크게 발달했으며 유수의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석탄업, 철강업, 기계제조업, 화학공업의 중심은 돈바스·드네프르 주이며, 드네프르강의 하구에서 키이우까지의 사이에는 6개소의 수력발전소가 단계상(段階狀)으로 건설되어 있다. 우크라이나의 경지율은 약 70%에 이르고 있어, 겨울밀·옥수수·보리·사탕무·해바라기·포도의 재배, 가축사양 등에서는 구 소련 시절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온난한 크림반도 남단과 광천(鑛泉)이 솟는 카르파트 지방은 중요한 관광·보양지이다.러시아의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작품 〈타라스 부리바〉의 배경이 되기로도 알려졌다.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 및 러시아어가 쓰이고, 국민의 절대다수가 믿는 종교는 우크라이나 정교회이다.

국토 면적 603,700km²에 576,700km² (크림 공화국과 세바스토폴 제외시) 해안선 길이는 2,782km로, 우크라이나는 세계에서 44번째로 큰 국가(중앙아프리카 공화국보다는 작고, 마다가스카르보다는 크다.)이다. 또한, 유럽에서는 두 번째로 큰 나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유럽의 중심이 우크라이나 서쪽의 라키브 마을 인근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유럽의 지리적 중심을 보는 관점에 대해 논쟁이 있다.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평원, 스텝, 고원이 있으며, 그들을 지나가는 강이 흑해로 흘러들어간다. 거의 남쪽 만으로 강이 빠져나가고 남동부 지방에는 다뉴브 삼각지가 루마니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산은 카르파티아 산맥으로서 우크라이나 서부에 위치한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높은 산은 호베를라 산으로 높이는 2,061m이다. 크림 반도를 따라서 넓은 해안선이 펼쳐진다.

우크라이나에 분포하고 있는 체르노젬(흑토) 지대는 비옥한 토양으로 유명하다. 그 밖에 아스팔트, 무연탄, 철, 망가니즈, 크롬, 타이타늄, 납, 아연, 알루미늄, 수은, 니켈, 천연 가스, 석유 등 70여 가지의 종류에 달하는 천연 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대개 온화한 대륙성 기후를 보이는데 남쪽의 크림 반도 인근에서는 온난 습윤 기후가 나타나기도 한다. 비는 북서부 지방에 가장 많이 내리고 동부와 남동부 지역은 덜 오는 편이다. 겨울은 흑해 인근 지방이라면 따뜻하지만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대체로 추워진다. 여름에는 전반적으로 따뜻하지만 남쪽 지방은 무덥다.

동슬라브족의 역사에는 중앙아시아에서부터 건너와 동유럽을 정복한 투르크 민족들의 관계를 빼 놓을 수 없다. 3세기부터 시작한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들의 유럽 침공과 동슬라브족 정복 그리고 이주는 5세기부터 10세기까지 사바르 카간국에 이어 아바르 카간국 그리고 하자르 카간국까지 이어진다. 동유럽 동슬라브 원주민들은 사바르 카간국에 정복당해 프랑크족들과 대립하기도 하였고 하자르 카간국의 우크라이나 초원 정복으로 인해 동슬라브 문화는 서유럽의 문화와는 조금 이질적인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하자르 카간국의 영향에 따라 동슬라브족으로서의 정체성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8세기에서 9세기에 루스 카간국이라는 고대 투르크어인 군주 칭호인 카간을 자칭하는 북게르만족 루스인의 첫 국가가 등장하였다. 그 전까지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지배했던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들이 카간을 자칭하였으나 그 지배 아래 동슬라브인들도 완전히 종속과 동화되어 동슬라브인의 정체성이 확립되었고 그 후 동슬라브인들이 카간을 자칭하였다. 키예프 대공국은 10세기까지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의 영향을 받았고 이에 따라 류리크 왕조의 시조인 류리크 또한 위대한 카간이자 왕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862년경 전까지는 확실히 카간이라 칭한 루스인들이 페르시아 사서와 동, 서 로마 기록에 남아 있다. 여기에 원초연대기의 기록에서는 루스인들의 카간으로 알려진 류리크가 동슬라브족 지역에 정착하면서 류리크 왕조와 키예프 대공국이 나타나며 카간이라는 호칭보다는 크냐지 또는 벨리키 크냐지라는 호칭이 자주 쓰이게 된다.дека името Украина доаѓа од старословенскиот поим украина што значи „гранична област“ или „крајина“


#Article 14: 가위 (282 words)


가위()는 손으로 잡아 종이 등을 쉽게 자를 수 있게 하는 도구이다. 두 장의 얇은 금속 날을 결리지 않도록 엇갈리게 나사로 엮어, 그 두 날이 지레의 원리로 움직이면서 서로 부딪치면 절단력이 발생한다. 플라스틱 판, 얇은 철판, 머리카락, 끈, 종이, 옷감, 강삭 등을 자를 때 쓰인다.

핑킹가위는 무늬를 내며 자를 때 사용하는 가위이다. 무늬의 종류는 여러가지이며 물결무늬 지그재그 톱니모양 등이 있다.

쪽가위는 실 따위를 자를 때 사용하는 가위이다. 발견된 가위 중 가장 오래된 가위가 쪽가위 형태로 제작되었다.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쪽가위의 형태를 변형한 가위를 찾을 수 있다.

X자 형태의 날을 지닌 가위이다. 서기 100년경 고대 로마에서 쪽가위 디자인을 각색하면서 발명되었다.

지렛대의 원리에 바탕을 둔 것으로 지레의 작용점 · 받침점 · 힘점의 상호관계에 의하여, 힘점이 작용점과 받침점 사이에 있는 원지점식(元支點式), 지레의 받침점이 힘점과 작용점의 사이에 있는 중간지점식, 작용점이 힘점과 받침점 사이에 있는 선(先)지점식의 3가지로 구별된다.

따라서 이것을 응용한 가위도 3종으로 대별된다. 원지점식에 속하는 것으로서 손자수용 가위 ·잎따기가위 ·망(綱)베기가위 등이 있고, 중간지점식에 속하는 것으로는 재단가위 ·꽃가위 ·전정가위 ·전지가위 ·잔디가위 ·양철가위 ·버튼홀가위 ·의료가위 ·이용(理容)가위 등이 있다. 선지점식에 속하는 것은 눌러서 자르는 가위와 과일따기 가위 등이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가위는 기원전 1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들어진 가위다. 특히 로마 시대의 유물로 가위가 많이 발견되었으며, 이 시대 가위는 라틴 문화 중기에 중부 및 북유럽 등으로 전해졌다. 라틴 문화의 가위는 남자의 무덤에 부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알려져있던 양모를 깎기 위한 것이 아니고 수염을 깎는 데 쓰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로마 시대의 유물에서 발견된 날이 짧고 튼튼하게 만들어진 가위는 철사나 튼튼한 실, 얇은 철판등을 자르는 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가위는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발견된 가위이며, 모양이나 쓰임새가 중국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걸로 보아 중국에서 건너왔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전 세계에서 발견된 유물을 비교해볼 때 가위는 서양에서 처음 만들어져 사용되다가 중국에 전해졌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Article 15: 위키 (679 words)


위키(,  )는 불특정 다수가 협업을 통해 직접 내용과 구조를 수정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일컫는다.

또한 일반적인 위키에서 텍스트는 단순화된 마크업 언어(위키 마크업)을 이용하여 작성되며, 리치 텍스트 에디터의 도움을 받아 편집하기도 한다. 위키는 지식경영이나 기록 등 다양한 용도로 이용된다. 공동체용 웹사이트나 조직 내 인트라넷에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주로 개인적인 용도로 이용되는 위키도 있는데, 이를 개인 위키라고 한다.

최초의 위키 소프트웨어인 위키위키웹(WikiWikiWeb)을 만든 워드 커닝엄은 위키를 동작하는 가장 단순한 온라인 데이터베이스 라고 설명했다. 위키는 빠른을 뜻하는 하와이어 wiki(발음은 위티[ˈwiti]나 비티[ˈviti])에서 왔다.

워드 커닝엄이 보 뢰프와 같이 쓴 《위키 방식: 웹 상의 빠른 협업(The Wiki Way: Quick Collaboration on the Web)》이라는 책에서, 위키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을 다음과 같이 꼽았다.

위키는 간단한 마크업 언어와 웹 브라우저를 이용, 함께 문서를 작성하는 공동체를 가능케 한다. 위키 웹사이트의 한 문서는 위키 문서라 부르며, 하이퍼링크로 서로 연결된 전체 문서를 위키라 한다. 위키는 본질적으로 정보를 만들고, 찾아보고, 검색하기 위한 데이터베이스다. 위키는 비선형적인, 진화하는, 복잡하게 얽힌 문서, 토론, 상호 작용을 할 수 있게 돕는다.

위키 기술을 정의하는 특징은 문서를 간단히 만들고 고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수정이 반영되기 전에 승인이나 검토의 과정이 없다. 대부분의 위키는 사용자 등록을 요구하지 않고,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다. 많은 편집자가 실시간으로 만들며, 즉시 온라인으로 배포된다. 단 이는 시스템의 남용을 유발할 수 있지만 주로 장점이 더 많다. 개인 위키는 문서를 고치거나 읽기 위해 사용자 인증을 요구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위키 문서는 위키 마크업이라 불리는 간단한 마크업 언어로 이뤄져 있다. 예를 들어 별표(*)로 시작하는 줄은 목록을 표시하는데 사용된다. 위키 마크업의 문법은 위키 소프트웨어마다 다르며, 일부는 HTML을 직접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한다.

점차 사용자가 위지윅(WYSIWYG) 편집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위키가 늘고 있다. 위지윅 편집은 위키 마크업의 모든 기능을 제공하지 못하므로, 이들 사이트에서는 편집자가 위키 문서를 직접 수정하는 방법을 제공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위키는 위키 문서의 변경 이력을 보존하고 있다. 편집자는 쉽게 문서를 예전 판의 내용으로 되돌릴 수 있으며, 이는 사용자의 실수나 고의적 훼손 때문에 필요한 기능이기도 하다. 미디어위키를 비롯한 많은 위키 소프트웨어는 문서를 편집할 때, 편집 요약을 남길 수 있도록 한다. 이 편집 요약은 문서 본문에는 남지 않으나, 문서의 이력에서 편집 이유를 설명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대부분의 문서는 다른 문서를 가리키는 수많은 하이퍼링크를 포함하고 있다. 사용자는 필요에 따라 다른 문서의 목차나 색인을 따로 구축할 수도 있다. 여러 편집자가 임의로 문서를 만들고 삭제하기 때문에 수동으로 이런 목차나 색인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위키 소프트웨어는 이를 돕기 위해 분류나 태그 기능을 제공한다.

대부분의 위키는 현 문서를 가리키는 다른 문서를 찾는 백링크 기능을 제공한다.

위키에서 존재하지 않는 문서를 가리키는 링크를 만드는 것은 일반적인 일로, 다른 사용자가 자신이 아는 내용을 채울 수 있도록 유도한다.

위키의 문서는 문서의 제목과 표기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등의 경우에 해당되면 그 문서의 제목과 거의 같은 명칭, 혹은 그 문서의 제목과 같은 명칭이 아니지만 그 문서가 설명하는 대상을 가리키는 또 다른 명칭이 있는 경우 넘겨주기를 이용해서 넘겨주기 문서를 만들어 그 명칭으로도 그 문서가 설명하는 대상의 원래 제목과 같은 내용의 문서에 들어갈 수 있다.

다른 문서에 대한 링크는 링크 패턴이라는 문법을 통해 지원된다. 원래 대부분의 위키는 낙타 표기법(CamelCase) 방식으로 문서를 만들고 연결했다. 단어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하고, 사이의 공백을 지워서 만들 수 있다. 이 방식은 로마자를 쓰는 경우, 쉽게 링크를 만들 수 있다. 한 단어로 되어 있는 문서를 만들 경우, 단어 중간의 한 글자를 임의로 대문자로 만들어서 이용한다. (예를 들어 wiki라는 문서를 WiKi로 표기한다거나 한다.) 낙타 표기법을 쓰는 위키는 TableOfContents 등을 링크로 사용하므로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일부 소프트웨어는 두 단어 사이에 다시 공백을 넣어서 사용자가 보기 좋게 표시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대문자 표기를 되돌리는 건 쉽지 않다. 예를 들어 RichardWagner는 Richard Wagner처럼 각 단어가 대문자로 표시되어야 하나, PopularMusic은 소문자인 popular music로 표시되어야 한다. 일부 위키는 괄호를 이용한 자유 링크 기능을 지원하기도 하며, 일부는 낙타 표기법 링크 기능을 막기도 한다.

대부분의 위키는 문서 제목을 이용한 검색을 지원하며, 일부 위키는 본문 검색을 지원하기도 한다. 검색의 확장성은 위키 엔진이 사용하는 데이터베이스에 따라 좌우된다. 일부 위키는 일반 파일을 사용하기도 한다. 미디어위키도 초기 버전에서는 일반 파일을 저장용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2000년대 초에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하도록 다시 작성되었다. 데이터베이스의 색인 기능은 대형 위키에서 빠른 검색을 위해 필요하다. 대안으로 일부 위키는 구글 검색 등 외부의 웹 검색 엔진을 이용하기도 한다.

최초의 위키 소프트웨어는 위키위키웹(WikiWikiWeb)으로, 워드 커닝엄이 창안했다. 커닝엄은 1995년에 위키위키웹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위키의 개념을 고안했고, 위키라는 이름도 지었다. 또한 최초의 위키 서버를 만들기까지 했다. 위키 소프트웨어는 디자인 패턴 모임에서 패턴 언어를 쓰면서 생겼으며, 가 최초의 위키였었다.




#Article 16: 아오조라 문고 (535 words)


아오조라 문고()는 ‘일본어판 구텐베르크 프로젝트’로 불리는 일본의 인터넷 전자도서관으로, 저작권이 풀린 문학작품을 수집, 전자문서화해서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다. 저자 사후 50년이 지난 메이지, 쇼와 시대 초기의 일본 문학 작품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일본어 외 문학 작품의 일본어 번역 작품도 다수 있다. 1997년 2월 도미타 미치오, 노구치 에이치, 야마키 미에, 란무로 사테이 등 4명이 창설하여 시작되었다. 2016년 연간 방문객수는 940만 건 이상이다.

아오조라 문고에 수록된 작품은 JIS X 0208에 해당되는 한자 범위 내에서 자원봉사자에 의해 아오조라 문고 형식 텍스트파일이나 HTML 파일로 전자화된다. 또 아오조라 문고 수록파일 취급기준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수록된 작품을 PC는 물론 PDA와 휴대전화로도 볼 수 있다. 텍스트 파일을 큰 글자로 인쇄하거나 전용 소프트웨어에 불러들여 시각장애인용으로 이용하는 방안도 기대되고 있다. 아오조라 문고의 열람 소프트웨어는 따로 개발 및 제공되고 있는 것은 없지만, 전자사전이나 아이폰용 어플리케이션 등은 타사에서 개발하여 출시되어 있다.

저자 사망 이후 50년이 지나 저작권이 소멸한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 초기까지의 서적 대부분이 존재한다. 외국 번역작품이나 저자가 무료보기를 인정한 현대작품도 포함된다. 장르는 정치부터 취미까지 다양하지만, 비교적 문학작품(시대소설, 추리소설등의 오락작품 포함)이 많다. 유명작가의 작품이 모두 갖춰져있진 않지만 그래도 일본어작품에 관련해서는 충실하게 갖춰진 편이다. (번역작품의 경우 번역저작권을 문제로 수가 많지 않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보존, 소개하는 장점도 있다. 작품 텍스트화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며 2011년 3월 15일 현재 등록작품수가 1만권이 넘었다.
고전작가인 모리 오가이, 나츠메 소세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최근의 작가로는 나카지마 아츠시, 다자이 오사무, 하야시 후미코, 미야모토 유리코, 호리 다쓰오, 사카구치 안고, 다카무라 고타로, 나가이 가후, 요시카와 에이지 등 인물의 작품이 있다.

아오조라 문고는 자원봉사로 운영되며 열람 역시 무료이다. 서비스 개시 초반에는 보이저 사에서 서버를 제공하였다. 1998년부터 1999년까지는 토미타가 작업 수칙과 매뉴얼을 만들었다.

자원봉사로 운영되기 때문에 작품의 입력과 교정 역시 자원봉사자가 한다. 입력은 원본을 보면서 타자입력이나 스캐너로 입력하는 방법으로 이뤄진다. 또 작품을 입력하는 '입력자'와 입력된 작품을 교정하는 '교정자'는 별도의 자원봉사자가 담당한다. 따라서 작품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작품을 입력한 뒤 교정자가 교정을 예약할 때까지 '교정대기' (校正待ち)가 되고, 작업을 멈추게 된다. 즉, 입력하는 자원봉사자가 작품을 입력해 교정을 맡은 자원봉사자가 교정예약을 해서, 교정작업을 완료하기 전까지는 작품을 공개할 수 없다. 때문에 입력이 완료되어도 작업 상태가 '교정대기' 상태인 작품이 증가하고
있다. 이는 입력에 비해 교정 작업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아오조라 문고 출범 당시부터 안고 있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작품의 교정작업을 하지 않고 공개하는 방안과 입력자가 교정한 것도 인정하자는 방안이 제기된 적이 있지만 현재까지도 이 방안은 채택되지 못하고 있다. 대신 2011년 12월 16일 공개분부터는 기부금을 재원으로 삼은 '유상교정' 서비스가 진행되고 있다.

텍스트 파일을 아오조라 문고에 수록할 때, 텍스트 파일이 갖추어야 할 서식을 '아오조라 문고' 형식이라 부른다.

아오조라 문고 형식은 텍스트 파일로서 많은 환경에서 읽을 수 있도록 규격화되어있다. 때문에 가능한 한 원본의 충실한 재현을 목표로 삼고 있지만, 줄 바꿈이나 삽화 등의 정보는 원칙적으로 포함되지 않는다.

아오조라 문고 형식에 대응하는 텍스트 뷰어와 텍스트 편집기도 존재하며, 올림문자와 방점 등도 재현할 수 있다. 또 이러한 텍스트 뷰어에서는 본래 아오조라 문고 형식에 포함되지 않았던 삽화 정보를 삽입하거나 세로쓰기로 표시할 수 있으며, 텍스트를 읽기 쉽도록 만드는 다양한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소프트웨어는 유료와 무료를 불문하고 종류가 다양하다.

일본어 표기에 많이 쓰이는 올림문자 (후리가나)는 그대로 올려쓰지 않고 '｜'나 '《》'로 표시한다. 올림문자를 《》 로 묶거나 ｜로 올릴 문자열을 특정하는 방식은 일본 시각장애인 독서지원협회 (BBA)의 원문입력 수칙에 따른 것이다.

이 같은 방식을 예시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

라고 표기했다면 'ぶんこ' (분코)라는 올림표기가 '文庫' 부분에 걸려 있는 것이다. 다만,

처럼 올림표기를 쓸 한자가 가나로 충분히 구분된다면 ｜를 써서 분리할 필요가 없으므로 쓰지 않는다. 또한,

처럼 가나에 올림표기를 강제로 쓰는 것도 가능하다.




#Article 17: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190 words)


프로젝트 구텐베르크(Project Gutenberg,PG)는 인류의 자료를 모아서 전자정보로 저장하고 배포하는 프로젝트로, 1971년 미국인 마이클 하트(Michael Hart)가 시작했다.

인쇄술을 대중화(인쇄술 방명은 직지  최)도로 확장시킨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인터넷에 전자화된 문서(e-text)를 저장해 놓고 누구나 무료로 책을 받아 읽을 수 있는 가상 도서관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인터넷을 이용해 기여하여 만들어지는 프로젝트로 수많은 고전의 원문이 모여 있다.

프로젝트에 등록된 전자책은 대부분이 서구의 문학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 시, 단편소설, 드라마 등의 문학작품 외에 요리책, 사전류, 정기간행물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일부 오디오 파일과 음악 악보 파일도 갖고 있다.

대부분은 영문 서적이지만,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네덜란드어, 핀란드어, 중국어, 포르투갈어, 라틴어, 스웨덴어, 라틴어, 에스페란토로 된 책도 있으며, 여타 언어 문서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문서는 주로 아스키 문자 집합, 때때로 ISO-8859-1 문자 집합으로 인코딩된 텍스트문서를 언제나 내려받을 수 있으며, HTML등의 다른 형식의 문서도 받을 수 있다. 편집이 어려운 PDF등의 문서형식은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바와 맞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PDF형식을 이용할 수 있는 문서도 있다. 최근 수년동안 XML형식을 도입할지에 대한 토론이 있었지만, 토론은 지지부진하다.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라이선스(The Project Gutenberg License,PGL)는  아래와 같은 2개의 큰 맥락을 갖는다.

이러한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라이선스는 이후 몇몇 추가된 라이선스를 도입했으며 이전의 라이선스와 추가변형된 라이선스는 '프로젝트 구텐베르크'의 공식웹사이트에서 전문을 확인할 수 있다.




#Article 18: 겐지 이야기 (197 words)


《겐지 이야기》()는 일본 헤이안 시대 중기(11세기)에 무라사키 시키부가 지은 소설이다. 54첩에 달하는 장편으로 800여 수의 와카(和歌)가 들어있다. 고대의 일본 문학의 최고 걸작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야기는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천황의 황자로 태어나 신하 계급으로 강하한 히카루 겐지(光源氏)와 그의 아들 세대까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등장인물은 500명에 가깝고 4대의 임금 70여 년에 걸친 장편이다. 작자는 궁정 귀족사회의 진상을 포착하고, 인간의 운명을 깊고 예리하게 응시하고 있다. 성격묘사라든지 자연묘사에서 세세한 부분에까지 빛을 발하는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헤이안 시대 중기 11세기 초에 성립된 장편 소설(모노가타리, 物語)이다.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는 오랫동안 특정한 명칭 없이 ≪源氏の物語≫, ≪光源氏物語≫, ≪紫の物語≫, ≪光源氏≫, ≪源氏≫, ≪源語≫, ≪紫文≫ 등으로 불려 오다가,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源氏物語≫라는 서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전체 54권으로 나뉘어 있으며 200자 원고지 5000매가 넘는 세계 최고(最古), 최장(最長)의 고전 소설로 치밀한 구성과 인간의 심리 묘사, 표현의 정교함과 미의식 등으로 일본 문학사상 최고 걸작으로 평가된다.

당시의 전형적인 이야기가 보통 ‘옛날에 남자가 있었다’라고 시작되는 것과는 달리, ≪겐지 모노가타리≫는 ‘어느 천황의 치세 때였는지’라는 독창적인 서두로 시작된다. 작품 전체는 400여 명의 등장인물과 기리쓰보(桐壷), 스자쿠(朱雀), 레이제이(冷泉), 금상(今上)에 이르는 4대 천황에 걸친 70여 년간의 이야기로, 히카루겐지(光源氏, 이하 겐지)라고 하는 주인공의 비현실적이라 할 만큼 이상적인 일생과 그 후손인 가오루(薫)와 니오미야(匂宮) 등의 인간관계를 그리고 있다. 또한 본문은 수많은 전기(伝奇)적 화형(話型)과 함께 795수의 와카(和歌)가 산재되어 있어 긴장감 있는 문체를 이루고 있다.




#Article 19: 귄터 그라스 (157 words)


귄터 그라스(, 1927년 10월 16일 ~ 2015년 4월 13일)는 독일의 소설가이자 극작가다.

독일 단치히 자유시(오늘날 폴란드의 그단스크)에서 식료품 상인이었던 독일계 아버지와 슬라브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노동봉사대(RAD)에서 근무하던 중, 1944년에 무장친위대에 입대하여 10 SS기갑사단 프른즈베르크로 발령받아 참전했다. 징집당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으나, 당시 친위대의 독일인 대원들은 징집 대상이 아니라 자원 입대가 기본이었다(국방군 육군은 징병제였다). 종전후 부상당한 채 미군 포로로 잡혀 1946년까지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런 사실은 그라스 자신이 최근 발간한 자서전에서 인정했다.

전후 1947~48년에는 광산에서 일하며 석공 기술 과정을 마친다. 이어 1948년부터 1952년까지는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그래픽과 조각을, 1953년부터 1956년까지는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조각을 배웠다.

그는 소설가로 활약하는 한편, 부조리극적인 소품(小品)인    등을 발표한 바 있는데, 현대정치에도 직접 행동으로 참가하여 동·서 독일의 분열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에 대담하게 도전한 (1965)을 발표했다. 1953년 동독의 폭동 당시 브레히트를 모델로 하여 예술과 정치의 관련을 추구한 작품으로 이 있다.

그라스는 전후 독일 사회민주당의 주요 지지자가 되어 외국인 혐오증, 신나치주의 등에 반대하는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Article 20: 일반 상대성이론 (642 words)


일반 상대성이론(一般相對性理論, , ) 또는 일반상대론(一般相對論, )은 마르셀 그로스만, 다비드 힐베르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에 의해 발전되고 아인슈타인이 1915년에 발표한, 중력을 상대론적으로 다루는 물리 이론이다. 핀란드의 이론물리학자 노르드스트룀도 일반 상대론의 많은 부분을 논문으로 발표했었다. 일반 상대론은 현재까지 알려진, 중력을 다루는 이론 가운데 가장 정확하게 실험적으로 검증되었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수학자 헤르만 민코프스키가 민코프스키 공간을 도입하여 평평한 시공간을 기하학적으로 다루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중력의 영향을 시공간의 휘어짐으로 기술한다. 일반상대론에서 시공간의 수학적 구조는 특별한 종류의 준 리만 다양체이며 국소적(locally)으로 민코프스키 공간이다. 시공간의 휘어짐은 수학적으로 준 리만 다양체의 곡률에 해당한다(더 정확히는 준 리만 다양체 중에서도 특수한 로런츠 다양체의 곡률). 즉, 일반상대론은 1850년대에 만들어진 수학인 리만 기하학으로 기술된다. 시공의 곡률(아인슈타인 텐서)은 (우주 상수를 무시하면) 4차원 운동량 밀도에 비례하는데, 이를 아인슈타인 방정식이라고 한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관성계뿐만 아니라 비관성계를 포함한 임의의 좌표계에 대해 물리 법칙이 동등한 형태를 유지하여야 한다.

자유낙하하는 승강기와 승강기 바닥에서 승강기 천장으로 쏘여진 빛을 떠올려보면, 승강기 안에서 승강기와 같이 자유낙하하는 관찰자는 빛에서 어떠한 도플러 효과도 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등가원리를 따르면, 중력장 내에서 자유낙하하는 관찰자는 중력장이 없는 관성계의 관찰자와 같으며, 중력장이 없는 관성계에서는 빛에 어떠한 변형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낙하하는 관찰자는 승강기 천장에 설치된 빛 감지기에서 어떠한 도플러 효과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하지만 승강기 밖에서 땅 위에 서있는 관찰자는 빛에서 도플러 효과를 기대한다. 왜냐하면, 승강기가 자유낙하를 시작할 때 빛이 출발했다고 가정하면, 빛이 승강기 바닥에서 승강기 천장으로 가는 시간  동안 승강기 천장은 만큼 빠르게 되고, 이 속도에 따라 빛에 대한 청색편이를 감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청색편이는 느린 속도 근사식 만큼 일어났다고 가정한다.

감지기가 어떤 관찰자에게는 도플러 효과가 없다고 감지하고, 어떤 관찰자에게는 청색편이의 도플러 효과가 있다고 감지할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청색편이의 결과를 상쇄시켜 자유낙하하는 관찰자의 결과와 일치시킬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 다행히, 중력장이란 존재가 있으므로, 중력장이 청색편이를 상쇄시키는 적색편이를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중력 적색편이는 만큼 일어나며, 여기에 빛이 감지되었을 때의 승강기 천장의 속도와, 빛이 승강기 천장으로 가는 시간을 대입하면 라는, 중력 퍼텐셜의 차이 에 따른 적색편이의 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승강기에서처럼 빛 방출기와 빛 감지기가 서로 상대적인 운동에 있는 상황이 아니라, 서로에 대해서 정지해있는 상황이라면, 빛의 감지기는 청색편이로 상쇄되지 않는 중력 적색편이를 감지할 것이다.

빛의 감지기가 빛의 방출기에 대해서 정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진동수를 얻을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빛의 감지기와 빛의 방출기가 단위 시간 당 서로 다른 개수의 파면을 받아들일까? 아인슈타인은 여기에 대해서 파면의 개수는 동일하지만, 빛의 감지기와 빛의 방출기가 서로 다른 시간 단위를 갖는다고 지적했다. 즉, 서로 다른 중력 퍼텐셜에 위치한 시계에서는 서로 다른 빠르기로 시침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진동수는 그 곳의 고유 시간에 반비례 하므로, 이며, 이를 중력 적색편이 식에 집어넣으면, 의 식을 얻을 수 있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시공을 특수 상대성 이론의 민코프스키 공간에서 임의의 (로런츠 계량 부호수 −+++를 가진) 준 리만 다양체로 확장한다. 다양체의 계량 텐서 로서 시공간의 곡률을 정의하고, 이 곡률을 중력으로 재해석한다. 뉴턴 역학에서 중력은 (중력적) 질량의 밀도에 의하여 결정된다. 질량의 밀도를 자연스럽게 상대화하면 에너지-운동량 텐서를 얻는다. 아인슈타인과 다비트 힐베르트는 아인슈타인-힐베르트 작용 을 통해 다음과 같은 장 방정식을 얻었으며, 이는 오늘날 아인슈타인 방정식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기호는 다음과 같다.

이 식으로부터, 중력장이 약하다고 가정하면 뉴턴의 역제곱 법칙을 비상대론적 극한으로 얻는다.

공간 좌표를 으로 하고 시간 좌표를 로 하면, 세계선의 선소 는  로 표시된다.

와 는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나타내는 인덱스로 0은 시간, 1,2,3은 공간 성분을 표시한다. 는 시공간 사이의 변환을 나타내는 계량 텐서이다. 예를 들어 가장 평탄한 시공간을 나타내는 민코프스키 계량 텐서의 경우

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중력 밖의 다른 힘이 작용하지 않고, 그 무게가 무시할 만큼 작은 입자는 시공간의 측지선을 따라 움직인다. 측지선은 시공에서 고유 시간을 극대화하는 경로이다. 즉, 이다.

일반적으로 중력에 의해 시공간이 휘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질량이 큰 물체는 시공간을 휘게 할 수 있고 그것이 중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실험적으로 성공적이나, 이를 주로 양자장론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로 확장할 수 있다. 일반상대론에 비틀림을 더한 이론은 아인슈타인-카르탕 이론이고, 중력상수를 스칼라장으로 승진시키면 브랜스-딕 이론을 얻는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추가 차원을 도입하여 다른 상호작용을 포함시키는 이론은 칼루차-클라인 이론이며, 초대칭을 도입하면 초중력 이론을 얻는다. 또한 초끈이론 에서는 아인슈타인-힐베르트 작용을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으며, 고리 양자 중력에서는 아인슈타인-힐베르트 작용을 가지고 이를 양자화 한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Article 21: 데니스 리치 (159 words)


데니스 매캘리스테어 리치(, 1941년 9월 9일 ~ 2011년 10월 12일)는 미국의 저명한 전산학자이자 현대 컴퓨터의 선구자이다. C와 유닉스의 개발자로 알려져있다.

미국의 뉴욕 주 브롱스빌(Bronxville)에서 태어났으며, 1967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응용수학 학위를 얻었다. 1968년부터 벨 연구소 컴퓨터 연구 센터에서 일했다. 2007년 루슨트 테크놀로지의 시스템 소프트웨어 연구부장으로 은퇴했다. 홀로 살고 있던 그는 미국 시각으로 2011년 10월 12일 뉴저지 주 버클리 헤이츠의 자택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향년 71세).

켄 톰슨(Ken Thompson) 등과 함께 최초의 유닉스(Unix) 시스템을 개발했고, 1971년 최초의 〈Unix Programmer's Manual〉을 썼다. 또한 C 언어를 개발한 후 브라이언 커니핸과 함께 〈C 프로그래밍 언어〉(The C Programming Language)를 기술했다. 커니핸과 〈C 프로그래밍 언어〉책을 썼기에 커니핸이 C 언어 개발에 참여한 것으로 종종 오해받으나 커니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C언어 개발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ALTRAN, B언어, BCPL, Multics 등의 개발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미국의 경제 전문지 '비즈니스 인사이더'에서는 '현재의 애플 컴퓨터는 거의 모두 데니스 리치의 업적에 기반하고 있다'이라며 그의 업적을 평가했다. 현재 애플 매킨토시의 OS X와 아이폰의 iOS는 모두 유닉스 운영체제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있다.




#Article 22: 주기율표 (424 words)


주기율표(週期律表, , ) 또는 주기표(週期表)는 원소를 구분하기 쉽게 성질에 따라 배열한 표로, 러시아의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처음 제안했다. 1913년 헨리 모즐리는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를 개량시켜서 원자번호순으로 배열했는데, 이는 현대의 원소 주기율표와 유사하다.
가장 많이 쓰이는 주기율표에는 단주기형과 장주기형이 있다. 단주기형 주기율표는 1주기와 3주기를 기준으로 하고, 4주기 아래로는 전형원소와 전이원소가 같은 칸에 있다. 이 단주기형 주기율표는 초기에 쓴 모델로 원자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 많이 사용하였다. 장주기형 주기율표는 현재 가장 많이 쓰고 있는 주기율표이다.

주기율표의 오른쪽에 있는 이 원소들은 다른 원소들과 다르게 화학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활성기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준금속은 금속과 비금속 사이에 있어 금속과 비금속의 성질을 모두 갖고 있다. 특히 규소나 저마늄은 반도체의 주 원료이다.

알칼리 금속은 수소를 제외한 1족 원소들이다. 칼로 잘릴 정도로 무른 금속이며, 물과 격렬하게 반응을 하여 때론 폭발을 하기도 한다.

주기율표의 역사는 요한 볼프강 되베라이너의 세 쌍 원소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실험을 통해 세 개의 원소로 이루어진 무리 중 어떤 원소들은 첫 번째 원소와 세 번째 원소의 물리량 평균이 두 번째 원소의 물리량과 같음을 확인했다. 그 구체적인 예로는 '칼슘(Ca), 스트론튬(Sr), 바륨(Ba)'의 세 원소가 있다 여기서 스트론튬(Sr)의 물리량은 칼슘(Ca)과 바륨(Ba) 원소의 물리량을 합하여 2로 나눈 평균값과 비슷하거나 같다. 되베라이너는 이들을 세 쌍의 원소라고 불렀다. 이러한 세 쌍 원소 관계를 만족하는 원소들은 칼슘-스트론튬-바륨, 염소-브로민-아이오딘, 그리고 리튬-나트륨-칼륨이 대표적인데 이를 만족하는 원소수가 적어 인정받지 못하였다. 세 쌍 원소는 현대 주기율표에서 같은족에 해당된다.

영국의 과학자 존 뉴랜즈는 원소들을 원자량의 순으로 배열하면 8번째 원소마다 비슷한 성질의 원소가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였고, 이를 피아노의 개념에 대입하여 옥타브 법칙을 세웠다. 하지만 이 대응성은 3번째 줄에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고, 처음 이 이론이 발표되었을 때만 해도 그는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이후 여러가지 실험이 뉴랜즈의 법칙의 중요성을 보였다. 현대 주기율표에서 주기개념의 시초가 되었다.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는 화학 교수였다. 멘델레예프는 원소의 규칙을 밝히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가 결국 원소들을 원자량순으로 나열하면 되베라이너의 세쌍원소, 뉴랜즈의 옥타브 법칙을 만족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원소가 어떤 함수의 결과라는 것을 확실히 믿었지만 비활성 기체가 발견되면서 그의 주기율표는 바뀌기 시작했다. 멘델레예프가 만든 주기율표에는 빈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언젠가는 빈 칸을 채울 원소가 발견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멘델레예프의 문제는 영국의 모즐리에 의해 풀렸다. 그는 음극선관을 이용하여 생성되는 X선의 파장을 연구하여 양성자 수에 따라 화학적 성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를 모즐리의 법칙이라하며, 이것을 기본으로 현대적 의미의 주기율표가 탄생하였다.

수소와 헬륨의 위치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주기율표에서는 수소를 알칼리 금속과 마찬가지로 가장 바깥쪽 껍질에 전자를 하나 가진 리튬 위에 배열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수소는 금속 원소가 아니며 수소가 전자의 구조 면에서는 알칼리 금속이 아닌 할로겐에게 가깝고 할로젠 원소와 성질이 비슷하다고 주장하며, 수소의 위치를 17족 원소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생각해서, 수소가 1족 원소라면 헬륨도 베릴륨 위에 2족 원소로 배치해야 한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헬륨은 비활성 기체이므로 현재처럼 네온 위인 18족 원소가 가장 적당하다고 한다.




#Article 23: 아미노산 (170 words)


아미노산()은 생물의 몸을 구성하는 단백질의 기본 구성 단위로, 단백질을 완전히 가수분해하면 암모니아와 함께 생성된다. 화학적으로 아미노기와 카복시기를 포함한 모든 분자를 지칭하기도 하며 화학식은NH2CHRnCOOH(n=1~20)이다.

생화학에서는 흔히 α(알파)-아미노산을 간단히 아미노산이라 부른다. α-아미노산은 아미노기와 카복시기가 하나의 탄소(알파 탄소라고 부른다)에 붙어있다. 아미노산의 일종인 프롤린(proline)은 실제로는 아미노기 대신 이미노기를 포함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이미노산'(imino acid)으로 분류해야 되지만, 생화학적으로 보통의 아미노산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아미노산으로 분류한다.

일반적인 α-아미노산의 구조는 오른쪽 그림과 같다.

아미노기와 카복실기를 모두 포함하고 있어, 아미노산은 중성에서 양쪽성 이온으로 존재하며, 카복실기가 공명 상태로 안정화를 취한다. 오른쪽의 구조에서 R은 나머지라는 뜻의 Residue 혹은 Remainder의 머릿글자로 곁사슬(Side chain)을 나타내고, 곁사슬에 무엇이 붙느냐에 따라 아미노산의 종류가 결정된다. 아미노산은 곁사슬의 성질에 따라 산성, 염기성, 친수성(극성), 소수성(무극성)의 네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곁사슬이 수소 원자뿐인 글라이신(glycine)을 제외하고, 다른 아미노산은 모두 두가지 광학 활성을 가져, D형과 L형으로 구분된다. 단백질(protein)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의 거의 대부분은 L-아미노산 형태로 존재한다. 청자고둥(cone snail)같은 일부 특이한 바다생물에서 D-아미노산이 발견되기도 했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의 탈수반응이자 펩타이드 결합(peptide bond)인 축합 중합을 통해 만들어진다.

A(염기성),B(산성),C(비전하성)는 친수성이며 D는 소수성이다. 21개의 주요 아미노산중에서 파랑색은 비필수 아미노산(non-essential amino acid)이며 빨강색은 필수아미노산(essential amino acid)이다.




#Article 24: 히라가나 (138 words)


히라가나(, )는 일본어에서 사용하는 두 가지 가나 중 하나이다. 가타카나는 주로 외래어 표기 등에 쓰이고, 히라가나는 다음과 같은 용도로 쓰인다.

히라가나는 여성이 많이 썼다고 한다. 그래서 온나데(; )라고 불린 적도 있다. 이런 이유로 히라가나는 여자들만 쓰는 글이라 하여, 오랫동안 일본의 공용 문서에선 가타카나와 한자(칸지)만이 사용되었다. 현재 일본 철도의 역명판에는 히라가나와 칸지가 적혀 있다. 히라가나는 헤이안 시대부터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유아들도 가나를 배울 때는 히라가나를 먼저 배우고 가타카나를 나중에 배우기 때문에 유아용 그림책 등에는 가타카나로 쓰인 단어 위에 히라가나를 후리가나로 덧붙이기도 한다. 음절문자이다.

한영 자판 상태에서 히라가나를 입력할 경우 ㄸ+한자 키를 누르면 된다. 가타카나의 경우 장음 등 일부 문자를 제외하면, 꼭 ㅃ+한자 조합을 해야 한다.

히라가나는 만요가나에서 왔다.

메이지 시대 이전에는 히라가나의 모양이 확실히 정해지지 않고, 여러 형태의 문자가 사용되었다. 메이지 시대의 학제 시행 후에야 위와 같은 자형이 표준화되어 쓰이기 시작했다. 위 이외의 구식 자형은 헨타이가나(変体仮名)라고 부른다.




#Article 25: 토마스 만 (370 words)


토마스 만(, 1875년 6월 6일 ~ 1955년 8월 12일)은 독일의 평론가이자 소설가이다. 사상적인 깊이, 높은 식견, 연마된 언어 표현, 짜임새 있는 구성 등에 있어서 20세기 독일 제일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29년 노벨 문학상을 비롯, 괴테 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토마스 만의 형은 급진적인 작가 하인리히 만이다. 그리고 6명의 자식 중 3명인 Erika Mann, 클라우스 만, Golo Mann들도 또한 독일의 중요한 작가로 성장했다.

토마스 만은 평의원이며 곡물 상인이었던 토마스 요한 하인리히 만과 율리아 다 실바 브룬스 부부 사이에서 두 번째 아들로 독일의 뤼베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율리아는 7살 때 독일로 망명한 부분적 독일계 브라질리안이다. 토마스 만의 아버지가 1891년에 돌아가시면서 회사는 청산되었다. 1893년 뮌헨으로 이주하여 보험 회사의 견습 사원이 되었다. 이때 첫 작품 가 잡지에 실리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토마스 만은 뤼베크 체육관 기술 분야에 참가하면서, 뮌헨 대학과 기술대학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 당시 그는 역사, 경제학, 미술역사, 문학등을 공부하게 되면서 언론계로 커리어를 준비하게 된다. 그는 이탈리아 팔레스트리나에서 살았던 1년을 제외하면 1891년부터 1933년까지 형이자 소설가인 하인리히와 함께 뮌헨에 거주하게 된다. 토마스 만은 보험회사에서 1894년에서 1895년까지 일을 하게 된다. 그가 Simplicissimus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작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토마스 만의 첫 번째 소설은 1898년에 출판된 꼬마 프리데만 씨이다.

그가 동성애 관계를 가졌다는 여러 정황이 있으나 종국에는 카티아 프링스하임과 사랑에 빠졌다. 1905년, 그는 그녀와 결혼을 하며, 6명의 아이들을 낳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등 정치적 논설을 발표하고, 점차 구낭만주의적인 반지성주의를 벗어나, 새로운 휴머니즘을 품기 시작하였다. 1924년 12년간의 노력의 결정인 장편소설 을 발표하였는데, 이 소설은 손꼽히는 발전 소설로서 독일 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독일을 규칙적으로 여행하긴 했지만, 그 후로 살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독일 방문은 1949년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200주년이다.

토마스 만의 작품은 처음으로 H. T. Lowe-Porter가 번역했다. 그녀는 토마스 만의 작품을 영어권 사회에 크게 전파시켰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토마스 만은 카이저의 (독일의 빌헬름 2세) 보수주의를 지지하고 진보주의를 공격한다.

그러나 1933년 8월 26일이라고 기록된 개인적인 편지(그러나 2007년 8월 30일에 공개됐다)에서, 이미, 토마스 만은 나치즘에 대한 견해를 표현하고 있었고, 이것은 후에 파우스투스 박사(Doktor Faustus)와 일치한다. 이 소설에서, 토마스 만은 2차 대전에서 모든 잔인함에 대한 독일 국민에 대한 역사적인 책임감을 가진 몇몇 지역들을 언급한다.

전쟁 동안, 토마스 만은 반-나치 라디오 연설 시리즈()를 만든다. 이것은 미국에서 녹음돼서 영국에 전해지고, BBC가 방송을 하게 되면서 독일 청취자들이 듣기를 원한다.

사회 비판가 의 컬렉션 The Accidental Century에 있는 Images of Disorder는 토마스 만의 정치적 성형이 바뀌는 것을 설명한다.




#Article 26: 방정식 (329 words)


방정식(方程式, )은 미지수가 포함된 식에서 그 미지수에 특정한 값을 주었을 때만 성립하는 등식이다. 이때, 방정식을 참이 되게 하는(성립하게 하는) 특정 문자의 값을 해 또는 근이라 한다. 방정식의 해는 없을 수도 있고, 여러 개일 수도 있고, 모든 값일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불능이라고 하고, 중자의 경우는 방정식, 후자의 경우는 항등식(부정)이라 한다. 

예를 들어

은 문자 가 어떤 값이든 항상 등호가 성립하므로 항등식인 반면,

은 방정식이고, 그 해는 와 이다. 또한,

방정식의 방정(方程)은 고대 중국의 산학서인 구장산술의 여덟 번째 장의 제목인 方程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서 方은 연립방정식의 계수를 직사각형 모양으로 배열한다는 뜻이고, 程은 이렇게 배열한 계수를 조작하여 해를 구하는 과정을 뜻한다. 이 해법은 약 1500년 뒤에 등장하는 가우스 소거법에 해당한다. 고대 중국의 수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음수의 계산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다.

방정식에서 해를 구하려는 문자, 즉 미지수로는 보통 를 사용한다. 미지수로 알파벳의 뒤쪽 문자 를 사용하는 것은 프랑스의 수학자겸 철학자인 데카르트로부터 비롯되었다.

방정식의 항에 무리식(루트)을 포함하는 다항식으로 이루어진 방정식을 무리 방정식이라 한다.

인수분해하면,

그러니, 무리방정식은 해에 대해서 무연근 검사로 마무리검산을 해야하므로,

위의 두 근인 을
원래의 식인 에 대입해보면,

우선 양변으로 놓으면, 

이어서, 일때,

따라서,  방정식의 근은 이다.

연립 방정식은 서로 다른 2개의 미지수가 주어진 방정식들에 모두 적합할 때 이 방정식의 쌍을 의미한다. 연립 방정식도 미지수의 차수에 따라 일차 연립 방정식, 이차 연립 방정식 등으로 나뉜다. 일차 연립 방정식에선 y=ax+b와 같이 한 미지수를 어떠한 값으로 나타내어 이 값을 그 미지수에 대입하는 방법인 대입법과 미지수의 계수를 같게 곱하여 둘을 더하거나 빼서 그 미지수를 없애는 가감법, 그리고 행렬을 이용한 가우스 소거법이 주로 사용된다.

방정식은 2x+3=0과 같이 x(미지수)의 값에 따라 등식이 참이 되기도 하고 거짓이 되기도 한다. 방정식은 중국의 구장산술이라는 산학서에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방정식에도 원 방정식, 직선의 방정식, 미분 방정식 등 여러가지가 있고, 또, 미지수의 차수에 따라 일차 방정식, 이차 방정식, 삼차 방정식, 고차 방정식... 등으로 나뉜다. 특히 이차 방정식에는 미지수의 값을 구하는 근의 공식이라는 식이 있다. 이차방정식 ax^2+bx+c=0(a≠0)의 근의 공식은 -b±√b^2-4ac/2a 이고, ax^2+2b'x+c=0(a≠0)의 근의 공식은 -b'±√b'^2-ac/a이다. 삼차 방정식과 사차 방정식은 특수한 경우에 성립하는 근의 공식이 있다. 오차 방정식부턴 근의 공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벨이 증명) 갈루아  이론을 이용하면 아벨과는 다른  방법으로 증명 이 가능하다.




#Article 27: 노무현 (7962 words)


노무현(盧武鉉, 1946년 9월 1일 ~ 2009년 5월 23일)은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경상남도 김해 출생이다.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에 뛰어들었다가 독학으로 1975년 3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1년을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여러 인권 사건을 변호하였다.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의 공천을 받아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며 5공비리특별위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고 국민경선제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제16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2003년 말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2004년 초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개혁 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주요 업적으로는 권력층에 만연해 있던 권위주의와 정경유착을 타파하고 기존 정권이 하지 못했던 각종 재벌 개혁을 시행한 것이 꼽힌다. 상속증여세의 포괄주의를 도입해 대기업 총수의 탈세 여지를 좁힌 것,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를 시행한 것, 대기업 간 불공정 담합에 대한 적발과 처벌을 강화한 것 등이 높게 평가받는다. 임기 중 경제성장률은 4.42%로 OECD 평균성장률을 항상 상회했지만 역대 대한민국 정부 중 OECD의 성장률을 하회한 정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수치는 이후 이명박 정부의 2.9%와 박근혜 정부의 2.8%를 크게 상회하는 것이나, IMF의 발표 자료에 따르면 세계 경제성장률 대비 국내 경제성장률이 노무현 정부 -0.7%, 이명박 정부 +0.0%, 박근혜 정부 -0.5%로 나타났다. 노무현 정부는 골디락스 호황에도 불구하고 세계 경제성장률을 상회하지 못했고 도리어 이를 가장 크게 하회한 대한민국 정부로 기록되었다.

주요 실책으로는 정치적으로 친인척 및 측근비리, 사회적으로 교육 정책 및 부동산 정책의 실패, 경제적으로 양극화 심화에 따른 민생경제 파탄, 외교적으로 햇볕정책의 실패 등이 꼽힌다. 부동산 정책은 전반적으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노무현 정부에서 소득 분배 지표가 더욱 악화되어 서민경제의 파탄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있다. 게다가 반미적 입장, 편협한 국수주의, 친북적 정책으로 인한 외교적 모순으로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잃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이렇듯 서민 생활과 직결되는 분야에서의 정책적 과오와 외교·안보에서의 실책으로 인해, 대통령 직무수행에 대한 여론 조사가 정례화 된 제6공화국 이래 노태우를 제치고 임기 평균 국정 지지율 최하위를 차지할 정도로 대중적인 지지가 부족했던 대통령으로,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같은 유행어가 나올 정도로 재임 시 국민들에게 많은 원성을 듣고 대중적 인기가 부족했으며 적이 많았던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정계 입문 초기에 직설적인 화법으로 청문회 스타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이는 대중적 인지도를 크게 끌어올려 대통령 당선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임기 중에는 대통령 못 해먹겠다,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등 그의 화법이 논란이 되며 보수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합법화, 국가보안법 폐지 검토, 2007년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NLL에 관한 발언이 오해를 불러 일으켜 보수 언론의 공격을 받았다. 보수 언론들은 노무현을 반미주의자이며 좌파로 규정하고 공격을 가했으나, 실제 임기 중에 펼친 정책은 그러한 노선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한미 FTA 추진과 이라크 파병 등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 신자유주의 우파에 가깝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진보 언론으로부터는 신자유주의자라고, 보수 언론에게는 반미주의자라며 양측 진영에서 모두 비판받은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행정수도 이전과 혁신도시 등 지방 균형 발전을 추진하였으나 세종특별자치시의 수도 이전은 헌법재판소에서 관습헌법이라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내려 행정도시로 선회하였다.

퇴임 후 고향 김해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였다. 2009년 검찰의 정관계 로비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었고, 노무현과 개인적 친분이 있던 박연차로부터 노무현 일가가 금전을 수수했다는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아 조사를 받았으며, 노무현 또한 검찰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아내가 받았다는 노무현의 주장과는 달리, 박연차는 검찰 조사에서 노무현이 직접 전화를 걸어 자녀들의 집 장만을 위한 100만달러를 요구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였고, 비서관을 통해 요청을 받고 차명계좌에서 노무현의 아들 노건호와 조카사위 연철호가 동업하는 기업에 500만 달러를 송금한 사실도 밝혀졌다. 이러한 노무현 일가의 640만 달러 수수 의혹은 현재까지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같은 뇌물 수수 직접 개입 의혹이 수면으로 부상하면서 궁지에 몰리게 되자, 노무현은 그 해 5월 23일 자택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양산부산대학교병원에서는 기자회견을 통해 두부 외상과 다발성 골절 등을 사망 이유로 결론내렸다. 노무현이 사망하면서 법무부는 노무현의 뇌물 수수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시켰다. 사후 봉하마을에는 전국에서 노무현 재단의 주장에 따르면 500만여 명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노무현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노무현은 1946년 9월 1일에 경상남도 김해에서 아버지 노판석과 어머니 이순례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위로 있는 형 2명 중 맏형 영현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작은 형 건평은 현재까지 살아있다. 노건평은 1968년 세무직 9급 공무원이 되어 10년간 지방 세무서에서 근무하였다. 노무현은 광주 노씨 광주군파 31대 손으로 광주 노씨는 광주광역시 일곡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가문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농업협동조합의 입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하였으나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과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여 결국 그만두었다. 이후 막노동과 사시 공부를 병행하였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 변론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광일 변호사가 1981년 부림 사건의 변호에 참여하라고 권유했고, 이를 수락함으로써 본격적인 인권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무현은 나중에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회고하며, 당시 학생들이 얼마나 고문을 당하고 충격을 받았는지 처음엔 변호사인 나조차 믿으려 하질 않았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라고 밝혔다.

한편 노무현은 자신을 감시하던 안기부 직원에게 광주항쟁 비디오와 노동운동 관련 자료들을 보여주면서 강의하였다. 안기부 직원 이화춘은 이러면 우리가 당신을 잡아가야 된다면서 오히려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노무현은 안기부 직원들에게 민중, 노동운동 관련 비디오, 자료들을 태연히 보여주었다.

안기부에 들어와 8년 동안 미국 자료를 수집하는 내근 업무를 하던 이화춘은 85년 5월 안기부 부산지부로 파견돼 법조를 담당하게 됐다. 전임자는 '문제 변호사'가 네 명 있는데 이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당신의 주요 임무라고 말했다. 이들 네 명은 노무현, 김광일, 문재인, 이흥록이었다. 인사차 찾아간 이화춘과 점심을 같이하던 노무현은 4시간 동안 노동.학생운동 사태 등 시국을 논했다. 8년간 미국 자료만 들여다봤던 이화춘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에 노무현은 당신같이 무지한 정보 요원은 처음 봤다. 당신 큰일났다고 걱정했다. 이씨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묻자 노변호사는 교육을 받아야겠다며 밤에 집으로 오라고 했다.

노무현이 보여준 자료들을 보고 안기부의 직원들은 당황해했다. 이화춘 등은 이러면 내가 당신을 잡아가야 한다며 뿌리치자 노무현은 나중에 잡아가더라도 일단은 읽어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노변호사가 전화를 걸어 독후감을 물었다. 이화춘은 광주사태의 참혹상에 충격을 받아 밤을 꼬박 새웠다고 답했다. 이화춘과 안기부 직원들은 노무현과 문재인 변호사가 같이 운영하는 '노동문제연구소' 겸 변호사 사무실을 출입했다. 사무실은 늘 학생.노동자로 붐볐다. 이씨의 '기관원 의식'은 무뎌져 갔고, 그와 노무현은 서로의 애환을 챙기는 관계로 발전했다고 한다.

재야 활동을 하던 노무현은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과의 인연으로 1988년 4월 26일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서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이해찬, 이상수 의원 등과 함께 '노동위원회의 3총사'로 불렸다. 한편, 1987년 12월에 있었던 현대중공업 파업 현장에서 강연 중에 사람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지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던 구절이 문제가 되어 언론의 공세를 받았다.

한편 노무현은 노태우 정부 하에서 국군 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 사람이 되어 감시당했다. 이는 1990년 10월 4일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으로 보안사로 연행돼 프락치로서 수사에 협조해 오다 탈영한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밝혀졌다.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이 지역등권론을 주장하자 노무현은 이부영 등과 함께 김대중의 지역등권론을 비판하였다.

국회의원에 낙선이 된 후 그는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일명 16부작 정치 드라마로 불렸던 국민 경선제는 2002년 3월 9일부터 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들과 국민(50%)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민 경선제에는 노무현을 비롯해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이 후보로 출마하였다.

국민 경선이 도입되기 이전에 민주당 부동의 1위는 이인제였고, 노무현은 군소 후보로 지지율은 10% 미만이었다. 경선 국면이 시작되면서 노무현은 영남 후보론 및 이인제 후보를 겨냥한 정체성 시비로 20%대 지지율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지역이었던 제주에서 한화갑 후보가 의외의 1위를 차지했고, 노무현은 득표 3위를 기록했다. 두 번째 울산에서는 인상적인 연설을 한 노무현이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다.

한편 여론조사에서는 대선 판도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3월 13일 문화일보와 SBS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과 이회창이 양자 대결을 벌일 경우 노무현이 41.7%로 40.6% 지지율을 기록한 이회창을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선 주자 지지도 여론 조사에서 이회창이 민주당 후보에 뒤처지는 결과가 나온 것은 대선 구도가 형성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관건은 3월 16일에 실시한 광주 경선이었다. 무엇보다도 광주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자 새천년민주당의 근거지로서 이곳의 결과가 사실상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대의 승부처였다. 당시 이인제 대세론이 있었고, 호남 출신으로 오랫동안 김대중을 보좌해온 한화갑의 기세가 만만치 않아 당시의 분위기는 노무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영남 출신인데다 새천년민주당 내에서는 이렇다 할 조직이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노무현의 승리였다.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는 여론 조사 결과가 유리하게 작용했다. 거세게 불 것으로 예상했던 지역주의 투표 성향이 무너지면서 광주 경선은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정작 1위를 장담했던 호남 출신인 한화갑 후보는 3위를 기록했고, 영남 출신 후보가 1위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당시 연단에 서서 광주시민 여러분들의 위대한 승리, 민주당의 승리, 한국 민주주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면서 감격적인 소감을 밝혔고, 이후 노무현은 단숨에 지지율이 급상승하며 '노풍(盧風, 노무현 바람)'의 주인공이 되었다. 광주 경선 직후 이인제의 지역 기반인 대전· 충청권에서 일격을 당해 노풍이 꺾이는 듯싶었지만 대구광역시 경선 결과, 종합 1위가 확정되었다. 노무현 후보는 연단에서 동서화합의 큰 가능성이 열린 것으로 평가한다며 선전해 준 두 후보께 감사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후 강원도와 전남, 전북, 경남, 대구를 비롯한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해 나갔고, 2002년 4월 26일, 서울 경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경선이 끝난 4월 말 노무현의 지지율은 당시 역대 대통령 후보 가운데 사상 최고치라는 60%를 기록했다.

노무현은 대선 후보로 선출된 직후 대선 승리를 위한 계획으로 '민주 세력 대통합론'(대통합론)을 내놓았다. 1987년 대선에서 양김이 분열되면서 쪼개졌던 민주화 세력을 하나로 묶어내 한국의 미래를 함께 열어젖히겠다는 포부였다. 이를 위해 노무현은 상도동 자택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 대통합론의 취지를 전달하고 김영삼에게 지방 선거 후보 추천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노무현은 김영삼에게 통일민주당 시절 김영삼으로부터 손수 받은 손목시계를 내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민주 세력 대통합론'은 국민들에게 대선 승리를 위한 정략으로 보이면서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게다가 5월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인 김홍업과 김홍걸의 비리가 불거지며, 새롭고 신선한 이미지의 노무현에게 큰 타격을 줬고, 지지율은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한편 노무현은 영남권 광역 단체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할 경우 재신임을 받겠다고 말했다.

새천년민주당은 지방 선거에서 광역 단체장에서 호남과 제주의 4석만 건지며 참패했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 대로 후보 재신임을 물었고, 민주당 당무 회의는 만장일치로 재신임을 의결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내 최대 계파 모임인 중도 개혁 포럼은 불복하고 ‘후보, 지도부 즉각 사퇴론’을 주장했다.

친(親)이인제 성향의 반노(反盧), 노무현의 집권 가능성에 회의적이던 비노(非盧) 의원들은 지방 선거에 참패하자 집단으로 신당 창당, 후보 사퇴를 주장하며 '노무현 흔들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노무현은 신당 창당과 재경선 수용 입장을 밝혔다. 한때 정몽준, 박근혜, 이한동 의원과 자민련 등이 신당 참여 대상으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무산되었고, 정몽준과 이한동은 각자 독자적으로 당을 만드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당시 천정배 의원은 8월 16일 국회의원, 지구당 위원장 연석회의에서 반노 진영의 행동은 '경선 불복 행위'라고 말했다.

이때 정몽준의 국민통합21에 입당하기 위한 김민석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그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악재가 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있었으나, 답보 상태였던 그의 지지율은 20%대를 회복하고 후원금 액수도 크게 늘었다.

후보 단일화는 정 대표로의 단일화를 염두에 둔 민주당 내 반(反)노무현, 비(非)노무현 측의 요구에서 비롯하였다. 단일화 방안으로는 크게 3가지가 있었는데, 국민 경선과 여론 조사, 협상 담판이었다. 이 중 협상 담판은 정몽준의 후보의 주장으로 11월 1일에 정식 제안했고, 국민 경선안은 국민 참여 50%, 당원 참여 50%의 민주당 안을 노무현 후보가 11월 3일 정식 제안했다. 여론 조사안은 단일화 여론 조사를 실시했을 때 우위를 점하는 정몽준 후보가 유리한 안으로 정몽준 후보가 선호하는 안이었다.

국민통합21은 노무현 진영 측의 제안을 반대하며 국민 경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판세는 1강(이회창) 2중(노무현-정몽준)의 구도로 바뀌고 있던 차였다. 국민통합21도 더는 단일화 방안을 놓고 입씨름을 벌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노무현 후보는 11월 11일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 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제의하였고, 단일화 재협상에서도 마지막 쟁점인 '무효화 조항'을 전격 수용하면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민주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설문 내용 변경도 단일화를 위해 수용했다. 민주당 김원기 고문은 노무현의 결단은 이기고 지는 것을 초월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노무현 후보의 지지도는 더욱 반등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토론을 거쳐 2002년 11월 24일 노무현 후보는 극적으로 단일화 여론 조사에서 승리했다. 24일 시행된 2군데 여론 조사 중 리서치 앤드 리서치 경쟁력 조사에서 46.8%를 얻어 42.2%를 얻은 정 후보를 제쳤고, 월드 리서치 조사에서는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조사 유효화 조건인 31.1%에 미치지 못한 28.7%가 되어 무효가 되긴 했지만, 38.8%를 얻어 37%를 얻은 정몽준 후보를 앞섰다. 노 후보 측은 이날 승리 원인에 대해 '성실하게 원칙과 정도를 지켜온 것이 국민을 감동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단일화가 되고 나서 여론 조사에서 노무현이 이회창 후보를 역전한 직후 이인제가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한 후 이회창을 지지하는 선언을 하는 등 새로운 갈등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2002년 11월 새천년민주당 후보였던 그는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전국 농민대회'에 참석했다가 성난 농부들이 던진 달걀에 얼굴을 정면으로 맞았다.

정몽준은 대선 투표 전날인 12월 18일 저녁 10시 민주당과의 선거 공조를 파기했다. 지지 철회 발표문에 따르면, 노무현 후보가 '미국과 북한과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라는 표현을 했는데, 국민통합21은 미국은 우리를 도와주는 우방이고, 미국이 북한과 싸울 이유가 없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면서 이 발언을 문제 삼았다.

노무현 후보는 설득을 위해 심야에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노무현은 정대철 선대위원장 등과 함께 자택 앞에서 기자들에 둘러싸여 기다렸으나 정몽준 대표는 만나주지 않았고, 심야 회동은 결렬되었다. 그러나 정몽준의 지지철회로 위기감을 느낀 진보 진영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지 않고 노무현에게 표를 몰아주는 의외의 효과가 나타난다.

노무현은 200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역전극을 반복하다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57만 표 차로 이기고 당선됐다. 참여정부를 표방하며 이듬해인 2003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대선 과정에서 인터넷의 젊은 지지층을 만들어 이끌어냈다. 대통령 취임 전인 2003년 1월 14일, 대통령 당선자인 노무현은 토론을 국정운영 방법으로 정했으면 한다라면서 토론공화국이라 말할 정도로 토론이 일상화되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취임 초 노무현은 노무현 정부, 즉 참여정부의 주요 정책은 크게 12개의 국정 과제로 제시됐다. 외교안보 분야와 정치행정 분야의 기조로 부패 없는 사회 봉사하는 행정, 지방 분권과 국가 균형 발전, 참여와 통합의 정치 개혁이 경제 분야에는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경제 확립,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 건설,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축, 미래를 열어가는 농어촌이 제시되었다. 사회 문화 여성 보건 분야로는 참여복지와 삶의 질 향상, 교육 개혁과 지식문화 강국 실현, 국민 통합과 양성평등의 구현, 사회 통합적 노사관계 구축 등을 제시하였다.

외교 방식은 동북아 균형자론을 표방하였다.

그는 대표적으로 그리스, 루마니아, 핀란드, 영국, 스페인 국빈 방문과 동남아시아, 남미, 러시아, 프랑스, 폴란드, 이탈리아, 바티칸 순방을 위한 23차례에 걸쳐 총 49개국을 방문했다. 한국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공식 방문한 국가는 이집트, 나이지리아, 알제리, 아제르바이잔, 아랍에미리트, 스페인 등 6개국이다.

그는 대선 전부터 반미주의자로 여겨졌는데, 2002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는 약점보다는 강점으로 작용했다.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불평등 SOFA 협정 등 때문에 미국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노무현은 미국에 할 말은 한다며 대미 관계에 있어 독자노선을 갈 것처럼 보였다.

당시 미국은 조지 W. 부시를 위시한 네오콘이 장기 집권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참여정부와 미국 정부와의 정책적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취임 후 부시 행정부와 대북 정책의 입장 차이가 발생하자 미국의 공화당 보수파는 그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고,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이에 가세하여 그를 좌파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실제로 노무현 정부가 미국에 대해 대북 정책 이외엔 독자노선을 걸었던 흔적은 드러나지 않고, 반대로 부시 행정부의 요청에 따른 이라크 전쟁 파병, 주한미군 용산 기지 이전 문제, 한미 FTA의 추진 등에서 오히려 부시 행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도 실리는 챙기지 못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출범 이후 일본의 우경화 추세에 맞물려서 일본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2004년 3·1절 치사에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을 일으켰던 A급 전범들의 위패가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관련하여 일본의 지도자(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지만 문맥상 고이즈미를 가리킨다고 판단됨)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국민 감정을 대변하려는 것이었지만, 보수 언론 및 야당으로부터 감정적 대응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미국의 UPI 통신은 '한국, 동해를 놓고 제안을 했다'란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명칭)에 대한 타협안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평화의 바다'로 바꿔 부를 것을 제안했다라고 보도했다. 이 같은 제의는 외교ㆍ안보 라인과 사전 협의도 거치지 않은 돌출 발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전문가들은 국제무대에서 국가 수장의 돌출 발언은 국익에 적잖은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의 일관성 없는 대일 영유권 시각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은 국민의 자존심과 역사의식에 상처를 입혔다며 반역사적 발언에 대해 깊이 반성하라고 지적했다. 네티즌들도 한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적절치 못한 역사관 표명이었다며 노 전 대통령을 비난했었다. 2007년 10월 발행한 '2007 방위백서'의 한글 번역본에는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2003년 한일 정상회담 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서는 다케시마라고 하지요?'라며 독도를 '다케시마'라는 표현을 써 파문이 일었다. 일본 언론들이 이를 한국 대통령이 일본의 견해를 용인?했다는 식의 보도를 했다. 민주노동당 박용진 대변인도 논평에서 일제 강점기 만행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제기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가 '다케시마 문제'라고 질문에 언급해서 이를 받아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다케시마'라는 언급이 한 번 있었다면서 기자의 질문을 받아 대답하는 과정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표현했다고 이를 왜곡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취임식 당일인 2003년 2월 25일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5월 15일에 미국을 방문하여 부시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하였다.

한편 3월 9일, 검찰 개혁의 향배와 검찰 인사를 놓고 검찰이 일선 검사들과 마찰을 빚자 노무현은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일선 검사들이 함께하는 '대통령과 전국 검사와의 대화'(토론회 명칭)라는 제목의 토론회가 방송 3사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이 자리에서 검사들은 검찰 개혁을 외치면서 대통령이 인사위원회도 거치지 않고 인사 개입을 하는 것은 검찰 개혁이 아니라며 대통령 검찰 인사의 부당성을 지적했으나, 노무현은 지금 인사위원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인사 대상이라며 여기서 인사하지 않으면 낡은 검찰로 몇 달 더 가자는 것이라며 검찰 인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검사들의 친인척 의혹 등 부적절한 발언이 거론되자 대통령이 이쯤 되면 막 하자는 거죠”라는 발언을 하였는데, 보수 언론은 이를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죠라고 구설수에 올렸다. 검사들은 토론회의 의도에 대해 대통령께서 토론의 달인으로 알고 있는데, 토론의 아마추어인 검사들을 말로써 제압하려 한다면 무의미하다는 비판을 했다. 당시 이 토론회는 권위적이고 군림하는 대통령이 아닌, 탈권위적인 '토론하는 대통령'을 보여준 모습으로 평가받았다.

한편 3월 24일에는 원칙대로 운용되지 못하고 자의적으로 운용되거나 국회의원들이 유용해 온 특별 교부금에 대해 폐지 또는 보통 교부금에 통합하는 등 개선을 명령했다. 그러나 2008년 12월까지 이러한 관행은 개선되지 않았다. 4월 18일에는 노무현의 지시에 따라 청남대가 개방되고 모든 관리권이 충청북도로 이관하였으며 현재는 관광지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은 초기 어려움을 겪에 되었다. 5월 21일 각종 사회적 갈등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자 그는 이러다가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생긴다 며 국정 운영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한편 2003년 9월에는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였다.

불법 관권선거 개입 사례로는 노무현의 양강구도 언급 등 총선관련 발언들과 군복무기간 추가단축 검토를 비롯한 행정부의 총선용 선심성 공약 남발 사례, 민주당 파괴공작, 총선 올인 등을 꼽았으며 이와함께 장관임기 보장 약속 파기, 대북송금 특검 수용과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의 자살을 비롯한 사례 21가지 등 총 43가지 예를 들어 노무현 정부 1년을 혹평했다.

같은 달 그의 형인 노건평이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으로부터 청탁성 명목으로 뇌물을 수수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노무현은 언론 브리핑에서 대우건설의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다면서 남상국을 질타했고, 2004년 3월 11일 남상국은 한강에서 투신했다. 이 사건으로 노건평은 유죄가 인정되어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남상국의 자살이 노무현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을 펴면서 노무현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송영길 최고위원은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사건의 본질에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마녀사냥하는 언론의 태도에 대해 비판하였고,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형에 대한 인사청탁에 대해서 관련된 당사자의 실명을 거론하며 공개적으로 비난한 부분에 대해서 적절치 못한 행동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당시 송영길 의원은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탄핵반대투쟁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노무현의 탄핵은 국민들의 불만을 키우는 요인으로 적용되었다. 탄핵 당일인 3월 12일부터 3월 27일 보름 동안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탄핵무효 부패정치 척결을 위한 범국민행동'(약칭 탄핵무효 국민행동)이 주도하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무효를 주장하는 촛불 집회가 열린다. 3월 13일에는 가장 많은 인파가 촛불을 들고 탄핵 무효를 주장했는데, 주최 측 추산 10만, 경찰 추산 5만 명의 인파가 모였다. 한편 80여 개의 보수 단체로 이루어진 '바른선택 국민행동'이 주도하는 탄핵 찬성 집회도 3월 27일에 2000여 명(경찰 추산)이 운집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후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세력들은 국민들의 반감을 사고 말았다. 이 영향으로 '정신적인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탄핵 후폭풍으로 지지도가 크게 상승하였고, 4월 15일에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단숨에 152석을 차지해 제1당이 되었다. 이로써 헌정 이후 사상 처음으로 진보세력이 중심이 되는 국회가 출범하였고,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었다. 이후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을 기각했다. 그러나 헌법재판관들의 개별 의견은 공개되지 않았다.

같은 해 5월 20일 노무현은 1당이 된 열린우리당에 수석 당원으로 입당하여 열린우리당은 공식적인 여당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11일에는 1월에 공포한 신행정수도법에 따라 국회는 신행정수도를 연기군과 공주시의 일부를 신행정수도의 입지로 정했다.

한편 8월에는 노무현에게 숨겨놓은 딸이 있다는 악성 댓글을 인터넷에 올린 혐의로 기소된 H(49세) 씨에 대해 징역 1년 3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의 증거 조사 결과 그런 사실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같은 해 12월 16일 FTA 추진 지시를 내렸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2009년 3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한 토론글을 게시하자 곧바로 심리전단에 적극적인 대응을 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는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자신의 사저인 봉하 마을로 귀향하였다.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첫날에 노무현 정권 인사들이 고의적으로 청와대의 컴퓨터 시스템에 보안 장치를 걸어 새 정권이 시스템을 사용 못하게 막아 놓았다는 뉴스가 나왔고, 그 후 약 2주간 시스템을 사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단순히 화면 보호기에 암호가 걸렸으며, 이는 남아 있는 'e-지원' 담당자에게 물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노무현과 관련한 기록물 유출 의혹 사건은 훗날 2009년 10월 29일 노무현의 자살로 인하여 검찰에서 불기소 종결했다.

이후 노무현은 부인과 자녀 등이 노무현의 퇴임 후 금품을 수수한 혐의가 드러나 검찰 수사를 받게 되었다.

검찰 수사가 형평성을 잃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여론 조사에서도 검찰 책임론이 대두되었으나, 검찰은 원칙대로 수사하였을 뿐이라 주장하였다. 사망 이후 '노무현 정권에 대한 정치 보복'이라는 말은 공공연해졌다. 또한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민주당 천정배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권력기관의 사유화와 보수언론의 탐욕이 만들어낸 재앙이다라고 말하여 보수 언론과 함께 검찰에게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박연차 태광그룹 회장으로부터 시작된 검찰 수사는 노무현의 일가와 주변 인물에만 집중됐다는 지적이 있다. 정상문 전 비서관 구속으로 이어졌고, 대부분의 언론은 봉하 마을에 있는 노무현의 사저 앞에서 24시간 대기에 들어갔다. 노무현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저의 집은 감옥입니다라고 괴로운 심경을 드러냈다. 검찰이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세무 조사 무마 청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에 대해서는 혐의가 없어 수사 초기 단계에서 제외됐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이번 검찰 수사는 2008년 7월 '태광실업 특별 세무 조사'에 대한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의 청와대 보고 후 시작됐다.  그리고 검찰이 수사 과정을 언론에 피의사실을 공표하여 피의 사실 공표 금지법을 검찰 스스로 위반하였으며, 그 뒤 수사 과정에서 노무현 및 그 가족의 피의 사실 입증에 실패하자 스스로 '빨대' 논쟁을 일으키는 등의 무리수를 두었다는 지적이 있다. 검찰의 수사에 대한 비판은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제기되었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나는 가장 큰 실수가 노 대통령에 대한 신병처리 결정을 빨리 하지 않은 거라고 본다. 구속 여부를 신속하게 했어야지. 전직 대통령 수사를 하면서 이래저래 모욕감을 주는 행동을 한 셈이라며 검찰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는 노무현 측근들의 지속된 거짓 증언 및 증거 인멸로 의심되는 행위를 하는 등 노무현 측근들이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있다는 지적이 있다. 한편에서는 그 물품 자체를 받은 사람이 노무현 부처가 아니라 노건평이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후 검찰 책임론이 거세지자 임채진 검찰총장은 모든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해 퇴임했고, 이인규 대검찰청 중수부장도 사표를 내 퇴임했다.

야당과 진보 성향의 시민 단체들은 검찰 수사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가했으며, 검찰 수사와 관련된 시국 선언도 줄을 이었다. 대검찰청 홈페이지에는 검찰을 비하하는 '떡검'이라는 표현이 넘치며, 검찰을 견제하기 위한 공직자 부패 수사처를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과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보수 언론 및 시민단체에서는 전직 대통령이라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고 죄를 지으면 누구나 처벌받을 수 있다는 원칙을 다시 세움으로써 대한민국이 법치국가임을 재확인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노무현과 관련한 인물에 대해 그가 죽었다는 이유로 기소하지 않은 데 대해 이의가 제기되었다. 이는 예전에 노건평과 남상국 사이에 벌어졌던 뇌물 수수 사건에서 남상국이 자살했음에도 노건평을 기소한 예 와도 모순이 된다는 의견도 있으며, 검찰이 노무현과 관련한 사항에서 유죄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소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다. 이와 별개로 검찰은 노무현의 아내인 권양숙의 거짓 증언이 사법 방해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근거로 뇌물 수수 혐의로 기소하려 했으나 노무현의 자살에 따른 동정 여론으로 인해 기소조차 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앞서의 남상국 예와 같이 과거에 자살한 사람에 대해 그 상대방을 기소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박연차와 권양숙이 관련된 자금에 대해서는 뇌물이 아닌 빌린 돈이라고 정상문 유죄 판결문에서 적시했다.

경남지방경찰청장은 노무현은 수행 중이던 경호원 이병춘을 인근 정토사로 심부름을 보낸 후 자리를 비운 사이에 투신한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경호원은 자책감 때문에 노무현이 담배 있나?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라고 한 후 뛰어내렸다고 거짓 진술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병춘이 진술을 번복하고, 경호관 사이에 있었던 휴대 전화 교신 기록이 발견되면서 이 같은 사실이 밝혀졌다. 경호관이 초기 수사에서 사망 당시 곁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추고 진술을 계속 번복한 것에 대해 경찰은 경호 실패에 대한 문책을 두려워한 때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노무현이 정확하게 언제 투신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사후 인터넷을 통해 일부 네티즌이 타살설과 유서 조작설 등 음모론을 언급하자 노무현의 유족과 측근은 이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경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오전 8시50분께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가운데, 사망 원인이 '투신 자살'로 최종 확인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오전 6시 40분께 경호원과 함께 간단한 복장으로 사저 인근 뒷산으로 등산하던 중 10분 뒤 벼랑에 떨어져 크게 다쳤다. 노 전 대통령은 7시 인근 김해 세영 병원과 양산 부산대 병원(오전 8시10분)으로 호송됐으나 이미 상태가 다발성 골절로 소생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사망했다. 경찰은 노무현 대통령의 사망 원인을 실족사에 무게를 두고 조사했으나 집을 나설 당시 평소와 달리 권양숙 여사, 보좌관 등 측근에게 알리지 않고 경호원만을 대동한 점, 뒷산의 경사가 완만하다는 점 등을 종합해 투신 자살로 최종 공식 확인했다.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 원인과 관련, 유서를 남겼다고 밝힘에 따라 자살 가능성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문 전 실장은 기자들과 만나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뒷산에서 뛰어내렸다면서 가족 앞으로 유서를 남겼다라고 확인했다. 김경수 비서관도 노 전 대통령이 유서를 남겼다고 밝혔다.

노무현이 5월 22일 검찰 소환 조사를 응하면서 '정치적 자살'을 선택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결벽증에 가까운 정치적 자산이자 무기인 '도덕성'이 상처를 입고, 검찰의 수사 내용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면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인간적인 모욕을 당했기 때문이면서 이와 함께 노무현은 자신으로 인해 자신들의 참모와 가족들까지 고초를 당하고 있는 것이 대해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의 극단적인 선택은 전직 대통령의 오욕과 비운의 역사를 끊어내려는 몸부림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서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에 대한 '먼지털이식' 수사가 반복되는 현대사의 비극이라는 평도 있으며 '정치적 타살'이라는 비판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참으로 믿기 어렵고 비통한 일이라고 애도의 뜻을 표하고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어긋남이 없도록 정중하게 모시라라고 지시했다. 정계나 학계, 시민단체는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잇따라 공식 논평을 발표하고 애도의 뜻을 나타냈다. 서울에서는 네티즌과 시민들이 서울 도심에 분향소를 마련해 추모의 발길이 이어졌다.

후진타오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은 조문에서 노 전 대통령은 나의 오래된 친구라며 재임 기간에 중국과 한국의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 수립 및 발전을 위해 중요한 기여를 했다라고 밝혔다. 원자바오 총리는 애도하면서 노무현의 대(對)중국 관계의 중시, 노무현의 솔직함과 성실함이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한중 관계의 전면적 발전 추진을 위해 기울인 공헌을 기억하겠다는 소회를 덧붙였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긴급 애도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서 노무현 재임 기간에 한국과 미국 간의 '강력하고 활기찬'(strong and vital) 관계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외상 시절 노 전 대통령을 만났던 기억을 떠올리며 애도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청와대에 애도 조문을 보내어, 지난 2004년 노 전 대통령의 영국 공식 방문은 한·영 양국 관계 증진에 중요한 이정표였다라고 전했다. 반기문 국제 연합 사무총장은 사망 관련 성명을 발표하고 애도의 뜻을 표명하면서, 노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 촉진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라고 노 전 대통령을 칭송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역시 애도의 뜻을 전했다.

아래는 그가 투신 자살하기 전에 남긴 것으로 보이는 유서 전문이다. 이 유서는 사저의 컴퓨터에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의 고통이 너무 크다라는 제목의 한/글 파일로 저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김경수 비서관에 따르면 이 유서 파일이 저장된 시간은 투신 1시간 19분 전인 오전 5시 21분이었다고 밝혔다. 한편 이 유서에는 돈 문제와 관련된 일부분이 누락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경찰은 조작설을 일축했다. 연합뉴스는 유서 조작 의혹은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이 유서에 담긴 내용이라며 전한 이야기를 일부 매체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보도하면서 비롯된 혼선 때문이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면서 삭제됐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경찰의 공식 발표 이전에 일부 매체들이 보도한 내용과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라며 평했다.

그의 사망은 또한 '언론 책임론'을 불러 일으켰다. 검찰의 몰아붙이기식 수사도 문제였지만, 이를 받아쓰기하듯이 그대로 전달하거나, 한발 앞서 검찰 수사의 방향까지 제시한 언론 은 여론 조사에서 노 전 대통령의 사망에 언론의 책임이 크다는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또한 천정배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권력기관의 사유화와 보수언론의 탐욕이 만들어낸 재앙이다라고 말하여 검찰과 함께 보수 언론에게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보수 신문은 일부 세력은 신문과 방송이 노 전 대통령의 혐의를 중계하듯 보도해 억울한 죽음으로 몰고 갔다라고 주장하지만, 2009년 9월 17일 판결이 나오자 이번 판결을 보더라도 노 전 대통령이 근거 없는 모함을 당한 것은 아니다라고 단정했다. 또 언론이 신속 정확한 보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며 자신들을 비롯한 언론이 검찰의 모욕 주기 수사·흘리기 수사를 받아쓰고, '아니면 말고' 식의 보도를 했던 것을 정당화했다.

한겨레는 보수지의 노무현과 관련된 보도를 비판 대신 증오, 죽은 권력 물어뜯기라고 평가하며 사망의 책임이 보수 언론에 있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한겨레, 경향신문 만평도 달라져란 제목의 기사에선 검찰 수사가 한창이던 때 진보 신문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노무현을 비판하고 희화화해 이전의 우호적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지만, 사망 전후 확연히 다른 보도 행태를 보였다며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한겨레신문에서 조사한 여론 조사에서 누가 가장 큰 책임이 있는지에 대한 여론 조사 결과 56.3%는 검찰, 49.1%는 언론을 꼽았다라고 보도했다. 이에 빅뉴스는 한겨레 여론 조사는 응답 1순위에서 노 전 대통령 자신(27.9%)을 꼽은 응답이 가장 많았는데도 여론 조사 항목을 자의적으로 배치하고 1,2,3순위를 합산하여 결과를 왜곡했다며 비난했다.

이렇듯 언론 책임론이 나오자 신문들은 즉각 보수·진보 양쪽으로 헤쳐 모여서 상대편의 책임이 더 크며, 상대편의 사망 전·후 보도 행태가 완전히 상반된다는 식의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노무현의 서거일 이틀 후인 2009년 5월 25일에 위원회가 결성된 뒤, 5월 29일까지 거행되었다. 당초 유족들은 가족장을 추진하였으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와 전 국민적인 추모열기로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노무현의 영결식은 국민장으로 치러져 전국적으로 500만(봉하 마을 장례 위원회 추산)이 넘는 인파가 각지에 시민들이 마련한 분향소에 조문을 했다. 봉하 마을을 찾은 조문객의 수는 100만으로 사망 직후부터 전국에 분향소가 설치되기 시작하여 총 301곳 이 설치되었다. 일주일간의 추도 기간 동안 인터넷 포털, 언론사, 기업의 로고는 검은색으로 바뀐 추도배너가 내걸렸고, 대다수의 방송사 오락 프로그램의 방송이 결방 하였으며, 지지 세력들이 이웃처럼 느껴지던 서민 출신 전 대통령의 안타까운 자결에 충격과 슬픔과 정부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생각에 따른 분노가 함께 표출되었고, 여론 조사에서도 60%가 넘는 사람들이 이명박과 검찰의 책임이라고 응답하였다. 한편으로는 위법 행위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고 자살을 택한 것에 대해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비판이 제기되며, 한나라당에서는 추모 열기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덕수궁 앞 대한문 앞에 마련된 장례 기간 동안 시민 분향소에서는 2킬로미터가 넘는 장례 행렬이 밤새 이어졌다. 임시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일대에 경찰이 출입을 통제하고, 시청 앞 서울 광장을 원천 봉쇄하여 전의경 버스가 시민들의 추모발길을 막는 등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조문행렬을 잠재적 폭력 시위대로 간주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정부는 애석하고 비통하다라고 조의를 표할 때와 말과 행동이 다르다며 진정성과 이중성에 대한 비판이 있다. 이처럼 정부가 국민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하고도 서울 광장과 청계 광장의 민간 분향소 설치를 막으면서 ‘과잉 통제’ 논란이 일었다. 정부와 경찰 측은 장례식 참석자들의 돌출 행동으로 인한 폭력 사태가 우려되어 부득이한 통제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노무현 수사에 대한 책임론이 대두되고, 과잉 통제 논란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정 운영 지지율이 이명박이 집권한 이후 가장 낮은 20%대까지 폭락하였다.

이날 영결식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앞서 세계 150여 해외 공관에 설치된 분향소에도 각국 주요 인사가 추모 행렬에 동참했다. 미국 백악관의 제임스 존스 국가안보 보좌관과 성 김 대북 특사가 분향소가 차려진 주미 한국 대사관을 찾아 조문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미국 정부를 대표해 조문했다. 아소 다로 일본 총리와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대표,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등 일본 정·관계 주요 인사들이 주일 한국 대사관으로 찾아가 분향했다.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는 노무현의 사망을 애도하는 메시지를 장례위원회에 보냈다.

영결식은 장례는 국민장으로 엄수되었으며 시신은 봉하 마을에서 새벽 5시에 출발, 5월 29일 오전 11시 서울 경복궁 흥례문 앞뜰에서 가족, 정부, 종교단체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일본에서는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 미국은 스티븐스 주한 대사를 단장으로 알렉스 아비주 국무성 동아태 부차관보, 마이클 그린 국가 안보회의(NSC) 선임보좌관, 빅터차 전 NSC 보좌관이 영결식에 참석했다.

정부에서 세운 공식 분향소는 서울역사박물관을 비롯해 102개소에 마련되었으며 총 조문인원은 5월 29일 18시까지 98만 5331명에 달하였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분향소는 대한문 앞을 비롯해 알려진 것만 150여곳에 달하였다. 5월 29일 새벽까지 조문객은 500만여명에 달하였다.

정부는 5월 23일 관계 국무위원 간담회를 개최해 국민장을 거행하기로 뜻을 모았고, 5월 24일 국무총리 주재로 임시 국무위원회의를 개최하여 국민장 거행을 의결하였다. 장의위원장은 관례에 따라 국무총리인 한승수가 선정되기로 하였으나 유가족 측이 공동위원장을 제의, 5월 25일 현직 국무총리 한승수와 전 국무총리 한명숙이 선정되었다. 장의위원은 전·현직 고위공무원, 사회지도층 인사, 유족이 추천한 친지 및 친분이 있는 인사 총 1,383명으로 구성되어 역대 최대 규모이다. 이와 함께 정부는 5월 27일 국민장 영결식을 5월 29일 경복궁 흥례문 앞 뜰에서 거행하기로 공고하였다.

한명숙 전 총리의 추도사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도사가 영결식 동안 진행되었다.

노무현의 시신은 당초 예정보다 약 2시간여 늦게 경기도 수원 연화장에 도착해 화장되었다. 화장 후 수습된 유골은 고향인 경남 김해 봉화산의 정토원에 49재가 끝나고 매장되기 전까지 안치되었다. 당초 작은 비석을 세워달라고 유언하였으며, 한때 국립묘지 안장 여론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바로 고인돌 형태의 묘소에 납골당 형태로 안장되었다.

경찰은 덕수궁 분향소에 조문가는 일반 시민들이 촛불을 켜 들고 이동하는 것을 '(사전에 신고되지 않은 불법) 시위로 발전할 우려가 있다'면서 제지하기도 하여 시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또한 한편 시민분향소 주변을 시청 앞 서울광장을 전경 및 의경 버스로 둘러 막아 이곳에서의 추모 행사를 원천봉쇄하는 등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조문행렬을 잠재적 폭력시위대로 간주하여 시민들과 충돌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재임 기간 중에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사회주의적이고 반미와 친북적인 설화가 많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으며, 진보적인 시각에서는 기업의 요구를 많이 반영된 비정규직 보호법으로 정규직 전환을 가로막고 대량 해고로 이어져 실직자를 양산한 점(이랜드 사태 등)과 같은 노동 환경의 악화와 한미 FTA의 추진, 이라크 전쟁 파병, 부실한 부동산 개혁 및 친재벌적이라고 비판을 받아 진보, 보수 어느 진영에게서도 명확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보수주의자에 따르면 '친북좌파'라는 비판과 진보 진영에서는 '친미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 이 양립하고 있다. 이런 파병결정에 대해 훗날 문재인은 미국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이 대북 제한폭격을 거론했고 그것을 막기 위해 파병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노무현은 대통령 취임 뒤 국정원장의 독대 보고를 없앴고, 사법 고시 23회인 강금실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사법부에 뿌리 깊은 권위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가 있다. 2003년 구태의연한 대법관 선발 관행에 제동을 걸었고, 사법 사상 최초로 여성 헌법재판관(전효숙)과 서열을 무시한 여성 대법관(김영란)을 탄생시켰다. 또 사법 개혁 위원회를 통해 법조 일원화, 국민의 사법 참여 등의 사법부 개혁을 위한 밑거름을 쌓았다. 일각에서는 지나친 의전 등으로 문제가 되던 법원들의 재판 사무 감사가 2006년 폐지된 이유가 김영란 대법관이 기수를 파괴하며 올라갔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언론인 강준식은 선거공영제를 확대하여 돈이 들지 않는 선거제를 확립한 것이라든지, 부작용은 있었지만 시민단체의 활발한 정치참여를 유도한 것이라든지, 시장 개입을 없앰으로써 정경유착의 고리를 상당 부분 끊은 것이라든지, 인권을 신장시킨 것이라든지, 권위까지 함께 버리는 우를 범했지만 권위주의를 청산한 것이라든지 하는 것 등은 다 그의 공이다.라고 말했다.

해양수산부 장관 출신으로 연안 어족자원 복원에 노력했다.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저인망식 불법어로를 근절하기 위해 촘촘한 그물을 제조하는 업체에 영업정지를 가하는 등 강경책을 사용했으며 연안에 인공 어초를 대량 투입하는 등의 대책을 시행하였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로 군생활을 제대로 한 최초의 대통령으로 국민들에게 대접을 받았다. 참여정부 당시에 김대중은 해안경비대 대원으로 군생활을 하였다고 알려졌었고 학도병 김영삼의 이야기는 전혀 대중에게 알려지지 못하였다. 최전방에서 초병 근무를 하였다는 진지가 '노무현 벙커'로 명명이 되었다고 유명해지며, 그 진지에서 근무를 서며 자랑스러워하는 초병들이 언론에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UN 평화유지군으로 지속적인 해외 파병은 있었으나 미군에 항구적 자유 작전과 관련하여 이라크전이 발발함에 따라 추가적으로 자이툰부대의 이라크 파병이 결정되었다. 파병 동의 기간에는 국회에서 전투병 파병이냐 비전투병 파병이냐는 뜨거운 논란이 있었다. UN군이 아닌 국군으로서 해외 파병을 군사 정권이 아닌 행정부에서 최초로 결정한 수장이 되었다.

노무현에 대한 비판을 참고하십시오.
재임 기간 중에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사회주의적이고 반미와 친북적인 설화가 많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으며, 진보적인 시각에서는 기업의 요구를 많이 반영된 비정규직 보호법으로 정규직 전환을 가로막고 대량 해고로 이어져 실직자를 양산한 점(이랜드 사태 등)과 같은 노동 환경의 악화와 한미 FTA의 추진, 이라크 전쟁 파병, 부실한 부동산 개혁 및 친재벌적이라고 비판을 받아 진보, 보수 어느 진영에게서도 명확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보수주의자에 따르면 ‘친북좌파’라는 비판과 진보 진영에서는 ‘친미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 이 양립하고 있다. 이런 파병결정에 대해 훗날 문재인은  미국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이 대북 제한폭격을 거론했고 그것을 막기 위해 파병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스스로 지역주의에 반대하며 민주자유당과 새천년민주당의 주류의 그늘에서 벗어나 개혁 정당인 열린우리당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국회에서의 그는 자신의 지지 정당인 열린우리당의 정치적 기반의 취약성과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과 같은 기존 정치 세력과의 타협이 부족해 다수당의 횡포로 탄핵 사태에 이르러 정치적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국회의원 김경재는 그의 정치력 자체를 의심하였다. 2004년 김경재는 노무현을 가리켜 미국은 노 대통령이 다중인격자처럼 행동해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며 노대통령은 임시정부 김구 주석을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말하는 등 기본적인 상식이 없는 지도자라고 지적하였다. 김근태는 한미 정상회담이 성공적이라는 평을 받는 것은 노 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그들이 하라는 대로 다 했기 때문이라면서 어떻게 현충일에 일본에 가서 '김구(金九) 선생은 실패한 정치인'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느냐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노무현은 대선 당시 깨끗한 정치, 낡은 정치 타파를 기치로 내걸어 집권에 성공했으며, 재임 중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도덕성을 강조했다. 참여정부가 내건 제일의 기치 또한 도덕성이었다. 그러나 친형인 노건평을 비롯하여 안희정, 이광재 등의 측근 비리에 연루되었다. 항상 도덕성을 토대로 정치적 정당성을 주장하던 노무현이었지만 측근과 친인척의 비리를 막지는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이러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취임 첫 해부터 대선 자금 문제로 안희정, 최도술 등 주변 인사들이 줄줄이 사법 처리되는 상황에 몰리지만 특유의 공세적 대응으로 불법 대선 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정계를 은퇴하겠다는 발언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밖에 2004년 3월에는 전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에게서 3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형 노건평이 불구속 기소되자 기자 회견을 열어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이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라고 형을 두둔하였고, 이 발언 이후 남 전 사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한 변양균-신정아 의혹이 터졌을 때는 요즘 깜도 안 되는 의혹들이 많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라는 발언을 하는 등 참여정부의 도덕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정치 상대를 비난하는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다. 결국 2007년 11월 대통령 취임 후 새살림을 꾸리려고 했는데…. 구시대의 막내 노릇, 마지막 청소부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참여정부는 설거지 정부라고 평가하면서 참여정부 시절 불거나온 비리 의혹들에 대해서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국회의원 이종걸은 '청년 노무현'은 대통령 되기 이전까지가 끝이라며 권력의 맛을 본 대통령 이후의 노무현은 더 이상 '청년 노무현'이 아니다라며 비판했다. 2009년 5월 그는 일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 같이 밝히면서도 '청년 노무현'은 남에게 빚을 졌다고 하면, 갚지 않아도 될 빚까지 갚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밝히며,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애증(愛憎)을 피력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사법처리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민정수석도 구속됐다면서 법의 형평성 차원에서, 임채진 검찰총장 입장에서 본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을 구속시킬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포괄적 뇌물죄 적용과 관련, 돈의 액수가 적다는 게 문제는 안 된다. 대통령 위치에서도 돈을 받았다면 포괄적 뇌물죄가 적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전직 대통령을 사법처리까지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무현은 60년 김해 진영중학교 2학년 재학중 친일 부정축재 의혹이 있는 김지태가 설립한 부일장학회 시험에 합격해 1년 동안 장학금을 받았다고 한다. 부산상고에 입학해서도 동문회장인 김지태가 교내에 만든 '백양장학회'에서 3년 동안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마쳤다고 한다. 78년에는 김지태가 설립한 삼화그룹 고문 변호사로 일했으며 자신의 자전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이 과정을 언급하기도 하였는데 나는 장학금만 바라보고 부산상고에 입학해 김지태 선생의 후배가 되었다면서 나의 오늘은 그 분(김지태)이 디딤돌을 놓아준 셈이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또한 1984년엔 김지태 회장의 유족들이 부탁한 117억원 짜리 상속세 소송을 맡아 전액을 취소 시키는 승소판결을 이끌어낸 바 있으며 그는 착수금 2000만원, 승소 사례금 4000만원을 포함 총 6000만원을 김지태 유족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정수장학회 논란이 한창이던 2012년 10월 22일, 이정현 새누리당 공보단장은 노무현과 부일장학회(정수장학회의 원래 명칭)의 원소유자인 김지태와의 이와 같은 인연을 들어 논란을 촉발 시켰다. 이정현은 김지태씨는 친일 부정축재 의혹이 있는데, 민주당이 언제부터 그런 의혹이 있는 사람들의 대변자가 됐냐라고 말했다. 또한 참여정부 5년 동안 신도시 집값은 56% 상승했으며 전국 집값은 36%나 상승했다.

참여정부의 부동산정책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부동산시장의 해법을 경제문제로 접근하지 않고 소득 계층간 갈등구조로 파악했다는 점이다. 이로인해 서울 강남권 등 일부 부유층을 향해 반 시장적 규제를 가했고 이는 결국 주변집값마저 끌어올리는 부작용을 낳았다. 또한 동시다발적으로 전국토의 난개발로 인해 토지가격 급등과 저금리 기조에 따른 과잉 유동성에 대한 대처 등 부동산시장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수요가 몰리는 곳에 공급을 확대하는 정책이 아닌 단순히 투기적 수요를 근절해 부동산 시장을 잡겠다는 수요측면에서만 접근함으로써 불씨를 키웠다. 정상적인 수요도 투기로 간주해 수요를 차단시켰고 공급은 지나친 가격 규제를 도입해 공급을 더욱 줄어들게 만들었다.

노무현 정부 때는 임기 내내 소득 분배가 악화됐다. 지니계수는 2002년 0.293에서 노무현 정부 첫해인 2003년 0.283으로 낮아졌다가 이후 2004년 0.293, 2005년 0.298, 2006년 0.305, 2007년 0.316으로 올랐다. 반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 0.319에서 2009년 0.320으로 올랐으나 2010년 0.315, 2011년 0.313, 2012년 0.310으로 내려 소득 분배가 소폭이지만 개선됐다. 박근혜 정부에선 2013년 0.307, 2014년 0.308, 2015년 0.305로 비슷했다.[*성장보다 분배를 강조했던 참여정부 시절에는 오히려 지니계수가 증가하면서 소득 불평등이 악화되었고, 참여정부보다 성장을 강조했던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오히려 지니계수가 감소하면서 소득 불평등이 개선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황우석 사건에서의 태도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05년 11월 27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PD수첩이 황당한 취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심지어 협박과 위협도 한다고 한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라는 글을 올리면서 PD수첩의 줄기세포에 진위에 대한 취재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했으며, 이후 줄기세포가 가짜로 판명된 후에도 자, 이걸로 정리를 하자라는 말로 상황을 무마시키려 했다는 비판이 있다.

이후 2006년 12월 28일에는 황우석 사건을 통해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책임을 지고 같은 해 1월에 물러난 박기영 전 대통령 정보과학기술 보좌관이 정책기획위원으로 발탁되었는데, 박 전 보좌관이 정책기획위원을 맡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도덕적 문제를 일으켰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라고 발언을 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2007년 12월 노동운동계에서는 노무현 정권에서 구속되거나 희생당한 노동자 수가 김영삼 정권의 두 배라며 비판하였다. 일부 노동단체는 노무현 정권에게 인권을 유린당했다고 주장하였으며 20여 명의 구속 노동자가 무기한 단식 농성에 돌입한 일도 있었다. 단식 농성에 참여한 구속 노동자들은 하중근 사망 사건 관련 싸움을 진행했던 포항건설 노조의 9명, 타워크레인 노동자 5명, 뉴코아-이랜드 관련 2명, 비정규직 철폐와 한미 FTA 반대 집회에서 연행 구속된 3명, 노사관계 로드맵 야합에 반대하며 한국노총 점거 농성을 진행한 2명의 노동자 등이다. 언론에서는 이렇게 많은 수가 감옥에서 단식 농성에 돌입한 것은 독재 타도를 외치던 80년대 이후 처음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한편 언론지 '참세상'의 조사에 따르면, 구속 노동자 후원회가 집계한 2007년 11월 30일 당시 구속 노동자는 총계 62명으로 집계하였으며, 노무현 정권에만 1천 37명의 노동자가 구속된 바 있다고 주장했다. 그중 2007년 11월에만 17명이 구속되었다. 이는 문민정부가 들어섰다는 김영삼 정권 때 632명보다 두 배에 가까운 수치이다. 구속 노동자들은 그 외에 강제 구금당한 이주 노동자의 수는 너무 많아서 집계가 불가능할 정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노무현은 2003년 6월의 일본 방문에서 한 김구는 실패한 정치인 발언과, 2004년 7월의 한일 정상회담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라 발언한 것을 두고 비판 여론이 제기되었다. 당시 한나라당에서는 그의 외교 정책을 굴종 외교로 규정하였다.

이에 송대성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노무현의 민주평통 NLL발언에 대해 어떻게 국군통수권자로서 농담처럼 NLL문제를 얘기할 수 있냐고 반문하면서 영토문제에 대해 통수권자가 이렇게 말하는 경우는 세계에 유례가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북측은 NLL이 일방적으로 그어졌다고 주장하면서도 70년대 중반까지 실제적인 영토선으로 준수해왔으나 대북햇볕정책이 실시되면서부터 북한이 본격적으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김영호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대한민국을 수호해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대단히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말했다. 이어 NLL이 무너질 경우 수도권 방어가 어렵고, 국익과 안보에 위해가 올 것이기 때문에 NLL 준수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데 대통령은 국민들보다도 안보의식이 해이한 것 같다면서 노 대통령이 임기말 대북관계에서 억지 성과를 내려는 데 집착해 누가 봐도 납득이 안 되는 이상한 망언들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렇게 보수적인 색채를 띄는 사람들이 NLL(북방한계선)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영토선적인 인식을 가지고 노무현 정부를 비판하지만, 이런 문제는 김영삼 정부 시절 국방부 장관이 국회에서 한 발언을 볼 때 단순히 '트집잡기'에 지나지 않으므로 건설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한편 대북低(저)자세 외교라는 비판과 함께 민간 차원의 북한 반대 운동을 탄압하여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였다는 주장이 있었다. 민간단체의 인공기 소각 퍼포먼스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북한에 사과한 것에 대해서도 대북 굴종 외교 논란이 있다.

이런 태도에 대하여 반론도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여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헌법 제66조 제3항)를 다하여야 하는 대통령 입장에서 대북 적대를 하여 괜히 국익에 이로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남북관계개선의 기반이 된다고 할 수 있는 남북신뢰를 다지기 위한 전략적 발언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 결과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을 통한 2007 남북정상선언문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진보적 가치 실현,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 등등을 노무현 정신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노무현 정신의 핵심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바보 노무현
의 삶처럼 사람 냄새 나는 삶의 실현이었던 듯하다. '대통령의 언어'가 아닌 '서민의 언어'로 말하고 서민의 몸짓으로 행동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언행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도 많았고, 그로 인해 안티도 많았다. 이 모든 해프닝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 뒤에도 털어내지 못한 서민적 언행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민적 풍모는 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낙향해 살면서 보여준 봉하마을 생활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그의 이같은 발언을 두고 대전일보는 다음날 1면 머릿기사로 대서특필하면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노 후보는 이날 인천 유세에서 정치 행정은 충청권으로 분산시키고 경제·금융·비즈니스는 수도권에 남는다면서 돈 되는 것은 여기서하고 돈 안되고 시끄럽고 싸움하는 것은 충청권으로 보내자고 말해 청중의 웃음을 샀다고 보도했다.

한편 분신자살기도로 입원중인 허세욱을 문병왔다가 허세욱으로부터 입당 권유를 받은 경제학자이자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경제비서관 출신정태인(鄭泰仁)은 그의 뜻에 따라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정태인은 이후 노무현 정부와 결별했고, 더불어 그의 30년 친구인 유시민 등과도 결별을 선언하기도 했다. 2008년 진보신당 창당 이후 정태인은 진보신당에 입당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돈인 배병렬(62) 전 NH-CA자산운용(구 농협CA투자신탁운용, 이하 CA자산운용) 상임감사가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2005년 자신의 삼촌이 회장으로 있던 회사가 농협에서 수십억원대의 대출을 받는 과정에서 개입,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경남 김해시 소재 농협 내외동지점 부지점장을 역임한 김모 씨 주장에 따르면, 배씨는 자신의 삼촌 배OO이 회장으로 일하던 T개발이 아파트를 짓는 과정에서 농협 대출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자 농협 김해 내외동지점과 심사를 맡은 농협중앙회 등에 압력을 행사해 대출이 가능토록 했다. 김 전 부지점장은 당시 대출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배 전 감사를 만났고 압력에 가까운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T개발에 대한 대출이 문제가 있었음은 이 대출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농협 인사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언론들 사이에서는 노무현이 김구는 실패한 정치인으로 발언했다고 보도하면서 비판했다. 광주의 도청이전반대추진위원회 관계자는 평생을 항일독립운동으로 민족의 재단 앞에 부끄럼없이 살아온 분을 일국의 대통령이 침략자였던 일본 국민들 앞에서 실패한 정치인으로 평가한 것은 적절하지 못했다며 그렇다면 항일독립운동이 실패한 정치활동이란 말이냐고 분개했다.

김근태는 그가 외교 문제에서 실패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외교에 있어서도 실패하고 있다. 중국 가서 하는 이야기, 일본 가서 하는 이야기가 다르다. 국민의 자부심을 상처낸다. 한미 정상회담까지는 분명하게 지적하고 비판했지만 한일정상회담은 너무 기가 막혀서 얘기를 하지 않았다. 과거사를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지 않은 일본 천황과 건배하는 것이나 일본 국민들과의 대화에서 '김구 선생이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철학과 원칙은 함께 하지만 판단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의 발언을 지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정치인 김구선생이 바르게 평가돼야'라는 글을 게시한 네티즌은 외세의 힘에 의해 우리 국민은 공산주의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해야하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데 백범 김구선생의 중립적인 민족주의 국가는 어디에 세워야하고 국민은 어떻게 김구를 선택하고 어떻게 따라야했던가라며 정치 지도자로서 김구 선생은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네티즌은 결국 김구는 훌륭한 인격자이자 지도자이지만 남에도 북에도 설자리가 없었던 비운의 지도자였고 우리 국민은 훌륭한 지도자 김구를 두고 북에서는 공산주의를 따라갔고 남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따라갔다며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비극을 강조했다. 성균관대 교수 김삼웅은 일왕이나 수상과 공식적으로 말한 것도 아니고 애국심은 존경하지만 정치인으로서 실패했다는 발언 하나 가지고 왈가불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고 더 이상의 코멘트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발언의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비판거리의 하나로 활용되었다.

노무현의 다케시마 발언은 곧 일본 언론들에게도 보도되었다. 지지통신은 영토와 역사문제에 대한 견해를 묻는 일본인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 무심코 발언한 것으로 보이나, 눈살을 찌푸리는 한국인 기자도 있었다고 비꼬았다. 그의 다케시마 발언을 일본 극우 인사일각에서는 한국에서 다케시마로 인정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처음 '이인제 대세론'에 묻혀 있다가 2002년 3월 16일 광주 지역 경선부터 본격적인 노풍(盧風)을 일으켰고, 언론들은 이 현상을 신기한 듯 부쩍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노무현 바람에 심상치 않은 무게가 실리자 보수 언론의 견제가 본격화됐다. 대선 당일 조선일보가 사설에서 지금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고, 유세를 함께 다니면서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줬던 정몽준 씨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상황이라며 이제 최종 선택은 유권자들의 몫이라고 방점을 찍은 일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대권을 잡은 이후에는 집권 1년 만에 보수 언론의 포화 속에 헌정 사상 유례없는 탄핵을 당하기도 했다. 탄핵 반대 촛불 여론으로 권좌를 되찾은 후에도 보수 언론의 공격은 그치지 않았으며, 여기에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협정 추진, 대연정 구상 등으로 인해 진보 언론도 노무현에게 칼을 겨누기 시작했다. 임기 말에는 취재 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이 기자실 폐쇄로 이어지면서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은 모든 언론이 비판을 퍼부었다.

'박연차 회장 비리 사건'에 연루된 정황이 드러나면서 진보 언론마저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았다. 언론들은 검찰발로 노무현의 가족과 관련된 비리를 낱낱이 보도하며 노무현을 부도덕과 비리의 몸통인 양 매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망으로 노무현의 생애가 역사의 뒤안길로 넘어가면서 언론의 긍정적인 평가들이 등장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언론과의 관계가 가장 순탄치 않았던 정치인으로 평가되었다.

대통령 후보 시절인 2002년 6월 20일에 서울 종로구 혜화동 가톨릭대 주교관이던 김수환 추기경을 방문했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노무현이 먼저 신앙 문제를 화제로 꺼냈다. 노무현은 1986년 부산에서 송기인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아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얻었다.라고 소개하고 하지만 열심히 신앙생활도 못하고 성당도 못 나가 프로필 쓸 때 종교란에 '무교'로 쓴다.라고 고백했다.

이에 김수환은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었고, 노무현은 희미하게 믿는다.라고 답했다. 김수환이 어려울 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고 말하자 노무현은 앞으로는 종교란에 '방황'이라고 쓰겠다.고 대답했다.

노무현은 자택 옆에 있던 정토원이라는 사찰에서 사시 공부를 하였다. 이후에는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장유암에 머무르면서 사시를 준비했으며, 틈틈이 불교 경전을 탐독했다. 9년간 사시 공부를 하여 1975년 3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평소 불심이 깊은 것으로 알려진 아내 권양숙은 2002년 10월 1일 당시 대선을 앞두고 합천 해인사에 머물고 있는 조계종 종정인 법전 스님으로부터 보살계와 '대덕화'(大德花)라는 법명을 받았는데, '대덕화'는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박정희의 아내 육영수가 받은 법명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법명 수계는 불교계의 민심이 실린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불교계의 기대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노무현은 재임 기간 동안 해인사를 무려 세 차례나 방문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다 방문을 하였다. 2003년 12월 22일에 노무현은 아내와 함께 경남 합천 해인사를 불시 방문해 조계종 종정 법전스님, 총무원장 법장스님과 환담한 뒤 오찬을 함께 했다. 사패산 터널 문제에 대한 공약을 지키게 못하게 되었다면서 양해를 구했다.

또한 노무현은 2005년 8월 30일에 T-50 골든이글 양산 1호기 출고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 목조 불상인 쌍둥이 비로자나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해인사에 들러 비행기 사고 없이 잘 날아다니고 잘 팔아 달라고 부처님께 기도를 했다. 취임 이래 2번째로 해인사를 방문했고 해인사 대비로전 건립에 30여억 원의 국고 지원을 즉석에서 약속했다. 2007년 11월 24일 해인사 대비로전(大毘盧殿) 낙성 대법회에 참석하면서 축사를 하였는데 3번째로 해인사를 방문했다.

노무현은 청와대 온라인 행정업무 처리 표준화 시스템인 'e지원'을 개발하게 하였다. e지원 시스템으로 청와대에서 종이 서류를 없애고 대신, 대통령의 모든 지시가 'e지원' 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e지원으로 인해 행정관이나 비서관의 업무 기안이 온라인에서 이뤄지고 대통령을 비롯해 간부들은 실시간으로 추진 중인 업무에 대해 댓글로 지시, 보완하고 결재까지 해서 간소화되었다. 노무현은 임기 후 e지원의 복사본을 제작해 봉하 마을에 설치하였는데, 국가정보 보안과 관련하여 문제가 제기되었고, 복사본을 제작하여 사유하는 것에 대하여 법적 근거가 없다는 법제처의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차후 국가기록원에 반납 처리되었다.

사법 시험 준비생 시절 그는 '개량 독서대'를 고안해 특허받기도 했다. 아울러 민주당 최고위원 시절인 지난 1994년에는 정치인을 위한 인명록 통합 관리 프로그램인 '한라 1.0'을 개발했고, 이는 버전 업을 거쳐 몇 년 후 '노하우(KnowHow) 2000'으로 업그레이드하기도 했다. 또한 의자 등받이를 높게 해 윗부분을 옷걸이 모양으로 해 웃옷을 걸어놓은 '옷걸이 의자'도 발명했지만 큰 빛을 보지 못했다. 퇴임 후에는 인터넷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을 개설했다.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은 노무현의 개인 홈페이지이며, 줄여서 '사람사는 세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2009년 5월 홈페이지 개편을 대대적으로 실시하다가 5월 23일에 노무현이 사망하자 개편알림 내용을 추모 이미지로 깔아놓기도 했다. 청와대로 연결되는 주소 맞습니다 맞고요, 맞습니다, 맞고요는 넷피아에 의해 넘어가기도 했었다. 한명숙이 서울본부 이사장, 권양숙이 경남본부 이사장이며, 경남본부는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에 있으며, 서울본부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에 위치해 있다.

격식 없는 그의 발언이 인기를 끌면서 일베와 합필갤 이용자들은 그의 사진과 동영상을 합성하여 비하하고 희화화하였다. 노무현 사후 그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합필갤에서 자살 장면과 운지버섯 자양강장제 광고를 합성한 영상이 인기를 끌면서 추락을 뜻하는 '운지'라는 유행어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일베저장소에서는 그의 육성을 '패션시티' 같은 노래와 합성한 영상을 상당히 많이 제작하면서 'MC무현'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일베저장소에서 노무현을 교묘하게 합성한 사진이 사진 검색 결과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탓에 공식적인 곳에 실수로 사용되어 관련자들이 물의를 빚는 일이 잦다. 노무현은 여전히 일베저장소에서 폄하되고 있다.




#Article 28: 곱셈적 함수 (223 words)


수론에서, 곱셈적 함수(-的函數, ) 또는 곱산술 함수(-算術函數)는 서로소인 두 정수의 곱셈을 보존하는 수론적 함수이다.

함수 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면, 곱셈적 함수라고 한다.

함수 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면, 완전 곱셈적 함수(完全-的函數, )라고 한다.

(완전) 곱셈적 함수의 정의역은 의 곱셈에 대하여 닫혀있는 부분 집합일 수도 있다.

곱셈적 함수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함수들 역시 곱셈적 함수이다.

곱셈적 함수 에 대하여, 만약 의 소인수 분해가

일 경우, 다음이 성립한다.

만약 추가로 가 완전 곱셈적 함수일 경우, 다음이 성립한다.

즉, 곱셈적 함수는 소수의 거듭제곱의 상에 의하여 결정되며, 완전 곱셈적 함수는 소수의 상에 의하여 결정된다.

곱셈적 함수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항등식이 성립한다.

여기서 는 뫼비우스 함수이다.

곱셈적 함수 의 정의역 이 를 만족한다면,

이다.

곱셈적 함수는 디리클레 합성곱에 대하여 아벨 군을 이룬다. 즉, 곱셈적 함수 의 디리클레 합성곱

와 디리클레 역원

은 곱셈적 함수이다.

곱셈적 함수 에 대하여, 만약 의 소인수 분해가

일 경우, 다음이 성립한다.

만약 추가로 가 완전 곱셈적 함수일 경우, 다음이 성립한다.

다음과 같은 수론적 함수들은 완전 곱셈적 함수이다.

다음과 같은 수론적 함수들은 곱셈적 함수이나, 완전 곱셈적 함수가 아니다.

양의 정수를 두 정수의 제곱의 합으로 나타내는 방법의 (더하는 순서를 고려한) 가짓수를 구하는 함수

는 곱셈적 함수가 아니다. 예를 들어, 1을 제곱수로 나타내는 방법은 다음과 같이 4가지가 있다.

즉,

이다.

폰 망골트 함수

는 이 어떤 소수 의 양의 정수 제곱일 경우 를, 소수의 거듭제곱이 아닐 경우 0을 값으로 취한다.

이므로, 이는 곱셈적 함수가 아니다.




#Article 29: 코사인 법칙 (339 words)


기하학에서, 코사인 법칙(cosine法則, )은 삼각형의 세 변과 한 각의 코사인 사이에 성립하는 정리이다. 이에 따르면, 삼각형의 두 변의 제곱합에서 사잇각의 코사인과 그 두 변의 곱의 2배를 빼면, 남은 변의 제곱과 같아진다. 삼각형의 두 변의 직각 삼각형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대한 일반화이다. 코사인 법칙은 삼각형의 두 변과 그 사잇각을 알 때 남은 한 변을 구하거나, 세 변을 알 때 세 각을 구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삼각형 의 세 각 가 마주하는 변이 각각 라고 하면,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은 삼각 함수의 하나인 코사인이다. 이를 코사인 법칙이라고 한다.

코사인 법칙을 통해 삼각형의 두 변과 그 사잇각으로부터 제3의 변을 구할 수 있다. 또한, 삼각형의 세 변으로부터 세 각을 다음과 같이 구할 수 있다.

코사인 법칙에서 가 직각일 경우, 이므로, 다음과 같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얻는다.

유클리드의 《원론》 2권 명제12 및 명제 13은 코사인 법칙과 동치인 명제를 서술한다.

레기오몬타누스는 1462~3년에 작성한 《삼각형에 대하여》()에서 (제1) 구면 코사인 법칙을 제시하였다. 프랑수아 비에트는 1579년 저서 《표준 수학》()에서 제2 구면 코사인 법칙을 제시하였다.

그림과 같이, 를 둔각으로 하는 둔각 삼각형 의 높이선 를 긋자. 그렇다면, 는 를 직각으로 하는 직각 삼각형이므로,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

또한, 이므로, 다음이 성립한다.

마지막 두 항을 직각 삼각형 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통해 정리하면 다음을 얻는다.

이로써 유클리드의 《원론》 2권 명제12가 증명된다. 코사인의 정의에 따라

이므로, 코사인 법칙

이 가 둔각일 경우 성립함을 알 수 있다. 가 예각일 경우의 증명은 이와 비슷하다.

삼각형의 세 변을 각각 높이선으로 안에서 또는 밖에서 나누면 다음을 얻는다.

세 등식의 양변에 각각 를 곱하면 다음을 얻는다.

이제 첫째 등식에 둘째 등식을 더한 뒤 셋째 등식을 빼면 다음을 얻는다.

이로써 코사인 법칙이 증명된다.

다음과 같은 세 벡터를 정의하자.

그렇다면, 벡터 의 길이는 각각 이며, 벡터 와  사이의 각도는 이다. 따라서, 코사인 법칙을 벡터의 스칼라곱의 성질에 따라 다음과 같이 간단히 증명할 수 있다.

단위 구면 위의 구면 삼각형 의 세 각 가 마주하는 세 변이 각각 라고 하면,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은 각각 코사인, 사인이다. 이를 (제1) 구면 코사인 법칙(第一球面cosine法則, )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쌍대 명제는 다음과 같다.

이를 제2 구면 코사인 법칙(第二球面cosine法則, )이라고 한다.

이 둘은 각각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벡터들을 정의하자.




#Article 30: 사인 법칙 (329 words)


기하학에서, 사인 법칙(-法則, ) 혹은 라미의 정리는 삼각형의 변의 길이와 각의 사인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정리이다. 이에 따라 삼각형의 두 각의 크기와 한 변의 길이를 알 때 남은 두 변의 길이를 구할 수 있다.

삼각형 의 각 을 마주보는 변을 라고 하자. 사인 법칙에 따르면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은 삼각형 의 외접원의 반지름이다.

삼각형 의 변  위의 높이를 라고 하자. 삼각법에 따라 이므로, 삼각형 의 넓이 는 다음과 같다.

자모를 치환하면 다음과 같은 등식을 얻는다.

양변에 를 나누면 사인 법칙을 얻는다.

삼각형 의 외접원을 그리자. 를 지나는 지름을 라고 하자. 따라서 는 직각 삼각형이며, 빗변은 이다. 삼각법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

만약 가 예각일 경우, 와 는 같은 호의 원주각이므로 이다. 따라서 다음이 성립한다.

만약 가 직각일 경우, 와 는 같은 점이므로, 이며 이다. 따라서 역시 위와 같은 식이 성립한다. 만약 가 둔각일 경우, 와 는 내접 사각형의 두 마주보는 각이므로, 이다. 따라서 역시 위와 같은 식이 성립한다. 남은 두 각 에 대한 식 역시 마찬가지로 증명할 수 있다.

코사인 법칙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

결과가 에 대하여 대칭적이므로, 변의 선택에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세 변과 세 각의 사인은 모두 양수이므로, 사인 법칙이 성립한다.

단위 구면 위의 구면 삼각형 의 각 가 마주보는 변을 라고 하자. 구면 사인 법칙(球面-法則, )에 따르면 다음이 성립한다.

구의 중심을 라고 하자. 에서 아무 점 를 취하자. 를 지나는 평면 의 수선을 라고 하자. 를 지나는 직선 의 수선을 각각 라고 하자. 삼수선 정리에 따라 는 각각 와 수직이다. 삼각법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

두 식에서 를 소거하면 다음을 얻는다.

남은 한 등식 역시 같은 방법으로 증명하면 구면 사인 법칙을 얻는다.

구의 중심과 세 꼭짓점 를 잇는 벡터를 각각 라고 하자. 삼중곱의 정의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

따라서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에 다음을 대입하면 구면 사인 법칙을 얻는다.

제1 구면 코사인 법칙을 사용하여 구면 사인 법칙을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

가우스 곡률이 -1인 쌍곡면 위의 쌍곡 삼각형 의 각 가 마주보는 변을 라고 하자. 쌍곡 사인 법칙(雙曲-法則, )에 따르면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는 쌍곡 사인이다.

제1 쌍곡 코사인 법칙을 사용하여 쌍곡 사인 법칙을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




#Article 31: 벡터 공간 (641 words)


선형대수학에서, 벡터 공간(vector空間, , ) 또는 선형 공간(線型空間, )은 원소를 서로 더하거나 주어진 배수로 늘이거나 줄일 수 있는 공간이다. 체에 대한, 가군의 특수한 경우다. 벡터 공간의 원소를 벡터(, )라고 하며, 이는 직관적으로 방향 및 길이의 비가 정의된 대상을 나타낸다. 그러나 노름이 주어지지 않은 일반적인 벡터 공간에서는 벡터의 길이 자체는 정의되지 않는다.

체  위의 벡터 공간 은 에 대한 가군이다. 즉, 다음과 같은 튜플이다.

이 데이터는 다음과 같은 공리들을 만족시켜야 한다.

실수체 에 대한 벡터 공간을 실수 벡터 공간(實數vector空間, )이라고 하며, 복소수체 에 대한 벡터 공간을 복소수 벡터 공간(複素數vector空間, )이라고 한다.

체  위의 벡터 공간 의 부분 집합 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면, 가 의 부분 벡터 공간(部分vector空間, )이라고 한다.

즉, 부분 벡터 공간은 의 연산들을 제한시켜 새로운 더 작은 벡터 공간을 이룰 수 있는 부분 집합이다.

벡터 공간 의 부분 집합 에 대하여, 의 생성() 는 를 포함하는 모든 부분 공간들의 교집합이다. 만약 에서, 인 원소 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가 선형 독립 집합이라고 한다. 생성이 벡터 공간 전체인 선형 독립 집합을 기저라고 한다.

선택 공리를 가정하면, 모든 벡터 공간은 하나 이상의 기저를 가지며, 모든 기저들은 항상 같은 크기를 갖는다. 벡터 공간 의 기저의 크기를 벡터 공간의 차원(次元, ) 이라고 한다.

두 벡터 공간 사이의 선형 변환은 벡터 덧셈과 스칼라 곱셈을 보존하는 사상이다. 만약 두 벡터 공간 사이에 가역 선형 변환이 존재한다면, 그 두 벡터 공간이 서로 동형이라고 한다. 주어진 두 벡터 공간 사이의 선형 변환의 집합은 점별 벡터 덧셈과 점별 스칼라 곱셈에 의하여 벡터 공간을 이룬다. 두 유한 차원 벡터 공간 사이의 선형 변환은 주어진 기저에 대한 행렬로 나타낼 수 있다.

선택 공리를 가정하자. 체 에 대한 벡터 공간 에 대하여 다음이 성립한다.

즉, 주어진 체에 대한 벡터 공간은 그 차원에 따라서 완전히 분류된다. 이는 선택 공리를 필요로 하며, 선택 공리가 없으면 모든 벡터 공간이 차원을 갖는다는 것을 보일 수 없다. 여기서 는 의 개의 직합이며, 인 경우 이는 곱집합과 다르다.

같은 체  위의 벡터 공간들이 주어졌을 때, 다음과 같은 연산들을 정의할 수 있다.

체  위의 벡터 공간 와 그 임의의 부분 공간 가 주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위에 다음과 같은 동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다.

이 동치 관계에 대한 동치류는 다음과 같다.

몫공간(몫空間, ) 는 집합으로서 이 동치 관계에 대한 몫집합(=동치류들의 집합)이다.

그 위의 벡터 공간 연산은 다음과 같다.

이 정의는 동치류의 대표원을 선택하는 방식과 무관하다. 또한, 이들 연산은 집합으로서의 연산과 일치하지 않는다.

 위의 벡터 공간들의 집합 이 주어졌을 때, 이들의 직접곱

은 집합으로서 들의 곱집합이다. 이 위에는 자연스러운 -벡터 공간의 구조가 존재한다. 즉,

이는 벡터 공간의 범주에서의 곱이며, 대수 구조로서의 직접곱이다. 즉, 자연스러운 사영 사상

이 존재하며, 이는 선형 변환을 이룬다.

 위의 벡터 공간들의 집합 이 주어졌을 때, 이들의 직합은 다음과 같다.

즉, 직접곱에서, 오직 유한 개의 성분만 0이 아닌 원소들로 구성된 부분 집합이다. 이는 벡터 공간의 범주에서의 쌍대곱이며, 가군의 직합의 특수한 경우이다. 즉, 자연스러운 포함 사상

가 존재하며, 따라서 각 는 의 부분 공간을 이룬다.

유한 직합은 직접곱과 같으나, 무한 직합은 일반적으로 직접곱의 부분 공간이다. 만약 가 의 기저라면,

는 의 기저를 이룬다. 따라서,

이다. 여기서 우변은 기수의 합이다.

 위의 벡터 공간들의 집합 이 주어졌을 때, 이들의 텐서곱

이 존재한다. 이는 자연스러운 다중 선형 사상

을 가지며, 또한 임의의 다른 다중 선형 사상

이 주어졌을 때, 유일한 선형 사상

가 존재한다. 텐서곱은 이 보편 성질로부터 유일하게 정의되며, 또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무한 개의 벡터 공간들의 텐서곱은 직접 정의하기 힘들다.

임의의 두 벡터 공간 , 에 대하여,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은 기수의 곱셈이다.

체  위의 벡터 공간 는 다음 성질들을 만족시킨다.

즉, 체 위에서는 모든 가군이 자유 가군이 된다.

체  위의 벡터 공간 의 집합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벡터 공간에 성질을 추가하여 만든 구조로는 거리의 개념을 준 노름 공간 · 바나흐 공간, 각의 개념을 준 내적 공간 · 힐베르트 공간, 위상적 성질을 가진 위상 벡터 공간 · 국소 볼록 공간 · 프레셰 공간, 벡터 곱을 준 체 위의 대수 등이 있다.

벡터 공간은 임의의 환 위의 가군의 개념의 특수한 경우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환 위의 일반적인 가군은 벡터 공간과 매우 다른 성질을 보인다. 벡터 공간과 비슷한 성질을 보이는 가군을 자유 가군이라고 한다.




#Article 32: 펜로즈 삼각형 (115 words)


펜로즈 삼각형( 또는 )는 불가능한 물체의 일종이다. 1934년 스웨덴의 화가 오스카르 레우테르스베르드가 처음 쓰기 시작했고, 1950년대에 영국의 수학자 로저 펜로즈가 그와는 독자적으로 고안하여, 널리 알렸다. 그 후에도 펜로즈 삼각형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판화에서 쓰이기 시작하여,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불가능한 물체에 영향을 주었다.

이 삼각형은 단면이 사각형인 입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2차원 그림으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삼각형의 각 변을 이루는 평행한 면들은 각 꼭짓점에 이르면, 서로 다른 위치에서 본 직각의 모서리이기 때문이다. 각 변을 이루는 막대는 모두 서로 직각을 이루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각형을 만든다.

이 방법을 일반화 시켜서 펜로즈 다각형으로 확대할 수 있다. 하지만 펜로즈 사각형은 그 시각적 효과가 삼각형만큼 충격적이진 않다.

펜로즈 삼각형처럼 보이는 입체를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이 때에 각 변은 꼬이거나, 끊어져야 한다.




#Article 33: 물리 상수 (112 words)


물리 상수(物理常數, )는 물리학에 나오는 값이 변하지 않는 물리량을 말한다. 물리 상수는 실제적인 물리적 측정과는 관계없이 고정된 값을 갖는 수학 상수와 대비되어, 대부분이 그 값이 실험을 통한 측정을 통해 얻어진다.

물리 상수들 중에 특히 유명한 것으로는 플랑크 상수, 중력 상수, 아보가드로 상수 등이 있다. 

물리 상수는 여러가지 양을 의미한다. 플랑크 길이는 자연의 기본적인 거리, 광속은 가능한 최고 속력, 미세 구조 상수는 차원이 없는 양으로 전자와 광자 사이의 상호작용의 정도를 각각 의미한다.

유효자리는 굵게 표시했다.

aPeter J. Mohr and Barry N. Taylor, CODATA Recommended Values of the Fundamental Physical Constants: 1998, Journal of Physical and Chemical Reference Data, Vol. 28, No. 6, 1999 and Reviews of Modern Physics, Vol. 72, No. 2, 2000. 




#Article 34: 대수학의 기본 정리 (143 words)


대수학의 기본 정리(代數學의 基本 定理 ; fundamental theorem of algebra)란 상수가 아닌 복소계수 다항식은 적어도 하나의 영점을 갖는다는 정리이다.

즉, 복소계수 다항식

에 대해  인 복소수  가 적어도 하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정리는 복소수체가 실수체와는 달리 대수적으로 닫힌 체임을 뜻한다.

수학자들은 17세기에 이미 이 정리가 옳으리라 생각하였으나 증명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복소수의 개념이 없던 당시에는 “모든 실계수 다항식은 실계수 일차식들과 실계수 이차식들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라는 예상이었다. 장 르 롱 달랑베르와 레온하르트 오일러 등이 증명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불완전하였고, 최초로 엄밀한 증명에 성공한 수학자는 19세기 초의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였다. 그 이후 이 정리는 복소수 계수 다항식으로 확장되었다. 가우스는 생애 동안 몇 가지의 다른 증명을 발표했다. 현재까지 순수하게 대수적인 증명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으며, 약간의 해석학 또는 위상수학을 도입해야 증명할 수 있다.

다음은 복소해석학을 이용한 증명이다.

복소 다항식

가 영점을 갖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즉 모든 복소수  에 대해  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는 전해석함수이다. 이제 삼각 부등식을 이용하여




#Article 35: 뫼비우스 반전 공식 (173 words)


수론에서의 뫼비우스 반전 공식(Möbius inversion formula)은 19세기 수학자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뫼비우스의 이름을 딴 공식이다.

g(n) 과 f(n)이 수론적 함수(arithmetic function)이며 1보다 큰 모든 에 대해 다음이 성립한다고 하자.

이 때, 1보다 큰 모든 에 대해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는 뫼비우스 함수(Möbius function)이고, 덧셈은 n의 양의 약수 d 전체에 대해 이루어진다.

수론적 함수 는 의 누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역으로 를 통해 를 꺼내는 공식이므로 반전 공식이라 불린다.

f와 g가 자연수에서 어떤 아벨 군으로의 함수일 때에도 공식은 성립한다.

디리클레 합성곱(Dirichlet convolution)을 사용하여 공식을 써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 는 디리클레 합성곱이고, 1은 모든 에 대해 항상 1인 수론적 함수이다. 이 경우,

가 성립한다. 즉, 뫼비우스 함수는 모든 함수값이 1인 수론적 함수의 역원이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이 성립한다. 여기서 은 일 때만 1이고 나머지는 모두 0인 수론적 함수이다.
다양한 수론적 함수의 계산의 예는 Apostol의 책을 참조하면 좋다.

조합론(combinatorics)에서 자주 쓰이는 동치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F(x)와 G(x)가 구간 [1,∞)에서 복소수로의 함수이고, 1보다 크거나 같은 모든 에 대해

을 만족하면, 1보다 크거나 같은 모든 에 대해

이 성립한다.

여기서 합은 x보다 작거나 같은 모든 양의 정수 n에 대해서 이루어진다.




#Article 36: 푸리에 급수 (126 words)


수학에서, 푸리에 급수(Fourier級數, )는 주기 함수를 삼각함수의 가중치로 분해한 급수다. 대부분의 경우, 급수의 계수는 본래 함수와 일대일로 대응한다.

함수의 푸리에 계수는 본래 함수보다 다루기 쉽기 때문에 유용하게 쓰인다. 푸리에 급수는 전자 공학, 진동 해석, 음향학, 광학, 신호처리와 화상처리, 데이터 압축 등에 쓰인다. 천문학에서는 분광기를 통해 별빛의 진동수를 분해하여 별을 이루는 화학 물질을 알아내는 데 쓰이고, 통신 공학에서는 전송해야 하는 데이터 신호의 스펙트럼을 이용하여 통신 시스템 설계를 최적화하는 데 쓰인다.

프랑스의 과학자이자 수학자인 조제프 푸리에가 열 방정식을 풀기 위하여 도입하였다.

푸리에 급수는 주기함수를 기본적인 조화함수인 삼각함수 또는 복소 지수 함수의 급수로 나타낸 것이다. 주기함수 가 의 주기를 가진다고 하자. 즉,

라고 하자. 또한, 가 모든 유한 구간()에서 제곱적분 가능하다고 하자. 즉, 임의의 에 대하여,

가 유한한 값으로 존재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의 푸리에 계수() 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Article 37: 감마 함수 (171 words)


수학에서 감마 함수(Γ函數, )는 계승 함수의 해석적 연속이다.

감마 함수의 기호는 감마(Γ)라는 그리스 대문자를 사용한다.

양의 정수 n에 대하여 이 성립한다.

감마 함수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동치임을 보일 수 있다.

감마 함수는 다음과 같은 적분으로 정의된다. 이 적분을 오일러 적분이라고 한다.

오일러 적분은 상반평면  인 영역에서 절대수렴한다. 여기에 해석적 연속을 사용해 이 함수의 정의역을 위의 단순극을 제외한 전 복소평면으로 확장할 수 있다. 이 확장된 함수를 감마 함수라 부른다.

이 정의는 오일러의 이름을 따 오일러 극한 형태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여기서  는 오일러-마스케로니 상수이다. 이 정의는 카를 바이어슈트라스의 이름을 따 바이어슈트라스 무한곱 형태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만약 감마함수를 자연수 에 대해

을 만족하는 함수로 정의하면 감마 함수는 유일하지 않다. 예를 들어

또한 위 성질을 만족함을 확인할 수 있다. 감마 함수는 이중 유일하게 가 양의 실수축상에서 볼록함수이다.

감마 함수는 정의역에서 정칙 함수이다. 즉, 다음이 성립한다.

감마 함수는 복소평면에서 유리형 함수이며, 양이 아닌 정수 에서 단순극을 가진다. 단순극 에서 유수의 값은 이다.
감마 함수는 영점을 갖지 않는다. 즉, 그 역수 는 전해석 함수이다.

감마 함수는 다음과 같은 함수 방정식을 만족시킨다.




#Article 38: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682 words)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1892년 3월 1일 ~ 1927년 7월 24일)는 일본의 근대 소설가이다. 호는 징강당주인(澄江堂主人)이며 하이쿠 작가로서의 호는 가키(我鬼)이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단편 소설이다. 「참마죽」, 「덤불 속」, 「지옥변」 등 주로 일본의 《곤자쿠 이야기집》·《우지슈이 이야기》 등 전통적인 고전들에서 제재를 취하였다. 또한 「거미줄(원제: 蜘蛛の糸)」, 「두자춘(杜子春)」 등 어린이를 위한 작품도 남겼으며, 예수를 학대한 유대인이 예수가 세상에 다시 올 때까지 방황한다는 상상력을 발휘한 「방황하는 유대인」도 있다.

원래 류노스케의 위로는 하쓰(はつ)와 히사(ひさ)라는 두 명의 누나가 있었는데, 큰누나였던 하쓰는 류노스케가 태어나기 1년 전에 여섯 살의 나이로 요절했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정신장애를 겪어서 류노스케를 양육할 수 없었다. 생후 7개월 된 류노스케는 도쿄시 혼죠구 고이즈미쵸에 있던 외가 아쿠타가와 집안에 맡겨졌고, 백모 후키(フキ)가 양육을 맡았다. 11살 때인 1902년에 어머니가 끝내 사망하자 이듬해에 그는 외삼촌으로 도쿄시의 토목과장을 지내기도 했던 아쿠타가와 미치아키(芥川道章)의 양자가 되어 아쿠타가와 성을 쓰게 된다. 아쿠타가와 집안은 에도 시대에는 사족(士族)으로서 대대로 도쿠가와(德川) 집안을 섬겨 다도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던 스키야호즈(數寄屋坊主) 집안이었고, 예술·연예를 애호하던 에도의 문인적 취미가 집안에 남아 있었다.

도쿄부립 제3중학교를 졸업할 때는 성적우수자라는 상장을 받기도 했고, 덕분에 제1고등학교는 시험 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1910년부터 일본에서는 중학교 때의 성적 우수자에게는 고등학교 입학시 시험 없이도 입학을 허가하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제1고등학교 제1부 을류(乙類)에 입학한 류노스케의 동기 가운데는 기쿠치 간도 있었다. 2학년으로 오르면서 기숙사로 들어갔는데, 기숙사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는 못했지만 그곳에서 한 방을 쓰던 이가와 쿄(井川恭)와는 평생의 친구가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동경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이 당시 도쿄제국대학의 영문학과는 1학년 가운데 합격자가 불과 몇 사람밖에 나오지 않는 어려운 곳으로 유명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14년(다이쇼 3년) 2월에 고등학교 동창이던 기쿠치 간·구메 마사오(久米正雄) 등과 함께 동인지 『신사조(新思潮)』(제3차)을 간행하여, 우선 '야나가와 다카노스케(柳川隆之助)' 라는 필명으로 아나톨 프랑스의 「바르타자알」, 이에이트의 「봄의 심장」의 일역을 기고한 뒤, 10월에 『신사조』가 폐간될 때까지 그의 초기작 「노년」을 동잡지에 발표하는데, 이것이 그의 작가 활동의 시작이었다.

또한 이 해에 해외 특파원으로서 중화민국을 방문하였고,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는 후스를 만나 그와 검열의 문제에 대해서 토론하기도 했다. 7월에 귀국한 그는 「상해유기(上海遊記)」 등의 기행문을 지었다. 1922년(다이쇼 11년) 11월 8일에는 차남 다카시(多加志)가 태어났다. 그런데 중화민국을 방문한 1921년 이후로 아쿠타가와는 신경쇠약, 장카타르 등의 병을 얻는 등 점차 심신이 쇠약해지기 시작해, 1923년(다이쇼 12년)에는 유가와라마치(湯河原町)로 온천 치료를 떠나기도 했다. 작품수도 줄어들기 시작하여 이른바 '호키모노(保吉もの)' 등의 사소설적 경향의 작품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러한 흐름은 만년작 「톱니바퀴(원제: 歯車)」, 「갓파(河童)」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이 해에 일본을 강타했던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주동 세력인 자경단의 단원으로 활약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쿠타가와의 초기 작품에서는 서양의 문학을 일역한 것도 존재하며(「발타자알」등) 번역문학 특유의 논리적으로 정리된 간결하고 공정한 필치가 특징이다.

그는 주로 단편소설을 썼으며, 오늘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걸작으로 알려진 작품 또한 대부분 단편소설이다. 그런 반면에 장편은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다(미완성 소설로 「사종문邪宗門」이나 「노상」이 있다). 또한 생활과 예술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연주의류의 자기 고백에 대해서 알몸뚱이를 사람 앞에 내놓는 것과 같다고 하여 멀리하고 진실한 자기는 허구의 세계에서만 분명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삶과 예술을 분리한다는 이상으로 작품을 집필했다고 한다. 다른 작가보다 표현이나 시점이 생생하다. 말년엔 시가 나오야의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없다는 심경소설을 긍정하고 스토리성이 있던 자신의 문학을 완전히 부인하였다(그때의 작품이 신기루이다).

「두자춘」(杜子春) 등 고전을 참조한 것이나(원래 이야기는 태평광기에 실린 당대의 소설 『두자춘전』) 스즈키 미에키치(鈴木三重吉)가 창간한 『붉은 새』에 발표한 것과 같은 동화적인 작품도 많다. 일반적으로는 기독교물이나 헤이안 시대를 무대로 한 왕조물로 분류된다. 또한 고전(설화문학)에서 구상을 얻은 작품이 많은데, 「라쇼몽」이나 「코」, 「마죽」 등은 《곤자쿠 이야기집》을, 「지옥변」 등은 《우지슈이 이야기》에서 제재를 얻었다. 또한 아포리즘의 제작이나 한문에도 뛰어났다.

좌익, 반군부적인 자기 주장을 펼쳤고 실제로 그런 작품도 다수 발표하고 있는데, 군인의 계급 투쟁을 「유치원생 장난 같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혹평하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군부에서 저작물에 대한 검열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이 검열 때문에 정정되거나 가필, 삭제를 면치 못한 부분도 많다. 그러한 한편으로 해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호의를 품은 듯, 육군 유년학교 교관이던 도요시마 요시오(豊島与志雄)에게 「좋은 직장이 있다」며 해군 기관학교로 초정하여 도요시마가 프랑스어 촉탁 교관으로 근무하게도 주선하였다. 우치다 햣켄(内田百間)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추천으로 해군 독일어 촉탁 교관이 되었고, 훗날 우치다는 1934년(쇼와 9년)에 쓴 「죽장기」(竹杖記)에서 아쿠타가와가 자신의 강사직 알선 및 협상에 어느 정도 역할을 맡았던 것을 적고 있다.

작품에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등장시킬 때는 별명인 오히루메무치(大日孁貴)을 이용했는데, 이는 아마테라스라는 호칭이 당시 일본 천황가의 조상신이기도 했던 아마테라스를 그대로 글 속에 등장시키는 것이 되어 불경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었기에, 태양신, 그것도 자연신의 성격을 가진 신으로써 오히루메무치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담배를 몹시 좋아해서 하루 180개피씩 피웠다고 하며, 『바다 주변』, 『교토 일기』, 『겐가쿠 산보』에도 시키시마 종목의 담배가 등장한다.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당시 조선인을 학살한 자경단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무자비한 학살 첫날 밤 후 그 경험이 너무나도 잔인하고 공포스러워서 자경단 활동을 접었다고 한다.




#Article 39: 장국영 (116 words)


장국영(, , , 1956년 9월 12일 ~ 2003년 4월 1일)은 홍콩의 배우이자 가수이다.

하카계 출신으로, 홍콩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중화인민공화국 광둥성 메이저우 시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는 중산층 집안의 10남매중 막내로 태어나, 영국 북부의 리즈 대학교에서 섬유직물관리학을 공부했으나 결국 졸업하진 못했다. 홍콩으로 귀국후 우연히 나간 노래콘테스트에서 AMERICAN PIE를 불러 2위로 입상하여 데뷔하였다.

오우삼의 《영웅본색》에서 저우룬파(주윤발)과 함께 주연을 함으로써 이 영화의 인기와 함께 한국에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다음은 그의 앨범목록이다.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양성애자라고 커밍아웃했다. 22세 쯤에 여배우 모순균과 교제했었으며, 1981년 영화 Agency 24를 촬영하면서 만난 여배우 예시배(倪詩蓓)와도 2년 동안 교제한 바 있다

홍콩 경찰은 장국영이 24층에서 투신하여 자살하였다고 밝혔는데 여러가지 부분에서 논란이 있으며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장국영의 전 재산 460억을 상속받은 애인 당학덕(탕허더, 통혹딱)이 지목된다.




#Article 40: 통계학 (1208 words)


통계학(統計學, )은 산술적 방법을 기초로 하여, 주로 다량의 데이터를 관찰하고 정리 및 분석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이다. 근대 과학으로서의 통계학은 19세기 중반 벨기에의 케틀레가 독일의 국상학(國狀學, Staatenkunde, 넓은 의미의 국가학)과 영국의 정치 산술(Political Arithmetic, 정치 사회에 대한 수량적 연구 방법)을 자연과학의 확률 이론과 결합하여, 수립한 학문에서 발전되었다.

통계학은 관찰 및 조사로 얻을 수 있는 데이터로부터, 응용 수학의 기법을 이용해 수치상의 성질, 규칙성 또는 불규칙성을 찾아낸다. 통계적 기법은, 실험 계획, 데이터의 요약이나 해석을 실시하는데 있어서의 근거를 제공하는 학문이며, 폭넓은 분야에서 응용되어 실생활에 적용되고 있다. 통계학은 실증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실질적 활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흔히 순수수학과는 다소 구분되는 응용수학의 일종으로 여겨진다. 통계학의 방법을 통해, 실제의 수치들을 왜곡하여 해석하는 것을 막고 연구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통계학은 과학, 산업, 또는 사회의 문제에 적용되며 모집단을 연구하는 과정이 우선시된다. 모집단은 한나라 안에 사는 모든 사람 또는 크리스탈을 구성하는 모든 원자와 같이 일정한 특성을 지닌 집단이면 어느 것이든 가능하다. 통계학자들은 전체인구(인구조사를 하는 기업)에 대한 데이터를 편집한다. 이것은 정부의 통계관련 법률요약집같은 조직화된 방법으로 수행될 수도 있다. 기술통계학은 모집단의 데이터를 요약하는데 사용된다. 도수 및 비율 (경주 등) 범주 형 데이터를 설명하는 측면에서 더 유용할 동안 수치 기술자는 연속적인 데이터 유형 (소득 등)에 대한 평균과 표준 편차를 포함한다. 데이터 분석 방법 엄청난 자료가 연구되는 현대 사회에서 경제지표연구, 마케팅, 여론조사, 농업, 생명과학, 의료의 임상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는 통계는 단연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하고 실용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수리통계학은 수학의 방법을 통계학에 적용한 것이다. 통계학은 원래 국가에 대한 과학으로 생각되었는데 즉, 국가의 땅, 경제, 군력, 인구 등에 관한 사실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이었다. 사용되는 수학적 방법은 해석학, 선형 대수학, 확률분석, 미분 방정식과 측도 이론적 확률이론 등을 포함한다.

영어의 statistics(통계학, 통계)는 확률을 뜻하는 라틴어의 statisticus(확률) 또는 statisticum(상태), 이탈리아어의 statista(나라, 정치가) 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특히 국가라는 의미가 담긴 이탈리아 어 statista의 영향을 받아, 국가의 인력, 재력 등 국가적 자료를 비교 검토하는 학문을 의미하게 되었다. 근대에서의 통계학은 벨기에의 천문학자이자 사회학자이며 근대 통계학을 확립한 인물로 평가 받는 케틀레가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통계학자들로 구성된 9개의 회의를 소집한 것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수집되고 분류된 숫자 데이터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1829년부터이고, 약자로 stats가 처음 기록된 것은 1961년부터이다. 또, 통계학자의 의미인 statistician이 사용된 것은 1825년부터이다.

한자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통계(統計)라는 단어의 기원은 명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천황 초년에 걸쳐 양학자인 야나가와 슌친(柳川春三)이 현재의 의미로 이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고 여겨진다. 그가 1869년에 편찬한 책자에서 통계가 현재의 용법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후 1871년에는 대장성에 통계사(統計司)와 통계요(統計寮)가 설치되면서 통계라는 단어의 사용이 대중화되었다. 모집단과 관련해서 기호는 그리스문자를 사용하는것이 관례이다.

실험의 기본적인 형태는 어떤 변인이 다른 어떤 변인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조사대상을 기준으로하면 대상이 되는 통계 집단의 단위를 하나하나 전부 조사하는 관찰 방법인 전수조사(全數調査)와 모집단의 일부를 표본으로 추출하여 조사한 결과로써 모집단 전체의 성질을 추측하는 통계 조사 방법인 표본조사(標本調査)가 대표적인 조사 방법이다.

이러한 조사를 통해 자료를 수집할때에는 자료의 양질이 측정수준에 따라 분류된다.
자료의 측정수준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측정수준에 따라 통계에 이용해야 할 요약 통계량이나 통계 검정법이 다르게 된다.

조직적인 통계 조사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질문서를 만들어 선정된 가구에 배포하는 방식을 이용했다. 실험계획은 자료수집전에 미리 어떻게 실험할것인지 계획하여, 원하는 자료를 정확하게 수집하고 기록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다. 자료 수집의 규모와 대상, 할당 방법을 바르게 결정하고 정당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도록 검토한다. 설문지 작성법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설문지 작성은 실험계획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대개 별개의 실습을 통해 체득하여야 한다.
설문지는 앙케이트(Enquete)라고도 하며 통계 자료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들을 기록하는 하나의 서식이다. 이를 이용해 설문지 작성자, 응답자들의 객관적인 생각, 각자의 가치와 신념, 태도 등과 같은 여러 정보를 수집할 수있다. 설문지는 가능한 표준화 되도록 작성해야한다. 필요한 정보를 더욱 포괄적으로 획득하기 위해 설문지는 다섯 가지 요소 응답자에 대한 협조요청, 식별자료, 지시사항, 설문문항, 응답자의 분류를 위한 자료로 구성된다. 설문지는 여러 번 수정, 검토 과정을 거쳐야 의도한 자료의 수집이 가능하다. 설문지를 이용한 통계자료 수집은 비교적 비용이 적게들고 큰 표본에도 쉽게 적용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다른 자료수집 방법에 비해 무응답률이 높은 편이며 응답에 대한 보충설명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추론 통계는 기술통계로 어떤 모집단에서 구한 표본정보를 가지고 그 모집단의 특성 및 가능성 등을 추론해내는 통계적 방법이다. 보통 수집된 자료는 어떻게 분석해야 할지 미리 정해져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획득한 자료(모집단)을 가지고 여러 그래프를 그려보는 와중에 또다른 별개의 분석방법을 추가로 채택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모집단에 대한 전체적 조감을 해보고 또다른 분석방향을 모색해 보는 과정에 해당한다.
추론 통계는 바탕인 기술 통계량이 있어야 한다. 이 추론 통계를 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검사를 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대규모 집단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이 소수의 집단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추론 통계는 기술 통계량의 정확성을 유지하는 작업으로서 사용한다. 보통 일반적인 추론은 실험 결과가 기존의 방식, 또는 다른 품종간 비교 등에서 차이점이 유의한지를 검증하는 것이다.

기술(記述) 통계는 측정이나 실험에서 수집한 자료의 정리, 표현, 요약, 해석 등을 통해 자료의 특성을 규명하는 통계적 방법이다. 기술통계에는 분석방향에 따라 여러가지가 있다. 단순한 평균 분산 등의 상투적인 분석 이외에, 모집단에서 어떤인자들이 있는지 뽑아내보는 인자분석과, 특정표본이 어떤모집단에 속하는지(원 모집단을 어떻게 여러 집단으로 나눠야 하는지) 판단하는 판별분석, 두 인자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정준상관분석, 인자들의 숫자를 줄여 단순화 하는 주성분분석, 그 외 군집분석 등, 다양한 분석방법이 존재한다.

다양한 통계분석을 할 수 있고 사회과학, 의학 등 전 분야에서 다양하게 쓰이는 프로그램이나 계산 속도가 느려 큰 규모의 자료를 다루기에는 편리하지 않다.

통계학은 컴퓨터 과학, 프로그래밍 언어, 선형대수학, 해석학, 분포론, 수치해석, 확률론 등 여러 학문과 관련되어 있다.

통계학과 사회과학의 발전에 따라 회귀분석, 인과분석 등과 같은 평가모형들이 발전되고, 이들이 정책평가에 응용됨으로써 정책영향의 평가에 공헌을 하고 있으며, 아직도 계속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특히 정보화사회와 빅데이터 시대를 맞아 다양한 사회정보의 수집·분석·활용을 담당하는 새로운 직종으로 기업, 정당, 지방자치단체, 중앙정부 등 각종 단체의 시장조사 및 여론조사 등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조사를 수행하며 그 결과를 체계적으로 분석, 보고서를 작성하는 관련 학문이 필요하게 되어 사회조사분석학이 등장하게 된다.

사회조사분석사란 기업이나 정당, 지자체, 중앙정부 등 각종 단체가 필요로 하는 조사를 수행해 분석, 보고하는 전문 인력군이다. 주로 경영, 조사기획, 자료분석, 마케팅 분야에서 일하므로 조사방법론, 사회통계, SPSS 통계분석 실무 등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

현대에 들어와 데이터 과학자들로 구성된 통계 조직은 기관과 단체 그리고 기업의 수익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데이터를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결론을 얻어낸다. 미래를 예측해 더 나은 결과물을 처방한다. 수많은 데이터 가운데 의미 있는 데이터를 찾아냄으로써 더 나은 의사결정을 돕는 작업이 있는데 데이터 클리닝, 데이터 마이닝 등이다.

기업과 기관마다 부르는 이름은 다르지만, 생산·판매와 서비스 등 핵심 직무에서 영업력 개선과 사원 복지 등 전 영역에 걸쳐 이같은 데이터 과학 조직의 역할은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주요 데이터에 대한 분석과 통계가 이뤄지는 비즈니스인텔리전스(BI) 조직이라 부른다. 데이터 분석 조직을 운영하는 IT 조직은 시스템에서 나오는 각종 데이터를 분석해 기업의 핵심 영역에 가치를 더하는 조직으로 변모 중이다.

전사자원관리(ERP)고객관계관리(CRM)생산관리시스템(MES)경영 정보 시스템(MIS)전략적 기업 경영(SEM) 등 각종 시스템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데이터에 대한 분석능력이 미래를 예측하는 핵심 경쟁력인 시대, 이른바 `데이터 경영` 시대의 개막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시대를 ‘빅 데이터’ 기술의 시대라고 하는데 미국의 유명 경제 출판 및 미디어 기업인 포브스도 미래의 유망직업 중 하나로 '데이터 마이너(정보수집 분석가)'를 선정하기도 했다.

포브스에 의하면 빅 데이터(Big Data) 데이터 마이닝이란 기존 데이터베이스 관리도구의 데이터 수집·저장·관리·분석의 역량을 넘어서는 대량의 정형 또는 비정형 데이터 세트 및 이러한 데이터로부터 가치를 추출하고 결과를 분석하는 기술로되는 ‘빅 데이터’를 보완, 마케팅, 시청률조사, 경영 등으로부터 체계화해 분류, 예측, 연관분석 등의 데이터 마이닝을 거쳐 통계학적으로 결과를 도출해 내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2000년부터 정보통신부의 산하단체로 사단법인 한국BI데이터마이닝학회가 설립되어 데이터 마이닝에 관한 학술과 기술을 발전, 보급, 응용하고 있다. 또한 국내·외 통계분야에서 서서히 빅 데이터 활용에 대한 관심과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국가통계 업무를 계획하고 방대한 통계자료를 처리하는 국가기관인 통계청이 빅 데이터를 연구하고 활용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빅 데이터 연구회'를 발족하였다.
하지만 업계에 따르면, 미국과 영국, 일본 등 선진국들은 이미 빅 데이터를 다각적으로 분석해 조직의 전략방향을 제시하는 데이터과학자 양성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정부와 일부 기업이 데이터과학자 양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 중에 있어 아직 걸음마 단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Article 41: 컴퓨터 과학 (1113 words)


컴퓨터 과학() 또는 전산학은 전산 이론,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에 중점을 둔 정보과학의 한 분야이다. 정보 자체보다는 정보의 수집, 전달, 축적, 가공을 하는 도구로서의 기계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전산 및 그 응용기술에 대한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을 의미하며 전산 이론 및 시스템 설계를 다루는 전문가를 컴퓨터 과학자라 부른다.

컴퓨터 과학의 하위 분야는 컴퓨터 프로그램 실행의 실용적인 기술과 컴퓨터 시스템의 응용 그리고 순수하게 이론적인 분야로 나뉠 수 있다. 몇몇 계산 문제의 기본적인 속성을 공부하는 계산 복잡도 이론과 같은 것은 매우 추상적이고, 이것과 다른 컴퓨터 그래픽스는 그래픽카드가 메인보드의 신호를 받고, 모니터로 전송하는 것이다. 현실 세계 응용에 중점을 둔다. 또 다른 하위 분야는 계산 실행에 중점을 둔다.
예를 들어, 프로그래밍 언어 이론은 계산 서술의 접근을 공부하고, 컴퓨터 프로그래밍 학문 그 자체는 프로그래밍 언어와 복잡한 시스템 사용의 다양한 측면을 조사하고, 인간-컴퓨터 상호작용은 컴퓨터와 계산을 유용하고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접근이 쉽게 만드는 데 중점을 둔다.

컴퓨터 과학은 정보 및 전산의 이론적 기초와 그것의 구현 및 응용을 위한 실용적인 기술을 다룬다.

이 말은 새크먼(H. Sackman)에 의하면 '컴퓨터 과학이란 수학·논리학·언어분석·프로그래밍·컴퓨터디자인·정보시스템·시스템스 엔지니어링 등의 공헌과 컴퓨터 개발과 이것의 응용에 관한 이론적·응용적인 훈련교육(訓練敎育)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걸친 연구분야이다'라고 정의한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컴퓨터에 상관되는 모든 활동은 '컴퓨터 과학'이라고 하는 인터디시플리너리(interdisciplinary)한 연구영역을 형성하고, 급속한 발전을 가져온 것이라 하고, 1964년에 애치슨(W. H. Atchison) 및 햄블렌(G.W. Hamblen) 등이 개발한 상관영역도(相關領域圖)를 소개하였다. 컴퓨터 과학이라는 하나의 체계의 학문적 인정은 별문제로 하고 그것이 나날이 기성과학에의 참획(參劃), 공헌을 확대하여 인터디스플리너리한 특질을 급속히 변화시키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애치슨 및 햄블렌은 '컴퓨터 과학'에 대해서 미국·캐나다·멕시코의 93개 대학을 대상으로 해서 앙케트 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로서 거의 모든 대학이 '정보과학'이나 '시스템 엔지니어링'보다 '컴퓨터 과학'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1965년 미국의 컴퓨팅기기협회(Association of Computer Machinery)는 이 협회가 조직한 컴퓨터 과학에 관한 커리큘렴(curriculum) 위원회의 권고서(勸告書)를 공개하고 컴퓨터 과학이 단지 컴퓨팅 디바이스나 수치계산의 기술(art)이 아니고, 물리학이 에너지에 관련되는 것과 같은 의의 이상으로 정보문제를 보다 광의(廣義)로 다루는 과학체계임을 논증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 1965년 9월에 캐나다의 서(西)온트리오 대학이 주최한 '시스템과 컴퓨터 과학 콘퍼런스'가 열렸다. 여기서 캐나다의 모든 대학에서의 컴퓨터 과학교육의 방향을 설정하는 토론이 있었고, 새로운 과학의 정의를 비롯해서 경계영역·교수방법 등의 연구·개발결과가 발표되었다. 그 성과의 일단으로서 컴퓨터 과학이 수치분석·응용통계·OR·데이터 처리 등의 여러 영역에 있어서 순수연구보다는 오히려 응용과학으로서의 프레임워크제에 서서의 설정을 목표로 하는 것이 명백해졌다. 또 이러한 전제에서 정보과학(information science)과 컴퓨터 과학의 상관성(相關性)에 관한 이론적 분석, 또는 컴퓨터 연구에 있어서의 이론과 응용간의 불균형 문제가 논구되었다. 이 콘퍼런스는 세계적으로 최초의 시도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캐나다의 대학교육에서 '컴퓨터 과학'의 커리큘럼에의 편입은 다른 나라에 앞서는 것으로 보인다.

컴퓨터가 미국의 산업 사회에서도 불가결한 존재로서 실제로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컴퓨터 과학'의 본질에 관한 학계의 논쟁은 아직도 활발하다. 이러한 논쟁과는 별도로 '컴퓨터 과학'에 관한 출판물은 그 정의(定義) 확립 이전에 많이 나와 있고, 이 현상은 MIS의 경우와 많은 유사점을 지닌다고 하겠다. 맥그로 힐(McGraw－Hill Book Co.)의 '컴퓨터 과학 문헌 안내'를 비롯해서 각 출판사가 컴퓨터 과학도서의 선전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컴퓨터 과학'이라는 학문체계가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 본질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점이 거론된다.

컴퓨터 과학의 역사는 현대의 디지털 컴퓨터의 역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주판과 같이 계산을 수행하는 기계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1623년에는 최초의 계산기계가 만들어졌고, 찰스 배비지는 19세기 초에 차분기관을 만들었다. 1900년대에 들어서 IBM사가 펀치카드 시스템(PCS)을 개발하여 회계에 관련된 일을 하도록 보급하였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주어진 한 가지의 일만 수행할 수 있었다.

컴퓨터는 이제 '컴퓨터 만능'으로까지 지칭될 만큼 시대의 총아이며 미래의 청사진이기도 하다. 이미 독립적인 사고능력을 가진 컴퓨터가 나타나고 있는데, 미국의 경우에는 일리노이대학에서 컴퓨터와 인간간의 대화에 의해서 학습을 진행하는CAI(Computer Aidedinstrucion) 시스템이 시도되고 있다. 특히 미국은 정부 민간기업체 차원에서 컴퓨터 과학연구개발을 위해 대학 또는 민간연구단체에 막대한 재정지원과 프로젝트를 추천해 오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의 학계에서 커리큘럼 속에 인터디시플리너리적 과학으로서의 컴퓨터 과학 강좌를 설치할 것을 검토하였으며, 컴퓨터 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대학의 역할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이 몇 해 동안에 유명한 대학의 경영대학원에서 컴퓨터 강좌를 병설하는 곳이 증가하고 있다. 또한 많은 컴퓨터 사이언스 담당교수가 있다고 한다. 예컨대 사이먼(H.A. Simon) 교수는 1966년 이후 컴퓨터 사이언스 심리학담당 교수로 활약하고 있다. 또한 OR의 세계적 권위자이며 파이어니어인 스탠포드대학의 단치히(G.H. Dantzig) 박사도 컴퓨터 사이언스를 강의하고 있다. 경영과학(managment science)의 여러 기법(技法)과 컴퓨터와의 연동(連動)을 전제로 한 문제해결법(problem solving)의 발전이 컴퓨터 효과의 증대에 기여할 가능성을 크게 나타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컴퓨터 과학'의 침투가 늦어지고 있는 이유로서는 ① 경영과학의 응용성의 결여, ② 인터디시플리너리한 어프로치에 있어서의 통합이론(統合理論), 또는 기술상의 미(未)발달 등을 들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경영관리의 환경 적응성의 이론적 프레임워크의 설정 곤란, 교육시스템의 개발 지체에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고려함에 있어 정보과학 또는 MIS의 발달과정을 정사(精査)하는 것도 중요하다. 즉 MIS의 조속한 이용을 기대한 경영자의 실망에 비추어 보아 컴퓨터 사이언스에 대한 의문이나 재고(再考)의식이 나온 것도 부정할 수 있다. 컴퓨터 과학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해졌지만, 그 전체로서 컴퓨터 과학이 경영관리의 혁신에 있어서 진실로 가치 있는 과학체계임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캐나다의 컴퓨터 교육의 발전을 논하기 이전에 미국에서의 논쟁을 추적함으로써 그 본질과 방향에 대해 고찰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 되겠다.

컴퓨터 과학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컴퓨터라는 기계에 대한 학문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유명한 컴퓨터 과학자 에츠허르 데이크스트라는 컴퓨터 과학에서 컴퓨터란, 천문학에서 망원경 이상의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컴퓨터 시스템을 디자인하고 보급하는 것은 컴퓨터 과학의 범주내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예를 들면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연구하는 분야는 컴퓨터 공학으로 불리고, 컴퓨터의 보급과 사용에 관한 연구는 정보 기술 또는 정보 시스템의 분야에 속한다. 하지만, 컴퓨터와 연관된 이러한 분야들은 컴퓨터 과학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해왔다. 컴퓨터 과학 연구는 인공지능, 인지 과학, 물리학, 그리고 언어학과 같은 학문과 공생한다.

많은 과학 분야와 비슷하게 컴퓨터 과학도 수학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수학에 기초를 둔 과학의 한 분야이다. 컴퓨터 과학의 기초에 큰 영향을 미친 수학이 조지 불의 불 대수이다. 불 대수는 이진법을 기반으로 한 대수학으로, 그 외에 체론과 환론 또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초기의 컴퓨터 과학은 쿠르트 괴델과 앨런 튜링 등의 수학자들이 큰 영향을 끼쳤고, 수리논리학, 범주론, 도메인 이론, 대수학과 같은 수학 분류들은 컴퓨터 과학과 함께 발전하고 있다.

스탠 켈리-부틀은 과학과 컴퓨터 과학의 관계는 유체동력학과 납공업의 관계와 같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컴퓨터 과학이 과학의 특성을 충분히 갖지 않는다는 오해에 기인한다. 

컴퓨터 과학과 소프트웨어 공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컴퓨터 과학과 소프트웨어 공학의 용어 정의가 많은 사람들에게 다소 모호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공학은 컴퓨터 과학의 한 분야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소프트웨어 공학은 다른 분야에 대한 응용이나 자원을 운용하는 방법 등 실용적인 특징에서 컴퓨터 과학의 다른 분야와 잘 구분된다.

사이먼은 컴퓨터와 사상의 관계에 대해서 '컴퓨터가 인간의 이미지에 따라서 조직되는 것이라면, 컴퓨터는 명백히 인간행동에 대한 택일적(擇一的) 조직상(組織上)의 가설에서 생기는 결과를 개발하는 기기(機器)이다'라고 말하고, 인간행동의 깊은 이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컴퓨터 시뮬레이션(computer simulation)의 중요한 역할과 의의를 밝히고 있다. 이 뜻을 경영관리의 향상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할 경우, 맨머신 시스템(man-machine system)의 원의(原義)가 밝혀질 것으로 생각되지만, 컴퓨터의 본질과 적용분야의 과학적 추구를 적극화하고, 컴퓨터에 대한 투자의 최적 효과의 창출에 체계적으로 노력함이 경영관리의 도전적 과제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 이와 같은 방향설정이 긍정된다면, 경영교육 커리큘럼 편성에 있어서의 '컴퓨터 과학'의 위치 설정도 명백해질 것으로 생각되지만, 교육기간은 말할 것도 없고, 기업조직에서 과학으로서의 컴퓨터 사고(思考)는 가속적(加速的) 보편화를 이룰 것이 명확하다. 경영관리에 대한 컴퓨터의 임팩트(impact)의 본질적 이해와 대응책도 컴퓨터의 과학적 추구에 크게 의존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함과 동시에 '컴퓨터 과학'이 경영학 혁신의 에이전트(agent)적 기능을 다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컴퓨터 과학은 그 이론의 적용법에 따라 여러 분야로 나뉜다. 일반적인 분류는 다음과 같다.




#Article 42: 위키백과 (1738 words)


위키백과(위키百科, ) 또는 위키피디아(, )는 누구나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다언어판 인터넷 백과사전이다. 2001년 1월 15일 지미 웨일스와 래리 생어가 시작하였으며, 대표적인 집단 지성의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위키백과는 자유 저작물을 보유하고 상업적인 광고가 없으며 주로 기부금을 통해 지원을 받는 비영리 단체인 위키미디어 재단에 의해 소유되고 지원을 받고 있다. 2020년 기준으로 영어판 600만여 개, 한국어판 개를 비롯하여 300여 언어판을 합하면 4천만 개 이상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위키백과의 저작권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CL)와 GNU 자유 문서(GFDL)의 2중 라이선스를 따른다. 두 라이선스 모두 자유 콘텐츠를 위한 것으로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사용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위키백과 이전에도 온라인 백과사전을 운영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위키백과 영어판은 전문가들이 작성했던 백과사전인 누피디아(지금은 없어짐)에서 비롯하였다. 누피디아는 웹 포털 회사인 보미스가 2000년 3월 9일 개시하였다. 보미스의 CEO였던 지미 웨일스와 편집장 래리 생어는 누피디아의 글들을 오픈 콘텐츠로 제시하기로 하였고 리처드 스톨먼이 주도한 GNU 자유 문서 라이선스로 제공하였다. 누피디아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고, 지미 웨일스와 래리 생어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백과사전으로 위키백과를 개설하였다. 생어는 모두의 백과사전이라는 목표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이름에 위키를 넣었다. 2001년 1월 10일, 생어는 누피디어 메일링 리스트를 통해 누피디아 프로젝트를 보완하기 위해 위키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위키백과는 2001년 1월 15일 서비스를 개시하였다. 도메인은 www.wikipedia.com을 사용하였고 사용 언어는 영어 하나뿐이었다. 래리 생어는 위키백과의 출범 소식 역시 누피디아 메일링 리스트를 통하여 알렸다. 위키백과가 시작한지 한 달 안에  정책이 수립되었다. 이후 몇 가지 정책이 수립되면서 위키백과는 누피디아와는 별개인 서비스가 되었다. 애초에 보미스는 위키백과를 영리 목적으로 운영하려고 하였다.

위키백과의 초기 편집자들은 누피디아, 슬래시닷, 그리고 웹 검색 엔진을 통해 유입되었다. 2001년 8월 8일 위키백과의 문서수는 약 8,000개가 되었다. 2001년 말이 되자 위키백과는 18개 언어판으로 늘었고, 문서 수는 2만여 개까지 늘어났다. 위키백과를 서비스 하는 언어는 2002년 말에는 26개, 2003년 말에는 46개, 2004년 말에는 161개로 늘어났다. 누피디아는 위키백과와 병립하여 운영되다가 컨텐츠를 위키백과로 넘기고 2003년 서버를 다운시켜 마감하였다.

영어 위키백과의 증대 속도는 2007년 초 정점을 찍었고, 2009년 8월 3백만 문서를 넘겼다. 위키백과 전체의 문서수는 2006년 가장 빠르게 늘어 매일 약 1,800 개의 문서가 새로 생겨났다. 그 뒤로 문서 증가 속도는 둔화되어 2013년의 경우 연평균으로 보았을 때 매일 약 800개의 문서가 새로 생겨났다. 위키백과의 성장 둔화 원인에 대해 팰로앨토 연구소는 프로젝트의 품질이 고급화되면서 변화에 대한 저항이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성장 둔화에 대한 다른 분석으로는 낮은 가지에 달린 열매처럼 주제나 가치가 분명하여 쉽게 만들 수 있는 문서는 이미 다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위키백과의 문서 수는 2016년 12월 31일 기준으로 영어 위키백과 5백3십만 개 이상, 스웨덴어 위키백과와 세부아노어 위키백과가 3백7십만 개 이상, 독일어 위키백과 2백만 개 이상, 네덜란드어 위키백과와 프랑스어 위키백과가 1백8십만 개 이상 등의 순위를 보이고 있으며, 운영중인 295개의 모든 언어를 합하면 약 4천3백3십만 개 이상이 된다.

위키백과의 가장 큰 특징은 누구나 편집과 관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글을 고칠 수 있는 체계인 위키로 만들어져 있어 집단 지성적 특성을 가진다. 개방성은 위키백과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로, 원칙적으로 사용자들은 누구든 거의 모든 문서를 새로 만들고 수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강점은 동시에 악의적인 문서의 훼손이나 부정확한 내용의 수록에 취약하다는 약점이 되기도 한다. 위키백과 커뮤니티는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편집 규칙을 정하고 일부 문서에 대한 생성과 편집을 규제하고 있다. 2009년 이후 여러 언어마다 위키백과 편집에 대한 커뮤니티의 규제가 강화되었다. 영어 위키백과는 대중적 관심이 높은 문서에 대한 편집을 위해서는 로그인이 필요하도록 하였고, 독일어 위키백과는 모든 문서에 대해 로그인 된 사용자만이 편집할 수 있도록 하였다.

과도한 편집 규제는 위키백과 성장의 걸림돌이라는 지적이 있고, 위키백과 커뮤니티 내에서도 은  가운데 하나로 새로운 사용자를 포용하기 위해서라도 지켜져야 한다는 의견들이 있다.

한편, 위키백과 커뮤니티 내에 존재하는 편향으로 인해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집단에 대한 개방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2014년 8월 게이머게이트 논쟁에서 영어 위키백과의 가 내린 5명의 여성주의 운동가 차단 결정은 위키백과의 개방성에 대한 많은 논란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위키백과의 문서들은 끊임없이 누군가에 의해 수정된다. 위키백과의 편집 시스템인 미디어위키는 다양한 방법으로 문서의 수정 사항을 사용자에게 알려주어 검토할 수 있도록 한다. 사용자는 문서의 역사를 확인하여 누가 언제 어떤 내용을 수정했는 지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변경 내용이 악의적인 문서 훼손이라면 사용자는 이를 손쉽게 되돌릴 수 있다. 또한 사용자는 시스템이 제공하는 최근 바뀜과 주시문서 목록 등의 기능을 통해 문서의 변경 사항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기능들은 위키백과가 으로부터 문서 훼손을 보호할 수 있도록 돕는다.

위키백과는 시작과 함께 문서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 따라다녔다. 누군가 보다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사용자의 편집을 검토하고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늘 있다. 위키백과의 공동창립자인 래리 생어는 결국 이 문제로 인해 위키백과를 떠나 전문가의 검토를 거치는 시티즌디움을 창립하였다. 위키백과 역시 몇 차례의 명백한 오류와 특정 집단의 의도적인 개입으로 완전한 개방 정책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USA 투데이》의 편집장을 역임했던 존 시겐설러가 존 F. 케네디의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거짓 정보가 위키백과에 올라온 사례는 오랫동안 위키백과 문서의 오류에 대한 사례로 거론되었고, 2016년 1월에는 스위스의 정보 기관 공무원이 수년에 걸쳐 약 5,500 건에 달하는 문서를 악의적으로 편집하였다가 아이피가 차단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위키백과의 문서 품질은 사용자들의 지속적인 수정과 검토에 의해서 유지되고 향상된다. 2003년 안드레 시포릴리는 위키백과 컨텐츠의 유지는 파괴적 활동보다 창조적 활동량이 훨씬 많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러나, 교묘한 거짓 정보는 매우 오랫동안 검토되지 못하고 남아있기도 한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2005년 1월 31일 등재된 연쇄 강간범 잭 로비쇼라는 문서가 완전히 허구의 인물을 서술한 것이라는 것을 2015년이 되어서야 발견한 일도 있었다. 이 문서는 2015년 9월 3일 삭제되었다.

위키백과의 컨텐츠는 사용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용자간의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 위키백과는 과 같은 커뮤니티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위키백과의 모든 문서에는 토론 탭이 있어서 사용자들 사이에 문서 개선을 위한 토론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다.

위키백과 사용자들은 와 같은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관심사를 공유하기도 한다. 위키백과를 운영하고 있는 위키미디어 재단은 매년 세계적인 컨퍼런스인 위키마니아 행사를 갖고 있다. 2016년 위키마니아는 이탈리아의 에시노라리오에서 열렸다. 위키마니아에서는 위키백과뿐만 아니라 위키미디어 재단이 운영하고 있는 위키미디어 공용, 위키데이터, 위키책, 위키문헌, 위키낱말사전과 같은 여러 자매 프로젝트의 주요 관심사도 함께 논의된다. 위키미디어 재단은 이들 여러 프로젝트의 활성화를 위해 세계 각지의 지부나 사용자 모임을 지원하는 사업도 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가 자발적 사용자 모임으로 활동중이다. 한국위키미디어협회는 2016년 1월 15일 위키백과 15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위키백과 커뮤니티는 종종 컬트 문화적인 것으로 묘사되지만, 그것이 늘 부정적인 면을 부각하는 것은 아니다. 위키백과 사용자들은 훌륭한 활동에 대해 를 부여하여 서로의 동기 유발을 하기도 한다.

위키백과는 사용자의 익명성을 보장한다. 다중이 익명으로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커뮤니티가 활력을 띄면 정보의 질은 꾸준히 향상된다. 위키백과의 이러한 작업 방식은 크라우드 소싱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분야에서도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위키백과에 정보를 추가하는 사람들은 전체 사용자 가운데 극히 소수라는 연구가 있고, 로그인 하지 않은 사용자에 대해서는 위키백과 커뮤니티가 이등시민 취급을 한다는 비판도 있다. 다트머스 대학교 연구진은 이를 검증하기 위한 2007년 연구에서 로그인 하지 않은 익명의 편집자나 기여 횟수가 적은 편집자의 활동 역시 로그인 사용자와 동등한 신뢰성을 보인다고 밝혔다. 2009년 《비지니스 인사이더》의 편집인 헨리 블라젯은 위키백과 문서에 대한 표집 조사 결과 대다수의 문서가 아웃사이더에 의해 생성된 뒤 인사이더에 의해 완성된다고 분석하였다.

몇몇 언어의 위키백과 커뮤니티는 자체적으로 문서들을 엮어서 출판물을 제작하기도 하는데, 독일어 위키백과의 경우 독일어 위키백과의 문서를 모아 2004년에 CD로, 2005년, 2006년에는 DVD와 책으로 제작하였다.

위키백과의 내용은 처음에는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 아래 배포되었으나 2009년 6월, 로 변경되었다.

위키백과는 특별한 위계가 없는 사용자들의 집단 활동이라는 점에서 아나키즘의 요소를 갖는 민주주의 체계로 평가되기도 한다. 위키백과 내의 모든 문서는 직접 내용 편집에 참여한 사용자를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위키백과의 이러한 은 커뮤니티가 공동으로 소유하는 가치에 대한 사적 이익 추구를 억제함으로써 공유지의 비극을 방지하고자 만들어졌다.

위키백과의 관리는 의 정신과 이를 구현하기 위한 에 따라 이루어진다. 정책과 지침은 커뮤니티의 에 의해 수립되거나 수정된다. 총의의 개념은 2005년 찰스 메튜의 위키미디어 메일링 리스트 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단순한 만장일치가 아닌 현시점에서 커뮤니티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타협이다. 위키백과의 커뮤니티는 각각의 언어마다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판마다 총의는 다를 수 있다. 위키백과 초창기 가장 큰 논란은 문서의 중립성 확보였고, 이에 따라 위키백과가 시작된지 한 달 만에 이 정책으로 지정되었다. 한국어 위키백과 역시 2004년 중립적 시각 정책을 도입하였다. 문서와 커뮤니티의 성장에 따라 지침이 필요한 다양한 사안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위키백과의 정책과 지침 역시 이에 대응할 수 있도록 다양하게 늘어났다.

위키백과 사용자들 사이의 논쟁 또는 분쟁은 모두 위키백과 커뮤니티 안에서 해결된다. 사용자들 사이의 문제는 서로간의 토론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문서의 훼손이나 악의적인 행위 등으로부터 선의의 편집 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도 필요하다. 문서를 삭제하거나 악의적인 사용자를 차단하는 것과 같은 활동은 커뮤니티 안에서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고 평가받아 로 선출 된 사용자가 실행한다. 한편 사용자 사이의 논쟁은 와 같은 기구를 통해 상호 조정을 이루기도 한다.

위키백과는 위키미디어 재단이 운영하는 위키미디어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이다. 위키미디어 프로젝트에는 위키백과 외에도 위키낱말사전, 위키책, 위키미디어 공용, 위키문헌, 위키인용집, 위키데이터 등이 있다. 모든 위키미디어 프로젝트는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용자들의 커뮤니티에 의해 운영되며 위키미디어 재단은 이들 프로젝트의 유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관리, 사용자 커뮤니티에 대한 지원과 같은 일들을 담당한다.

위키미디어 재단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비영리 기구로 위키백과를 비롯한 위키미디어 프로젝트의 유지를 위한 기금을 조성하고 호스팅하고 있다. 위키백과가 시작된 지 2년 후인 2003년 6월 20일 플로리다 주 법인으로 설립되었으며 2007년 본부를 샌프란시코로 이전하였다. 2013년 귀속분 국세청 신고서에 따르면 재단의 기금 수익은 3천9백7십만 달러이고 지출된 경비는 2천9백만 달러이다. 또한 총 자산은 3천7백2십만 달러로 이 가운데 부채는 230만 달러이다.

위키백과의 운영 프로그램은 미디어위키이다. 오픈 소스로 배포되는 자유 소프트웨어인 미디어위키는 PHP 기반의 위키 소프트웨어로 MySQL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한다. 위키백과 초기에는 펄로 작성된 유스모드위키를 사용하였으나 2002년 1월에 마그누스 만스커가 개발한 PHP와 MySQL 기반의 위키가 도입되었고, 다시 2002년 7월 리 다니엘 크로커가 개발한 미디어위키를 3세대 소프트웨어로 도입하였다. 미디어위키는 이후로도 여러차례 업데이트 되어 위키백과를 비롯한 여러 위키미디어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소프트웨어가 되었다.

위키백과는 낮 시간을 기준으로 1초에 25,000~60,000페이지 요청을 수신한다. 페이지 요청은 먼저 스퀴드 캐시 서버의 프론트엔드 계층으로 내보낸다. 스퀴드 캐시가 처리할 수 없는 요청은 리눅스 가상 서버 소프트웨어를 실행하고 있는 부하 제어 서버로 내보낸다. 즉, 데이터베이스로부터 렌더링한 페이지를 보여 주기 위해 아파치 웹 서버들 가운데 하나로 요청을 내보낸다는 뜻이다. 웹 서버는 요청한 페이지를 전달하여 모든 언어판의 위키백과에 대한 페이지 렌더링을 수행한다. 속도를 더 빠르게 하기 위해 렌더링 된 페이지는 만료될 때까지 분산 메모리 캐시에 캐시 처리되며 이로써 대부분의 동일한 페이지 접근을 위해 페이지 렌더링을 완전히 생략할 수 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위키백과의 서버는 주로 우분투로 이루어진 리눅스 서버들의 컴퓨터 클러스터로 운영되고 있다. 2009년을 기준으로 위키미디어 재단은 미국 플로리다주에 300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44대의 서버를 운영하였다. 2013년 1월 22일 위키백과는 중요 데이터를 미국의 데이터 센터 공기업인 에퀴닉스로 이전하였다.

위키백과에서는 단순 반복적인 활동을 위해 봇으로 불리는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봇은 자주 혼동되는 오탈자를 바로잡거나 자동으로 생성될 수 있는 반복적인 문구의 삽입과 같은 일을 담당한다. 봇 역시 위키백과 커뮤니티의 사용자들이 작성하여 운영하며 잘못된 사용을 막기 위해 별도의 등록 절차를 거친다.

위키백과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편집자의 시각에 따라 누군가 악의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입력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잘못된 정보가 퍼져나갈 수 있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어 왔다. 예를 들어 2005년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존 시겐설러라는 미국의 전직 언론인이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에 관여했다는 잘못된 정보가 올려져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으며, 한 익명 사용자가 신바드라는 미국의 코미디언이 사망했다는 거짓 정보를 올려 인터넷 전반에 잘못된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또한 위키백과는 미국 내의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자유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로 인해 컨서버피디아가 2006년에 개설되었다.

미 연구팀에 의하면, 영어판 위키백과에 등록된 문서 중 회사 관련 내용의 약60% 정도가 잘못된 사실을 담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연구팀의 교수는 이를 특정 회사들이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위키백과에 회사에 유리한 내용을 삽입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Article 43: 광자 (229 words)


광자(光子, photon) 또는 빛알은 기본입자의 일종으로, 가시광선을 포함한 모든 전자기파를 구성하는 양자이자 전자기력의 매개입자이다. 기호는 그리스 문자 이다. 전자기력의 효과는 미시적, 거시적인 수준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데, 광자가 질량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장거리에서의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다른 기본입자들과 같이 광자는 양자역학과 입자-파동 이중성 이론을 통해 가장 잘 설명된다. 하나의 현상임에도 파동과 양자라는 두 가지 관측 가능한 모습을 가진 광자의 진짜 성질은 어떤 역학적 모델로도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빛의 이중성의 묘사, 전자기파에서의 에너지의 위상을 파악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전자기파의 양자의 위치는 공간적으로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광자 한 개의 에너지는 플랑크 상수()에 빛의 진동수()를 곱한 값, 즉  이고, 운동량은 (는 광속)이다.

아이작 뉴턴은 빛이 입자로 이뤄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고전적인 입자론은 빛의 파동적인 성질, 특히 간섭을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18세기에 와서는 이중 슬릿 실험을 설명할 수 있는 토머스 영의 파동설이 우세하였고, 제임스 맥스웰의 고전전자기학의 완성으로 파동설은 정설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와서 고전적인 파동설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자외선 파탄이 그중 한 예인데, 이에 따르면 열적 평형에 있고 유한한 온도를 가진 고전적 흑체는 무한한 양의 전자기파를 방출하여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막스 플랑크는 전자기파가 양자화 되었다는 가설을 도입하였다 (1901). 그러나 그는 실제로 빛이 입자로 구성되었다기보다는, 어떤 알 수 없는 현상에 의해 파동의 에너지가 양자화 되었다고 해석하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힐베르트의 가설에서 시작하여, 빛이 실제로 입자로 구성되었다고 가정하면서 광전효과를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였다 (1905). 이후 양자역학의 발전과 양자전기역학의 도입으로, 빛이 양자화되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빨간색의 광자에너지는  



#Article 44: 보손 (216 words)


보손()는 스핀이 정수고, 보스-아인슈타인 통계를 따르는 매개 입자다. 인도의 물리학자 사티엔드라 나트 보스의 이름을 땄다. 페르미온의 반대말이다. 모든 입자는 스핀이 정수이거나 반정수이다. 스핀-통계 법칙에 따라 (유령입자나 애니온 따위의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 전자(前者)의 경우는 보스-아인슈타인 통계를 따르고, 후자는 페르미-디랙 통계를 따른다. 전자를 보손, 후자를 페르미온이라고 부른다. 보손은 보스-아인슈타인 통계를 따르므로, 파울리 배타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 즉, 여러 입자가 동일한 상태에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광자는 스핀이 1인 보손이다. 따라서, 들어온 빛을 완전히 흡수하는 흑체가 복사하는 전자기파의 파장 분포는 보스 통계를 따른다. 또 응집물질물리에 나오는 준입자 포논도 보스 통계를 따른다.

현재 알려진 기본 입자 가운데 보손은 다음과 같다.

초대칭이나 각종 대통일 이론 등, 표준 모형을 확장하는 모형들은 대부분 추가 보손을 예측하나, 이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짝수개의 페르미온으로 구성된 합성 보손이 구성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간자는 쿼크와 반쿼크로 구성된 합성 보손이다. 이 밖에도, 보손들로도 합성 보손이 구성될 수 있다.

양자장론의 스핀-통계 정리에 따라, 로런츠 대칭이 깨지지 않는 이상 모든 보손은 항상 정수의 스핀을 갖는다. 즉, 가능한 스핀은 0, 1,  2, … 따위다. 기본 보손의 경우, 와인버그-위튼 정리에 따라 보통 0, 1, 2만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며, 스핀 2인 입자는 중력자, 스핀 1인 입자는 벡터 보손, 스핀 0인 입자는 스칼라 보손으로 불린다.

페르미온과 달리, 보손은 파울리 배타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 즉, 한 양자 상태에 임의의 수의 보손이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보손은 낮은 온도에서 보스-아인슈타인 응축 등의 특이한 성질을 보인다.




#Article 45: 디리클레 합성곱 (253 words)


디리클레 합성곱(Dirichlet convolution) 혹은 디리클레 포갬은 수론적 함수(arithmetic function)의 집합에서 정의되는 이항연산(binary operation)으로, 수론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독일 수학자 르죈 디리클레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f, g가 수론적 함수 (즉, 자연수에서 복소수로의 함수)일 때, f, g의 디리클레 포갬 f * g는 다음과 같이 정의되는 수론적 함수이다.

여기서 덧셈은 n의 모든 양의 약수 d에 대해 이루어진다.

이 연산의 일반적인 성질을 몇가지 나열해 보면:

덧셈과 디리클레 포갬으로 수론적 함수의 전체집합은 epsilon;을 곱셈에 대한 항등원으로 하는 가환환(commutative ring)을 이루고, 이를 디리클레 환(dirichlet ring)이라 부른다. 이 환의 unit은 f(1) ne; 0 을 만족하는 f들이다.

나아가, 곱셈적 함수의 집합은 디리클레 포갬과 epsilon;을 항등원으로 하는 가환군(abelian group)을 이룬다. 

곱셈적 함수에서 몇가지 중요한 곱셈적 함수들간의 포갬에의한 관계식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주어진 수론적 함수 에 대해 디리클레 합성곱을 연산으로 하는 역원 이 존재한다. 이 역원을 계산하는 계산식은 다음과 같다. 맨 첫 번째 항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일 경우는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모든 에 대해 1 인 수론적 함수의 역원은 뫼비우스 함수가 된다. 더 일반적인 관계는 뫼비우스 반전 공식에 의해 유도된다.

f가 수론적 함수이면, L-급수(L-series)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급수가 수렴하는 복소수 s에 대해,

L-급수의 곱은 디리클레 포갬과 다음 관계가 있다.
좌변이 존재하는 모든 s에 대해,

위 관계식은 L-급수를 푸리에 변환과 비교해 보면, 포갬 정리(convolution theorem)과 긴밀하다.

물론 수론적 함수는 연속함수가 아니므로 통상적인 의미로서의 미분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산술함수에서 따로 미분을 정의하여 디리클레 합성과 연계하여 사용한다.

주어진 산술함수 의 미분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여기서 물론 는 망골트 함수(Mangoldt function)이다.

예를 들어, 모든 에 대해 1 인 수론적 함수 이 있다고 할 때, 관계식  때문에 다음이 성립한다

위와 같이 미분을 정의할 경우 다음과 같은 성질들이 성립한다.




#Article 46: 동치관계 (115 words)


수학에서, 동치관계(同値關係, )는 논리적 동치와 비슷한 성질들을 만족시키는 이항관계이다.

집합  위의 동치관계 는 반사관계이자 대칭관계이자 추이관계인 이항관계이다. 즉, 다음 조건들이 성립하여야 한다.

집합  위에 동치관계 이 주어졌을 때, 원소 의, 동치관계 에 대한 동치류(同値類, ) 는 그 원소와 동치인 원소들의 집합이다 즉,

집합 의 에 대한 몫집합(-集合, ) 은 에 대한 동치류들의 집합이다. 즉,

집합 위의 동치관계로부터, 표준사상을 구성할 수 있다. 즉, 집합  위의 동치관계 에 대하여, 함수

를 표준사상이라고 한다.

반대로, 전사함수 에 대하여, 이항관계

는 동치관계이며, 그 몫집합은

이다.

집합 위의 동치관계와 그 집합의 분할 사이에는 자연적인 일대일 대응이 존재한다. 즉, 다음과 같다.

집합  위의 동치관계 에 대하여, 그 몫집합 은 의 분할이다. 즉,

반대로, 집합 의 분할 에 대하여, 이항관계

는 동치관계이다.




#Article 47: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240 words)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自然哲學- 數學的原理, )는 서양의 과학 혁명을 집대성한 책의 하나이다. 줄여서 '프린키피아'()라고 불리기도 한다. 1687년에 나온 아이작 뉴턴의 세 권짜리 저작으로, 라틴어로 썼다.

이 책에서 뉴턴은 고전 역학의 바탕을 이루는 뉴턴의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기술하고 있다. 당시 요하네스 케플러가 천체의 운동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알아낸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을 뉴턴은 자신의 위 두 법칙들로써 증명해 낸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서 코페르니쿠스에서 시작되어 케플러, 갈릴레오를 거치면서 이루어져 온 천문학의 혁명을 완성하는 한편, 갈릴레오 이후 데카르트, 하위헌스 등을 통해서 이루어져 온 근대 역학의 성공을 눈부시게 보여주고 있다.

에드먼드 핼리도 이 책을 바탕으로 1530년, 1607년, 1682년에 나타났던 혜성들의 궤도를 계산해, 이 혜성 모두가 동일한 하나의 천체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일정한 주기에 따라 1750년대 말에 다시 나타나리라고 예견했다. 뉴턴도 핼리도 죽은 뒤인 1758년에 수수께끼 같은 천체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핼리 혜성이다.

제1편은 운동에 관한 일반적 명제를 논술하였고, 제2편은 매질 속에서의 물체의 운동을 다루고, 마지막 제3편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케플러의 행성의 타원궤도 등의 행성의 운동을 증명하였다.

뉴턴은 그의 이론을 기술하기 위해 미적분학을 역학에 적용하였지만, 이 책에서는 주로 기하학적인 증명 방법을 사용하고 미적분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사람들의 이해를 고려해서라고 한다.

저항이 있는 공간 속에서 물질의 입자가 어떻게 운동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이 내용은 오늘날의 소위 「유체역학」에 해당한다. 이것은 주로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데카르트의 「소용돌이」우주관에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목적에 맞추어져 있다.

가장 성과가 많은 부분이다. 태양과 다른 행성들의 질량이 추론되고, 순전히 수량적인 방식을 이용해서 지구의 평평한 모습이 설명되며, 조수의 이론 등이 상세히 제시되고 있다.




#Article 48: 슈뢰딩거 방정식 (339 words)


슈뢰딩거 방정식(-方程式, )은 비상대론적 양자역학적 계의 시간에 따른 진화를 나타내는 선형 편미분 방정식이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도입하였고, 그가 발명한 파동역학의 기본 방정식이다.

파동 함수 에 대한 슈뢰딩거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해밀토니언 연산자 는 고전적 해밀토니언에 해당하는 연산자로, 후자를 양자화하여 얻는다. 는 폴 디랙의 브라-켓 표기를 사용해 나타낸, 슈뢰딩거 묘사에서의 힐베르트 공간의 상태 벡터이다. 이를 파동 함수 로 나타낼 수 있다. (파동 함수에 대한 해석은 코펜하겐 해석을 참조하라.)

해밀토니언 연산자 는 보통 미분 연산자이다. 예를 들어, 퍼텐셜  속에 있는, 질량이 인 비상대론적 입자의 경우 해밀토니언은 다음과 같은 2차 미분 연산자이다.

즉, 슈뢰딩거 방정식은 다음과 같은 2차 편미분 방정식이 된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다음과 같은 라그랑지언으로부터 유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퍼텐셜  속에 있는, 질량이 인 비상대론적 입자의 경우 슈뢰딩거 라그랑지언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두 번째 표현은 전미분항(total derivative)을 무시하고 쓴 것이다.

이 라그랑지언을 고전적 가환 또는 반가환 장의 라그랑지언으로 여겨, 양자장론으로 이차 양자화시킬 수 있다. 이 경우, 외부 배경장 속에서 움직이는, 임의의 수의 비상대론적 보손 또는 페르미온을 나타내는 양자장론을 얻는다. 또한, 이 경우 비선형 상호작용항을 추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로스-피타옙스키 방정식이 이러한 꼴이다.

로 나타내었다. 1924년 루이 드 브로이는 광자 뿐만 아니라 모든 입자가 대응되는 파동함수 를 가진다는 드 브로이 가설을 발표하고, 파동의 파장 λ와 입자의 운동량 p에 대해

의 관계식을 제안했으며, 이 관계식이 특수상대론 및 위의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식과 일관됨을 보였다. 즉, E = hν는 광자 뿐만 아니라 모든 입자에 대해 성립한다는 것이다.

위 식들을 각진동수 와 파수  및 를 이용해 표현하면,

p와 k를 벡터로 표현하면

에르빈 슈뢰딩거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1925년 발표하였다. 슈뢰딩거는 평면파의 위상을 복소 위상인자로 나타내었다.

그리고 그는

이므로

이며, 마찬가지로

이므로

이고, 따라서

및 각 방향의 부분들을 더하면

이 성립함을 알았다. 이제 이를 총 에너지 E와 질량 m 및 위치에너지에 대한 고전역학적 공식

에 대입하여, 당시에 슈뢰딩거가 얻었던 위치에너지가 주어진 3차원 공간 상의 단일입자에 대한 공식에 도달한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비상대론적이므로, 특수상대론과 불합한다. 슈뢰딩거 방정식을 상대론적으로 일반화하면 스핀에 따라 클라인 고든 방정식이나 디랙 방정식 따위를 얻는다. 이들은 비상대론적인 극한에서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수렴한다.

또한, 슈뢰딩거 방정식에 비인 항을 추가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응집물질물리학에서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그로스-피타옙스키 방정식은 슈뢰딩거 방정식에 사승 상호작용을 추가한 것이다.




#Article 49: 엔트로피 (762 words)


엔트로피(, )는 열역학적 계의 유용하지 않은 (일로 변환할 수 없는) 에너지의 흐름을 설명할 때 이용되는 상태 함수다. 통계역학적으로, 주어진 거시적 상태에 대응하는 미시적 상태의 수의 로그로 생각할 수 있다. 엔트로피는 일반적으로 보존되지 않고,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시간에 따라 증가한다. 독일의 물리학자 루돌프 클라우지우스가 1850년대 초에 도입하였다. 대개 기호로 라틴 대문자 S를 쓴다.

엔트로피에는 열역학적 정의와 통계학적인 정의, 두 가지의 관련된 정의가 있다. 역사적으로, 고전 열역학적 정의가 먼저 발전하였다. 고전 열역학적인 관점에서, 그 이론은 원자나 분자 같은 수많은 성분들로 이루어져 있고, 학설의 안정성은 그러한 성분들의 평균적인 열특성으로 설명된다.
이론을 구성하는 성분의 세부적인 성분들은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특성은 온도, 압력, 엔트로피, 열용량과 같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평균적인 지표들에 의해 설명된다. 그 이론의 특성에 관한 고전적인 정의는 평형 상태임을 가정하였다. 엔트로피의 고전 열역학적 정의는 최근 비평형 열역학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후 엔트로피를 포함한 열특성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시세계에서의 움직임에 대한 정역학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정의되었다. 그 예로 처음에는 기체로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광자, 음자, 스핀과 같은 양자 역학적으로 생각되는 뉴턴 입자가 있다. 이 이론의 특성에 대한 통계학적 설명은 고전적인 열역학을 사용하여 이론의 특성을 정의하는 것이 몇몇 변수의 영향을 받는 이론의 최종적인 상태를 예측하는데 있어서 점점 신뢰할 수 없는 예측 기술이 되어감으로 인하여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고전적 열역학에서는 엔트로피 S의 절대적 값은 정의할 수 없고, 대신 그 상대적 변화만 정의한다. 열적 평형을 이뤄 온도가 인 계에 열 를 가하였다고 하자. 이 경우 엔트로피의 증가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 식을 적분하여 유한한 엔트로피 차이를 정의한다.

엔트로피는 온도의 함수로써, 주어진 열이 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같은 크기의 열량이라도 고온의 계에 더해졌을 때보다 저온의 계에 더해졌을 경우에 계의 엔트로피가 크게 증가한다. 따라서 엔트로피가 최대일 때 열에너지가 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은 최소이고, 반대로 엔트로피가 최소일 때 열에너지가 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이 최대가 된다.
실제로 외부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유용한 에너지, 존재하지만 외부적인 일을 하는 데에 쓰일 수 없는 에너지를 사용불가능한 에너지라고 한다. 계의 총 에너지를 유용한 에너지와 사용불가능한 에너지의 합으로 정의 할 때, 엔트로피는 전체 에너지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주어진 계의 절대 온도에 반비례하는 사용불가능한 에너지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깁스 자유 에너지 또는 헬름홀츠 자유 에너지와의 관계식에서 TS 로 나타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엔트로피는 계의 자유 에너지를 결정짓는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온도는 평형 상태에 있는 계에서만 정의되는 값이므로, 이와 같은 엔트로피의 열역학적인 정의는 오직 평형 상태에 있는 계에서만 성립한다. 반면 통계역학적인 엔트로피의 정의는 모든 계에 적용된다 (아래 참고). 따라서 엔트로피의 보다 근본적인 정의로는 통계역학적인 정의를 꼽을 수 있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흔히 분자들의 무질서도의 증가로 정의되어 왔으며, 최근들어 엔트로피는 에너지의 분산으로 해석되고 있다.

통계역학에서는 엔트로피의 차 뿐만 아니라 엔트로피의 절대적 값을 정의할 수 있다. 확률적 상태 분포를 가지는 어떤 계의 앙상블을 생각하자. 여기서 단일계의 상태(미시적 상태) 의 확률을 라고 하자. 이 경우, 앙상블의 엔트로피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고립된 계의 경우, 통상적으로 모든 미시적 상태의 확률이 같다고 가정한다. 즉  (여기서 는 가능한 미시적 상태의 수)다. 이 경우

다. 여기서 kB 는 볼츠만 상수다. 이 식은 루트비히 볼츠만이 처음 발견하였다.

열저장고와 열적 평형을 이룬 계의 미시상태는 볼츠만 분포 를 따른다. 이 경우 엔트로피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는 분배함수다. 를 헬름홀츠 자유 에너지로 정의하여, 로 쓰기도 한다.

양자역학적 앙상블은 밀도행렬 로 나타내어진다. 이 경우, 폰노이만 엔트로피()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밀도행렬을 대각화하면 그 각 원소는 확률 가 되므로, 이는 위의 통계역학적 정의와 동등하다. 이 정의는 존 폰 노이만이 발견하였다.

블랙홀은 고전적으로 털없음 정리에 의하여 미시상태가 없다. 그러나 반고전으로 마치 어떤 유한한 엔트로피를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 이 엔트로피는

다. 여기서 는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의 넓이다. 이를 베켄슈타인-호킹 엔트로피()라고 부른다. 이는 야콥 베켄슈타인(, )이 가설을 세웠고, 스티븐 호킹이 반고전적으로 유도하였다. 또한, 특수한 경우 끈 이론이나 루프 양자 중력 등으로 미시적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블랙홀을 포함하는 계의 경우, 베켄슈타인-호킹 엔트로피를 무시하고 계산하면 일반적으로 열역학 제2법칙이 성립하지 않고, 이를 포함하여 계산하여야만 성립한다.

은 특정 온도 에서 시스템의 에너지 중에서 일로 변환할 수 없는 에너지를 나타낸다. 따라서 전체 에너지에서 를 뺀 양이 자유 에너지가 된다.

엔트로피란 우주 내부 어떤 시스템에서 생기는 유용한 에너지가 무용한 에너지로 변화하는 량의 척도이다. 엔트로피를 계를 구성하는 성분들의 배열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면, 위치 엔트로피와 열 엔트로피로 분류할 수 있다. 여기서 열 엔트로피는 분자들 사이에서의 에너지 양자의 분포들에 의한 구별가능한 배열을 기준으로 하여 계산된 엔트로피를 말한다.

위와 같이 분류한 엔트로피를 계의 관점에서 본 알짜엔트로피 변화를 나타낼 때 이용할 수 있다.

계와 주위가 갖는 엔트로피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열 엔트로피는 계와 주위 모두에 존재하지만, 계를 제외한 모든 곳을 지칭하는 주위에서 위치 엔트로피의 변화는 너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므로 그 변화를 무시할 수 있고, 주위가 갖는 엔트로피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온도, 즉 열 엔트로피이다. 이 때문에 주위의 엔트로피 변화를 열 엔트로피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점에서 계에서 열 엔트로피변화는 분명 존재하긴 하지만 위치 엔트로피의 변화가 더욱 계의 엔트로피변화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계의 엔트로피 변화를 위치 엔트로피의 변화라 할 수 있다.




#Article 50: 라플라스 방정식 (321 words)


라플라스 방정식(Laplace's equation)은 2차 편미분 방정식의 하나로, 고윳값이 0인 라플라스 연산자의 고유함수가 만족시키는 방정식이다. 전자기학, 천문학 등에서 전위 및 중력 퍼텐셜을 다룰 때 쓰인다. 피에르시몽 라플라스의 이름을 땄다. 라플라스 방정식의 해를 조화함수라고 한다.

차원 리만 다양체에서 가 라플라스-벨트라미 연산자라고 하자. 그렇다면 라플라스 방정식은 다음과 같은 2차 편미분방정식이다.

이므로,

이 된다.

우변을 주어진 함수 로 바꾼 경우

는 푸아송 방정식이라고 한다. 즉, 라플라스 방정식은 인 푸아송 방정식의 특수한 경우다.

우변을 다음과 같이 바꾸면

헬름홀츠 방정식을 얻는다. 라플라스 방정식은 인 경우다.

코시-리만 방정식의 해의 두 성분 모두 각각 라플라스 방정식을 만족한다. (즉, 정칙함수의 실수 또는 허수 성분은 조화함수다.)

라플라스 방정식의 디리클레 문제란 어떤 영역 의 경계에서의 φ가 특정 함수로 주어졌을 때, 영역 위의 해 φ를 구하는 것이다. 열전도에서 등장하는 라플라스 방정식을 빗대어 보면,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경계면의 온도를 특정한 온도로 일정하게 유지하고 내부의 온도가 더 이상 변화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린 후 내부의 온도 분포를 찾는 것이 디리클레 문제에 해당한다.

라플라스 방정식의 노이만 경계 조건은 경계 D에서 함수  자신이 아니라 법선 도함수를 조건으로 가진다. 물리학에서는 경계에서만 벡터장의 효과를 알고 있을 때 그 벡터장의 퍼텐셜을 구하는 데 사용한다.

라플라스 방정식의 해를 조화 함수라고 한다. 조화 함수는 방정식의 해가 되는 영역에서는 항상 해석적이다. 만일 두 함수가 각각 라플라스 방정식(또는 선형 동차 미분방정식)의 해라면, 두 함수의 선형 결합도 해이다. 이 성질을 중첩의 원리라고 하며 복잡한 문제의 해를 간단한 해들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유용하게 쓰인다.

의 형태로 나타난다.

는 격하게 (mesh size)

푸아송 방정식의 차분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복소 범위의 해석적 함수 의 실수부와 허수부는 모두 라플라스 방정식을 만족한다.
이고

라 하자. 가 해석적이려면

를 만족해야 한다(코시-리만 방정식). 여기서

이다. 따라서  는 라플라스 방정식을 만족한다. 도 비슷한 방법으로 라플라스 방정식을 만족함을 보일 수 있다.

극좌표계 에서 라플라스 연산자는 다음과 같다.

따라서 그 일반해는 변수분리법으로 구할 수 있고, 다음과 같다.

이는 함수 의 푸리에 급수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으로 나타낼 수 있다. 즉, 푸리에 급수의 계수는 로랑 급수의 계수와 같다.

여기서 는 구면 조화 함수이고, 와 은 임의의 계수다. 물론, 가 원점에서 연속적이려면 이다.




#Article 51: 삼각함수 (163 words)


수학에서, 삼각함수(三角函數, )는 각의 크기를 삼각비로 나타내는 함수이다. 예각 삼각함수는 직각 삼각형의 예각에 직각 삼각형의 두 변의 길이의 비를 대응시킨다. 임의의 각의 삼각함수 역시 정의할 수 있다. 삼각함수는 복소수의 지수 함수의 실수 · 허수 부분이며, 따라서 복소수를 다룰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가장 근본적인 주기 함수이며, 각종 주기적 현상을 다룰 때 푸리에 급수의 형태로 등장한다.

삼각함수에는 3개의 기본적인 함수가 있으며, 이들은 사인(, , 기호 ) · 코사인(, , 기호 ) · 탄젠트(, , 기호 )라고 한다. 이들의 역수는 각각 코시컨트(, 기호 ) · 시컨트(, 기호 ) · 코탄젠트(, 기호 )라고 한다.

C가 직각인 삼각형 ABC에서, 각 A, B, C의 대변(마주보는 변)의 길이를 라고 할 때, 사인, 코사인, 탄젠트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또한, 코시컨트, 시컨트, 코탄젠트는 위 세 함수의 역수가 되며,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좌표평면에서 원점을 중심으로 하고 반지름 r의 길이가 1인 원을 단위원이라고 한다. 이 단위원 위의 점 A 에 대해, 축과 점 A와 원점을 잇는 직선간의 각을  라고 하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오일러의 공식 에 를 대입하면,

를 대입하면,

연립하여 풀면, 쌍곡선함수,




#Article 52: 르장드르 다항식 (173 words)


르장드르 다항식() 는 르장드르 미분 방정식()이라고 불리는 다음 미분 방정식의 해가 되는 함수들이다.

스튀름-리우빌 형식으로 쓰면,

이다. 이 함수와 미분 방정식의 이름은 프랑스의 수학자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이 상미분 방정식은 물리와 공학의 여러 분야에서 자주 등장한다. 특히, 구면좌표계에서 라플라스 방정식을 풀 때 등장한다.

구체적인 몇몇 르장드르 다항식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인 경우의 구간 [-1,1]사이에서의 르장드르 다항식의 그래프는 다음과 같다.

르장드르 다항식에는 다음과 같은 몇몇 간단한 성질이 있다.

르장드르 다항식 끼리 구간 [-1,1] 에서  내적을 취하면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는다.

여기서 은 크로네커 델타를 의미한다. 따라서, 르장드르 다항식은 구간 [-1,1]에서 서로 수직함을 알 수 있다. 이는 르장드르 방정식이 스튀름-리우빌 문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즉, 르장드르 미분 방정식을 다음과 같이 스튀름-리우빌 형식으로 놓을 수 있다.

여기서 고윳값 이다. 스튀름-리우빌 문제의 해의 집합은 일반적으로 함수 공간의 정규 직교 기저를 이루므로, 르장드르 다항식도 마찬가지로 직교 기저를 이룬다. (다만, 통상적으로 그 노름이 1이 아니게 정의한다.)

르장드르 다항식은 점화식이나 선적분, 생성 함수 등 여러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

로드리게스 공식()은 르장드르 다항식의 일반식이며, 다음과 같다.

르장드르 다항식은 다음과 같은 점화식을 만족한다.

르장드르 다항식은 다음과 같은 생성 함수를 가진다.



#Article 53: 로봇 (830 words)


로봇(, )은 인간과 유사한 모습과 기능을 가진 기계 또는 한 개의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작동할 수 있고(programmable), 자동적으로 복잡한 일련의 작업(comlex series of actions)을 수행하는 기계적 장치를 말한다. 또한 제조공장에서 조립, 용접, 핸들링 등을 수행하는 자동화된 로봇을 산업용 로봇이라 하고, 환경을 인식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기능을 가진 로봇을 '지능형 로봇'이라 부른다. 사람과 닮은 모습을 한 로봇을 '안드로이드'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뜻은 형태가 있으며,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기계라고도 한다. 그리고 인공의 동력을 사용하는 로봇은 사람 대신, 또는 사람과 함께 일을 하기도 한다. 통상 로봇은 제작자가 계획한 일을 하도록 설계된다. 로봇'이란 용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Carel Čapek)가 1920년에 발표한 희곡 R.U.R에 쓴 것이 퍼져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또한 로봇의 어원은 체코어로 노동을 의미하는 Robota이다.

Robot이라는 말은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Karel Čapek)의 희곡 R.U.R.(Rosuum' s Universal Robots)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로봇의 어원은 체코어의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 'robota'에서 나왔다고 알려지고 있다. 차페크는 R.U.R.에서 모든 작업능력에서 인간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면서 인간적 “감정”이나 “혼”을 가지고 있지 않은 로봇이라고 불리는 인조인간을 등장시키고 있다. 로봇은 언젠가 쇠조각으로 변하여 반항하는 정신을 발달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창조주인 인간을 전부 죽여 버린다고 하는 비극을 인상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로보틱스(Robotics)라는 말은 로봇의 활용과 로봇 공학을 의미한다. 이 말은 미국 과학자이면서 작가인 아이작 아시모프(Issac Asimov; 1920년 1월 2일 ~ 1992년 4월 6일)가 1942년에 발간한 단편 Runaround에서 최초로 사용하였다.

명사로서 로봇(robot)은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

일할 수 있는 능력은 있어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인간을 닮은 것.

아이작 아시모프가 1950년 발간한 소설인 'I'Robot'에서 제안된 로봇의 행동에 관한 3가지 원칙이다.

제1법칙: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며, 위험에 처해 있는 인간을 방관해서도 안 된다.

제2법칙: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만 한다. 단, 제1법칙을 거스를 경우에는 제외다.

제3법칙:로봇은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만 한다. 단, 제1법칙과 제2법칙을 거스를 경우는 예외다.

군사용 로봇이 공격의 기능을 갖출 경우, 첫 번째 원칙에 위배되게 된다. 
하지만 3원칙만 듣게되면 만약 예시로 로봇에게 지구에 있는 나무를 다 없애주라고 할때 나무를 없애는것이기때문에 실행을 할 수가 있어 인간에게 위험할수있다. 그래서 몇몇사람들은 이를 바꾸려고한다.

그동안 인간이 해 오던 많은 일들을 지금은 로봇이 대신하고 있다. 산업 현장에는 단조로운 반복 작업이나 따분한 작업, 불쾌한 작업들이 많은데, 이와 같은 작업은 특히 로봇에게 맡기기에 적합하다. 조립 공장에서 리벳 박는 일, 용접, 자동차 차체를 칠하는 일 등은 그 좋은 예이다. 이런 종류의 작업은 로봇 쪽이 인간보다 더 잘 해낼 수 있다. 왜냐하면 로봇은 언제나 일정한 수준의 정밀도와 정확도로 작업을 계속할 수 있으며, 결코 지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품의 품질은 항상 일정하며 게다가 휴식을 취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많은 양의 제품을 만들 수 있다.

또한 로봇은 위험한 작업을 대신할 수가 있다. 방호복을 입지 않고 원자력 공장에서 방사성 물질을 취급하거나, 유독 화학 물질을 취급할 수가 있으며, 인간에게는 너무 덥거나 추운 환경에서도 일할 수가 있다. 인간의 생명이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곳에서도 로봇을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폭발물을 수색하거나 폭탄의 뇌관을 제거하는 일, 그리고 우주 공간에서의 작업도 그중의 하나이다.

로봇은 우주 공간에서의 작업에 특히 이상적이다. 지구를 돌고 있는 인공위성을 수리하거나 유지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고, 보이저호와 같이 탐사와 발견을 목적으로 먼 천체까지 비행하는 데도 로봇이 사용된다.

한편 가정에서도 점점 많은 로봇이 가사를 돕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육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도 많이 이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로봇 간호보조자는 장애자나 노령으로 인해 체력이 약해진 사람들이 가족들에게서 독립하여 혼자서도 살 수 있도록 해주며, 병원에 입원하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도와 주게 될 것이다.

로봇이 사용되는 분야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주로 힘이나 정밀도를 요하는 작업 담당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할 때 컴퓨터를 이용하면, 제품의 생산 계획이나 설계·제조·보관·출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다. 기계 공업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공작 기계는 금속 등을 가공할 때 사용된다. 과거에는 이 기계를 사용하기 위해 고도의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수치 제어 공작 기계가 개발되어 기술이 없어도 금속을 가공할 수 있게 되었다. 수치 제어 공작 기계는 가공하는 작업의 순서와 내용을 수치 정보로 만들어 기계에 입력시키면 기계가 자동적으로 가공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 수치 제어 공작 기계와 자료의 입력 관리를 맡는 컴퓨터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 컴퓨터 수치 제어 공작 기계이다. 이 수치 제어 기계에서 더 발전하여 복잡한 가공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장치가 공작 로봇이다.

주로 인내심을 요하는 작업 담당

주로 위험한 환경에서의 작업 담당

미국에서는 로봇이 생활에 도움을 주는 기계라기보다 앞으로 인류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어서 주로 터미네이터 등 영화에서 로봇이 인류를 위협하는 존재로 나와 있다. 또 무인 조종 비행기 등 군사에서 쓰는 군사 로봇이 가장 잘 발달되어 있다.

일본 에도 시대에는 가라쿠리 인형 같은 로봇이 있었다. 일본은 아시모등과 같은 휴머노이드형 로봇이나 소니의 AIBO와 같은 애완용 로봇 그리고 산업용 로봇 외에도 인간의 모습에 가까운 로봇 개발에 힘쓰고 있다. 아톰, 건담 같은 로봇 애니메이션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중국에서는 로봇을 산업이나 가정에 도움을 주는 기계라보다는 사람이 조종하는 꼭두각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과 일본, 심지어는 대한민국까지도 로봇공학에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자 이들에게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2000년에 선행자(先行者)라는 이름의 직립보행형 로봇을 개발하기도 했으나 선행자의 양 다리 사이에 설치된 파이프 모양의 부속으로 인하여 일본에서 '최종중화병기 선행자'라는 애니메이션이 발표되는 등 개그캐릭터로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물의 힘으로 여러 인형이 작동하는 물시계 자격루와 옥루를 제작하였다. 한국은 초기에는 산업과 경제에 필요한 기계를 제작하였고, 근래에 들어서는 휴머노이드형 로봇 개발에 힘쓰고 있다. 로봇은 산업 뿐만 아니라 대회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겨루는 용도로도 제작되고 있다. 또한 물리적인 움직임 없이 사람과 의사소통하며 감정을 교류하는 소셜 로봇도 있다. 예를 들면, 2015년 5월 글로벌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인디고고(Indiegogo)를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소개된 뮤지오가 있다.




#Article 54: 깊은 생각 (142 words)


깊은 생각()은 더글러스 애덤스의 과학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등장하는 상상의 컴퓨터이다.

소설 속에서 깊은 생각은 '삶과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찾기 위해 만들어졌다. 결국 컴퓨터는 750만 년 동안 계산을 한 결과 42라는 답을 계산해 내지만, 깊은 생각의 제작자들은 정작 이 답에 대한 질문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깊은 생각 자신도 궁극의 질문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은 내놓지 못한 채, 결국 42라는 답에 대한 질문이 무엇인지를 계산하기 위해 더욱 강력한 컴퓨터(지구)를 제작할 것을 제안한다. 천만 년 동안 계산을 하고 결과를 내어 놓기 5분을 남겨놓고 지구는 보곤 공병함대에 의해 파괴된다.

원작 라디오 시리즈에선, Geoffrey McGivern이 그 목소리를 담당했고, 후의 LP 녹음과 TV 시리즈에선 Valentine Dyall가 목소리를 연기했다.

체스 세계 챔피언 개리 카스파로프를 꺾었던 컴퓨터 딥 블루의 이전 모델도 이 소설 속의 컴퓨터의 이름을 따라 딥 소트(Deep Thought)라 명명되었다. 이후 세대 체스 컴퓨터들의 이름은 딥 프리츠, 딥 주니어 등으로 이어진다.




#Article 55: 표준 모형 (1141 words)


소립자 물리학의 표준 모형(標準模型, )은 자연계의 기본 입자와, 중력을 제외한 그 상호작용 (강한 상호작용, 약한 상호작용, 전자기 상호작용)을 다루는 게이지 이론이다. 강력을 다루는 양자 색역학과, 약력과 전자기력을 다루는 와인버그-살람 이론으로 이루어진다. 표준 모형에 따르면, 전자와 중성미자 및 기타 렙톤은 기본 입자이나, 강입자는 쿼크로 이루어진다. 이들은 게이지 보손에 의하여 상호작용한다. 게이지 보손은 이론의 대칭을 나타낸다. 표준 모형의 대칭 가운데 강한 상호작용의 대칭은 색가둠으로 인하여 간접적으로만 관찰할 수 있고, 약한 상호작용의 대칭은 힉스 메커니즘으로 인하여 깨진다. 따라서 거시적으로는 전자기 상호작용의 대칭만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표준 모형은 실험적으로 힉스 메커니즘을 제외하고 1980년대에 완성되었다. 힉스 메커니즘은 2010년대 초에 실험적인 증거가 발견되었다.

표준 모형에서는 중성미자와 게이지 보손, 힉스 보손을 제외한 모든 입자를 디랙 입자로 나타낸다. 이들 입자는 스핀 ½(즉 페르미온)을 가지며, 질량과 전하를 가지고, 그 반입자와 서로 다르다. 표준 모형은 이들 입자의 질량을 예측하지 못하나, 대체로 세대가 높을 수록 더 무겁다. 표준 모형의 디랙 입자 중, 강하게 상호작용하는 입자는 쿼크, 그렇지 않는 입자는 중성미자와 함께 렙톤으로 분류한다. 쿼크는 ±⅓ 혹은 ±⅔의 전하를 가지고, 중성미자가 아닌 렙톤은 ±1의 전하를 가진다. 이들 입자는 힉스 메커니즘으로 질량을 얻는다. 중성미자는 바일 입자(손지기 페르미온)으로 나타낸다. 즉 스핀 ½(즉 페르미온)을 가지며, 질량과 전하가 없고, 그 반입자와 다른 손지기(chirality)를 가진다.

렙톤의 경우, 표준 모형에서는 렙톤이 섞이지 않는다. 즉, 표준모형은 세 종류의 렙톤 수 (전자 수, 뮤온 수, 타우온 수)를 개별적으로 보존한다.

표준모형의 페르미온은 다음과 같이 세 세대로 나뉜다. 각 세대의 서로 대응되는 입자는 질량을 제외하고는 정확히 같은 성질을 지닌다. 표준 모형은 왜 세대 구조가 존재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표준 모형은 게이지군이 SU(3)C×SU(2)W×U(1)Y인 게이지 이론이다. 이 중 강력은 SU(3)C, 약전자기력은 SU(2)W×U(1)Y에 해당한다. 낮은 에너지에서, 약전자기력의 대칭은 힉스 메커니즘에 의해 자발적으로 깨져 전자기력의 U(1)EM만 남고, 나머지는 약력을 이룬다. 이 과정으로 인해 힉스 보손과 약력의 게이지 보손은 질량을 얻는다. (여기서 U(1)Y와 U(1)EM은 서로 다른 군이다.)

강력의 게이지 보손은 글루온이다. SU(3)가 8차원이므로, 글루온은 총 여덟가지의 색을 지닌다. 강력은 오직 쿼크에만 작용하고, 렙톤에는 작용하지 않는다. 쿼크는 세가지의 색을 지닌다. 이를 가시광선의 삼원색을 따서 통상적으로 빨강, 초록, 파랑으로 부른다. 이 때문에 강한 상호작용을 기술하는 양자장론을 양자 색역학이라고 일컫는다.
글루온을 통하여 쿼크의 색이 바뀔 수 있다. 따라서 글루온의 색을 3가지의 색을 다른 색으로 바꾸는 조합 (초록→빨강, 빨강→파랑 등)으로 볼 수 있다. 3가지의 색을 다른 3가지로 바꾸는 조합은 총 3×3=9가지이나, 그중 모든 색을 그대로 두는 (빨강→빨강, 초록→초록, 파랑→파랑) 변환을 제외하여 8가지의 색이 남는다.

전약력의 게이지 보손은 SU(2)×U(1)이 4차원이므로 4종인데, 이는
대칭 깨짐 이전의 W+, W-, W0 (약한 아이소스핀, SU(2)), B (약한 초전하, U(1))에 해당한다.
대칭 깨짐 이후, W0과 B는 광자와 Z보손으로 섞인다.
전약력의 게이지 군 가운데 SU(2)의 전하는 약한 아이소스핀, U(1)의 전하는 약한 초전하이다. 대칭이 깨지면서, 약한 아이소스핀의 한 성분과 약한 초전하가 섞여 양자전기역학의 대칭군 U(1)을 이룬다.

표준 모형은 대부분의 양자장론처럼 많은 수의 대칭을 지닌다. 대칭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자연계에서 약력은 C 대칭과 P 대칭을 최대로 깬다. 따라서 표준 모형은 이들을 따르지 않는다. 강력의 경우 이론적으로 C 대칭을 깰 수 있으나 (강력 CP 문제), 이는 관측 불가능할 정도로 작다. 약력은 2세대 이하에서는 CP 대칭을 보존하지만 3세대 이상으로는 CP 대칭을 깬다 (CP 위반). 표준 모형은 다른 모든 특수상대론적 이론과 같이 푸앵카레 대칭을 따르므로 CPT 정리에 따라 CPT 대칭을 따른다. CPT는 이산대칭이기 때문에 뇌터 정리에 해당하지 않고,연관된 보존량도 없다.

표준 모형은 SU(3)×SU(2)×U(1)의 대칭군을 가진 게이지 이론이다. 여기서 SU(3)은 색력에 해당하고, SU(2)×U(1)은 전약력에 해당한다. SU(2)를 약한 아이소스핀, U(1)을 약한 초전하라고 부른다. 이 중 SU(2)×U(1)은 U(1)으로 깨지게 된다. 여기서 깨진 후 남은 U(1)은 전자기 대칭으로, 약한 초전하의 U(1)과는 다르다. 이에 따라 표준 모형은 색전하, 약한 아이소스핀, 약한 초전하를 보존한다.

표준 모형은 건드림이론 수준에서 네 가지의 전반적 (global) 우연대칭 (accidental symmetry)을 가진다. 이는 쿼크 위상 회전, 전자 위상 회전, 뮤온 위상 회전, 타우온 위상 회전이다. 이에 따라, 표준 모형은 바리온 수, 전자 수, 뮤온 수, 타우온 수를 보존한다. 이들은 우연대칭이기 때문에, 대통일 이론에서 깨질 수 있다. 실제로 전자 수, 뮤온 수, 타우온 수의 개별적인 보존은 중성미자 진동에 의하여 반증되었다. 또한, 우연대칭은 건드림이론에서는 성립하지만 비(非)건드림적인 효과로 인해 깨질 수 있다. 실제로 표준 모형에서는 비건드림적 효과로 인하여 바리온 수와 렙톤 수가 개별적으로 보존되지 않는다. 즉 B+L은 보존되지 않을 수 있다. 이를 스팔레론(sphaleron)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B−L은 비건드림적으로도 보존된다. 물론 모든 비건드림이론적 효과는 대부분의 경우 극히 미미하고, 빅뱅 초기 (바리온 생성 및 렙톤 생성)를 제외하고는 관측하기 힘들다. 이 밖에도, 표준 모형은 각종 근사적인 맛깔 대칭을 지닌다. 가장 기본적으로 아이소스핀의 SU(2)와 이를 초전하로 확장한 SU(3)이 있고, 이를 다른 쿼크를 도입하여 더 확장할 수 있다. 맛깔 대칭은 쿼크의 질량에 의하여 깨진다. 질량이 클 수록 깨지는 정도도 더 심하다.

아래의 표는 표준 모형에 등장하는 모든 마당을 정리한 것이다. 이 가운데 페르미온 장 (스핀 ½)은 질량을 제외하고 모든 성질이 같은 두 개의 세대가 더 존재하지만, 생략하였다.

이 표는 왼손 바일 스피너 대신에 오른손 바일 스피너로 적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쿼크를 반쿼크로 바꾸어야 한다. 이는 약력은 전반성 (P) 대칭을 최대로 불복하기 때문이다. 또한, 표준 모형에서 중성미자는 오직 왼손만 존재한다. 즉 모든 중성미자는 왼손잡이며, 반중성미자는 오른손잡이다.

페르미온의 경우, 왼손 입자(, )는 SU(2)L의 기본표현(fundamental representation)을 따르나, 왼손 반입자(, , )는 SU(2)L에 따라 변환하자 않는다. (반)쿼크(, , )는 SU(3)c의 (반)기본표현을 따르나, 렙톤(, )은 SU(3)c에 따라 변환하지 않는다.
게이지 장(, , )은 해당 게이지 대칭에 대하여 딸림표현을 따르고, 로렌츠 벡터이며, 다른 게이지 대칭에는 변환하지 않는다.

표준 모형은 19개의 상수를 포함한다.

표준 모형은 이론적으로 여러가지의 결함을 가지고 있고, 또 현상론적으로 관측된 일부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표준모형이 더 기본적인 이론을 근사하는 유효 이론이며, 더 높은 에너지에서는 표준모형이 다루지 않는 새 현상이 나타나리라고 기대한다. 거대 하드론 충돌기에서 행해지는 여러 실험은 표준모형의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표준 모형은 이론적으로 여러 자연스러움 (naturality) 문제를 안고 있다. 이는 표준 모형에 등장하는 몇몇 상수가 너무나 큰 값 또는 작은 값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대개 더 강력한 대칭을 도입하여 상수가 왜 그렇게 크거나 작은 값을 가지는지 설명해야한다. 이런 종류의 이론은 대통일 이론이나 초대칭 따위가 있다.

계층 문제
전약력의 자발 대칭 깨짐이 일어나는 눈금은 플랑크 눈금보다 터무니없이 작다. 표준 모형에서는 전약력 대칭 파괴는 스칼라 힉스 보손으로 일으켜지나, 스칼라 입자의 질량은 (초대칭이 없는 이상) 방사 보정에 대하여 안정하지 못하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새로운 물리가 나타나는 눈금(대통일 눈금이나 플랑크 눈금) 정도이여야 하는데, 힉스 보손의 질량은 플랑크 질량보다 훨씬 작다.
CP 위반 문제
강력이 CP대칭을 위반하는 정도는 지나치게 작다.
우주 상수 문제
진공의 에너지 밀도는 플랑크 에너지 밀도에 비하여 지나치게 작다. 이론적으로는 진공에너지(우주상수)는 무한대이거나 중력을 고려하면 플랑크 에너지 눈금에 있어야 하는데, 관측된 값은 이보다 훨씬 작다.

또한, 표준 모형은 여러가지로 임의적인 면이 있다. 표준 모형은 3세대로 구성되어 있지만, 왜 3세대로 구성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2세대가 발견되었을 때,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는 누가 그걸 주문했어?라고 외칠 정도로, 세대의 존재와 그 수는 언뜻 보면 불필요한 구조다.

표준 모형은 전하의 양자화를 설명하지 않는다. 폴 디랙은 전하의 양자화를 설명하려면 자기 홀극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였으나 표준 모형은 자기 홀극을 포함하지 않는다.

또한 표준 모형은 19개의 자유 변수를 가진다. 이 자유 변수의 수는 기본 이론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다.

표준 모형은 입자 물리학의 거의 모든 실험 결과를 오차 범위 안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표준모형은 중력을 다루지 않는다. 또 표준 모형은 중성미자를 무질량 입자로 다루지만, 실제로 중성미자는 아주 작지만 영이 아닌 질량을 가진다 (중성미자 진동). 이 질량이 어떤 종류인지 (즉 중성미자가 디랙 입자인지 마요라나 입자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

또한 표준 모형은 아무런 암흑 물질 입자를 포함하지 않는다. 표준 모형에서 암흑 물질로 간주할 수 있는 입자는 중성미자밖에 없는데, 중성미자는 이론적으로 전체 암흑 물질 양의 소량만을 차지한다.




#Article 56: 쿼크 (246 words)


쿼크()는 경입자와 더불어 물질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입자다. 경입자가 아닌, 색전하를 띤 기본 페르미 입자이다. 중입자와 중간자를 이룬다. 이론 물리학자 머리 겔만은 자신이 발견한 우주의 기본 미립자를 '쿼크'(quark)로 명명했는데 이것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피네간의 경야》 12장 '신부선(新婦船)과 갈매기'에서 갈매기가 외치는 무의미한 조롱의 울음소리에서 따온 것이다. 우연의 일치로, 우주 속의 입자들을 구성하는 쿼크는 세 개씩 같이 다닌다.

쿼크는 총 6가지의 종류가 있으며, 다음과 같다.

각 쿼크에는 이에 대응되는 반입자인 반쿼크()가 존재한다. 반쿼크는 대응하는 쿼크와 질량이 같지만 전하와 색전하가 반대다. 각 쿼크는 빨강, 초록, 파랑 세 개의 색깔을 가질 수 있다. 쿼크는 3세대가 있는데 1세대는 위·아래(up·down) 쿼크, 2세대에 맵시·기묘(charm·strange) 쿼크, 3세대에 꼭대기·바닥(top·bottom) 쿼크로 나눈다.

쿼크는 기본 전하의 −⅓ 또는 +⅔의 전하를 갖는다. 기본 전하의 정수배가 아닌 전하를 가진 입자는 쿼크가 유일하다. 전하량 외에도 쿼크는 색전하(色電荷, )란 물리량을 갖는데, 이 양은 '빨강', '초록', 혹은 '파랑'으로 나타낸다. 이 물리량에 대한 보존법칙은 합쳐진 입자는 언제나 '무색'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반쿼크는 '반빨강', '반초록', '반파랑'의 색전하를 갖는다.(색전하는 가시광선의 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단지 양자 색역학의 대칭군인 SU(3)의 3차원 표현의 기저를 나타내는 통상적인 용어일 뿐이다.)

양자 색역학의 색가둠 현상에 의하여, 일상적인 에너지에서 쿼크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중간자나 중입자를 이룬다. 중간자는 쿼크와 반쿼크로 이루어진 입자이고, 중입자는 세 개의 쿼크로 이루어진 입자다. 중간자와 중입자를 통틀어 강입자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홑 쿼크는 관측할 수 없으며, 관측 가능한 강입자는 항상 기본 전하의 정수배의 전하를 가지고, 항상 무색이다. 쿼크를 따로 관측할 수 없으므로, 위 표의 쿼크 질량은 정확한 값이 아니라 참값이 놓여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범위다.

여기서 쿼크()는 액체의 단위인 쿼트를 변형한 것으로, 등장 인물인 마크에게 술을 권하는 대목이다.




#Article 57: 중력 상수 (374 words)


중력 상수(重力常數, , 기호 G), 만유인력 상수 또는 뉴턴 상수는 중력의 세기를 나타내는 기초 물리 상수다. 중력을 다루는 모든 이론, 예를 들어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과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등장한다. 과학 기술 데이터 위원회 2010년 자료
에 따르면, 국제단위계에서의 값은 다음과 같다.

그 밖에 국제 천문 연맹에서 제공하는 자료도 권위가 있다.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르면, 두 물체 사이의 중력적 인력은 그 두 질량의 곱에 비례하며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식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

이 식에서 비례 상수 를 중력 상수라고 일컫는다.

중력은 자연의 다른 세 상호작용보다 상대적으로 약하다. 예를 들어 두 대의 3000 kg의 자동차가 각각의 질량 중심에 대해 3 m 떨어져 있을 때 두 자동차에 작용하는 중력은 약 67 µN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모래 알갱이의 무게 정도의 힘에 해당한다.

중력 상수는 헨리 캐번디시가 캐번디시 실험을 통해 정교하게 처음으로 측정하였다. 실험을 위해 막대의 양 끝에 납으로 된 공을 매달고 이를 줄에 매달아 수평 방향으로만 회전하게 한다. 막대의 관성 모멘트는 막대가 복원력에 의해 진동하는 주기를 측정하여 알아낼 수 있다. 막대의 한쪽 끝에 다른 공을 가까이 대면 중력에 의해 서로 끌어당기게 되고 막대가 회전한 각도를 측정하여 이 힘을 알아낼 수 있다. (캐번디시의 실험의 본 목적은 중력 상수의 측정이 아니라, 지구의 질량을 측정하는 것이었다. 지구 표면의 중력장은 쉽게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지구의 크기와 중력 상수를 알면 지구의 질량을 계산할 수 있다.)

중력 상수의 측정은 캐번디시의 실험 이후로 점차 정확도가 향상되어 왔다. 중력이 다른 기본 상호 작용에 대해 매우 약하고, 다른 물체의 영향을 없애기 어렵기 때문에 중력 상수 를 측정하는 것은 여러 모로 어렵다. 게다가 중력과 다른 상호 작용 사이에 알려진 상관 관계가 없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이를 측정할 수 없다. 최근의 리뷰(Gilles, 1997)에 따르면, 중력 상수의 측정값은 크게 변해 왔고, 최근의 몇몇 측정값은 실제로는 서로 배타적이라고 한다.

 곱 또는 표준 중력 변수는 여러가지 중력과 관계된 수식을 간단히 표현하는 데 자주 활용된다. 특히 태양계에 대해 중력 법칙을 이용할 때 매우 높은 정확도로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빈번하게 사용된다. 중력 상수의 정확도가 높지 않은 데 반해 행성의 위치나 중력 가속도와 같은 양은 매우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따라서 중력 상수와 질량의 곱은 매우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다(따라서 지구나 태양의 질량의 측정값의 정확도는 중력 상수의 정확도에 의존한다.). 태양계에서의 중력을 계산할 때 거의 대부분의 계산에서 GM 값이 함께 붙어서 나오며, 대부분의 계산에서 이 둘을 따로 대입할 필요가 없어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 표준 중력 변수의 값은 로도 표시하며 국제단위계에서 다음과 같은 값을 갖는다.




#Article 58: 변형력 (144 words)


변형력(變形力, )은 역학에서 단위면적당 작용하는 힘을 뜻한다. 응력(應力)이라고도 한다. 오귀스탱 루이 코시가 1822년 처음 고안했다.

사실상 응력의 개념은 연속체(Continuum)라는 가정 아래 성립할 수 있다. 물체 내부의 경우, 가상의 단위부피를 설정해서 그 가상의 표면 바깥에 작용하는 힘을 계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상의 힘'은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표면힘(Surface Force)과 몸체힘(Body Force)이다. 표면힘은 표면에 평행한 힘이며, 몸체힘은 표면에 대하여 수직 방향인 힘이다.

응력의 SI단위는 파스칼(Pa)이다. 압력과 같은 단위지만, 압력과 응력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일반적인 단면봉(Prismatic Bar)의 경우, 수직응력(Normal Stress)은 바깥쪽(Tension) 또는 안쪽(Compression)으로 작용한다. 변형률(Strain)과의 연관성 때문에, 보통 바깥쪽 응력을 양으로, 안쪽 응력을 음으로 본다. 이 경우, 보통은 계산의 편리성을 위해 모든 단면적에 고르게 힘이 작용한다라고 가정하고 평균값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즉,

실제로는 모든 지점마다 작용하는 응력의 값이 다르다. 때문에 코시는 이를 표현하기 위해 텐서를 사용했다.

\left[{\begin{matrix}
\sigma _{11}  \sigma _{12}  \sigma _{13} \\
\sigma _{21}  \sigma _{22}  \sigma _{23} \\
\sigma _{31}  \sigma _{32}  \sigma _{33} \\



#Article 59: 대수학 (179 words)


대수학(代數學, )은 일련의 공리들을 만족하는 수학적 구조들의 일반적인 성질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이다. 이렇게 일련의 추상적인 성질들로 정의되는 구조들을 대수 구조라고 하며, 그 예시로 반군, 군, 환, 가군, 체, 벡터 공간, 격자 등이 있다. 대수학은 취급하는 구조에 따라서 반군론, 군론, 환론, 선형대수학, 격자론, 정수론 등으로 분류된다.

기하학, 해석학, 정수론과 함께 대수학은 수학의 대분야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대수학이란 용어는 단순한 산술적 수학을 가리키기도 하나, 수학자들은 군, 환, 불변량 이론과 같이 수 체계 및 그 체계 내에서의 연산에 대한 추상적 연구에 대해서 대수학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algebra라는 명칭은 페르시아의 저명한 수학자인 콰리즈미(783~850)가 쓴 《》()에서 비롯되었다. 책의 원 제목에 있는 ‘자브르()’는 (흩어진 것을) 묶는다는 뜻으로, 이 책에서는 방정식에서 항들을 묶어서 소거하는 것을 부르는 말로 쓰였다.

고대의 대수학에 대한 주요 저서로는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기원전 3세기)이나 구장산술(3세기), 디오판토스의 (3세기) 등이 있다. 9세기에 페르시아의 수학자 콰리즈미는 《》(820년)를 통해 대수학을 하나의 독립적인 분야로 정립했다. 이 책은 1145년 가 《알게브라와 알무카발라의 서(書)》()란 제목으로 라틴어로 번역한 뒤 다섯 세기에 걸쳐서 유럽의 대학에서 사용되었다. 여기서 알게브라()와 알무카발라()는 해당하는 아랍어 단어를 음역한 것이다. 또한 콰리즈미의 저서인 인도 수의 계산법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2차 방정식, 사칙연산, 십진법, 0 등의 개념이 소개되었다.




#Article 60: 파동 방정식 (194 words)


물리학과 수학에서, 파동 방정식(波動方程式, )은 일반적인 파동을 다루는 2차 편미분 방정식이다. 음파와 전자기파, 수면파 등을 다루기 위하여 음향학, 전자기학, 유체역학 등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 등장한다. 양자역학에서 위치 에너지가 없는 경우 파동 함수는 파동 방정식을 따른다.

파동 방정식은 에 대한 선형 쌍곡 편미분 방정식으로, 다음과 같다.

여기서 는 파동의 속도를 나타내는 매개변수다. 공기중을 진행하는 음파의 경우에는 대략 300 m/s이고, 이 속도를 음속(音速)이라 부른다. 현의 진동의 경우 는 다양한 값을 가질 수 있다.
는 시각 , 위치 에서의 파동의 진폭을 나타내는 함수다. 음파의 경우 진폭은 그곳에서의 공기의 압력이며, 진동하는 현의 경우엔 기준 위치에서부터의 변위를 나타낸다. 파동의 종류에 따라 는 스칼라 또는 벡터일 수 있다. 는 위치 에 대한 라플라스 연산자이다.

기본적인 파동 방정식은 선형 미분 방정식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두 파동의 결합은 단순히 두 파의 더한 것과 같다. 또한 파동을 분석하기 위해 파를 성분별로 나누어도 된다. 푸리에 변환을 이용해 파동은 사인함수들로 쪼개어질 수 있고, 이 방법은 파동방정식을 분석하는 데 유용하다.

축 방향으로 늘어선 1차원 (현)의 경우, 위 식은 다음과 같다.

식의 상수를 주파수에 따른 변수로 생각해 더 복잡하고 실제적인 파동방정식을 만들 수 있다. 이때의 방정식은 비선형이 된다.

현악기의 떨리는 현의 파동의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장 르 롱 달랑베르, 레온하르트 오일러, 다니엘 베르누이,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등이 연구하였다.




#Article 61: 구골 (113 words)


구골(googol)은 10의 100제곱을 가리키는 숫자이다. 즉, 1 뒤에 0이 백 개 달린 수이다. 참고로 우주의 모든 소립자의 수는 대략 10의 80제곱개이다.

이 수의 이름은 1920년 미국의 수학자 에드워드 캐스너(Edward Kasner)의 9살짜리 조카 밀턴 시로타(Milton Sirotta)에 의해 지어졌다. 캐스너는 이 개념을 저서 《Mathematics and the Imagination》(수학과 상상)에 수록했다.

이 수의 학문적인 중요성은 그리 크지 않고, 주로 수학 수업에서 거론될 뿐이다. 캐스너는 이 수를 매우 큰 수와 무한대의 차이를 보이기 위해 고안했다. 칼 세이건은 그의 저서 '코스모스'에서 마치 무한대로 느껴지는 우주의 크기를 무한대와 비교하기 위하여 구골보다도 더 큰 수인 구골플렉스(역시 밀턴 시로타가 명명)를 활용하여 구골플렉스와 1이 무한대보다 작은 정도는 서로 정확히 같다.라고 했다.

지금으로부터 년 후 우주는 마지막 남은 유일한 블랙홀이 호킹 복사에 의하여 증발한다.




#Article 62: 구글 (942 words)


구글 LLC()는 전 세계의 정보를 체계화하여 모든 사용자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이다. 검색 서비스 제공을 주력으로 한다. 구글 검색은 2018년 5월 기준 전 세계 검색량의 90%를 점유하고 있다. 2008년 웹 페이지 인덱스 수가 1조를 돌파했다.

구글은 세계 최대의 검색엔진으로 현재 나스닥에 상장된 기업이다. 특히 영미권에서는 독보적인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구글은 PDF, 포스트스크립트,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어도비 플래시 문서들을 포함한 웹 문서 검색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외에 , , , , , Froogle 서비스에서 이름이 변경된 , ,  등의 주요 검색 서비스가 있다.

또한 검색 서비스 외에 추가적인 서비스들을 제공하는데 이에는 2004년 시작된 이메일 서비스인  과 , , , Google 리더, , 기업 사용자를 위해서 각종 웹 애플리케이션을 제공하는 구글 앱스  등이 있다.

구글의 인수에도 불구하고, 모토로라는 여전히 기존 장치의 안드로이드 버전 업그레이드 서비스와 신제품을 출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구글봇이라는 이름의 웹 크롤러는 사용자가 검색하기 전에 수천억 개에 달하는 웹페이지에서 정보를 모아 이를 검색 색인에 정리한다.

크롤러는 과거 크롤링으로 만들어진 웹 주소 목록과 웹사이트 소유자가 제공한 사이트맵에서 크롤링을 시작한다. 웹사이트를 방문한 크롤러는 사이트에 있는 링크를 사용하여 다른 페이지를 찾는다. 크롤링하는 동안 새로운 사이트, 기존 사이트의 변경사항, 깨진 링크를 주의 깊게 살핀다. 크롤링할 사이트, 크롤링 횟수 및 각 사이트에서 가져올 페이지 수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결정한다.

구글에서는 사이트 소유자에게 를 제공하여 사이트 소유자가 구글에서 사이트를 크롤링하는 방법의 세부 사항까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한다. 사이트 소유자는 페이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관해 자세한 지침을 제공할 수 있으며, 재크롤링을 요청하거나 ''라는 파일을 사용하여 아예 페이지가 크롤링되지 않도록 할 수도 있다. 구글은 비용을 받고 특정 사이트를 더 자주 크롤링하지 않으며 사용자에게 최고의 검색결과를 보장하기 위하여 모든 웹사이트에 동일한 도구를 제공한다.

사용자에게 수십억 개의 웹페이지가 아닌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하기 위해, 구글의 검색 알고리즘은 크게 다섯 가지 방법을 활용한다. 검색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단어를 분석하기, 검색어와 일치하는 정보가 포함된 웹페이지를 검색하기, 페이지의 유용성을 평가하여 순위를 매기기, 사용자의 위치나 이전 검색 기록과 같은 맥락을 고려하여 사용자에게 알맞은 검색 결과를 제공하기, 검색 결과가 사용자의 검색 유형에 유용한지 고려하여 최상의 결과를 제공한다.

구글은 광고주에게 구글 애즈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입찰함으로써 검색 결과 옆에 뜨는 텍스트 광고를 구매할 수 있다. 희소성이 높은 키워드는 클릭당 광고비가 더 비싸게 책정된다.

애드센스를 통해서 광고를 하고 싶어하는 회사와 관련 사이트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애드워즈와 유사한 자동화 프로그램을 통해 둘을 연결해 준다.

구글은 클릭당 지불 데이터를 가지고 해당 광고를 클릭 할 때만 비용을 내도록 한다.

구글 애널리틱스(Google Analytics)는 광고주에게 해당 광고의 효과를 즉시 확인 할 수 있는 무료 툴을 제공한다. 이 프로그램은 매시간 클릭수와 판매량, 해당 키워드의 트래픽, 클릭이 판매로 이어진 비율 등 광고 효과를 즉각 확인 할 수 있게 해준다.

미디어 업체로 하여금 광고 판매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임으로써 롱테일(long tail)이라는 형태로 변화하도록 한다. 그렇게 한다면 기존에는 광고를 잘 하지 않던 이들까지도 타킷팅이 잘 된 저렴한 광고를 구매하도록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구글은 사용자들에게 신문이나 책, 잡지를 자유롭게 검색하도록 권장한다. 해당 발행물들 역시 검색 트래픽을 활용해서 무료로 자신들을 홍보하고 광고를 판매해 수익을 창출한다. TV 방송사나 영화사들은 유튜브를 홍보채널 겸 온라인 배급시스템으로 활용하도록 권장한다. 광고주들에게는 구글이 2007년에 인수한 디지털 광고 서비스 업체 더블클릭(Doubleclick)을 통해 온라인 광고를 하도록 권한다.

구글의 수입은 2004년 32억 달러이던 것이 2007년에는 166억 달러로 뛰었다. 세계적 불황을 비웃기라도 하듯, 구글은 2008년에 42억 달러의 수익을 거두었고 매출은 218억 달러로 상승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97%가 광고 수입이었다.

사용자가 텍스트 광고를 클릭할 때만 광고료를 부과해서 광고주들 중에서 우군을 확보했고, 무료이자 2009년 초반까지 광고가 붙지 않았던 구글 뉴스로 뉴스독자들 중에서 우군을 확보했으며, 광고 수익과 신규 고객을 발생시켜 줌으로써 웹사이트와 소규모 사업자들 중에서 우군을 확보했다. 구글은 두 번째 경매 프로그램 애드센스 때부터 수입의 20%만 자기 주머니에 넣고 나머지는 웹사이트들에게, 아니 구글 표현을 빌리자면 사업 파트너들에게 돌려 주었다. 2008년에 구글은 총 50억 달러가 넘는 돈을 수십만에 달하는 '파트너들'에게 제공했다.

G메일, 구글 뉴스, 구글 어스, 구글 맵스, 구글 비디오, 구글 번역, 피카사(Picasa-디지털 사진 공유), 구글 클래스룸, 구글 북스(발행된 모든 책 검색), 구글 트렌드 (검색량 통계 제공), 오컷(Orkut-인맥, 친목 사이트), 여기에 데스크톱(Desktop)이나 문서도구(Docs), 구글 플레이같은 '클라우드 컴퓨팅(cloud computing)' 응용 프로그램까지 제공한다.

구글에서 사용하는 컴퓨터는 보통 PC들로 구성된 컴퓨터 클러스터들인데, 이 클러스터들은 일을 병렬적으로 처리하여 방대한 양의 데이터베이스를 처리한다. 특히 여러 대의 PC를 운영하면서 계속적인 데이터베이스를 처리하기 위해 한 컴퓨터에 오류가 났을 경우 그 컴퓨터는 꺼지고, 다른 컴퓨터가 일을 계속 처리하도록 한다. 구글은 이러한 방식이 거대하고 비싼 컴퓨터(서버)를 대신하는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고 이러한 방식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 사업에도 투자를 하여 알파고나 무인자동차의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구글의 철학은 You can make money without doing evil.(악해지지 않고도 돈을 벌 수 있다.)와, You can be serious without a suit.(정장 없이도 진지해질 수 있다) 그리고 Work should be challenging and the challenge should be fun.(일은 도전이어야 하고 도전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

간단히 요약하면 돈을 벌때 나쁜일이 아닌 좋은 일을 통해 돈을 벌자는 의미이다.

구글 코리아()는 2003년 3월부터 한국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2005년에 한국 진출을 선언하였고 2006년에 설립한 기업이다.

구글은 한국의 포털사이트인 다음, 네이버와 다르게 고객센터를 두고 있지 않다. 따라서, 구글직원과 직접 연락하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포럼을 통하여 google employee와 의견 공유가 가능하다.

블로그, 카페, 웹페이지에서 적었던 글은 구글로봇이 수집하여 보관한다. 이를 삭제하려면 웹마스터도구를 이용해야 하는데, 구글의 삭제조건에 들지 않으면 삭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유럽연합에서 잊힐수 있는 권리에 대해서 인정함에 따라, 이에 맞추어 구글도 지울 수 있도록 구글로봇을 수정하고 있다.

블로그 검색을 통해 블로거의 글을 검색할 수 있다. 다만, 블로그를 폐쇄했어도 자신이 작성했던 글에 대해선 계속 검색이 되어 삭제할 방법이 없다. 설사 웹마스터를 통해 삭제를 했어도 블로그 검색에 있던 글은 영구적으로 삭제가 불가능하며, 글을 재발행하는 방법밖엔 없다.

한국어판 구글 어시스턴트에서 재밌는 얘기를 해달라고 하자 나치의 만행인 홀로코스트를 재밌는 이야기랍시고을 하거나 아예 사용도 안 했으며, 더 나아가 아예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쓰지 말고 아이폰을 쓰자며 불매운동까지 일어났다.
결국 이 사건은 독일을 비롯한 해외에도 퍼졌으며 당장 시정하고 사과할 것을 구글에 요구했다. 다행히도 문제가 되는 회화는 어시스턴트에서 지워졌으나 이에 대한 해명은 하지 않았다.

구글에 가입하려면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13세 이상이어야 한다. 다만 대한민국, 스페인에서는 14세 이상, 베트남에서는 15세 이상, 네덜란드에서는 16세 이상 가입할 수 있다.

일부 구글 서비스는 특정 연령 요건이 있다.




#Article 63: 벡터곱 (163 words)


선형대수학에서, 벡터곱(vector곱, ) 또는 가위곱()은 수학에서 3차원 공간의 벡터들간의 이항연산의 일종이다. 연산의 결과가 스칼라인 스칼라곱과는 달리 연산의 결과가 벡터이다. 물리학의 각운동량, 로런츠 힘등의 공식에 등장한다.

두 벡터  와 의 벡터곱은 라 쓰고(쐐기곱과 연관지어 라고 쓰기도 한다.),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식에서 는 와 가 이루는 각을 나타내며, 은 와 에 공통으로 수직인 단위벡터를 나타낸다.

위 정의에서의 문제점은 와 에 공통으로 수직인 방향이 두개라는 점이다. 즉, 이 수직이면, 도 수직이다.

어느 것을 두 벡터의 벡터곱으로 할 것인가는 벡터 공간의 방향()에 따라 달라진다. 오른손 좌표계에서는 는, 가 오른손 좌표계 방향을 따르도록 정의되고, 왼손좌표계에선 마찬가지로 이 순서의 세 벡터가 왼손 좌표계 방향을 따르도록 정의된다. 이와 같이 좌표계의 방향성에 의존하기 때문에, 두 (참) 벡터의 벡터곱은 참 벡터가 아니라 유사벡터다. (반대로, 참 벡터와 유사벡터의 벡터곱은 참 벡터다, 하지만 유사벡터와 유사벡터의 벡터곱은 슈도벡터다.)

벡터곱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다.

a, b, c ∈ R3, α ∈ R이라 하자.

벡터곱은 벡터 미분 연산인 회전 (∇×)의 정의에 등장하고, 자기장에서 움직이는 전하가 받는 힘을 기술하는 로런츠 힘의 공식에 등장하며, 돌림힘과 각운동량의 정의에도 나온다.




#Article 64: 빅토르 초이 (611 words)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 1962년 6월 21일 ~ 1990년 8월 15일)는 소련의 록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 겸 영화배우이며, 소련 록 음악 밴드 키노(КИНО)의 리더였다.

빅토르 초이는 1962년 6월 21일,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아버지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최동열)와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슬하 무녀독남 외동아들로 출생하였다. 친조부 막심 초이(최승준)는 본래 대한제국 함경북도 성진 출생이었고 후일 일제 강점기 초기에 러시아 제국으로 건너간 고려인 출신이었다.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 때 소련 카자흐스탄 사회주의 자치공화국 키질로르다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7세 때부터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초기 곡들은 레닌그라드 거리에서의 삶, 사랑과 친구들과의 어울림 등을 다루고 있다. 노래의 주인공은 주로 한정된 기회만이 주어진 채 각박한 세상을 살아나가려는 젊은이였다. 이 시기에 록은 레닌그라드에서만 태동하고 있던 언더그라운드의 한 움직임이었으며, 음악 차트 등의 대중 매체들은 모스크바의 팝 스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가수들에게만 허가를 내 주었고, 집과 녹음실 등 성공이 필요한 많은 것들을 제공하여 길들였다. 그러나 록 음악은 그 당시 소련 정부에게 너무도 마땅치 않은 음악이었다. 록은 자본주의 진영의 록 그룹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외에도 젊은이들을 반항적으로 만들었으며, 의사 표현의 자유 등 표현 관련 가치를 중시했다. 따라서 록 밴드들은 정부로부터 거의 원조를 받지 못했고 관영 매체에 의해 마약 중독자나 부랑자라는 편견으로 그려지는 수준이었다.

빅토르 초이는 레닌그라드에 있는 세로프 미술전문학교에 입학였으나, 결국 낮은 성적 때문에 1977년에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 후 레닌그라드 기술전문학교에서 목공업을 공부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또 중퇴하였다(이와 같은 사항들로 인하여 그의 학력은 전문대학 중퇴이다.). 그러나 그는 이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록 음악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는 보일러 수리공으로 일을 하면서 파티 등의 장소에서 자신이 만든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한 연주를 록 그룹 아쿠아리움의 멤버였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가 보게 되어, 그레벤시코프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밴드를 시작하게 된다.

레닌그라드의 록 클럽은 록 밴드들이 연주할 수 있던 소수 장소에 속했다. 이곳의 연중 록 콘서트에서 빅토르 초이는 처음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그는 두 명의 아쿠아리움의 멤버들이 연주를 맡은 가운데 솔로로 연주한다. 그의 혁신적인 가사와 음악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가 유명해지기 전에 그는 음악하는 사람들이 도전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실험적으로 가사와 음악을 만들었다. 이런 시도는 성공을 거두고, 데뷰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멤버들을 모아 키노(러시아어로 영화, 극장이라는 뜻이다)를 결성한다. 그들은 빅토르 초이의 아파트에서 데모 테이프를 만들고, 이 테입은 처음엔 레닌그라드, 그리고 나중에는 전국의 록 매니아들에게 퍼지게 된다.

이후 몇 개의 앨범이 더 나왔으며, 대부분이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으며 밴드는 인기를 유지했다. 그는 당시 소련 젊은이 모두의 우상이었지만, 그런 것에 비하여 그는 소위 비교적 보통 수준의 삶을 살았다. 그는 계속 아파트 빌딩의 보일러 실에서 살며 일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즐기고 있으며 정부의 보조를 받지 못하고 있고, 자신들의 앨범은 공짜로 복제되어 퍼지기 때문에 밴드를 유지하기 위하여서라도 금액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런 소박한 삶의 방식은 대중들이 그와 더욱 친밀감을 느끼기에 매우 충분했다.

음모론에 따르면, KGB가 의도적으로 초이를 살해했다고 한다. 평소 반전과 평화 사상을 주장하던 초이가 러시아 권력자들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트럭 기사가 종적을 감추고, 초이에게 유리한 목격자들의 증언이 기각되었으며(초이는 졸지도 운전 규칙을 어기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트럭 기사가 그에게 돌진했다는 사실), 시체가 봉인된 관에 담겨 서둘러 매장되었다는 사실 등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곳이 아니지만, 현재 러시아 경찰과 정부는 27년 동안 이 사안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놀랍게도 교통사고에서 온전하게 건질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다음 앨범에 쓰일 그의 목소리를 담은 테이프이었다. 목소리는 남은 멤버들의 나머지 녹음과 합쳐져 현재는 블랙 앨범으로 불리는 앨범으로 남아 있다. 이 유작 앨범은 밴드의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며 러시아 록 역사에 있어서 키노의 자리를 확고하게 했으며, 빅토르 초이를 최고의 영웅이자 전설로 만들었다.

키노가 소비에트 음악과 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들은 이전의 다른 어떤 그룹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음악과 가사로 노래를 만들었다. 키노는 모던 러시아 록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키노는 아직도 러시아 전역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레닌그라드 벽에는 그들에 대한 그라피티가 그려지고 있으며,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가에는 한 벽 전체가 그들에게 헌정되었으며, 그곳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팬들이 모인다. 사망 10주기였던 2000년에는 러시아의 록 밴드들이 모여 빅토르 초이의 38번째 생일을 맞아 빅토르 초이의 헌정 음반을 만들었다.




#Article 65: 무리수 (211 words)


무리수(無理數, irrational number)는 두 정수의 비의 형태로 나타낼 수 없는 실수를 말한다. 즉, 분수로 나타낼 수 없는 소수이다. 

이에 반해 두 정수의 비에 의해 나타낼 수 있는 수를 유리수(분수)라 한다. 이것도 소수이다. 

유리수의 집합은 로 정의하고,
무리수의 집합은 로 정의한다.

무리수는 소수점 이하로 같은 수의 배열이 반복적으로 나타나지 않는(순환하지 않는) 무한소수이다.

무리수는 다시 와 같은 대수적 수와  등의 초월수로 나뉜다.

무리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증명한 것은 고대 그리스 피타고라스 학파로 전해진다. 히파소스는 이등변 직각삼각형의 밑변과 빗변의 비는 정수의 비율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는 우주가 완벽하여 모든 것이 정수의 비로 표현될 수 있다고 믿었던 피타고라스 학파에 충격을 주었다. 전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 학파의 동료들이 ‘우주의 섭리에 거스르는 요소를 만들어낸’ 히파소스를 살해했다고 하며, 죽이진 않고 추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 10권을 포함한 고대 그리스 수학책에서는 유리수를 비로 나타낼 수 있는 길이를 ‘말할 수 있는()’ 길이, 그렇지 못한 것을 ‘말할 수 없는()’ 길이라고 불렀다. 알로고스는 글자 그대로 로고스가 없다는 뜻의 단어로, 말 없음·이성 없음 등을 뜻한다. 이것이 라틴어 로 번역되어 지금에 이른다.

가장 간단히 무리수임이 증명되는 수는 과 같은 꼴의 수일 것이다. 증명은 귀류법을 사용하며, 다음과 같다:

무리수를 최초로 발견한 것은 일반적으로, 2의 제곱근이 유리수가 아님을 발견한 피타고라스와 그 제자들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한 증명의 한 가지 방법은 다음처럼 귀류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일반화하여, 제곱수가 아닌 자연수의 제곱근은 무리수임을 증명할 수 있다.




#Article 66: 플랑크 상수 (347 words)


플랑크 상수(Planck常數, , 기호 h)는 입자의 에너지와 드브로이 진동수의 비 ()이다. 양자역학의 기본 상수 중 하나다. 이 상수를 도입한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의 이름을 땄다. 기호는 라틴 문자 이다. 유니코드 기호 ()가 있다.

새로운 정의는 2019년 5월 20일 세계 측정의 날부터 발효되었다.

외에, 다음과 같이 정의되는 가 대신 쓰이기도 한다. (양자역학에서 보다 더 많이 사용되는 형태이다.)

식에서 는 원주율을 나타낸다. 이 기호는 영어에서는 '( 에이치 바)', 독일어에서는 )(하 크베어)로 읽는다. 이 상수 는 폴 디랙의 이름을 따 디랙 상수(Dirac's constant)라고 부른다. 유니코드 기호 가 있다.

는 각운동량의 양자이다. 계의 임의의 축에 대한 각운동량은 언제나 의 정수배의 값으로 양자화한다.

는 또 불확정성 원리를 기술하는 식에도 등장한다.
그래서 가 보다 더 기본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 밖에 는 플랑크 단위의 정의에 사용된다.

처음에 고전물리는 뉴턴의 역학 이론에서 시작되었지만 재능있는 수많은 학자들이 물리에 뛰어들어 그 영역을 전자기까지 확장을 시켜 모든 영역에서 승승장구하였었다. 막스 플랑크가 물리를 하던 19세기 후반, 물리는 더 이상 발전이 없을 것이며 소소한 몇몇 문제만 해결되면 완벽한 학문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매우 팽배하였다. 하지만 고전물리는 흑체 복사와 관련된 부분에서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것은 고전물리가 예측하는 결과와 흑체 복사의 실험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긴 파장에서는 잘 일치하지만 짧은 파장에서는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에 대한 사고 실험은 다음과 같다.

아주 잘 밀폐된(외부와 에너지 교류가 없는) 한 용기 안에 흑체와 한 줄기 빛을 집어넣고 용기를 다시 밀폐한다고 하자. 이 경우 흑체는 빛을 흡수하여 파장의 형태로 다시 방출을 하게 되는데 고전물리의 등분배법칙에 의하면 흑체가 방출하는 에너지는 모든 파장에 골고루 나뉘어야 한다. 이 말은 아주 작은 빛을 넣게 되더라도 상자를 열게 되면 엑스선이나 감마선이 나오게 되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모순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몇의 물리학자들이 매달리게 되었다. 막스 플랑크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혁명적인 착상을 하였다. 그것은 '에너지는 주파수에 비례한다'라는 가정이었다. 즉 에너지가 양자화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 가정에서 에너지와 주파수를 연결해주는 비례상수가  인 것이다. 물론 플랑크는 가정을 통해서 흑체 복사에 관한 문제를 정리하였고 그 식은 실험과 잘 일치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하지만 플랑크는 저 식에 대해서 큰 의미를 두기보다는 실험결과와 일치시키기 위해 어쩔수 없이 도입시킨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역사적으로, CODATA 플랑크 상수 권장값은 지수부를 제외하고 다음과 같다. CODATA 권장값은 새로운 측정 결과를 반영하여 몇 년마다 개정된다.




#Article 67: 막스 플랑크 (238 words)


막스 카를 에른스트 루트비히 플랑크(, 1858년 4월 23일 ~ 1947년 10월 4일)는 양자역학의 성립에 핵심적 기여를 한 독일의 물리학자이다.

독일의 킬에서 태어난 플랑크는 1874년 뮌헨에서 물리학 공부를 시작했고, 1879년 베를린에서 졸업했다. 1880년 뮌헨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885년에 고향 킬로 돌아가 1886년에는 마리 메르크와 결혼한다. 1889년에는 베를린으로 가 이론 물리학과장을 맡는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엔, 아돌프 히틀러에게 유대인 과학자들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설득하려 했다. 플랑크의 아들 에르빈(Erwin)은 1944년 6월 20일의 히틀러 암살 기도와 관련되어 처형되었다. 괴팅겐 (Göttingen)에서 그가 사망한 후, 카이저 빌헬름 학회는 그의 이름을 따 막스 플랑크 연구소(Max-Planck-Gesellschaft zur Förderung der Wissenschaften; MPG)로 개명하였다.

막스 플랑크 자신은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생존하였으나, 둘째 아들 에르빈 플랑크는 언급한 대로 2차 대전 중 처형당했고, 첫째 아들 카를 플랑크는 1차 대전 중 서부 전선에서 전사하였다. 한편 그의 딸이 출산 중 사망하고, 그가 아끼는 많은 후배 과학자들이 유대인 박해 때문에 고초를 입거나 이를 피해 망명하는 등,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그의 개인사는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플랑크는 스위스의 아마추어 과학자에 불과하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발굴한 사람이며, 1차 대전 기간 중 과학계의 교류가 완전히 중단되는 것을 막고자 끝까지 노력하였다. 플랑크는 인격적으로 많은 동료와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독일 민족주의와 나치즘 사이에서 최후까지 균형을 유지하고자 애쓴 원로 중 한 사람이었다.

플랑크는 양자역학의 창시자로 위대한 과학자인 동시에, 독일 과학계의 수장으로 후배 과학자 발굴과 과학계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이는 20세기 독일 과학계의 눈부신 성과에 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핵심적인 기여를 한 양자역학에 의구심을 품었으며 양자역학을 수용하지 않고 부정하는 태도를 지녔다.




#Article 68: 포인팅 벡터 (152 words)


포인팅 벡터()는 전자기장이 가진 에너지와 운동량을 나타내는 벡터로, 전기장과 자기장의 벡터곱이다.

영국의 존 헨리 포인팅()이 1883년에 유도하였다.

포인팅 벡터 S는 국제단위계에서 다음과 같다.

CGS 단위계에서는  대신 를 쓴다.

포인팅 벡터의 크기는 전자기장의 에너지 선속 밀도(, 단위 시간 및 단위 면적 당 에너지)의 크기와 같다. 포인팅 벡터의 방향은 에너지가 전달되는 방향과 같으며 항상 전기장 및 자기장과 수직이다.

포인팅 벡터는 전자기장의 에너지뿐만 아니라 운동량 와 각운동량 과도 다음과 같이 연관되어 있다.

포인팅 정리()는 전자기장을 포함한 계에서의 에너지 보존 법칙이다. 즉, 전자기장이 한 일의 양은 전자기장이 잃게 되는 에너지의 양과 같다는 정리다. 식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

우변의 첫 번째 적분은 부피 안에 저장된 전자기장의 에너지이며, 두 번째 적분은 표면의 수직 방향의 전자기파로 방출되는 에너지다. 즉, 포인팅 정리에 따르면, 전자기력에 의하여 전하가 받은 일의 양은 전자기장에 저장된 에너지의 양의 감소량과 표면의 수직 방향의 전자기파로 방출되는 에너지량과 같다.

역학적 에너지 밀도, 전자기장의 에너지 밀도 식을 이용하여 포인팅 정리 식과 발산정리를 이용하면 포인팅 정리의 미분형을 얻을 수 있다.




#Article 69: 미세 구조 상수 (140 words)


미세 구조 상수(微細構造常數, , 기호 α) 또는 조머펠트 미세 구조 상수(Sommerfeld -)는 전자기력의 세기를 나타내는 물리상수다. 원자물리학과 입자물리학에서 자주 나타난다. 1916년 아르놀트 조머펠트가 발견하였다. 원래 조머펠트가 원자 방출 스펙트럼의 미세 구조를 연구할 때 발견하였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미세 구조 상수 는 국제단위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여기서 는 기본 전하, 는 원주율, 는 디랙 상수, 는 빛의 속도, 은 진공의 유전율이다. 이 값은 두 전자가 (전자의 컴프턴 파장)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을 때, 그 전기적 위치 에너지와 전자의 정지 에너지 의 비로 해석할 수 있다.

CGS 단위계에서는  인자가 전하량에 포함되므로 식이 다음과 같이 바뀐다.

는 차원이 없는 상수이기 때문에, 그 값은 단위계에 상관없이 같다. 여기에 들어가는 기본 상수값을 대입해보면

이 나온다. 이 값은 실제 측정값과는 차이가 있다. 여기에 양자 전기역학에서 예견하는 전자들의 상호작용을 통한 보정을 고려할 수 있다. 이는 전자의 자기 모멘트와 미세 구조 상수와의 관계를 통해 구해진 것으로, 다음과 같다.




#Article 70: 힐베르트 공간 (324 words)


함수해석학에서, 힐베르트 공간(Hilbert空間, )은 모든 코시 열의 극한이 존재하는 내적 공간이다. 유클리드 공간을 일반화한 개념이다.

가  또는 라고 하자. -힐베르트 공간 은 완비 거리 공간을 이루는 -내적 공간이다. 내적 공간으로서, 힐베르트 공간은 표준적인 위상 공간 및 거리 공간 및 벡터 공간 및 노름 공간의 구조를 갖는다.

이와 동치로, -힐베르트 공간을 다음과 같은 평행사변형 항등식(平行四邊形恒等式, )을 만족시키는 -바나흐 공간 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경우, 내적 구조는

가 된다.

힐베르트 공간 의 정규 직교 기저 는 다음과 같은 두 성질을 만족시키는 부분집합이다.

초른의 보조정리에 의하여, 모든 힐베르트 공간은 정규 직교 기저를 갖는다. 주어진 힐베르트 공간 의 모든 정규 직교 기저의 크기는 항상 같은 기수임을 보일 수 있으며, 이 기수를 힐베르트 공간의 차원 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힐베르트 공간의 정규 직교 기저는 벡터 공간의 기저를 이루지 않으며, 힐베르트 공간의 차원은 벡터 공간으로서의 차원보다 작거나 같다. 이는 벡터 공간의 경우 를 필요로 하지만, 힐베르트 공간의 경우 가 오직 조밀 집합임이 족하기 때문이다.

두 -힐베르트 공간 ,  사이에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따라서, 힐베르트 공간들은 차원에 따라 완전히 분류된다. 또한, -힐베르트 공간 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즉, 분해 가능 힐베르트 공간의 차원은 음이 아닌 정수이거나 아니면 가산 무한 이다.

리스 표현 정리에 따라서, 힐베르트 공간 는 스스로의 연속 쌍대 공간 와 동형이며, 만약 일 경우 이는 표준적() 동형이다.

가  또는 라고 하고, 가 측도 공간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렇다면 L2 공간 는 -힐베르트 공간을 이룬다.

만약 가 셈측도가 부여된 집합이라면

이며, 함수

는 의 정규 직교 기저를 이룬다.

만약 가 분해가능 시그마 대수(로 정의한 거리 공간이 분해 가능 공간인 경우)이며, 또한 가 시그마 유한 공간(가산개의 유한 측도 부분집합들의 합집합)이라면, 는 분해 가능 공간이다.

힐베르트 공간은 해석학의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며, 특히 편미분 방정식 이론에서 널리 쓰인다. 힐베르트 공간 중 하나인 소볼레프 공간이 편미분 방정식을 다룰 때 주로 등장한다.

푸리에 해석이 힐베르트 공간에서 이뤄진다.

양자역학에서, 양자계의 상태 공간은 분해 가능 힐베르트 공간으로 나타내어진다.

다비트 힐베르트가 1912년에 힐베르트 공간 을 정의하였다. 이는 유클리드 공간이 아닌 최초의 힐베르트 공간으로 여겨진다. 이후 1929년에 존 폰 노이만 이 힐베르트 공간을 추상적으로 정의하였다.




#Article 71: 양자역학 (1003 words)


양자역학(量子力學, )은 분자, 원자, 전자, 소립자와  미시적인 계의 현상을 다루는 즉, 작은 크기를 갖는 계의 현상을 연구하는 물리학의 분야이다. 또는, 입자 및 입자 집단을 다루는 현대 물리학의 기초 이론이다. '아무리 기이하고 터무니없는 사건이라 해도, 발생 확률이 0이 아닌 이상 반드시 일어난다'는 물리학적 아이디어에 기초한다. 현대 물리학의 기초인 양자역학은 컴퓨터의 주요 부품인 반도체의 원리를 설명해 주는 등 과학기술, 철학, 문학, 예술 등 다방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 20세기 과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론으로 평가된다.

양자역학은 모든 역학, 전자기학(일반 상대성 이론은 제외)을 포함하는 고전 이론을 일반화한다. 양자역학은 고전역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제공한다. 양자역학의 효과는 거시적으로는 관측이 어렵지만 고체의 성질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양자역학 개념이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드하스-판알펜 효과는 양자역학을 통해서만 설명이 가능하다. 물론, 원자 또는 그보다 작은 영역에서는 분명해진다.

양자역학이라는 용어는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보른(Max Born, 1882~1970)이 처음 제시했다. 독일어 'Quantenmechanik(퀀텐메카닉)'이 영어 'Quantum mechanics'로 번역되었고 일본에서 이를‘量子力學(료오시리키가쿠)’라 번역했는데 이것이 한국에 그대로 들어와 ‘양자역학'이라 부르게 되었다.

양자역학이란 말을 이해하려면 ‘양자’와 ‘역학’을 각각 살펴보는 것이 좋다. ‘양자(量子)’로 번역된 영어의 quantum은 양을 의미하는 quantity에서 온 말로, 무엇인가 띄엄띄엄 떨어진 양으로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학(力學)’은 말 그대로는 ‘힘의 학문’이지만, 실제로는 ‘이러저러한 힘을 받는 물체가 어떤 운동을 하게 되는지 밝히는 물리학의 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힘과 운동’의 이론이다. 이렇듯 양자역학이란 띄엄띄엄 떨어진 양으로 있는 것이 이러저러한 힘을 받으면 어떤 운동을 하게 되는지 밝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료와 평화의 회복과 더불어 물리학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1918년도의 노벨상은 패전국 독일의 물리학자인 막스 플랑크에게 수여되었으며(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921년, 닐스 보어 1922년),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양자론이 진전되었다. 그 주요 중심지는 1921년 이론물리학 연구소가 개설된 코펜하겐(닐스 보어)을 비롯하여 뮌헨(아르놀트 조머펠트), 괴팅겐(막스 보른, 막스 플랑크), 레이던(파울 에렌페스트)이며, 그 밖에 취리히의 에르빈 슈뢰딩거, 베를린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가담하였다. 이 형성기는 또한 젊은 세대의 활약이 특징적이었다.

양자역학 형성의 길은 두 갈래로 되어 있다. 한쪽은 보어의 원자 모형에서 출발하여 대응원리(對應原理)에서 행렬 역학으로 통한 길이다. 또 한쪽은 아인슈타인의 광자로 비롯하며, 루이 드브로이의 물질파를 거쳐서 도달하는 파동역학의 길이었다. 이 둘은 그 형성과정이나 수립된 이론이 전혀 달랐지만 얼마 안 가서 실은 같은 내용이라는 것이 판명되고, 통일체로서의 양자학으로 간추려졌다. 그리하여 양자역학의 형성이 일단락될 무렵, 물리학은 재차 새로운 단계에 이르렀다.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은 다른 관점에서 출발하였고, 전혀 다른 형태를 갖추고 형성되었으나, 그 이룩한 결과는 일치했다. 이것을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 에르빈 슈뢰딩거는 파동역학에서 행렬역학의 유도를 시도하여 양자의 동등성(同等性)을 증명하는 데 성공하였다. 폴 디랙과 파스쿠알 요르단()은 변환이론(變換理論)을 수립하였으며, 이것으로 두 개의 이론은 하나로 통합되어 1926년경에는 양자역학이 성립되었다.

양자역학의 형식은 성립되었어도, 그 물리적 해석에는 아직도 많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예컨대 파동의 개념에 대하여서도 파동역학의 창시자 슈뢰딩거는 이것을 실재(實在)하는 것으로 보았지만 아인슈타인의 반론을 받고, 보른의 확률해석이 이에 대체되었으나, 마침내 이것도 불충분하여 많은 모순으로 유도되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리하여 결국 낡은 물리학의 사고방식으로는 양자론의 개념은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음이 차차 확실해졌고, 드디어 1927년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등장하였다. 파와 입자의 두개의 상(像)을 결부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이 관계는, 미시적 세계에서는 일상경험에서 만들어진 관념은 이미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보어는 이 생각을 다시 자연인식 일반에 펼쳐 양자역학의 일관된 해석을 수립하려고 하여, 같은 해 상호보완성 원리를 제창하였다. 현상의 시공적(時空的)인 기술과 인과적 관계와는 서로 보충하는 동시, 서로 배제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아인슈타인은 이와 같은 새로운 양자론의 해석에 찬성하지 않고 일관하여 EPR 역설 등 의문을 계속 제출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기묘한 양자역학의 주장은 당시의 사상계에도 큰 영향을 주어, 물질의 부정이나 주관주의·실증주의 경향의 세력이 증가하는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

양자역학(量子力學)의 결론들은 당시 과학자(및 일반인)들의 직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기에, 이 이론이 실재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는지에 대해 많은 해석과 철학적 논쟁이 있었다.

많은 수의 물리학자들은 보어 등이 개발한 코펜하겐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해석에서 양자역학의 확률적 측면들은 우리의 지식의 부족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 실재 그 자체이며, 따라서 결정론적 이론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양자역학을 개발한 이들 중 한 명인 아인슈타인은 이 이론의 무작위성을 좋아하지 않았고, 양자역학의 현상인 도깨비 원격현상등을 강력히 부정하면서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양자역학의 근본에는 보다 깊은 국소적 숨은 변수 이론이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에 대해 여러 가지 반박을 제시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EPR 역설이라 불린다. 벨은 EPR 역설을 이용해, 조건법적 명확성()을 가정한 경우 양자역학과 국소적 이론 사이에 실험적으로 확인 가능한 차이가 있음을 증명했다. 실험을 통해서, 실제 세계는 조건법적으로 명확하지 않거나 비국소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영문학 교수이자 작가인 루이스는 비결정론이 그의 철학적 신념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양자역학을 불완전한 이론으로 보았다. 그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존재론적 비결정성이 아닌 인식론적 한계를 보여줄 뿐이라고 생각했으며, 다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이유에서 숨은 변수 이론을 지지했다. 코펜하겐 해석을 둘러싼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은 당시의 양자역학을 둘러싼 논쟁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현재 표준적인 양자역학의 해석은 코펜하겐 해석이나,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해석들이 존재한다.

양자역학이라는 새 이론은 원자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탁월한 이론이었다. 학자들은 이 이론을 토대로 점점 더 많은 문제들을 풀어나갔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 새로운 이론은 ‘우리가 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아주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를 새로 꺼내기 시작했다.

원자와 관련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역학은 ‘파동함수6)’라고도 하고 ‘상태함수’라고도 하는 수학적인 장치를 사용한다. 양자역학이 제안된 초창기부터 많은 물리학자들은 파동함수의 의미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파동함수가 정확히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그전까지 물리학에서는 대체로 수학을 이용해 방정식이나 공식을 만들면, 그 의미를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결코 알 수 없는 것을 방정식이나 공식에 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는 가장 핵심이 되는 파동함수가 정확히 무엇인지 아무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듯 보였다. 게다가 하이젠베르크는 이 양자역학이라는 이론 안에 소위 ‘불확정성 원리7)’가 있음을 밝혔는데, 이 또한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말해 주었다. 실용적으로 물리현상을 아주 잘 설명해 주는 이론이 있는데, 정작 그 이론은 우리가 안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보다 불과 100여 년 전에 프랑스의 피에르 라플라스(Pierre Simon de Laplace, 1749~1827)는 물리학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파동함수와 불확정성 원리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가 원자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그 개념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프랑크와 보어의 초기 양자역학은 전자의 궤도가 점프하는 현상을 강조한 반면 후기의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은 전자의 위치가 확률적 분포로밖에 알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초기의 양자역학은 원자폭탄, 반도체 등에 이론적 배경을 제공했고 후기의 양자역학은 물질에 대한 인간의 인식에 큰 변화를 주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특히 후기 양자역학은 인간의 인식의 한계성을 인정함으로써 현대철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으로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실험가능한 물리학의 혁명적 발전이 실험이 불가능한 한계에 다다랐다는 점을 내포하기도 했다. 물리학은 실제로 20세기 후반부터 지금의 21세기 초반까지 끈 이론, 통일장 이론 등 여러 이론을 내놓았으나 실험이 불가능한 가설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Article 72: 양자역학의 수학 공식화 (110 words)


양자역학의 수학적 공식화는 양자역학에 등장하는 개념들과 공식을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서술하는 것이다. C* 대수 이론, 스튀름-리우빌 이론 등이 쓰일 수 있지만, 보통은 힐베르트 공간중 하나인 L2 공간에 작용하는 선형 연산자를 통해 기술한다. 이는 존 폰 노이만이 1930년대에 완성한 것으로, 20세기 이전에 개발된 물리학의 수학적 모형들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여기에 나타나는 구조들 중 상당수는 함수해석학에서 나온 것이다. 에너지와 운동량 등의 물리적 관측량은 더이상 위상 공간상의 함수의 값이 아닌 선형 연산자의 고윳값으로 다루어진다.

편의상 브라-켓 표기법과 슈뢰딩거 묘사를 쓰자. 양자역학의 공준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는 플랑크 상수다. 이를 슈뢰딩거 방정식이라고 부른다. 대신 밀도 연산자 를 쓰면, 그 시간 변화는 다음과 같다.

이 수학적 틀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비가환 연산자에 대한 정리가 된다.




#Article 73: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1241 words)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 , 1901년 12월 5일~1976년 2월 1일)는 독일의 물리학자이다. 불확정성 원리로 유명하며, 행렬역학과 불확정성 원리를 발견하여 20세기 초 양자역학의 발전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그는 1932년에 양자역학을 창시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막스 보른과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양자역학의 행렬적 형식을 1925년 발표했다. 1927년에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가장 유명한 과학적 업적인 불확정성 원리를 출판했다. 또한, 그는 난류의 유체역학, 원자핵, 강자성, 우주선, 소립자의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카스파르 하이젠베르크와 안니 베크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20년부터 4년동안 뮌헨-루트비히-막시밀리안 대학교와 괴팅겐-게오르크-아우구스트-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그는 뮌헨에서는 아르놀트 조머펠트와 빌헬름 빈에게 지도받았고, 괴팅겐에서는 막스 보른과 제임스 프랑크에게 물리학 교육을, 다비트 힐베르트에게 수학 교육을 받았다. 하이젠베르크는 1923년에 뮌헨에서 박사학위를 획득하고 1924년에 괴팅겐에서 하빌리타치온(박사학위 후에 따는 교수 자격증)을 획득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닐스 보어의 원자 모형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제자들에게 정성스럽게 관심을 가져주던 조머펠트는 이를 알고 하이젠베르크를 괴팅겐에서 열린 보어축제에 데려가 주었다. 보어는 축제에서 양자역학에 대한 강의를 하였고, 하이젠베르크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22년 6월의 일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조머펠트의 조언을 따라 난류에 대해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그는 논문에서 층류의 안정함과 난류의 성질을 연구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 주제를 잠시 다시 연구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막스 보른 아래에서 제이만 효과에 관해 연구했다. 이 연구는 그의 하빌리타치온 논문이 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1924년부터 1927년까지 괴팅겐에서 사교수로 있었다. 1924년 9월 17일, 하이젠베르크는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아서 코펜하겐 대학을 방문했다. 그는 거기서 닐스 보어와 연구를 하게 되었고, 1925년 5월 1일에 괴팅겐으로 귀환했다. 괴팅겐에서 그는 6개월에 걸쳐 막스 보른과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양자역학의 행렬적 형식을 개발했다. 1926년 5월 1일, 하이젠베르크는 코펜하겐에서 보어의 조수이자 대학 강사 일을 하게 되었다. 코펜하겐 생활 도중에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불확정성 원리를 개발하였다. 1927년의 사건이었다. 그 해, 하이젠베르크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물리학과 학과장을 맡게 되었다. 거기에서, 하이젠베르크는 파울리 배타 원리를 이용해서 물질의 강자성을 연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군은 입실론 작전에 따라 독일의 대표적인 핵물리학자들을 체포했다. 이에 따라 하이젠베르크 역시 체포당했고 조사받았다.
전쟁후 하이젠베르크는 이론 물리학자로서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이젠베르크는 1947~1948년에 걸쳐 초전도체에 관한 논문 세 편을 쓰며 초전도체의 이해에 기여했다.

하이젠베르크는 1957년에 서독의 첫 원자로를 기획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하이젠베르크는 카이저 빌헬름 과학 협회의 회장이 되었고, 1958년 협회가 뮌헨으로 옮겨지고 막스 플랑크 협회로 이름이 바뀔 때까지 회장직을 수행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또한 독일 연구 협회 회장, 핵물리학 위원회 회장,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재단 이사장을 했다. 1957년부터 하이젠베르크는 플라스마 물리학에 관심을 가졌고 핵융합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국제 핵물리 협회의 과학 방침 위원회의 회원이었으며, 몇 년 간은 위원장도 했다.

불확정성 원리(不確定性原理, )는 양자 역학에서 맞바꿈 관측량(commuting observables)이 아닌 두 개의 관측가능량(observable)을 동시에 측정할 때, 이렇게 관측한 두 개의 값 사이에는 물리적으로 한계가 존재한다는 원리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는 위치-운동량에 대한 불확정성 원리이며,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위치가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운동량의 퍼짐(또는 불확정도)은 커지게 되고 반대로 운동량이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위치의 불확정도는 커지게 된다. 이 말을 쉽게 풀어 쓰게 되면 관측을 하는 그 순간에도 물체는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관측한 값은 불확정한 값이 된다는 의미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임의의 양자상태에서 위치의 평균에 대한 제곱평균제곱근(RMS)편차 (X의 표준편차)는

운동량의 평균에 대한 제곱평균제곱근 편차 (P의 표준편차)는

두 표준편차의 곱은 다음과 같다.

즉, 위치와 운동량의 표준편차의 곱은 디랙 상수의 절반보다 같거나 크다.

하이젠 베르크는 원자 핵 분야에서도 탁월한 업적을 가지고 있다. 1932년 하이젠베르크는 핵이 중성자와 양성자로 구성된다는 새로운 이론을 발표하였다.

하이젠베르크가 시발점이 되어 시작된 소립자론의 연구와 그 발전 동향이다. 물질의 궁극이라 여겨지는 구성요소와 그 궁극요소의 운동을 연구하는 학문. 소립자와 그 상호작용을 기술하는 이론은 상대론적인 장의 양자론이다. 이 이론에 의해 여러 가지 소립자의 속성, 즉 질량, 스핀, 스핀과 통계성과의 관계 외에, 소립자의 반응에서 나타나는 각종의 보존법칙과, 이것과 결부된 소립자의 전하, 그 밖의 양자수가 규정된다. 그리고 만약 자연계에 어떠한 종류의 소립자가 존재하며 어떠한 상호작용하에 있는가를 안다면 이들 소립자에 관련된 물리량을 계산으로써 구해 실험과 비교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해진다. 그런데 실제로는 장의 양자론은 양자전자기학이라 불리는 특별히 잘 알려진 예를 제외하면 실험결과의 정량적 이해를 포함한 그 타당성을 증명하는 일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소립자에 임의의 상호작용을 도입하면 때때로 피할 수 없는 수학적 곤란을 일으키기 때문에 장의 양자론 자체에 본질적인 내부모순이 있다는 견해가 옛날부터 주장되어 왔다. 덧붙여 1950년 무렵부터 실험에 의해 새로이 여러 소립자가 발견되고, 강한상호작용을 하는 소립자의 종류는 점차 증가해 100종류까지 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와 같은 다양한 소립자의 존재를 통일적으로 기술하는 원리가 장의 양자론에는 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과도 관련해서 소립자를 기술하는 이론으로서의 장의 양자론의 유효성에 대한 부정적 견해도 종종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제기되었다. 그러나 소립자의 약한상호작용 및 강입자의 존재양식과 강입자의 강한상호작용에 관한 지식은, 이 시기에는 아직 현상론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 후 실험적 지식의 집적과 여러 현상의 이론적 분석이 급속히 진전됨에 따라, 한편에서는 공간반전의 불변성을 파괴하는 약한상호작용의 형태가 점차로 명백해짐과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강한상호작용의 영역에 있어서는 1956년의 사카타 모형에서부터 1964년의 쿼크 모형의 제창을 거치며 강입자는 이미 소립자가 아니라, 이에 대체하여 색이라 불리는 3성분의 전하를 가진 몇 종류의 쿼크장이 공통으로 하나의 게이지장과 상호작용함으로써 개개의 강입자가 구성된다고 하는 견해가 70년대 초에 확립되었다. 이러한 게이지장의 입자를 쿼크와 반쿼크를 풀처럼 붙여서 강입자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글루온이라 한다. 약한상호작용도 1967년 S. 와인버그, 68년 A. 살람에 의해 밝혀진 바와 같이, 이 상호작용을 담당하는 장, 즉 약보존장을 게이지장의 형식으로 기술하여 이것을 전자기적상호작용과 통일시킬 수 있게 되어 약한상호작용이 약한 이유 대해서는 약보존이 큰 질량을 가지기 때문이라고 이해되었다. 이것에 대해 강한상호작용이 강한 이유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쿼크와 반쿼크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글루온의 상호작용에서 도출해 보면, 이 둘이 멀리 떨어짐에 따라 무한히 강해진다는 특별한 성질을 가진다는 것으로써 설명된다.

소립자를 현대적으로 정의해 보면 소립자는 쿼크나 경입자와 같은 스핀 1/2의 페르미형 입자와 강·약-전자기적상호작용을 부여하는 몇 종류의 게이지장이며, 또 약-전자기적상호작용의 게이지불변성의 자발적 붕괴를 일으키는 몇 개의 스핀 0인 입자의 원리로부터 이끌어내진 것에서 더 나아가 이 3종류를 단 한 종류의 상호작용으로 통일하려는 견해가 1974년 H. 조지와 S.L. 글래쇼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 이론에 의하면 팽창우주론에 따라 우주 초기에 물체가 초고온·초고밀도 상태에 있었을 때 모든 상호작용은 단일한 양상을 띠고 있었고, 그 후 우주팽창에 따른 냉각에 의해 진공이 상변화를 여러 번 일으켜 상호작용의 분화가 진행되고 자유롭던 쿼크와 글루온은 가두어져 강입자를 만들어 현재 우리들이 알고 있는 물질세계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대통일의 상호작용은 쿼크와 경입자를 대등하게 보고 이것을 세대라 하는 표지로 분류하여, 각 세대의 쿼크와 경입자 사이에 각 세대 공통된 게이지장의 군에 의한 상호작용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이와 같은 대통일상호작용에서는 앞서 서술한 3종류의 상호작용 외에 쿼크와 경입자의 상호전화를 일으키는 상호작용이 나타나기 때문에 종래는 절대 안정한 소립자라고 여겨왔던 양성자조차 극히 장시간의 수명을 가지고 붕괴한다고 예상된다.

과학자들은 19 세기 말에 뉴턴역학과 맥스웰의 전자기학만 있다면 물리학의 모든 법칙들이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뉴턴역학은 입자 즉 눈에 보이는 역학을 담당하였고 맥스웰의 전자기학은 파동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즉, 이 시절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은 파동과 입자 로 나뉜다고 생각했다. 입자와 파동은 서로 다른 것으로 취급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에는 치명적인 문제, 즉, 흑체복사가 있었다. 흑체란 모든 전자기파를 흡수할 수 있는 물체인데 이로 이루어진 상자를 가열하였더니 흑체 안에 무한히 많은 파동들이 제각각의 에너지를 가지고 존재한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플랑크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데 이것이 양자역학의 시발점이 되었다. 플랑크는 실험 내용을 이용하여 강제로 수식을 만들었는데 이 수식이 의미하는 것이 파동 자체가 불연속적이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믿어 왔던 진리가 깨어지게 된 것이다. 얼마 후 아인슈타인은 광양자 이론을 발표한다. 이 이론은 빛이 입자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 실험이었다. 이로 인하여 빛은 파동이자 입자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불연속적인 값들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양자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물리량이 연속 값을 취하지 않고 어떤 단위량의 정수배로 나타나는 비연속 값을 취할 경우, 그 단위량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즉 모든 물리량이 불연속적인 값을 가지며 이 불연속적인, 즉 양자화된 것들의 움직임을 설명하여 주는 것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사람들이 어떠한 물체를 '본다'라고 하는 행위는 그 물체에 대하여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즉 가시적인 물체에 대하여만 적용될 뿐이다. 만약 이러한 물체가 빛의 입자만큼 작아지게 된다면, 이러한 관측 행위는 관찰 대상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불확정성의 원리란 것은 작은 입자들을 볼 때 그 입자들이 양자만큼 작아질수록 “관측”이라는 행동을 하게 되면 그 입자들은 그 관찰 행위 자체에 영향을 받게 되어 우리가 “관측”한 물리량에 착오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어떤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Article 74: 중국의 역사 (1659 words)


중국의 역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1250년 무정의 통치기인 상나라(기원전 1600~1046년 경)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하 문명은 여러 다른 문명의 영향을 받았으며 중국 본토에서는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이래 약 4000년 동안 한족을 포함한 수많은 민족들이 건국한 왕조가 흥망을 반복해 왔다. 한나라 때 중화민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이라는 말이 성립되었다. 서진의 멸망 이후로 변방의 이민족들이 대대적으로 침략해 화북을 차지했고 한족들은 강남으로 내려가 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당나라 멸망 이후로 중국을 재통일한 한족들의 왕조인 송나라 때는 중국 중세 문화가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몽골족의 몽골 제국에 의해서 멸망해 사라지게 된다. 이후 몽골 제국은 4개의 칸국과 원나라로 분열되게 된다. 몽골족의 왕조라고 할 수 있는 원나라는 중국 전토를 지배했다가 주원장을 필두로 한 한족들에 의해 북방으로 쫓겨나게 된다. 원나라를 몰아내고 다시 건국되어 중국을 통일한 한족들의 왕조인 명나라는 영락제 시절에 큰 전성기를 맞이했다가 여진족이 건국한 후금에 의해서 멸망하게 된다. 여진족은 국호를 후금에서 청나라로 바꾸고 중국대륙의 지배자로 군림한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 제1차 아편 전쟁과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에 패배한 이후, 중국 본토는 아시아의 병자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고 대만과 만주는 일본 제국에 지배당하고 중국 한족의 남조의 수도로서 상징적이던 난징은 이민족에게 유린당했던 것처럼 현대에는 일본 제국에 의해 난징 대학살과 강간으로 유린당한다. 홍콩은 영국이 지배했으며 마카오는 포르투갈이 지배하였다.

여진족이 건국한 청나라의 무능에 반발하여 태평 천국 운동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그 후 한족의 개혁파들에 의해 양무 운동과 변법 자강 운동이 차례로 일어났으나 반식민지로 전락한 중국은 힘이 없었고 열강의 지배와 간섭으로 실패했다. 한편 서태후 등 보수파의 사주로 반외세 운동인 의화단 운동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그 후 신해혁명이 일어나 1912년에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 국가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하지만 일본 제국에 의해 포섭되기도 하는 각지의 군벌에 의해 수많은 내전이 일어났고 몽골, 티베트의 독립 운동 등으로 말미암아 중화민국은 혼란에 싸여 분열되었다. 또한 일본 제국의 침략에 의해 중국 동부 지역을 잃고 난징이 유린을 당하며 중국 자체가 지배당할 뻔한 위험한 시기를 보냈다. 이 때 일본의 중국 정복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와 가까워졌으나 러시아 또한 중국에 조계지를 설치하고 중국 영토로 남하하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30년대에는 국공 내전(중국에서는 보통 “해방 전쟁”이라 칭함)과 중일 전쟁(중국에서는 보통 “항일전쟁”이라 칭함)이 발발하여 중국 각지가 전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중앙 정부가 2개 이상인 때에도 있었다. 

많은 중국인 가난한 농민, 소작농 계급들로 구성된 중국 공산당은 소련의 영향 아래에서 힘을 키웠고 그 후 중일 전쟁 중에 일본의 세력 아래에 있던 군벌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서 세력을 늘려 온 중국 공산당은 계속되는 오랜 내전으로 군인들에 의해 반복되던 민간인에 대한 살인과 강간, 방화에 지친 중국인들의 민심을 얻었다. 1945년에 일본이 미국에 패망하고 나서 중국 공산당은 중국 내에서 일어나던 국공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웠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매년 10월 1일을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절로 정하고 이를 기념한다.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고대의 전설적 제왕들이다. 삼황(三皇)은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 여와씨(女媧氏)를 말하며, 오제(五帝)는 황제헌원(黃帝軒轅), 전욱고양(顓頊高陽), 제곡고신(帝嚳高辛), 제요방훈(帝堯放勳:陶唐氏), 제순중화(帝舜重華:有虞氏)를 지칭한다.

중국에서는 이 시기를 ‘선진 시기’(先秦時期)라고도 한다. 하(夏) (기원전 21세기 - 기원전 17세기)의 경우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으나, 대체로 실존했던 국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를 무너뜨리고 세운 상(商) (기원전 17세기 - 기원전 11세기 중반)은 은허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 은(殷)이라고도 부르며, 한때 신화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은허의 유적 발굴 이후 실존했던 국가로 인정되었다.

주(周) (기원전 1050년 경 - 기원전 256년)는 본래 상(은)나라의 제후국이었으나, 상(은)나라 말기 주왕(紂王)의 폭압으로 상(은)나라를 무너뜨리고 패권을 잡은 나라다. 이 때 주의 왕을 처음으로 ‘천자’(天子)라고 불렀다. 주의 패권은 춘추 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 (기원전 770년 - 기원전 221년)가 되면서 약해지기 시작한다. 춘추 시대에는 여러 주나라의 제후국들이 주의 천자를 존중하고 각자의 세력을 다투던 시기로, 세력이 강한 제후국들 중에 주 왕실의 이름으로 천하를 호령한 제(齊)-환공(桓公), 진(晉)-문공(文公), 초(楚)-장왕(莊王), 오(吳)-합려(闔閭), 월(越)-구천(勾踐)의 5제후를 춘추 오패라고 부른다. 전국 시대로 들어서면서 천자에 대한 충성마저 약화되기 시작한 시기로, 진(秦), 한(韓), 제(齊), 위(魏), 조(趙), 연(燕), 초(楚)라는 전국 칠웅이 차례로 왕을 칭하고 오로지 천하 통일을 위해 질주하였다.

진(秦)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7년)은 한(韓), 제(齊), 위(魏), 조(趙), 연(燕), 초(楚)를 무너뜨리고 중국 본토를 통일하였다. 진은 이어 모든 제후국을 폐지하고 조정에서 직접 다스리는 군현제를 처음 실시하였다. 이어 진왕 영정은 처음으로 ‘황제’(皇帝)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진(秦)나라의 무리한 통치와 폭압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진나라는 진 이세황제의 치세에 몰락하여, 그 뒤 멸망하였고, 초한전을 거쳐 한나라가 중원을 통일한다. 한나라는 200년 넘게 유지된 중앙집권적 국가로 서양에 최초로 이름이 알려진 나라이기도 하다. 전한(前漢) (기원전 206년 - 서기 9년)은 한나라(전한)의 외척이었던 왕망이 황위를 찬탈하여 세운 신(新) (9년 - 23년)에 의해 잠시 명맥이 끊기나, 신나라는 급격한 개혁이 민중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각지의 반란으로 망하였고, 한나라(전한)를 계승한 국가인 후한(後漢) (25년 - 220년)이 다시 통일 국가를 이루었으나, 무제 이후의 황권은 환관들과 외척들로 인하여 크게 약화되었다. 위에게 멸망당했다.

대한민국에서는 삼국 시대(三國時代) (220년 - 280년)라고 하지만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439년 - 589년) 까지 포괄하여 위진 남북조 시기라고 한다.

위(魏)는 조비가 후한의 황제로부터 직접 제위를 물려받은 국가로 중원 지역을 차지하였다. 촉(蜀) 후한 황실의 후예인 유비가 계승하였으나, 세력권은 서남 지방에 한정되었다. 한편 손권의 오(吳)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장강 이남을 차지하였다. 위는 사마염의 서진(西晉) (265년 - 316년)에게 승계되며 서진이 삼국을 통일하게 되나, 초기부터 황실 분란인 팔왕의 난 등으로 혼란스럽다가, 흉노족의 전조에게 멸망당한다. 서진의 멸망 이후 서진이 있던 자리에 16개의 국가가 들어서 패권을 겨뤘으니 이를 십육국 시대(十六國時代) (316년 - 439년)라 한다. 비한족 국가인 전조(前趙)·후조·전연(前燕)·후연· 남연, 관중(關中)에 있던 전진(前秦)·후진·서진 및 하투(河套)의 하(夏), 사천(四川)의 성한(成漢), 하서(河西)의 후량·북량·남량과, 한족 국가인 북연, 하서(河西)의 전량(前涼), 서량이 있었으며, 전조, 후조, 전진 등이 한때 큰 세력권을 과시했으나 결국 북조의 북위로 통합된다. 북위(北魏)는 선비족 탁발씨의 국가로, 3대 태무제의 시기에 화북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북위는 곧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리되고, 동위는 북제(北齊), 서위는 북주(北周)로 이어진다. 북제는 이후 북주에 흡수되고, 북주는 왕실 외척인 양견에 의해 수(隋)로 국호를 바꾸게 된다.

한편 서진 황실의 계승을 천명한 동진(東晉)은 서진의 영토를 되찾으려 여러 차례 노력했으나 모두 실패한다. 세력권은 주로 장강 이남으로 한정되었다. 동진을 계승한 국가들이 이어진 왕조를 남조라고 하며, 송(宋)=유송(劉宋), 제(齊)=남제(南齊), 양(梁), 진(陳)이 있다. 수나라에게 멸망당한다.

수(隋) (581년 - 618년)는 북주의 외척인 양견에 의해 건국된 나라로, 남조의 진을 멸망시키고 통일하나, 무리한 원정과 과도한 세금 징수로 인해 건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하였고, 당(唐) (618년 - 907년)으로 이어진다. 당나라는 비단길을 통한 유럽과의 교역을 활성화시켜 중국 고대 문화를 서양에 전파하였다. 한편 당나라의 황후이던 측천무후가 조정을 장악하고 아들인 당의 황제를 황태자로 격하시키고 국호를 잠시 주(周) (690년 - 705년)로 바꾼다. 측천무후의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으로 공포 정치를 펼쳤으나, 인재 중심의 정치 역시 펼쳐서 백성들의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측천무후 이후 다시 국호를 당으로 바꾸게 된다. 후량에게 멸망당한다.

오대십국 시대 (907년 - 960년)는 화북의 정권을 다투던 5개의 대국과 나머지 10개의 소국이 혼재했던 시기이다. 5호 10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송(宋) (960년 - 1279년)이 다시 중원을 통일하였다. 세계 최초로 지폐를 발행하였으며, 중국 역사상 최초로 상비 해군을 창설하였다. 또한 문화 정치를 펼친 왕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확대되었으며, 예술, 사상 및 각종 실용기술의 발달이 두드러져, 문화적으로 풍요롭던 시기였다. 그러나 내몽골 지역과 만주 지역을 차지한 거란족이 세운 국가인 요(遼) (916년 - 1125년)에 의해 베이징 이북의 많은 지역을 빼앗기고, 요나라와 서하에 사실상의 조공을 납부하며 별 위세를 떨치지 못하다가, 요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여진족이 요나라를 정복하고 세운 금(金) (1115년 - 1234년)에게 화북 지방을 빼앗기고 멸망한다. 이 때까지를 북송(北宋)시대라고 하고, 이후 북송의 황실을 계승한 왕조를 남송(南宋)이라고 한다. 몽골 제국과 함께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몽골 제국을 계승한 원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원(元) (1271년 - 1368년)은 만주,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동유럽까지 지배한 몽골 제국의 적장자인 쿠빌라이 칸이 몽골고원, 만주, 화북력들을 아우르는 지역의 한족식으로 세운 국가로,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 본토를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주원장이 원나라를 몽골 고원으로 몰아내고 명(明) (1368년 -1644년)이라는 한족 왕조를 건국한다. 초기에는 외국과 교류하며 선진 문물을 과시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임진왜란 등 외부 원정의 부담과 문화 침체로 쇠퇴하다가 사르후에서의 패배와 숭정제의 실책으로 멸망한다. 명나라의 몰락을 틈타 금나라의 후예인 만주족이 후금을 세워 중국을 다시 통일하였다. 청(淸) (1616년 - 1912년)은 후금을 계승한 왕조로, 초기에는 한족을 정책적으로 차별했으나, 전체적인 제도 및 왕조의 분위기는 명나라와 유사하였다. 양무 운동을 통해 근대 국가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서구 열강 세력들의 이권침탈이 심화되면서 더욱 더 쇠퇴하고, 1912년에 신해 혁명으로 멸망한다. 청나라 소조정이 1912년부터 1924년까지 유지되었지만 결국 붕괴되었다. 그 사이에 청나라 복벽사건이 일어나서 1917년 7월 1일부터 청 황조가 복벽되었으나 1917년 7월 12일에 끝을 맺었다.
한편 남명(南明) (1644년 - 1662년)은 멸망당한 명나라의 왕실을 계승한 나라로, 명의 부흥을 기도하였으나 청나라에 망하였다. 남명의 신하였던 정성공은 타이난으로 건너가 정씨왕국을 설립하여 청나라에 대항하지만 3대째에 복속당한다.

중화민국(中華民國) (1912년 - 현재)은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수립된/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 국가이다. 이후 각 지방의 실력자들이 군벌로 등장하였다. 특히 위안스카이는 자신이 거느리는 북양 군벌을 이끌고 쑨원으로부터 대총통 자리를 넘겨받았다. 위안스카이가 1916년 사망하자, 이후 그의 부하들이 할거했는데, 대표적으로 안휘파의 돤치루이, 직예파의 펑궈장, 차오쿤, 오패부, 봉천파의 장쭤린, 산시파의 옌시산 등이 중국 각지에서 할거하였다. 한편 중화민국 최초의 공화정 체제인 북양 정부는 1928년까지 존속했다. 그 후 북벌이 재개되고 모든 세력이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 수중으로 들어왔다. 이로써 난징을 수도로 하는 중국 국민당 주도의 국민 정부가 집권하게 되었다.

한편 천두슈(陳獨秀)와 마오쩌둥(毛澤東)을 주축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이 농민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고 있었다. 중국 국민당은 중국 공산당과 제1차 국공 합작을 이루어냈으나, 북벌 과정에서 분열이 일어나, 국공 내전이 시작되었다. 국민 정부는 1931년 만주사변 이래 일본의 침략에 무저항주의를 택하고 오로지 '공산당 타도'에 중점을 두는 정책을 폈으나, 시안 사건을 계기로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어 항일 민족 통일전선이 결성되었다. 중일전쟁 중에 수도 난징이 점령당하고 충칭을 임시 수도로 정해 옮겼지만, 끝내 일본 제국이 패망하자 난징으로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전후 처리 과정에서 내분이 생겨 제2차 국공 내전이 발발하였다. 한편 국공 내전 중에 정부는 새로운 중화민국 헌법을 통과시켜 국민 정부를 헌정 체제로 격상시킨다. 1949년 4월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수도 난징을 점령하면서 중국 공산당이 사실상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된다. 기세를 몰아 중국 공산당은 중국 대륙을 석권한 이후 공식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다. 이 과정에서 중화민국 정부는 패닉 상태에 빠져, 국민당에 내분이 일어나 공산당 밑으로 들어가거나(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 타이완, 영국령 홍콩 또는 국외 등지로 피난하는 국민당 관계자도 속출했다. 한편 중국 국민당은 장제스의 지도하에 현재의 타이베이 시로 정부를 이전하여 지금까지 중화민국의 법통이 계승되고 있다. 냉전 시대에 한국 전쟁 덕분에 중화민국은 영토의 대부분을 잃었어도 국제적 위상이 거의 변함없었다. 그러나 점차 탈냉전 시대에 들어서게 되면서 실리 외교를 선호하는 세계 다수의 국가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쪽으로 기울었다. 현재 중화민국을 중국의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있는 나라 수는 대폭 감소했지만, 서로 중국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자처하며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두 개의 중국’으로 정부가 병립된 분단 국가로서 동아시아의 정치외교적인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한편 일본 제국이 세운 괴뢰 정부로 왕징웨이 정권, 몽강연합자치정부, 만주국이 있으나 국민 정부에 통합된다.

국공 내전으로 1949년 10월 중국 공산당의 주도로 중국 대륙에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1949년 - 현재)이 건국되었다. 소비에트 연방과의 유대 관계를 통해 여러가지 경제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국경 분쟁을 일으키는 등 소련과의 관계도 소원해진다. 1971년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를 통해 중화민국을 제치고 유엔에 입성하였으며 국제 사회로부터 널리 인정받게 된다. 1971년 '핑퐁외교'로 불리던 리처드 닉슨의 베이징 방문을 계기로, 마침내 1979년 중화민국의 강력한 후원국이던 미국과도 수교하게 된다. 덩샤오핑() 이후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통해 경제 대국 반열에 진입하였다. 1990년대에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포르투갈로부터 마카오를 차례로 편입하였다. 2008년에는 베이징 하계 올림픽이, 2010년에는 상하이 엑스포가 개최되으며, 2022년에는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개최될 예정이다.

아래의 데이터는 양학통의 《計劃生育是我国人口史発展的必然》(1980년)에 의한다.




#Article 75: 브라-켓 표기법 (188 words)


브라-켓 표기법(영어:)은 양자역학에서 양자 상태를 표현하는 표준 표기법으로, 추상적인 벡터와 선형 범함수를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이 표기법은 꺾쇠괄호 '⟨', '⟩'와 ,수직선 '|' 을 사용하여 표기한다.
오른꺾쇠괄호로 표기한 것을 켓이라고 하며, 주로 열벡터를 나타내고 다음과 같이 쓰인다.

왼꺾쇠괄호로 표기한 것을 브라라고 하며, 주로 행벡터를 나타내고, 다음과 같이 쓰인다.

여기에서 는 '켓-'로 읽고, 는 '브라-'로 읽는다.

유한차원벡터공간에 포함된 브라와 켓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다음이 성립한다.

이때, 은 의 켤레 복소수이다.

브라와 켓, 그리고 연산자의 조합은 행렬 곱셈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브라-켓 표기법은 복소벡터공간에서 벡터의 스칼라곱 또는 벡터 위로의 선형 범함수의 작용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
내적이나 작용은 브라-켓 표기법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같은 레이블인(같은 내용물을 가진)브라와 켓은 서로에게 에르미트 수반이다.
쌍대공간의 각 브라 벡터에는 꼭 한 개의 켓벡터가 대응된다는 리스 표현 정리에 의해 〈ψ| 는 다음과 같이 켓벡터 |ψ〉 와 대응되며 잘 정의되어 있다.

   | width1    = 225
   | image1    = Discrete complex vector components.svg
   | caption1  = 복소 벡터 의 이산적으로 분포된 원소 는 가산-무한 차원 힐베르트 공간에 속한다. 여기에는 가산-무한하게 많은 값과 기저벡터 가 있다.
   | width2    = 230
   | image2    = Continuous complex vector components.svg
   | caption2  = 복소벡터 의 연속적으로 분포된 원소 는 불가산-무한 차원 힐베르트 공간에 속한다. 여기에는 무한하게 많은  값과 기저벡터 가 있다.



#Article 76: 대한민국 (8635 words)


대한민국(, )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있는 민주공화국이다. 서쪽으로 황해를 사이에 두고 중국이, 동쪽으로는 동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이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과 맞닿아 있다. 수도는 사실상 서울특별시이고, 실질적 행정 수도는 세종특별자치시이다. 대한민국의 국기는 대한민국 국기법에 따라 태극기, 국가는 관습상 애국가, 국화는 관습상 무궁화이다. 공용어는 한국어와 한국 수어이다. 인구는 약 5,200만 명으로 전체 인구 중 절반이 수도권에 살고 있다.

대한민국은 1919년 3.1 운동을 통한 독립 선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 지역 거주자들의 자유 선거를 통하여 1948년 공식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갔다. 대한민국은 1948년 12월 유엔 총회 결의 제195호를 통해 유엔으로부터 한반도 유엔이 감시 가능한 한반도 이남의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탄생한 한반도 유일한 정부로서 합법 정부로 승인받았다. 이와 관련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에 유엔 감시 하에 선거를 실시한 한반도 이남에서만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주장도 있다. 1991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동시에 UN에 가입하였다. 한편 국제법 상의 관례와 통설,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UN에 가입하였다 하여, 가맹국들 상호 간에도 당연히 그 국가성이 승인되는 것은 아니고 또 그러한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판시하여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성을 원칙적으로 부정하고 있으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어 국가 성립 3요소인 국민, 영토, 주권이 인정되는 지역은 '한반도 이남'이었다는 점과 이후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 1991년 남북 기본 합의서,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 등에 의하여 상호 공존을 약속하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별개의 독립된 주권국가로 인정되는 일부 국제법규와 대한민국 헌법의 시각이 대치되어 문제점이 존재한다.

대한민국은 한국 전쟁 이래 일명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높은 경제 발전을 이룩하며, 1990년대에 이르러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발전하였으나 1990년대 말 외환 위기를 겪고 난 뒤, IT업계 활황과 거품 붕괴 등 여러가지 대내외적 요인에 의한 상승과 하강을 거듭하고 있다. 2019년 명목 기준 1인당 국민 총소득(GNI)은 3만 1,430달러로 세계은행에서 고소득 국가로 분류되었고, 2016년 유엔의 인간 개발 지수(HDI) 조사에서 세계 18위로 '매우 높음',  국제 통화 기금(IMF)에서는 대한민국을 선진 경제국으로 분류하였다. 하지만 국내총생산 대비 16%를 차지한 삼성전자가 단독적으로 전체 국내 임금근로자 수(1819만 명)의 0.5%인 고용 효과를 유발한 것에서 드러나듯 경제적 양극화와 불균형이 있다. 2003년부터 2016년까지 OECD 회원국 자살률 1위이며, 교통사고에 의한 사망률, 장시간 근로와 이에 따른 산업재해 사망률, 저출산 등의 문제가 크기에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이코노미스트에서 발표하는 민주주의 지수 조사에서는 2019년 기준 23위의 '8.0점'을 기록하는 등 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온전히 작동하는 국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현재 주요 20개국(G20),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개발 원조 위원회(DAC), 파리 클럽 등의 국제기구의 회원국으로 있다.을 더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1919년 3.1운동 직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정한 것이다. 1919년 4월 10일 임시 정부의 첫 의정원 회의에서 신석우가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국호를 정하자고 한 것에 여운형이 대한이라는 이름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또다시 '대한'을 쓸 필요가 있느냐며 반박하자, 다시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라고 부연 설명을 하였고, 이에 다수가 공감함에 따라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고 전해진다.

광복 후 1948년 제헌 국회에서 이 국호를 계승하여 헌법에 명시하였고 다시 1950년 1월 16일 국무원 고시 제7호 국호 및 일부 지방명과 지도색 사용에 관한 건에 의해 확정하였다. 이에 20세기 전반까지도 널리 사용되던 지명으로서의 조선이라는 이름은 대한이나 한국, 한(韓)으로 대체되어 현재 대한민국 내에서는 자주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민은 자국의 국호를 대한민국, 한국 등으로 부르며, 자국을 호칭할 때는 흔히 우리나라라고 한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하며, 한반도 북부에 자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비해 한반도 남부에 있다 하여 남한으로도 불리는데 특히 대한민국 한반도 북부를 점거하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국을 남조선(南朝鮮)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내에서는 대한민국을 간단히 한국(韓國) 또는 남한(南韓) 등으로도 부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을 반국가단체로 보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명칭 대신에 남조선(南朝鮮)으로 부른다. 대한민국은 과거엔 구한국(舊韓國), 대한제국과 구별하여 신한국(新韓國)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국제사회에서는 관습상 대한민국을 간단히 '코리아'(Korea)라 부르며 이름은 동아시아의 고대 국가인 고려에서 유래되었다.

코리아(Korea)란 영문 국호의 어원은 동아시아의 중세 국가인 고려에서 유래되었다.
고구려가 5세기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高麗)로 변경한 것을 918년 건국된 중세 왕조 고려(高麗)가 계승하여 '고려'라는 국명이 아라비아 상인등을 통해 전 세계에 전해지자, 유럽인들이 '고려'를 코레(Core, Kore), 코리(Kori)로 부르던 것을 '~의 땅'을 의미하는 '-a'를 붙어 '고려인의 땅'이라는 '코레-아'(Corea), '코리-아'(Korea), '코리-아'(Koria)가 되어 프랑스어로 Corée, 스페인어로 Corea, 영어로 Korea라고 불리게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공식 영어 명칭은 Republic of Korea로서, 약칭 'R.O.K.'이며 관습상으로는 간단히 Korea라고 불리며 국제 표준화 기구에서는 약칭 'KOR'로 불린다.

대한제국 시절 공식 문서에는 Corea 또는 Korea가 혼용되어 사용되었고, 1900년대 초기부터 영어권에서는 Korea의 사용 빈도가 높아지게 되었다. 1892년 외국인이 자주 보는 잡지 〈〉 5월 호에는 “미국 국무부와 영국의 왕립지리학회는 우리가 차용한 이 땅의 이름을 아주 조리 있게 Korea로 표기하기 시작했던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일본의 한 지방이 된 것으로부터 Chosen이라는 일본식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일본,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베트남 등 주로 동아시아에 있는 한자 문화권 국가들에서도 일상에서 대한민국을 간단히 한국(, , )이라 부른다. 다만 여전히 한반도 전체를 부를 때는 조선(, , )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대한민국은 동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 열도와, 황해를 사이에 두고 중화인민공화국과 마주하며, 육지로는 군사 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맞닿아 있다.

한반도는 제3기 마이오세 이후에 일어난 단층과 요곡운동의 결과 동쪽으로는 높은 산지가 급경사로 동해안에 임박하고 서쪽으로는 서서히 고도가 낮아진다. 이를 동고서저의 경동지형이라 한다. 높은 산들은 대부분 동부 지방에 치우쳐서 한반도의 등줄기라 불리는 태백산맥에 자리한다. 태백산맥의 대표적인 산이 설악산이다. 태백산맥의 남서쪽으로 소백산맥이 이어지며 그중에는 지리산이 유명하다. 제주도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사화산인 한라산이 있다.

하천의 유량은 극히 불규칙하여 여름에는 집중 호우로 연 강수량의 약 60% 이상이 홍수로 유출되며, 갈수기에는 강바닥을 거의 드러내는 하천이 많다. 대표적인 강은 위쪽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한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 낙동강 등이다. 대다수의 강이 산지가 많은 동쪽에서 평평하고 낮은 구릉이 대부분인 서쪽으로 흐르며 중하류에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가 전개된다.

산맥은 교통에 적지 않은 제약을 주어, 산맥을 경계로 지역의 문화나 풍습이 크게 차이가 나기도 한다. 산맥으로 가로막힌 지방은 고개를 넘어 왕래했는데 영서 지방과 영동 지방을 연결하는 태백산맥의 대관령·한계령·진부령·미시령, 중서부와 영남 지방을 연결하는 소백산맥의 죽령·이화령·추풍령·육십령 등이 산맥을 넘는 주요한 교통로로 사용된다.

한반도의 서쪽은 황해, 동쪽은 동해, 남쪽은 남해와 맞닿아 있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형이며, 가장 큰 부속 도서인 제주도 남쪽으로는 동중국해와 접한다. 황해와 남해 연안은 해안선이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조수 간만의 차가 클 뿐만 아니라 해안 지형도 꽤 평탄하여 넓은 간석지가 전개된다. 또한 수많은 섬이 있어서 다도해라고도 불린다. 반면에 동해 연안은 대부분 해안선이 단조롭고 수심이 깊으며 간만의 차가 적다. 해안 근처에는 사구·석호 등이 형성되어 있고 먼 해상에 화산섬인 울릉도가 있으며 그보다 동쪽으로 약 87.4km 거리에 대한민국 최동단인 독도가 위치한다. 서쪽에는 평지가 발달됐다.

북위 33도~38도, 동경 126~131도에 걸쳐 있어 냉대 동계 소우 기후와 온대 하우 기후, 온난 습윤 기후가 나타난다. 겨울에 북부 지역은 편서풍으로 인해 시베리아와 몽골 고원의 영향을 받아 대륙성 기후를 띠어서 건조하고 무척 추우나 남부 지역은 이런 영향을 적게 받아 상대적으로 온난한 편이다. 여름에는 태평양의 영향을 받아 해양성 기후의 특색을 보여서 고온다습하다. 계절은 사계절이 뚜렷이 나타나며 대체로 북부 지역은 여름과 겨울이 길고 남부 지역은 봄과 가을이 길다.

비는 주로 여름에 많이 내리는데 연 강수량의 50 ~ 60%가 이때 집중된다. 이를 장마라고 하며 특히 6월 말에서 7월 중순까지를 장마철이라 한다. 각 지역의 연 평균 강수량은 중부 지방이 1100 ~ 1400mm, 남부 지방이 1000 ~ 1800mm, 경북 지역이 1000 ~ 1200mm이다. 경상남도 해안 지역은 약 1800mm이며 제주도는 1450 ~ 1850mm이다.

습도는 7월과 8월이 높아서 전국에 걸쳐 80% 정도이고 9월과 10월은 70% 내외이다. 태풍은 북태평양 서부에서 연평균 28개 정도가 발생하여, 이 중 두세 개가 영향을 미친다.

본래 4계절이 뚜렷한 기후 환경이었으나 지구 온난화 등의 영향으로 봄, 가을의 기간이 급격히 줄어들며 게릴라성 폭우로 특징되는 열대성 호우가 잦아 아열대화가 진행되면서 어업이나 농업에 변화가 있다.

한반도 전역에 동식물 10만 여 종이 분포한다. 호랑이 중에서 가장 큰 종인 시베리아호랑이가 과거 살았었으나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 그 밖의 맹수로는 반달곰과 표범이 있으며 소수 개체군이 생존한다. 그 밖에도 멧돼지, 고라니, 너구리 등의 포유류와 까치, 꿩, 참새, 비둘기를 비롯한 텃새, 두루미, 기러기 같은 철새가 서식하며 지네나 거미, 수많은 곤충류도 있다. 삼면이 바다여서 난류와 한류에 서식하는 다양한 어패류와 고래도 존재한다. 다만 최근에는 지구 온난화로 한류성 어류가 감소하고 불가사리나 해파리가 급증해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산삼이나 진달래, 소나무 등 많은 식물은 약용이나 기타 여러 용도로 쓰인다. 제주도에는 열대림과 비슷한 야자수가 번육하며 지리산이나 태백산맥에는 북방계형의 특산 식물들이 자생한다. 백두산에는 시베리아나 만주에서만 볼 수 있는 침엽수림과 같은 북방계 식물류가 자란다. 중부 지방에는 높은 산지로 말미암아 고산형 식물과 약용식물 여러 종이 자생한다.

시멘트 공업과 석회공업(石灰工業)의 원료인 석회암은 한국의 주요 자원으로 각지에 대량 분포해 있다. 다른 자원은 양이 적거나 품질이 낮아 채산성이 맞지 않는 탓에 거의 생산하지 않는다. 다만 21세기 이래 국제 원자재 가격의 상승과 기술의 발전으로 재개장하는 광산이 있다. 석탄은 무연탄만이 있으며 삼척, 태백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철광석은 양양, 충주 등지에서 주로 캤다. 텅스텐은 매장량이 매우 많으며 특히 영월에 엄청난 규모의 광산이 있다.

울산 앞바다에서는 천연가스층이 발견되어 개발하고 있으며, 독도 부근 해저에는 메테인 하이드레이트가 상당량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유는 제주도 남방 해역의 대륙붕 제7광구에 천연가스와 함께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언급되지만 실제로 탐사되지는 않았다. 이곳은 1974년에 체결한 한일 대륙붕 협정에 의해 2028년까지 한일이 공동 관리한다.

한반도에 두 발로 걷고 도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약 70만 년 이전으로 추정되며, 현생인류는 후기 구석기 시대인 약 2만 5천 년 전부터 해안과 강가를 중심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인골 화석으로는 충청북도 단양군 상시굴과 두루봉동굴, 제천시 점말굴 등에서 현생인류로 추정되는 사람 뼈 화석이 발견된 바 있다. 이후 중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빗살무늬 토기인, 무문토기인 등 여러 인종의 유입과 주변 세력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문명이 발전했다. 다만 초기 구성원들의 이동과 외부 세력 유입의 구체적 모습은 확실하지 않다.

한반도 일대의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현존하지 않는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세웠다고 기록하였고 《동국통감》에서 그 시기를 기원전 2333년이라 하였다. 날짜는 대종교에서 임의로 음력 10월 3일로 약속하고 개천절이라 불렀는데 대한민국 정부에서 그 날을 양력으로 고쳐 국경일로 지정하였다. 고조선 멸망을 전후하여 부여, 옥저, 동예, 진국, 삼한 등 여러 나라가 생겨났고,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시대로 이어졌으며 이 중 신라가 삼국을 부분적으로 통일하는 한편 북쪽의 발해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형성했다. 10세기 고려가 등장하면서 한민족 단일 국가의 시대를 시작했고 14세기 조선이 이를 계승했다.

근대 한국의 뿌리는 1897년에 수립된 대한제국이다. 고종 황제는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에서 대한(大韓)으로 고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정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였고,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일본, 청나라 등과 수교하였다. 광무개혁을 단행하여 신식군대를 설치하고, 근대적 사법·토지 제도를 도입하고, 상공업을 진흥하고, 근대적 병원과 학교 및 은행 등을 설립하였다. 해외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근대 산업기술을 습득하게 하고, 제조·철도·운수 등 여러 분야에서 근대적 기업과 공장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자주적 근대화 노력은 1895년 청일 전쟁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진 이래 간섭을 받아왔으며, 1904년에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로 일본의 한국 병합이 본격화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을 무력으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1907년 고종 황제를 폐위하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을 통해 국권을 빼앗기며 일제 강점기로 전환, 근대적 자주국가라는 목표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김구를 주축으로 주석중심제로 재정비하고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건국강령으로 채택하였다. 한국 광복군도 조직하여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1942년 2월에는 대독 선전포고까지 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고자 하였다. 1942년에는 좌파 계열인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 김원봉 세력과 김성숙, 유림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민족통일전선 형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1943년 버마 전선의 영국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하고자 공작대를 파견하여 일본군 포로 취조 및 암호 번역, 선전 전단 작성, 대적 회유 방송 등을 하였다. 미국 OSS와도 연계하여 1945년 9월을 기한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으나,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대한국민이 3·1운동에 따라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삽입되었다.

광복 이후 여운형, 안재홍 등은 1944년 설립한 지하조직인 건국동맹을 모태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고, 9월 여운형, 박헌영 등에 의해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1945년 11월 중화민국 쓰촨성 충칭에서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임정정통론' 문제로 갈등이 벌어졌고, 미군정은 맥아더 포고령에 따라 인공 내각(조선인민공화국 내각)과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음으로써 인공 내각은 해산되었다.

미군정청이 1946년 7월 서울지역 1만여 명에게 실시한 '어떤 정부 형태를 원하는가'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한다라고 밝힌 상황에서 화순탄광 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벌인 봉기에 대한 유혈 진압과 사회주의적인 인민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했던 미 군정은 온건파인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을 통해 좌우 합작과 협상을 주도하게 했다. 그러나 헤게모니 장악에서 제외된 것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 김구, 윤치영, 박헌영, 허헌 등의 반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후 제2차 미소공위 마저 결렬되어버리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 총회로 이관했고, 총회에서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이 결정되었다. 이에 김규식, 조소앙, 김구 등은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북협상 등을 추진하여 노력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가고, 남한에서도 선거 가능한 지역에 한한 정부 수립론이 제기되면서 (정읍 발언) 사실상 남북 단일 정부 수립은 불가능한 모양새가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은 남침을 기도하여 공산주의화 하려는 야망을 실현하고자 준비하였다. 소련의 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의 승인을 받자,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소련에서 지원받은 수십대의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대한민국을 침공했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탱크의 공세를 막을 수 있는 방어책이 전혀 없었고 야포와 전투기 등 모든 것이 압도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총만 가진 거의 맨 몸의 한국군은 순식간에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조선인민군이 침략한 3일만에 수도인 서울을 인민군에게 빼앗기게 된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무장한 인민군을 상대하는 것이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던 한국군은 결국 밀려나 낙동강 방어선을 최후의 배수진으로 정하고 버티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어린 학생들(학도병들)이 무고하게 죽어나갔으며 많은 사상자와 인명피해가 초래되었다.

하지만 유엔군이 파병으로 지원하고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9.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벌여 조선인민군에 반격을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은 9월 27일에 서울을 탈환해냈다. 10월 1일에는 38도선까지 수복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 때 유엔 내부에서 맺어진 새로운 결의로 유엔군의 목적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완전히 공략하려는 목적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한국과 유엔군은 거듭해서 10월 26일에는 압록강까지 올라갔으나 곧 이어 중화인민공화국이 인해전술을 펼치며 참전하고 소련이 군사를 지원하여 전세가 다시 역전되었고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이후 38도선 인근 중부 지방에서 교착을 거듭하던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오전 10시에 체결된 후에 효력이 발생한 22시에 완전히 전투가 종료되고 군사 분계선이 형성되면서 오늘날까지 휴전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 전쟁으로 20만 명이 과부가 되었고 10만여 명 이상이 고아가 되었으며 1천만여 명 이상이 이산 가족 신세가 되었다. 한반도 내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된 탓에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가 도래하여 한국과 북한의 경제 수준이 떨어졌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으로 인해 남북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극도로 팽배하게 되어 한국의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면서, 분단한 지 70여년에 이르고 있다.

한국 전쟁이 휴전 협정을 맺은 후 1950년대는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전후복구사업을 실시하는 가운데 경제원조체제가 성립되던 시기였다. 제1공화국 정권의 고위 관료는 부패해 국민의 불만을 샀다. 의원 내각제였던 제1대 내각에서 재선이 불가능하다 판단한 이승만은 이범석과 장택상을 비롯한 측근들과 족청계,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부산정치파동(1952년), 사사오입 개헌(1954년)을 일으키고 장기집권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범석, 장택상 등의 성장을 두려워한 이승만은 이들을 제거하고 이기붕 계열을 등용한다. 이기붕 계열은 또한 친 자유당 성향의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등의 정치깡패들을 활용하여 야당 의원의 집회를 탄압, 제1공화국 후반기는 혼란을 거듭했다.

그 와중에 부통령 장면의 피격 사건(1958)과 조봉암 사법살인(1959) 등의 조치까지 겸해졌고 언론의 자유마저 통제당했다. 1959년의 한일회담이 끝나자 곳곳에서 정부의 독재에 저항하는 집회가 시작, 1960년 3월 15일 부통령 선거의 부정을 계기로 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4·19 혁명이 발생했고, 마산 앞바다에서 며칠 전 실종되었던 김주열의 주검이 떠오르면서 시위는 격화되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여 제1공화국은 붕괴했다.

그 뒤 윤보선은 형식적인 민정을 실시하였으나 군사정변 세력에게 구정치인 정화법(1962)으로 정치활동을 정지당하자 여기에 불만을 품고 사퇴(1962.3.22)함으로써 1962년 3월부터 1963년 12월까지 5·16 군사정변 세력이 설립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사법권·행정권·입법권을 모두 장악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3선 개헌을 통과시키고 1971년 대선에서 3선에 성공한다. 그런데 대선에서 야당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고 같은 해 총선에서 야당의 의석수가 2배로 늘어나는 선전을 이룬 데다가 제1차 석유 파동 등으로 경제성장도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정권 유지에 위기를 느낀 박정희 정부는 1972년 유신 헌법을 통과시키고, 제4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전두환과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계엄 사령관을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하여 실세로 떠올랐고, 민주화 일정을 지체시켰다. 1980년 초부터 국회와 정부는 유신 헌법을 철폐하기 위한 개헌 논의를 진행했고, 대학생과 재야 세력도 정치 일정 제시와 전두환 퇴진 요구를 바탕으로 민주화 시위를 벌였다. 이에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확대하면서, 이른바 화려한 휴가라고 불리는 포고령을 통해 정치활동 금지, 보도검열 강화, 휴교령 등을 선포하고 군병력을 동원해 국회를 폐쇄했다. (5.17 쿠데타) 이 과정에서 신군부는 5·17 쿠데타에 항거한 광주 민주화 운동을 공수부대 및 특전여단을 투입해 유혈진압을 하고, 5월 27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정국을 주도했다. 10월 27일에는 7년 단임의 대통령제를 골자로 한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되고 이듬해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제5공화국은 경제 안정에 매진하는 한편, 1981년에는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 등을 유치하기도 했다. 또한 야간통행금지 해제 및 교복 자율화 등의 유화 조치를 내걸어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도 했다. 한편으로 임기 중반부터 3저호황으로 인한 수출 흑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적인 독재체제를 성립하고 민주주의 탄압 및 고문·정치사찰·용공조작으로 대변되는 인권 유린행위를 자행했으며, 정경유착·부정축재·친인척 비리가 빈발했다.

그러나 노태우도 전두환처럼 군인 출신이었고, 12·12 사태를 주도하고 5공 성립 과정에 깊숙히 관여한 인물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노태우 정부도 정경유착은 물론 비자금 형성·민간인 사찰·고문 등 5공의 파쇼 정치를 그대로 답습했다. 이는 결국 민주화 시위(1991) 등으로 이어졌고, 노태우는 이른바 6공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을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여당 내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왔으며 끝내 김영삼을 후계자로 택할 수밖에 없었다.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함으로써 노태우 정부는 막을 내렸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론을 내세우며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을 추진하고 탈원전 추구, 가상화폐 규제 등의 경제정책을 펼쳐나가는 과정 속에서 사회적 찬반론을 불러일으켰으며, 계속되는 경기불황과 부동산 대책 실패로 비판 여론을 받았다. 또 2017년 더불어민주당원 댓글 조작 사건과 2018년 여권 인사의 미투 운동 연루, 2019년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 논란 등 정부와 여당의 도덕성 논란이 부정적 평가에 일조함과 동시에, 2018년 남북 단일팀 추진과 대북 석탄 밀수 사건, 2020년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인한 남북관계 경색 등에 있어서도 반발 여론이 끊이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3일에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수립되었으며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신탁 통치 찬반을 놓고 좌파 진영과 우파 진영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하게 되었으며, 이후 미국과 구 소련의 분할 군정에 놓여 있다가, 1948년 5월 10일 총선을 거쳐 7월 17일 첫 헌법이 제정되었고 8월 15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정부로 공식 출범하게 된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적 기본절서에 입각한 민주 공화국으로 대통령제를 기본으로 하여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혼합한 정치 제도(그 예로 국무총리가 존재하고, 국회의원이 장·차관급 공직자를 지낼 수 있다)를 채택하고 있고,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멸망한 후 3·1 운동 정신으로 창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독재의 불의에 항거한 4·19 혁명의 민주주의 이념을 계승함을 헌법 전문에 명백히 밝혀두고 있다.

최초의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7월 17일 공포되었으며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며 사유재산에 관하여는 원칙적으로 보장되나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하고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는 방법으로 자유주의에 사회주의적인 면을 더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민주주의의 부침에 따라 헌법은 9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다. 그 가운데 박정희 때의 유신 헌법은 1971년 핑퐁외교 이후 1971년 7월 헨리 키신저 미국 국가안보담당 보좌관과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미합중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여 양국이 '상하이 코뮈니케'를 발표하는 등 냉전 구도 허물어지는 해빙기였던 1972년 12월에 공포하여 긴급조치 등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국민의 자유기본권을 제약하는 비민주적이었지만 그 당시 국내외를 둘러싼 환경에 의해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시각도 있지만 특별히 근거를 밝히지 못하며 단지 박정희 정부가 1인 독재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이 주된 평가이다. 현재 발효 중인 헌법은 제6공화국의 수립에 따라 1987년 여야 합의를 통해 개정되었다. 또한 3권 분립의 원칙에 따라 독립적인 세 개의 권력 기관을 근간으로 하여 국가를 구성하되 행정부에 권력이 다소 집중되는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다.

특히 국민의 자유와 권리와 관련하여 모든 국민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받지 아니한다.고 정한 내용이 1988년 개정된 헌법에서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와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는 내용으로 수정하여 권력의 전횡을 견제하기도 했으나 이후에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사건이나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등과 같이 법률이나 행정부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헌법 제8조에 의해 자유롭게 정당을 결성할 수 있으며, 복수정당제가 보장된다. 대한민국은 다른 국가에 비해 정당의 수명이 짧고 정당 간의 합당이나 분당이 많이 일어난다.

가장 최근에는 21대 국회가 2020년 5월 30일부터 개원하였다. 2020년 9월을 기준으로 여당이며 원내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있으며 그 밖의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한 정당(국회에 의석을 20석 이상 가진 정당)으로는 국민의힘이 있다. 비교섭단체인 정당(국회에 의석을 1석 이상 가진 정당)으로는 정의당, 국민의당, 열린민주당, 기본소득당, 시대전환이 있다. 국회에 의석이 없는 정당으로는 노동당, 녹색당, 민생당, 진보당 등이 있다. 제21대 총선 당시에는 더불어민주당+더불어시민당(위성정당) 180석, 미래통합당+미래한국당(위성정당) 103석, 정의당 6석, 국민의당 3석, 열린민주당 3석을 얻어 더불어민주당이 원내 제1당을 유지하게 되었다.

입법부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대한민국 국회는 현재 총 300석의 단원제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법부였던 임시의정원을 기원으로 두고 있으며, 1948년 5월 10일 구성된 제헌국회가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이다. 매년 1회의 정기회(100일 이내)와 30일 이내의 임시회가 열리며, 회기 중에 국회는 법의 의결권과 예산안의 심사, 국정 감사와 헌법에 명시된 기관장의 임명 동의 및 조약의 체결 및 비준 동의 등의 활동을 한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임기는 4년이며, 임기 중 의사진행과 관한 발언에 대한 면책특권과 회기 중 불체포특권을 가진다. 공직선거법에 따른 피선거권을 충족한 인물로, 국회의원 총선거나 재선거 및 보궐선거, 혹은 대한민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비례대표 의석승계 결정에 따라 선출된다. 대한민국 국회의장과 부의장은 국회의원 중에서 본회의의 무기명 투표를 거쳐 선출되며, 그 임기는 국회 회기의 절반에 해당되는 2년이다.

대한민국의 행정부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정부는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여 입법부에서 법률로써 정한 사안들을 실행한다. 대통령은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으로 구성된 국무회의의 조력을 받아 업무를 처리한다.

대통령은 5년 단임으로 국민의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다. 대통령은 국회가 통과한 법률을 거부할 권한이 있다. 그러나 한 번 거부한 법률을 국회가 다시 통과시킨다면(단, 국회는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3분의 2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 법률은 그대로 통과된다.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재판관 3인과 대법관 등을 임명할 수 있다. 대통령은 조약을 체결·비준하고, 외교사절을 신임·접수 또는 파견하며, 선전포고와 강화를 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국군을 통수하며 공무원 임명을 할 수 있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방대한 권한을 행사한다.

대통령의 명을 받아 내각을 통할하기 위하여, 대통령의 보좌기관으로서 국무총리를 두고 있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하되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국무총리는 내각의 구성원을 대통령에게 임명을 제청하며 내각을 통솔한다. 대통령의 유고 시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게 되며 국무총리가 유고시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순으로 권한을 대행한다.

대한민국의 사법부는 대다수의 현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재판에 있어서 공정한 심판을 위해 3심제로 이루어져 있다. 대법원을 최고법원으로, 그 밑에 고등법원, 지방법원, 지방법원의 지원과 특허법원, 가정법원, 행정법원 등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법률 심사를 위해 설치된 특수법원(여기에서의 재판은 1심의 판결과 동일하다.)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민국 국군의 경우 군사법원법에 따라 군사재판을 할 수 있으나, 최종심은 대법원이 관할한다.

한편 법원과는 별도로 각종 법령 등의 위헌 여부를 심사하는 헌법 재판소가 구성되어 있다. 헌법재판소에서는 법률이 헌법에 위배되는지를 판가름하는 위헌법률심판, 대통령을 비롯한 공무원의 탄핵 소추를 심사하는 탄핵심판, 위헌 정당의 해산 여부를 심사하는 정당해산심판, 권한쟁의심판, 헌법소원심판 등을 심사한다.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은 총 9명이며, 대통령, 국회, 대법원장이 각각 3명씩 선출하고 대통령이 임명한다. 헌법재판소장은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한다.

최고 법원인 대법원의 법관인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에 따라 국회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대법관의 임기는 헌법을 통해 보장되며, 그 연한은 6년이다.

사법부를 구성하는 법관에 의하여 독립된 재판이 보장되나 실질적으로 불기소 처분권을 가지는 검사가 공소를 제기하는 사건에 한하여 제한적으로 재판권이 보장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외교에 관한 업무는 외교부가 맡고 있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한국 전쟁을 겪은 뒤 적대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는 햇볕 정책, 곧 대북유화책을 시도했으나 차후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등 대남 도발 행위로 인해 중단되었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는 연평도 도발, 천안함 폭침, 목함 지뢰 사건 등이 발생함과 동시에 대북 강경정책을 실시했고, 이에 따라 남북 관계가 상대적으로 경색되었다. 대한민국의 외교는 한국 전쟁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미국과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과거 한반도를 식민 통치하였던 일본과는 1965년 수교하였다.

대한민국은 현재 유엔 회원국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시리아, 쿠바 등 3개국과 외교 관계가 없으며, 이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외에 서사하라, 중화민국, 팔레스타인, 코소보 등도 외교 관계가 없다. 이 중 중화민국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부터 수교국이었으나 1992년에 국교가 단절되었다. 그렇지만 현재 대한민국과 중화민국 양국은 양국 수도에 서로 대표부(타이베이 대표부)를 설치하여 운영 중에 있고 상호 간의 왕래와 민간교류는 자유롭다. 팔레스타인의 경우에는 대한민국이 팔레스타인에 대표부를 설치하여 운영 중에 있다.

과거에는 통상에 관한 업무를 전문적으로 관장하기 위해 외교통상부 산하 통상교섭본부를 설치해 운영하였으나, 정부조직 개편에 따라 산업통상자원부로 이관되었다.

대한민국의 영토인 독도, 이어도 등에 대하여 이웃한 일본, 중화인민공화국이 각각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유엔과 WTO, OECD, 그리고 G-20의 구성원이며 또한 APEC와 동아시아 정상회의의 창립 가맹국이며, 미국의 주요 비NATO 동맹국(MNNA)이다. 한편 2007년부터 2010년 상반기까지 해외에서 추방한 대한민국 국민이 2,111명으로 일본에서 제일 많았다.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당시부터 현재까지 국가로 승인하지 않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대하여 국제법상 교전단체의 지위만을 인정한다. 또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헌법을 비롯한 국내법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 일체를 대한민국의 고유한 영토로 간주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국 영토를 불법적으로 점거하는 반국가단체로 본다.

국민의 정부 당시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물자 교류는 참여정부 말까지 활발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남 도발 등으로 인해 2013년 금강산 관광 산업, 개성공단까지 중지된 상태이였지만 남북회담을 통해 재가동하기로 했다. 그러나 2015년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계속해서 대남 도발, 핵 실험, 미사일 발사 등을 진행함에 따라 다시 중지되었다.

대한민국과 미국의 관계는 19세기 중반인 1871년 조선의 통상을 요구하던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완강히 버티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돌아간다. 그 뒤 일본의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쇄국정책을 풀고 일본을 비롯한 세계열강과 통상조약을 맺게 되자 미국은 1882년에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어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가지게 된다. 1897년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미국은 특사를 파견하여 축하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1905년 을사조약 뒤부터 뒤틀어졌는데 당시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인 엘리스 루스벨트가 미국을 대표하여 대한제국에 방문했을 때 고종의 환대에도 없는 사람 취급하였고 고종의 아내였던 명성황후 무덤 앞의 말 조각상에서 앉아 사진을 찍는 무례함을 범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1910년 일본제국의 대한제국 강제합병을 계기로 미국과의 외교관계가 단절된다.

양국은 1965년 한일 협정을 통해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양국 간에 역사 인식, 영토 등에 대한 갈등이 존재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범들을 숭배하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나 독도 문제, 동해 명칭 문제, 일본군 위안부도 민감한 문제이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과 아베 신조 내각 당시에는 한일 셔틀외교가 중단되는 등 양국 관계가 멀어졌으나 아시아 외교를 중시하는 일본 후쿠다 야스오·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의 출범과 한일 관계를 보다 중시하는 대한민국의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 관계가 개선과 악화를 반복하다가 일본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취임하면서 한일 관계가 강화되었다. 2002년에는 양국이 공동 주관하여 한일 월드컵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에서 한국 문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이른바 한류 열풍이 불어 양국 간 교류가 많이 증진되었다. 그러나 역사·영토(독도) 문제 등 여러 부분에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고,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강화함으로써 양국 관계도 점차 경직되어가고 있다.

대한민국은 1948년 정부 수립 직후부터 중화민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 전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원한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적대 관계가 되었으며, 1992년까지 외교 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 1992년 공식 수교하면서, 기존의 중화민국과 단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관련된 여러 문제가 있는 와중에도 양국은 외교 관계를 이루고 있다. 2016년 주한 미군의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THAAD)' 배치 추진과 미・중 무역 갈등 문제 등 국제 사회에서의 충돌로 인하여 한중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

러시아는 구 소비에트 연방의 법통을 이어받은 나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국가 간의 갈등이었던 동・서 냉전으로 인해 대한민국과는 적대적인 관계였으나 탈냉전 이후에 한소수교가 1990년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소련 붕괴 이후의 러시아와 경제, 문화, 우주기술협력, 군사(불곰사업) 등에서 밀접한 관계를 추진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녹둔도 문제를 포함해서 연해주 등 잠재된 영토 문제가 아직 남아있지만 남북분단으로 인해 가시화되지는 않았다. 대한민국의 위성인 나로호 발사도 러시아의 협조 하에 발사했다. 현재 12만 5000명의 고려인이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다. 러시아와 한국은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아에로플로트 등 여러 항공사가 매일 운항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대립으로 인해 일찍부터 군사력을 증강시켜 왔으며 1990년대까지는 양적 위주의 성장을 추진했으나, 2000년대 들어 새로운 무기 기술의 개발과 발달로 인해 질적 성장을 이루었다. 대한민국 국방부가 국군(國軍)이라고 불리는 대한민국의 군을 지휘하고 있다. 2013년 7월 기준 병력 규모는 현역이 약 670,000명으로 세계 6위, 대한민국 예비군은 약 3,200,000명으로 세계 5위이다. 세계에서 11번째로 탄도미사일을 독자 개발했다.

대한민국 국군의 경우 여군은 기갑, 포병, 잠수함 병과에는 진출할 수 없었으나 2014년 9월 창군이래 최초 여군 포병장교가 탄생하였고 기갑병과에도 여군이 진출함에 따라 다양한 병과에서 여군들이 활약하고 있다.

대한민국 육군은 병력 약 520,000명, 전차 약 2,300대, 장갑차 약 2,500대, 견인포/자주포/다연장 로켓포 약 5,200문, 유도무기 30기, 헬기 600기를 보유하고 있다. 현재 국방과학연구소(ADD)는 전차 K2 전차(K2 흑표, Black Panther)를 개발했다. K-2 전차는 2014년 대한민국 육군에 정식으로 배치된다. K-21 전투장갑차는 2012년경 전력화하였고 복합형 소총인 K-11 소총을 운용하고 있다.

대한민국 공군의 장비는 F-15K 60대, KF-16 (Block 52+) 134대와 F-16C/D (Block 52+) (PB형) 35여대, F-4E 80대 (퇴역 중), KF-5E/F (제공호)와 F-5E (타이거 II) 195대, T-103 러시아제 훈련기 IL-103 72대, KT-1 기본 훈련기 105대, KA-1 전선항공통제기/경공격기 20대, T-50 고등 훈련기 60대+98대 생산 확정, T-50B (블랙 이글스) 10대를 보유 중이며, TA-50 전술입문기 (LIFT) 22대를 운용 중이고 KF-16에 버금가는 다목적 전투기인 FA-50 60~120대를 도입 중에 있다. F-4E, KF-5E/F (제공호)와 F-5E (타이거 II)등은 지속적으로 도태되고 있어서 F-5E (타이거 II), KF-5E/F (제공호)는 FA-50 60대로 대체되고, F-4E는 F-35A로 대체되며 T-103 훈련기 72대 역시 기체 노후화로 한국항공우주산업이 개발한 KC-100 나라온으로 대체된다.

수송기는 전략 전술 수송기인 C-130J-30 4대 C-130H 12대, CN-235-220M 18대가 있으며 VIP 수송용으로 대한항공에서 임차한 보잉 747-400 1대를 비롯해 보잉 737-300 1대, VCN-235 2대, VC-118 1대, BAe-748 2대가 있다. 정찰기로는 호커800기를 개조한 금강정찰기와 백두정찰기, RF-4C 18대, RKF-16 5대를 보유, 운용하고 있으며, 공중 조기 경보 통제기 보잉 E-737 피스아이 4대를 운용 중이며 회전익 항공기 (헬기)는 구조.탐색용인 HH-60 페이브호크, HH-47 치누크, 카모프 Ka-32가 있으며 병력 수송용인 벨 205, 212, 412, UH-60 블랙호크 등이 있다. 이외에도 VIP 수송용인 VH-92, VH-60, AS-362 '수퍼퓨마'가 있다. 또한 공군은 국산 헬기인 수리온을 2기 주문하였다.

사병들의 전투력 향상을 위해 소화기 실탄 사격장 및 1인당 실탄사격 훈련의 내실화와 사병들의 개인 장비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있다. 공군 전력사업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사업인 한국형 전투기 사업인 KF-X 사업과 차기 대통령전용기 사업인 VC-X사업, 원격지원전자전기 사업, 스텔스 무인 전투기(UCAV)의 개발 및 사업을 진행 중이며 최근 KC-X 사업의 최종 후보로 에어버스 A330 MRTT가 선정, 4대 구매를 체결하였다.

대한민국 해군(예하 해병대 포함)은 병력 약 68,000명, 잠수함 약 20 척, 전투함정 약 140 척, 지원함정 20 척, 대잠헬기 및 해상초계기 50 대를 보유하고 있고 차기 군함들을 비롯해 모든 군함들은 선체 전체에 광범위하게 스텔스 설계를 적용하고 레이다 반사율을 줄이기 위해 경사설계를 적용한다. 총 3개 함대와 4개 전단을 두고 있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대한민국 해군 예하에 편성되어 있는 군으로서 국가 전략 기동군으로서 해병대는 상륙작전을 수행한다.
대한민국 해군(예하 해병대 포함)은 병력 약 69,000명, 잠수함 약 20 척, 전투함정 약 140척, 지원함정 20척, 헬기/해상초계기 약 50대, K1A1 전차와 K9 자주포, 상륙돌격장갑차(KAAVP7A1) 등의 기갑 차량, 상륙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경상남도 진해시에서 초대 지휘관에 신현준 중령이 임명되고, 해군 장교 26명, 부사관 54명, 병 300명으로 창설되었다. 해군 예하의 국가 전략기동군으로서 상륙 작전을 주임무로 하며, 그 외 김포, 강화, 포항, 경주, 진해, 제주, 도서지역 등 방어, 상륙작전을 하고, 예비군 교육 및 훈련 등의 임무도 수행한다. 2014년 기준으로, 2개 사단과 1개 여단을 보유하고 있고, 이외에도 연평도와 진해, 제주도 및 기타 여러 도서 지역들에도 해병 부대들을 주둔시키고 있다.

대한민국은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적 시장 경제 체제를 유지하는 중이며 자본주의에 기반한 혼합 경제 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 발전은 이승만 정권의 경제관료 양성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4.19 혁명으로 세워진 장면 정권에 의해 기존에 양성된 경제관료를 중심으로 경제 개발 계획이 준비되었으나 5·16 군사정변 발발로 실행되지 못했다.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주도로 경제 개발 계획을 성실히 수행하였으며, 경공업 육성을 통해 본격적인 산업화를 시작했다.

대한민국은 자본력이 부족한 환경에 따라 독특한 형태의 경제발전을 진행시켜 왔는데, 박정희 당시 계획경제체제를 시행, 수출을 통한 성장을 목적으로, 자본 및 기술적 기반이 약한 중소기업보다는 재벌기업이 주류인 대기업을 축으로 하는 기업경제구조를 세웠으며, 천연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가공무역을 핵심으로 삼은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정책을 도입하였다. 그 결과, 수출과 수입에 많이 의존하는 편이며, 주요 무역 상대국은 중화인민공화국, 미국, 일본, 중화민국, 독일, 영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이다. 반도체 세계 1위 삼성을 비롯하여 1983년부터 세계 조선 1위를 지켜오고 있는 현대, 백색가전의 LG, 세계 철강 4위인 포스코 등의 여러 기업 집단을 가지고 있으며 포춘지 선정 세계 500대 기업 중 17개가 대한민국 기업이다.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상장기업에는 개인지배주주가 존재한다. 반면에 기업발전에 따른 외부자본조달로 지배주주의 지분율 하락이 불가피한 가운데 지배주주와 소수주주간 이해상충문제가 심각한 편이다. 대한민국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대규모기업집단의 경우 지배구조가 계열사간 피라미드 및 순환식 소유구조에 의해 경영권을 확보하고 있으나, 이는 현금권과 통제권 간의 상당한 괴리를 가져와 기업가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안고 있다. 경영권 행사에 따른 사적 경영권 혜택이 과도하여 기업이 망하지 않는 한 경영권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비효율적 산업구조는 대한민국 경제의 치명적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가계부채는 1999년 ~ 2001년 급증, 2002년 ~ 2004년 감소, 다시 2005년 ~ 2007년 까지 급증, 이후 2008년 금융 위기로 그 증가세가 지속되어 2011년 처음으로 가구당 가계부채가 5000만원을 넘어섰다. 이는 자산 증가보다 부채 증가가 더 빨라짐에 따라 빚을 갚을 능력이 악화됐기 때문이다.

특히 소득이 적을수록 부채상환 능력이 크게 떨어졌는데, 2010년 소득 하위 20%의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비율이 2009년 보다 68.2% 급증한 279.5%에 이르러 소득의 3배에 달하였다. 이는 소득이 적은 20, 30대 가구와 저소득층의 재무건전성 악화를 보여주고있다. 이는 저축은행들이 건설업체의 잇따른 부도로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이 부실해지면서 금리가 높은 가계대출 비중을 늘림과 더불어 전월세값을 포함한 물가의 급등과 교육비 지출에 따른 ‘생계형 대출’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축소된 가계부채 상환 능력에 대하여 이명박 정부는 고소득층의 가계 빚이 가계부채의 70% 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빚을 갚을 능력이 양호하며 자산불평등도 외국에 비해 낮다는 것을 이유로 당장 한국 경제에 부담이 될 가능성이 낮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20, 30대와 저소득층의 가계부실이 본격화되면 미국이나 유럽처럼 '가계부채 대란'이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의 부채와 공기업의 공공부분 부채는 2011년 3분기 말 한국은행이 파악한 것만 789조 3600억 원으로 1년 만에 9.2% 급증했으며 이중 공기업의 부채는 1년 만에 14.4%나 급증한 363조 8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공기업 부채가 크게 늘어난 것은 정부가 보금자리 주택이나 4대강 공사 등 국책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공사채 발행 등으로 마련한 결과로 보고있다.

소득 양극화 지수는 2003년 기준으로 증가세가 2006년 2.12%, 2008년 2.05%, 2010년 0.89%로 계속 증가하고 있으나 조금 둔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소득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 계수는 2003년 기준으로 증가세가 2009년 5.65%, 2010년 2.73%으로 계속 높게 나타났다. 공적연금 지출은 30개국 중 29위,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은 30개국 중 30위로 나타났다.
경제중심도시는 서울및 광역시이며 행정도시는 세종특별자치시이다.

한국의 농업인구는 3백2만1천명으로 전체 인구의 7.5%를 차지, 10% 아래로 떨어졌다. 이와 함께 농업인구의 고령화 까지 진행되면서 나중에 식량위기가 올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공업은 중급수준의 기술을 요하는 산업들에 특화되었고, 주요 산업으로는 조선, 전자, 자동차, 반도체 등이 있다. 특히 조선 산업은 2008년 기준 세계 전체 점유율의 절반을 넘어섰으며, 전자 산업은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있다. 자동차 생산력은 세계 5위이며,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가 수출을 주도하고 있다. 최근 로봇, 친환경 에너지 등의 미래형 산업에 대한 투자와 지원 또한 늘리고 있다.
반면, 국가경제 발전수준에 비해 서비스업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은 편이며, 발달수준도 미흡한 편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는 삼성, 현대자동차와 같은 재벌 대기업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는 편이다.

한국 공업의 역사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대부터 제철, 제련 공업이 발달하였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제국의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근대적인 공업 시설이 건립되었고, 일본의 자본이 한국에 유입되었다. 일본 자본의 유입에 맞서 국채 보상 운동이 자발적으로 확산되었고 1920년대에는 김성수는 자본을 투자하여 경성방직, 경성직류 등 방직과 면 공업을 육성하여 민족자본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1923년부터는 조만식, 안재홍, 김성수 등에 의해 물산 장려 운동이 진행되어 국산 공업품을 활용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한 군수 공업으로 일변화 된 한국의 공업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광복 이후에도 한국의 공업 수준은 미미했으나, 1960년대 이후 출범한 제3공화국 정권은 경제성장의 기반으로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후 60년대에는 수공업, 수제품 공업, 기술, 근로자 파견 위주로 진행되었고, 식료품과 담배, 섬유 공업을 기반으로 하는 수입 대체 산업이 발달하였다. 7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 제조업, 수출 위주의 공업정책이 진행되었다. 1980년대 이르러 섬유, 의류 산업뿐 아니라 전자 제품, 건설, 중화학 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골목 상권은 정부가 개입, 규제하지 않는 시장 경제를 채택하였고 군사정권 몰락 이후 이러한 시장 경제 체제가 대폭 확산되고 있다. 따라서 기업형 슈퍼마켓(SSM), 빵집 등, 프랜차이즈와 대기업의 다양한 분야 시장 독과점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10년 동반성장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중소기업적합업종을 선정, 대통령이 직접 언급 하는 등 제재가 가해지고 있다. 이에 일부 대기업이 속속 사업에서 철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기업형 슈퍼마켓 기업은 중소 업체를 사들이는 등 여전히 많은 대기업은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대한민국에는 우측 통행을 하며, 자동차 운전석은 왼쪽에 있다. 4,000km에 달하는 31개의 고속도로 및 국도, 지방도 등의 도로가 있어 대한민국의 교통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경부고속도로는 AH1 노선의 일부이며 국도 제7호선은 AH6 노선의 일부이다.  

전국적으로 버스의 하루 평균 이용객 수는 1462만명이다.

과거에는 현금과 함께 회수권과 토큰을 사용했으나 최근에는 교통카드를 이용하는 지역이 대부분이며 현금도 대부분 사용 가능하나 환승 혜택이 없다. 또한 교통카드를 통한 환승 할인 혜택 등으로 사용자를 유도하는 중이다. 또한 이를 통한 도시철도와의 연계를 목적으로 수도권의 버스 노선 체계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되었고 수도권 통합요금제가 수립되게 되었다. 현재 버스 체계는 크게 시내버스와 시외버스로 나눌수 있으며 시내버스 특정 지역의 면허에 귀속된다.

또한 비교적 작은 지역에서의 운행을 위한 마을버스도 부산, 서울, 경기도 등에서 운행되는 중이다. 시내버스의 경우 시계를 넘어서면 시계 추가 요금이 부과되며 서울, 경기도, 인천의 시내버스는 거리에 따른 추가 요금이 부과된다. 시외버스는 시외버스터미널이나 시외버스정거장에서 주로 승하차가 이루어지며 대부분 교통카드를 사용할 수 없지만 가끔씩 사용 가능한 노선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버스 회사 중에서는 KD그룹이 가장 규모가 크며 대한민국내 여객용 버스의 10%를 소유하고 있으며 경기도 노선의 절반을 관리한다.

또한 현재 자가용 이용자들을 대중교통으로 유도하기 위해 버스전용차로제를 도입했다. 최근에는 장애인들을 배려하기 위하여 저상버스를 도입하는 자치 단체들이 생기고 있으며 수도권의 도심 지역의 혼란이 극심한 대한민국의 상황에 걸맞은 굴절버스를 수도권 일부 지역에서 도입하였으나 대부분 비용 문제 등으로 취소되었다.

대한민국의 철도 및 광역전철의 총 연장 길이는 3,000km에 달한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철도시설은 1963년 9월 1일 교통부 산하에 철도청을 신설하여 이때부터 국가가 체계적으로 관리하였으나 2005년에는 기업체로 전환하여, 공기업의 형태인 한국철도공사와 한국철도시설공단에서 국유 철도를 관리하고 있다. 또 2016년 12월에는 한국철도공사가 자본을 출자한 민간기업 SR에서 운행하는 수서고속철도가 개통되며 철도경쟁시대가 도래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철도선에는 경부선, 호남선, 충북선, 경전선, 장항선, 전라선, 경춘선, 중앙선 등이 있다. 특히 경의선 철도는 평부선·평의선과 시베리아 횡단철도와의 연결을 추진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도시철도는 수도권과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대전광역시, 광주광역시 등에서 운행되고 있다. 시내를 운행하는 도시철도를 일컬어 '지하철' 또는 '전철'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1974년 8월 15일 처음으로 개통된 수도권 지역은 1~9호선을 비롯하여 총 23개 노선이 운행되고 있으며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1985년 개통된 두 번째로 큰 부산 도시철도는 총 길이가 100km를 상회하며, 5개 노선이 운행된다. 이 외에도 대구에는 3개 노선, 광주와 대전에는 1개 노선이 운영되는 등 일부 광역시를 중심으로 도시철도가 마련되었다. 요금은 지자체마다 다르나, 대부분의 노선에서 복지 정책으로 65세 이상의 노인과 장애인, 국가유공자는 무임으로 승차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도시철도는 대체로 운행 시간이 정확하고 위생환경과 전반적인 이용이 쾌적하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나 실내먼지 오염농도가 높고, 출퇴근 시간에 사용자가 많은 일부 역에서 혼란이 빚어지는 등 개선점도 지적된다. 또한, 화재 확산 방지를 위하여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 이후 열차의 내부 자재를 불연성 재질로 제작하고 있으며, 방독면이나 소화기 등도 역사와 차내에 비치되어 있다. 선로 추락 사고나 자살 등을 예방하기 위한 대책으로 전국의 모든 도시철도 역에 승강장 안전문이 설치되었다.

대한민국에는 8개의 국제공항과 7개의 국내선 공항이 대한민국 내외의 항공 교통을 담당하고 있다. 항공교통은 광복 후 1948년 대한국민항공사(KNA)가 설립되어 국내선을, 1954년 이후 국제선을 운항하였다. KNA는 1962년에 대한항공공사로 개칭하고 국영으로 운영되다가, 1969년 한진상사가 인수하여 대한항공으로 개명하고 민영으로 운항되면서 급속한 성장을 보였다. 1988년 제2민간항공사업이 허가됨으로써, 금호그룹의 아시아나항공과 함께 경쟁체제로 바뀌었다. 또한 대한항공은 2007년 기준으로 약 100억 톤의 화물을 처리하였다. 최근에는 진에어, 에어부산 등 여러 저가항공사도 운행되고 있다.

수출입화물운송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해운업은 선박의 노후화, 선원부족, 비용가중이라는 내부적 문제에 비국적선 취항증가로 경영압박을 받고 있다. 2002년 말 전국의 항만수는 총 49개항이며, 이 중 무역항이 27개, 연안항이 22개항이다. 이들 항만의 연간 하역능역은 2억7,259만5,000톤으로 1988년의 1억7,077만톤보다 약 1.6배 증가했다. 선박등록현황은 총 763만 7,549톤(6,792척)이며, 이 중 여객선 12만 4,513톤(190척), 화물선 521만 4,636톤(725척)이고, 외항선박들의 주요정기항로 취항현황을 보면 북미 25척, 동남아 48척, 한일항로 55척 등이다.

국민의 대부분은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한민족이다. 고대부터 중국 대륙 등지로부터의 인구 유입도 잦았으나 그들도 같은 민족으로 융화되었다. 다만 1990년대 이후 중국,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개발도상국 국가에서의 이주가 늘어나면서 다민족적인 요소 또한 증가하고 있다. 2018년 통계청 기준 인구는 총 51,629,512명이다. 민족구성을 보면 한국인 49,977,951명(96.8%), 중국인 101만2000명(2.5%)

대한민국의 노동조합 연맹체로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등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수구,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기독교계에서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 등이 존재해 왔다. 대한민국에서는 2000년 홍석천, 하리수, 이시연 등의 등장 이전에는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밝히기만 해도 주변에서 따돌림, 학교 폭력에 노출되거나 취업 등에 불이익 등을 받아왔다. 성소수자들은 1992년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으며, 1993년 성소수자 단체 초동회가 처음 결성되고 1년 뒤에는 남자 동성애자인 게이, 트랜스젠더 모임인 친구사이와 레즈비언 단체인 끼리끼리로 분리되었다. 1997년에는 대학생 동성애자 인권단체인 대학생동성애자인권연합이 결성되고 이듬해 동성애자인권연대로 명칭 변경, 2015년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로 명칭 변경하였다.

현재, 대한민국 내 대표적인 성소수자 인권단체 연맹체로는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 (무지개행동)이 있다. 이런 동성애 문화가 확산되자 기독교에서 동성애가 합법화되면 동성애자를 욕해도 처벌받는다거나 동성애자 부부에 대해 주례를 거부한 이유로 처벌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동성애 반대를 위해 제17대 국회에서부터 대한민국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반대를 예배나 각종 집회를 통해 선동하면서 동성애 차별금지를 주장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박원순 서울시장에 대해 비판하고 있으며 자유한국당 안상수 의원은 2019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 정한 차별금지 대상에서 성적 취향을 제외하자는 개정안을 발의하여 논란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에서의 여성의 활약이 미미하다고 분석되는데, 2017년 이코노미스트 유리천장 지수에서 한국의 고위직 여성 비율은 10.5%, 기업 이사회 내 여성 임원 비율은 2.4%로 나타나 OECD 29개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대한민국 국회 내 여성 비율은 17%로 이는 OECD 평균(28.2%)보다 낮은 수치다. 근 십여 년간 대한민국의 대기업들이 외국인 임원과 여성 관리자를 뽑았지만 그 중 상당수는 몇 년도 버티지 못했다. 2010년 SK의 첫 외국인 여성 임원(2008~2010년)이었던 린다 마이어스는 한국 기업은 다양성 문제에서 너무 보수적이고 변화에 느리다고 평가했다.

중화권, 일본, 동남아시아, 아랍, 독립국가연합 등을 비롯한 세계 여러지역의 사람들과 결혼하는 한국인이 늘고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가정을 이주가정이라고 부른다. 특히 농촌 지역 기준 결혼 등록건수의 50%에 해당하는 1만여 건 정도가 국제결혼으로 등록되고 있다. 1990년대 초까지 남아선호사상이 잔존하였으며, 1970년대의 박정희 정부의 둘만 낳자는 가족 계획과 1980년대 전두환 정부의 하나 낳아 알뜰살뜰 등의 가족 계획으로 여자 아이에 대한 낙태 현상 등으로 1970년~1990년대 초반 출생자들 사이에서는 남녀 간의 성 비율이 깨져 여성에 비교하여 남성의 수가 월등히 많은 현상이 도래하였다. 또한 1980년대 후반부터 농촌 기피 현상으로 일부 농촌 지역 노총각들이 결혼, 연애가 어려운 것에 비관하여 자살하는 일이 증가하였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외국에서 배우자를 찾는 농촌 총각들이 증가하였다.

이주노동자는 1990년대 이후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면서 1970년대 이후 고졸이던 평균 학력이 1995년 고교평준화와 학력고사 등의 폐지 이후 대졸 내지는 초대졸로 변화하였다. 그에 따라 청년층이 3D 업종 또는 4D 업종으로 분류되는 직업을 기피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3D 업종과 4D 업종으로 분류되는 직종 외에도 중소기업과 일부 공장 등에 대한 기피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로 인해, 각지에서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대한민국에 들어와 일하고 있다. 이들은 합법적으로 취업 비자를 받고 입국한 산업연수생과 불법적으로 들어온 불법 체류자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이주노동자라 하면 이들 둘을 통틀어 가리킨다. 2010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이주노동자 수는 55만 명으로,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2.2%를 차지하고 있다. 일각에서 이주노동자가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견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주노동자의 비율은 10% 대를 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내 난민의 대부분은 경제적 곤란 등의 이유로 북측에서 나온 탈북자로, 정부에서는 이들을 대한민국 헌법에서 정한 상징적인 영토 규정에 의하여 대한민국 영토를 불법점거하고 있는 반국가단체의 집단을 탈출하여 대한민국의 영역으로 들어온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하면서 국적 부여, 생활 지원 등 다양한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이후 정치적 난민을 인정하기 시작하여 아프리카나 아랍권의 일부 국가로부터 정치적 혹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입국한 이들을 인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그 수는 일반적인 선진국에 비해 많지 않다. 2017년에는 남성과 여성 모두와 사귀거나 성 관계를 하는 탐욕적인 양성애자라는 이유로 난민을 신청했다가 대법원에서 받아들여진 사례가 있으며 2018년에는 비행기만 타면 비자가 없어도 제주도에 올 수 있는 점을 이용하여 예멘에서 대규모로 난민이 유입되어 국민적 반발이 컸다.

인구 유입 등으로 수도권 전체 인구는 증가하는 반면 부산은 지속적 감소로 1995년 381만 명에서 2013년 356만 명으로 급감했으나 대신 인근 경상남도 지역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대구 역시 253만 명에서 252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인천은 약 298만 명, 대전 155만 명, 광주 148만명 울산 117만 명 등이다.

대한민국의 도시화율은 81.5%로, 전 세계적으로 매우 도시화된 국가에 속한다. 대한민국은 2020년을 전환점으로 하여 인구증가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하여, 2045년에는 인구 5천만 명 선이 붕괴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2018년 기준으로 합계출산율(여성 한 명이 평생 동안 낳는 자녀 수)은 0.98명으로 세계 최초의 출산율 0명대 국가가 되어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어 인구 감소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초등학교 6년과 중학교 3년이 의무교육이다. 고등학교는 3년 과정이며, 일반계(인문계, 자연계)·전문계(실업계)·특수 목적 고등학교(특목고)로 분리되어 있다. 고등교육에는 4~6년제 대학교와 2~3년제 전문대학이 있다.

대한민국은 대학교 진학률이 다른 국가에 비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일반적으로 대학교에 진학하려는 사람들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치르게 된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은 고등학교 졸업 예정자 혹은 고등학교 졸업에 상응하는 학력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치를 수 있다. 이 외에도 각 대학에서는 수시입학전형, 특별전형 등을 통하여 개별 대학의 요구에 맞는 학생들을 선발하고 있다. 또 대한민국은 사교육 시장이 크게 발달되어 있어, 사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이, 각 가정마다 월평균 70여만원을 웃돌고 있다.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는 우파와 좌파의 극심한 이념 대립 등에서 기인한 사회 갈등이 존재한다.

또한 한국의 노사갈등에 대하여 상당수의 국민들이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국제경영개발원에 의하면 한국의 노사관계는 57개국 중 56위로 선정되어 시급한 문제로 꼽히고 있다.

이념 대립의 연장선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실현 방식에서 국가주도의 사회운영과 성장을 주장하는 국가주의세력과 개인의 자유에 따른 사회 운영을 주장하는 동시에 분배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진보주의 세력 간 논리의 충돌도 있다. 이는 서방세계와 같은 좌우 대립의 이념지형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데서 기인한 사회 갈등인데 그 원인으로 일각에서는 대한민국이 반공반북을 중요시하여 좌파의 존재를 부정해야 하는 환경이 장기간 지속되었고 1980년대 학생·노동운동 진영에 의해 만들어진 좌우 대립의 이념지형도 1990년대 초 세계적인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사라져 서방세계와 같은 이념지형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대한민국의 갈등 지수는 2009년 삼성경제연구소가 조사한 결과 OECD 회원국 중 4위에 해당하였으며, 이 같이 높은 사회 갈등에 따른 비용으로 국내총생산(GDP)의 27%인 약 300조원을 지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민국의 소통 지수는 2011년 아시아포럼21이 조사한 결과 100점 만점 중 이명박 정부의 소통 지수는 45.8점, 한나라당의 소통 지수는 42.6점, 기성세대와 젊은세대 간 소통 지수는 36.2점으로 모두 50점 이하인 걸로 나타났다.

인종 차별이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서 유독 심하며, 백인은 차별이 거의 없으나, 흑인 및 황인은 오히려 차별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한국어를 모르는 아프리카 및 동남아시아 사람들에게도 차별 대우를 하는 경우가 있으며, 유럽 같은 경우에는 차별이 그렇게 심하지 않다.

경쟁 심리도 심각하다. 대한민국은 어려서부터 성적, 경쟁 위주의 교육과 문화 속에서 성장하게 함으로써 경쟁과 그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한다. 이에 따라 남과 나를 비교하며 오직 높은 곳만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는 성인이 되어서 학력 위주 경쟁, 스펙 위주 경쟁, 실적 위주 경쟁, 외모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등으로 획일화된다.

SBS와 한국갤럽이 2011년 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우리 사회의 경쟁 수준은 평균 76점으로 10년 전보다 20점 가까이 높아져 경쟁이 계속 가속화됨을 보여주었으며, 국민 10명 중 8명이 과도한 경쟁에 부담을 느낀다라고 대답하여 상당수가 부담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쟁은 모두를 스트레스 속에 놓이게 하며, 장기간 스트레스는 매우 예민해지게 만들고, 분노, 불면증, 우울증 등의 신체·정신적 증상을 동반하게 된다. 그래서 이를 담당하는 정신과 진료와 심리 상담 치료의 횟수가 늘어나고 있으나, 여전히 언덕 위의 하얀 집으로 불리는 등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어 상당수가 기피하는 실정이다. 또 경쟁은 다수의 패배자를 생산하게 되는데, 이는 다수의 자존감 저하와 수치심, 분노심 상승의 원인이 되고 있다.

결국 사회 전반의 동질성 추구와 이질성 거부 심리, 경쟁 심리는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외국인 차별, 왕따, 학교 폭력, 인터넷 악플 등으로 표출되고 있으며, 이에 따른 피해로 정신 이상자의 수를 늘리거나, 그런 정신 이상자를 방치하게 되어 자살자를 늘리거나, 사회에 불만을 품고 불특정 다수에게 행하는 묻지마범죄의 수를 늘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이에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2011년 10월 '대한민국 3, 4차 정부보고서에 대한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최종 견해'라는 보고서를 통해 학생의 성적에 따른 차별과 경쟁적인 교육체제에 대해 지적하며 개선을 요구하였다.

학력 차별에 대한 대응으로 이명박 대통령은 2011년 라디오 연설에서 학력차별 없는 사회를 강조하였으며, 고용노동부가 고등학교 직업 교육에 지원을 강화하는 등 능력 중심의 열린 고용 지원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백혈병이 생겨 산업 재해로 인정 받는 학생도 있었고, 음료공장 실습중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지기도 하고, 제주도에서는 지하철 청소 실습 중 지하철에 치어 숨지는 사고 등으로 고등학교 현장 실습이 노동력 착취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은 상황이다.

이러한 결과로 과거 대학교의 비인기 학과였던 '심리학과'가 상위 경쟁률을 기록하고, 관련 주제의 책이 대거 출간되고, 베스트 셀러에 오르는 등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2011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여가 시간에 즐기는 활동 중 게임이 29.9%로 가장 높았다. 연령별 연령별로는 30대 미만의 경우 역시 게임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반면 30대 이상 연령층은 영화와 TV 시청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1인당 영화 관람 횟수는 2013년 4.12편으로 미국의 3.88편을 제치고 세계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의 여가생활에 대한 불만족 이유들로는 ‘시간 부족’ 비율이 45.9% 였고, 그 다음으로는 ‘경제적 부담’이라는 이유가 45.6%로 나타났다.

한국은 반도에 있는 지리적 조건으로 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고대의 한국 문화는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의 북방계와 동남아시아의 남방계가 혼합된 바탕에 중국 등 이웃 나라에서 들어온 외래 문화와 한국 고유의 독자적 문화와 융합하여 발전했다.

관습적인 공용어이자 법적인 공용어는 한국어로, 그 계통이 학계에서 확증되지 않은 고립된 언어이지만 많은 학자들이 알타이어족과 연관성 있음을 주장한 바 있고, 특히 많은 한국인 학자들은 한국어가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보고 있다.

한국어 표기에 쓰이는 문자인 한글은 세종대왕이 원로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언문청(諺文廳) 또는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여, 훈민정음이라는 명칭으로 1446년 반포하였다. 한글은 각 자음과 모음이 하나의 기호로 표시되고, 그 자음과 모음을 모아써서 소리를 나타내는 표음문자이다. 한글의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뜨고 모음은 천(하늘:ㆍ),지(땅:ㅡ),인(사람:ㅣ)을 나타내는 각 부호의 조합으로 만든,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 창제 원리가 밝혀진 문자이다. 한글 창제 이전에는 삼국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써왔던 한자와 이를 당시의 한국인이 쓰던 입말에 맞는 한자의 소리만 따서 문자로 표기한 향찰, 구결, 이두 등이 한국어 기록 수단이었다.

한자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양반층 및 관공서에서 계속 써왔으며,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야 비로소 공문서에 한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글의 이해를 돕는다는 측면에서 한글 대신 한자로 직접 표기하기도 한다. 1962년 3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전용정책이 시행되면서 표기문자의 주류로 등장했고, 현재 한자 표기는 중의적 표현을 막기 위해 부수적으로 쓰고 있다.(한글맞춤법 참고)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까지는 영어를 제1외국어로 의무 교육으로 가르치고 있다. 중,고등학교에서 선택하여 배울 수 있는 제2외국어로는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아랍어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때 수험생이 제2외국어를 선택할 수도 있다. 특히 일본어와 중국어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많이 배우는 제2외국어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면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과 더불어 집회, 결사,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일간 신문은 크게 전국지와 지방지로 나뉜다. 전국지는 대한민국 전국을 대상으로 발행되며, 지방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일부 지면을 할애한다.

지방지는 특정 지역에 연고를 둔 신문으로 전국적인 뉴스를 다루기도 하지만 주로 해당 지역의 뉴스를 다룬다. 전국지로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의 보수적인 신문, 이른바 '조중동'과, 한겨레, 경향신문 등의 진보적인 신문, 이른바 '한경오'으로 분류되고 있다. 2008년 한국언론재단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시장점유율은 조선일보 11.9%, 중앙일보 9.1%, 동아일보 6.6%, 경향신문 2.7%, 한겨레신문 1.7% 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전문지들도 있으며, 크게 경제에 관련된 소식을 다루는 경제지와, 스포츠와 연예계 소식을 다루는 스포츠지를 들 수 있다. 한편 주요 도시의 공공시설에서 출근 시간대에 무료로 배포되는 무가지가 존재하며, 인터넷 매체를 통한 인터넷 신문도 존재한다. 2008년 기준 대한민국 일간지의 수는 약 288종, 주간지의 수는 약 2,896종, 월간지의 수는 약 3,293종, 격월간지의 수는 약 459종, 계간지의 수는 약 981종, 년 2회의 수는 약 325종, 인터넷 신문의 수는 약 1,040종 정도가 있다.

방송의 경우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 FM라디오 방송, AM라디오 방송, 단파 라디오 방송, 케이블 방송, 디지털위성방송, 지상파 DMB 방송 등이 있다. 현재 전국 단위 지상파 방송으로 국공영 방송인 한국방송공사(KBS)와 준공영방송인 문화방송(MBC)이 있다. 지역 단위 지상파 민영 방송으로는 한국방송공사와 문화방송(MBC)을 중심으로 한 계열과 서울지역의 지역민영방송인 에스비에스(SBS)를 중심으로 한 SBS 네트워크 계열이 있으며, 그외 독자적인 지방 민영방송인 경인지역의 경인TV가 있다. 그외 한국교육방송공사법에 따른 공영방송인 한국교육방송공사(EBS)이 지상파 방송으로 있다. 종합편성채널 4사로는(JTBC, MBN, 채널A, TV조선)와 보도 채널인 연합뉴스TV와 YTN 등 2개의 보도 채널이 존재하며, 케이블TV 최대 PP사업자인 CJ EM과 티캐스트도 있다.

라디오 방송의 경우 지상파 방송사인 KBS, MBC, SBS, EBS가 점유하는 주파수와 기타 기독교방송(CBS), 극동방송(FEBC), 불교방송(BBS), 평화방송(PBC), 원음방송(WBS) 등 종교방송의 주파수, 교통안내 전문 방송인 교통방송(서울은 TBS, 기타 지역은 TBN 한국교통방송), 국악 전문의 국악방송, 그리고 국방홍보 목적의 국군방송 등의 여러 방송사가 존재한다.

대한민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터넷이 연결된 나라이며, 세계 최고 속도의 인터넷 속도를 보유하고 있다. 높은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과 인터넷 이용률을 보이는 대한민국은 2000년 초중반 인터넷 신문을 표방한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의 등장과 함께 인터넷 신문과 포털사이트를 중심으로 한 인터넷 언론 매체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인터넷 언론 매체들은 인터넷 매체 특유의 신속성과 높은 접근성 등을 강점으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론 형성에 상당한 위력을 보이고 있다. 참고로 단순 뉴스 전달자에 불과했던 포털사이트가 하나의 언론세력으로 성장하는 변화를 보임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는 인터넷 신문사, 포털사이트를 언론 기관으로 보고 법적 규제를 마련했다.

대한민국에는 고대로부터의 전통적인 토착신앙으로서 무교(무속신앙)이 있다.

불교와 유교는 오래전 삼국시대부터 유입되었으며, 불교는 5세기부터 14세기 말(삼국시대 및 고려시대)에 이르는 약 1천 년 동안 한반도에서 융성하여 많은 사찰과 문화유산을 남기고 현재 단일 종교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신도수가 많다. 14세기 말 조선에서는 유교가 국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유교를 학문과 사상, 가치관 그리고 철학으로서 배우는 사람은 있으나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유교는 현재까지도 한국인들의 풍습이나 습관, 습성, 가치관, 사상, 생활 방식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독교의 경우 천주교는 조선 후기에 이승훈 등에 의해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었으며, 그 교세가 확장되자 병인박해, 신유박해 등 대규모 박해 사건이 일어난 일 때문에 프랑스의 병인양요가 일어난 계기가 되어 조선 정부의 탄압이 거세졌다. 당시의 순교자 중 103명이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시성되어 성인이 되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으로 학교와 개신교 교회들이 세워졌다. 이 시기에 감리교, 장로회 등의 개신교, 성공회, 정교회 선교사가 파송됨으로써 전파되었고 양적인 성장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기독교 역사는 비록 짧으나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현대 사회에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인 종교활동 및 선교가 활발하다. 현재 성공회, 천주교와 정교회, 개신교를 합친 기독교 인구는 전 종교 중에서 가장 많다.

그 밖에 천도교(동학), 대종교, 원불교, 증산도, 통일교 등 여러 신흥 종교가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기간 한국에서 창시되어 현재까지 신봉되고 있다.

대표적인 대한민국의 전통 민요로는 아리랑을 들 수 있고, 그 밖에 지방마다 다른 민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많은 가수들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권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시장(K-POP)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대표적인 K-POP 가수로는 보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비스트, 티아라, 인피니트, 방탄소년단, 핑클 등이 있다. 또한 2012년에는 싸이(박재상)의 강남스타일(Gangnam Style)로 세계에 강남스타일 열풍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노래는 원더걸스의 Nobody 이후, 미국 빌보드 차트에 2위까지 올랐다.

한국 미술은 약 기원전 7천여 년 전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고조선 시기에는 제의를 위해 만들어진 비파형 동검, 동경 (거울), 방울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삼국 시대에는 왕족과 귀족을 위한 예술이 등장하였는데, 고구려의 고분벽화, 백제의 금동대향로, 신라의 금관이 대표적이다. 이후 고려 시대에는 도자기의 일종인 고려 청자와 먹으로 그리는 문인화가 발달했다. 조선 시대 때부터 양반 사대부들을 성리학에 기반한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이들은 문인화와 백자를 선호하였다. 이들 문화는 다분히 사대주의적이었으나, 영조와 정조 시대에는 정선, 김홍도, 신윤복 등의 화원들이 나타나 특색 있는 미술을 만들었다. 동시에 조선시대에는 서민적인 미술인 민화가 발달했다.

그 후 대한제국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서양 고전 미술과 모더니즘 미술이 도입되었고, 해방 이후 미국, 프랑스,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돌아온 유학생들이 현대 미술을 시도하였다. 현대 한국 미술은 서양적 기술과 재료를 바탕으로 한 혼합된 서양화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서예, 동양화와 같은 전통미술 역시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한편 백남준은 독창적인 비디오 아트를 선보여 한국 출신 작가 중 가장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예술가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 순수미술 분야는 국내외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반면 건축, 그래픽디자인, 산업디자인, 게임 같은 상업미술 분야에서는 점차 주목받고 있다.

한국의 스포츠는 고대부터 무술에 근거한 체육 활동이 발달했으며, 특히 대한민국의 국기(國技)인 태권도는 올림픽 정식 종목에 채택되기도 하였다. 태권도 이외에도 한국 전통 무술(스포츠)인 궁술(국궁), 택견, 씨름이 있다.

대한민국은 1948년 하계 올림픽부터 올림픽에 참가했다. 또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였으며,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획득하여 종합 4위를 기록하였다.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이 강세를 보이는 종목으로는 양궁, 사격, 탁구, 배드민턴, 쇼트트랙, 핸드볼, 유도, 태권도, 역도가 있으며, 최근 20년간 하계 올림픽의 경우 시드니 올림픽을 제외하면 메달 종합 10위 이내의 성적을 올렸다. 특히 2012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종합 5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동계 올림픽의 경우 2018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기도 했으며, 2010년 동계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종합 5위를 기록하며 최고 기록을 세웠다.

대한민국은 또한 1986년 아시안 게임과 2002년 아시안 게임, 2014년 아시안 게임등을 개최했으며, 종합 1위는 1995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200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 차지한 적이 있다.

실제로 즐겨하는 생활스포츠 그리고 국가대표팀 경기와 프로 경기 포함 TV로 가장 즐겨보는 스포츠 등 각종 부분에서는 축구가 최고 인기 스포츠로 선정되고 있으며 축구, 야구, 농구, 배구, e스포츠, 바둑의 6개의 종목이 프로 리그를 갖추고 있다. 프로 리그에서 인기 종목으로는 야구와 축구 등이 꼽히며, 한국의 발전에 밑거름에 이어 근래에는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 축구는 2002년 FIFA 월드컵을 일본과 공동 개최하며 대회 4위에 오른 적이 있다. 2010년 FIFA 월드컵에서는 원정 16강에 성공하였으며, 2018년 대회까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2012년 하계 올림픽 축구에서는 동메달을 따기도 했다. 야구는 2008년 하계 올림픽에서 우승,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준우승, 2015년 WBSC 프리미어 12 우승의 경력이 있다.

한편 대한민국이 개최했거나 개최 예정인 스포츠 대회는 다음과 같다.

한류(韓流, Korean wave)는 대한민국의 대중문화가 주로 아시아를 중심으로 외국에서 대중성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1997년 무렵부터, 문화 수출국을 목표로 하는 대한민국의 국책을 배경으로, 2000년 전후부터 대한민국 드라마가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서 방송되었다. 그 후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일본에서도 한국의 대중문화가 널리 유입되어 이 용어가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Article 77: 대한민국의 국가 (872 words)


애국가(愛國歌)는 대한민국의 국가이다. 1919년 안창호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스코틀랜드 민요인 〈작별〉에 삽입해서 부르기 시작하다가 1935년 한국의 작곡가 안익태가 지은 《한국환상곡》에 가사를 삽입해서 현재까지 부르고 있다.

가사의 작사자는 윤치호 설, 안창호 설, 윤치호와 최병헌 합작설 등이 있다. 윤치호의 작사설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는 애국가를 바꾸려 하였으나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 김구의 변호로 계속 애국가로 채택하게 되었다. 이후 1948년의 정부 수립 이후 국가로 사용되어 왔으며, 2010년 국민의례 규정에서 국민의례시 애국가를 부르거나 연주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로서의 역할을 간접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안창호 설에는 실증적인 자료가 부족하다.

윤치호의 사촌동생 윤치영(尹致瑛)은 윤치호가 대한민국의 애국가 가사의 일부를 썼다고 주장했다. 윤치영에 의하면 애국가 가사의 앞부분은 최병헌 목사가 짓고, 후렴구는 윤치호가 지었다는 것이다. 최병헌은 윤치호가 다니던 정동감리교회의 목사였다. 윤치호와 최병헌이 함께 지었다는 애국가 사본이 2002년 한남대학교 교수 박정규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다. 이는 윤치호의 ‘무궁화 노래’(1896)와 김인식의 ‘코리아’(1910)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 또한 애국가의 원본은 그가 지었으나,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부 개사했다고도 한다.

그밖에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로 시작되는 협성회 무궁화가 역시 윤치호가 작사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윤치호가 지은 노래 중 안창호가 가사의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를 문제삼아 가사를 바꾸라고 요청하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으로 고쳤다. 그러나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한 안창호는 윤치호가 지었다가 본인 스스로 수정한 부분 중에서도 우리 대한 만세를 우리 나라 만세로, 이기상과 이맘으로 임금을 섬기며를 이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며로 안창호가 다시 고쳤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주요한과, 독립운동가 안태국의 사위 홍재형 등은 그가 지은 협성회 무궁화가를 안창호의 요청으로 개사한 것이 애국가의 기원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이는 한말 독립운동가인 안태국(안창호, 양기탁 선생과 신민회를 조직,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피검)의 사위인 홍재형이 안태국의 말을 회고하는  의 내용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또 주요한은  에서 ´원래 끝 구절의 첫 가사는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임금)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였으나 1919년부터 상해에서 이를 지금과 같이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는 분명 안창호가 고친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한편 전택부 역시 윤치호가 애국가의 유력 작사자라 주장하였다. 그 근거로는 첫째로, 1907년 윤치호의 역술로 출판된 중에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애국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 둘째로 미국에서 살고 있는 양주은이 소장한 국민가 중에 애국가가 윤치호의 작사로 되어 있다는 사실, 셋째로 해방 후 윤치호가 친필로써 ‘윤치호 작’ 애국가(사진 10번)를 쓴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1955년 벌써 밝혀졌던 사실 이라는 것이다.

윤치호가 지은 찬미가의 개사본이 1910년에 실렸다. 애국가가 수록된 최초의 문헌이 윤치호의 “찬미가”이고 1910년 9월 21일자 신한민보에 애국가의 전문이 윤치호 작사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어 윤치호가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윤치호는 안창호의 노력으로 신학문을 수용하고 체계적 교육이 시행되고 있던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느낀 바 있어 자신의 작품격인 찬미가를 저술하며 여기에 도산이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애국가를 수록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애국가의 원작자로는 윤치호 설이 유력하다. 한편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윤치호 단독작사설을 심의했을 때 찬성 11표, 반대 2표로 만장일치를 끌어내지 못하여 결정을 유보하였고, 그 이후 애국가에 작사자에 대한 결정은 없었다. 따라서 현재 애국가의 공식적인 작사자는 미상이다.

처음 애국가는 가사에 스코틀랜드 가곡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로버트 번스 작사·윌리엄 쉴드 작곡)의 가락을 붙여서 불렀다. 새 곡을 써야 할 필요를 느낀 안익태가 1935년 11월 사 장조로 된 새 가락을 작곡하여 1936년 The Korean Student Bulletin 1936년 10월호에 애국가 악보 광고가 붙기도 하였다. 새 가락을 붙인 애국가의 악보는 1942년 뉴욕한인교회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애국가는 1940년경에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전해졌고 국가로 채택되었으나 한반도에는 전해지지 못했다. 다만 1942년 8월 29일에 개국한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은 애국가 1절을 매일 방송하였다.

한반도의 독립 이후 새 애국가의 악보가 전해졌고, 이후 1948년 세워진 대한민국 정부의 사실상의 국가(國歌)가 되었다. 애국가의 악보는 교과서 등을 통해서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다만 대한민국의 성문법에서는 국가를 별도로 규정하지 않았고, 현재까지도 법령상 규정되어 있는 바는 없으나 사실상의 국가로 인정되어 있어 국가적인 행사 따위에서 연주 또는 가창된다.

라디오 방송은 해방 이후에는 1945년 9월 9일(사실상 1948년 정부 수립)부터, 텔레비전 방송은 1956년 5월부터 1959년 2월까지, 1961년 12월 31일 이후부터 방송 시작맨트와 종료맨트(국명 고지)을 통해 애국가를 매일 방송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을 주권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애국가 연주를 거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2010년 FIFA 월드컵 예선 홈 경기는 평양이 아닌 중국에서 치러졌었다. 다만 2013년 평양에서 열린 아시안컵 및 아시아 클럽 대항 역도선수권대회에서는 이례적으로 대한민국의 애국가 연주가 허용되었다.

다만 두 곡은 첫소절이 서로 비슷하지만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가 약박으로 시작하는 데 비해 〈애국가〉는 강박으로 시작하며, 전체적으로 가락의 분위기가 다르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작곡한 것은 1935년이고, 그가 처음으로 유럽에 간 것은 이듬해인 1936년이었기 때문에 그가 불가리아 민요를 접했을 가능성은 낮다. 또한 니콜로프의 논리는 1966년 안익태의 전기인 김경래의 『안익태의 영광과 슬픔, 코리아 판타지』(현암사)에서 안익태는 애국가를 작곡하기 위해 필라델피아 유학시절 무려 40여 개국의 국가를 수집했다. 또한 세계 각국의 민요, 가곡, 성가곡을 모아 애국가 작곡을 위한 기초 자료로 삼았다는 증언에 맞지 않는다고 분석되기도 한다.

과거에는 애국가의 저작권이 국가에 귀속되지 않고 안익태의 유족이 그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1992년부터 이에 따라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신탁을 통해 저작권료를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2003년에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서는 프로축구단 경기에서 애국가를 무단으로 사용한 두 구단을 고소하였으며, 이에 따라 논란이 불거졌다.

이후 애국가의 저작권을 국가에서 사들이는 것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으며, 결국 2005년 3월 16일 안익태의 유족이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에 저작권을 기증함으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또한 작곡가인 안익태도 생전에 친일 활동을 했다 하여 정치적 논란이 되기도 한다.

윤치호가 짓고 안창호가 개사하였다는 논란은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도 돌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애국가의 채택을 놓고 임정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임시정부의 지도자 중 한 명이던 김구는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한 동지에게 '우리가 3.1 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했는데 누가 지었는가가 왜 문제인가'라며 '작사ㆍ작곡가의 성향보다 애국가 안에 담긴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반박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곡의 음악성에 관하여, 그 선율 자체가 처음에 못갖춘마디처럼 들려, 이로 인해 뒷부분의 호흡에 문제가 생긴다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2006년에 YB가 편곡한 애국가에서는 첫마디만 못갖춘마디로 바뀌어 있다.




#Article 78: 노벨 물리학상 (171 words)


노벨 물리학상( - 物理學賞, , )은 6개 분야의 노벨상 중 하나로, 1년에 한 번 스웨덴 왕립 과학원에 의해 수여된다. 첫 번째 노벨 물리학상은 1901년, 엑스선을 발견한 독일의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에게 수여되었다. 이 상은 노벨 재단이 주관하며, 이 상을 수상하는 것은 물리학계에서 최고의 영예로 꼽힌다. 노벨 물리학상은 알프레드 노벨의 사망일인 12월 10일에 스톡홀름에서 수여된다. 2007년의 노벨 물리학상은 프랑스의 알베르 페르와 독일의 페터 그륀베르크가 거대 자기저항의 발견에 대한 공로로 공동 수상하였고, 상금인 1천만 스웨덴 크로나를 나누어 가졌다.

노벨 물리학상은 사람들이 그 과학자의 업적의 중요성을 알기까지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다른 한 편으로는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8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의 경우 그 이론은 이미 1930년에 이미 발표하였지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여 50여년이 지나서야 상을 받을 수가 있었다. 또한 201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피터 힉스와 프랑수아 앙글레르의 경우 그의 이론을 검증할 수 있게 되는 과학기술이 발전하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 49년 뒤 그의 업적이 사실로 확인되어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이론과 발견이 사람들에게 중요성을 인정받았지만, 그 이론이나 발견을 발표한 과학자가 이미 죽어버렸기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Article 79: 안익태 (195 words)


안익태(安益泰)(1906년 12월 5일 ~ 1965년 9월 16일)는 대한민국 출신의 스페인 작곡가, 첼리스트, 트럼페터,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이다.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1945년 8.15 조선 광복 이후 대한민국 서울의 숭실중학교와 숭실고등학교에서 각각 명예 졸업장을 수여받기도 한 그는 대한민국의 국가(國歌)인 애국가를 작곡했으며, 대표 작품으로 한국환상곡이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다.

안익태는 1906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평양종로보통학교와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를 마쳤다. 1921년에 일본으로 유학, 도쿄 세이소쿠 중학교에 음악특기자로 입학하였다. 1926년에는 도쿄 구니타치 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해 첼로를 전공했고, 1930년 졸업 후 다시 미국으로 유학했다. 와 커티스 음악학교,  음악대학원에서 첼로와 지휘 등을 배웠고 한인 교회 등에서 음악감독으로 일하기도 했다.

안익태 본인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1930년대 후반에 만났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베를린에 머물렀던 1942년에 만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안익태 공연 프로그램에 '슈트라우스의 제자' 라는 내용이 실리기 시작했고, 슈트라우스가 자신의 작품인 '일본 축전 음악' 을 지휘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작성해준 추천장이 남아 있다. 안익태는 2차대전 종전 후 슈트라우스의 교향시들을 본격적으로 다루었으며, 일본의 옹가쿠노토모샤(음악지우사)에서 슈트라우스의 전기를 출판하기도 했다.

전황이 악화되자 1944년 4월에 파리에서 베토벤 축제 연주회를 마친 직후 독일의 우방인 스페인으로 피난했으며, 그 해 12월에는 그의 대표작인 한국 환상곡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필 악보를 완성했다.

안익태의 1940년대 유럽 활동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김경래와 롤리타 탈라베라의 전기에 기록된 자료로 전해져 왔으나, 최근에 진행된 연구들에서 이들 자료의 잘못된 정보와 왜곡 사례를 지적하고 있다.




#Article 80: 서울특별시 (1750 words)


서울특별시는 대한민국의 최대 도시이며 유일한 특별시이며 사실상 수도이다. 백제의 첫 수도인 위례성이었고, 고려의 남경이었으며, 조선의 수도가 된 이후로 현재까지 대한민국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이다. 중앙으로 한강이 흐르고, 북한산, 관악산, 도봉산, 불암산, 인릉산, 청계산, 아차산 등의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의 도시이다.

서울의 면적은 605.2 km2로 대한민국 면적의 0.6%이고, 인구는 약 1천만 명출처:  서울시 공공데이터, 2020년 8월 27일 확인.으로 대한민국 인구의 18.7%를 차지한다. 시청 소재지는 중구이며, 25개의 자치구가 있다.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하계 올림픽,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 등을 개최하였다. 2018년 서울의 지역내총생산은 422조원이었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경제와 교통의 중심 도시이다.

서울의 한자 음차 표기로는 이십일도회고시, 한경지략, 증보문헌비고의 서울(徐菀), 동사강목, 북학의의 서울(徐蔚), 대동지지의 서울(徐鬱), 앙엽기의 서올(徐兀) 등이 있다. 이처럼 조선 시대에 서울은 한양, 한성(漢城) 외에도 서울(), 경도(京都), 경부(京府), 경사(京師), 경성(京城), 경조(京兆)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김정호의 수선전도에서 알 수 있듯 수선(首善)으로 표기된 예도 있다. 이 중 한양과 한성을 제외하면 모두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들로서 '서울'이 원래는 서울 지역(사대문 안과 성저십리)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였다는 방증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일반명사 '서울'을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고, 경제, 문화, 정치 등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도시'라고 정의하고 있다. 1910년 10월 1일에 일제가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서울은 주로 경성으로 불렸으며, 1945년 광복 후에는 '경성'이란 말은 도태되고 거의 '서울'로 부르게 되었다.

서울의 로마자 표기 은 19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서울을 쎄-울()로 표기한 데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서울을 로 표기하고, 스페인어권에서는 로 쓰나 모두 '쎄울'로 읽는다. 또, 영미권에서는 일반적으로 로 쓰고 영혼을 뜻하는 단어 와 같은 '쏘울'로 읽는다. 서울시에서는 이러한 점을 착안하여 2006년 11월 13일 서울시의 서브슬로건()을 《》로 지정하였다.

서울은 한자어가 아닌 고유어 지명이기 때문에 서울이라는 한자가 존재하지 않아서 중국에서는 서울을 한청(, 한성)이라 불러왔고 1988년 서울올림픽도 한성올림픽이라고 불렀으나, 2005년에 서울시가 과 발음이 유사한 서우얼(, 수이)을 서울의 공식적인 중국어 표기로 정하면서 점차 이 표기가 확산되어 가는 추세이다. 일본어의 표기는 '소우루'()이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청의 문서에서, 서울특별시의 영문 공식 명칭은 Seoul Independent City였다. 직역하면 서울독립시이나, 독립시라는 표현이 어색하다는 한국어 관점에 따라 특별시()로 번역한 것이 굳어져 현재 공식명칭(the Seoul Special City)에 이르고 있다.

서울은 북위 37° 34′, 동경 126° 59′의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하는 분지 지형의 도시이다. 시의 중심으로 한강이 흐르고, 서울 도심에는 남산(270m), 인왕산(338m)이 있다. 시 주변으로 북한산(836m), 관악산(629m), 도봉산(740m), 수락산(641m), 불암산(510m), 구룡산(306m), 우면산(293m), 아차산(295m), 지양산 등이 서울을 둘러싸며 경기도 및 인천광역시와 자연적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서 간의 거리는 36.78 km, 남북 간의 거리는 30.3km이며, 면적은 약 605.25 km2이다. 서울의 면적은 대한민국의 0.6%이며 남북한 면적의 0.265%이다. 서울특별시의 최북단은 도봉구 도봉동이고 최남단은 서초구 원지동이며 최동단은 강동구 강일동, 최서단은 강서구 오곡동이다.

서울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북한산(삼각산)을 최고점으로 한 고양·양주구릉과 경기평야가 만나는 지대에 있다. 주위에는 북한산(836m)·도봉산(717m)·인왕산(338m)·관악산(629m) 등 500m 내외의 산과 구릉이 자연성벽과 같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이다. 광주산맥의 한 줄기인 도봉산은 백운대·인수봉·노적봉의 3개 봉우리가 솟아 있는 북한산과 이어져 있고, 그 산줄기는 다시 남으로 뻗어 북악산(342m)을 솟게 하였다. 그리고 북악산에서 동으로 뻗은 산줄기에 낙산(125m), 서로 뻗은 산줄기에 인왕산이 있다. 인왕산에서 뻗은 산줄기 중 남쪽으로 뻗은 것은 숭례문을 지나 남산(265m)·응봉(175m)과 이어져 있고, 서쪽은 무악재의 안부(鞍部)를 지나 안산(296m)과 이어져 있는데 모두 구릉성 산지이다. 한강 남쪽에는 100m 이하의 구릉지가 펼쳐져 있고, 남쪽에 천연의 요새와 같이 서울의 외곽에 솟아 있는 관악산(629m), 청계산(618m), 구룡산(306m), 우면산(293m) 등이 있다. 그 외에 서울 동부에 불암산, 수락산, 망우산, 아차산 등이 있다.

서울의 중심에는 한강 하류가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하류이기 때문에 구배는 완만하며 물의 흐름은 느리나, 홍수 때는 상·중류의 유역 지방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 때문에 수위가 높아진다. 여의도는 상류로부터 운반되어 온 토사가 퇴적된 하중도이다. 한강물은 서울시민의 수돗물로도 공급되는데, 과거에는 뚝섬과 선유도 등에도 취수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잠실 수중보와 팔당 저수지로부터 물을 끌어들여 공급하고 있다. 한강은 일제 강점기까지 별다른 정비가 없었다가, 1960년대 이후 한강을 정비하는 사업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1968년 밤섬을 폭파한 뒤 여의도를 개발하였고,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잠실 개발계획으로 잠실섬과 부리도의 남쪽 물길(송파강)을 막아 육지로 만들었다. 1982년 시작된 '한강종합개발사업'을 통해 둔치를 조성하고, 강변 양쪽에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를 놓았다. 2006년에는 한강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한강 주변을 다시 정비하였다.

한강 이외의 주요 하천으로는 불광천, 안양천, 중랑천, 청계천, 탄천, 양재천, 여의천, 홍제천 등이 있다.

서울의 임야 면적은 2006년을 기준으로 157.35 km2으로, 임야의 51.5%는 국공유림이고 49.5%는 사유림이다. 임야의 분포는 산이 많은 노원구에 17.73 km2, 관악구에 17.53 km2, 강남구에 16.11 km2가 있어서 전 임야의 32.6%를 차지하고 있다. 이 임야의 많은 부분이 개발 제한 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임야는 잘 보호되고 있는 편이긴 하지만, 임야 면적은 매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서울의 지반은 주로 중생대 말기에 형성된 담홍색의 화강암과 고생대 이전에 이루어진 화강편마암의 두 종류로 되어 있다. 화강암은 서울의 동북부와 관악산 일대에 분포되어 있고, 화강편마암은 주로 남서부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데, 그 경계선은 대체로 북아현동에서 서소문, 남산 서쪽을 돌아 한남동과 행당동을 지나고 있다.

화강암은 조립질이면서 다른 암석과는 다르게 절리(節理)가 잘 발달하고 풍화작용에 약하며, 도봉산·백운대·인수봉과 같은 봉우리가 기암절벽을 만들어 서울 특유의 절경을 보여 주고 있다. 홍제동·안암동·창신동·장위동 등지의 화강암은 1990년대까지만 하여도 건축재로 쓰이곤 했다.

화강편마암은 견고한 암석이지만 접착성이 적기 때문에 쉽게 붕괴되어 봉우리를 이루지 못하나, 작은 기복을 이룬 노년기 지형을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동작동 부근의 화강편마암은 판형으로 쉽게 벗겨져 온돌의 구들장으로 쓰였고, 화강편마암이 풍화되어 된 천호동의 점토는 벽돌과 옹기 제조의 원료로서 많이 쓰였다.

서울 도심 주변에는 도심을 관통하는 청계천의 계속된 침식으로 북악산과 남산에서 산기슭이 발달되어 기복이 많은 지형이 되었다. 을지로에 있던 구리개, 조선일보사 앞의 황토현(黃土峴)이란 기복은 가로공사와 도시개발에 따라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으나, 현재도 율곡로·퇴계로·을지로 곳곳에서 기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기복 때문에 이 지역에는 고개 또는 현(峴)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이러한 지명에는 충무초등학교 부근의 풀무고개 또는 대장고개(治峴), 인현(仁峴)·종현(鍾峴)·진고개(泥峴), 계동(桂洞) 일대에 관상감현(觀象監峴), 가회동 일대에 맹현(孟峴)·홍현(紅峴)·안현(安峴)·송현(松峴)·배고개(梨峴) 등이 있다. 이러한 지형은 조선시대에 잘 이용되었다. 풍수설에 따라 북악산 기슭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 인왕산 기슭에는 덕수궁을 지었고, 궁궐 사이는 궁인(宮人)·귀족·고관 들의 저택지로 이용하였다. 이 지역의 침식으로 운반된 토사는 청계천 연안에 퇴적되어 평탄한 시가지를 형성하게 하였다. 따라서 도심지에서 가장 평탄한 곳은 청계천 북쪽의 연안으로 동대문에서 세종로 사이의 종로이며, 이곳에서는 지형의 기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삼각지로부터 해발고도 20m의 갈월동을 지나면 지형이 차차 높아져서 서울역 앞에 오면 더욱 높아지기 시작하고, 숭례문 부근은 해발고도가 40m 내외가 된다. 이곳은 분수계(해발 36.6m)가 되어, 동으로는 청계천이 동으로 흘러 중랑천과 합류한다.

서울은 냉대 동계 소우 기후(쾨펜의 기후 구분 Dwa) 에 속하며, 습윤 대륙성 기후로 분류하기도 한다. 기온의 연교차가 큰 대륙성 기후이다. 최근 기온 상승으로 인해 최한월 평균기온이 영하 3 °C보다 높은 -2.4 °C로 높아져 2009년부터 대한민국 기상청은 온대 하우 기후(Cwa)로 변경했다. 그러나 이는 열섬 현상으로 인한 것으로 외곽 지역은 여전히 -3 °C 미만으로 내려간다는 점과 냉대 기후의 최한월 평균기온 기준을 0 °C 미만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여름 기온과 겨울 기온의 연교차가 28.1 °C로 매우 크기 때문에, 겨울은 매우 춥고, 여름은 몹시 무덥다. 최근 30년(1981년~2010년) 기준으로 서울의 연평균 기온은 12.5 °C 이고, 최난월인 8월 평균 기온은 25.7 °C, 최한월인 1월 평균 기온은 -2.4 °C이다. 특히 최한월의 평균 기온은 같은 위도 상의 다른 도시에 비해 낮은 편이다. 시내의 기온 분포는 중구와 같이 가옥이 밀집한 곳과 많은 자동차가 배기가스를 뿜으며 지나는 간선도로, 그리고 도심부의 포장도로가 지나는 지역이 가장 기온이 높고, 한강 연안과 가옥의 밀집도가 낮은 지역은 기온이 낮게 나타나고 있다. 도심의 기온은 여름철의 6, 7, 8월 3개월을 제외하고는 해가 거듭될수록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이 상태로 계속 기온이 높아진다고 가정하면 약 100년 간에 평균기온은 1.8 °C, 일 최저 기온의 연평균치는 4.1 °C씩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시내의 습도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계절은 여름과 겨울이 길고, 봄과 가을이 짧다. 봄은 3월 중순부터 시작되는데 월평균 기온이 0 °C 이상으로 올라가고 날씨는 따뜻해진다. 그러나 제트기류가 서쪽에서 불어올 때 황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여름은 20 °C 이상의 기온이 계속되며 7, 8월에는 30 °C 내외의 무더운 날씨가 많다. 또한 장마나 집중호우가 계속되어 많은 비가 내리므로 홍수의 피해가 크다. 가을은 하늘이 높고 맑은 날이 계속되며, 기온은 차차 내려가 선선한 날씨가 계속된다. 겨울은 기온이 0 °C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100일 내외, 최저기온이 -10 °C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29.4일로서, 추운 날이 비교적 오래 지속되고 있다. 눈이 내리는 기간은 125일, 얼음이 어는 기간은 164일이나 강수량은 여름에 비하면 훨씬 적어 건조한 날씨가 많다. 최근 30년(1981년 ~ 2010년) 기준으로 연평균 강수량은 약 1,450.5mm이나, 1990년에는 2,355.5mm, 1949년에는 633.7mm가 내릴 정도로 연 강수량의 기복이 심한 편이다. 계절별 강수량은 여름철에 892.1mm, 겨울철에 67.3mm로 여름철에 강수가 크게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한반도는 계절풍 지대에 속하기 때문에 서울은 여름에 남동풍, 겨울에 북서풍이 빈번하게 분다. 도심부에서 도로 위를 부는 도로바람은 남산의 북사면에서 발달한 차가운 공기가 충무로 지하상가 위를 지나 을지로 입구 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퇴계로 2가 부근에서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분다.

역대 최저 기온은 1927년 12월 31일의 -23.1 °C, 역대 최고 기온은 2018년 8월 1일의 39.6 °C이다.

시내에는 큰 건물과 공장의 굴뚝에서 내뿜는 매연, 자동차의 배기가스 등의 오염물질이 늘어나면서 태양광선이 제대로 땅에 닿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시내에 내리쬐는 일사량은 매년 감소되어 가고 있다. 비행기나 높은 산 위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면 연기와 먼지를 품은 오염대기층인 연진모자가 상공을 덮고 있어 서울 시야를 나쁘게 하고 있다. 2011년 환경부가 7대 도시의 대기 오염물질을 조사한 결과, 전국의 미세먼지 평균농도는 51㎍/m3이고, 서울의 미세먼지 농도는 49㎍/m3로 나타났다. 2013년을 기준으로 하여 서울시는 전국 16개 지방(서울, 부산, 대구, 경기, 제주, 전남 등)에서 8위(7위: 대구 9위: 전북)를 하였고, 광역시나 특별시 중에서는 4위(3위: 대구 5위: 울산)를 하였다.(중위권) 그러나 최근, 수년 동안 서울시에서는 청정연료 확대보급, 경유자동차 저공해화, 도로비산먼지 청소, 공사장 비산먼지 관리 등과 같은 대기질 개선활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해 오면서 대기질이 좋아지기 시작했으나, 

하지만 2020년 코로나19 상황과 역대 가장 긴 장마 때문에 서울의 미세먼지는 110일 동안 보통 이하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은 25개 자치구와 424개 행정동이 있다. 한강 남쪽에 11개, 한강 북쪽에 14개 자치구가 있다. 2020년 4월말 주민등록 인구는 9,726,787명이다. 가장 인구가 많은 구는 송파구, 가장 인구가 적은 구는 중구이다.

고려 멸망 후 조선이 천도(1394년)한 후 조선 태종 때 인구는 약 10만 명이었으며, 이후 1900년대까지 20만 명 선을 유지하였다.

일제 강점기 이후 서울의 인구는 지방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으로 급격하게 늘어나서 과밀화 현상을 빚고 있다. 1919년에 인구 25만 명, 인구밀도 6,874명/km2이었던 것이 1925년에는 인구 34만 명, 인구밀도 9,297명/km, 1930년에는 인구 33만 명, 인구밀도 9,824명/km2, 1935년에는 인구 40만 명, 인구밀도 11,172명/km2에 달하였다. 이에 따라 1936년에 시역을 확장하여 인구는 73만 명으로 증가하고 인구밀도는 5,430명/km2으로 감소하였다. 1945년 광복 당시의 인구는 90만 명, 인구밀도 6,628명/km2이었는데, 외국에서의 귀국, 한반도 북부지역 출신 등으로 1946년에는 인구가 127만 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하였고, 인구밀도는 9,309명/km2이 되었다. 1948년에는 인구 171만 명에 인구밀도 12,055명/km2으로, 1949년에는 136.05 km2이었던 시의 면적이 268,35 km2로 확장되었고 인구는 142만 명, 인구밀도는 5,284명/km2이 되었다.

이렇게 계속 증가하던 인구도 1992년 인구 1,097만 명, 인구밀도 18,121명/km2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는 정부의 서울 인구 분산 정책에 따른 것으로. 서울 교외에 분당·일산·평촌·중동과 산본등의 1기 신도시가 개발되었고 이 마저도 포화상태로 현재 운정, 판교, 동탄등 2기 신도시 개발에 따른 이주에 의한 것이다. 계속 감소하던 인구는 2003년 인구 1,028만 명, 인구밀도 16,975명/km2을 정점으로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뉴타운'으로 불리는 서울 시내 대규모 재개발로 인한 인구 유입의 영향이 크다. 2009년 12월말 기준 인구는 10,464,051명, 4,116,660세대이고, 인구밀도는 17,289명/km2이다.

서울의 인구증가를 보면 1960년경부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각종 산업이 발전하면서 고용 증대가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농촌인구가 급격하게 서울로 집중하게 되었다. 농촌에서는 생계가 어려워 무작정 서울로 온 이농 인구 덕분이었다. 서울은 자연증가보다 사회증가에 의하여 과밀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서울에는 교육기관이 많이 분포하고 있어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은 주로 서울에서 취업을 하거나 생활 터전을 마련한다.

다만, 2010년대 들어 서울의 높은 전세로 인해 서울의 인구순유출 속도가 한국 도시들 중 가장 빠르며, 2016년 5월을 기점으로 서울 인구가 1,000만명 선 아래로 떨어졌다. 사실상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1000만명을 넘어선 서울의 인구가 28년만에 1000만명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2018년 5월 기준으로 서울의 인구는 980만명이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대부분의 인구는 경기도로 이동하고 있으며, 세종시나 제주도로의 이동도 이루어지는 역도시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Article 81: 앙카라 (1412 words)


앙카라(, )는 터키의 수도이다. 이스탄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앙카라 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인구는 4,587,558명이고(2014년 통계), 앙카라 주의 인구는 5,150,072명(2015년 통계)이다.

앙카라는 터키의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정치적 중심지로, 1923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터키 공화국이 세워지자, 이스탄불을 대신해 수도로 지정됐다. 앙카라는 공무원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이지만, 아나톨리아 지역의 상공업의 중심지이며, 도로와 철도 교통의 중심지다.

앙카라에는 중동전문대학(Hacettepe Üniversitesi)와 앙카라대학(Ankara Üniversitesi)이 있다. 또 국립도서관, 고고학박물관, 민속학박물관과 국립극장, 대통령 관현악단이 앙카라에 있다.

앙카라가 수도가 된 이후의 개발로 옛 도심지였던 울루스(Ulus)와 신 개발지대인 예니세히르(Yenisehir)로 구분된다. 울루스는 로마·비잔틴·오스만 양식의 옛 건물과 좁은 도로로 대표되는 데 반해 예니세히르에는 넓은 도로, 호텔, 극장과 아파트 건물이 들어차 더 현대도시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정부 청사와 외국 공관도 예니세히르에 소재해 있다.

앙카라는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700년까지 히타이트 문명의 지배하에 있었다. 기원전 1000년 경에는 프리기아인들이 이 곳에 정착했고, 프리기아의 수도인 고르디움이 현재 앙카라 주의 남서쪽에 위치한 포랏르에 있었다. 앙카라는 고대에 프리기아인들의 풍요한 도시였으나 후에 지진으로 고르디움은 파괴되었다. 미다스의 손 신화로 유명한 미다스 왕이 프리기아의 왕이었다.

프리기아의 풍습은 리디아와 페르시아의 통치 기간에도 계승됐다. 프리기아의 풍습은 로마 시대 때까지 계속됐다. 페르시아 제국의 왕도(王道)가 이곳을 지나갔다. 중앙 아나톨리아 지방의 주권은 페르시아 제국이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대왕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페르시아 제국이 갖고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고르디움을 통해 앙카라에 입성했고 짧은 기간만 머물렀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하자, 마케도니아 제국은 뿔뿔히 나뉘어서 안티고노스 1세가 앙카라 지역을 차지한다,

기원전 300년 경에는 아나톨리아 지방의 북동부에 위치한 폰토스가 무역거점으로 삼기위해서 이 지역에 진출했다. 그리고 앙카라의 이름의 기원이 된 안키라(Áγκυρα, 그리스어로 닻)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그 후 기원전 232년경 갈라티아 지방에 정착한 켈트인의 일파인 텍토사게스족(라틴어 Tectosages)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기원전 189년에는 로마의 집정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가 앙카라를 점령하여 갈라티아인들에 대한 군사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기원전 63년에는 폼페이우스가 다른 텍토사게스 영토와 함께 한 수장 아래 두어 한동안 자치가 이루어지다가 기원전 25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앙카라를 로마 제국의 갈라티아주 수도로 삼았다.

이때 앙카라의 주민구성은 그리스인, 유대인, 로마인, 로마화된 켈트인들을 포함하고 그리스어가 사용되었으나 그리스화된 헬레니즘 도시가 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기원후 19년경 그리스인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앙카라를 도시가 아니라 요새라고 불러 그리스·로마 도시 수준의 공공시설 등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암시하고 있다.

비문이나 주화에 남겨진 기록으로 유추해 볼 때 당시 앙카라의 문화는 켈트 바탕에 로마의 사상과 관습이 얹힌 형태였다고 여겨진다. 150년경에야 진정한 헬레니즘이 싹트기 시작한다. 기독교가 북쪽이나 서북쪽으로부터 전파된 시기는 이르면 1세기 정도로 생각된다. 앙카라의 위상은 콘스탄티노플이 로마 제국의 국제 도시가 되고 나서야 가까운 지리조건 덕에 크게 올라갔다. 그 후 중세에도 앙카라는 여전히 중요한 도시로의 위치를 고수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도시였을 때는 페르시아인들과 아랍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앙카라가 터키 공화국의 수도가 된 이후, 구시가지는 울루스(Ulus)로, 신시가지는 예니셰히르로 불리게 되었다. 로마시대, 비잔틴시대, 오스만 제국 시대의 유적들과 오래된 시장, 옛 관공서 등은 울루스에, 대로, 신식 호텔, 극장, 쇼핑몰, 신식 관공서, 대사관 등은 크즐라이(Kızılay)를 중심으로 하는 신시가지에 위치하게 됐다. 그 이후, 앙카라는 터키 공화국의 수도로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1924년에는 앙카라의 인구는 35,0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1950년에는 286,781명이 사는 도시가 되었고, 2014년에는 5,150,072명의 인구가 사는 대도시가 되었고, 현재 터키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됐다.

앙카라는 중앙아나톨리아 지역, 즉 내륙에 위치하다보니 대륙성 기후를 띈다. 여름에는 덥고 건조한 날씨가, 겨울에는 춥고 눈이 많이 온다. 주로 가을과 봄에 비가 내린다. 앙카라는 고지대에 위치하다보니 여름에는 낮에 덥고 건조하지만, 밤에는 시원하다. 연간 강수량은 402mm 이고 1월 평균기온은 0.4°C, 7월 평균기온은  23.6°C이다.

앙카라는 중요한 상업·공업도시이며 주변의 농업 지대에게는 중요한 시장이다.

역사적으로 앙고라 염소털로 만든 모헤어, 앙고라 토끼 털로 만든 앙고라 울을 생산하는 섬유산업이 발달했었다. 또한, 중앙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포도가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와인 생산지로도 유명했다. 특히, 카바클데레 와인(Kavaklıdere wine)이 유명하다.

공업에서는 TAI(Turkish Aerospace Industries), MKE, 아셀산(ASELSAN), 하벨산(Havelsan), 로켓산(Roketsan), 누롤 마키나(Nurol Makina) 등의 항공산업 및 방위산업 관련 회사들의 본사가 위치하여있다. 이들 업체의 수출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또한, 독일의 버스, 트럭 제조 회사인 MAN SE의 공장도 위치하여있다. 또한, 앙카라에 위치한 앙카라 대학교, 중동공과 대학교, 빌켄트 대학교 등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꾸준히 산업에 투입되고 있다.

정부기관의 고용 역시 앙카라 경제에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각국의 대사관에서 일하는 외국인의 비중도 높은 편이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시장은 울루스에 위치한 츠크르크츠라르 요쿠수(Çıkrıkçılar Yokuşu)로 주로 양탄자, 가죽 제품 등을 판매한다. 바클크라르 시장(Bakırcılar Çarşısı)은 장식품, 카펫, 골동품 등으로 유명한 시장이다. 앙카라성 근처에도 향신료, 말린 과일, 견과류 등을 판매하는 시장이 있다. 또한, 스히예 광장 주변에는 매일 전통시장이 열린다.

현대적인 쇼핑몰은 크즐라이나 찬카야의 투나르 힐미 에비뉴에서 주로 볼 수 있다. 크즐라이역 주변에는 크즐라이 쇼핑몰이 있는데 푸드코드, 스타벅스, 옷가게가 입점해있다. 아트리움 몰(Atrium Mall) 옆에 바로 옆에 있는 아타쿨레 타워의 꼭대기 층에는 레스토랑이 있다. AŞTİ역 주변에는 아르마다 쇼핑 몰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케치외렌의 에트릭 지역에 대형 슈퍼마켓, 오락실, HM 등이 입점해있는 안타레스 쇼핑몰이 위치하고 있다.

아르마다, CEPA, 켄트파크 쇼핑 몰이 고속도로 변에 있고, 갈레리아, 알자디움, 골디온이 위밋쾨이에 위치한다. HM, ZARA 등의 브랜드가 입점해 있는 앙카몰은 앙카라에서 가장 큰 쇼핑몰로 아크쾨프뤼역 바로 앞에 위치해 있다. 2014년에는 넥스트 레벨과 타우루스 쇼핑몰이 오픈했다.

앙카라는 정치적으로 이슬람주의 보수당인 정의개발당(AKP, Adalet ve Kalkınma Partisi) 케말주의 중도좌파인 공화인민당(CHP, Cumhuriyet Halk Partisi) 민족주의 극우인 민족주의자운동당(MHP, Milliyetçi Hareket Partisi)가 의석을 나누어 갖고 있다. 선거구 수는 25개이다. 2014년 선거 결과 공화인민당은 2개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으나, 앙카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찬카야(Çankaya)에 의석을 가지고 있다. 민족주의자운동당은 2개의 의석을 갖고 있다. 전반적으로 정의개발당이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앙카라는 이즈미르나 이스탄불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2013년 터키 반정부 시위 때 앙카라에서도 이스탄불, 이즈미르 못지 않은 격렬한 시위가 발생했고, 다수의 사상자도 있었다.

앙카라 지하철과 대부분의 버스는 EGO(The Electricity, Gas, Bus General Directorate)에서 운영한다. 대다수의 버스는 교통카드만을 이용해서 사용이 가능하지만, 일부 개인이 운영하는 버스에서는 현금으로만 탑승이 가능하다. 현재 앙카라에는 경전철인 앙카라이(Ankaray, A1)와 M1, M2, M3까지 3개의 지하철이 운행중이며, M4가 건설중이다. 또한, 쉔테페와 예니마할레역을 연결하는 케이블카도 운행 중이다.

앙카라 중앙역(Ankara Railway Station)은 터키 철도 교통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터키 국영철도에서 앙카라에서 이스탄불, 에스키쉐히르, 시바스 등 전국 각지로 여객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신잔역(Sincan)에서부터 카야쉬역(Kayaş)까지 광역철도도 운행중이다. 2009년 3월 13일에 앙카라와 에스키쉐히르를 잇는, 2011년 8월 23일에는 앙카라와 코냐간, 2014년 7월 25일에는 앙카라와 이스탄불을 3시간 30분만에 연결하는 고속열차인 YHT(Yüksek Hızlı Tren)가 각각 개통되었다.

앙카라는 또한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여 있기에 버스 교통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버스 터미널인 AŞTİ(Ankara Şehirlerarası Terminal İşletmesi)는 거의 모든 노선을 갖추고 있다.

앙카라의 공항은 시 북서쪽에 위치한 에센보아 국제공항이 있다.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이나 사비하 괵첸 국제공항에 비해 노선수가 적지만 터키 국내선과 프랑크푸르트, 모스크바 등 유럽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노선이 있다.

터키의 타지역처럼 축구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1923년 창단된 겐츨레르비를리이 SK가 앙카라를 연고지로 하는 축구팀으로 쉬페르리그에서 활동중이다. 겐츨레르비를리이 SK는 1987년과 2001년에 튀르키예 쿠파스의 우승팀이었다. 또한, 1910년 창단된 MKE 앙카라귀쥐는 가장 오래된 축구팀이지만 현재는 TTF 2. 리그에 소속되어있다. MKE 앙카라귀쥐는 1972년과 1981년 튀르키예 쿠파스의 우승팀이었다. 겐츨레르비르 B팀과 하제테페 SK도 쉬페르 리그에 소속되었던 적이 있다. 위의 모든 팀들은 앙카라 19 마으스 스타디움을 홈 구장으로 한다. 또한 오스만스포르도 앙카라를 홈으로 하는 팀으로 2010년까지 쉬페르리그에 소속되어 있었다. 홈 구장은 예니켄트 아사쉬 스타디움으로 신잔에 위치한다.

또한, 신잔을 홈으로 하는 부그사쉬스포르, 에티메스구트를 홈으로 하는 에티메스구트 쉐케르스포르, 예니마할레를 홈으로 하는 튀르크 텔레콤스포르, 찬카야를 홈으로 하는 앙카라 데미르스포르, 케치외렌의 케치외렌귀쥐, 케치외렌스포르, 푸르사클라르스포르, 바룸스포르, 알튼닥을 홈으로 하는 페트롤 오피시 스포르 같은 군소 팀들도 존재한다.

또한, 농구 역시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앙카라에는 앙카라 아레나를 홈으로 하는 튀르크 텔레콤과 TOBB 스포츠 홀을 홈으로 하는 카사 테드 콜레즈리레르 두 개의 농구팀이 있다.

배구에서는 할크뱅크 앙카라가 통산 6회 터키 남자 배구 리그(Türkiye 1. Voleybol Ligi)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다.

아이스 스케이팅과 아이스하키 경기도 앙카라 버즈 파테니 사라이(Ankara Buz Pateni Sarayı)에서 열린다.

앙카라는 이스탄불과 더불어 대학교가 모여 있는 도시로 유명하다.

앙카라에는 도시 곳곳에 크고 작은 공원들이 있다. 울루스에 위치한 겐츨릭 공원(Gençlik Parkı)에는 놀이공원과 호수가 있어서 주말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크즐라이에 위치한 귀벤 공원(Güven Park)에는 시미트와 꽃을 파는 행상들이 많이 있으며,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있다. 카바크르레데에 위치한 쿨루 공원(Kuğulu Park)에는 중국 정부에서 선물받은 백조와 흑조, 오리 등이 살고 있다. 알튼 공원(Altın Park)는 넓은 공원과 호수가 있으며, 배를 탈 수 있다. 앙카라 외곽지역인 에르야만에는 야경과 호수가 아름다운 괵수 공원(Göksu Park)가 있다.

또한, 앙카라 아레나 주변에는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터키 군인을 기리기 위한 한국 공원(Kore Bahçesi)이 있다.

겐츨릭 공원은 1952년부터 1976년까지 100 터키 리라의 뒷면에 그려져있었다. 또한, 시내에 아타튀르크 오르만 치프트리이(Atatürk Orman Çiftliği)라는 아타튀르크가 생전에 농장일을하던 농원이 있는데, 이 곳에는 동물원과 농장, 레스토랑 등이 있다. 또한, 아타튀르크가 태어난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위치한 생가를 완벽하게 복원해 놓은 집도 있다. 농장인 치프트릭(Çiftlik)에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농장에서 생산되는 치즈, 전통 맥주, 아이스크림 등을 맛 볼수 있으며, 주변에는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있다.

앙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양이 품종인 터키시 앙고라(Ankara kedisi)가 살던 지방이다. 터키시 앙고라는 주로 희고, 부드러운 긴 털을 갖고 있지만, 오늘날에는 품종 개량을 통해 검은털이나 붉은털을 가진 터키시 앙고라도 많다. 터키시 앙고라는 페르시안 고양이나 터키시 밴과도 가까운 품종이다. 눈은 파랑색, 녹색, 황색인 경우도 있지만 간혹가다 한쪽 눈과 다른쪽 눈의 색이 다른 오드아이도 있다. 귀는 크고 눈은 아몬드 모양으로 생겼다.

앙고라 토끼(Ankara tavşanı)는 앙카라 주변에 살던 길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토끼이다. 앙고라 토끼는 가장 오래된 가축용 토끼 중에 하나인데, 중세시대에 프랑스 왕실의 애완용 토끼로 유명하다. 미국에는 20세기 초에 처음으로 도입됐다. 앙고라 토끼는 털인 앙고라 울로 유명한데, 앙고라 울은 희고 길며 가벼워서 의복 재료에 많이 쓰인다.

앙고라 토끼를 사육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앙고라 울을 얻기 위해서다. 대부분의 앙고라 토끼는 온순하지만, 주의 깊게 다뤄주어야 한다. 여름에는 털을 짧게 깎기도 하는데, 긴 털 때문에 여름에 열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Article 82: 운동량 (206 words)


운동량 (運動量, )은 물리학 특히, 뉴턴 역학에서 물체의 질량과 속도의 곱으로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운동량의 국제 단위는 뉴턴 초 (N · s) 또는 킬로그램 미터 매 초 (kg · m/s)이고, 통상적인 기호는 라틴 소문자 p이다. 선형 운동량() 혹은 병진 운동량()이라고도 부른다.

예를 들어 빠르게 움직이는 무거운 트럭 같은 물체는 운동량이 크다. 무거운 트럭을 빠른 속도까지 가속시키기 위해서는 큰 힘을 한참 동안 가해야 하고, 반대로 그 트럭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도 큰 힘을 오랫동안 가해야 한다. 트럭이 더 가볍다거나 더 느리게 움직인다면 그만큼 운동량도 작아질 것이다.

선형 운동량은 보존되는 양으로,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에 의한 영향이 없는 닫힌계의 선형 운동량의 총합은 바뀌지 않는다. 고전역학에서는 선형 운동량 보존법칙이 뉴턴의 운동 법칙에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도 공식을 약간 수정한 형태로 선형 운동량 보존 법칙을 충족시킬 수 있으며, (일반화된) 선형 운동량 보존 법칙은 적절한 정의를 이용하면 전자기학, 양자역학, 양자장론, 일반 상대성 이론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존 법칙이다.

고전역학에서, 운동량은 질량과 속도의 곱으로, 크기와 방향을 모두 갖는 벡터다. 즉, 운동량을 p, 질량을 m, 속도를 v라고 하면, 운동량은 다음과 같다.

만약 어떤 계에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뉴턴의 운동법칙에 따라 계의 총 운동량은 바뀌지 않는다.

두 물체가 충돌할 때도, 두 물체의 운동량의 합은 일정하다. 즉, 두 물체의 질량을 , , 충돌 전의 속도를 , , 충돌 후의 속도를 , 라고 하면 다음의 식이 성립한다.




#Article 83: 유카와 히데키 (753 words)


유카와 히데키(, 1907년 1월 23일 ~ 1981년 9월 8일)는 일본의 이론물리학자이다. 교토부 교토시 출신이다.

원자핵 내부에 있어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서로 강한 상호작용의 매개가 되는 중간자의 존재를 1935년에 이론적으로 예측했다. 1947년, 영국의 물리학자 세실 프랭크 파월이 우주선 중에서 파이 중간자를 발견한 것에 의해 ‘유카와 이론’이 증명돼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49년에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 이후 반핵 운동이나 평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막스 플랑크와 함께 공동 선언자로 이름을 올렸고 중간자 이론 외에 비국소장이론, 소영역이론 등의 이론을 계속 발표했다. 이런 모습은 고등학교와 교토 제국대학 동창이었던 도모나가 신이치로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고 도모나가와 마찬가지로 니시나 요시오의 제자로도 알려져 있다. 목소리가 작고 강의가 상당히 난해했다고 전해진다.

교토 대학·오사카 대학 명예교수, 교토시 명예시민이었다. 1943년에 문화훈장을 받았고 학위는 이학박사이다.

외가쪽은 유카와의 외할아버지인 오가와 고마키쓰는 예전 기슈번의 번사였으며, 또한 유카와가 자체가 선조 대대로 와카야마현 출신이었기 때문에 “와카야마 출신”이라고 소개되기도 했지만 유카와 본인에 의하면 교토시 출신이라는 것이다. 와카야마현 출신의 실업가인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고향에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출생지’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는데 거기에는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이유로 유카와의 필체에 의해서 쓰여졌지만 유카와 본인은 와카야마에서 살았던 경험은 없다.

교고쿠 보통소학교를 졸업한 후 1919년에는 교토 부립 교토 제1 중학교(현: 교토 부립 라쿠호쿠 고등학교·부속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생 시절의 유카와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는데 별명은 ‘곤베에’()였다. 또한 사춘기 때부터는 거의 말을 안들었고 귀찮은 것들은 모두 ‘말 안하겠다’라는 한마디로 끝내버리는 등 ‘이왕 짱’()이라고 불렸지만 의외로 《바보 이반》에서 따온 별명 같다고 유카와가 스스로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다. 이 말수가 적을 정도의 과묵한 성격을 가졌다는 이유로 아버지인 다쿠지로부터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라고 홀대를 받았고 다른 형제들에 비해 능력이 낮다고 보여지면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전문학교에라도 보낼까’라고 고민했던 시기도 있었다. 교토 제1 중학교의 동기로는 학자가 된 동기들이 대부분이었고 후에 학자가 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똑같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교토 제1 중학교의 1년 선배이며 제3 고등학교와 교토 제국대학 동기였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목소리가 작고 강의는 꽤 난해했다고 전해졌다. 이 즈음에 오사카 위장 병원(1950년에 유카와 위장 병원이라고 개칭)의 원장인 유카와 겐요의 둘째 딸 유카와 스미와 결혼해 유카와가의 데릴사위가 되면서 성을 ‘오가와’에서 ‘유카와’가 됐다.

오사카 제국대학으로 옮긴 후 전혀 성과가 없던 유카와를 야기는 더욱 더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주의를 준 뒤 “본래라면 도모나가를 오게 했을텐데 너의 형으로부터 의뢰받아서 어쩔 수 없이 너를 채용했으니까 도모나가에게 지지 않도록 공부를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곤란하다”라고 질책했다. 우치야마 료유에 의하면 야기는 비수같은 독설로 유명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 1947년에 세실 프랭크 파월 등이 실제로 파이 중간자를 발견한 것에 의해서 1949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아시아인 노벨상 수상자로서는 작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나 물리학자 찬드라세카라 벵카타 라만에 뒤를 이은 세 번째의 수상자였고 일본인으로서는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였다. 이 뉴스는 패전과 연합국 점령하에서 자신감을 잃었던 일본 국민에게 큰 힘을 주었다. 2000년에 유카와의 노벨상 관련 문서를 조사한 오카모토 다쿠지는 추천장 대부분이 외국인 추천자로부터 받았다는 점 등을 들어 “노벨상 역사 가운데에서도 보기 드물게 연구 성과와의 관계가 명료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전후에는 비국소장 이론과 소영역 이론 등을 제창했지만 이론적 성과로는 연결되지 못했다. 한편 머리 겔만의 쿼크 이론에 대해서는 “전하가 이나  같은 그렇게 어중간하게 존재할 리가 없다”라고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또 한편으로는 반핵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막스 보른 등과 함께 공동선언자로 이름을 남겼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쟁 중에는 아라카쓰 분사쿠가 이끄는 교토 대학 그룹에서 일본의 원자폭탄 개발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교토 대학에서 정년 퇴임 후인 1975년에 전립선암이 발병돼 수술을 받았다. 수술에 의해서 암의 진행은 막았지만 그 이후에는 자택에서 요양을 계속하면서 학술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 양국의 긴장 격화로 제4회 과학자 교토 회의의 발기인의 한 명으로서 1981년 6월, 15년 만에 회의 개최가 성사됐다. 이 때 이미 건강 상태가 나빠지면서 회의에서는 휠체어에 의지한 상태에서 참석해 핵폐기를 호소했다. 3개월 뒤인 같은 해 9월, 폐렴에 심부전 합병증으로 교토시 사쿄구의 자택에서 향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묘소는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소재한 지온인에 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있는 와카바 상의 대좌에 유카와에 의한 단가로서의 명문인 ‘원자폭탄이여 다시 여기에 오지 말지어다. 평화를 기원하는 사람만이다 여기는’()이라고 새겨져 있다.

단, 전자가 강한 힘을 전달한다는 생각을 하이젠베르크가 유카와 이전에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전자는 이전부터 존재가 알려지면서 이론으로서도 실패한 것이기 때문에 장을 창출할 입자라는 생각은 확립돼 있지 않았다. 하이젠베르크나 보어는 관찰되지 않은 소립자로 장을 설명하는 유카와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보어는 유카와에게, 하이젠베르크는 도모나가에게 이것을 알리기도 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유카와의 강한 힘을 낳는 중간자론은 소립자론의 길을 열었다고 당시에는 높이 평가했다. 유카와는 강한 힘의 중간자론으로 노벨상을 받았는데 이후의 일을 장의 양자론에서 스스로 찾아낸 문제 해결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 연구는 성공하지 못했다.

민코프스키 공간상에서 폐곡면에서의 확률 진폭을 정의하면 인과율이 파괴된다는 문제를 유카와가 제기하면서 이 문제에 생애를 걸었다(이 문제를 ‘유카와의 원()’이라고 말한다. 유카와가 이 문제를 제기한 후 폴 디랙도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도모나가의 기여는 있었지만 이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초대칭성을 세계 최초로 제기한 미야자와 히로나리는 주장하고 있다. 물리학은 유카와의 기본 문제를 회피하여 현상론에 치우쳤다고 한다.

유카와 이전에는 일정한 시간으로 확률 진폭이 정의돼 있었다.

이하는 일본 국내에서의 저명한 인물을 둔다.

제자의 제자에는 현재 활약하는 수많은 이론물리·물성물리·우주물리·천문·수리생물학자가 포함돼 있다.




#Article 84: 한국 (682 words)


한국(韓國), 조선(朝鮮), 또는 코리아()는 동아시아에 위치한 지역 또는 헌법상의 국가로, 현대사에서는 한반도 또는 조선반도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이르는 말이다. 현대에 일반적으로 '한국'은 대한민국을, '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이르는 경우가 많으며, 근현대사에서 한국은 고종이 수립한 대한제국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넓은 의미로 한국은 고조선 이후 한반도에서 설립된 여러 한민족의 국가를 통칭하는 말이다. 한국의 강역은 현재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들에 해당되나, 역사적으로 한민족의 강역은 만주와 연해주의 일부를 포함하기도 하였다. 한국의 역사를 한국사 또는 조선사라고 한다.

한국은 동아시아의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다. 북서쪽으로는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경계를 이루고, 북동쪽으로는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 및 러시아와 마주하고 있다. 삼면이 바다인 한국에는 서쪽으로 황해(서해), 동쪽으로 동해, 남쪽으로 남해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한반도 및 부속도서의 최북단은 함경북도의 온성, 최서단은 평안북도의 마안도, 최동단은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한 섬 독도, 최남단은 마라도이다.

한반도의 동부 및 북부는 비교적 높은 산들로 이루어진 산지 지형을 특징으로 하고, 서쪽으로 갈수록 대체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서해로 흘러드는 하천에 의해 형성된 여러 충적평야와 구릉지들이 나타난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산은 백두산(2,744m)이며, 관모봉(冠帽峰, 2,541m), 북수백산(北水白山, 2,522m)의 순이다. 한국 북부의 개마고원은 '한국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고지대이며, 반도의 동해안을 따라 달리는 산맥인 태백산맥은 백두대간이라고도 불린다.

한국의 주요한 섬으로는 면적순으로 제주도, 거제도, 진도, 강화도 등이 있는데, 대부분의 섬이 황해와 남해의 근해에 형성되어 있는 한편 제주도와 울릉도는 화산 활동에 의해 형성되어 비교적 고립되어 있다. 한국의 황해안과 남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되어 있으며, 조수 간만의 차가 크다.

한반도 전체의 극지역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의 극지역은 다음과 같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극지역은 다음과 같다.

한국은 반도에 있는 지리적 조건으로 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한국 문화는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의 북방계와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의 남방계가 혼합된 바탕에 중국과 일본 등 이웃들과의 교류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했다. 전통 음악은 풍물놀이이며, 아리랑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는 대체로 700만 명을 넘지 못했다. 조세와 부역 등을 피하려고 호구조사를 기피하는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40% 가까이 누락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실제 인구는 조선 시대 중기에 와서 1천만 명 내외, 후기에는 약 1,300만 명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0년 일제의 조사에 따르면 대한제국의 인구는 약 1,312여만 명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1910년 무렵에는 1,742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국권 피탈 후 현대적 인구 조사를 한 1925년에는 1,900만여 명, 1935년에는 2,289만9천여 명 1944년에는 2,590만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반도 전체의 공용어는 한국어이다. 다만 대한민국의 경우 한국 수화를 추가 공용어로 두고 있다. 한국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교착어로 분류되기도 하며, 또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어 왔다. 대한민국에서는 경기 방언을 기초로 한 대한민국 표준어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서북 방언을 기초로 한 문화어를 표준어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어를 표기하는 글자는 한글이다. 한글은 기본적으로 말소리를 기호로 표시하는 표음 문자이고, 자음과 모음을 구분하는 음소 문자이며, 발음의 유사성에 따라 형태의 규칙성을 띠는 매우 정교한 자질 문자(예. ㄱ·ㅋ·ㄲ, ㅏ·ㅑ·ㅐ·ㅒ)이다. 또, 한글은 자음과 모음의 글자를 결합해 하나의 음절을 독립적으로 표시하는 글자를 만드는 형태로 표기한다는 점에서 다른 문자와 두드러지게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국어 표기에 쓰이는 문자인 한글은 조선의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위해 직접 만든 문자 체계이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 후 정인지·신숙주·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를 만들어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이름으로 1446년에 반포하였다. 한글 창제 이전에는 한자(漢字)로 문서가 작성되었으나, 표의 문자인 한자로 한국어를 표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서 향찰, 구결, 이두 등 차자 표기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지배층인 양반(兩班)층과 관공서에서는 한자를 계속 사용하였으며, 한글은 19세기까지 주로 편지글·시조·가사·한글소설 등에 사용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야 비로소 공문서에 한글이 쓰이기 시작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한글의 사용이 억압 받았으나 1945년 해방 후 본격적으로 널리 쓰여져 한국문화 발달의 기틀이 되었다. 최근에는 동음이의어(同音異意語)나 약어(略語)의 구별 등을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자의 사용이 크게 줄어들었다.

한글은 처음 만들었을 때는 스물여덟 글자였으나, 지금은 ㅿ(반시옷), ㆆ(여린히읗), ㆁ(옛이응), ㆍ(아래아) 네 글자가 사라져서 스물네 글자가 되었다.

한국은 현재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어 있으므로 해당 지역이 관할하고 있는 행정구역의 체계와 형식적으로 통치를 주장하는 지역의 행정구역 체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은 현재 1특별시, 6광역시, 1특별자치시, 8도, 1특별자치도로 편제되어 있다. 3단계 행정체계로 도/특별시/광역시  시/군/구  읍/면/동으로 구분된다. 다만, 서울특별시와 광역시를 제외한 인구 50만 이상 대도시 에는 시 아래에 행정구를 둘 수 있다.

이들 중 도와 동급의 행정구역은 광역시이며, 특별시, 특별자치시, 특별자치도도 존재한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현재 1직할시, 3특별시, 3지구, 9도로 편제되어 있다. 또한 3단계 행정체계로 도  시/군  동/리로 구분된다. 이는 광복 직후와는 다른 것으로 면은 통합하여 군으로 승격하고, 읍은 군의 중심지역을 이르는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이 외에 로동자구와 직할시에 소속된 구역 등이 있다.

이들 중 도와 동급의 행정구역은 직할시,특별시이며, 지구와 함께 행정상의 특혜를 받게 되어 있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다만, 대한민국에서는 이 같은 행정구역 구분을 인정하지 않고, 광복 당시의 행정구역만을 인정한다(이북5도위원회).




#Article 85: 미분방정식 (433 words)


미분 방정식(微分方程式, differential equation)은 미지의 함수와 그 도함수, 그리고 이 함수들의 함수값에 관계된 여러 개의 변수들에 대한 수학적 방정식이다. 미분방정식의 계수(order)는 미분 횟수가 가장 많은 독립 변수의 계수가 결정짓고, 차수(degree)는 계수를 결정 지은 독립 변수의 미분꼴이 거듭제곱된 횟수에 따라 결정된다.

미분 방정식은 엔지니어링, 물리학, 경제학 등 수학 외의 학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유체역학, 천체역학 등의 물리적 현상의 수학적 모델을 만들 때에도 사용된다. 따라서 미분 방정식은 순수수학과 응용수학의 여러 분야에 걸쳐있는 넓은 학문이다.  물체의 운동이 물체의 위치와 시간값의 변화에 따른 속도로 표현되는 고전역학이 그 대표적인 예다. 뉴턴의 운동 법칙은 물체의 미지의 위치를 시간에 대한 함수로 표현하고, 물체의 위치·속도·가속도·그리고 물체에 작용하는 힘 등을 그 함수에 대한 미분 방정식으로 나타냄으로써 이 변량들을 역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흔히 운동방정식이라고 부르는 이 미분 방정식은 아주 쉽게 풀리는 경우도 있다.

미분 방정식을 사용하여 실세계를 표현한 예로는, 중력과 공기저항만 고려하여 공중에서 떨어지는 공의 속도를 결정하는 것이 있다. 땅을 향한 공의 가속도는 중력에 의한 가속도 마이너스 공기저항에 의한 가속도이다. 중력은 일정하다고 치고, 공기저항은 공의 속도에 비례한다고 하자. 이것은 공의 가속도, 즉 공의 속도의 도함수가 공의 속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속도를 시간에 대한 함수로 나타내면 이 미분 방정식을 풀 수 있다.

수학에서 미분 방정식은 여러 가지 다른 관점에서 연구되고 있는데, 대개 그 해―방정식을 만족시키는 함수의 집합―에 대한 연구가 흔하다. 명쾌한 함수의 형태로 해가 구해지는 것은 가장 간단한 미분 방정식들 뿐으로, 어떤 미분 방정식은 명확한 해를 구하지 않고, 그 특징만 밝혀지는 경우도 있다. 만약 해를 독립적으로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컴퓨터를 이용해 수적 근사값을 구할 수도 있다. 동역학계 이론에서는 미분 방정식으로 표현되는 계의 질적 분석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주어진 정확도 안에서 해를 구하기 위한 많은 수치 해석 방법이 개발되고 있다.

미분 방정식의 목표는 다음 세가지이다.

미분 방정식에 대해 해가 있어야만 하는지, 아니면 해가 유일한지 등의 문제도 중요한 관심사이다. 그러나 응용수학자, 물리학자, 엔지니어들은 대개 주어진 미분 방정식을 푸는 데에 관심을 두기 마련이고, 여기서 얻어진 해는 전기회로, 다리, 자동차, 비행기, 하수도 등을 만드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

미분 방정식 이론은 잘 발전되어 왔으며, 학습을 위해 방정식의 형태에 따라 그것을 의미있게 분류시키기도 한다.

상미분 방정식은 미지 함수와 종속변수가 하나의 독립변수를 가지는 함수인 미분 방정식을 말한다. 간단한 형태로 미지함수가 실수 또는 복소수 함수 형태를 가진다.

미지 함수의 독립 변수가 둘 이상인 미분 방정식이다.

여기서 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함수이며, 이 방정식은 간단히 변수를 다음과 같이 양변으로 분리하여 놓아서 풀 수 있다.

위 식을 적분하여 다음의 결과를 얻는다.

양변에 e를 취하면 다음의 결과를 얻는다.

여기서

는 임의의 상수이다. (이 결과가 맞는지 확인하려면, 이 식을 원래의 방정식에 대입해 보면 된다.)

가 상수가 아닌 함수이고, 어떤 함수의 경우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더라 하더라도) 그 적분이 불가능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실제적인 풀이는 매우 어려울 수 있다. 

이 방정식을 푸는 방법은 특별한 적분 인자,  에 달려있다.

위의 1차 상미분 방정식의 양변에 를 곱하자.




#Article 86: 각운동량 (177 words)


각운동량(角運動量)은 물리학에서 어떤 원점에 대해 선운동량이 돌고 있는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각운동량은 좌표의 원점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여러 각운동량을 다룰 때에는 둘을 합하거나 그에 관련한 연산을 하는 것이 물리학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신중히 고려하며 사용해야 한다.

각운동량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여러 공학 분야에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이고, 응용분야 또한 매우 다양하다. 이렇게 각운동량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유는 돌림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각운동량은 보존되는 양이 되기 때문이다. 뇌터의 정리에 의하면 각운동량의 보존은 공간의 회전대칭성 때문이다. 이러한 각운동량의 보존은 공학뿐만 아니라 여러 자연현상을 기술하는 데에도 유용하게 사용된다.

어떤 원점에 대한 입자의 각운동량을 수학적으로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이다. 물리계가 여러 입자로 구성되어 있을 때에는, 한 원점에 대한 총 각운동량은 각각의 각운동량을 더해서 구하거나,

좀 더 복잡한 부피를 가지는 물체의 각운동량은 미소질량에 대해 각운동량을 적분하여 얻을 수 있다.

많은 경우, 고정된 특정한 한 축에 대한 각운동량만을 고려하기 때문에 각운동량을 3차원 벡터로 취급하지 않고 단순히 반시계방향의 회전은 양으로, 시계방향의 회전은 음으로 취급하여 스칼라로 놓기도 한다. 이렇게 할 때에는 벡터곱의 크기로 각운동량을 표기하게 된다.

여기서 는 로부터 까지 재는 각도이다.

각운동량을 시간에 대해 미분하면 돌림힘 

가 된다. 만약 어떤 원점을 기준으로 계에 돌림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Article 87: 원주율 (532 words)


원주율(圓周率, pi, )은 원둘레와 지름의 비 즉, 원의 지름에 대한 둘레의 비율을 나타내는 수학 상수이다. 수학과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 두루 쓰인다. 그리스 문자 π로 표기하고, 파이(π)라고 읽는다. 원주율은 수학에서 다루는 가장 중요한 상수 가운데 하나이다. 무리수인 동시에 초월수이다. 아르키메데스의 계산이 널리 알려져 있어 아르키메데스 상수라고 부르기도 하며, 독일에서는 1600년대 뤼돌프 판 쾰런이 소수점 이하 35자리까지 원주율을 계산한 이후 뤼돌프 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주율의 값은 3.141592653589793238462643383279502884197169399375105820974944...로, 순환하지 않는 무한소수(무리수)이기 때문에 근삿값으로 3.14를 사용하거나 기호 파이(π)로 사용한다.

유클리드 평면에서 원은 크기와 관계없이 언제나 닮은 도형이다. 따라서 원의 지름에 대한 둘레의 비는 언제나 일정하며, 이를 원주율이라 한다. 즉, 원의 지름을 d, 둘레를 C라 하면 원주율 π는 다음의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원주율을 나타내는 기호 π는 1706년 영국의 수학자 윌리엄 존스가 최초로 사용했다. 이것은 둘레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페리페레스(περιφηρής) 또는 페리메트론(περίμετρον)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윌리엄 존스는 “특정 도형의 길이나 넓이를 구하는 계산에 매우 유용한 방법이 여러 가지 있다. 원을 예로 들면 지름이 1인 원의 둘레를 약 3.14159…= π로 표기하는 것이다.”라고 기호 π의 사용을 제안하였다.

원주율은 소수점 아래 어느 자리에서도 끝나지 않고, 순환마디도 없이 무한히 계속되는 비순환소수이다. 원주율이 무리수라는 것은 1761년 요한 하인리히 람베르트가 증명했다. 원주율의 소수점 이하에서 나타나는 수열은 무작위 표집을 통해 만드는 난수표와 성질이 같다. 원주율은 십진법으로는 값을 정확하게 표기할 수 없기 때문에 실제 계산에서는 근삿값을 이용한다.

한편, 원주율은 계수가 유리수인 유한 차수 다항식의 해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종류의 수를 초월수라 부른다. 이 사실은 1882년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이 증명하였다. 여기에서 원주율은 어떤 정수에 적당한 유리수를 곱하고 제곱근을 씌우는 등의 연산을 조합하여 얻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원주율이 초월수라는 사실을 통해, 그리스 3대 난제 중 하나였던 “자와 컴퍼스만을 사용하여 원과 넓이가 같은 정사각형을 작도하는 원적문제”가 유한한 대수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원과 원주율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원주율이 보이는 복잡한 수열에 비해 이를 계산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라이프니츠가 정리한 다음 계산식이 널리 알려져 있다.

(∑s=0 to ∞  ((-1)^s/(2s+1)))4) 라이프니츠 정리

고대의 여러 문화에서 원주율의 값으로 3이 쓰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원주율을 3으로 계산하였고, 구약성경 열왕기상 7장 23절과 역대하 4장 2절에는 직경과 둘레의 길이를 기술하여 원주율이 3정도 임을 알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고대 중국의 수학책인 《구장산술》에서도 3을 원주율로 제시하였다. 《구장산술》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실려 있다.

구장산술의 계산은 평균값으로 이루어져있다. (1) 원둘레가 30보인 경우 반지름은 30=2r*3.14 r=4.78 이경우의 면적은 71.74 (2) 지름이 10보인 경우 면적은 78.5. (1)과 (2)의 평균은 75보. 그러므로 구장산술의 계산이 부정확하다는 것은 잘못되었다.
구장산술에 실린 계산이 매우 부정확하다는 것은 왼쪽 그림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지름이 1인 원에 내접하는 정육각형의 둘레는 3이고 실제 원의 둘레는 그것과는 차이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이는 고대에서부터 이미 널리 알려진 문제였고 값을 보다 정확하게 구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원통형 바퀴를 굴려 직접 측정해 원주율을 계산하였는데 =3.16049……를 사용하였다.

한편 기원전 3세기의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근대 적분이 없었던 당시에 무한소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는 소거법을 사용하여 의 근삿값을 계산하였다. 이 방법은 임의 차원의 미지항에 대해 극한을 취하는 것으로, 귀류법을 사용하여 동일한 계산을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해답을 얻는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변이 매우 많은 다각형이 임의의 원에 내접하는 경우와 외접하는 경우를 비교하여 원주율을 계산하였다. 즉, 임의의 원의 둘레는 그것에 외접하는 다각형의 둘레보다 짧고 내접하는 다각형보다 길다. 이때 다각형의 변이 많아질수록 외접하는 경우와 내접하는 경우의 둘레 차는 작아지므로 원의 둘레에 근사한다. 즉, 지름이 d인 원에 내접하는 변의 개수가 n인 정다각형의 둘레 Pn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함수의 극한을 취하면 원주율을 얻을 수 있다.



#Article 88: 엔탈피 (594 words)


엔탈피(, )는 열역학계의 성질로, 계의 내부 에너지와 부피를 차지하여 얻을 수 있는 에너지(부피와 압력의 곱)의 합으로 정의된다. 대기압이나 수압과 같이 일정한 압력에 둘러싸인 계를 다룰 때 유용하게 사용되는 상태함수이다. 기호는 대개 라틴 대문자 H이다. 국제단위계상에서 줄이, 영국 열량 단위에서 칼로리가 엔탈피를 나타내기 위한 단위로 사용된다.

내부 에너지를 계산할 수 없기 때문에 계의 총 엔탈피를 바로 구할 수는 없다. 따라서 에너지 전달을 잘 표현한다는 등의 실용적인 이유로 등압과정에서 측정된 엔탈피 변화량()이 주로 사용된다. 만일 물질의 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엔탈피 변화량은 주변 환경의 열에너지 변화량과 동일하다. 화학 물질에 대해 엔탈피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에는 대부분 표준상태, 즉  부근의 압력과  부근의 온도를 상정한다. 엔탈피 변화량은 흡열 과정에서 양의 값을, 발열 과정에서는 음의 값을 가진다.

엔탈피는 다음 식으로 정의된다.

여기서 는 계의 엔탈피를, 는 계의 내부 에너지를, 는 계의 압력을, 는 계의 부피를 의미한다.

엔탈피는 크기 성질로, 성분이 동일하다면 계의 크기와 비례하여 값이 달라진다. 세기 성질로 사용하고 싶다면 비엔탈피 나, 몰엔탈피 를 정의해 사용할 수 있다. 이 때 은 질량을, 은 몰수를 의미한다.

불균질한 계의 경우 총 엔탈피 값은 각 부분의 엔탈피의 총합으로 구할 수 있는데,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는 총 엔탈피 값을, 는 각 부분계를, 는 그 부분계의 엔탈피를 의미한다.

중력장 내에 놓인 닫힌 계를 고려해보자. 이 경우 압력 는 고도에 반비례하여 즉각적으로 달라지지만, 온도 는 평행이 완전히 이루어지기까지는 특별히 달라지지 않는다. 이 경우 엔탈피는 다음과 같이 적분을 사용해 나타낸다.

여기서 (로)는 밀도를, 는 비엔탈피를 나타내며 따라서 는 엔탈피 밀도를 나타낸다. 는 무한히 작은 부피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적분은 모든 부피를 무한히 작은 부분으로 나누어서 각 부분의 엔탈피를 더한 것과 같다.

위의 엔탈피의 정의는 그 값이 기준을 어떤 점으로 잡느냐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쓰이는 것 보다는 엔탈피의 변화로 어떤 과정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즉, 어떠한 과정에서 압력의 변화가 0인 경우엔(ΔP=0), 엔탈피의 변화량은 계가 주변과 주고받은 에너지인 열량을 나타낸다.

따라서 주변의 압력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반응의 전후 열량 출입을 나타내는 데에 많이 쓰인다.

계의 엔탈피는 직접 측정할 수 없으며, 계의 엔탈피 변화로 대신 측정된다 .엔탈피 변화는 다음 방정식으로 정의된다.

반응 엔탈피(ΔH) = 엔탈피 변화량  E출입량 E 차이값 between 반응물  생성물  반응열

ΔH는 엔탈피 변화량이다.

는 계의 최종 엔탈피이다.

는 계 의 초기 엔탈피이다.

ΔH의 구성 = 부호 + 크기

ΔH 부호의 의미

ΔH 크기의 의미 - E 출입량 = E 차이 between 반응물  생성물

역반응 ΔH = -정반응 ΔH

엔탈피는 온도와 압력에 따라 달라지므로 온도와 압력을 표시한다. 온도와 압력이 표시되어 있지 않으면 25도씨, 1기압 상태이다.

엔탈피 변화는 화학 반응을 일으킬 때 열역적 계 또는 주위에서 관찰된 엔탈피의 변화를 설명한다.

화학반응이 완료된 후 엔탈피 값은 달라진다. 이는 생성물과 반응물간의 엔탈피 차이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엔탈피 변화값 (ΔH)은 (생성물의 엔탈피 값의 총합) - (반응물의 엔탈피 값의 총합)으로

나타 낼 수 있다. 일반적인 엔탈피 변화의 예로서는 표준 생성엔탈피가 있다. 이러한 엔탈피의 측정은 표준화된 환경 또는 표준 조건에서 측정하는 것이 매우 일반적이다.

표준 조건 (Standard conditions)으로는

물질 1몰이 완전 연소하여 가장 안정한 생성물이 될 때 방출하는 열량

물질 1몰이 가장 안정한 원소로부터 생성될 때 방출하거나 흡수하는 열량

생성열  생성반응식의 E 차이

홑원소 물질 생성열 =0 - 예외 : O3
, 다이아몬드(C)의 생성열 0

생성열 = 연소열인 반응 - C(흑연) + O2- CO2  ΔH=C(흑연) 연소열 = CO2 생성열

일부 표준 형성의 열은 아래 표에 열거되어 있다.

물질 1몰이 가장 안정한 원소로 분해될 때 방출하거나 흡수하는 열량

분해열 = - 생성열

산과 염기가 중화되어 H2O1몰이 생성될 때 방출하는 열량

물질 1몰이 다량의 물에 용해될 때 방출하거나 흡수하는 열량

원리 : 연료가 연소할 때 방출한 열 = 물이 흡수한 열

연소열(kJ/mol) = 물이 흡수한 열량/연소한 물질의 수 = (물의 (비열 X 질량 X 온도변화)) / ((연소한 연료질량/연료의 화학식량))

원리 : 연료가 연소할 때 방출한 열 = 물과 열량계가 흡수한 열

연소열(kJ/mol) = (물이 흡수한 열량 + 열랑계가 흡수한 열량) / (연소한 물질의 몰수)




#Article 89: 운동 에너지 (940 words)


운동 에너지 (運動- , kinetic energy)는 운동하고 있는 물체 또는 입자가 갖는 에너지이다. 주어진 물체의 어떤 속도에서의 운동에너지는 그 물체를 정지 상태에서 그 속도까지 가속시키는데 필요한 일의 양으로 정의된다. 가속이 되어 운동 에너지를 얻게 되면 속도의 크기가 변하지 않는 한 그 운동에너지를 유지한다. 또한, 그 운동 상태에서 정지 상태까지 감속시키는데 필요한 에너지 또한 원래 그 물체의 운동 에너지와 같다.

고전 역학에서 질량이 m인 비회전체의 속도의 크기가 v일 때 물체의 운동 에너지는  이다. 상대론에서는 v가 빛의 속도보다 훨씬 작을경우에 운동 에너지는

고전역학에서 E ∝ mv2 라는 원리는 처음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와 요한 베르누이에 의해 고안되었는데, 이 때 운동 에너지를 살아있는 힘() 라고 묘사하였다. 네덜란드의 는 이 관계의 실험적인 증거를 제시하였다. 물체를 점토 블럭에 떨어뜨리면서 그라브산드는 그들의 관통 깊이가 충돌 속도 크기의 제곱에 비례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브르퇴유는 실험 결과가 암시하는 바를 인지하였고 자신의 설명을 발표하였다.

운동 에너지 와 일 이라는 용어의 현대의 과학적 의미는 19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코리올리는 1829년에 Du Calcul de l'Effet des Machines 를 발표하는데 여기에서 운동 에너지를 수학적으로 기술하려고 시도하였다. 윌리엄 톰슨은 약 1849-51년도에 운동 에너지(kinetic energy)라는 용어를 처음 쓴 것으로 알려져있다.

에너지는 화학 에너지, 열 에너지, 전자기 복사, 중력 에너지, 전기 에너지, 탄성 에너지, 핵 에너지, 정지 에너지 등과 같이 많은 형태로 존재한다. 이것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 할 수 있는데 바로 위치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이다.

운동 에너지는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어떻게 전환이 되는지 살펴본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사이클리스트는 음식에서 제공되는 화학 에너지를 자전거를 가속 시키는데 사용한다. 평평한 표면에서 이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기 저항과 마찰을 이겨내는 데 필요한 것을 빼면 더 이상 필요한 일이 없다. 이 과정에서 화학 에너지는 운동 에너지로 변환되지만 그 과정은 완전히 효율적인 것이 아니고 열을 부가적으로 생산하게 된다.

운동하는 사이클리스트와 자전거의 운동 에너지는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사이클리스트가 충분히 높은 언덕을 만나 페달을 밟지 않은 채로 언덕 정상에서 멈추게 되었다고 하자. 그럼 운동 에너지는 완전히 중력 위치 에너지로 변환되게 되고 이것은 언덕을 다시 내려오면서 운동 에너지로 바뀌게 된다. 마찰 때문에 에너지의 손실이 생기므로 추가적으로 페달을 밟지 않는 한 원래의 속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에너지는 사라진 것이 아니고 마찰 때문에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전환된 것이다. 이번엔 싸이클리스트가 바퀴 하나에 발전기를 연결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하강하는 과정에서 전기 에너지를 생산하게 된다. 그럼 발전기가 없었을 때보다 싸이클리스트는 언덕 아래에서 더 적은 속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는 원래 가지고 있던 에너지 일부가 전기 에너지로 변환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브레이크를 밟게 될 경우 운동 에너지는 마찰에 의해서 열로 빠르게 전환 될 것이다.

다른 속도의 함수인 물리량과 같이 물체의 운동 에너지 또한 물체와 관찰자의 기준계 사이의 관계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물체의 운동 에너지가 불변량인 것은 아니다.

우주선은 공전 속도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운동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부터 얻는다. 완벽한 원 궤도의 경우 지구 근방의 우주 공간은 마찰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운동 에너지는 일정하게 유지된다. 하지만 다시 우주선이 지구로 돌아올 경우 운동 에너지는 열로 전환된다. 만약 궤도가 타원형이거나 쌍곡선의 형태라면 공전하는 동안 운동 에너지와 위치 에너지는 지속적으로 교환된다. 근일점에서 운동 에너지는 최대, 위치 에너지는 최소가 되고 원일점에서는 운동 에너지는 최소, 위치 에너지는 최대가 된다. 그렇지만 운동 에너지와 위치 에너지의 합은 보존된다.(역학적 에너지 보존 법칙)

운동 에너지는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전달될 수 있다. 당구에서 플레이어가 당구공을 큐로 치게 되면 그 공에게 운동 에너지를 전달하게 된다. 만약 그 공이 다른 공과 충돌한다면 에너지가 전달 되기 때문에 멈춰 있던 공은 가속되고 다른 공은 급격하게 느려진다. 당구에서의 충돌은 탄성 충돌에 가깝다. 따라서 운동 에너지는 보존된다. 비탄성 충돌의 경우 운동 에너지는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열, 소리 등)로 분산된다.

플라이휠은 에너지를 저장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이는 운동 에너지가 회전 운동의 형태로 저장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물리적 상황에서 운동 에너지를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일상생활에서는 보통 뉴턴 역학(고전 역학)에서의 ½mv² 공식이 가장 적합하다. 하지만 물체의 속력이 빛의 속력에 가까워지면 상대론적인 효과가 나타나며 상대성 이론이 필요하게 된다. 만약 물체가 원자나 아원자 수준의 크기라면 양자 역학적인 효과가 두드러지며 양자 역학이 필요하게 된다.

고전 역학에서 점 입자(너무 작아서 질량이 한 점에 집중해 있다고 봐도 되는 물체) 혹은 비회전 강체의 운동 에너지는 그것의 속력과 질량에 의존한다. 운동 에너지는 속력의 제곱과 질량의 곱에 1/2을 곱한 것과 같다. 따라서

이고, 여기서 은 물체의 질량 는 물체의 속력(혹은 속도)이다. SI 단위에서 질량은 킬로그램, 속도는 m/s로 측정된다. 그리고 운동 에너지의 단위는 줄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80kg의 물체가 18m/s로 운동할 때 운동에너지를 계산하려고 한다면

인 것이다. 만약 당신이 공을 던진다면 당신은 공을 가속시키기 위해 일을 가할 것이고, 그 공이 어떤 물체에 부딪히고 그 물체를 움직이게 한다면 부딪힐 때 공이 그 물체에게 일을 해 준 것이다. 그런데, 운동 에너지는 정지 상태에서 어떤 속력까지 가속시키는데 필요한 일이므로 알짜힘 x 변위 = 운동 에너지인 것이다. 즉,

이다.

운동 에너지는 속력의 제곱에 비례하기 때문에 물체의 속력이 두 배가 된다면 운동 에너지는 네 배가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차가 다른 동일한 질량의 차보다 두 배의 속력으로 달리고 있다고 하자. 두 차가 브레이크를 밟을 때 마찰력이 동일하다고 하면 속력이 두 배 빠른 차가 네 배더 많은 거리를 브레이크를 밟아야 완전히 멈출 수 있다. 이는 감속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네 배인 것을 의미한다.

물체의 운동에너지는 또한 운동량과도 관계가 있는데, 이는 다음을 만족한다.

여기서, 는 물체의 운동량, 은 물체의 질량이다.

병진식 운동 에너지, 강체의 선형 운동에서의 운동 에너지 또한

이다. 여기서 은 물체의 질량 는 강체의 질량 중심의 속력이다.

물체의 운동 에너지는 그것이 측정되는 기준계에 의존한다. 하지만 에너지가 나가거나 들어올 수 없는 고립계에서의 전체 에너지는 시간이 지나도 그것이 측정되는 기준계 안에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로켓 엔진에서 운동 에너지로 변환되는 화학 에너지는 기준계에 따라 우주선체와 배기 가스에 다른게 나뉜다. 이를 오베르트 효과라고 부른다. 하지만 어떤 기준계를 선택하든지 운동 에너지, 연료의 화학 에너지 등을 포함한 전체 에너지는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기준계를 따라 움직이는 서로 다른 관측자들이 관측한 전체 에너지는 서로 다를 수 있다.

기준계에 따라 계의 운동 에너지는 달라지는데 운동량 중심을 따라 움직이는 기준계에서 측정할 때 운동 에너지는 최소값을 가진다.  이는 이 기준계에서 계의 총 운동량이 0이기 때문이다.

극소 시간 dt 동안 입자를 가속시키는데 필요한 일은 힘 과 변위 의 내적과 같다. 따라서,




#Article 90: 가타카나 (608 words)


카타카나(, , )는 일본어에서 사용하는 음절 문자 중 하나이다. 히라가나와 함께 가나라고 부른다. 가타카나는 해당하는 음을 갖는 한자의 일부분을 가져와 헤이안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한문을 뜻으로 읽기 위해 신라의 각필구결 일부를 사용하여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있으나 정설은 아니다.

가타카나를 히라가나보다 어렵다고 인식하는 것은 일본인도 마찬가지라 일본 유아들이 가나를 배울 때 히라가나를 먼저 배운 뒤에 가타카나를 배우고 유아용 그림책 등에는 가타카나로 쓴 단어 위에 히라가나를 후리가나로 덧붙이기도 한다. 한영 자판 상태에서 가타카나 입력을 하려면 ㅃ+한자 키를 써야 한다. 히라가나가 ㄸ과 한자 키의 조합 방식과 유사한 개념이 될 수도 있다.

일본어에서는 주로 다음과 같은 경우에 쓰인다.

이밖에도, 일본에서 어떤 항목들을 열거할 때 그 순서를 구별해 나타내는 기호 (ア, イ, ウ…)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경우 이로하순 (일본의 가나다순)대로 적는 경우가 많다.

과거 메이지 유신기부터 태평양 전쟁기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제국 시대에 작성된 공문서와 법령은 무조건 가타카나와 한자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가타카나라는 말 자체는 '片仮名'라는 한자 표기로 되어 있으나 이를 다시 가타카나로, 즉 'カタカナ'라고 적는 경우도 있다. 또 'v'음을 나타낼 때 쓸 수 있는 가나는 가타카나의 'ヴ' 뿐이며, 그 활용형인 'ヴァ, ヴィ, ヴェ, ヴォ' 역시 가타카나로만 적을 수 있다.

한편 일본어 이외에도 아이누어를 표기할 때 주로 사용되며, 과거 일제 점령기의 대만에서도 대만어를 표기하는 데 활용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대만어는 한자 내지는 알파벳 표기법을 따라 쓰이고 있다.

로마자 표기는 헵번 표기법을, 한글 표기는 외래어 표기법의 어중/어말 표기법을 따랐다. (다만, 근현대에 추가된 가타카나에 대해서는 표기법에 정해진 한글 표기가 없다.) 회색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글자들 또는 사용이 드문 글자들이다.

고대 일본에서 한자의 일부 획을 따서 문자로 삼은 것은 일찍이 7세기부터였으나, 오늘날 가타카나의 직접적 기원은 9세기 초 나라 지방의 고종파 (古宗派)에 속한 학승들이 불경에 쓰인 한문을 일어로 훈독하기 위해 만든 글자 체계에서 비롯됐다. 이들이 만든 글자는 한문 옆에 작게 붙여 쓰는 일종의 훈점 (訓点)으로, 한자음만 빌려 쓰는 만요가나의 일부 획을 다시금 생략하여 만든 것이었다.  예를 들어 カ(카)는 加(더할 가)의 왼쪽 부분을 따서 만들었다. 초창기만 해도 경전의 각 행간 여백에 오코토텐 (ヲコト点)과 같이 쓰였으나 점차 빠르고 조그맣게 적기 위해 형태의 간략화가 이뤄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지금 쓰는 가타카나의 원형이 된 것은 물론, 오코토텐의 역할을 대신하여 훈독에 널리 쓰이기에 이르렀다.

가타카나는 그 유래에서 짐작되듯이 승려나 박사들이 한자의 음과 훈을 주기하기 위해 사용한 경우가 많았으며, 꽤 초창기부터 현대 일본어처럼 한자와 가나를 번갈아 쓴 사례도 발견된다. 나중에는 한문의 주석 역할을 벗어나 노래 가사집이나 이야기집과 같이 일상 속 필기에도 쓰이는 등 사용 범위가 넓어졌지만, 히라가나로 쓰인 글이 미적 가치를 평가받고 감상하는 수준에 이른 것과 비교하면 아직까지 기호적인 성격이 강했다. 초창기 가타카나는 그걸 쓰는 개개인과 집단마다 글꼴의 차이가 컸고, 1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이체자 (異体字)의 종류가 많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글꼴이 통일되었고 12세기에 이르러 오늘날의 모습에 가깝게 되었다.

가타카나가 히라가나와 같은 하나의 문자 체계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헤이안 시대 중기이다. 이때 쓰여진  (宇津保物語) '국양 상' (国譲上) 권의 '글씨의 모범' (書の手本)에 가타카나가 실려 있다. 또 에도 시대의 학자였던 반 노부토모 (伴信友)의 설에 따르면, 헤이안 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堤中納言物語)의 '무시메즈루 공주님' (虫めづる姫君) 편에 무시메즈루 공주가 남자에게 보낸 연애편지에서 가나 (히라가나)는 아직 쓰지 못하오니 가타칸나 (가타카나)로라는 구절이 있어, 이 당시 문자를 습득하는 순서는 가타카나에서 시작해 히라가나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으로 일어학자 고마쓰 히데오 (小松英雄)는 '무시메즈루 공주님'에서 보이는 서술은 기본적으로 허구인 이야기에서 쓰인 특수한 사례이며, 실제로는 가나 (히라가나)를 아릅답게 쓸 수 있게 배우는 것이 당대 여성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일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서부터는 서양 외래어 유입에 따라 그 활용 빈도가 한층 높아졌으며, J. C. 햅번이 지은 일영사전인  (和英語林集成)의 도표에서 메이지 초의 가타카나 글꼴을 찾아볼 수 있다. 1900년 소학교령 시행 규칙으로 한 소리 한 글자라는 원칙에 따라 표준 글꼴만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통해 지금의 가타카나가 확립되었다. 한편 가타카나는 히라가나에 비해 학문적으로 쓰이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에서는 보다 정식적인 문자로 취급되어 법령과 기타 공문의 표기 문자로 쓰였고, 교육상으로도 히라가나에 앞서 가르쳤다. 그래서 이 당시 교과서를 보면 가타카나와 한자로만 서술된 것이 많다. 하지만 신문이나 문예집 등 민간 분야에서의 서술법에까지 가타카나 사용이 강제되진 않았다.




#Article 91: 다양체 (205 words)


위상수학과 기하학에서, 다양체(多樣體, )는 국소적으로 유클리드 공간과 닮은 위상 공간이다. 즉, 국소적으로는 유클리드 공간과 구별할 수 없으나, 대역적으로 독특한 위상수학적 구조를 가질 수 있다. 더 정밀히 말하면, 한 n차원 다양체의 각 점이 n차원의 유클리드 공간에 대해 위상동형사상인 근방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정밀한 정의에서 다양체는 n-다양체라고 불린다.

음이 아닌 정수 에 대하여, 차원 국소 유클리드 공간(局所Euclid空間, ) 는 다음 성질을 만족시키는 위상 공간이다.

하우스도르프 국소 유클리드 공간 에 대하여 다음 네 조건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하우스도르프 국소 유클리드 공간을 다양체라고 한다.

만약 어떤 위상 공간 가 차원 다양체이자 차원 다양체이며, 이라면 는 공집합이다.

모든 국소 유클리드 공간은 다음 성질을 만족시킨다.

모든 하우스도르프 국소 유클리드 공간은 다음 성질을 만족시킨다.

모든 콤팩트 하우스도르프 국소 유클리드 공간은 다양체이다.

국소 유클리드 공간 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모든 제2 가산 다양체는 다음 성질을 만족시킨다.

모든 파라콤팩트 분해 가능 국소 유클리드 공간은 다음 성질들을 만족시킨다.

위상 공간 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위상 공간 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다양체의 대표적인 예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다양체가 아닌 국소 유클리드 공간으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비가산 개의 연결 성분을 갖는 다양체는 (정의에 따라 파라콤팩트 공간이지만) 제2 가산 공간이 아니다. 보다 일반적으로, 다양체에 대하여 제2 가산 공간인 것은 가산 개의 연결 성분을 갖는 것과 동치이다.




#Article 92: 정주영 (821 words)


정주영(鄭周永, 1915년 11월 25일 ~ 2001년 3월 21일)은 현대그룹을 창업한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며 전직 정치인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였던 1940년대 초반 시절에 자동차 정비회사인 아도 서비스(Art Service, 현대건설의 전신)를 인수하여 운영하였고 한때 홀동광산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1946년 4월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설립하면서 건설업을 시작하였고 현대그룹의 모체를 일으켰으며 건설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성공을 거두었다. 뛰어난 상업과 기업경영능력으로써 현대그룹을 일군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라고 할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프로축구 현대 호랑이는  홈 앤 어웨이 제도로 바뀐 한편 주말 2연전이 새롭게 도입된 동시에 프로야구의 선례를 본따 홈팀이 흰색,원정팀이 유색 유니폼을 입은  1987년  본인(정주영)의 고향인 강원도를 연고지로 설정했다가 1990년 울산으로 연고지를 옮겼으며 주말 2연전 제도는 선수 부상 등의 문제점이 생기자 1년 만에 폐지됐고  다음 해부터 홈팀은 유색, 원정팀은 흰색 유니폼을 입는 것으로 변경됐다.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농사를 도왔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차례 가출을 반복하였으나 실패하였다가 결국 가출에 성공하였다.

가출 후 청진의 개항 공사와 제철 공장 건설 공사장에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소를 판 돈으로 고향을 떠나 원산 고원의 철도 공사판에서 흙을 날랐는데 이것이 첫 번째 가출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정주영은 무려 4번이나 가출을 하였다. 두 번째 가출하여 금화에 가서 일하였다. 3번째 가출 때는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들고 도망하여 경성실천부기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덜미를 잡혀 고향으로 돌아갔다. 4번째 가출은 1933년으로 19살의 나이로 인천 중구 신포동(도로명:신포로)에 위치한 인천항에서 부두하역과 막노동을 하다가 경성으로 상경하여 이듬해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배달원 자리는 꽤 흡족하여 집을 나온지 3년이 지나 월급이 쌀 20가마가 되었다. 부기를 할 줄 아는 정주영은 쌀가게 주인의 신임을 받아, 주색잡기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는 아들이 아닌 정주영에게 가게를 물려 주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11월 23일 밤 변중석 여사를 집에서 처음 대면하였다. 당시 소녀 변중석은 윗마을 총각이 서울서 선을 보러 내려왔다는 부친의 말에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떨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보름 뒤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신부 뒷모습만 보고, 신부는 신랑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뤄진 결혼이었다. 1938년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물려 받아 복흥상회라는 이름을 짓고 그 가게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복흥상회 개업 후 2년 만인 1940년에 중일 전쟁이 일어나 일제가 식량배급제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복흥상회를 폐업해야 했다.

일제말기인 1941년 빚을 내어 아도 서비스의 사업을 맡기도 하였으나 1달도 채 지나기 전에 불에 타버렸다. 다시 빚을 내어 신설동 빈터에다 다시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공장도 1942년 5월 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시피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떠나게 된다. 홀동광산의 광석을 평양 선교리까지 운반하는 일을 3년간 하다가 1945년 5월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는데, 3개월 후 일본의 패망으로 홀동광산은 문을 닫고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소련군 포로로 잡혀갔다. 이때 그는 이미 타인에게 광산업을 인계하였으므로 극적으로 피랍을 모면한다.

이후 서울 돈암동의 스무 평 남짓한 집에서 동생들, 자녀들과 함께 벌어놓은 돈으로 살다가 해방 후인 1946년 4월에 미군정청의 산하기관인 신한공사에서 적산을 불하할 때 초동의 땅 200여 평을 불하받아 현대그룹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였다. 또한 1947년 5월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 건설업에도 진출하였다. 1950년 1월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두 회사인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하여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때 자본금은 삼천만원이었다.

그러나 그해 한국 전쟁으로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가족들과 부산으로 피난한 정주영은 동생 정인영이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일하던 덕에 서울에서 하던 토목사업을 계속 할 수 있었으며 서울 수복 후 미8군 발주 공사를 거의 독점하였다.

한국 전쟁 직후 현대건설은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교량, 도로, 집, 건물 등을 복구하면서 점차 늘어가는 건설수요로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그 뒤에도 늘어나는 건설 수요 등을 감안하여 그는 시멘트 공장 설립을 추진, 1964년 6월 현대 시멘트공장을 준공하여 시멘트도 자체적으로 조달하였다.

그 뒤 낙동강 고령교 복구, 한강 인도교 복구, 제1한강교 복구, 인천 제1도크 복구 등의 사업을 수주하여 1960년에는 국내 건설업체중 도급한도액이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964년 단양에 시멘트 공장을 완공하였으며, 1965년에는 국내 최초로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를 건설하였다. 1967년에는 다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어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현대건설 내 시멘트공장을 확장하여 1970년 1월 정식으로 현대시멘트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후 현대건설과 현대시멘트의 사주로 해외건설시장 확보와 낙찰 등을 이끌어내며 한국 국외의 건설시장으로도 진출하였고 울산 조선소 건설, 서산 앞바다 간척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면서 기업을 확장하게 된다.

기업인으로 활동하는 중에도 한국지역사회학교 후원회에 참여하여, 1969년 1월에는 한국 지역사회학교 후원회장에 피선되기도 했다. 1974년 6월에는 한국과 영국의 민간 경제협력을 위한 한·영 경제협력위원회 한국측 대표의 한사람에 선출되었고, 1970년대 중근동 지역 건설, 개발 사업을 성사시킨 뒤 1976년부터 1997년까지는 한국·아랍 친선협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8년 2월 25일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다시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국민의 정부가 실시한 대북 햇볕 정책에 맞춰서 정주영이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한 것이다.

대북사업의 추진과 중계 사업을 위해 그는 1999년 2월에 현대아산을 설립했다. 사실 정주영은 1989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하여 금강산 공동 개발 의정서에 서명하였는데, 이것이 9년 만에 현실화된 것이다. 이때 정주영은 원산과 평양을 둘러봤으며, 특히 자신의 고향 통천도 방문하였다.

한편 정주영은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아내 변중석이 입원해있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고 나중에 자택에서 요양 생활을 했다. 2001년 1월에 병원에 입원한 뒤 2개월 뒤인 3월 21일에 서울아산병원에서 폐렴으로 인한 급성 호흡부전증으로 인해 향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인 2001년 5월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이 추서되었다. 이후 5년뒤인 2006년 11월 타임(TIME)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에 선정되었으며, 2008년 DMZ 평화상 대상이 특별 추서되었다.

현대그룹 회장으로 재직시 아들들과 함께 평소에  청운동 자택에서 계동에 위치한 현대그룹 본사까지 걸어서 출근하였다. 평소에 일찍 기상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매일 아침 6시에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두 모여 아침식사를 하였다고 한다. 주로 미역국을 준비했으며 이 때문에 현대가 며느리들은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 식사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Article 93: 마틴 가드너 (142 words)


마틴 가드너(Martin Gardner, 1914년 10월 21일 ~ 2010년 5월 22일)는 미국의 과학 저술가이다. 특히 유희수학() 분야의 저술로 이름이 높다.

오클라호마주 털사 태생으로 시카고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유희수학(recreational mathematics) 분야를 집대성하고 대중에게 널리 알려 수많은 과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수학을 비롯한 과학뿐 아니라 마술, 문학(그는 루이스 캐럴의 전문가이다), 유사과학, 종교 등 다방면에 걸쳐 관심을 가져 6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였으며, 제임스 랜디와 함께 회의주의 운동을 주창하기도 하였다. 미국 노스캐럴라이나 주의 헨더슨빌(Hendersonville)에 만년을 보내다가 2010년 5월 22일 미국 오클라호마주의 노먼(Norman)에서 9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는 미국의 대중 과학 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지에 1956년부터 1981년까지 수학 게임(Mathematical Games) 컬럼을 연재하였다. 그가 연재를 그만둔 후 더글러스 호프스태터가 컬럼을 물려받았는데, 마틴 가드너에 대한 존경의 뜻에서 '수학 게임'의 애너그램인 Metamagical Themas를 자신의 컬럼 제목으로 정하였다. 1993년이래 그의 유희수학에 대해 관심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부정기적으로 모여 Gathering for Gardner(G4G)란 콘퍼런스를 열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컬럼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흥미있는 주제들을 대중에 소개하였다.




#Article 94: 프리먼 다이슨 (294 words)


프리먼 존 다이슨(, 1923년 12월 15일 ~ 2020년 2월 28일)은 영국 태생의 미국의 물리학자이다. 양자전기역학의 이론적 기반을 닦은 인물 중 하나이다. 또한 저명한 물리학자들 중 거의 유일하게 평생 박사 학위를 취득하지 않았다.

프리먼 다이슨은 1923년 12월 15일 영국 버크셔주 크로손()에서 태어났다. 1936년에서 1941년까지 윈체스터 칼리지를 다녔다. 18살이던 1940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고드프리 해럴드 하디 아래에서 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군에 입대하여 20살의 나이에 영국 공군 폭격기 사령부에서 분석가로 일했다. 전쟁이 끝나자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1947년에는 두 개의 정수론 논문을 출판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1947년부터 코넬 대학교 박사과정에 등록하여 한스 베테의 지도 아래 물리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연구에 뛰어들면서 이후 평생 동안 박사 학위를 취득하지 않았다.

프리먼 다이슨의 가장 널리 알려진 학문적 업적은 양자장론의 이론적 기반을 닦은 작업들이다. 그는 1949년에 양자전기역학을 기술하는 두 가지 방법, 즉 리차드 파인만의 파인만 도표를 이용한 경로적분과 줄리안 슈윙거, 도모나가 신이치로가 제안한 연산자 계산이 동치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파인만 도표를 가지고 재규격화 계산을 구현한 논문을 최초로 썼다. 또한 다이슨 급수라는 기법을 발명했으며, 이것은 워드-다카하시 항등식으로 확장되는 기반이 되었다.

생애의 후기에, 다이슨은 기술적으로 진보한 문명은 자신이 살고 있는 항성계의 태양을 완벽히 둘러싸 항성에서 나오는 복사 에너지를 완전히 사용하고 바깥쪽으로는 적외선을 복사할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에 따르면 밤하늘에서 적외선을 복사하는 거대한 물체를 찾아보는 것이 외계 문명체를 탐사하는 SETI 계획의 한 방법이 된다. 다이슨은 복사 차폐물로 자그마한 운석들의 구름을 생각했지만, 과학 소설에선 이어진 고체 구조물이 선호되어 왔다. 이러한 상상 속의 구조를 다이슨 구라고 부른다. 또한 그는 다이슨 나무라는 것도 제안했는데, 이는 유전자 조작으로 혜성에서도 자랄 수 있는 식물을 말한다. 다이슨은 혜성을 조작하여 내부에 생물이 숨쉴 수 있는 대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며, 태양계 밖으로 인간을 보낼 수 있는 서식지를 조성할 수 있다고 했다.

프리먼 다이슨은 2020년 2월 28일, 98세의 나이로 뉴저지주 프린스턴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딸 에스더 다이슨은 기업가이자 투자자이다. 아들 조지 다이슨은 역사가로, 과학사를 연구한다.




#Article 95: 린 마굴리스 (115 words)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 1938년 3월 5일 ~ 2011년 11월 22일)는 미국의 생물학자로서 매사추세츠 대학 앰허스트(University of Massachusetts Amherst) 대학교의 지구과학과 교수이다. 세포 생물학과 미생물의 진화 연구, 지구 시스템 과학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마굴리스는 미국항공우주국(NASA) 우주과학국의 지구생물학과 화학 진화에 관한 상임위원회의 의장을 역임했으며, NASA의 지구생물학에 관한 실험들을 지도하였다.

마굴리스의 가장 중요한 과학적 업적은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의 기원을 진핵세포로 들어간 외부 조직 공생적 관계를 이루다 정착했다고 보는 이론이다. 이러한 세포 내 공생설은 당시 충격적인 가설로 생물학계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100여 종의 논문과 더불어 10여권의 책을 펴냈다.

그는 영국 대기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주창한 가이아 이론을 지지하며, 가설을 공고히 하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또한 칼 세이건의 첫 번째 부인이었으며, 도리언 세이건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Article 96: 사람 (928 words)


사람은 영장류의 일종이다. 지구상의 사람을 통틀어 인류(人類), 인간(人間, Human)이라고도 한다. 사람은 스스로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사유, 언어 사용, 자기반성, 문제 해결을 할 수 있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고도로 발달한 두뇌를 지니고 있으며, 이로써 인간은 개인이 자신을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주체가 된다. 그러나 환경의 영향에 따라 자신을 통합화 하는데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지적, 심리적 능력과 함께, 직립 보행을 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팔을 이용해 다른 종보다 훨씬 정교한 도구를 만들 수 있다. 지구에 사는 사람은 2019년 12월 기준으로 약 73억 명이다. 사람은 현재 남극을 제외한 지구의 모든 대륙에 살고 있으며, 이 중 약 85%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아프로-유라시아, 구세계)에 살고 있다. 나머지 15%만이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신세계)에 살고 있다.

대부분의 고등 영장류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서 자기표현, 생각의 교환, 조직화를 할 수 있도록 언어를 비롯한 의사소통 체계를 이용하는 데 능숙하다.또한 이성을 가진 동물로 불린다

현생 인류의 기원에 대해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나 이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이론으로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태동한 단일 종이 전 세계로 이주했다는 아프리카 기원설, 여러 대륙에서 동시에 인류가 진화했다는 다지역 기원설 등이 있다. 아프리카 기원설은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 같은 여러 증거를 통해 학계의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사람은 다른 동물보다 지식의 축적면에 있어서 이점을 가지고 있어서 문명을 발생시킬 수 있었다. 기원전 수천 년 무렵에 황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강 등에 최초의 도시와 초기의 국가가 형성되었다. 그 뒤로 세계 곳곳에서 독특한 문명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문명의 발전은 로마 제국, 페르시아 제국, 몽골 제국와 같은 거대한 제국을 이루기도 하고 자금성, 피라미드, 타지마할과 같은 세계적인 문화 유산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류는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에 의한 파괴를 저지르기도 했으며, 원자폭탄, 핵폭탄과 같이 인류 전체를 몰살시킬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 이용하기도 하였다.

문화는 예절, 의상, 언어, 종교, 의례, 법이나 도덕 등의 규범, 가치관과 같은 것들을 포괄하는 '사회 전반의 생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문화는 다른 동물에서 볼 수 없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이다.

사람은 대부분 여러 개체가 모여 살며 이러한 군집을 사회(社會)라고 한다. 사회의 단위는 작게는 가정 또는 가족에서 크게는 국가(國家)로 나뉜다. 서기 2012년 현재 세계에는 200여 개의 국가가 있다.

이러한 군집 생활에서 사람은 서로를 구분하고 부르기 위해 사람마다 이름을 부여한다. 또한 이름과 함께 자손을 따라 대대로 이어지는 공통의 이름인 성씨가 사용되며 이를 통해 혈통을 구분하거나 서로 호칭을 한다. 성씨는 남성 쪽을 따라 이어지는 부계성(父系姓)이나 여성 쪽을 따라 이어지는 모계성(母系姓)이 있으며 부계성과 모계성을 모두 갖거나 아예 성씨를 사용하지 않기도 한다.

사람은 가족을 구성하기 위해 짝을 이루는데 한 쌍의 남녀가 짝을 이루는 일부일처제(일처일부제), 한 남성과 여러 여성이 짝을 이루는 일부다처제, 한 여성과 여러 남성이 짝을 이루는 일처다부제 등의 방식이 있으며 여러 남성과 여러 여성이 짝을 이루는 다부다처제의 경우도 나타난다.

사람은 서로의 생각을 전달하는 데에 언어와 문자를 이용한다. 현재 사용되는 언어는 6천여개로 알려져 있으나 여러 사정으로 점차 쓰이지 않는 언어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문자는 적어도 5천년 전부터 쓰여 왔다.

인 면에서도 성차의 차이보다는 동일한 점이 더 많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키(신장)는 유전적 요인이나 환경적 요인에 따라 개인차가 있다. 성인의 경우 보통 남자는 160 cm~195 cm 여자는 145 cm~175 cm 정도이다.

직립보행으로 이동하며 손을 사용하여 물건을 이용하거나 여러 가지 일을 한다.

뇌의 무게는 태어날 때는 약 300g이고 만 5세 무렵에 성인의 뇌 무게인 1300~1400g에 이른다. 성인 기준으로 몸무게에 대한 뇌 무게의 비율은 약 2%이다.

털은 퇴화되어, 피부 부위에 따라 털이 없거나 매우 짧아 피부를 완전히 덮지 못한다. 단, 머리 윗부분, 겨드랑이, 생식기 주위에는 각각 머리카락, 겨드랑이 털, 음모가 나 있는데 이 털은 피부를 덮을 만큼 길고 많다. 머리카락은 어린이 시기부터 있으나, 겨드랑이 털과 음모는 이차성징 이후로 자란다. 또한, 이차성징 이후로 남자에 한해서 입술과 턱 주변에 수염이 난다. 털의 색깔은 검정, 갈색, 금색, 붉은색 등으로 다양하다. 나이가 들어 노년기에 이르면 점차 멜라닌이 퇴화되어 흰색으로 바뀐다.

야행성이던 원시 영장류가 주행성으로 바뀌면서 청각보다 시각에 의존하게 돼 귀를 움직이는 능력은 쇠퇴했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이 낯선 소리를 들었을 때 귀 주변 근육으로 향하는 신경반응의 강도는 씹기, 미소 짓기, 의도적으로 귀 움직이기 등을 할 때보다 10분의 1∼100분의 1 수준 정도로 약했지만, 사람도 다른 동물처럼 무의식적으로 귓바퀴를 관심 있는 소리 쪽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인간의 성은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며, 성행위를 통해 생식한다. 성행위를 통해 수정된 배아는 여성의 자궁에 착상되어 임신기간을 거친다. 보통 한 번에 하나의 태아(胎兒)를 임신하며, 드물게 둘 이상의 태아를 동시에 임신하기도 하는데, 이를 쌍둥이(일명:쌍생아 (雙生兒)로, 일란성과 이란성 쌍생아로 나뉜다.)라고 한다. 임신기간은 38주 (266일)로 이 기간을 지난 태아는 출산과정을 거쳐 하나의 개체로 태어나 영아 (嬰兒)가 된다. 영아기의 사람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성장하며, 젖을 떼는 시기는 개체에 따라 차이가 있다. 대략 생후 1년에서 6년 사이의 사람을 유아(幼兒)라고 하며, 이 시기에 기초적인 언어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 따라 그 나라의 모국어부터 습득한다.) 습득이 이루어진다. 이후 대략 만 20세까지는 그 초기를 어린이 또는 소년, 후기를 청소년이라고 하며, 이 시기에 대부분의 외형적 성장이 끝난다. 또한 이 시기에 이차성징이 일어나 남성과 여성의 외형적 차이가 두드러지게 되며, 초경이나 사정, 몽정을 경험하는 등 생식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후 대략 만 20세에서 만 40세 사이를 청년, 대략 만 40세에서 만 50세 사이를 장년, 대략 만 50세에서 만 60세 사이를 중년, 만 60세를 넘어서면 노년이라고 하나 이러한 시기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성장이 끝난 사람은 청년기 이후로 조금씩 노화되기 시작한다. 중년에서 노년 정도가 되면 노화의 결과로 신장(身長) 축소, 각종 감각 기관 둔감, 생식 능력 감퇴 등의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생식 능력의 경우, 남성은 늦게는 70세 이후까지도 생식이 가능하나 청년기를 정점으로 고환에서 생성되는 정자의 수와 운동능력이 점차 감소하기 때문에 임신 성공 가능성도 같이 떨어지며, 여성은 중년기 (개인차가 있으나 대개 40~50세이다.)에 폐경이 일어나 난자의 배란이 중지되므로 이후 생식이 불가능하게 된다.

사람의 평균 수명은 86세 정도이며, 보통은 여자가 남자보다 평균 수명이 긴 편이다.

사람은 주행성 동물로, 낮에 활동하고 밤에 잠을 잔다. 어릴 수록 하루에 자는 시간이 길고, 자랄 수록 짧아진다. 생후 1주에는 18~20시간, 만 1세에는 12~14시간, 만 10세에는 10시간 정도를 자며 성인은 하루에 대략 6시간 ~ 8시간 정도를 잔다. 사람은 의도적으로 수면 시간을 조절하기도 하며, 사람에 따라, 마치 야행성 동물처럼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는 경우를 올빼미족이라 한다.

사람은 의생활, 식생활, 주생활이 3가지를 필요로 하고, 이 외에도 미성년자에게는 교육까지 필요하다.




#Article 97: 아널드 슈워제네거 (305 words)


아놀드 알로이스 슈워제네거(, 영어 발음:  아널드 앨로이스 시워처네거, 독일어 발음:  아르놀트 알로이스 슈바르체네거, , 1947년 7월 30일 ~ )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의 배우, 보디빌더, 정치인이다.

배우가 되기 전 1960년대부터 70년대에 보디빌더로 활동했으며,. 병역은 무거운 물건을 들어나를 기회가 많다는 이유로 전차병으로 이행했으며 실제로도 전차 조종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다. 1968년 미국 이민 후 1983년 미국 시민이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본래 이중국적을 허락하지 않아 다른 국가로 귀화한 오스트리아 시민권자들은 국적을 포기해야 하지만, 슈와제너거는 미국 시민권 취득 전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특별 허가를 받아 오스트리아 국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보디빌더로 불리던 슈워제네거는 1973년 기네스북에 '지구상에서 상체근육이 가장 잘 발달된 사람'에 기록되기도했다. 어렸을 때 보디빌더 출신 영화 배우 레그 파크(Reg Park)가 헤라클레스 영화에 나오는 걸 보곤 그를 롤모델로 삼고 보디빌더를 시작했다고한다.

원래 슈워제네거는 레드 소냐를 촬영하면서 만난 브리짓 닐센과 연인 사이였으나 평소 슈워제네거는 미국 정계에 진출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던 탓에 브리짓 닐센과 결별하고 1986년 존 F. 케네디의 조카이자 NBC의 유명 언론인이자 기자인 민주당파 마리아 슈라이버와 9년 동안 연애 끝에 결혼했다.

슈워제네거는 사업가이자 정치인이기도 하다. 1989년 미국에서 가장 많은 상금이 주어지는 보디빌딩 대회 '아널드 클래식'을 설립하였다. 오래전부터 공화당 지지파였는데 1983년 미국 시민권 취득 이후 공화당에 입당하여 1990년 조지 H 부시로부터 '문화 체육관광부 의장'에 직접 임명되어 4년간의 임기를 지내며 미국 전국 51개주를 철통 호위를 받으며 직접 순회하기도했다. 1991년 1200만 달러 짜리 자가용 제트기를 받기도 했다. 1991년엔 실베스터 스탤론, 브루스 윌리스, 데미 무어 등과 'Planet Hollywood' 라는 체인 레스토랑을 설립했다. 1992년엔 자선단체 'After School All Stars' 설립했다.. 1997년 대형 심장 수술을 받기도 했다. 2003년10월 7일, 캘리포니아 주지사 보궐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와 당선되었다. 2006년 11월 7일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와 민주당 후보를 56% 대 39%로 누르고 재선되었다. 영화로 축적한 부(富) 때문에 주지사 임기중 매년 연봉인 17만5천달러를 받지 않고 모두 사회에 전면 기부하기도 했다.

정치성향은 중도우파 성향으로 여겨진다. 또한 녹색 보수주의자로 알려져 있는데, 캘리포니아 주지사 시절 민주당과 연대하여 친환경주의 정책들을 기용하기도 했고 2019년에는 스웨덴 출신 10대 환경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와 독대를 가지기도 했다.




#Article 98: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 (279 words)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自由文書使用許可書,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GNU FDL, GFDL, GNU FDL)는 일종의 자유문서를 위한 저작권 라이선스의 한 형태로서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SF, Free Software Foundation)에서 GNU의 프로젝트를 위해서 착안되었다. GFDL에 따라 만든 문서는 자유롭게 복사, 수정, 재배포가 가능하며, 2차 저작물 역시 GFDL을 따라야 한다. GFDL을 따르는 문서는 기본적으로 무료로 배포되지만, 대량으로 제작된 경우 유료로 판매될 수도 있다. 현재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에 따라 추진 중인 프로젝트들 가운데 가장 큰 프로젝트로 손꼽히고 있는 것이 바로 위키백과다. 위키백과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CCL)와 GNU 자유 문서(GFDL)의 2중 라이선스를 따른다.

사용 허가서는 소프트웨어의 문서와 다른 이와 유사한 지침서를 대상으로 한다. 이 허가서에 따르는 모든 문서의 복사 및 변경은 역시 이 사용 허가서의 규준에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복사 및 변경된 소프트웨어나 자료는 다시 변경되거나 배포 및 판매될 수 있다.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는 1999년 말 의견 수렴을 위한 초안이 발표되었으며, 검토와 수정을 거쳐 1.1 버전이 2000년 3월에, 1.2 버전이 2002년 11월에, 1.3 버전이 2008년 11월 3일에 공표되었다. 현재의 최종 버전은 1.3이다.

여기서의 '호환'이라는 의미는 다른 라이선스의 저작물을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를 사용하는 저작물과 섞어 쓸 수 있는지를 의미한다.

두 허가서가 비슷한 저작권 방침을 가지고 있지만 GFDL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라이선스와 호환되지 않는다. 하지만 1.3판에서는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를 사용하고 있는 특정 웹 사이트의 저작권을 CC-BY-SA로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추가하였다.

이 예외 조항은 다음의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한다면 GFDL 기반의 다중 저자 협력 프로젝트 사이트 (Massive Multiauthor Collaboration Site)에서 CC-BY-SA-3.0으로 변경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있다.

라이선스의 재허용을 허가하는 11장의 조항은 2009년 8월 1일 이후에는 효력이 상실된다.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는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와 호환되지 않는다.

아래 목록들 중 몇 가지는 GNU FDL과는 별개로 발전해 온 것들이다. 그리고 몇 가지는 GNU FDL의 결함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Article 99: GNU (266 words)


GNU(, 그누)는 운영 체제의 하나이자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모음집이다. GNU는 온전히 자유 소프트웨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대부분이 GNU 프로젝트의 GPL로 라이선스된다.

GNU는 GNU's Not Unix!(GNU는 유닉스가 아니다!)의 재귀 약자이며, 이렇게 선정된 이유는 GNU의 디자인이 유닉스 계열이지만 자유 소프트웨어인 점과 유닉스 코드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별을 두려는 것이다. GNU 프로젝트에는 운영 체제 커널인 GNU HURD가 들어있는데, 원래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SF)에서 거기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허드(Hurd) 커널이 아직 산업용으로 사용 가능한 상태가 아니라서, 그 대신 GNU가 아닌 커널(리눅스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을 GNU 소프트웨어와 함께 사용할 수 있다. 현재 GNU와 LINUX를 결합하여 너무나 많이 사용되므로, 이 조합을 짧게 'LINUX'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으며, GNU/LINUX라고 부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삽화에 나와있는 GNU는 생물의 종 이름이다.

프로젝트의 창립자 리처드 스톨먼은 GNU를 사회에 대한 기술적 수단'으로 보았다. 이와 관련해 Lawrence Lessig는 스톨먼의 책 《자유 소프트웨어, 자유 사회》 제2판에서 스톨먼은 소프트웨어의 사회적 관념과 어떻게 자유 소프트웨어가 공동체와 사회 정의를 조성할 수 있는지에 대해 썼다고 언급하였다.

오늘날 GNU의 안정판은 리눅스 커널이 포함된 GNU 패키지로 구성되어 동작하며 기능적인 유닉스 계열 시스템을 만들어준다. GNU 프로젝트는 이를 GNU/리눅스로 부르며, 제공되는 기능들은 다음과 같다:

GNU 자유 시스템 배포 가이드라인(GNU Free System Distribution Guidelines, GNU FSDG)은 GNU/리눅스 배포판과 같은 설치 가능한 시스템 배포판이 자유적인 특성이 있고 배포판 개발자들이 배포판들을 해당 특성에 맞출 수 있게 도와주는 시스템 배포 약속이다.

GNU 프로젝트가 GNU 운영 체제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했을때, 소프트웨어적인 면에서는 자유 소프트웨어의 결과물 카테고리인 에서 보이는 것과 하드웨어적인 면에서는 추구하고 있는 바가 운영 체제의 핵심인 커널 즉, GNU 허드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소프트웨어적인 면과 하드웨어적인 면을 통해 온전한 자유로운 운영 체제를 만드는 것이 GNU 프로젝트의 목표라고 한다면, GNU Hurd는 하드웨어를 통괄 제어하는 GNU 운영 체제의 커널이 되겠다.




#Article 100: 셀빅 (123 words)


셀빅(CellVic)은 대한민국에서 생산했던 PDA의 일종이며, jTel에서 개발하였다. 후일 코오롱이 인수한 후 Cellvic으로 개명되었다.

jTel은 팜 파일럿을 벤치마크하여 한국 내 환경에 맞게 자체 O/S를 제작해 한국 내 최초의 PDA OS로서 의의를 가졌다.

jTel은 1년에 4회의 애플리케이션 공모전을 통하여 애플리케이션 확보에 박차를 기했으며, 개인개발자에 대한 지원과 이에 힘입은 개인개발자들의 노력으로 다수의 애플리케이션을 확보하였다. 또한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활발한 토론과 애플리케이션 개발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대표적인 커뮤니티로는 CoolView(후에 상표등록 문제로 셀북으로 개명됨) 제작자인 연승훈씨가 운영하는 kcug.net(현재 운영중단)을 들 수 있다.

셀빅은 팜 파일럿에 비하여 대한민국 기업의 제품인만큼 한글 지원은 원활하였다. 세계 최소, 최경량 PDA인 CellVic i부터 휴대폰과 카메라 모듈탑재가 가능한 CellVic XG, 더 발전된 형태로서 스마트 폰 mycube까지 다양한 제품을 만들었으나, 코오롱으로 경영권이 넘어간 이후 PocketPC를 탑재한 스마트폰의 경쟁에서 뒤쳐지면서 끝내 2004년부터 더 이상 후속 지원을 중단하였다.




#Article 101: 밀러 실험 (354 words)


밀러 실험 혹은 밀러-유리 실험()은 초기 지구의 가상적인 환경을 실험실에서 만들어, 그 조건에서 화학진화(chemical evolution)가 일어나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실험이다. (오파린과 홀데인의 가설에 따르면, 원시 지구는 무기 화합물이 유기화합물로 합성되기 좋은 조건이었다고 한다.; 유리-밀러 실험은 이 가설을 검증하려 했다.) 이 실험은 생명의 기원에 관한 고전적인 실험으로 여겨지며, 1953년 시카고 대학의 스탠리 밀러와 해럴드 클레이턴 유리가 처음 실행했다.

실험에는 수증기(H2O), 메테인 (CH4), 암모니아 (NH3), 수소 (H2)가 사용된다. 화학물질들은 살균된 유리관과 플라스크로 이루어진 루프형의 실험기구 안에 밀봉된다. 실험기구 중에 플라스크 하나에는 물이 반쯤 채워져 있고, 다른 하나에는 한 쌍의 전극이 들어있다. 물은 가열하여 기화시키고, 수증기가 포함된 내부 공기중에 불꽃을 튀겨, 자연의 번개를 흉내낸다. 그리고, 다시 공기는 식혀져서 수증기는 물이 되고 처음 플라스크로 돌아가는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한다.

일주일 동안 계속 실험을 행한 결과, 유리와 밀러는 10 ~ 15%의 탄소가 유기물질로 합성되어 있는 것을 관찰하였다. 더욱이, 2%의 탄소는 살아있는 세포의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중에 몇 종류의 형태라는 결과도 얻었다.
결론적으로 밀러는 원시대기의 조성을 기초하여 원시지구의 모형을 만들고 결과 반응을 조사하는 것이 연구의 테마였다.

생성된 분자들은 완전한 살아있는 생화학적 시스템을 이루기에는 상대적으로 모자란 단순한 유기물질이었다. 그러나, 실험은 이미 있는 생명체를 가정하지 않고, 자연적인 과정만으로 생명체를 이루는 기본 요소들이 생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립시켰다.

스탠리 밀러는 이후에 원시대기에 관한 연구를 좀더 진행하여, 기체 크로마토그래피를 이용하였으며, 사망시까지 연구에 손을 놓지 않았다. 밀러가 사망한 뒤 그의 제자이자 오랜 동료였던 제프리 베다 교수는 밀러의 유품에서 1950년대 실험에서 얻은 물질이 들어있는 유리병이 담긴 박스를 발견했다. 최신 분석 장비로 이 물질의 조성을 분석한 결과 당시 밀러가 확인했던 것보다 더 많은 유기분자(아미노산 22종과 아민 5종)가 들어있음을 확인해 2008년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2008년, 제프리 베다 교수는 화산 분출의 구조와 스파크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더 많은 아미노산이 발견됨을 보여주었다. 이 실험에는 고출력의 액체 크로마토그래피와 질량분석기등이 이용되었다.그 결과 22가지 아미노산, 5 종류의 아민을 비롯한 수많은 수산화물이 생성되었다.
이 실험은 2010년에 황화수소 스파크 실험으로 재현되었으며, 발견된 아미노산은 아래에 표기한다.

하지만 이 주장 역시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박된다.

창조설자들은 밀러는 원시 대기환경을 실험관에 그대로 옮긴 후 번개와 같은 방전을 재현하려 했으나 밀러의 시험 장치와 실제 번개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번개와 같은 방전을 재현한 이유는 아미노산 합성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함이다. 결과로 보면, 이는 번개보다 에너지가 적지만 그보다 적은 에너지로도 충분히 아미노산이 합성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Article 102: 물 (1547 words)


물()은 산소와 수소가 결합된 것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화학 물질이다. 화학식 를 가지며 표준 온도 압력(STAP : 섭씨 25℃ 1바)에서 무색 투명하고, 무취무미(無臭無味)하다. 물은 지구 위의 거의 모든 곳에서 발견되며, 지표면의 70% 정도를 덮고 있다. 물은 가장 보편적인 용매로 보통 액체 상태의 물을 가리킨다. 고체 상태인 것을 얼음, 기체 상태인 것을 수증기라고 부른다. 흔히 '김'(Steam)이라고 부르는 형태를 수증기와 혼동하는 경우도 있으나, 김은 엄연히 액체 상태의 작은 물방울들이 올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수증기와는 다르다.

물 분자는 두 개의 수소 원자와, 하나의 산소 원자가 공유결합(결합 길이 0.096 nm)을 한 H-O-H의 굽은형의 물질이다. 물 분자는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가 각각 전자를 내놓아 전자 쌍을 만들고, 이 전자쌍을 함께 나누어 가짐(공유)으로써 결합되어 있다. 화학식은 H2O이다.

물은 자연적으로 세 가지 물질의 상태로 나타나며 지구상에서 여러 형태를 지닌다. 수증기와 구름은 하늘에 있으며 바닷물과 빙산은 극지 바다에 있고 빙하와 강은 산에 있으며 대수층의 물은 땅속에 있다.

물은 화학적으로 많은 성질을 갖는다. 대표적인 성질은 공유결합, 산과 염기의 생성, 그리고 금속과의 산화(결합 및 부식)이다.

 물에서의 수소결합(평균 결합 길이: 0.197 nm)은 전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상대적으로 약한 수소 원자가 약한 세기의 양이온의 성질을 띠고 전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강한 산소원자가 강한 세기의 음이온의 성질을 띰으로써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물은 극성 공유결합 물질이다. 또한, 중심 원자로 작용하는 수소 원자의 비공유 전자쌍과 산소와의 결합 고리인 수소결합(공유 전자쌍)의 작용력을 비교할 때 쌍극자 모멘트 값이 0이 아니므로 극성 분자로 분류된다.

한편 물은 높은 비열을 갖는데 이 또한 수소결합에 그 원인이 있다. 물을 가열할 때 쓰이는 에너지의 일부는 수소결합을 끊는 데 쓰이고 나머지의 에너지가 물의 온도를 높이는데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물이 다른 분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정한 열에너지의 첨가로 온도를 올리기 어려운 물질이 되는 것이다. 수소결합으로 인해 물은 분자량이 비슷한 다른 물질에 비해 녹는점, 끓는점, 융해열, 기화열이 크다. 물의 비열과 기화열이 크다는 점은 생물체의 수분과 체온이 일정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물보다 얼음의 밀도가 작은 것은 수소결합에 의한 육각형 구조와 관련된다. 또한 표면장력과 모세관 현상도 수소결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물은 다른 분자와 달리 그 점성에 비교해 표면장력이 큰데, 표면에 있는 물 분자가 공기 중으로 끌려가지 않고 내부에 있는 물 분자의 수소결합력을 받기 때문이다. 모세관 현상은 수소나 산소원자를 포함하지 않은 물질(예: 금속)에서는 잘 안 나타나는데 그 원인은 물이 모세관 현상을 일으킬 때 그 관을 이루는 분자와 수소결합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유리관을 이루는 유리는 SiO2이므로 수소결합력이 작용한다.)

물은 보통 금속류를 녹여 염기를 만들고 비금속류를 녹여 산을 만든다. 산과 염기의 기준은 양이온으로 하전된 수소 이온과 음이온으로 하전된 수산화이온이며, 수소이온이 많으면 산성이고 수산화이온이 많으면 염기성이며, 두 이온의 값이 0에 가까우면 중성이 된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염산, 질산, 황산 등이 있으며 이 3가지의 산은 모두 강한 산이다. 대표적인 알칼리(염기)로는 수산화나트륨, 수산화 칼륨, 암모니아수 등이 있으며 3가지 모두 강한 염기이다. 한편 산과 염기는 수소이온이나 수산화이온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전해질이고, 이온 물질을 갖는 모든 물이 전해질이다.

물은 산소와 함께 금속을 잘 부식시키는 성질이 있다. 철의 경우 반응성이 크나 직접적으로는 산소와 잘 반응하지 않으며 아주 천천히 산화철을 생성한다. 하지만 물이 묻은 철은 상황이 다른데, 그 원인은 물이 철을 이온화하면서 전자를 내놓고 이 전자를 받은 산소원자가 양이온으로 하전된 철 분자와 결합을 하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화는 물기가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아 결국 속까지 모두 산화시키고 만다. 금속의 산화를 막기 위해 기름칠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기름과 물 사이의 반발력을 이용한 것이다.

한편 찬물에서 급격히 반응하는 금속은 포타슘, 칼슘, 소듐 등이 있고, 뜨거운 물에서 급격히 반응하는 금속은 마그네슘, 알루미늄, 아연 등이 있다.

수리학에서 1기압 하에서 물의 단위 중량은 보통 ω나 γw로 쓰며, 1000kg중/m³(1t중/m³=1g중/cm³)으로 나타낸다. 지구상에서 물의 단위중량을 다룰 때는 편의상 '중'(force)을 빼고 1000kg/m³(1t/m³=1g/cm³)으로 쓴다.

물은 수많은 물질을 녹일 수 있어서 맛과 냄새가 다양하다. 사람과 다른 짐승들은 너무 염도가 높거나 부패한 물을 피하기 위하여 마실 수 있는지를 평가할 수 있는 진보된 감각을 갖고 있다. 샘이나 광천수로 광고하는 맛은 그 안에 녹아있는 광물에서 비롯한 것이다. 순수 H2O는 무취무미하다. 물의 색깔과 냄새는 식수로서 일차적인 주요한 판단 기준으로 사용될 수 있다.

물은 생명체 활동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지구 이외의 천체에서 물이 발견되면 항상 관심을 받게 된다.

수증기는 다음과 같이 존재한다.

액체로 된 물은 다음과 같이 존재한다.

얼음은 다음과 같이 존재한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액체와 기체, 고체로서의 물은 지구 위에 사는 생물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지구는 태양계의 생명체 거주가능 영역에 위치하여 있다. 태양으로부터 살짝 더 가까이 있거나 살짝 더 멀리 있었더라면 (약 5%, 곧 800만 킬로미터 정도) 기체, 고체, 액체라는 세 가지 형태가 동시에 존재할 가능성이 훨씬 적다.

지구의 중력은 물이 대기를 지탱할 수 있게 도와 준다. 대기 속 수증기와 이산화탄소는 온도에 대한 완충 작용(온실 효과)을 제공하므로 표면 온도를 상대적으로 일정하게 유지시켜 준다. 지구가 더 작았더라면 대기가 더 얇아져 온도가 극단으로 치우칠 것이므로 화성과 같이 극관을 제외한 물의 형성을 막는다.

지구의 표면 온도는 들어오는 태양 복사(일사) 수준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한다. 이는 온실 기체와 표면 및 대기 반사가 동반되면서 지구 온도가 유동적인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질 시대를 거치면서 상대적으로 일정한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이를 가이아 이론이라고 부른다.

한 행성 위의 물의 상태는 주위 압력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는 한 행성의 중력이 결정한다. 어느 행성의 용적이 충분히 크다면 그곳 위의 물은 온도가 높아도 고체 상태를 유지한다. 그 까닭은 중력이 높은 압력을 만들어내기 때문인데 글리제 436 b와 글리제 1214 b 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물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론이 존재한다.

수문학은 지구를 지나는 물의 이동, 물의 분포, 수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물의 분포를 연구하는 것을 수로학이라고 한다. 물의 분포와 이동에서 지하수의 경우 수문지질학으로, 빙하의 경우 빙하학으로, 내륙수의 경우 육수학, 바다의 경우 해양학으로 부른다. 수문학을 동반한 생태학적 과정을 생태수문학이라고 한다.

한 행성의 표면 위 아래와 공중에 떠 있는 총체적인 물을 수권이라고 부른다. 지구의 물은 대체적으로 1,360,000,000 km3 (326,000,000 mi3)이다. 물은 지구에서 대부분 바다에 액체 형태로 존재한다. 인공적으로는 수소와 산소를 혼합한 뒤 방전을 일으켜서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물의 분포는 바닷물 (97.33%), 빙하 (2.04%), 지하수 (0.61%), 호수와 강 (0.01%) 그리고 기타 (0.01%) 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수와 민물은 수자원으로서 인간에게 실질적으로나 잠재적으로 유용하다.

물의 순환은 수권 안의 물이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대기, 토양의 물, 지표수, 지하수, 식물 사이에서 물은 이동한다.

물은 물의 순환 속에서 이러한 지역을 돌며 끊임없이 움직이는데 다음의 과정을 이룬다.

표면 유출한 일부 물은 이를테면 호수와 같이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갇히게 된다. 높은 고도에서 겨울 동안 극북과 극남에서 눈은 만년설, 설괴빙원, 빙하 안에 모인다. 물은 또 땅에 스며들어 대수층으로 이동한다. 그 뒤 지하수는 샘이나 온천, 간헐천 표면으로 거슬러 흘러간다. 또, 지하수는 우물로 말미암아 인공적으로 뽑아낼 수 있다. 이러한 물은 깨끗한 민물이며 사람과 길짐승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만큼 중요하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이러한 민물은 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

조석은 달과 태양이 대양에 미치는 기조력으로 말미암아 지구의 대양 표면이 오르내리는 일을 가리킨다. 조석은 바다와 삼각강 수체의 깊이 변화를 일으키며 조류를 만들어낸다. 특정 장소에서 바뀌는 이러한 조석은 지구 회전의 영향과 지역적인 수심측량에 따라, 지구 기준에서 태양과 달의 위치가 바뀌어 일어난다.

바닷물은 평균 3.5%의 염분에 적은 양의 기타 물질을 포함한다. 바닷물의 물리적 속성은 민물과 비교하여 몇 가지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더 낮은 온도 (-1.9 °C)에서 얼고, 온도를 어는 점으로 낮추면 밀도가 올라간다. 일반적인 바다의 염도는 발트 해의 0.7% 정도에서 비롯하여 홍해, 페르시아해의 4.0%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물은 다른 물질과 구별되는 점으로 생명의 증식에 없어서는 안 되는 수많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유기 화합물이 궁극적으로 복제를 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알려진 모든 형태의 생명체들은 물에 의존한다. 물은 체내의 수많은 용질이 녹이는 용매일뿐 아니라 또 체내의 물질대사에 필수적인 부분이므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물은 광합성과 호흡에 필수적이다. 광합성을 하는 세포는 태양 에너지를 이용하여 물의 수소를 산소에서 분리시킨다. 수소는 기체나 물에서 흡수한 CO2와 결합하여 포도당을 형성하고 산소를 내뱉는다. 살아있는 모든 세포들은 이러한 재료를 이용하고, 수소와 산소를 산화시켜 태양 에너지를 포획하며, 그 과정 가운데 물과 CO2를 다시 형성한다. (세포 호흡)

지표의 물에는 생물로 가득하다. 생물의 최초의 형태는 물에서 발생하였다. 거의 모든 물고기는 예외 없이 물 속에서 살며 돌고래, 고래와 같은 수많은 종류의 해양 포유류가 있다. 양서류와 같은 특정한 종류의 짐승들은 물과 땅을 오가며 산다. 켈프, 말과 같은 식물들은 물에서 자라며 일부 물속 생태계를 위한 기반으로 자리잡혀 있다. 플랑크톤은 일반적으로 바다 먹이 사슬의 토대가 된다.

바다의 척추동물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산소를 보유하여야 하며 보유 방법은 다양하다. 물고기는 허파가 아닌 아가미를 가지고 있으나 폐어와 같은 어떠한 종류의 물고기들은 아가미와 허파 둘 다 지니고 있다. 돌고래, 고래, 수달, 물개와 같은 해양 포유류들은 공기를 마시기 위하여 주기적으로 지표로 올라와야 한다. 일부 양서류들은 피부를 통하여 산소를 마실 수 있다.

문명은 역사적으로 강과 주된 물길을 중심으로 번성하여 왔다. 이른바 문명의 요람이라 불리는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을 끼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 민족은 나일 강에 온전히 의지하였다. 로테르담, 런던, 몬트리올, 파리, 뉴욕, 부에노스아이레스, 상하이, 도쿄, 시카고, 홍콩과 같은 거대 도시들은 물에 다가가기 쉬운 곳에 있고 결과적으로 무역이 팽창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도 이와 같은 까닭으로 번성하였다. 물이 더 부족한 북아프리카와 중동과 같은 지역에서 마실 물을 구하는 것은 인간 발전에 주된 요인이 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사람이 마실 수 있는 물은 음료수라고 한다. 마시기에 알맞지 않은 물은 걸러내거나 정제하는 등의 다양한 물 처리로 말미암아 마실 물로 바꿀 수 있다. 마실 수는 없으나 헤엄을 치거나 몸을 씻는 데 사람에게 해가 없는 물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를 안전한 물로 부른다. 개발도상국에서 모든 폐수의 90%가 정화 및 처리되지 않은 채로 지역 강과 개울로 흘러간다.

또한 물의 섭취는 동물의 기초대사량을 증가시켜 체중감량과의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보인다.

농업에서 물은 관개에 이용하며 이는 충분한 식량을 생산하는 주된 요소로 자리잡혀 있다. 관개는 몇몇 개발도상국에서 최대 90% 물을 차지하며 선진국에서도 중요한 부분으로 잡혀 있다. (미국의 경우 민물의 30%가 관개에 이용된다)

사람의 몸은 체형에 따라 최저 55%에서 최고 95%의 물을 지닌다. 몸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려면 날마다 1~5리터의 물을 마시어야 탈수 현상을 막을 수 있다. 섭취하여야 하는 정확한 물의 양은 활동 수준, 온도, 습도 등의 요인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대부분은 물을 직접 마시는 것보다 음식이나 음료수를 통하여 소화시켜 물을 흡수한다. 건강한 사람이 물을 얼만큼 섭취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명백한 답은 없으나 날마다 6~8잔의 물 (거의 2리터)을 마시는 것이 최소한의 적절한 양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옹호자들의 생각이다.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는 식수에 적합한 최대의 민물 원천이다. 이곳은 소금과 칼슘이 매우 적으므로 상당히 깨끗하다.




#Article 103: 외계어 (통신언어) (144 words)


외계어(外界語)는 통신언어의 일종으로 컴퓨터 문서상에서 쓰이는 한국어의 변칙적인 표기를 통칭하는 용어이다. 2000년대 초 정보화의 발달과 PC통신과 인터넷의 보급화로 통신언어가 발달하였고, 통신언어의 한글 변용 정도가 심하여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있는 경우를 외계인들이 쓰는 언어에 빗대어 외계어라 한다. 주로 청소년 층에서 자주 쓰였으며, 일본의 갸루 문자와 유사하다.

통신언어의 일종인 외계어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보통, 어미에서 -ㅗ와 -ㅛ가 -ㅓ와 -ㅕ로 변화되는 등의 통신체와 병행해서 쓰인다.

이모티콘과 닿소리만으로 이루어진 표현(예: ㅇㅋ, ㅋㅋㅋ)과 인터넷에서 쓰이는 유행어(예: 즐) 등의 표현을 통신에서 쓰는 사람은 위의 것만을 외계어로 여긴다. 하지만 유행어와 닿소리 표현, 이모티콘까지 통틀어서 외계어로 보는 시각도 있다.

외계어를 일부에서는 ‘언어 파괴’라고 비판하지만 이를 과민 반응이라고 생각하는 시각도 있다. 청소년층 안에서도 외계어를 비판하는 사람이 있지만, 비판하는 대상인 ‘외계어’의 범주의 차이는 다양하다. 외계어는 2000년대 초반에 주로 사용되었지만 최근에는 그리 많이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인터넷상에서 외계어에 대한 논의도 많이 줄어들었다.

한편 미술가나 글꼴 디자이너들도 한글이 아닌 문자로 한글을 표현하는 실험을 한다.




#Article 104: 콜라츠 추측 (220 words)


콜라츠 추측(Collatz conjecture)은 1937년에 처음으로 이 추측을 제기한 의 이름을 딴 것으로 3n+1 추측, 울람 추측, 혹은 헤일스톤(우박) 수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콜라츠 추측은 임의의 자연수가 다음 조작을 거쳐 항상 1이 된다는 추측이다.

예를 들어, 6 에서 시작한다면, 차례로 6, 3, 10, 5, 16, 8, 4, 2, 1 이 된다.

또, 27에서 시작하면 무려 111번을 거쳐야 1이 된다. 77번째에 이르면 9232를 정점으로 도달하다가 급격히 감소하여 34단계를 더 지나면 1이 된다.

이 추측은 컴퓨터로 268Barina, D. Convergence verification of the Collatz problem. J Supercomput (2020). 까지 모두 성립함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아직 모든 자연수에 대한 증명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문제의 해결에 500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던 에르되시 팔은 수학은 아직 이런 문제를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말을 남겼다.

다음과 같은 통계적인 설명을 생각하면 이 추측은 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콜라츠 추측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콜라츠 추측의 함수표현 공식

콜라츠 추측 공식의 합동산술(modular arithmetic) 표현식

콜라츠 그래프에서 특정 짝수는 홀수에대한 의 수면서 동시에 짝수에 대한 수가 되는 분기점이 된다.

만약 콜라츠 추측이 성립한다면, 이것은 동시에 을 제외한 모든 자연수가 과 연결되기 위한 마지막 분기점이다.

따라서, 홀수에 대한 의 수 이면서 동시에 짝수에 대한 수가 되는 분기점 짝수 은  에서 의 수이다.

콜라츠 그래프의 분기점 짝수 은

규칙적으로 출현한다.

최초 출현 수열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콜라츠 그래프 분기점 수열은 6씩 증가하는 수열이다.

또한 십진수 30을 주기로 5개의 자리수 이 순환적으로 출현한다.




#Article 105: 전자 게시판 (147 words)


전자 게시판(電子揭示板, bulletin board system, BBS, 또는 computer Bulletin Board Service, CBBS)은 일반적으로 대학의 게시판 또는 중세 도시의 지역 사회 광고판을 컴퓨터 네트워크에 적용한 시스템으로, 보통 특정 전자게시판 소프트웨어를 가동하는 컴퓨터 시스템을 말한다. 사용자들은 전화선과 터미널 프로그램을 써서 시스템에 접속하고 소프트웨어를 업로드하거나 다운로드하고 게임, 뉴스, 메시지 교환 등을 할 수 있다. 전성기인 1980년대 처음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수많은 BBS들은 아마추어 시삽들이 여가 시간에 운영하는 무료 서비스였으며 몇몇 BBS들은 사용료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BBS는 여러 면에서 현재의 월드 와이드 웹과 인터넷의 다른 프로토콜들의 전신이기도 하다. BBS는 친교 목적으로 많이 쓰였으며 논문을 발표하거나 자유 프로그램이 퍼지는 경로이며 게임과 기타 다른 응용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인터넷이 널리 퍼지면서 BBS는 인터넷 프로토콜 또는 웹에 기반한 시스템으로 바뀌어갔다.

공개 게시판의 전신은 1973년 8월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서 시작된 커뮤니티 메모리(Community Memory)였다. 유용한 마이크로컴퓨터가 당시 존재하지 않았고 모뎀은 비싸면서도 속도가 느렸다. 이러한 까닭에 커뮤니티 메모리는 메인프레임 컴퓨터에서 구동되었으며 여러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 주변 지역들에 위치한 터미널들을 통해 접근되었다.




#Article 106: 정보 (514 words)


정보(情報, )는 컴퓨터공학에서 특정 목적을 위하여 광(光) 또는 전자적 방식으로 처리되어 부호, 문자, 음성, 음향 및 영상 등을 표현하는 모든 종류의 자료 또는 지식을 말한다.

한편 정보는 일반 용어에서 전문 용어까지 다양한 뜻으로 사용된다. 이를테면, 언어, 화폐, 법률, 자연환경 속의 빛이나 소리, 온도나 신경, 호르몬 등의 생체 신호등 정보 원천으로부터 비롯한 모든 것을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더 넓은 의미로 정보의 원천을 다루기위해 정보가 다루어지는 상황도 정보와 연관지을수있다.

요즘에는 컴퓨터의 정보 처리를 기반으로 한 정보(데이터)가 많이 대두된다. 정보의 원래 뜻에 따라, 정보와 자료(데이터)를 구별하고, 정보를 “뜻을 가지는 자료”라고 생각하는 의견도 있지만, 이러한 분야에서는 전체적으로 정보의 뜻을 가지고 문제 삼는 경우는 별로 없음므로, 특별히 정보와 자료는 구별하지 않는다. 구분하자면, 데이터를 모아 둔 것이 자료라면 자료를 특정한 목적의 의사결정을 위해 가공한 형태를 정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훌륭한 정보는 목적 적합성과 신뢰성 및 적시성을 유지해야 한다. 적시성이 매우 중요한 정보를 첩보로 따로 분류하기도 하며 가공을 통해 비교적 장기간 활용이 가능한 정보를 지식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정보는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그 속도가 더욱 빠르게 진행된다. 개인이 하나의 정보를 선택하게 되면 변화에 의해서 불확실성이 커지게 되고, 정보의 가치가 적어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선택된 정보보다 선택되지 않은 정보가 더 가치가 있는 것으로 불안감을 갖게 한다. 맥도너(A.M.McDonough)는 '정보란 사실 내지 자료에 지적인 처리를 가하여 얻어진 지식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정보는 자료에 특정 의미가 주어진 것으로서 직접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한다. 모든 정보는 자료이나, 모든 자료는 모든 정보라고 할 수 없다. 포레스터(J.W.Forrester)는 '경영은 정보를 행동으로 연결시키는 과정(Process)이다.'고 하였다. 이는 경영상의 의사결정에 정보가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모든 자료가 정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대적이기 때문에 모든 자료는 정보의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 정보는 가치지향적이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고, 어느 정도의 이익을 제공할 수 있는 자료이어야 정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결국 정보란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정리해 놓은 자료의 집합이며, 정보가 되기 위해서는 이용자, 즉 어떤 목적을 갖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자료가 처리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보는 이용자를 위하여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재배열, 요약, 삭제하는 행위를 거쳐야 한다.

프랑스어의 renseignement(안내, 정보)를 번역한 말로 사용된 것이 처음이다. 중국에서는 정보를 신식(信息)이라고 하는데 이 말에는 첩보라는 뜻도 있다.

정보는 상대방에게 사건을 알릴 때 전달되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아들이 아버지에게 집에 불이 났는지 아닌지 알리는 것도 정보 전달의 한 예이다. 전달 형태가 불이 났는지 또는 안 났는지의 두 가지 방법만 존재한다면 1 비트로 전달이 가능하다. 동전도 마찬가지다. 던진 동전이 앞면인지 뒷면인지를 알려 주면 되기 때문에 1 비트로 표현된다. 16가지의 경우가 나오는 회전 룰렛을 사용하여 경기를 한다면, 그 결과를 위해 4 비트를 할당해야 한다. 앞서 말한 3가지 사건에서 사건 요소인 는 불이 났는지, 앞면이 d던져졌는지, 회전 룰렛에서 1번 칸이 선택되었는지에 해당한다. 각각의 확률을 생각해 보면, 각 사건의 경우의 수가 가지는 확률인 이 동일하다고 가정하면 순서대로 1/2, 1/2 그리고 1/16이 된다. 이때 비트 단위 정보량은

와 같이 구해지고 각각 값은 1, 1, 4가 된다. 물론 불이 날 확률이 불이 나지 않을 확률보다 높은 경우가 있다. 이 경우 불이 나지 않을 확률  이 되어, 이를 나타내는 정보량도 이 된다.

대한민국의 전자거래기본법에 따르면, “전자문서”라 함은 정보처리시스템에 의하여 전자적 형태로 작성, 송신ㆍ수신 또는 저장된 정보를 말한다(전자거래기본법 제2조 제1호).

신용정보는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금융거래 등 상거래에 있어서 거래 상대방에 대한 식별·신용도·신용거래능력 등의 판단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정보로서 대통령이 정하는 정보를 말한다. (동법 제2조 제1호)




#Article 107: 채팅 (145 words)


채팅()은 네트워크에서 두 명 이상의 사용자가 실시간으로 글을 주고받는 행동을 말한다. 채팅은 본래 PC통신 때부터 즐겨 쓰던 방법으로, 대화방으로 사용자들이 들어와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과 웹캠의 발달로 음성 채팅 및 화상 채팅 등의 새로운 기술이 널리 퍼졌다. 또한, 대화방을 사용하지 않는 간편한 인스턴트 메신저도 널리 쓰인다.

사람들이 직접 만나서 나누는 대화와 같이 인터넷이나 온라인서비스에 접속한 이용자끼리 서로 메시지를 입력해서 주고받는데, 이런 개인적인 대화를 위한 통신망을 대화방이라고 부른다. 온라인 서비스, 즉 PC통신으로 하는 채팅은 주로 국내에서 한정되지만 인터넷으로 하는 채팅은 전 세계 어디에 있는 사람이라도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으면 온라인으로 대화가 가능하다. 인터넷에는 대화방 채널이 많이 있다. 어떤 대화방은 어린이끼리만 있고, 또 어떤 곳은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끼리 이야기를 한다. 우리말을 사용하는 곳도 프랑스어, 일본어 등을 사용하는 곳도 있지만 대분분의 대화방은 영어를 사용한다.

최초의 온라인 채팅 시스템은 1973년 일리노이 대학교의 플라토 시스템에서 Doug Brown과 David R. Woolley에 의해 개발되었다.

여러 개의 프로토콜을 지원하는 채팅 프로그램:




#Article 108: 캠 (424 words)


캠(cam)은 기계공학에서 동력 전달 장치의 하나로 회전 운동을 직선 운동으로 또는 그 반대로 바꾸는 철덩어리이다. 원동축의 정속(定速) 회전에 대응하여 종동 링크를 복잡한 경과를 더듬게 왕복직선 운동과 왕복 각운동을 부여하는 데는, 운동의 성질에 응해서 각종 기구가 쓰인다. 그중에서도 임의의 경과를 더듬는 운동을 가장 재빠르게 행하게 하는 데에는 캠장치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 평면 캠과 확동 캠, 입체 캠으로 분류할 수 있다.

캠은 회전운동에서 왕복운동으로 변화시키는 철덩어리로 볼 수 있다. 널리 알려진 예는 자동차의 캠축으로, 엔진의 회전 운동을 실린더의 흡배기 밸브 작동에 필요한 왕복운동으로 변환한다.

순/역방향 운동이나 원형운동을 왕복운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크랭크라는 철덩어리에 의해서 움직일 수 있다. 휠의 동작에 필요한 회전운동을 전환시키고, 피스톤의 왕복운동을 취하는 자동차의 크랭크축은 그 예이다.

캠은 또한 저장된 정보와 도구전송 정보를 볼 수 있게 한다. 스크류 머신의 다양한 도구와 척의 움직임, 또는 뮤직 박스의 노트를 지시하는 'CAM-DRUM'은 그 예이다. 캠에 의해 전송되고 저장된 정보는 ‘어떤 행동이 일어나고, 언제쯤 일어날까?’ 라는 질문의 답이 될 수 있다. (이 주제를 설명하기에는, 비록 뮤직 박스 캠이 더 나은 예 일지라도, 자동차 캠 샤프트에도 본질적으로 이 물음을 답할 수 있다.)

어떤 캠은 축에 대해 회전하는 캠으로 만들어진 롤러 follower의 변화가 반영되는 변위 다이어그램에 의해서 특별할 수 있다. 이 다이어그램은 반경변위의 그 위치에서 각도 위치와 관련된다. 몇 가지 주요 용어는 플레이트 캠의 구조와 연관성이 있다.
변위 다이어그램은 전통적으로 음수가 아닌 값을 그래프로 표시된다.

캠장치는 인도할 운동에 상응한 윤곽을 지닌 회전체(캠)을 일정한 속도로 돌리고, 둥글거나 또는 평면의 단면을 가진 종동절(從動節)을 그것에 대해 밀어붙임으로써, 필요로 하는 운동을 하게끔 한 것이다. 하트캠은 판(板)캠의 일종으로, 종동절의 끄트머리가 나이프에지로 되어 있으며, 그것이 캠의 회전 중심을 통과하는 직선상으로 왕복운동 하도록 되어 있다. 이는 가장 기초적인 캠장치이다. 캠은 각종 자동 기계류에 많이 쓰이고 있는데, 엔진 등의 연료판(瓣)이나 흡배기 밸브의 작동을 제어하는 데에도 쓰이고 있다.

배력장치(倍力裝置)는 원동절(原動節)의 변위에 비교해서, 어떤 종동절의 변위가 매우 작을 경우는, 그 종동절에 현저하게 큰 힘을 내게 할 수 있다.

엄밀히 직선을 그리는 링크장치는, 포슬리에 기구(機構) 외에 여러 종류가 있지만, 미끄럼기구를 갖고 있지 않는 한 기구가 복잡하게 되므로, 기구를 간단하게 해서 근사적(近似的)인 직선운동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기에도 여러 종류의 기구가 있는 데 〔그림〕－39는 그 일종으로서, 점 P가 그리는 렘니스케이트곡선(雙葉曲線)의 일부가 직선을 거의 닮고 있다는 것을 이용하여, 선박용 하역크레인으로 짐을 거의 수평으로 이동하도록 한 기구이다.

구면링크장치에서는, 축선(軸線)이 이루는 중심각이 평면링크장치의 링크의 길이에 상당하며, 중심각이 90°인 것은 평면링크장치의 슬라이더 즉 미끄럼자(子)에 상당한다. 구면링크장치에서도 4절(節)의 것이 기초적인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실제로 쓰이고 있는 것은 중심각이 90°인 링크 3개를 지니는 구면양(兩)미끄럼자 크랭크 연쇄로부터 고정링크의 교체로서 얻어지는 회전미끄럼자 기구와 요동(搖動)미끄럼자(子)기구 등이 주이다. 예전에 기차의 천장에 설치된 천장선풍기의 목흔들기 기구도 이의 응용이다.

초기 캠은 기원전 3 세기부터 헬레니즘 문명의 수력식 자동화기기에 내장되었다. 후에 캠축에 캠을 사용하는 방식이 터키 발명가 알-자자리에 의해 채용되었다. 유럽기계에는 캠 및 캠축이 14세기부터 나타났다.




#Article 109: PC통신 (670 words)


PC통신(피시통신, )은 개인용 컴퓨터(PC)를 다른 컴퓨터와 통신 회선으로 연결하여 자료를 주고 받는 것을 말한다. 전화망을 사용하여 문자, 숫자, 영상, 음성 데이터 등을 전송한다. 개인용 컴퓨터끼리 서로 연결한 통신 형태도 포함되지만, 보통은 정보 서비스 제공을 위한 호스트 컴퓨터와 통신 장비를 설치하고 여기에 가입한 사람들이 개인용 컴퓨터로 접속하여 이용하는 형태의 전화 회선을 통한 통신 네트워크 서비스를 가리킨다. 이때 통신 회선은 주로 전화 모뎀을 통한 전화 회선(PSTN)이 사용되지만 ISDN 등의 다른 회선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개인용 컴퓨터가 보편화되면서 1990년대에 게시판과 대화방, 그리고 자료실을 제공하는 PC통신 서비스 회사가 설립되었다.

대한민국의 PC통신은 천리안과 하이텔 서비스로 시작되었다.

먼저 천리안은 1984년 5월에 (주)한국데이터통신의 전자사서함 서비스로 출발하여, 1985년 10월 생활정보DB, 1986년 9월 화상정보서비스 '천리안', 1987년 4월 한글전자사서함 '한-메일(H-mail)', 1988년 5월 문자정보서비스 '천리안 II'로 이어져, 1990년 1월에는 'PC-Serve'가 개통되고 1992년 12월 '천리안 II'와 'PC-Serve'가 통합하여 천리안이 되었다.

한편 하이텔은 1986년 11월 1일 한국경제신문사에서 '한국경제 프레스텔(Korea Economic Prestel)'을 개통하여 1987년 4월 15일 '한경 KETEL'로 변경, 1987년 5월 1일에는 한경KETEL 영문 정보 서비스를 제공하였고, 1989년 11월 '케텔(KETEL)' 서비스를 시작한 뒤 1991년 12월 한국통신과 합작으로 한국PC통신(주)를 설립하면서 1992년 3월 서비스를 코텔(KORTEL)로 변경하고 같은 해 7월에 명칭을 하이텔(HiTEL)로 변경하였다.

케텔 당시 한국경제신문사에서는 컴퓨터 통신을 홍보하고 회원들을 확보하기 위해 가입자들 중 추첨을 통해서 1200 BPS모뎀을 나누어 주었다. 당시 모뎀은 상당히 비싸서 10~20만원의 고가 장비였으며, 구입하여 집에 직접 와서 설치도 해주었다. 1994년 나우누리, 1996년 유니텔이 영업을 시작하면서 PC통신 서비스는 다양해졌으며, 접속프로그램인 터미널 에뮬레이터도 큰사람 정보통신의 이야기 위주에서 새롬 데이타맨, 특정 PC통신회사의 전용 에뮬레이터 등 다양하게 개발되었다. 또한, PC통신은 MUD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즉, PC통신을 통하여 현재의 온라인 게임 및 커뮤니티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VT모드의 PC통신은 일부 기존 업체에서는 서비스가 유지되고는 있으나, 인터넷의 발달로 지금은 PC통신 사용자가 드물다. 하이텔 서비스는 2007년 2월 28일에 완전히 종료되었다.

VT모드 텍스트 기반 서비스는 다음과 같다.

그 밖에 민간주도의 지역 기반 PC통신망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은 대형 서비스 이외에도 특정 분야 또는 지역에 특화된 통신망도 존재하였고, 소규모 기업 및 단체, 심지어 개인이 운영하는 사설 BBS도 상당수 존재하였다.

사설 BBS는 개인 또는 단체가 운영하는 주로 비영리 목적의 소규모 PC통신 서비스였다. 자발적으로 발생한 이러한 사설 BBS들은 상용 PC통신 서비스가 대중화되기 전까지 PC통신의 개척자 역할을 하였다.

대한민국 사설 BBS는 1988년 3월 이주희가 개설한 'The FIRST'과 1988년 5월 바이트전자가 개설하고 최승철이 운영한 '바이트 네트(Byte-Net)'가 효시로 알려져 있다. 곧이어 대구에서XENIX 환경에서 4개의 접속노드를 갖추어 다중접속자를 지원하는 '달구벌'이 개설되고, 이듬해에는 '엠팔(EMPal) BBS'가 개설되는데, 이 두개의 BBS는 당시 한국데이터통신에서 제공한 전자사서함 'H-mail'의 사용자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졌다. 또 와일드캣과 8개의 전화 회선을 이용하여 운영하는 '네트워크 서울'도 있었다.

이렇게 출발한 사설 BBS들은 외국산 호스트 프로그램—주로 와일드캣—을 한글화 해서 사용했는데, 1990년 10월에 최초의 국산 호스트 프로그램인 '카페'가 조병철에 의해서 공개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성욱의 '곰주인', 김성철의 '밀키웨이'가 나왔고, 이와 별도로 1991년 최오길의 '호롱불'이 등장하여 전국적인 사설 BBS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

당시 유명 사설 BBS는 다음과 같다.

한편, 흔히 01410으로 알려진 한국통신하이텔은 전화망을 활용한 부가통신 서비스의 일종이며, 처음에는 접속번호 157이 사용되었으며 나중에는 014XY 체계가 도입됨에 따라 01410을 접속번호로 하였다.

서비스 방식은 접속망 하이텔을 한국통신(현 KT)이 운영하면서 인포샵이라는 명칭으로 개별 정보제공업체(CP)이 정보서비스를 판매하는 형태이며 현재는 파우와우로 이름이 변경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는 프랑스의 미니텔 서비스를 모델로 한 것으로, 미니텔과 마찬가지로 문자 및 비디오텍스(VTX)가 지원되는 전용 단말기 하이텔 단말기를 도입하여 전화가입자들에게 무상임대하였다.

이 하이텔망은 인포샵 서비스 이외에도 다른 여러 PC통신 서비스의 접속 관문의 역할도 하였고, 아울러 전화접속 패킷망으로서 HiNET-P, HiNET-F 등의 네트워킹 서비스도 제공되었다. 나중에는 종량제 PPP 접속서비스도 제공된다.

서비스 명칭 하이텔이 PC통신 하이텔과 공유되어 있으나, 서로 구분되는 별도 서비스이다. 이 서비스 내에는 한국PC통신의 하이텔 이외에도 한국통신이 직접 운영하는 소규모 PC 통신으로 HiTEL-POP도 함께 존재했는데, 이것은 이후 미래텔로 이름이 바뀌었었다가 나중에 PC통신 하이텔로 흡수되었다.

현재는 광대역망의 보급으로 모뎀 사용이 격감하여 대부분의 014XY 번호가 사용되지 않고 있다.공식 서비스는 2017년 8월 31 종료되었으며 다음해까지도 01410 파우와우 서비스는 낮은 접속 성공률로 매회 수분간 접속이 되었으나 더이상 제공되는 컨텐츠와 서비스는 없었으며 , 2018년 7월 경 일자불상에 모든 014xy 전화번호가 퍠쇄되었다. 따라서 2018년 7월 현재 이하 명기된 모든 일체의 서비스는 더 이상 접속이 불가능하다.아울러, 1544 국번으로 시작하던 관련 서비스는 현재 타 기업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별 표시(*)는 2007년 12월 기준으로 접속 불능

ASCII 아트는 문자를 조합하여 한 화면상에 그림을 표시하는 것으로 그 기원은 문자 기반 표시장치만 존재했던 초창기 컴퓨터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편, ANSI 아트는 터미날의 제어코드(ESC 이스케이프)를 활용하여, 색상 표시, 화면 갱신들을 이용해 동적인 화면을 구현하는 것을 지칭한다.

KETEL의 초기화면

　CONNECT 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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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110: 햄버거 (230 words)


햄버거(, )는 샌드위치 패스트 푸드의 일종인 음식이다. 또한 햄버거는 양념, 빵가루 등에 고기를 갈아 넣고 버무린 뒤 구워낸 햄버그 스테이크(패티), 채소, 양념 등을 두 장 이상의 동그랗거나 길쭉한 빵 사이에 넣어 만들며, 보통 손으로 쥐면서 들고 먹는다. 그리고 가정에서 직접 만들어 먹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패스트푸드 식당에서 판매된다. 수많은 패스트푸드 식당들은 햄버거, 감자 튀김, 콜라 등을 하나로 묶어서 세트로 판매하기도 한다.

독일의 함부르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상인들이 지난날 몽골에서 독일로 가져온 음식이었던 타르타르 스테이크를 모방하여 그 지역 요리사가 다진 육회를 재료로 반죽하여 뭉친 것을 불에 구운 것으로 햄버그 스테이크 또는 '함부르크 스테이크'라 한다. 18세기 초 미국으로 이민온 독일 출신 이민자들에게서 이 스테이크가 미국에서 널리 알려지면서 함부르크에서 온 스테이크라는 이름인 햄버그 스테이크(Hamburg steak)로 불리게 된다.

이후 미국 각지에서 햄버그 스테이크를 사용하여 햄버거라는 요리가 유행하게 되었는데 시초에 대해서는 많은 주장이 있을 뿐 정확히 누가 어디서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미국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큰 이견이 없다. 햄버거의 시초를 둘러싼 주장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 박람회 때 한 요리사가 샌드위치를 만들던 중 너무 바쁜 나머지 함부르크 스테이크를 일반 고기 대신 샌드위치 빵에 넣어 판매한 것이 오늘날 햄버거의 시초라는 설이 있다.

들어가는 패티의 원료나 양념에 따라서 치킨버거, 불고기버거, 비프버거 등으로 구별해 불리기도 한다. 또 패티 이외의 소에 따라 치즈버거로도 불린다. 채식주의자들을 위해 채소만 넣어 만들거나 콩을 원료로 한 패티로 만든 샌드위치(베지 버거)역시 햄버거로 불릴 때가 많다. 대한민국에서는 김치의 맛을 낸 김치 버거와 밥을 뭉쳐 모양을 낸 것을 빵 대신 사용한 라이스 버거도 존재한다.




#Article 111: 놀이 (575 words)


놀이() 또는 유희(遊戱)는 인간이 재미를 얻기 위해 하는 활동을 말한다. 물질적 보상 또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는 행위이며 외부의 강제에 의한 행위도 아니라는 점에서 노동이나 일과 구별되지만, 노동에도 유희적 측면이 있다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놀이는 기분전환을 위한 여가 활동으로 규정되며, 서양 기원의 승부와 관련 있는 놀이는 게임(game)으로 불리기도 한다.

즐거움 외에도 민첩성이나 사회성 등 성장에 필요한 경험을 얻기 위해 놀이를 하기도 하는데, 이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놀이를 어떠한 것으로 생각하느냐에 관해서는 종래 많은 학설이 있다. 잉여정력설(剩餘精力說)·생활준비설·반복설·휴양설·생물학설 등이 있다. 놀이를 작업과의 대립개념으로 했을 때 그 본질은 분명해진다. 작업은 진지한 것이며, 피곤함과 고됨이 따른다. 또한 의무적·강제적인 것임에 반해서, 놀이는 자기목적적이며, 자기충족적 운동으로, 활동에는 쾌감이 따르고, 또한 자발적·해방적인 것이다.

놀이에는 기본적인 요소로 참여자와 목표가 있어야 하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rule)이 추가 요소로 포함될 때도 있다. 근대의 놀이는 기본적으로 방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놀이의 핵심은 '즐거움'이다. 놀이의 참여자는 놀이 규칙에 따라 수행하는 여러 가지 행위를 하면서 '즐거움'을 얻거나, 특정 행위 이후에 돌아오는 보상으로서 '즐거움'을 얻고자 한다. 즉, 한 사람 이상의 참여자가 과정 또는 목표를 통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행위를 '놀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서 '즐거움'이란, 통념상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범위 안에서 느끼는 '긴장감, 성취감, 기쁨' 등의 건강한 정신 상태를 말한다.

유아기(乳兒期)에는 작업과 놀이가 미분화상태이기 때문에, 놀이에 대해서 어른의 작업에 대한 것과 같이 진지하다. 이 미분화성 때문에 이 시대에서는 놀이 가운데서 작업(간단한 심부름 등)을 시키는 일도 가능하며, 또한 완구(玩具)를 보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사용되고 있는 여러 가지 도구가 그 역할을 한다.

유아에게는 혼잣놀이나 평행놀이가 많다. 아동기의 중기부터 후기는 집단적 놀이가 특징이며, 소위 갱(gang)시대를 이룬다. 유희집단의 성원 수도 연령과 함께 변화한다. 집단참가의 인원수는 초등학교 저학년에서는 2~4명이던 것이 고학년에 가서는 6~10명으로 증가한다. 그 후 청년기가 됨에 따라 다시 감소한다. 동일유희라도 발달에 따라서 그 구조가 변화한다.
오가와타로(小川太郞)에 의하면, 유희는 혼자서 가능한 조직없는 유희로부터 단순한 규칙을 가진 단순한 조직놀이로, 다시 복잡한 규칙을 가진 복잡한 조직놀이로 변화한다. 아동기부터 청년기에는 놀이가 집단적으로 행해지며, 규칙이 정해진 그룹조직이라든가 운동경기 등이 왕성하게 실시된다. 이 놀이집단을 통해서 협조성이나 자기통제와 같은 성격형성이 가능해지며, 신체의 훈련, 규칙 존중 등의 사회성의 증진이 학습될 가능성이 많다.

뵐러(Ch. Buhler)는 놀이를, ① 기능놀이(감각을 사용한다든지, 손발을 움직인다), ② 상상(想像)놀이(소위 경쟁놀이), ③ 구성놀이(토막쌓기·찰흙빚기·描畵 등), ④ 수용(受容)놀이(그림극·레코드 등을 보고 들으며 즐기는 것)등으로 분류하여 발달을 고찰한다.
파텐(M. B. Parten)은 사회적 행동양식에 의해서, ①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행동, ② 방관적 행동, ③ 혼잣놀이, ④ 평행놀이, ⑤ 연합놀이, ⑥ 협동놀이로 분류한다.

유아기의 놀이의 형태는, 대개 유희활동의 경과형식(經過形式)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분류하여, 그 발달 차이를 알아보고 있다.

가장 원시적인 유희활동. 거의 2-3분 간격으로 다른 활동을 나타내며, 더욱이 그 하나하나의 행동이 유희라고 이름붙일 수 없을 정도로 정리되지 않은 것으로 1세아에 많다. 대부분 적응적 목적을 위해 습득한 어떤 하나의 기제로 순환적 반응을 반복하는 행위가 주를 이룬다. 이 시기는 심상이 아닌 기능적 동화가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다른 단계와 구별된다.

단편적 유희행동이 모자이크식으로 접합한 것이다. 10분간 정도씩 유희(遊戱)가 계속되나 다음 유희와의 관계성이 없이 이루어지는 놀이 방법으로, 1시간에 4~9종의 놀이가 나타난다. 2~3세아에 가장 많다. 이 시기에 이르른 아동은 단순한 감각운동적 면에서 탈피해 상징적 가작화를 통한 놀이에 집중한다. 하지만 아동은 사진의 행동을 가작화로써 이해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의식화하는데에만 머무르며, 이는 누적형놀이와 연속형 놀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같은 종류의 유희가 1시간 가까이 연속된다. 하나의 유희가 그것과 관계 있는 유희로 발전한다든지, 혹은 다른 유희를 도입하여, 잡다(雜多)하게 하나의 유희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2~5세아에 비교적 많다. 이 때에부터는 놀이가 습관화된 의식으로부터 분리되어 상징적 도식의 형태를 취한다.

정지된 유희활동이 1시간에 2가지나 3가지의 비율로 실시된다. 4~6세아에 많다.

분절형의 유희가 다시 오래 계속된다. 1시간 내의 대부분이 하나의 유희이다. 분절형 놀이의 상위유희로 이해하는것이 좋다. 언뜻 보기에는 연속형 놀이와 비슷해보이지만, 각각의 유희 사이에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는것으로 연속형 놀이와 구분된다.

승부나 규칙과 관련이 없는 놀이는 다음과 같다.

승부나 규칙과 관련이 있는 놀이는 다음과 같다.




#Article 112: 비디오 게임 (500 words)


비디오 게임(, )은 컴퓨터가 비디오 게임 사용자의 입력을 받아 정해진 규칙에 따라 처리하고, 그 과정이나 결과를 출력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한 전자게임(electronic game)이다. 비디오 게임은 글자나 그림, 소리만으로 출력될 수도 있지만, 많은 비디오 게임이 영상표시장치를 이용한 시각적 출력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비디오 게임은 여러 종류의 입력 장치를 사용하여 사람의 행위를 게임에 번역, 전달할 수 있으며, 가장 흔한 게임 컨트롤러는 PC 게임의 경우 키보드, 마우스이며, 콘솔의 경우 게임패드, 휴대용 콘솔의 경우 버튼이 포함되어 있다. 그 밖의 게임 컨트롤러는 일반적으로 레이싱 휠, 라이트 건, 댄스 패드가 있다. 디지털 카메라 또한 플레이어의 신체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한 게임 컨트롤러로 사용할 수 있다.

이스터 에그는 개발자들의 메인 게임의 일부가 아닌 곳에 남겨둔 숨겨진 메시지나 농담이다.

비디오 게임은 게임으로서는 드물게 혼자서 하는 게임(1인용 게임)이 많았다. 그것은 컴퓨터 자체가 여러 사람이 함께하기 어려우며, 함께 하는 사람이 없어도 컴퓨터가 알아서 적절한 상대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혼자서 하는 게임은 컴퓨터가 모든 것을 처리하고 제공한다는 점 때문에 서사적 특징을 띠기도 한다. 다른 참여자와의 상호 작용에 크게 의지했던 기존의 게임과는 달리, 다른 참여자가 없는 비디오 게임에서는 게임이 제공하는 내용이 그 경험 수준을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서사적 특징의 하나는 주인공의 존재인데, 보통의 게임은 여러 인간 참여자가 이루어내기 때문에 특별한 주인공이 없던 반면, 혼자 하는 비디오 게임에서는 유일한 인간 참여자에 그 비중이 맞추어진다. 그래서 모든 게임 환경과 컴퓨터 참여자들이 주인공인 인간 참여자의 행동에 맞추어 작용함으로써 의도된 경험을 제공하기도 한다. 나아가 컴퓨터가 더는 참여자로서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이 인간 참여자 개인에 맞추어지는 환경으로서 제공되는 게임도 많다. 그를 위해 비디오 게임은 영화와 소설 등의 다른 서사 매체의 문법을 빌려와 게임 참여자에게 높은 수준의 경험을 제공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통신 기술의 발달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도 함께 게임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온라인 게임이 대두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전의 게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의 사람들이 동시에 게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재미 이론》의 저자인 라프 코스터는 2007년 게임 개발자 회의에서 과거 1인용 게임들의 성행은 놀이의 기형적인 변화였고, 온라인 게임의 시대가 오면서 진정한 놀이로서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비디오 게임을 새로운 서사 형태의 출현으로 보는 사람들은 혼자서 하는 비디오 게임에도 큰 의미를 두고 있다.

비디오 게임은 종종 다양한 전자 매체가 결합한 멀티미디어의 궁극적 형태로 언급된다. 현대의 비디오 게임은 영화, 문학, 음악 등 여러 표현이 모두 결합하여 상호 작용의 형태로 제공되는 경험 매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게임의 본질은 그 구조이며 영상과 음악, 문학 등의 표현은 그것을 돕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도 있다.

비디오 게임은 플레이어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임의로 연산된 세계를 제공하기 때문에 가상 세계의 일종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비디오 게임은 일반적으로 재미를 제공하며 일련의 학습 과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디지털의 특성상 널리 배포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교육이나 선전의 도구로서 사용되기도 한다.

과도한 비디오 게임은 심각한 게임 중독 문제로 이어진다. 한편 게임의 효과에 대한 연구결과들도 있다. 2013년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2개월 이상 하루 30분 이상 슈퍼 마리오 64 게임을 한 그룹이 그렇지 않은 그룹에 비하여 일부 뇌 부위가 커졌다. 물론 모든 게임이 이런 효과를 가진 것은 아니고 논문에서 제시하는 한계점들도 있다. 

그러나 폭력적인 게임을 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게임을 한 사람보다 폭력성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결과, 게임을 많이 하는 아이일수록 문제 행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결과 등 비디오 게임의 부정적 효과에 주목하는 연구결과들도 많이 있는 상태다.




#Article 113: 리처드 도킨스 (692 words)


클린턴 리처드 도킨스(, 1941년 3월 26일~ )는 영국의 동물행동학자, 진화생물학자 및 대중과학 저술가이다. 그는 1995년부터 2009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대중의 과학이해를 위한 찰스 시모니 석좌교수직과 옥스퍼드 대학교 뉴 칼리지의 교수직을 맡았으며 2009년에 정년 퇴임하였다.

그는 역시 많은 저명한 언론매체의 편집장으로 일했으며 엔카르타 백과사전과 진화백과사전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또 무신론적 박애주의자들이 발간하는 잡지의 수석편집위원으로 칼럼을 쓰고 있으며 과학적 회의론 잡지의 창립멤버로 편집이사회의 멤버이기도 하다. 그는 영국왕실이 수여하는 패러데이 상의 심사위원, 영국TV 아카데미상 심사위원을 맡고 있으며 영국과학발전협회의 생물학 부문 수장이기도 하다.

도킨스는 진화에 대한 유전자 중심적 관점을 대중화하고 밈이라는 용어를 도입한 1976년 저서 《이기적 유전자》로 널리 알려졌다. 또한, 1982년 그는 표현형의 효과가 유기체 자신의 신체만이 아니라 다른 유기체들의 신체를 포함한 넓은 환경으로 전달된다는 것을 보여준 저서 《확장된 표현형》으로 진화생물학계에서 폭넓은 인용을 받았다.

도킨스는 무신론자이며, 철저한 인본주의자, 회의주의자, 과학적 합리주의자 및 브라이트 운동 지지자이다. 그는 미디어에서 여러 차례 다윈의 로트바일러 로 불렸는데, 이는 영국의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가 자연 선택을 지지하면서 다윈의 불독으로 불린 것에서 유추되었다. 2006년에 발표한 그의 책 《만들어진 신》에서 도킨스는 초자연적 창조자가 거의 확실히 존재하지 않으며 종교적 신앙은 굳어진 착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2007년 11월 현재 《만들어진 신》의 영어판은 150만 권 이상 판매되어 그의 책들 중 1위를 기록했으며, 31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도킨스는 생물학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대중과학서를 집필했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기도 했다.

리처드 도킨스는 1941년 3월 26일 케냐 나이로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클린턴 존 도킨스는 2차대전중 연합군으로 영국에서 케냐로 이주하였으며 도킨스가 8세가 되던 1949년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부모 모두 과학에 매우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어린 도킨스의 질문들에 과학적 언어로서 답을 해 주었다고 한다.

도킨스는 그의 어린시절을 전형적인 평범한 영국 소년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대략 9세 되던 무렵 신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얼마 후에 그는 자연에 있는 방향성, 규칙성, 목적성, 질서와 이런 것들의 조합등을 인식하고 다시 신의 존재를 믿도록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영국성공회의 관습들이 매우 불합리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신보다는 윤리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후에 그가 생물의 진화과정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의 종교적인 관점은 다시 변화하게 되었다. 그는 초자연적인 신의 존재 없이도 진화론의 자연선택이 생명의 복잡성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느꼈다.

도킨스는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온들 스쿨(Oundle School)을 다녔다.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교의 베일리얼 칼리지에서 동물학을 수학했는데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인 동물행태학자 니콜라스 틴버겐(Nikolaas Tinbergen)교수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1962년에 옥스퍼드를 졸업했다. 그 후 틴버겐의 지도하에 옥스퍼드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1966년에 받게 된다. 틴버겐은 동물행태연구의 개척자였는데 특히 본능의 문제들, 학습과 선택에 있어 선구자이다. 이 시기에 도킨스의 연구는 동물결정모델에 관한 것이었다.

도킨스는 만물은 신이 창조했다는 종교적 믿음인 창조과학에 단호한 비판적 자세를 가지고 있다. 그는 창조과학을 불합리하고 지성을 축소시키는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의 1986년에 나온 책 《눈 먼 시계공》(The Blind Watchmaker)에서 창조론자의 중요한 논점인 설계론에 대해 지속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 책에서 도킨스는 18세기 영국신학자 윌리엄 패일리(William Paley)의 저서 자연신학에서 주장되어 유명해진 시계공비유에 대해 반박했다. 패일리는 그의 저서에서 시계는 너무 복잡하고 기능적이어서 단순히 우연의 산물로 출현할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시계보다 훨씬 더 복잡한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도 당연히 누군가에 의해 미리 설계되었다라고 확언했다. 하지만 도킨스에 따르면 진화론의 자연선택도 생물계의 규칙성과 복잡성, 그리고 기능성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에 있어서 지성을 가지지 않고 맹목적으로 작동하는 자동 시계제작자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도킨스는 아이들의 과학교육에 지적설계를 포함시키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과학적이지 않으며 단지 종교적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에 있어서 진실이란 영국단체를 강하게 비판해 왔는데 그 이유는 이 단체가 공립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치도록 홍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킨스는 이러한 단체에 대항하기 위해 이성과 과학을 위한 리처드 도킨스 재단을 통해 책, DVD, 팸플릿을 제작해서 학교에 전달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상황을 교육 스캔들이라고도 표현했다.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한 책인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의 저자 런던 대학교 교수 스티븐 로즈(Steven Rose)는 도킨스를 초다윈주의자(Ultradarwinist)로 명명하면서, 유기체가 아닌 유전자 수준에서 여러가지 자연 선택과정이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도킨스의 유전자론은 유기체의 독자성을 무시하고, 유기체를 유전자를 전달하는 단순한 매개체로 격하시켜 진화의 과정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여기에 대해 도킨스는 로즈가 비판하는 유전자 결정론이란 사회생물학자들 사이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이념임을 지적하고, 로즈의 주장은 정치적 목적이 담겨있다고 답했다.

도킨스는 또한 수많은 연설과 강의를 했는데 그중엔 헨리 시즈위크(Henry Sidgwick) 기념연설 (1989), 첫 번째 에라스무스 다윈(first Erasmus Darwin) 기념강의 (1990),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강의 (1991), T.H. 헉슬리 기념 강연(T.H. Huxley Memorial Lecture) (1992), 어빈 기념 강의(Irvine Memorial Lecture)(1997), 쉘든 도일강의(Sheldon Doyle Lecture) (1999), 틴베르헨 강연 (2004), 그리고 태너 강의(Tanner Lectures)(2003)등이 대표적이다. 1991년에 그는 어린이를 위한 왕실학교 크리스마스 특강을 했고 이것은 2007년에 이 우주에서 성장한다는 것은이란 DVD 타이틀로 나왔다.




#Article 114: 유리수 (304 words)


수학에서, 유리수(有理數, )는 두 정수의 비율 또는 분수의 형식으로 나타낼 수 있는 수이다. 단, 분모가 0이 아니어야 한다. 특히, 분모가 1일 수 있으므로 모든 정수는 유리수이다. 유리수체의 기호는 이며, 몫을 뜻하는 영어 quotient에서 따왔다.

유리수체 는 정수환 의 분수체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집합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유리수체 는 다음과 같은 공리를 만족시키는 (동형 아래 유일한) 체이다.

유리수체 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다. 집합  위에 다음과 같은 동치 관계 를 줄 수 있다.

유리수체 는 집합으로서 몫집합 이며, 그 위의 덧셈과 곱셈은 다음과 같다.

체가 만족시켜야 하는 조건인 각종 연산 법칙과 덧셈 항등원  및 각 유리수 의 덧셈 역원  및 곱셈 항등원  및 0이 아닌 각 유리수 의 곱셈 역원 의 존재가 성립하므로, 이는 체를 이룬다.
정수환과 유리수체 사이의 표준적인 단사 환 준동형은 다음과 같다.

각 유리수 를 분수 꼴 으로 나타내면, 유리수를 마치 두 정수의 비율인 것처럼 다룰 수 있다.

유리수는 두 정수의 비율이므로, 나눗셈 기호와 의미가 같은 분수 기호를 통해 나타낼 수 있다. 예를 들어, 1과 3의 비를 분수로 나타내면 이다. 분자와 분모를 동시에 그 공약수로 나누어 원래와 값이 같지만 꼴이 더 단순한 분수를 얻는 과정을 약분이라고 한다. 분자와 분모가 서로소이어서 더 이상 약분할 수 없는 분수를 기약 분수라고 한다. 예를 들어, 을 최대 공약수 6으로 나눠 약분하면 기약 분수 을 얻는다. 분자가 분모보다 작은 분수를 진분수, 작지 않은 분수를 가분수라고 한다. 가분수는 정수와 진분수의 합으로 표현한 것을 대분수라고 한다. 예를 들어, 의 대분수 표현은 1이다.

무리수는 두 정수의 비율로 나타낼 수 없으므로 분수 표현이 불가능하다.

유리수의 진법 전개는 유한 소수이거나 순환 소수이다. 십진법 전개가 가장 흔하며, 그 예는 다음과 같다.

분수를 소수로 전환하려면 나머지 있는 나눗셈을 통해 순환 마디를 구하면 된다. 유한 소수나 순환 소수를 분수로 전환하려면  = 0.1,  = 0.01,  = 0.001 및  = 0.111...,  = 0.010101...,  = 0.001001001... 따위를 이용하면 된다.

반면 무리수의 진법 전개는 비순환 소수이다.

유리수는 유한 연분수 표현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Article 115: 피시방 (591 words)


피시방(PC房, )은 대한민국에서 널리 퍼진 LAN 게임 카페(LAN Gaming Center)이자, 다중 PC 카페로서, 보통 피시방은 시간당 요금 또는 정액 요금을 내고 컴퓨터로 인터넷, 온라인 게임 등을 이용할 수 있는 장소다. 또한 피시방의 시간당 요금은 지역마다 다르다. 대부분은 50~80분에 1000원 정도로 가격을 책정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전자 카페는 혜화동에 김형준이 개업한 피씨카페이다.

피씨카페는 1988년 3월에 첫 개장하여 1991년에 폐장된 엠팔의 멤버였던 안상수와 금누리가 홍익대학교 근처에서 만든 ‘일렉트로닉 카페’(전자 카페)이다. 당시 16비트 컴퓨터 두 대를 놓아 전화선으로 PC통신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후 세계 최초의 인터넷 카페는 1994년 4월에 정민호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BNC(BIT COMMUNCATION CAFE)라는 이름으로 첫 개장한, 인터넷카페이다. BNC 인터넷 카페는 당시 최초의 인터넷 카페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언론에서 소개한 인터넷 카페들은 전부 전자카페였으나 1994년부터 모뎀카페, 네트워크카페, 사이버카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다음해인 1995년 여름에 종로, 홍대 등지에 인터넷 카페가 만들어지면서 대학생들이 인터넷 카페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인터넷 카페에서는 ISDN과 전화모뎀을 이용한 PC통신으로 하이텔에 연결하여 텍스트 위주의 통신이 가능하였으며, 대형 텔레비전 모니터에 PC와 TV를 연결하여 모르는 사람이 통신을 이용한 바둑을 둘 수 있었고 쥬라기 공원같은 통신을 이용한 게임을 할 수 있었다.

그 뒤, 1996년 여름에는 PC방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다음해인 1997년 11월, IMF 시대를 맞이하게 되면서 피시방의 수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 상황이 IMF라는 커다란 혼란으로 침체된 상태에서 명예퇴직을 당했던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시장인 PC방 창업에 뛰어 들기 시작하였다. 그 영향으로 1998년부터 1999년까지는 창업 열풍에 맞추어 상승세를 타게 된다. 또한 1998년에 발매된 미합중국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스타크래프트는 5년동안 대한민국의 피시방 2만 곳을 설립하는데 기여하였다.

PC방의 대중화로 인하여 1998년 여름부터는 PC방의 창업이 대한민국의 컴퓨터 산업이 호황세를 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사업체들이 PC방을 시장으로 이용하였고, 많은 사업들이 성공할 수 있는 블루오션으로 생각되었다. 비디오 게임산업이 발전하면서, 그 비디오 게임에 맞는 컴퓨터 사양이 필요하였고, PC의 고사양화가 가속화되는 효과를 불러왔다. 2001년부터는 PC방 개인사업의 통신선 설치가 일반 가정집까지 연결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초고속 인터넷망을 구축해나갈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피시방은 미국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전략시뮬레이션 비디오 게임인 스타크래프트가 1998년 4월 발매와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함께 널리 퍼졌다. 따라서 대부분의 인터넷에 연결되었고, 컴퓨터 게임을 하기에 적합해졌다. 2000년에 들어서는 화상 채팅이 퍼지면서, 많은 피시방들이 웹캠을 설치하였다. 또한 넥슨, 넷마블 등의 온라인 게임 서비스 업체들은 피시방을 중심으로 자사가 서비스하고 있는 온라인 게임을 이벤트 등의 방식으로 홍보하기도 하며, 피시방에서 온라인 게임을 이용할 경우 보너스 경험치 같은 혜택을 주기도 한다. 피시방은 컴퓨터를 비치하여 방문자가 이용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이외에도 스낵이나 음료수를 판매한다. 그러나, 2002년 이후 각 가정의 인터넷 접속 방법의 발달과 증가로, 현재 피시방은 사라지거나 또는 생존을 위해 이용료 인하, 시설의 고급화·대형화, 또는 플레이스테이션 4 같은 비디오 게임기를 비치하는 등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피시방은 어린 학생들의 새로운 놀이터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이용자의 상당수가 청소년 및 어린이지만, 상당수의 피시방이 금연구역을 철저히 지키고 있지않아 간접흡연의 피해를 입고 있다. 또, 인터넷 중독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피시방에서 장시간 사용하면서 생활을 망치는 경우가 있으며, 간혹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 피시방 사장들이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학생들에게 노동착취 등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또한 금연법의 시행으로 2014년 1월 1일부터 100m²이상의 전 사업장, 2015년 1월 1일부터는 100m²이하의 전 사업장이 실시대상이 된다.

또, 주민등록번호나 개인 정보가 유출될 수도 있다. 일부 PC방에서는 회원가입시 주민등록번호와 이름, 생일, 전화번호와 집 주소를 수집하고 있으며 PC방의 메인 관리 컴퓨터가 해킹당하거나 업주의 악의적인 이용으로 피해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14년 8월 7일부터 주민등록번호의 수집이 금지되면서 PC방에서의 주민등록번호 수집 역시 불법이 되었다. 이로 인해 회원가입 수단이 문자 인증으로 바뀌는 추세이나 인증으로 인한 추가비용이 발생하는 등의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PC방 업주들이 PC방은 더 이상 청소년유해시설이 아닌데도 학교정화구역 안에 일률적으로 설치를 금지하는 것은 직업 선택의 자유 등을 침해한다고 헌법소원을 제기하였지만 기각되었다. 헌재는 PC방을 학교 근방 200m이내에 설치할 수 없다는 법규가 기본권을 제한하지 않는다고 보았으며 또한, 직업수행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사이버지식정보방(知識情報房)은 대한민국 국군에 장병 복지를 위해 설치된 이용 시설로, 사지방 혹은 싸지방이라 부른다.




#Article 116: 노동조합 (873 words)


노동조합(勞動組合, , , ) 또는 노조(勞組, )은 노동자들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만든 노동자의 사회단체를 말한다.

인간의 노동은 선사시대 이래 계속되어 온 것이나 임금을 받고 노동을 제공하는 임금 노동자 계급의 출현은 산업화 이후의 일이다. 노동자는 기업가와 더불어 산업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 집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는 산업혁명 초기부터 기업가에 비해 매우 불리한 사회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후 자본가와 국가에 대하여 집단적인 조직체를 통하여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시드니 웹(S.Webb)에 의하면 노동조합의 정의는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노동 조건의 유지, 개선 기타 경제적,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 또는 그 연합 단체이다. 노동조합은 노동운동의 조직적인 기초가 되며, 직업·기업·산업별로 조직된다.

시드니 웹의 정의에서 암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거의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계급분화에 의한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질서에 도전하기 보다는 이를 인정하면서 협상을 통해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고자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등에서는 노동조합이 자본가와 대립하는 노동자 진영의 주요 조직으로 파악한다.

노동조합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국가에서는 노동조합의 성격을 노동자의 자주적 단결체로서 노동자의 여러 이익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나 연합단체로 보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기계에 밀려 직조공과 같은 숙련 기술자들이 사라진 대신 비숙련 노동자들이 노동인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산업화 국가의 노동자들은 매우 열악한 조건에서 근로하였으나 이들은 아무런 정치적 발언권이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게 되었다. 초기 노동조합 활동은 자본가와 국가의 탄압을 받았으며 법률적으로 엄금되었다. 최초의 노동조합은 17세기 영국에서 노동자들이 결성한 우애조합, 공제조합 등이었다. 영국 의회는 1799년 단결금지법을 제정하여 노동조합의 결성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이들 조직은 비밀 결사의 형태를 띄었다. 초기 노동조합의 주요 활동은 일정한 조합비를 걷었다가 사고가 발생했을 때 지급하는 일종의 상호부조였다.

미국에서는 19세기 여러 단위 노동조합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자본가들은 최악의 경우 노동조합 간부를 청부살인하는 등 악랄하고 극심한 탄압을 하였으나 노동운동의 발전을 막지는 못하였다. 1869년 결성된 노동자 기사단은 후일 세계산업노동자로 개칭하였으며 이 단체의 마더 존스와 같은 노동운동가들은 미국 노동운동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수 많은 노동자들의 노력끝에 1820년대 영국은 노동조합을 금지하는 법률(단결엄금법, 18세기 제정)을 폐지하였고 노동조합 활동이 합법화되었다. 이후 유럽과 미국 등 산업화된 국가에서 노동조합 운동이 계속되어 1890년 무렵에는 서구 열강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노동조합이 합법화 되었다. 1890년 5월 1일 첫 노동절 기념집회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어 노동조합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주었다.

산업화가 세계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노동운동 역시 파급되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산업화를 겪은 일본은 1912년 일본 노동운동 역사 처음의 노동조합인 우애회(友愛會)가 설립되었고 1925년 무렵에는 457개 노동조합에 25만여명의 조합원이 가입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일제 강점기이던 1920년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친목회, 노동회, 노우회와 같은 지역합동 노동조합이 생겨났다. 또한 인쇄공과 같은 숙련노동자들은 직업별 노동조합을 세웠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성장을 바탕으로 1924년 4월 조선노동총연맹이 출범하였다. 한국의 노동조합은 노동인권 쟁취를 위한 단결투쟁과 함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 운동을 벌였다. 일제강점기 노동계에서는 부두에서 짐을 배로 실어나르는 노동자들이 임금삭감에 항의하여 파업투쟁을 하는 등 노동자들이 노동인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활발하였다. 이러한 투쟁은 노동자들이 단결투쟁만이 노동인권을 쟁취하는 수단임을 깨닫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대표적인 노동조합 관련 운동으로는 1929년의 원산의 노동자들이 원산총파업투쟁이 있다.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식민지가 된 제3세계에서 노동조합의 독립운동 참여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또한 1930년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도 있다.
고무공장 주주들은 15~20%의 배당이익을 챙기면서도, 노동자 임금 10% 삭감을 결의하여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였다. 당시 노동자들은 130원의 저임금을 받아 3~4명의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사용자들의 임금삭감은 곧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고무노조(위원장 김유창)는 단체교섭을 시도하였으나 거절당하자 파업투쟁으로써 단결투쟁을 하였다.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들은 1930년 8월 7일 국제고무공장을 시작으로 11개 공장 1천800명의 노동자가 동맹파업투쟁에 들어갔다. 당시 사용자들과 경찰은 대체인력 투입, 빨갱이 딱지 붙이기, 활동가 체포, 용역 불량배를 통한 폭력으로써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방해하고 탄압했으나, 노동자들은 현장복귀 거부와 선전전으로써 저항하였다. 또한 강주룡이라는 노동자는 모든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의미로 고공농성을 벌이기도 하였다.

노동조합의 조직 대상을 기업별로 하여 결성된 노동조합을 기업별 노동조합이라 하고 산업 직군에 따라 조직된 노동조합을 산업별 노동조합이라 한다. 산업별 노동조합은 산별노조라고도 한다.

산업별 노조는 산업직군 곧 하는 일이 같은 노동자들이 노동인권을 존중받기 위해 만든 노조이다. 해당 산업직군에서의 노동을 위해 구직하거나 공부하는 노동자까지도 가입할 수 있는 산업별 노조도 있다. 본문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두 가지 산업별 노조를 소개한다.

예를 들어 민주노총 금속노조는 자동차, 기계, 조선업, IT, 전자, 전기같은 금속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이 만든 산업별 노조이다. 금속노동자들은 정규직, 사내하청 등의 비정규직, 한국인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등의 구분없이 누구나 금속노조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으며, 산업별 노조이므로 조합원은 일다니는 회사에 어용노조나 유령노조가 있더라도 회사와 단체협약 곧 노동조건과 임금에 대한 약속을 체결할 수 있다.

민주노총 건설노조는 건설업에 종사하거나 일하려는 노동자들의 산업별 노조이며, 산업별 노조이므로 조합원들은 단체교섭을 일다니는 회사와 체결함으로써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건설노동자는 거의 대부분 일용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이라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단결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업별 노조가 아닌 산업별 노조를 결성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한편 현대중공업 노동조합과 같이 산업별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노동조합은 기업별 노동조합이 된다.

노동조합은 조직 형태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오픈 숍의 형태로 운영된다. 클로즈드 숍의 인정은 각 나라의 법률에 따라 다르다. 영국은 산업의 종류에 관계없이 클로즈드 숍을 인정하는 반면, 미국은 1935년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와그너 법을 제정하여 클로즈드 숍을 인정하였으나 1947년 새롭게 제정된 노사관계법인 테프트-하틀리 법에 의해 금지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항운노조연맹이 클로즈드 숍으로 운영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노동하는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하지 않은 노동자, 이른바 이주 노동자들은 차별, 열악한 노동환경, 대한민국 정부의 출입국 정책 등으로 노동인권을 존중받지 못하므로 민주노총 이주노동자 지회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에는 소속 조합원 노동자의 연령에 일부 제한을 둔 대신 고용 형태나 소속기업을 따지지 않는 노동조합이 있는데, 대표적인 조직은 청년유니온이다. 청년유니온은 상급단체를 두지 않은 독립된 노동조합 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 세계 최대 노동조합 연대 기구로는 국제 자유 노동조합 연맹(ICFTU)과 세계 노동 연맹(WCL)을 합병하여 2006년 11월 결성된 국제 노동조합 연맹(ITUC)으로 전 세계 국가별 노동조합 305개, 노동자 1억 7,500만명이 151개국에서 가입하고 있다. 또 다른 노동조합 국제 연대 기구는 세계 노동조합 연맹(WFTU)이 조직되어 있다.

대한민국에는 다음과 같은 노동조합 연맹이 존재하거나 존재했다.
(오른쪽에는 약칭을 명기)




#Article 117: 자연로그의 밑 (498 words)


자연로그의 밑(base of the natural logarithm)은 무리수인 상수로 로 나타내어지며 기호 로 표기한다.

국내 정식 수학 용어는 자연로그의 밑이며, 수학교육학 한정으로는 로그가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술되는 편이 잦아 상수 로 지칭한다.

이외 특칭된 용어는 모두 비공식적인 용어이다. 스위스의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이름을 따서 부르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오일러가 발견한 수가 많아서 통용되지는 않고 있다. 그 외 로그 계산법을 도입한 스코틀랜드의 수학자 존 네이피어를 기려 부르자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정작 그것을 발전시켜 밝혀낸 사람은 그가 아닌 야코프 베르누이어서 무마되었다.

가 계산된 최초의 기록은 1618년 존 네이피어에 의해 발간된 로그표이다. 그러나 네이피어는 로그 계산의 과정에서 나온 결과 값만을 간단히 다루었을 뿐 를 상수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네이피어의 로그는  과 동치이다. 이를 오일러가 정의하여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는 로그함수 정의로 옮기면 네이피어의 로그는

인 로그함수이다. 위의 로그에서 사용된 밑은 의 역수인 와 매우 가까운 근삿값이다. 후일 윌리엄 오트리드가 네이피어의 로그표를 사용하여 로그 계산자를 만들었지만 그 역시 를 특별한 상수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가 특정한 상수임을 발견한 사람은 야코프 베르누이이다. 그는 복리 이자의 계산이 다음과 같은 극한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베르누이는 위의 식이 수렴한다는 것과 그것이 특정한 값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물론 그 값은 이다.

베르누이가 정리한 위의 급수를 처음으로 상수로서 표현한 사람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이다. 라이프니츠는 1690년에서 1691년 사이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에게 쓴 편지에서 이 급수를 “b”로 표현하였다. 한편, 오일러는 1727년에서 1728년 사이에 이 상수를 로 표현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e 라는 표기가 정식 출판물에 처음 등장한 것은 1736년 출판된 오일러의 《메카니카》이다. 그 이전에는 수학자 마다 여러 알파벳을 사용하여 이 상수를 표기하였으나 《메카니카》의 출판이후 로 표기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를 밑으로 하는 로그인 자연로그는 여러 분야에 두루 쓰인다. 로그함수는 정의에 의해 여러 밑을 가질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밑을 따로 표기하지 않은  는 자연로그를 뜻했다. 하지만 상용로그와 헷갈리는 문제 때문에 현재는 로 표기한다. 로그함수 의 도함수는 이다. 즉,

이고,

이다. 이는 를 밑으로 한 자연로그의 가장 큰 특징으로 지수가 등차적으로 증가할 때 로그곡선의 기울기는 등비적으로 감소한다는 의미가 된다.

를 밑으로 하는 자연로그는 여러가지 증정도와 밀접한 관련을 보인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자연수에서 주어진 수가 충분히 클때 1에서 부터 주어진 수까지의 소수의 개수는 로그함수에 점근한다는 소수 정리가 있다. 리만 가설에서 출발한 이 정리는 1896년 프랑스의 자크 아다마르와 벨기에의 발레 푸생이 서로 독자적인 연구를 통하여 증명하였다.

이외에도 자연로그는 물리와 화학 등 여러 자연 과학의 변화량에서 사용된다. 다음은 자연로그가 자연 과학에 사용된 예이다.

는 무리수에 속하며 초월수로 알려져 있다.

는 대수적 방정식의 해가 될 수 없는 초월수이다. 1873년 프랑스의 수학자 샤를 에르미트에 의해 가 초월수임이 증명되었다. 가 초월수임을 증명하는 방식은 귀류법에 의한 것으로 만일 가 대수적인 수라고 가정하면 다항식을 구성하는 계수가 무한히 약분되는 모순이 생긴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또한 는 무리수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증명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의 테일러 전개는

이 성립한다.

이제 를 유리수라 가정하면 양의 정수 , 에 대해

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어야 하고 이 부등식의 각 변에 를 곱하면

이 된다. 한편,  =  라 가정하였으므로

이 된다. 이에 따라 와  는 양의 정수가 되어야 하므로  역시 양의 정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위의 식 (1)에서 는 0보다 크고 1보다 작다고 하였으므로 이는 자연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는 두 양의 정수의 비, 즉 유리수로 나타낼 수 없는 무리수이다.

의 근삿값은 다음과 같은 연분수의 전개를 통하여 계산할 수 있다.




#Article 118: 방일영 (387 words)


방일영(方一榮, 1923년 11월 26일 ~ 2003년 8월 8일)은 대한민국의 언론인·경제인·기업인이며 조선일보(朝鮮日報)의 2대 회장이다. 1943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1999년까지 근무했다.

그 밖에 일신방직의 사외이사로 초빙되기도 하였고, 각종 장학 사업을 후원하였으며 1994년에는 방일영국악상을 제정하여 매년 한국의 우수 국악인들을 시상하였고, 1995년 5월에는 방일영문화재단을 설립하여 문화예술인 지원사업을 추진했다. 1945년 잠시 양주군청의 면서기로 근무하였다.

조선일보 9대 사장 방응모의 손자이자, 이후 조선일보 회장을 지낸 방우영의 형이다. 첫째 아들 방상훈은 2006년 현재 조선일보 사장이며, 둘째 아들 방용훈은 코리아나 호텔 대표이사이다. 밤의 대통령, 밤의 황제이라는 별칭이 있다. 평안북도 박천출신으로 본관은 온양이며, 아호는 우초(愚礎)이다.

경성제일고보(경기중학교 전신)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 중앙대학 예과를 졸업한 뒤 1943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1999년 이사 고문직을 사임할 때까지 55여 년 동안 조선일보에 몸담아 왔다.

방일영은 1944년 11월 세 살 아래 박현숙과 결혼했다. 박현숙은 한학자인 부친 박순흠과 고영선의 넷째 딸로 숙명여고를 졸업했다. 한 해 전 동생 방우영의 영어교사였던 이용덕이 박현숙의 흑백 사진 한 장을 들고 방응모를 찾아온 것이 결혼으로 이어졌다.

태평양 전쟁 당시 그도 학도병 징집 대상자가 되었다. 할아버지 방응모는 손자 방일영이 학병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백병원 설립자인 고향 후배 백인제를 불러 상의했다. 이때 백인제는 방일영의 왼쪽 뺨 귀 밑에서부터 턱까지 생살을 째는 수술을 집도했다. 그런 뒤 방일영은 일단 징집이 면제되는 면서기를 했다. 1945년 봄부터 여름까지 양주군청 소속 면서기를 지냈다.

방응모 사후 몰락한 조선일보를 다시 일으켰다. 한독당원에 김구의 노선을 추종한 방응모는 야당 인사로 분류되었고, 한국전쟁으로 납북되어 사망하면서 조선일보는 몰락했으나 내분을 수습하고 다시 회사를 일으켜 세웠다. 1955년 방일영장학회를 조직, 고학생들의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조선일보 재직기간 중이던 1980년대 조선일보를 급팽창시켜 발행유가부수 1위의 신문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같은 성장과정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전두환 군사정권과의 유착이 큰 밑바탕이 됐고, 코리아나 호텔 특혜 의혹 등 적잖은 시비를 낳기도 했다. 또한 대통령선거 등 주요한 정치전환기마다 강한 정파성을 드러내 '안티조선' 운동을 자초하기도 했으며 지금도 '족벌언론' 논란에 휘말려있는 상태다.

방일영장학회는 1974년부터 서울대·연대·고대 학생들을 매년 10여명 선발해 수업료 전액과 생활비를 지급해 왔다. 지금까지 3백30여명이 장학금을 받았고, 최근에는 대학원생에까지 수혜 폭을 넓혔다. 이들은 졸업 후에도 서중회라는 이름으로 활발히 교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문화의 창달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비판으로는 제3공화국, 4공화국 당시 밤의 황제으로 군림하며 권언유착에 가담한 장본인의 한사람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 밖에 안티조선 운동을 자초했다는 비판도 있다.

방일영은 성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았다. 사후의 유산다툼에서 장남 방상훈의 변호사는 '잘 아시겠지만, 선대 회장님은 대한민국 기생들 머리를 가장 많이 올리신 분'이라고 말했다. 사후 일부 혼외자들이 조선일보와 방일영의 혼내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의 장남 방상훈은 독립운동가 겸 계몽운동가 윤치호의 증손녀이자 철도청 부이사관 윤영구의 딸 윤순명과 결혼했다.

혼내자 3명(1녀 2남), 혼외자 6명(첫 번째 간통상간녀 3남, 두 번째 간통상간녀 2녀 1남)이 있다.




#Article 119: 자유 소프트웨어 (389 words)


자유 소프트웨어()는 복사와 사용, 연구, 수정, 배포 등의 제한이 없는 소프트웨어 혹은 그 통칭이다. 소프트웨어의 수정 및 수정본의 재배포는 인간이 해독 가능한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가 있어야만 가능하며, 소스 코드는 GPL 등의 라이선스를 통하거나, 혹은 극히 드물게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되기도 한다.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은 초창기의 컴퓨터 사용자들이 이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1983년에 시작되었다.

자유 소프트웨어는 완전히 무료로 또는 최소한의 금액만을 받고 자유롭게 배포되어야 하며 자유 소프트웨어를 통한 비즈니스 모델들은 대개 고객 지원이나 커스터마이징 등을 통한 것들이다. 반면 독점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비즈니스 모델들은 사용자가 합법적으로 소프트웨어를 이용하기 위한 허가를 위해서 반드시 일정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자유 소프트웨어와는 맞지 않는다.

자유 소프트웨어는 이제 거대한 전 세계적인 움직임으로 확산되었으며, 개인 및 거대 단체와 정부 기관 등에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아파치 웹 서버나 MySQL 데이터베이스, PHP 스크립트 언어 같은 자유 소프트웨어들은 서버 측 인터넷 애플리케이션 영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완벽히 자유로운 컴퓨터 환경은 리눅스나 FreeBSD 등의 시스템 소프트웨어들을 기본으로 한 많은 패키지들을 통해서 구성할 수 있다. 자유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웹 브라우저나 오피스 제품군 혹은 멀티미디어 플레이어 등의 거의 대부분의 데스크톱 애플리케이션들을 자유 소프트웨어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많은 영역에서 개인 사용자를 위한 이런 소프트웨어들은 경쟁 독점 소프트웨어들에 비해 미미한 시장 점유율만을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자유 소프트웨어들은 온라인으로 무료로 제공되거나, 오프라인으로 적당한 가격으로 배포된다. 그러나 이것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자유 소프트웨어의 경제적 가능성은 IBM이나 레드햇, 썬 마이크로시스템즈 등의 거대 회사들에 의해 인식되었다. 주력 산업이 IT 영역이 아닌 많은 회사들이 인터넷의 홍보 및 판매 사이트를 위해 비용이 적게 들고 애플리케이션을 쉽게 수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 소프트웨어를 선택했다. 또한 소프트웨어 이외의 산업에서도 그 연구와 개발을 위해서 자유 소프트웨어의 개발과 유사한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은 좀 더 공개된 개발 과정을 생각하고 있었고, 마이크로칩과 같은 하드웨어들은 카피레프트 라이선스가 적용된 명세서와 함께 개발되기 시작했다.(오픈코어 프로젝트를 참조.) 크리에이티브 커먼스나 자유 문화 운동 등의 움직임들도 또한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례이다.

자유 소프트웨어를 이해하려면 먼저 자유에 무게중심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자유는 소프트웨어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며 자유롭게 이용함을 말한다. 자유에는 일정한 책임이 따르게 된다. 자유롭게 이용하더라도 출처를 밝히고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유는 본인 혼자서 자유롭게 쓴다 하더라도 결국 재생산, 재배포 등의 활동이 수반될 수 있기 때문에 책임범위 안에서 활동할 수 있다.

자유는 결국 책임을 수반한다고 보고 책임을 다하는 것은 출처를 밝히고 사용조건을 준수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유 소프트웨어에 대한 정의는 남이 만든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경우 책임을 지겠다는 최소한의 조건을 이행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Article 120: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550 words)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GNU General Public License, GNU GPL 또는 GPL)는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에서 만든 자유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로, 소프트웨어의 실행, 연구, 공유, 수정의 자유를 최종 사용자에게 보장한다. 대표적으로 리눅스 커널이 이용하는 사용 허가이다. GPL은 가장 널리 알려진 강한 카피레프트 사용 허가이며, 이 허가를 가진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면 파생된 프로그램 역시 같은 카피레프트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철학에서 GPL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자유 소프트웨어의 권한을 누리며 카피레프트를 사용함으로써 그러한 자유가 보전되고, 이전 작업 내용을 수정하거나 다른 내용을 추가하는 것도 허용됐다. 이는 허용적인 자유 소프트웨어 사용 허가로서, BSD 사용 허가가 대표적인 예이다.

GNU 약소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The GNU Lesser General Public License, LGPL)는 이를 변형하여 더 허가된 형태로서,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를 염두에 둔 것이다. 또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 (GNU FDL)은 GNU 소프트웨어에 대한 문서의 사용 허가로 시작하였으나 위키백과 프로젝트와 같이 다른 문서 형태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다만 현재까지 이 허가서는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 등에서만 법원의 판단 등으로 합법한 허가서로 인정받았고, 대다수 국가에서는 이에 따른 법률적 판단을 받은 바 없다. 대한민국 내에서도 직접 이 허가서가 합법한가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없었으며, 다만 허가서라는 특성상 준법행위를 하는 다수는 분쟁없이 이 허가서의 제약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 내에서도 한 차례 법원의 판단을 받을 뻔했던 엘림넷과 하이온넷 사건이 있었으나, 회사 기밀 유출 사건으로 형사기소되는 바람에 중요 쟁점일 수 있었던 GPL에 대한 판단은 형사법원에서 다루지 않고 다른 이유로 1, 2심 법원에서 유죄를 판결, 최종 확정한 바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적어도 공정거래위원회 등을 통해 표준 약관심의 따위를 받아 확정지을 필요가 있으며,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표준 허가서가 부당하다는 법률적 판단도 없으므로, 이 허가서의 조건을 위반할 시 저작자로부터 기소당할 수 있다.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는 누구에게나 다음의 다섯 가지의 의무를 저작권의 한 부분으로서 강제한다.

GPL은 미국의 리처드 스톨만(Richard Stallman)이 GNU-프로젝트로 배포된 프로그램의 라이선스로 사용하기 위하여 작성하였다. 이것은 Emacs, GNU 디버거(GDB), GNU 컴파일러 모음(GCC)에서 사용된 라이선스의 초기 판의 통합에 기반하고 있다. 이 라이선스들은 현재 GPL과 비슷한 조항들이 있으나, 각각의 프로그램 고유의 라이선스였다. 스톨만의 목표는 어떤 프로그램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라이선스를 만들어서 여러 프로젝트에서 코드를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목적에 부합하는 저작권의 형태로서 GPL이 1989년 1월에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GPL은 오늘날 자유 소프트웨어 저작권 가운데 가장 널리 쓰이고 있으며, 대부분의 GNU 프로젝트는 GPL과 LGPL의 규준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모든 LGPL의 규준에 따르는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는 동시에 GPL의 규준에 따르고 있다.

GPL의 버전 1은 1989년 1월에 발표되었다(). 이것은 자유 소프트웨어에서의 두 가지 중요한 자유를 보장해 주었는데, 하나는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를 공개하지 않은 채 바이너리 파일만 배포하는 것을 막는 경우로 이것을 막기 위해 GPLv1에는 프로그램을 GPLv1로 배포할 때는 사람이 이해하기 쉬운 소스 코드를 같이 배포해야 한다는 조건이 들어갔다.

두 번째 문제는 프로그램에 추가적인 제약을 걸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고, 이를 막기 위해 GPLv1 프로그램을 수정한 프로그램은 원래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GPLv1을 따라야 한다는 조건이 들어갔다.

GPL 버전 2는 1991년 6월에 발표되었다().
중요한 변경 사항은 자유냐 죽음이냐에 자세히 명시되어 있다. 이 내용은 GPL 프로그램을 배포하는 것을 막는 조건, 예를 들어 특허로 인하여 추가적으로 돈을 지불해야 한다거나 하는 일이 발생하여 소스 코드의 공개가 불가능하고 실행 바이너리 프로그램만 배포하려고 한다면 소스 코드 뿐만 아니라 실행 바이너리 프로그램조차 배포할 수 없도록 보완했다.

그리고 1990년대에 이르러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에 대해서는 조금 약화된 GPL 라이선스가 전략적으로 더욱 유용하다는 의견이 많아졌다. 이에 대한 내용을 LGPL(the Library General Public License)이라고 하여, 1991년 6월에 발표된 GPLv2와 동시에 같이 발표되었다. 이 두 가지의 내용은 1999년 LGPL v2.1로 발전되었고 LGPL(GNU Lesser General Public License)이라고 불렀다.

GPL 버전 3은 2007년 6월 29일에 발표되었다.




#Article 121: 일본어 (1618 words)


일본어(, )는 주로 일본에서 사용되는 언어이다. 줄인 말로 일어(日語, Riwen, Tiếng Nhật)라고도 한다. 문자는 히라가나 가나와 한자()를 사용한다. 일본의 사실상 법적 공용어이다.
주로 일본인이 사용한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교육 받은 대부분의 사람은 일본어를 모어로 한다. 일본어의 문법 체계나 음운 체계를 반영한 수화로는 일본어대응수화가 있다.

사용 인구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일본 국내의 인구 및 일본국 국외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일본계 외국인, 일본에는 약 1억 4천만 명 이상이 이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추정된다. 통계에 따라 수치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이 수치가 맞다면 일본어는 모어 화자 수순 언어 목록에서 상위 10위 이내에 드는 언어다.

에스놀로그에 따르면, 언어별 사용자 수에서 일본어는 아홉 번째로 사용자 수가 많다.

일본어의 음운은〈〉와〈〉을 제외하고 모음으로 끝나는 개음절 언어의 성격이 강하고, 또한 표준어를 포함해 많은 방언이 모라를 가지고 있다. 악센트는 고저 악센트를 띤다.

이와 더불어 본래의 옛 일본어인 야마토 고토바()에서는 원칙적으로

등의 특징이 있었다.

문장은 주어 - 수식어 - 술어의 어순으로 구성된다. 수식어는 피수식어의 앞에 위치한다. 또한 명사의 격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순이나 어미를 바꾸는 것이 아닌 문법적인 기능을 나타내는 기능어(조사)를 뒤에 덧붙인다. 이러한 구성에 따라 언어유형론 상에서 어순적으로는 SOV형의 언어로, 형태적으로는 교착어로 분류 된다.

어휘는 옛날의 야마토 고토바 이외에 근대 이후에 들어서는 서양어를 중심으로 하는 외래어가 증가하고 있다.

대우 표현으로는 문법적, 어휘적으로 발달한 경어 체계가 있으며, 서술되는 인물간의 미묘한 관계 차이를 나타낸다.

일본어는 지방별로 다양한 방언이 있으며, 특히 류큐 제도의 방언은 다른 방언들과 차이가 두드러진다. 근세 중기 까지는 교토 방언이 중앙어의 지위에 있었지만 근세 후기에는 에도 방언의 지위가 높아졌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의 현대 일본어에서는 도쿄의 야마노테에 거주하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언(야마노테코토바)을 기반으로 표준어(공통어)가 형성되었다.(〈표준어#일본〉문서 참조)

표기 체계는 그밖의 여러 언어들에 비해 복잡하다. 한자(국자를 포함한다. 음독 및 훈독으로 읽는데 쓰인다.)와 히라가나, 가타카나가 일본어에 쓰이는 주요 문자이며, 항상 이 세 종류의 문자를 짝지어 표기한다. 그밖에 로마자나 그리스 문자(의학・과학용어에 주로 이용) 등도 자주 쓰인다. 또한 가로쓰기와 세로쓰기 병용된다.(표기 체계의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일본어의 표기 체계〉문서 참조）

음운은〈자음＋모음〉음절을 기본으로 하며, 모음은 다섯 종류 밖에 없는 등 알기 쉬운 구조로 이루어진 한편, 직음()과 요음()의 대립,〈1음절 2모라〉의 존재, 무성화모음, 말의 구조에 따라 높낮이가 바뀌는 고저 악센트 등의 특징이 있다.

일본어는 주로 일본에서 쓰인다. 일본어 사용 인구에 대한 조사는 일본국 국내외를 불문하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일본국의 인구 수가 곧 화자 인구수라고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다.더구나 田野村忠温가 1977년부터 1997년까지 간행된 10점(판의 차이를 포함하면 16점)의 자료를 조사한 결과, 저마다 기재된 일본어 화자 인구는 최소 1억 200만명, 최다 1억 2500만명 이상이었다. (  (증보 2판, 2013년 12월 23일에 확인))

일본어를 직접적으로 일본의 공용어 내지 국어로 정하는 법적 규정은 없다. 하지만 애초부터 법령은 일본어로 기록되어 있고 재판소법에서는 “재판소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한다.”(동법 74조)라고 규정되어 있으며, 문자·활자문화진흥법에서는 “국어”와 “일본어”를 동일시한다(동법 3조, 9조). 그 밖의 많은 법령에서도 일본어가 유일한 공용어 및 국어임이 당연한 전제로 깔려 있다. 또한 법문 뿐만이 아닌 공용문은 모두 일본어만 쓰이며, 일본국의 학교 교육에서는 일본어가 “국어” 과목으로서 교육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TV나 라디오, 영화 등의 방송, 소설이나 만화, 신문 등의 출판 분야에서도 거의 대부분 일본어가 쓰이고 있다. 일본국 외의 드라마나 영화가 방송되는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일본어로 번역되어 자막이 달리거나 음성이 일본어로 더빙되어 방송되는 등 시청자 및 청취자가 일본어만은 당연히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이러한 자막이나 더빙이 달려 방송된다. 외국어 그대로 방송되거나 출판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것들은 해외로 발표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논문이나 혹은 일본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또는 외국어 학습자 등 한정된 사람을 대상으로 하며, 절대다수의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일본 외에서는 주로 라틴 아메리카(브라질, 페루, 볼리비아, 도미니카 공화국, 파라과이 등)나 하와이 등의 일본인 이민자 사이에서 일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관찰되지만,는 하와이의 일본계 사람의 담화 인용을 담아 보고한 저널이다.에 따르면 1979년에서 1980년까지의 조사에서 브라질의 일본계 사람 중'일본어를 유창히 사용한다'고 대답한 사람은 1950년 이전 태어난 사람의 20.6퍼센트, 이후에 태어난 사람의 8.3퍼센트이다. 일본계 사람의 3세, 4세로 세대가 내려 갈수록 비 일본어 화자가 늘어가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본 패전 이전에 일본의 식민지 하에 있었던 한반도, 타이완, 구 만주국 영토, 사할린 섬, 남양 제도(현재의 괌, 북마리아나 제도, 팔라우, 마셜 제도, 미크로네시아 연방) 등의 지역에서 일제 당시 일본어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 중 현재에도 일본어를 기억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조사도 있다. 타이완에서는 타이완 원주민이 다른 부족과 대화할 때 일본어가 종종 쓰이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팔라우의 앙가우르 주에서는 일본어를 공용어의 하나로 채용하고 있지만 현재 앙가우르 주 내에는 일본어를 일상 회화에 쓰는 주민은 존재하지 않아 실질적인 주 공용어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으며, 일본국과의 우호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요소로만 남아 있다.

일본국 외의 일본어 학습자는 대한민국에 약 96만명, 중화인민공화국에 약 83만명, 인도네시아에 약 72만명을 비롯해 365만명에 이르며,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학습자 수가 전체 학습자의 8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어 교육이 행해지는 지역은 125개국과 8지역에 이르고 있다. 또한 일본국 국내의 일본어 학습자는 아시아 지역의 학습자 약 14만명을 중심으로 약 17만명에 이른다.

일본어를 포함하는 일본어족의 계통은 분명하지 않다. 계통에 관한 몇가지 이론과 가설이 있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의견이 모이지 않고 있다.

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설은 메이지 시대 말부터 특히 주목받았다. 이러한 설의 근거로는 고대 일본어(야마토 고토바)의 어두에 r음(유음)이 오지 않는 점, 일종의 모음조화 가 보이는 점 등이 있다. 다만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 자체는 언어간의 친족 관계가 증명되어 있지 않아 고대 일본어에 위와 같은 특징이 나타나는 것이 일본어가 유형상〈알타이형〉언어 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남방계의 오스트로네시아어족과는 음운 체계나 어휘가 유사하다고 지적되고 있지만, 그러한 예시가 충분치 않고 단순한 추정이나 불확정된 예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드라비다어족과의 관련을 주장하는 설도 있지만 이를 인정하는 연구자는 적다. 오노 스스무는 일본어의 어휘나 문법 등이 타밀어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설을 주장하지만 비교언어학의 방법상의 문제로 인해 비판이 많다.

아이누어는 어순(SOV형)에 있어서는 일본어와 유사하지만 문법과 형태는 유형론적으로 일본어와는 다른 포합어에 속하며, 음운 구조도 유성, 무성의 구별 없이 폐음절이 많은 등의 차이가 있다. 기초 어휘가 유사하다는 지적 도 있지만, 그 예시가 불분명하다. 일반적으로 일본어와 닮아있는 아이누어 중에는 일본어에서 아이누어로 간 차용어가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으로서는 계통적 관련성을 나타내는 자료는 부족하다.

한국어는 문법 구조가 유사한 점이 많지만 기초 어휘가 크게 차이난다. 음운면도 고유어에 있어서 어두에 유음이 오지 않는 점, 일종의 모음조화가 보이는 점 등 앞에서 언급한 알타이어족과 공통되는 유사점이 있는 반면, 폐음절이나 자음 연결의 존재나 유성 및 무성의 없는 점 등 일본어와는 큰 차이도 있다. 한반도의 사어인 고구려어와는 수사 등 유사한 점이 있다고 일컬어지지만, 고구려어의 실태는 거의 대부분 알려져 있지 않으며, 현 시점에는 계통론상의 판단 자료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렙차어, 히브리어 등과의 동계론(同系論)도 과거 존재 했지만, 거의 대부분 의사언어비교의 범주에 머물렀다.

난세이 제도（구 류큐국 영역)의 언어는 일본어와 계통을 같이 하는 언어 중 하나(“류큐어” 내지 “류큐어족”)로 간주해 일본어와 한데 모아 일본어족으로 보는 관점과 일본어의 방언 중 하나(“류큐 방언”)로 보는 관점이 있지만, 연구자와 견해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일본어는 크게 오사카와 교토를 중심으로 하는 서일본 방언()과,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하는 동일본 방언()으로 크게 양분된다. 이즈 제도 남부에는 고대어 표현이 많이 남는 독특한 방언이 있어, 하치조어()라고 불린다.

방언에 관한 일본국의 문헌적인 기록은 현존하는 일본국의 최고의 시가집인 만요슈에서 나오는데 여기에는 아즈마 지방(현재의 간토 지방)의 방언의 노래가 있다. 나라 시대에도 이미 나라 지방을 중심으로 중앙어와 그 외 지역의 방언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국의 방언 연구는 에도 시대 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메이지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에 의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동일본 방언에는 도호쿠 방언, 간토 방언, 나고야 방언 등의 주부 방언이 있고, 서일본 방언에는 호쿠리쿠 방언, 긴키 방언(간사이 방언), 히로시마 방언 등의 주고쿠 방언, 시코쿠 방언, 하카타 방언 등의 규슈 방언 등 수많은 지역성이 강한 방언이 존재한다.

특히 오사카의 방언은 지역색이 두드러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온화한 인상의 도쿄에서 주로 사용하는 표준어에 비해 오사카는 해상 교통이 있는 상업도시였기 때문에 오사카 방언은 활발한 억양이 특징이다. 교토 방언은 ‘위쪽 말’()이라고도 하는데 수도가 오랫동안 교토에 있었다가 도쿄에 옮겨졌기 때문에 품위 있고 격조 높은 말로 여겨져 왔다.

도쿄 방언은 거의 표준어에 가깝기 때문에 표준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본래 에도 방언이라고도 불린 것으로 (히)와 (시)의 발음의 구별이 되지 않는 등 표준어와는 다르다. 홋카이도 방언도 거의 표준어에 가깝지만 특히 형용사 등에 홋카이도 특유의 방언이 포함된다.

현재 공식 장소 등에서는 평상시 방언을 말하는 사람도 표준어를 이용한다.

일본어 음소는 /m/, /n/, /p/, /b/, /t/, /d/, /k/, /g/, /s/, /z/, /h/, /r/, /y/, /w/, /N/, /Q/가 있다.

일본어는 고저 악센트를 가진 언어이다.

일본어에서는 보통 한자와 히라가나, 가타카나 등 세 종류의 문자를 주로 사용하여 표기되며, 그 밖에 로마자와 아라비아 숫자도 함께 사용한다. 이들 가운데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는 표음문자고, 한자는 표의문자이다.

전통적으로 메이지 시대 초반까지는 일본어의 맞춤법에서는 띄어쓰기를 사용하지 않고 히라가나만을 사용하거나 교육용 문서에서는 단어 사이에 공백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구두점 등을 사용할 때도 서양의 문장 부호들(따옴표, 물음표, 느낌표, 온점 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었다.

오늘날 현대에는 거의 대부분의 공문서와 사문서 모두 단락 부호로 (한국어 맞춤법의 ‘,’에 해당) 및 (한국어 맞춤법의 ‘.’에 해당)이 넓게 이용되고 있다. 1951년 10월 30일, 일본국의 국어심의회 건의 제3의 5의 주2에서는 ‘,’및 ‘.’를 사용하도록 가이드라인이 짜여졌지만 실제로는 거의 대부분 준수되고 있지 않다.

아래는 일본어의 오십음()이다. '[  ]'의 안은 국제 음성 기호(IPA) 표기이다.

일본어에는 본래 일본어의 고유어인 야마토 고토바가 있었고, 한자는 뒤에 중국에서 직접 전해지거나 혹은 한반도 서해안(특히 백제 또는 고구려)을 경유하여 전래되었다. 한자를 읽을 방법은 크게, 한자와 함께 전해진 한자 본래의 음에서 온 음독( 또는 )과, 그 한자와 같은 의미를 가진 야마토 고토바()의 발음을 적용시켜 발음하는 훈독( 또는 )으로 나눌 수 있다. 같은 한자도 음독이나 훈독이 여러 개 존재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일본어에서는 하나의 한자에 여러개의 발음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生”(날 생)에는 47종류의 발음이 있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는 “水”(물 수)를 '수'라고는 읽지만 '물'이라고는 읽지 않는데, 그에 반해 일본어에서는 음독으로 '스이(すい)'라고도 읽고 훈독으로 '미즈(みず)'라고도 읽는다. 마찬가지로 한국어에서는 “金”(쇠 금, 성 김)을 '금'으로, 성씨로 쓰일 때 한정으로 '김'이라고는 읽으나, '쇠'라고는 읽지 않는데, 일본어에서는 음독으로 '킨(きん)' 혹은 '콘(こん)'으로도 읽고 훈독으로 '카네(かね)'라고도 읽는다.

한자의 위(세로쓰기에서는 오른쪽)에 작은 크기의 가나로 발음을 적은 것을 후리가나라고 한다. 후리가나를 붙일 때는 읽는 독음이 온요미인지 쿤요미인지 구별하기 위해서 온요미의 경우에는 가타카나로, 쿤요미의 경우에는 히라가나로 붙이는 게 정석이나, 구별이 필요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상관없이 히라가나로 표기하기도 한다. 만요슈에는 한자를 차용하여 표음문자처럼 이용한 만요가나가 사용되었다.

일본어와 가나를 외우기 위한 방법으로 이로하 노래()가 있다. 여기에는 을 제외한 모든 글자가 한 번씩 들어 갔으며, 일부 변형에는 도 들어가기도 한다. 과거에는 이 노래의 순서대로 가나의 순을 매기기까지 했었고 현재까지도 종종 쓰인다. 이런 종류의 문장을 팬그램이라 부른다.

그 밖에 이전에도 유사한 방법으로 아메쓰치노우타나 대위이 노래 등이 있었다.

다음은 일상적으로 자주 쓰이는 일본어 표현들이다. 로마자 표기는 헵번식 로마자 표기법을 따른다.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7세기 이전에도 교류가 있어서 일본어를 접한 건 오래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강제로 교육시키기도 했다. 한국에서 일본어 교육이 시작된 것은 조선 말기이나,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정부 수립 이후였다. 1970년대 초에 고등학교 교과목에 일본어가 제2외국어 중 하나로 추가되었고, 2001년에는 '생활 일본어'가 중학교 교과목에 포함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학 수험생들은 수능에서 일본어 I을 선택할 수 있다.




#Article 122: 허수 (493 words)


허수(虛數, imaginary number)는  실수가 아닌 복소수를 뜻한다.

실수의 특성상, 제곱하면 무조건 0 또는 양수가 되기 때문에 이차방정식 을 실수의 범위에서 해를 전혀 구할 수가 없다. 또한 수직선에 모든 실수를 하나하나 대응시키면, 수직선은 빈틈없이 채워지는 것으로 볼 때, 우리가 존재한다고 느낄 수 있는 수는 실수밖에 없다는 것은 필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꼴과 같이 실수 범위에서 전혀 구할 수 없는 해를 구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실수의 성질로는 불가능한 제곱해서 음수가 되는 수를 만들어내기위해 제곱하여 -1이 되는 수 를 만들어내면, 위의 이차방정식의 해는 또는이 되므로 이 수는 우리가 존재한다고 느끼는 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차방정식의 해가 되기 때문에 수학자들은 이 수가 수학적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고 허수로 정의했고, 만 있으면 모든 허수들을 나타낼 수 있으므로 이 수를 imaginary number의 앞글자를 따서 허수 단위 라고 정의했다.

복소수는 실수와 허수를 포괄하는 수이며,  (단, a, b 는 실수)로 나타낼 수 있고, 이때 a를 실수부분, b를 허수부분라고 한다.

b가 0일 경우 위의 수는 실수가 되고 0이 아닐때에는 허수가 되는 것으로 볼 때, 양수는 음수, 유리수는 무리수로 대응되는 것처럼 실수는 허수와 대응되는 관계가 있다. 허수는 단순히 억지로 만들어진 수가 아닌, 어떤 한 성질이 있는 수가 있으면 필연적으로 그와 반대되는 수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수이다.

또한, 허수는 기존에 있었던 수직선, 실수축(가로)에 허수축(세로)를 덧붙여 복소수평면을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허수가 정의되기 전까지만 해도, 수의 개념은 1차원적이었다. 즉, 수의 개념은 오직 수직선으로만 표현되었다. 그러나 허수가 정의된 후, 수의 개념은 2차원으로 확장되었다. 즉, 수의 개념은 복소평면으로 표현된 것이다. 수의 틀을 직선에서 평면으로 확장시킨 것은 모두 허수의 덕택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허수로 인해 수의 틀이 확장되었다는 것은, 언젠가는 또 새로운 어떤 수가 발견되어 수의 틀이 입체로 확장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렇듯 허수의 발견은 복소수와 대응되는 수가 언젠가 누군가의 필요로 인해 만들어질 것임을 알려주는 위대한 발견이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헤론은 거듭제곱하여 음수가 되는 수에 대한 개념을 기록한 바 있다. 1572년 이탈리아의 수학자 라파엘 봄벨리가 허수 단위를 정의하였다. 이후 르네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의 부록 〈기하〉()에서 상상의 수(imaginary numbers)라고 부른 데에서 허수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 허수라는 이름은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에 의해 널리 알려졌으며, 오일러는 허수 단위 기호로  를 도입하였다. 또한 오일러는 이것을 방정식 일때 이 방정식을 만족하는 정수해는 없다는 것을 증명할 때 사용하였다. 1799년 카스파르 베셀이 복소수의 기하학적 표현을 완성하였다.

미국 수학에서 허수란  형태, 즉 순허수이다. 즉 실수에 허수단위 가 곱해진 형식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제곱하면 음수가 된다.

한 평면상에 직교 좌표계를 정하고 이에 대한 한 점 Z 의 위치 (x, y)를 로 정하여 복소수를 평면상의 점으로 표시할 수 있다. 이 때, 좌표와 복소수는 일대일 대응을 이룬다. 또한, 이렇게 나타낸 점 Z(x,y)는 극좌표를 사용하여 원점에서 부터 점 Z 사이의 반지름과 각도로서도 나타낼 수 있다. 즉,

가 된다.

한편, 왼쪽의 그림과 같이 실수부는 같고 허수부의 부호만 반대인  와  를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켤레복소수(복소켤레)라고 한다. 켤레 복소수는 극좌표에서 반지름이 같고 x축에 대해 대칭인 점이 된다.

복소평면에서 허수의 위치를 극좌표를 사용하여 나타낼 수 있으므로, 임의의 단위 원을 그려 복소수와 삼각함수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1714년 영국의 수학자 로저 코츠는 자연로그가 다음과 같은 삼각함수의 관계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를 오일러의 공식이라 한다.

에서 허수는 복소수와 함께 다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를 복소수체라고 하며  로 나타낸다.




#Article 123: 선형대수학 (252 words)


선형대수학(線型代數學, )은 벡터 공간, 벡터, 선형 변환, 행렬, 연립 선형 방정식 등을 연구하는 대수학의 한 분야이다. 현대 선형대수학은 그중에서도 벡터 공간이 주 연구 대상이다. 추상대수학, 함수해석학에 널리 쓰이고 있다.

선형대수학은 자연과학과 공학에도 널리 활용된다. 선형 연립방정식을 푸는 좋은 방법으로는 소거법과 행렬식이 있다.

선형대수학은 2차원 혹은 3차원의 직교 좌표계에 대한 연구로 부터 시작되었다.

선형대수학에서 기본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다.

보통 3차원까지의 벡터는 그림 등으로 시각적 표현이 가능하지만 그 이상의 벡터는 벡터의 각 구성요소를 괄호 안에 나열함으로써 표기한다.

여러 가지 문제를 수학으로 해결하는 데 있어 선형대수학의 개념은 매우 중요한데, 선형화 혹은 선형 근사를 통해, 복잡한 비선형 방정식 문제를 간단한 선형 방정식 문제로 변환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형대수학의 선형성()이라는 성질은 직관적으로는 아래와 같은 개념에서 시작되었다.

(는 상수를, 는 변수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선형성은 변수의 지수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차함수()와 같은 형태를 가리킨다. 선형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비선형이 있는데,  등 일차함수와 같은 형태의 성질을 만족시키지 않는 함수들을 가리킨다. 선형의 직관적인 이해는 일차함수와 동일시해서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선형의 엄밀한 의미는 일차함수보다 더 확장된다. 수학적으로 정확한 선형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정의) 정의역 에서 임의의 원소 를 치역 에 대응시키는 연산 는 다음과 같은 성질을 만족시킬 때 선형이라고 한다. 여기서 c는 임의의 상수이다.

예를 들어 일차함수 를 생각해보자. 로 (1)번 조건을 만족시키고 로 (2)번조건을 만족시킨다. 그러므로 이 함수는 선형이다. 이차함수 의 경우에는 로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다른 선형연산의 예로는 회전변환, 원점을 지나는 직선에 대한 대칭변환, 어떤 벡터 공간에 대한 수직입사 등이 있다.

학부과정에서 가르치는 선형대수학의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다만 이 내용은 일반적으로 이와 같이 가르치는 내용이며 각 학교마다 비중있게 다루는 부분이 다를 수 있고 내용을 추가하거나 뛰어넘을 수 있다.




#Article 124: 커널 (컴퓨팅) (961 words)


컴퓨터 과학에서 커널()은 컴퓨터의 운영 체제의 핵심이 되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하나로, 시스템의 모든 것을 완전히 통제한다. 운영 체제의 다른 부분 및 응용 프로그램 수행에 필요한 여러 가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핵심(核心)이라고도 한다.

커널은 운영 체제의 핵심 부분이므로, 커널의 역할 역시 운영 체제의 핵심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초창기의 컴퓨터에서 운영 체제 커널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다. 초기의 프로그램은 하드웨어 추상화나 운영 체제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컴퓨터만으로 불러들인 다음 실행될 수 있었으며, 이것은 초창기 컴퓨터들의 일반적인 운영 방식이었다. 다른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가 켬으로써 다시 입력자료를 읽어들여야 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로더와 디버거 같은 작은 프로그램들이 상주해 있는 것이, 다른 프로그램으로 교체하거나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로더, 디버거들이 초기 운영 체제 커널의 기초가 되었다.

단일형 커널은 하드웨어 위에 높은 수준의 가상 계층을 정의한다. 높은 수준의 가상 계층은 기본 연산 집합과 관리자 모드에 작동하는 모듈인 프로세스 관리, 동시성, 메모리 관리 등의 운영 체제 서비스를 구현하기 위한 시스템 콜으로 되어 있다.

이 연산들을 제공하는 모든 모듈이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있더라도 모든 모듈이 같은 주소 공간에서 실행되기 때문에 코드의 집적도는 매우 조밀하며 수정하기 어렵고 한 모듈의 버그는 시스템 전반을 멈추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구현이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완성되면 구성 요소의 내부 집적이 내부의 시스템 이용을 효과적이게 하여 좋은 단일형 커널은 높은 효율을 보인다. 단일형 커널의 지지자들은 코드의 정확성 여부와 그런 코드(부정확한 코드)가 커널에 포함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고 그것은 마이크로커널에 비해 조금 더 우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리눅스, FreeBSD, 솔라리스와 같은 최신의 단일형 커널은 실행 모듈을 실시간으로 읽어들일 수 있다. 실시간으로 실행 모듈을 읽는 특징은 커널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손쉽게 확장할 수 있게 커널 공간의 코드의 양을 최소한으로 유지시켜 준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NT 제품군(NT, 2000, XP, 2003, 비스타,7,8,8.1,10)은 처음에는 혼합형 커널이었으나 나중에 나온 것들은 단일형 커널로 바뀌었다. 윈도우 NT 시리즈는 상위의 서비스들을 NT executive이라는 서버로 구현하였다. Win32 특성은 처음에는 사용자 모드의 서버 형태로 구현되었으나, 최근 버전에서는 관리자 주소 영역으로 이동하였다. 다양한 서버들이 로컬 프로시저 콜(LPC: Local Procedure Call)이라 불리는 주소 영역간 매커니즘을 통해 통신하며, 성능을 최적화하기 위해 공유 메모리를 이용한다.

주로 다음 운영 체제들의 커널이 단일형 커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이크로커널은 하드웨어 위에 매우 간결한 추상화를 정의한다. 기본 연산 집합과 운영 체제 서비스를 구현한 스레드 관리, 주소 공간, 프로세스간 통신의 작은 시스템 콜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커널이 제공하는 네트워킹과 같은 다른 서비스들은 사용자 공간 프로그램인 서버로 구현한다.

운영 체제는 서버를 다른 일반적인 프로그램처럼 간단히 시작하고 끌 수 있다. 이를테면 네트워킹 지원이 필요 없는 작은 시스템에서는 간단히 서버를 끄면 된다. 이 경우 전통적인 시스템에서는 재컴파일이 필요했고 일반 사용자의 능력 밖의 일이다. 이론적으로 마이크로커널에서 시스템은 더 안정적이다. 서버가 중단될 때 커널의 충돌이 아니기 때문에 단 하나의 프로그램만 내려버리면 된다.

그러나 서버가 실패한 후 시스템 상태도 잃어버릴 경우 응용 프로그램이 계속 수행되는 것은 그 응용 프로그램이 막 복사된 다른 서버를 이용하게 되더라도 보통은 매우 힘들다. 예를 들어 TCP/IP 연결을 요구하는 (이론적인) 서버가 다시 시작되면 응용 소프트웨어는 연결이 끊어졌습니다.라고 말하고 서버의 새 인스턴스를 찾아서 다시 연결한다. 그러나 파일과 같은 다른 시스템 객체는 이렇게 편리한 의미론이 없다. 이러한 편리가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다. 기록할 정보들은 모두 미리 보관해 두어야 한다. 서버 간의 하나의 서버를 다시 시작할 때 중요 상태를 보호하기 위해 트랜잭션, 복제, 대조점의 데이터베이스 기술이 요구된다.

일반적으로 마이크로커널은 전통적인 디자인의 수행을 잘못하고 때로는 극적이다. 이유는 응용과 서버 간의 자료 교환을 위해 커널을 출입하는 문맥 교환 때문이다. 주의 깊은 조율이 오버헤드를 극적으로 줄여줄 것으로 믿어져 왔으나 90년대 중반부터 대부분의 연구원들은 시도를 포기했다. 최근에 새 마이크로커널은 성능을 최우선으로 설계하며 이 문제를 넓은 부분에서 다루었다. 그러나 현재 운영 체제 시장은 자기 몸 사리며 마이크로커널 설계에 소극적이다.

마이크로커널과 마이크로커널에 기반한 운영 체제의 예

혼합형 커널은 본질적으로 마이크로커널을 따르나, 일부 커널의 비(非)본질적 기능이더라도 사용자 레벨에서 수행될 때 성능상 느린 코드들을 커널 레벨에서 수행하도록 수정한 것을 말한다. 이는 다양한 운영 체제 개발자들이 마이크로커널 기반의 설계를 받아들이던 시점에 순수한 마이크로커널의 성능상의 한계를 인식하고 타협한 결과이다.

예를 들어, OS X의 커널인 XNU는 Mach 커널 3.0 마이크로커널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전통적인 마이크로커널 설계의 지연 현상을 줄이기 위해 BSD 커널의 일부 코드들을 들여와 동일한 주소 영역에서 실행하고 있다.

DragonFly BSD는 첫 번째 비 Mach 기반의 BSD OS로 혼합형 커널 구성을 적용한 예이다.

하이브리드 커널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도 포함된다.

혼합형 커널이라는 말을 부팅 후에 모듈을 읽어들일 수 있는 단일형 커널과 혼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혼합형 커널은 단일형 커널과 마이크로커널 설계 양쪽의 구조적 개념과 작동방법에 대한 특히 메시지 전달과 어떤 중요하지 않은 코드는 사용자 공간에 들어가는 반면 어떤 코드는 성능의 이유로 커널 공간에 포함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다.

엑소커널은 운영 체제 설계에 대한 급진적인 신개념으로 말단 이론을 따르는 수직 구조의 운영 체제이다.엑소커널의 구상은 개발자에게 강제적인 추상화를 줄여 하드웨어 추상화에 대해 선택지를 다양하게 하는 것이다. 엑소커널은 기능이 보호를 보장하는 것과 자원을 분배하는 것만 하기에 매우 작아 편익보다 단순함을 제공한다. 이런 특성은 오히려 모든 사용자가 각기 실제 호스트 컴퓨터의 자원을 모방한 컴퓨터를 받는VM/370 운영 체제와 비슷하다. 반면에 모놀리식 커널이든 마이크로 커널이든 전통적인 커널 설계는 하드웨어 추상화 계층(HAL)이나 장치 드라이버 아래 자원을 숨김으로써 하드웨어를 추상화한다. 한 예로 전통적인 시스템에서 물리 메모리가 할당할 때 실제 위치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오프셋과 기억 관리 장치를 통해서만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

TUNES Project 와 UnununiumOS 는 노커널 실험이다. 노커널 소프트웨어는 단일 중앙 입구의 제약이 없다.

 

타넨바움과 토르발스의 토론에 제시된 두 진영의 의견은 일장일단이 있다.

두 진영의 성공 사례가 있다. 모놀리식 커널은 정확한 설계가 쉽고 마이크로커널 기반 시스템보다 빨리 성장할 수 있다. 반대로, 마이크로커널은 종종 임베디드 로봇 산업이나 의료 컴퓨터 등에 이용될 수 있다. 운영 체제의 컴포넌트를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고 메모리 공간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근대의 모듈을 읽어오는 모놀리식 커널에서도 이런 것은 불가능하다.

Mach는 일반적인 용도의 마이크로커널로 알려졌지만 특별한 용도로 설계된 마이크로커널도 있다. L3는 마이크로커널이 느리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L4는 L3의 후예로 Fiasco 구현으로 대중적인데 L4 프로세스들과 별도의 공간에서 리눅스 구동이 가능하다. 이런 특성의 스크린숏은 freshmeat.net에서 구할 수 있다. Pistachio라 불리는 새 버전도 역시 가능하다.

QNX는 1980년 초에 나타난 운영 체제로 극 최소주의 마이크로커널 설계로 이루어졌다. 이 시스템은 Mach가 목표로 했던 마이크로커널 이념을 더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QNX는 우주 왕복선의 로봇 팔과 (작은 실수가 수십억의 손실을 입히는 허블 우주망원경의 거울 등의) 오차에 민감한 유리를 닦는 기계에도 적용되었다.




#Article 125: 도스 (1216 words)


도스(, DOS)는 디스크 운영 체제의 일종으로서 디스크에 읽고 쓰기 등의 명령을 수행하는 프로그램이다. 명령어를 직접 치는 명령 줄 기반이다.

이 시스템들 중 어느 것도 간단히 도스라고 불리진 않았다. (1960년대의 이와 관련이 없는 IBM 메인프레임 운영 체제에만 사용되었음) 이와 무관한 수많은 비x86 마이크로컴퓨터 디스크 운영 체제는 도스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이들을 사용하는 컴퓨터에 대해 논할 때 단순히 도스라고 부르곤 했다. (아미가도스, AMSDOS, 애플 도스, 아타리 도스, 코모도어 도스, CSI-DOS, 프로도스, TRSDOS)

디지털 리서치의 CP/M이 가장 대표적인 도스의 원형이다. 8비트 개인용 컴퓨터에는 CP/M이 널리 사용되었으나 애플 II는 독자적인 애플 도스(정식 명칭은 그냥 DOS)를, MSX는 MSX-DOS를 썼다. 이들 컴퓨터도 나중에 CP/M을 지원하지만 디스크의 포맷이 달라서 서로 바꾸어 쓸 수는 없었다. IBM-PC에서는 이를 모방한 QDOS로부터 PC-DOS와 MS-DOS가 나왔으며, 나중에 CP/M은 16비트 버전인 CP/M-86 바탕으로 DR-DOS로 나왔다.

현재는 DR-DOS의 후기작인 오픈도스와, NTFS 등을 지원하는 공개 도스 프로젝트인 프리도스가 있다. MS-DOS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 도스이다. PC-DOS는 IBM의 도스이다. 버전 5.0까지는 사실상 MS-DOS와 같은 제품이었으나 그 이후 추가된 내용이 달라졌다. DR-DOS는 디지털 리서치사에서 만든 도스이다. 이것은 나중에 노벨 도스(Novell DOS)로 바뀌었다가 다시 칼데라 오픈 도스(Caldera OpenDOS)로 바뀐다.

윈도우 3.1 이하의 버전과 같이 초기 버전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별도 버전의 도스 위에서 실행되었다. 1990년대 초에 윈도우의 그래픽 셸은 도스 시스템에서 많이 이용되었다. 1995년에 윈도우 95가 별도의 도스 라이선스를 요구하지 않은 독립형 운영 체제로 번들되었다. 윈도우 95(및 이를 따랐던 윈도우 95과 ME)는 기본 OS 커널을 인계 받았지만 MS-DOS 구성 요소는 호환성을 위해 그대로 남겨두었다. 윈도우 미를 제외한 윈도우 95, 98과 더불어 MS-DOS 구성 요소는 윈도우를 시작하지 않고도 구동이 가능하였다. 윈도우 NT 계열 운영 체제가 널리 사용되면서, 윈도우 사용을 위해 더 이상 도스가 필요없게 되자 PC 사용자들 다수가 도스를 직접 사용하는 일은 중단되었다.

하드웨어에 직접 접근하는 도스 구조는 임베디드 장치에서 이용할 때 매우 이상적이다. 최신 판의 DR-DOS가 현재에도 이 시장에 초점을 두고 있다. ROM-DOS가 캐논 파워샷 프로 70의 임베디드 시스템에 사용되었다.

리눅스 하에서 도스 프로그램들을 거의 네이티브 속도로 구동할 수 있는 DOSEMU라는 리눅스 네이티브 가상 머신을 이용하여 여러 도스 사본들을 실행할 수 있다. 도스박스를 포함하여 여러 버전의 유닉스에서 도스를 구동하기 위한 다른 수많은 에뮬레이터들이 있다.

도스 에뮬레이터들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하에서 게임이나 다른 도스용 소프트웨어를 구동하기에 적절한 방법인데, 현대 버전은 도스와의 완전한 호환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운영 체제에서 오래된 게임을 즐기도록 고안된 도스박스가 대표적인 예이다. 다른 대안으로는  상에서 도스 운영 체제의 사본으로 도스 응용 프로그램들을 구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오버헤드는 증가되지만 더 나은 호환성을 제공한다.

모든 MS-DOS형 운영 체제들은 인텔 x86 호환 CPU를 갖춘 컴퓨터, 주로 IBM-PC 및 호환기종에서 동작한다. 특정 기계에 의존적인 MS-DOS 버전들은 수많은 비 IBM 호환 x86 기반 컴퓨터용으로 개발되었으며, 여기에는 제조업체 이름을 딴 마이크로소프트의 배포판에서부터 비 IBM-PC 호환 하드웨어와 동작하도록 설계된 버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응용 프로그램들이 직접 하드웨어 접근 대신 도스 API를 사용하는 한 IBM-PC 비호환 머신들에서도 실행이 가능하다. 1985년, 디지털 리서치는 또한 모토로라 68000 CPU용 컨커런트 도스 68K 버전 및 1990년대 초에 모토로라 CPU용 DOS/NT 파생 오리지널 프리도스 커널 DOS-C가 있었다. 이 시스템들이 도스 구조와 유사하긴 했지만, 응용 프로그램들은 이러한 x86이 아닌 CPU의 비호환 명령 집합으로 인해 이진 호환성이 없었다. 그러나 고급 언어로 작성된 응용 프로그램들은 쉽게 포팅이 가능했다.

도스는 재진입성이 없는 기본 커널 기능들을 갖춘 단일 사용자, 싱글태스킹 운영 체제이다. 즉, 한 번에 하나의 프로그램 해당 커널 기능들을 사용할 수 있으며 도스 스스로는 하나 이상의 프로그램을 한 번에 실행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이 없다. 도스 커널은 문자 입출력, 파일 관리, 메모리 관리, 프로그램 적재 및 종료와 같이 프로그램을 위한 다양한 함수를 제공한다.

도스는 기본적으로 배치 파일(파일 확장자는 .BAT)을 통해 셸 스크립트를 위한 기능을 제공한다. 이것들은 텍스트 파일로서, 문서 편집기를 이용해서 작성이 가능하다. 컴파일된 프로그램과 동일한 방식으로 실행되며, 배치 파일의 각 줄을 명령 단위로 실행한다. 배치 파일은 또한 여러 내부 명령을 이용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GOTO와 조건문을 들 수 있다. GOSUB 및 단순 산술은 DR-DOS COMMAND.COM 및 4DOS와 같은 일부 서드 파티 셸을 통해 지원되지만, 실질적인 형태의 프로그래밍이 지원되는 것은 아니다.

이 운영 체제는 문자 기반 응용 프로그램의 개발을 허용하는 API를 제공하지만 그래픽 카드, 프린터, 마우스와 같은 하드웨어 대부분의 접근을 위한 것은 아니다. 프로그래머들이 직접 하드웨어에 접근하게 하려면 각 프로그램이 개별 하드웨어 주변기기에 맞는 자체 장치 드라이버를 갖추어야 했다. 하드웨어 제조업체들은 사양을 공개하여 대중화된 응용 프로그램들을 위한 장치 드라이버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보증해야 했다.

도스는 8.3 파일 이름을 지원하는 파일 시스템을 사용하며, 여기에서 파일 이름이 8자, 확장자의 경우 3자를 사용한다는 뜻이다. 도스 2를 기점으로 계층적 디렉터리가 지원된다. 또, 각 디렉터리는 8.3 형식이지만 최대 디렉터리 경로 길이는 64자인데, 이는 도스가 관리하는 내부적인 현재 디렉터리 구조(CDs) 테이블 때문이다. 드라이브 이름을 포함하여, 도스가 온전히 지원하는 최대 길이는 마지막의 널 바이트를 포함, 드라이브:\경로\파일명.확장자를 이용하여 80자이다.

도스는 파일 할당 테이블(FAT) 파일 시스템을 사용한다. 본래 드라이브 당 최대 4078개의 클러스터를 지원하는 FAT12였다. 도스 3.0에는 16비트 할당 엔트리를 사용하여 드라이브 당 최대 65517개의 클러스터를 지원하는 FAT16 지원을 추가하였다. 도스 3.31은 32 MB 드라이브 제한을 제거하고 최대 2 GB까지 지원하는 FAT16B의 지원을 추가하였다. 마지막으로 MS-DOS 7.1(윈도우 9x의 도스 구성 요소)은 32비트 핟랑 엔트리를 사용하는 FAT32의 지원을 추가함으로써 하드 드라이브를 최대 137 GB 이상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도스 3.1을 시작으로 파일 리다이렉터 지원이 도스에 추가되었다. 초기에 네트워킹 지원을 위해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MSCDEX를 이용한 CD-ROM 드라이브 지원에 사용되었다. IBM PC DOS 4.0 또한 IFS(installable file system)를 지원했으나 사용되지 않아 도스 5.0에서 제거되었다.

도스에서 드라이브들은 식별 가능한 문자들을 가리킨다. 표준화된 관습으로, A'와 B는 플로피 드라이브를 위해 할당한다. 오직 하나의 플로피 드라이브를 가진 시스템에서 도스는 이 드라이브에 두 개의 문자를 할당하며, 프로그램들이 이들을 교체할 때 사용자에게 디스크를 스왑할 것인지 묻게 된다. 플로피에서 플로피로 복사하거나 다른 곳에서 데이터를 접근하는 동안 특정 플로피로부터 프로그램을 실행하고자 할 때 이용된다. 하드 드라이브들은 본래 문자 C와 D'로 할당되었다. 도스는 드라이브 당 하나의 활성 파티션만 지원할 수 있었다.

도스에는 내부 문자 장치로 점유하고 있는 까닭에 파일 이름을 사용할 수 없는 예약 장치명이 있다. 또, 이러한 제한은 여러 윈도우 버전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어떠한 경우에는 충돌이나 보안 취약성을 야기하기도 한다.

도스는 원래 인텔 8086/8088 프로세서용으로 설계되었으므로 최대 1 MB의 램에만 직접 접근할 수 있었다. PC 아키텍처로 인해 최대 640 KB만 사용 가능하며(기본 메모리) 그 중 상위 384KB가 예약된다.

도스 시스템들은 명령 줄 인터페이스를 이용한다. 프로그램들은 명령 프롬프트에서 파일 이름을 입력하여 시작할 수 있다. 도스 운영 체제들은 시스템 유틸리티와 같은 몇 가지 프로그램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프로그램들과 관련되지 않는 내부 명령어라 불리는 추가 프로그램들도 제공한다.

사용자에 더욱 친숙한 환경을 제공하려는 시도 속에, 수많은 소프트웨어 제조업체들은 메뉴나 아이콘 기반 인터페이스를 제공하는 파일 관리 프로그램들을 작성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가 잘 알려진 예인데,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9x가 프로그램 로더를 기본 내장하면서 가장 흔히 쓰이는 PC 호환 프로그램 로더로서 도스를 대체하였다. 텍스트 사용자 인터페이스 프로그램들에는 Mdir, 노턴 커맨더, 도스 내비게이터, 볼코프 커맨더, 쿼터데스크 DESQview, 사이드킥이 있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프로그램에는 디지털 리서치의 그래픽 인바이런먼트 매니저(본래 CP/M용으로 작성됨)와 GEOS가 있다.

마침내, 주요 도스 시스템 제조업체들이 자신들만의 환경 관리자를 포함하기 시작하였다. MS-DOS/IBM DOS 4는 도스 셸을 포함하였다. 이듬해에 출시된 DR DOS 5.0은 GEM 기반의 뷰맥스를 포함하였다.

도스는 멀티태스킹 운영 체제가 아니다. 그러나 도스는 종료 후 상주 프로그램(Terminate and Stay Resident, TSR)을 제공하여 여러 프로그램들이 메모리에 상주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시스템 타이머나 키보드 인터럽트를 후킹하여 이들이 백그라운드에서 작업을 수행하게끔 하거나 현재 실행 중인 프로그램을 적시에 호출할 수 있게 한다. PRINT 명령어는 이를 수행하여 백그라운드 인쇄 스풀링을 구현하였다. 볼랜드 사이드킥도 이 기법을 사용한다.

종료 후 상주 프로그램들은 기본적으로 이용할 수 없는 기능을 제공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CED와 도스키와 같은 프로그램들은 COMMAND.COM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능 이상으로 명령 줄 편집 기능을 제공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 CD-ROM 확장 (MSCDEX)과 같은 프로그램들은 CD-ROM 디스크의 파일을 접근할 수 있게 하였다.

일부 TSR들은 초기 수준의 태스크 전환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셰어웨어 프로그램 백 앤드 포스 (1990년)은 단축키를 이용하여 현재 실행 중인 프로그램의 상태를 디스크로 저장하고, 다른 프로그램을 불러와 전환할 수 있었다.

도스는 지배적인 PC 호환 플랫폼이었으며 수많은 유명한 프로그램들이 도스를 위해 작성되었다. 여기에는 다음을 포함한다:




#Article 126: 라플라스 변환 (112 words)


라플라스 변환()은 어떠한 함수 에서 다른 함수로의 변환으로, 선형 동역학계와 같은 미분 방정식을 풀 때 유용하게 사용된다. 피에르시몽 라플라스의 이름을 따 붙여졌다.

라플라스 변환을 이용하면, 미분 방정식을 계수방정식으로 변환하여, 문제들을 쉽게 해결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초깃값 문제의 경우 일차적으로 일반해를 구하는 단계가 필요없게 되고, 비제차 미분방정식의 경우에는 대응하는 제차미분방정식을 먼저 풀 필요가 없다. 라플라스 변환은 주어진 식을 간단한 식으로 변환한 뒤, 변형된 식을 푼다. 그리고 그렇게 풀어진 해를 다시 원식으로 변환한다.

함수 의 라플라스 변환은 모든 실수 t ≥ 0 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함수 로 정의된다.

여기서 는 를 간단히 나타낸 것이고 복소수 , σ와 ω는 실수이다.

실제 사용시에는 엄밀히 정확하지는 않지만 로 표기하기도 한다.

참고: 는 층계 함수이다.




#Article 127: IBM (224 words)


국제 사무기기 회사(國際事務機器會社, )는 미국의 다국적 기술 및 컨설팅 회사이다. 천공카드 시스템을 고안한 허먼 홀러리스가 1896년 창설한 제표기기회사가 1911년에 국제시간기록회사·Computing Scale Company·번디 제조회사와 합병해 세운 전산제표기록회사(CTR)가 이 회사의 전신이다. 터뷰레이팅 머신의 자동 표작성기는 1890년의 미국 국세 조사(國勢調査)에 사용되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CTR은 한때 경영 부진에 빠졌으나 1914년 토머스 J. 왓슨을 사장으로 영입해 급성장의 계기를 이룩했다.

이후 1924년 지금의 이름으로 변경하고 토머스 왓슨의 아들 토머스 J. 왓슨 주니어의 노력으로 PC를 개발했다. IBM이 PC를 개발한 뒤 내부를 공개 하였으며 수많은 업체들은 PC의 주변기기를 개발하였고 IBM은 로열티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PC의 기술은 빠르게 성장하였다. 그래서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PC를 사용하고 있다. IBM은 PC의 기능을 보강하여 PS/2라는 새로운 컴퓨터를 만들기도 하였다. PS/2에서는 로열티를 받으려 하였고 그로 인해 수많은 업체들과 사용자들은 PS/2를 외면하였다. 결국 PS/2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IBM은 주로 메인프레임을 위주로 한 하드웨어 업체였으나, 1990년대부터 소프트웨어, 서비스 등으로 분야를 넓혀왔다.

이 그룹은 IBM의 주된 부서 가운데 하나이다. 다음과 같은 다양한 브랜드가 존재한다:

이사회는 10인~14인이 최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관점은 상황 및 추천된 후보의 자질에 따라 융통성 있게 조정될 수 있다. 현재는 이사 12인(사내 1, 사외 11)이며, 2010년도 주총 이후에는 13인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사무엘 팔미사노(Samuel J. Palmisano)가 이사회 의장(Chairman of the Board)과 대표이사(President), CEO를 겸하고 있다. CEO의 성과는 집행 평가 및 경영자원 위원회(Executive Compensation and Management Resources Committee)에서 정기적으로 검토하고 이사회의 집행 부분(executive session)에서 매년 검토하며, 이사회 의장은 정기적으로 승계 계획 및 경영진 계발에 대해 보고한다.




#Article 128: 프랙탈 (1110 words)


프랙탈() 또는 프랙털은 일부 작은 조각이 전체와 비슷한 기하학적 형태를 말한다. 이런 특징을 자기 유사성이라고 하며, 다시 말해 자기 유사성을 갖는 기하학적 구조를 프랙탈 구조라고 한다. 브누아 망델브로가 처음으로 쓴 단어로, 어원은 조각났다는 뜻의 라틴어 형용사 ‘fractus’이다. 프랙탈 구조는 자연물에서 뿐만 아니라 수학적 분석, 생태학적 계산, 위상 공간에 나타나는 운동모형 등 곳곳에서도 발견되어 자연이 가지는 기본적인 구조이다. 불규칙하며 혼란스러워 보이는 현상을 배후에서 지배하는 규칙도 찾아낼 수 있다. 복잡성의 과학은 이제까지의 과학이 이해하지 못했던 불규칙적인 자연의 복잡성을 연구하여 그 안의 숨은 질서를 찾아내는 학문으로, 복잡성의 과학을 대표하는 혼돈 이론에도 프랙탈로 표현될 수 있는 질서가 나타난다.

프랙탈은 수학적 도형으로도 연구되고 있다. 프랙탈 도형은 종종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재귀적이거나 반복적인 작업에 의한 반복되는 패턴으로 만들어진다. 대표적인 프랙탈 도형에는 망델브로 집합, 칸토어 집합, 시에르핀스키 삼각형, 페아노 곡선, 코흐 곡선 등이 있다. 프랙탈은 결정론적이거나 추계학적일 수 있으며, 혼돈적 계와 연관지어 발생할 수도 있다.

프랙탈 기하학은 프랙탈의 성질을 연구하는 수학 분야의 하나이다. 이는 과학, 공학, 컴퓨터 예술에 적용되기도 한다. 자연계에서도 프랙탈 구조가 자주 발견되며, 구름, 산, 번개, 난류, 해안선 및 나뭇가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프랙탈은 실용적인 목적으로 많이 사용되며, 현실 세계의 매우 불규칙한 물체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쓰일 수 있다. 프랙탈 기법은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는 물론, 기술적으로 이미지 압축 등에서도 사용된다.

프랙탈의 역사는 주로 이론적 연구에서 컴퓨터 그래픽의 현대적인 적용에 이르는 길을 따르며, 그 과정에서 몇몇 유명한 사람들이 공식적인 프랙탈 형태를 만들었다. Pickover에 따르면, 프랙탈의 수학은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Leibniz가 반복적인 자기유사성을 생각했을 때인 17세기에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그는 직선만이 자기 유사라고 생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의 저서에서, Leibniz는 fractional exponents(분수적인 지수)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기하학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사실, 다양한 역사적 설명에 따르면, 그 이후로는 몇 명의 수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고심했고, 그들에 의해 때로는 수학적 괴물이라고도 불리는, 낯설게 떠오르는 개념에 대한 저항으로 인해 불분명했던 작업들이 주로 이루어졌다. 결국, 1872년 7월 18일 Karl Weierstrass가 왕립 프러시안 과학 아카데미에서 오늘날 프랙탈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연속이지만 모든 곳에서 미분 불가능한, 비직관적인 특성을 가진 함수의 첫 번째 정의를 나타낸 것은 2세기가 지난 후였다. 또한 가산 지표가 커짐에 따라서 계차는 임의로 커진다. 그 뒤 1883년에 바이어 슈트라스의 강의에 참석한 Georg Cantor는 특이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금은 프랙탈로 인식되는, 지금은 칸토어 먼지로 알려진 실제 선의 하위 집합들의 예를 출판하였다. 또한, 세기 말에 펠릭스 클라인과 앙리 푸앵카레는 self-inverse“ 프랙탈이라는 하나의 범주를 도입했다.

다음 중요한 발전 중 하나는 1904년에 온 것인데, 이 때, 푸앵카레의 아이디어를 확장하고 바이어 슈트라스의 추상적이고 분석적인 정의에 불만을 품은 헬 폰 코흐는, 지금은 코흐 눈꽃송이라고 불리는 비슷한 함수에 대해 손으로 그린 이미지를 포함한 더 기하학적인 정의를 내렸다. 또 다른 획기적인 사건은 10년 후인 1915년에 왔는데, 그 때 바츠와프 시에르핀스키는 그의 유명한 삼각형을 만들었고, 그 1년 후에, 시어핀스키의 양탄자를 만들었다. 1918년까지, 두 명의 프랑스 수학자, 피에르 파투와 가스통 쥘리아는, 독립적으로 연구했긴 했으나 복소수와 반복적 함수를 구조화하고, 더 나아가 끌개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현대에는 프랙탈의 특성으로 불리는 결과에 동시에 도착했다. 그 연구가 발표된 직후 1918년 3월에 펠릭스 하우스 도프는 프랙탈이라는 정의의 발전을 위해 차원의 정의를 상당히 확대하여 프랙탈들이 정수 차원이 아닌 차원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자기 유사 곡선에 대한 아이디어는, 그의 1938년 종이 평면이나, 공간 곡선 그리고 새로운 프랙탈 곡선과 유사한 부품들로 이루어진, 폴 레비에 의해 더 나아갔다.

다른 연구원들은 현대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 없이, 초기 연구원들이 그들이 수동 그림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에 제한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발견한 많은 패턴들은 간단하게 사람의 손으로 그리는 반복 작업들로 만들 수 있는 것들로 제한되었고, 그들이 발견한 많은 패턴의 의미를 시각화하고 높이 평가할 수단이 부족했다. (예를 들어, 쥘리아 집합은 간단한 그림들에 대한 반복적인 수행으로 시각화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브누아 망델브로가 리차드손의 초기 연구에서 나아간 영국의 해안은 얼마나 길까? 프랙탈 차원과 통계학적 자기 유사성“와 같은 논문에 자기 유사성에 대해 쓰기 시작한 1960년대에 이러한 상황은 바뀌었다. 1975년에 만델브로는 프랙탈이라는 단어로 수백년에 걸친 사고와 수학적 발전을 굳히고, 인상적인 컴퓨터 건축 시각화로 그의 수학적 정의를 묘사했다. 망델브로 집합과 같은 그의 공식적인 이미지들은 많은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그것들 중 많은 것들은 반복에 기초해서 만들어졌고, 프랙탈이라는 용어의 대중적인 의미로 이끌었다. 1980년 로렌 카펜터는 SIGGRAPH에서 프랙탈로서 풍경을 만들고 표현하는 소프트웨어를 소개하였다.

프랙탈을 네 가지 생성 기법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이들 중 기하학적 프랙탈만이 완벽한 자기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반면 망델브로 집합은 느슨하며, 통계적인 자기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데, 확대할 때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이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 또한, 프랙탈은 자기 유사성의 강도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뉠 수도 있다.

망델브로 집합과 쥘리아 집합은 아래 점화식으로 만들어진다.

여기서 z와 c는 복소수이다. 쥘리아 집합은 정해진 c에 대해 위 점화식을 수렴시키는 z의 초기값을, 망델브로 집합은 정해진 z의 초기값에 대해 위 점화식을 수렴시키는 c를 의미한다. 발산 속도에 따라 점의 색을 다르게 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에 대해 생각해보자.

의 초기값을 로 하여 점화식을 반복하여 계산한다. 그 결과는 값에 의존한다. 즉 값에 따라 가 하나의 값으로 수렴하기도 하고 여러 값 사이를 순환적으로 맴돌기도 하고 아주 큰 값으로 발산하기도 한다. 만델브로트 집합은 초기값을 로 했을 때 을 발산시키지 않는 복소수 들의 모임이다.
  를 고정했을 때 발산하지 않는 를 충만한 쥘리아 집합(filled-in julia set)

이라 한다. 쥘리아 집합은 충만한 쥘리아 집합의 경계이다.

규칙적 프랙탈.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프랙탈의 경우 대부분 부분과 전체의 모양이 대략적으로 비슷할 뿐이나 반복함수계의 경우 전체와 부분의 형태가 완전히 일치한다.

통계학적 프랙탈.

자기유사성이 핵심 개념인 프랙탈 이론은 위상수학 분야에 속하고, 초기조건의 민감성이 핵심인 카오스 이론은 미분방정식 분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프랙탈 도형은 가까운 두 점이 가진 정보가 전혀 다르다는 점에서 초기조건의 민감성을 가지고 있고, 카오스 이론의 끌개는 프랙탈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프랙탈에서의 차원은 자가복제를 하기 위해 필요한 도형의 숫자로 정의된다.

즉, 어떤 도형의 길이를 x배 크게 하였을 때 그 도형의 면적이 n배 증가한다면 그 도형의 차원은 logxn으로 정의된다. 하우스도르프 차원의 개념.이에 따라 자연수가 아닌 차원이 존재할 수 있으며, 시에르핀스키 삼각형의 경우 프랙탈에서의 차원의 값은 log23으로 나타난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프랙탈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연에서는 자기 닮음으로 표현될 수 있는 유한한 구조물들이 자주 발견된다.

프랙탈이나 혼돈 이론을 적용한 기술들은 인공 지능, 시뮬레이션, 우주 분야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험적 예술 등에도 적용되고 있다.

프랙탈의 형태적 특징을 기하학적 조형성으로 이용하여 만든 디자인이다. 프랙탈의 성질은 형태적으로 '반복', '자기유사성', '회전'이며, 질서, 통일, 반복, 조화같은 기본적인 디자인 원칙하에 프랙탈의 형태적 특성이 나타난다.

프랙탈 디자인에서의 자기유사성은 기본적 형태요소의 크기를 늘리거나 줄이면서 배열되는 데에서 드러난다. 이런 기본형태요소는 끝없이 반복되며, 이 가운데서 통일성과 질서 조화를 보는 이로 하여금 느끼게 해준다.

프랙탈 디자인은 포토샵이나 일러스트 같은 컴퓨터 그래픽 툴로 만들 수 있다. 그래픽 툴로 프랙탈 디자인을 만드는 방법은 기본형태를 복사해서 크기를 점점 줄이거나, 점점 늘리면서 반복해서 확장시키는 것이다.

프랙탈 디자인이 적용된 대표적인 예로 존 마에다가 디자인한 Morisawa poster가 있다.

Richard F.Voss와 John Clarke가 물질적인 소리 신호에 대한 수학을 연구하였다. 그들은 연구에서 파워 스펙트럼(노이즈) 중에서 주파수 변화량 f에 따라 1/f 특성을 가진 pink noise가 규칙적이면서도 불규칙적인 자연현상과 유사한 형태를 가짐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1/f 패턴을 갖는 음악을 프랙탈 음악이라 한다.

Voss와 Clarke는 pink noise(프랙탈 음악)이 적절한 보통의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프랙탈 음악도 자연에서의 프랙탈처럼 전체 구조와 유사한 작은 구조가, 전체 안에서 반복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프랙탈적인 공간 채움과 조화로운 음 연결도 프랙탈 음악의 특성이다.

프랙탈 음악에는 바흐가 작곡한 클래식부터 컴퓨터로 작곡한 현대 음악 등이 있다.




#Article 129: 20세기 (361 words)


한국의 역사에서 20세기는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이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분단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1905년 일본 제국은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1907년 정미조약으로 8,800명 밖에 남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해산한 일제는,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인들은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1919년 3·1 운동은 일제의 강점에 맞서는 전민족적인 저항 운동이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다양한 독립운동이 있었다. 해외에서는 독립군을 조직하여 무장 독립 투쟁을 하는 한편 각국을 상대로한 외교적 노력이 있었고, 국내에서는 일제의 수탈에 항거하여 각종 파업과 쟁의가 끊이지 않았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일본 제국이 패망하여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거세지던 냉전의 영향력 아래 단일 국가를 수립하지 못하고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남북의 두 정권은 서로에게 적대적이었으며 결국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한국전쟁은 큰 피해를 남기고 휴전을 맞았고, 이후 두 국가는 체제 경쟁을 지속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쟁이후 김일성주의를 표방하고 이후 유일체제라고 불리는 주체사상을 바탕으로한 일당 독재 국가를 이루었다.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장기 독재에 저항한 4·19 혁명이 일어났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에 의한 군사 독재가 이루어졌고, 박정희의 사망 이후에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에 의해 군사 독재가 지속되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대한민국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1987년 개정 헌법은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있는 현행 헌법이기도 한다. 이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이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한편, 20세기 동안 과학, 기술은 전분야에 걸쳐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다. 19세기에 그레고어 멘델에 의해 발견된 멘델의 유전법칙은 20세기 초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시 발견되어 현대 유전학의 기반이 되었다. 이후 유전 물질에 대한 탐구가 계속되어 1928년 프레더릭 그리피스는 그리피스 실험을 통해 형질전환을 발견하였고, Downie AW (1972). Pneumococcal transformation—a backward view. Fourth Griffith Memorial Lecture. J. Gen. Microbiol. 73 (1): 1–11. PMID 4143929. 1952년 앨프리드 허시와 마사 체이스가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하여 DNA가 유전물질임을 증명하였으며,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구조를 밝혔다.

물리학 분야에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여 물리학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아인슈타인인 자신의 발견에 대해 “상대성 이론은 돌파구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심각하고 깊은 옛 이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생겨났다. 이 새로운 이론은 일관성과 간결함을 유지하면서 옛 이론의 모순을 강력히 해결한다.”고 자평하였다. 로켓 공학과 무선 통신의 발달, 그리고 컴퓨터의 출현에 힘입어 인류는 처음으로 우주 공간으로 나갈 수 있었다. 1961년 보스토크 1호에 탑승한 유리 가가린은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되었다. 1969년에는 아폴로 11호의 승무원들이 달에 착륙하였다.

아돌프 히틀러 (1887 - 1945)




#Article 130: 실수 (792 words)


수학에서, 실수(實數, )는 주로 실직선 위의 점 또는 십진법 전개로 표현되는 수 체계이다. 예를 들어, -1, 0,  제곱근 2|, e, π 등은 모두 실수이다.

실수에 대하여 사칙 연산(덧셈 · 뺄셈 · 곱셈 · 나눗셈)을 실행할 수 있다. 실수는 크기비교가 가능하며, 실직선에서 더 왼쪽에 있는 수가 더 오른쪽에 있는 수보다 작다. 특히, 실수는 0보다 큰 양수 · 0보다 작은 음수 · 0으로 분류된다. 또한, 실수는 정수의 비인 유리수와 그렇지 않은 무리수로도 분류되며, 정수 계수 다항식의 근인 대수적 수와 그렇지 않은 초월수로도 분류된다. 실직선은 복소 평면의 일부로 볼 수 있으며, 이 경우 실수는 허수와 함께 복소수를 이룬다.

공리적으로, 실수는 완비 순서체로 정의되고, 이는 동형 의미 아래 유일하다. 구성적으로, 실수는 유리수 코시 수열의 동치류 · 데데킨트 절단 · 십진법 전개의 동치류로서 구성된다. 실수의 완비성은 공집합이 아닌 실수 유계 집합이 항상 상한과 하한을 갖는다는 성질이다. 이는 유리수와 구별되는 중요한 성질이다.

실수 집합은 비가산 집합이다. 즉, 자연수 집합과 실수 집합은 둘다 무한 집합이나, 그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존재하지 않는다. 실수 집합의 크기는 자연수 집합의 크기보다 크다. 연속체 가설은 자연수 집합보다 크며 실수 집합보다 작은 크기를 갖는 실수 부분 집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이다. 연속체 가설은 ZFC(즉, 선택 공리를 추가한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에서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으며, 연속체 가설을 만족하거나, 그 부정을 만족하는 ZFC의 모형이 모두 존재한다.

실수 체계 는 실수의 공리계를 통해 정의하거나, 구체적인 모형을 구성하여 정의할 수 있다.

실수는 다음과 같은 공리를 만족하는 수 체계이다.

마지막 완비성은 실수를 유리수와 구분짓는 성질이다. 이들 공리를 만족하는 수 체계는 동형 의미 하에 유일하다.

실수는 다음과 같은 대상으로서 구성할 수 있다. 이렇게 구성한 실수는 실수 공리계의 모형을 이룬다. 즉, 실수 공리계의 모든 공리들을 만족한다.

실수 집합 위에는 덧셈 +, 뺄셈 -, 곱셈 ×, 나눗셈 ÷이 정의되어 있으며, 이들 중 덧셈과 곱셈은 교환 법칙, 결합 법칙, 분배 법칙을 만족한다. 즉, 임의의 실수들에 대하여,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실수 0과 1은 사칙 연산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는다. 즉, 임의의 실수들에 대하여,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실수 과 그 반수 를 더하면 0이다. 즉,

뺄셈과 나눗셈은 다음과 같이 덧셈과 곱셈으로 귀결된다.

양수(=실직선에서 0의 우측의 실수=0보다 큰 수) 밑, 실수 지수의 거듭제곱을 정의할 수 있다. 실수에 대하여 거듭제곱을 정의할 수 있는 건 실수의 완비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략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음수(=실직선에서 0의 좌측의 실수=0보다 작은 수) 밑의 거듭제곱 역시 정의할 수 있는데, 이는 유리수 지수에 한하며, 또한 이렇게 확장된 거듭제곱은 위의 연산 법칙을 비롯한 좋은 성질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실수들 사이에는 순서(즉, 크기 비교)가 존재한다. 두 실수 의 순서 의 직관은 실직선 위에서 가 더 왼쪽에, 가 오른쪽에 있다는 것이다. 는 이거나 라는 뜻이다. 이에 따라, 실수의 순서는 다음 성질들을 만족시킨다.

또한, 실수의 순서는 실수의 연산과 호환된다. 즉, 임의의 실수들에 대하여,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양수()는 0보다 큰 실수를 뜻하며, 음수()는 0보다 작은 실수를 뜻한다. 위의 성질들에 따라, 모든 실수는 양수, 음수와 0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또한, 양수 곱하기 양수는 항상 양수이며, 양수 곱하기 음수는 항상 음수이며, 음수 곱하기 음수는 항상 양수이다. 특히, 임의의 실수의 제곱은 항상 음수가 아닌 실수이다.

구간은 특별한 실수 부분 집합으로서, 주어진 두 실수 사이의 실수를 원소로 갖거나, 주어진 한 실수를 시작점으로 하는 반직선에 놓인 실수를 원소로 갖는다. 예를 들어, 임의의 에 대하여, 다음과 같다.

퇴화 구간은 구간과 비슷한 집합으로서, 두 끝점의 순서가 정상적인 구간의 반대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수들의 집합(예를 들어, 유리수 집합이나 실수 집합)의 모든 수들보다 작지 않은 수를 그 집합의 상계라고 한다. 이는 보통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면 여럿이 같이 존재한다. 수들의 집합에 상계들이 존재하며, 이들 가운데 가장 작은 하나가 존재한다면, 이를 상한이라고 한다. 실수 집합 은 다음 성질을 만족시킨다.

이를 상한 공리이라고 한다. 상한 공리는 실수의 완비성에 대한 한 가지 표현이다.

실수의 완비성은 실수의 가장 중요한 성질의 하나이다. 데데킨트 절단()을 통해 서술하는 것이 가장 간단하다. 실수 집합 의 두 부분 집합 의 쌍 이 다음 조건들을 만족시키면, 를 의 데데킨트 절단이라고 한다.

이제, 실수의 데데킨트 완비성 공리를 다음과 같이 서술할 수 있다.

데데킨트 완비성 공리는 상한 공리와 서로 동치이다.

실수 집합은 아르키메데스 성질을 만족한다. 즉, 두 실수 가 있다고 하자. 이 경우 가 아무리 작고 가 아무리 크더라도, 를 충분히 많은 횟수 만큼 더하면, 를 초과한다. 즉,

실수 집합 위의 순서는 조밀 순서이다. 즉, 임의의 서로 다른 두 실수 에 대하여, 항상 그 사이에 또 다른 실수 가 존재한다.

실수 집합 위에는 표준적인 위상 공간 · 거리 공간 · 노름 공간 · 내적 공간 구조를 부여할 수 있다. 즉,

실수 부분 집합 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사실, 모든 유클리드 공간에 대하여, 위 네 조건은 서로 동치이며, 모든 거리 공간에 대하여, 앞에 세 조건은 서로 동치이다.

또한, 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실수는 유리수와 무리수로 분류된다. 실수 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예를 들어, 1/3 = 0.333...은 유리수이며, e = 2.7182...와 π = 3.1415...는 무리수이다.

실수 집합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은 알레프 0이다. 달리 말해, 실수는 자연수 부분 집합과 일대일 대응한다. 이 둘 사이의 일대일 대응은 여러 가지 만들 수 있다.

실수에 대한 엄밀한 정의는 게오르크 칸토어에 의해 이루어졌다. 유리수로부터 실수를 이론적으로 확장하여 그 성질을 규정짓게 된 것은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게오르크 칸토어, 리하르트 데데킨트와 같은 수학자들의 공이 지대하였다.




#Article 131: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698 words)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韓國大學總學生會聯合, 약칭 한총련)은 8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전대협을 계승하여 1993년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학생운동단체이다. 표어는 1993년 창립시에는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였으며 1995년에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한총련은 특유의 권위주의적 성향과 패권적 운동관으로 인해 1996년 연세대 사태와 1997년 한양대 출범식 사건으로 여러 학생운동그룹들과 상당수 학교들이 탈퇴하면서 세력이 급격히 약화됐다. 당시 한총련을 탈퇴한 학생운동그룹들은 전국학생회협의회, 전국학생연대회의, 참대학 등의 독자적인 학생운동조직, 학생회협의체를 건설하였다.

한총련이 대법원에서 이적단체로 판결되었고 한총련에 가입한 단과대학 총학생회장에 당선되면 자동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입건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국가보안법위반자가 급증하여 사회문제가 되었다. 1997년 191명이 구속되어 전원 기소되었고 1998년 127명 구속되어 121명 기소,  1999년 162명 구속 149명 기소, 2000년 101명 구속 95명 기소, 2001년8월까지 13명 구속 4명 기소로 전체 594명이 구속되어 560명이 재판을 받았다.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판결이 나서 집중적으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기소한 건수가 늘었던 김대중 정부에서 전체 국가보안법위반 구속자의 53%가 한총련 대의원이다.

구체적으로 한총련 제5기(1997년) 사법처리 대상자 388명 중에 206명이 구속, 160명이 불구속되어 351명 구공판 기소, 115명 기소유예, 체포되지 않은 사람이 22명이었으며 1998년 제6기는 301명 중에 145명이 구속되고 118명이 불구속 6명 내사종결되어 구공판기소 252명 기소유예 11명 체포되지 않은 사람 32명이며 7기(1999년)는 291명 중에 97명이 구속되고 48명이 불구속 16명 내사종결이며 구공판 137명 기소유예 8명 체포되지 않은 사람 130명으로 5~7기 전체 사법처리 대상자 980명 가운데 448명이 구속되고 740명이 재판을 받았다.

지역별로는 서울(서총련), 강원(강총련), 경기인천(경인총련), 충청(충청총련), 광주전남(남총련), 전북(전북총련), 대구경북(대경총련), 부산경남(부경총련)으로 지역별 총학생회 연합이 있으며 각 지역총련별로 지구를 둔다. 제주(제총협)지구는 지역적 특수성으로 지역총련과 동격인 특별지구로 한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의장 金在容한양대총학생회장)은 1993년 5월 29일 오전8시10분부터 고려대 학생회관 1층 생활도서관에서 제1기 출범식 행사의 하나로 마련한 북한및 해외 학생대표들과 국제전화를 통해 「조국통일 범민족청년학생연합」金在容한총련의장 등 남측본부 의장단 11명은 서울에서, 허창조 조선학생위원장 등 6명의 북측 본부 의장단은 중국 북경 연경호텔에서, 김창오 재일한국청년동맹위원장 등 해외본부 의장단 6명은 일본 동경에서 국제전화로 회의를 열고 스피커를 통해 공개적으로 2시간여 동안 통일방안과 제3차 청년학생통일축전 등에 대해 논의했다. 1993년 3월초 북한에 귀환한 리인모는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해외본부 사무총장인 임민식이 북경에서 대독한 연대사에서 나는 북한에서 잘 지내고 있다. 우리 모두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하자고 말했다. 회의를 마친 뒤 남.북.해외 본부 공동의장단은  한반도 평화정착, 8.15 범민족회담 성사, 6.12 남북청년학생 자매결연 예비회담 개최, 범청학련 연대강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등의 공동 결의뮨울 채택했다.

대검 공안부(부장 최환)는 1993년 6월 13일  그동안 한총련이 주도한 대규모 옥외집회에 대해서도 평화시위를 조건으로 개최를 허용해왔으나 한총련측이 그동안 두차례나 당국과의 약속을 어기고 불법적인 폭력시위를 주도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어떠한 형태의 집회개최도 허용치 않기로 했다는 이유로 김춘도 순경 사망사건을 계기로 앞으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 주관하는 옥외집회를 일체 금지했다.

학생대중단체의 분화가 잇따르고, 다양한 의견그룹이 수면 위로 떠오른 지금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주한미군철수, 국가보안법철폐, 북미평화협정체결, 6·15 남북 공동선언 이행, 학원자주화 등을 주요 활동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전국농민회총연맹 등과 연대하고 있다. 또한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가맹단체이다. 전에는 범청학련 남측본부 의장을 한총련 의장이 겸하였으나 현재는 그렇지 않다.

이후 경찰은 연세대에 진입해 학생조직을 검거하려는 당초의 시도가 실패하자 백골단을 투입해 연세대 인근에서 산발적으로 돌격하던 사수대를 제압해 학생들을 연행했다. 이어 전기, 수도, 식량 등을 차단했다. 연세대에 갇힌 2만 여명의 학생은 5일 동안 농성을 하며 버텼다. 학생들은 이과대학 입구와 생활관 각 층마다 책상으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농성을 했지만 정부는 헬리콥터를 동원해 학생들이 머문 층의 창문으로 최루탄을 살포해 제압했다.

집회와 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은 연행됐고, 연세대 교내 시설은 크게 파손됐다. 이 같은 학교 분위기로 인해 연세대와 고려대가 해마다 치루던 정기전은 연세대가 고려대에 양해를 구해 열리지 않았다. 그해 열린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비운동권 후보가 당선되는 계기가 됐다.

창원지법 형사1부(재판장 안영율 부장판사)는  한총련이 제작한 이적표현물을 소지,배포하고 화염병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 뒤 검찰이 정한 한총련 탈퇴시한을 지키지 않아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혐의로 추가 기소된 인제대 총학생회장 김진영씨(26·법학4)에 대해 『한총련의 이적성 여부에는 아직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재판부는 한총련을 이적단체라고 명확하게 규정한다』라고 판단하면서 징역 2년6월에 자격정지 2년6월을 선고했다 전국 법원 가운데 처음으로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대법원(주심 대법관 이임수)은 1998년 7월 30일 한총련 5기 의장 강위원에 대한 상고심을 기각함으로써 한총련을 이적단체라고 확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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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2004년 대법원은 재차 10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또한 그 강령 및 규약의 일부 변경하였으나 그 사상과 투쟁목표에 있어서 종전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과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없어, 그 지향하는 노선이 반국가단체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일노선과 그 궤를 같이함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하거나 적어도 이에 동조하는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이적단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라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한총련과 전대협을 이적단체로 지적한 것에 대해서는 재야와 학생운동계에서 반발, 논란이 진행 중에 있다.

노무현 정부 출범을 전후하여 한총련 합법화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 선고를 받은 대의원 등에 대한 사면,복권 논의가 이루어졌다. 

인권이사회는 △국가보안법 제7조(찬양·고무)를 개정하고, △피해자에게 적절한 보상과 구제를 하고, △비슷한 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 등을 정부에 권고했다.
인권이사회는 1992년과 99년에도 ‘국가보안법을 점진적으로 폐지해야 한다’는 내용 등을 정부에 권고한 바 있다.




#Article 132: 조선일보 (1288 words)


《조선일보》(朝鮮日報)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언론사인 조선미디어그룹의 조선일보사가 발행하는 조간일간지이다. 1920년 3월 5일에 창간되었으며, 현재까지 존재하는 한국어 신문들 중 가장 역사가 깊은 신문이다. 2020년 기준, 국내에서 유료 부수 100만부가 넘는 유일한 신문이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미디어 중 하나로 손꼽힌다.

대한민국 신문 구독률 36.8% 가운데 조선일보는 11.9%를 차지하였으며, 구독점유율은 24% ~ 30% 로 나타나고 있다. 특정 신문 구독 여부에 관계없이 지난 일주일간 어떤 신문의 기사를 봤는지를 알아보는 주간열독률 조사에서 조선일보의 열독률은 16.2%였다. 2009년 한국ABC협회가 실시한 집계에서 발행부수 1,844,783부로 집계되었다. 2011년 기준으로 유료 발행 부수는 1,353,159부였다. 2011년 7월부터 가판 가격이 인상되어 현재 부당 1000원이나 월 구독료는 15,000원으로 변함없다.

한국ABC협회가 2020년 발행·유료 부수 현황을 공개한 자료에서 조선일보는 121만부의 공식 발행 부수를 가진 국내 최대 신문이자, 국내에서 유일하게 유료부수 100만부가 넘는 신문으로 확인되었다. '조선일보'는 발행 부수 121만2208부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이어 동아일보(92만5919부)·중앙일보(86만1984부)·매일경제(70만6760부)·한국경제신문(52만6908부) 등의 순이었다. 실제 판매량을 집계하는 유료 부수에서도 '조선일보'가 1위(116만2953부)였다. 2·3위인 '동아일보', '중앙일보'와는 각각 29만, 35만부 격차였다.

한국갤럽이 2013년 9월 30일부터 2주간 서울·인천·경기 등 수도권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집에서 유료로 정기구독하는 신문'을 기준으로 조사한 가구 구독률에서 조선일보는 11.9%로 압도적 1위였다.

'시사IN'이 행한 '가장 불신하는 매체' 조사에서 2017년 2위, 2018, 2019년에는 2년 연속 1위를 차지하였다.

영국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공개한 2018년 매체신뢰도 순위에서 조선일보와 TV조선이 15개 매체 중 각각 14위, 15위에 올라 조선일보 계열이 최하위권에 머무른 가운데 2019년 매체신뢰도 순위에서 조선일보와 TV조선이 14개 매체 중 각각 14위, 13위를 차지하여 사실상 2년 연속으로 조선일보 계열의 매체는 가장 신뢰도가 낮은 매체로 꼽혔다.

그리고 1924년 9월 13일에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항일 독립 신문으로서의 정체성을 뚜렷히 했고, 4대 사장인 이상재가 취임한 후에는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고 문자보급운동의 일환으로 한글 교재를 무상 배포하는 등 우리나라의 문화보전에 힘썼다. 이후 5대 사장은 조선 독립민족주의 성향의 신석우가 맡았다. 이후 1931년에 재만동포 자금 횡령 사건에 6대 사장 안재홍이 연루되어 구속되고, 7대 사장 유진태 8대 사장 조만식을 거쳐 9대 사장 방응모가 취임한 후 한일 학생의 교육차별을 비판하는 논설 '교육필화'로 인해 총독부에게 기사가 압수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1933년부터 1936년까지 부사장이던 이광수의 영향으로 민족개량주의까지 합세하여 더욱 항일적인 신문이 되었다. 그러나 1936년부터 총독부의 개입으로 인해 항일 성향이 줄어들었으나, 이후 중일전쟁에서 일본을 평론하는 사설과 신문내용을 여러차례 보내면서 간접적으로 제국주의를 비판하였다. 그 후 1940년 조선총독부의 민족 말살정책의 표적이 되어 발간을 중단하였고, 이에 당시 사장이었던 방응모는 월간 조광을 창간하면서까지 신문을 이어나갔다. 조광에서도 내선일체와 침략전쟁을 비판했다.

해방 이후,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다시 속간되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어가던 백범 김구는 조선일보의 복간에 대해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크게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9대 사장인 방응모의 한국독립당 입당과 반탁운동 가담을 계기로 정치적으로 보수 성향의 김구와 한국독립당을 지지하였으며, 1947년 이후 민족 지도자 중에 한 명이었던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노선을 지지하게 된다. 마침내 1948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하자 이승만 정부의 출범을 지지하였고, 동시에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까지 반민족 행위자 강력처벌과 처단을 주장했다. 한편,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을 때 남용소지에 대해 비판을 함으로써 국가보안법의 사용 규범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후 조선일보는 1955년부터 1959년까지 이승만 정부의 부산 정치파동을 다루지 않았고, 이승만 정부와 집권 여당이었던 자유당이 추진했던 반공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또한 진보당 사건, 진공관 구입 밀수출 사건,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 뉴델리 밀회 조작 사건, 금정산 공비 사건, 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 박정호 간첩 사건, 김정제 간첩 사건 등 이승만 정권의 공안정국에는 반공주의 기준과 이승만 정부를 옹호하는 기사를 보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금성사 설립 기사와 삼성 관련 기사를 많이 보도함으로써 경제적으로 대기업 육성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외에도 능의선 기공식과 한글학회의  완간을 보도했고, 가짜 이강석 사건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당시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한 국민 통합에 앞장섰다.

하지만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조선일보는 국민의 편에서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여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하야를 이뤄내었다. 그리고 제2공화국 장면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는 교원노조 운동을 지지하기도 했으나, 1960년 당시 장면 정부가 들어서면서 교원노조 운동 탄압과 노동운동 탄압에 조선일보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1961년에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나서 조선일보는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출범을 지지함과 동시에 1961년부터 1962년까지 5.16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신문을 여러차례 내보냈다. 그리고 그 당시 공안사건들이던 민족일보 사건, 사대당 사건, 교원노조 사건, 유족회 사건 등에 대해 반공주의적 기준과 박정희 군정을 옹호하는 쪽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또 이 당시 삼성물산 설립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또 문화방송, 한국방송 설립 기사도 여러차례 내보냈다. 그리고 군사원호청 발족 기사와 전국경제인연합회 설립 기사, 한국신문윤리위원회 발족 기사,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발족 기사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박정희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다시 반정부적인 성향으로 돌아섰는데 이후 최석채 주필이 재직하던 1964년부터 1969년까지 조선일보는 상당히 박정희 정부, 즉 제3공화국에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 조선일보는 사회적 약자와 노동운동 세력들에게 상당히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당시 한일기본조약의 강행과 1차 인민혁명당 사건, 미법도 주민 간첩단 사건, 제1차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서울대 문리대 불꽃회 사건, 분지 필화사건, 언론계 침투 무전 간첩단 사건, 경향신문 간첩사건,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의 사법처리 과정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다만 이 시기에도 삼척군 해안가 간첩 사건, 군내 반정부 음모사건, 진장언 하사 간첩사건, 송추 간첩사건 같은 공안사건에 대해서는 반공주의적 기준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그리고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해서도 삼성을 상당히 비판하는 논조로 보도를 했다. 그리고 한국전력, 중소기업은행 설립을 호의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7년부터는 조금씩 다시 박정희 정부에 우호적인 기준으로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는데 박정희가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고 이 시기 제2차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영호남·서해안 무전 고정간첩단 사건, 동백림 사건, 서울사범대학 독서회 사건이 발생하면서 조선일보는 다시 보수언론으로 다시 조금씩 돌아가게 되고 1968년에는 통일혁명당 사건과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같은 공안정국이 일어나면서 조선일보는 또다시 보수언론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1969년, 박정희 정부의 3선 개헌 이후로 조선일보는 다시 보수성향으로 완전히 돌아서는데 당시 유럽 간첩단 사건과 이수근 위장간첩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3선 개헌을 지지하는 보도 또한 여러 차례 내보냈다. 또 그 당시 대한항공 민영화 기사, 삼성전자 설립 기사, 현대자동차 설립 기사, MBC 개국, 일간스포츠 창간, 진주 남강댐 준공도 여러차례 보도했다.

그리고 1978년에는 최은희 납북 사건을 보도하기도 했으며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 자연보호헌장 선포 등의 기사도 내보냈다. 또한 1979년에는 삼척 고정간첩단 사건, 통일혁명당 재건 음모 사건, 부산·삼천포 고정 간첩단 사건 등을 여러차례 기사로 내보냈다. 그리고 10.26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에도 특종 보도를 많이 했다. 10.26 사건 이후에는 12.12 쿠데타를 많이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1920년에 창립하였으며 일본의 소위 문화정치가 실시되면서 동아일보와 함께 조선총독부로부터 허가되었다. 창간 당시에는 대정친목회를 모체로 조진태사장으로 시작하였으나, 자금력부족으로 송병준에게 넘어갔다. 송병준은 자신이 신문경영 전면에 나서지 않고 원로 언론인 남궁훈을 사장으로 영입한다. 1924년 남궁훈은 민족주의자였던 신석우가 인수해 민족의 사표(師表)로 추앙 받던 이상재를 추대할 때까지 사장으로 재임한다 1924년 이 때는 일제와 타협적이던 동아일보와는 달리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다. 좌파와 우파가 연합한 최대 독립운동조직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홍명희와 박헌영, 김단야 등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조선일보에 입사하면서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후 계속적인 경영 악화로 조만식을 거쳐 방응모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그 후 보수적인 언론인들이 조선일보사를 주도하면서, 보수주의 관점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일제시대 극초기 조선일보에는 다양한 경력과 능력의 소유자들이 집결했다.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 보수주의자를 비롯해 각 분야의 최고 엘리트들과 활동가들이 어울려 민족의 '정신적 정부'를 자임했다.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남궁훈, 이상재, 신석우, 안재홍, 조만식 등은 민족 지도자들이었다. 조선일보 창간 사회부 기자로서 일제를 규탄하고 총독 암살을 계획했던 독립운동가 방한민(方漢旻), 일제의 조선인 학살 현장에 달려가 목숨걸고 취재한 이석, 한홍정 등은 펜으로 일제의 총칼에 직접 맞선 행동파였다. 독일 유학 후 혁명의 모스크바로 파견된 김준연, 영국·프랑스·독일·스위스에서 화려한 학력을 쌓은 이관용, 미국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훈구, 그리고 중국 내전 현장을 누빈 이상철, 홍양명, 홍종인 등은 세계 정세와 선진 문물을 알리는 전령사들이었다.

조선일보사는 일간지 외에도 주간지 '주간조선', 스포츠지인 '스포츠조선', 관광 숙박시설에 대한 잡지 '월간 산', 취미 문화에 관한 잡지 '월간낚시' 등의 시사지와 잡지를 발행한다. 자회사로는 '디지틀조선', '월간조선', '조선에듀케이션', '헬스조선' 등이 있으며 이 중 '디지틀조선'은 코스닥에 상장하였고, 2004년부터 연간 80억 정도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어린이들을 위해 1931년부터 '어린이조선일보'를 발행하고 있으며, 일반단행본과 백과사전들을 편집하는 출판사업도 하고 있다. 조선일보에서 출판한 단행본으로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따뜻한 이야기》(1998년)나 영화 말아톤으로 유명해진 장애인 배형진씨의 이야기를 담은 《달려라 형진아》등이 있다.

또한 온라인버전 조선닷컴이외에 영어판, 일본어판, 중국어판 온라인신문을 운영하고 있다. 이중 조선일보 일본어판은 자회사 '조선일보 일본어판'(구 조선일보JNS)에서 운영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2007년에 비즈니스앤을 개국하고, 2008년 11월에는 방송기자와 피디를 모집, 2008년 2월에는 대구방송, KNN과 함께 아워 아시아를 제작, 배급하였다. 이외에도 조선일보는 종합편성방송 심사에서 2위로 통과한 'TV조선'을 소유하고 있으며, TV조선과 조선일보는 보수적 논조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외에도 '주간조선' '월간조선' 등을 제작하는 조선뉴스프레스라는 자회사가 있다.

한국신문협회는 조선일보의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 아들' 보도를 2014년 한국신문상 뉴스취재보도부문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들은 언론이 권력자의 탈선된 사생활을 보도하려 할 때 필요한 덕목인 용기를 잘 보여주었다고 하며 언론의 역할에 충실한 조선일보를 높이 평가했다.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기념으로 뉴스 다시보기 서비스의 1920년 창간부터 1999년 12월 31일까지 무료 열람을 볼 수 있으며, 별도 무료와 유료 서비스이다. 그리고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 과거 신문을 제공한다.




#Article 133: 스칼라 (수학) (200 words)


스칼라란 선형대수학에서 선형공간을 정의 할 때, 선형공간의 원소와 스칼라 곱을 하는 체의 원소이다. 예를 들어, 1차 실수 계수 다항식들의 선형공간 에서 스칼라는 실수다.

스칼라의 정의는 N차원 공간에서 N의 0승개의 수로 표현할 수 있는 물리량이다.

그러므로 좌표계가 변환되어도 그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양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속도 벡터가 두 개의 성분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x축 방향으로 100 km/h, y축 방향으로 0 km/h) 각각의 성분은 크기만을 가지고 있지만 스칼라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 속도를 나타내기 위한 좌표계가 바뀌면 각각의 성분도 바뀌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x'축 방향으로 80 km/h, y'축 방향으로 60 km/h 라는 식으로).

하지만 막대의 길이가 1 m이면 어느 좌표계에서 재어도 1 m가 될 것이다. 따라서 막대의 길이는 스칼라이다(단 상대론적으로 움직이는 좌표계는 논외로 한다). 수학에서도 스칼라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전산학에서는 스칼라를 단순히 '하나의 수'를 가리키는 말로 쓰기도 한다.

스칼라(scalar)라는 말은 '사다리'를 뜻하는 라틴어 scala의 형용사형인 scalaris에서 따온 것이다. 이 용어를 수학에서 처음으로 쓴 사람은 프랑수아 비에트로, 그의 저서 《해석학입문 (In artem analyticem isagoge) (1591년)》에 쓰였다.

한편 옥스포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영어에서 이를 처음 쓴 사람은 윌리엄 로언 해밀턴으로, 1846년에 사원수의 실수부에 관한 내용을 서술하면서 사용하였다.

해밀턴의 용례는 사원수 표기를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회전을 하나의 스칼라(사원수의 실수부)로 표현하고 벡터를 나머지 세개의 허수부로 표현하는 것이다.

스칼라의 다른 예로는 질량, 부피, 온도, 이동 거리 등이 있다.




#Article 134: 자연수 (722 words)


수학에서 자연수(自然數, )는 수를 셀 때나 순서를 매길 때 사용되는 수다. 양의 정수(陽-整數, ) 1, 2, 3, ...로 정의되거나, 음이 아닌 정수(陰-整數, ) 0, 1, 2, 3, ...로 정의된다. 범자연수(汎自然數, , )라는 용어는 첫째 정의를 택할 경우에 음이 아닌 정수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며, 이에 대응하는 문화어와 영어는 둘째 정의를 택할 경우에 정수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자연수의 집합은 대문자 N을 써서 표기하며, 보통 칠판 볼드체 ℕ를 사용한다.

약수 관계나 소수 분포를 비롯한 자연수의 성질들은 수론의 연구 대상이며, 분할이나 계수를 비롯한 자연수의 문제들은 조합론의 연구 대상이다. 자연수는 많은 연산에 대하여 닫혀있지 않다. 정수는 자연수를 뺄셈에 대하여 닫혀있도록 확장하여 얻는 수 체계이며, 유리수는 자연수를 추가로 나눗셈에 대하여 닫혀있도록 확장한 수 체계이다. 실수는 추가로 코시 수열의 극한에 대하여 닫혀있도록 확장한 것이며, 복소수는 추가로 다항식의 근에 대하여 닫혀있도록 확장한 것이다.  하나하나가 유한하지만, 무한 집합을 이룬다. 자연수의 집합은 가장 작은 크기의 무한 집합이며, 자연수와 크기가 같은 집합을 가산 무한 집합이라고 한다.

자연수가 만족시켜야 하는 일련의 공리들을 제시하여 자연수를 일종의 무정의 개념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자연수의 공리들이 이루는 체계 가운데 가장 자주 사용되는 하나는 페아노 공리계이다. 수리논리학에서 이는 자연수의 이론에 해당된다. 자연수를 특별한 집합으로서 간주하여 다룰 수도 있는데, 이 경우 보통 자연수의 집합은 최소 재귀 집합으로 정의된다. 수리논리학에서 이는 자연수의 모형에 해당된다.

자연수의 수를 세는 역할을 일반화하면 기수의 개념을 얻으며, 자연수의 순서를 매기는 기능을 일반화하면 순서수의 개념을 얻는다. 자연수의 집합의 대수적 성질을 일반화하면 반환의 개념을 얻는다. 특히 자연수는 많은 스포츠 점수 같은 경기나 게임에 사용될수 있으며 우리가 가장 흔히 보는 수로도 볼수있다.

가장 통용되는 자연수 이론인 페아노 공리계는 상수  및 함수 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공리들로 이루어진 2차 논리 이론 이다.

이 공리들 가운데 2차 논리 공식은 셋째 공리뿐이다. 이 셋째 공리를 1차 논리 공리꼴로 대신하면, 페아노 산술을 얻으며, 이는 보다 더 약한 공리계이다.

자연수 이론의 한 가지 모형 을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에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다.

이 경우, 각 자연수는 그보다 작은 자연수들의 집합이다. 예를 들어, 처음 몇 자연수는 다음과 같다.

고유 모임이 허용되는 집합론의 경우, 자연수를 유한 집합의 대등 관계에 대한 동치류로서 정의할 수 있다. 즉, 각 자연수는 그 자연수를 원소 개수로 하는 집합들의 모임이다. 즉, 이는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구성은 고유 모임을 사용하므로, 분류 공리꼴을 만족시키는 집합론에서 사용할 수 없다.

자연수의 집합은 가환 순서 반환을 이룬다.

자연수의 집합 의 정의에 따라, 수학적 귀납법이 성립한다. 즉, 다음과 같은 꼴의 명제를 수학적 귀납법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여기서 는 주어진 성질이며, 자연수 부분 집합 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명제를 증명하려면 다음 두 가지를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

자연수의 집합 위의 초한 귀납법에 따르면, 다음 한 가지를 증명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도 있다.

특히, 인 경우 이 조건이 뜻하는 바는 단순히 인데, 이는 이 조건의 전제가 항상 참이기 때문이다.

자연수의 집합 위의 초한 재귀 정리에 따르면, 수열을 점화식을 통해 정의할 수 있다. 즉, 집합 에서 값을 취하는 수열 은, 그 일반항을 통하지 않고서도, 다음과 같은 점화식을 줌으로써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는 에서 값을 취하는 각 유한 수열에 의 원소를 대응시키는 함수이다. 특히, 이 점화식에서 인 경우, 이 점화식이 뜻하는 바는 공(空)수열 의 함숫값 을 첫항 으로 정의하는 식 이다.

자연수의 집합은 정렬 집합이다. 즉, 공집합이 아닌 자연수 부분 집합 은 항상 최소 원소 를 갖는다.

귀류법을 사용하여, 가 최소 원소를 갖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이제 임을 강한 수학적 귀납법을 통해 증명하자. 만약 라면, 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므로 모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며, 이는 모순이다.

자연수의 집합 위에서 무한 강하법이 성립한다. 즉, 자연수의 감소 무한 수열 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위에서 증명한 자연수의 정렬성을 통해 엄밀하게 증명할 수 있다. 즉, 만약 자연수의 감소 무한 수열이 존재한다면, 그 수열의 항들의 집합은 자연수의 부분 집합인데, 이는 공집합이 아니면서 최소 원소를 갖지도 않으므로 모순이다. 무한 강하법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은 꼴의 명제를 증명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려면 다음 한 가지를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

자연수의 집합 은 무한 집합이다. 자연수의 집합의 크기를 알레프 0 으로 정의하며, 이는 최소 무한 기수이다. 즉, 임의의 무한 집합 에 대하여, 인 부분 집합 가 존재한다. 자연수의 집합과 크기가 같은 집합(=전단사 함수 가 존재하는 집합 )을 가산 무한 집합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유리수의 집합 는 가산 무한 집합이며, 실수의 집합 는 비(非)가산 무한 집합이다.

자연수에 대한 곱셈식 이 성립할 때, 가 의 약수라고 하며, 반대로 를 의 배수라고 한다. 0은 모든 자연수를 약수로 가지며, 0의 배수는 0뿐이다. 그러나, 양의 정수의 경우만을 생각하기도 한다. 항등식 에 따라, 자연수는 항상 1과 자기 자신을 약수로 가지는데, 약수가 이들뿐인 자연수를 소수라고 하며, 그렇지 않은 자연수를 합성수라고 한다. 다만, 0과 1은 소수도 합성수도 아니라고 정의한다. 산술의 기본 정리에 따르면, 모든 합성수는 유한 개의 소수들의 곱으로 표현 가능하며, 이러한 표현은 소수들을 곱하는 순서를 무시하면 유일하다.




#Article 135: 스타크래프트 (2346 words)


《스타크래프트》()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실시간 전략 게임이다. 1998년 3월 31일 북미와 중국에, 4월 9일에는 대한민국에 발매되었다. 게임의 배경은 26세기 초반 미래의 우주로, 지구 집정 연합에게 버림받은 사이오닉 능력 초능력자, 범죄자들의 테란()과 집단 의식을 가지고 다른 종족을 흡수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드는 저그(), 초능력과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외계 종족인 프로토스() 사이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스타크래프트》와 그 확장팩인 《》는 1998년 4월(브루드 워는 11월)부터 1999년 1월까지 두달 동안 전 세계에서 150만 장 이상 판매되어 그 해에 가장 많이 팔린 게임이 되었고, 2007년 5월 20일 기준으로 블리자드는 950만 장 이상이 팔렸다고 집계했으며, 2009년 2월 28일까지 1100만 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집계되었다. 1998년 최고의 컴퓨터 전략 게임으로 오리진스 상을 받았고, 그 외에도 다수의 올해의 게임, 올해의 전략 게임, 올해의 멀티플레이어 게임 상을 받았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2009년 1월 31일까지 세계 판매량의 대략 40%정도인 450만 장이 팔렸으며, 2000년부터 2011년까지 프로 선수와 팀이 생겨 스타크래프트 경기가 방송에도 중계되는 등 높은 인기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스타크래프트》는 LG소프트를 통해 발매되었다. 한국어로 수정하지 않고 영문판 그대로 출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기를 끌었으나, 영문판을 그대로 발매함에 따라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제공하는 온라인 게이밍 서비스인 배틀넷에서 한글 채팅이 불가능해지는 문제가 있었는데, 이로 인해 1999년부터는 한글이 지원되는 한스타와 같은 프로그램이 배포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이후 2005년 2월 스타크래프트의 버전이 1.12로 업그레이드 되면서 이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이후 스타크래프트는 2009년 1월부터 1.16.1 버전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8년이 지난 2017년 3월 26일 오후 2시부터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I 3 StarCraft(아이 러브 스타크래프트) 행사에서 1.17패치를 건너 뛴 1.18패치와 를 공개하였다. 이후 동월 3월 31일 1.18버전을 공개할 예정이었으나 안정성의 문제로 테스트 버전이 먼저 공개되었다. 그 이후 밸런스 문제와 그래픽 카드 호환성 문제로 인해 여러번 연기되었다가 종료되었다. 다음날 4월 19일 새벽부터 정식으로 1.18 패치가 배포되어 전세계 서버가 오픈되었고, 기존 스타크래프트 엔솔로지는 무료로 받을 수 있게 된다. 상당한 버그와 화질 개선이 이루어졌고 현재 OS 에 맞춘 환경이 지원하는 패치가 이루어졌다.

《스타크래프트》의 기본적인 게임 전개는 플레이어가 자원을 모아 건물을 짓고 테크 트리를 발전시키며 유닛을 생산해 상대방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게임에 등장하는 자원에는 모든 종류의 생산 활동에 필수인 '광물'과, 고급 유닛이나 건물의 생산, 각종 업그레이드 연구 등에 사용되는 '베스핀 가스'가 있다. 자원은 종족 별로 존재하는 일꾼 유닛(테란의 ‘SCV’, 프로토스의 ‘프로브’, 저그의 ‘드론’)을 통해 채취할 수 있다. 베스핀 가스는 베스핀 간헐천 위에 가스 채집을 위한 건물을 건설해야 채취할 수 있다. 한 번씩 채취할 때 마다 8의 수치가 축적된다.

게임에는 유닛의 생산을 한정 짓는 한계 수치가 존재한다. 이 한계 수치는 테란의 ‘서플라이 디포’와, 프로토스의 ‘파일런’과 같은 지원 관장 건물을 건설해서 늘릴 수 있다. 저그의 경우 지원용 건물이 아니라 수송 유닛인 ‘오버로드’를 통해 한계 수치를 늘린다. 기본적으로 최대 유닛 단위는 종족 당 200으로 한정되어 있다.하지만 프로토스의 다크 아칸을 사용할 경우 200을 넘길 수는 있긴 하지만 그럴 일은 딱히 없다. (어차피 다크아칸 자체를 잘 사용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프로토스의 스카웃만큼 버림받은 유닛이다.)

상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다양한 전략을 수립해야 하고, 적의 전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각종 업그레이드와 기지 확장을 통한 효율적인 자원 관리가 필요하다. 또한 종족별로 저마다의 특징이 있어 그것이 전략 수립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스타크래프트는 블리자드의 또 다른 게임인 ''에 비해서 많은 부분이 향상되었다. 워크래프트에서의 종족들은 특수능력과 업그레이드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였을 뿐 거의 성격이 같았다. 스타크래프트에서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워 윈드에서 사용된 각 종족의 불균형을 해결하는 방식을 사용해 워크래프트보다 향상된 완성도를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 종족은 저마다의 개성적인 일면을 가진다.

처음 발매될 당시에는 세 종족 간에 약간의 불균형이 있었지만, 확장 팩과 약 스무 번에 걸친 패치로 지금은 종족 간 균형이 비교적 잘 맞추어져 있다. 블리자드에서 1998년에 출시한 스타크래프트의 확장 팩인 에서는 본편과 이어지는 캠페인과 함께 종족 별로 새로운 유닛들과 업그레이드들이 추가되었다.

스타크래프트에는 테란, 저그, 프로토스 세 종족이 있다. 이 세 종족은 각자 특유한 장점과 단점이 존재한다.

테란은 인류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종족이다. 원래는 개발 중이었던 게임 산산조각난 국가(Shattered Nations)에 등장하려고 했으나 무기한 연기로 인하여 취소되어 이곳에서 테란이라는 종족으로 속했다. 스토리에 의하면 서기 24세기 지구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 범죄자가 늘어나서 망할 지경에 지구는 강대국연합연맹(UPL)을 중심으로 뭉친다. 그들은 한 프로젝트를 계획하는데, 사형할 범죄자나 반정부인사, 복제인간 등을 4대의 우주선에 태워 지구에서 내보내는 것이였다. 이 중 세이렌고 호는 파괴되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고, 남은 3대가 코프룰루 구역에 정착한 것이 테란의 시작이다. 건물은 건설 가능한 땅이 있으면 지을 수 있으며, 대다수는 공중에 띄울 수도 있다. 다만 피해를 많이 입어 체력 게이지가 붉은색이 되었을 때에는 공격이 없어도 계속 손상되어 결국엔 파괴되기 때문에 재빨리 건설로봇으로 수리해야 한다. 이 때문에 저그의 디파일러가 사용하는 기술 '플레이그'에 약하다. 테란 유닛 하나하나는 비교적 약한 편이고, 대부분 이동속도가 느린 편이다. 크게 마린, 메딕, 파이어뱃, 고스트등의 생체 유닛(일명 바이오닉 유닛)과 그 보다 생산시간이 길고 공격력이 강한 기계(일명 메카닉 유닛)유닛으로 나뉘며, 기계 유닛이 많이 모일수록 강력한 화력을 보유하게 된다. 대다수 유닛이 원거리 공격을 하기 때문에 컨트롤이 많이 필요하고, 따라서 손이 많이 가는 종족이다. 후반에 고스트와 전투순양함 체제를 같이 쓰려면 과학 시설 건물을 두 개 지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테란의 건물과 유닛의 체력은 자동 회복이 불가능하지만 기계 유닛과 건물은 건설로봇의 수리로, 생체 유닛은 확장팩 추가 유닛인 메딕의 치료를 통해서 체력을 회복할 수 있다.
중재자의 '리콜' 기술이나 저그의 나이더스 커널 건물 같은 대규모 유닛을 순간적으로 이동·수송하는 방법이 테란에게는 없고, 지상방어의 측면에서는 저그의 지하 군체나 프로토스의 광자포 같은 구조물과는
다르게 테란은 방어 유닛을 생산하여 배치해야만 공격이 가능한 건물 '벙커'를 이용해야 한다. 테란이 다른 종족에 비해 월등히 강하다는 소리가 많지만, 테란도 약점에 잘못 걸리면 지는 종족이 되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일례로 테란은 세 종족 중 유닛과 건물의 체력이 가장 약한 종족이며 이를 보완하기 위한 보조, 회복, 건물 수리 및 방해 스킬도 존재한다.

에일리언을 연상시키는 우주 괴물인 저그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설정에 의하면 프로토스의 창조주 젤나가가 프로토스의 실패를 바탕으로 창조한 종족이 저그이고, 개체 하나하나가 자아를 가지고 있는 프로토스와는 반대로 저그는 단 하나의 자아 의식을 가진 초월체(Overmind)를 중심으로 수많은 개체가 군단을 구성한다. 저그가 특정 지역에 정착하면 '점막'(크립)이라고 불리는 생체 물질이 주위 지면을 뒤덮는다. 저그는 이 점막 위에만 건물을 지을 수 있다. 또한 다른 종족은 그 위에 건물을 지을 수 없다. 점막은 해처리와 같은 중앙 건물에 의해 최초 생성되고 점막 군체로 확장된다. 자원 수집 역할과 애벌레를 만들어 내 유닛을 생산하도록 하는 부화장의 시스템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다. 이것은 테란의 병영과 프로토스의 관문 같은 유닛 생산 건물이 따로 필요하다는 점과 매우 대조적이며, 저그는 다른 종족보다 더 속도감 있게 게임이 진행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처음에 오버로드라는 공중유닛이 주어지기 때문에 초반 정찰에 유용하다. 또한 테란 건설로봇의 건물 건설과 프로토스 프로브의 건물 워프와 달리 저그의 일꾼 유닛인 드론은 자신이 건물로 직접 변태한다. 결국 건물 건설을 위해서는 드론 하나를 희생할 수 밖에 없다. 유닛 하나하나가 적은 체력을 가지고 있는데다 약해서 쉽게 죽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생산시간이 짧아 빠르게 충족할 수 있다. 또한 대부분 이동속도가 매우 빨라 기동성의 측면에서 타 종족에 우위를 점할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체력이 자동으로 회복이 되는 특징도 있으나, 그 속도가 매우 느리다. 타 종족은 건물로 인구수를 충족시키는 반면 저그는 유닛인 오버로드가 그 역할을 하기 때문에 공격을 받아 죽는 경우에 인구수에 차질이 생긴다. 테란의 전투순양함이나 프로토스의 우주모함만큼 막강한 유닛은 없지만 대신 유닛의 필요 인구수 수치가 낮아 개체수를 타 종족보다 가장 많이 운용할 수 있고, 테란과 프로토스에는 없는 0.5 짜리 인구수 유닛(스커지, 저글링)도 저그에만 존재한다. 저그는 엄청난 물량으로 상대를 이기는 종족이다.

소수 정예를 지향하는 외계종족 프로토스 역시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설정에 의하면 젤나가가 아이어에서 살고 있는 종족에서 '최초의 가능성'을 보았고, 이들에게 젤나가의 모든 것을 부여하여 탄생한 종족이 회복 기사, 암흑 기사이다. 암흑 기사는 체력도 회복 가능하다. (하지만 프로토스종족들은 머리가 비상하며, 계속해 거듭하는 진화를 통해 자신들의 창조주인 젤나가의 존재까지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로인해 젤나가가 이 종족을 버렸다는 시나리오.) 유닛의 기본능력(공격력, 방어력, 체력)이 매우 뛰어나서 강력한 편이지만, 생산 시간이 길고 가격이 비싸며 필요 될 수 있으며 기동성은 여러가지 이동 속도 업그레이드를 통해 극복이 가능하다.

유닛 크기(Unit Size)와 피해 형태(Damage Type)는 서로 다른 유닛간의 강하고 약한 상성 관계를 설계하는 데 사용된 모델이다.

스타크래프트에 존재하는 모든 유닛은 대형, 소형, 중형 중 하나로 구분된다. 이들 구분은 유닛이 어떤 피해 형태를 가진 공격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느냐를 결정한다. 일반형 공격은 크기에 관계없이 모든 유닛에게 100% 피해를 준다. 진동형 공격은 소형 유닛에게 100%의 피해를, 중형 유닛에게 50%의 피해만을, 대형 유닛에게 25%의 피해만을 준다. 폭발형 공격은 소형 유닛에게 50%의 피해만을, 중형 유닛에게 75%의 피해만을, 대형 유닛에게 100%의 피해를 준다.

스타크래프트에서는 광물(Minerals)과 베스핀 가스(Vespene Gas)라는 두 가지 형태의 자원을 지원함으로써 플레이어가 더욱 전략적인 선택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광물에 비해 베스핀 가스는 희소성도 있고, 노동력을 아무리 많이 투입해도 생산량이 증가하지 않는다.

보통 광물은 7~10 덩어리가 주어진다. 광물 하나를 채취하면 8씩 늘어난다. 여러 일꾼 유닛이 하나의 광물을 동시에 채취할 수는 없다. 대신에 자원 채취가 끝나면 다른 일꾼이 바로 달라붙어 자원을 캐므로 일꾼이 많을수록 자원채취의 공백이 안 생기므로 짧은 시간동안 많은 자원을 충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한 덩어리당 2.5기의 일꾼이 가장 적당하다고 한다. 그러니 너무 많으면 효율성도 떨어진다. 베스핀 가스와 마찬가지로 광물도 한계 지점이 있지만, 베스핀 가스가 자원 기지 당 1개소에서만 캘 수 있는 것에 비해서 여러 덩어리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광물을 모으는 일꾼 유닛이 많아질수록 단위시간당 채취 자원량이 증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또 다른 자원인 베스핀 가스의 경우, 일반적으로 하나의 베스핀 가스 채취구에는 일꾼 유닛을 한번에 3기 까지(특정 방향은 4기) 배치하는 것이 가장 채취량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그 이상 일꾼 유닛을 투입해도 채취량은 올라가지 않게끔 되어 있기 때문에 베스핀 가스의 단위 시간당 채취량은 항상 일정하다. 게다가 베스핀 가스는 무한한 양을 채취할 수 있으나, 일정 정도 수집 후에는 채취 가능한 양이 8에서 2로 줄어든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베스핀 가스는 광물에 비해 항상 부족하다. 때문에 베스핀 가스의 채취량을 늘리려면 베스핀 가스 채취구가 있는 자원 기지를 추가로 확보해야 한다. 더욱이 게임에 등장하는 강력한 고급 유닛들은 대부분 많은 베스핀 가스를 필요로 한다.

《스타크래프트》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제공하는 온라인 게이밍 서비스인 배틀넷을 통해 멀티플레이어 게임을 할 수 있다. 한 게임에서 최대 여덟 명이 동시에 플레이할 수 있고, 사람 대신 컴퓨터 플레이어를 인원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 플레이어 간에 동맹을 맺어 협동 플레이도 가능하며, 한 쪽의 숫자가 부족한 핸디캡 경기를 가질 수도 있다. 배틀넷에서 유즈 맵 세팅 을 제외한 모든 게임은 조기에 게임이 종료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승/패가 기록으로서 남게 되는데, 간혹 네트워크 연결상의 문제로 게임이 종료되면 DISC(Disconnected)로 표시될 수 있다.

《스타크래프트》 역시 배틀넷 상에서 편법적인 플레이를 가능하게 하는 해킹 프로그램이 존재하는데, 블리자드는 이런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플레이어를 발견하면 자사의 모든 배틀넷 망으로부터 그들의 접근을 차단한다.

밀리 게임은 랭킹에 기록되는 게임으로, 인증 받은 전용 맵에서만 플레이할 수 있다. 공정한 게임을 위해 해킹 방지 프로그램이 실행되고, 게임이 별개의 서버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무한 맵' 등 인증되지 않은 맵으로는 밀리 게임을 할 수 없다. 사용자들의 실력을 고려하여 공정하고 편리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게 하는 점에서 큰 기대를 모았다. 스타크래프트 밀리 랭킹 시스템은 발매 초기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였으며 밀리 랭킹 시스템을 이용한 대회 진행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2004년 1월에 래더 랭킹 시스템을 폐지하였다. 2017년 8월 15일에 출시 된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에서 새로워진 레더 랭킹 시스템이 개선되었고, 전국 PC방의 순위도 기록하게되는 전용 레더 랭킹 시스템이 추가되었다. 1.19패치에서도 적용되었다.

스타크래프트 멀티플레이어 시스템을 배틀넷이라고 하며 배틀넷 서버는 공식적으로 Asia, US East, US West, Europe 4개 서버가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경우 사설서버인 Fish 서버와 Brain 서버가 있다. 사용자는 사설 서버를 이용하기 위해 레지스트리 설정을 수정해서 서버에 접속할 수 있다. 이후 스타크래프트 1.18 패치가 이루어지면서 사설 서버였던 피쉬 서버가 레지스트리 설정 없이 자동으로 등록되었다. 1.19패치 이후로 아시아 서버의 분리작업이 이루어져 대한민국 플레이어를 위한 Korea 서버와 일본/중국/대만 등 기타 아시아 국가를 위한 Asia 서버로 분리되었다. 따라서 2017년에 이르러 접속 가능한 배틀넷 서버는 U.S. West, U.S. East, Europe, Korea, Asia, Fish (Korea) 6개 서버가 있다. 그러나 피쉬커뮤니케이션측은 10월 1일부터 서비스 종료되어 서버 목록에서 삭제되었다.
(여담으로 한국서버의 난이도는 블리자드 자체에서 인정했다. 설명에도 고수들의 전장 이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스타크래프트 에디터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게임 내 탑재된 스타크래프트 캠페인 에디터(Campagin Editor)가 있다. 많은 초보 맵 개발자가 사용하지만 기능의 한계를 문제로 이 에디터를 사용하지 않는다. 보통은 세디터(SSEditor), 스타포지(Star Forge) 등의 고급에디터를 많이 사용한다.

리마스터 발매 이후 역언덕, 넓은 언덕 등이 기본 에디터에 내장되었고, 여러 기능의 추가로 고급에디터를 굳이 설치하지 않고도 어느 정도 쓸만한 수준으로 기본 에디터가 발전했지만 시간이 지나 기본 에디터가 삭제되었다.

스타에디트()라는 스타크래프트와 같이 설치되는 맵을 만들거나 편집할 수 있는 도구로 트리거(Trigger)라는 개념을 통해 특정한 논리를 사용자 맵 내에 삽입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스타크래프트의 멀티플레이 네트워크의 명칭인 배틀넷에서는 본래의 스타크래프트 게임과는 관계 없는 '유즈 맵 세팅(Use Map Settings)'이라는 별개의 게임이 성행한다. 이들 게임은 유닛의 이름, 속도, 공격력, 방어력, 체력, 생산비용, 생산시간, 업그레이드 시간, 보유 에너지량 등을 변경할 수 있다.

《스타크래프트》는 1998년 출시된 오래된 게임이지만, 2016년까지 대한민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게임의 하나로 꼽혔다. 또한 《스타크래프트》는 대한민국에 PC방을 퍼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타크래프트》는 그 설정과 줄거리, 인물 등을 활용한 공식 소설과 전자책으로도 출판되었다.

또한 만화가 김성모가 스타크래프트라는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고, 이 작품으로 인해 인터넷에서 드라군 놀이가 유행하였다. 2000년 경에는 신해철, 허니패밀리, 남궁연 등이 참여해서 스타크래프트를 주제로 한 옴니버스 음반이 나오기도 하였다. 게다가 스프라이트를 이용하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로 부터 공인받아 제작한 E스포츠 만화《스타크래프트 에쒸비》를 출판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과거에는 스타크래프트를 소재로 한 식품 상품으로 출시된 적이 있었다.

《스타크래프트: 종족 전쟁》은 1998년에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에 의해 발표된 스타크래프트의 확장팩이다. 이 확장 팩에서는 새로운 캠페인과 각각의 종족에 대해 두 개의 유닛, 새 음악, 새 특수능력과 기술이 추가되었다. 캠페인은 원래 스타크래프트의 이야기, 즉 초월체가 프로토스의 태사다르에 의해 파괴당하고, 프로토스는 저그의 공격을 피해 아이어를 떠나는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닌텐도 64판은 컨트롤러 중앙에 있는 아날로그 스틱을 이용해서 커서를 조작하는데, 이 방식이 마우스에 비해 불편했고, 온라인 기능이 없다는 점 때문에 PC판보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스타크래프트: 고스트》(영어: StarCraft: Ghost)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개발하였던 1인칭 슈팅 게임으로, 스타크래프트의 설정을 기반으로 한다. 블리자드는 이 게임을 2002년에 발표했지만, 2006년 3월 24일 게임의 개발을 “무기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곧 블리자드는 개발 중인 게임 목록에서 이 게임을 지웠고, 웹페이지도 삭제했다. 주인공으로 설정된 여성 유령요원 노바는 에서 나온다.

《스타크래프트 II》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공식적인 스타크래프트의 후속작으로 개발한 PC 게임으로, 2007년 5월 19일 서울에서 개최된 2007 블리자드 월드와이드 인비테이셔널(WWI; World Wide Invitational)에서 스타크래프트2 중 프로토스가 공개되었다. 마침내 2010년 7월 27일 정식 출시가 되었고 대한민국에서는 2010년 9월 18일을 기준으로 오픈베타가 끝나고, 정식으로 출시되었다. 2013년 3월 12일 확장팩인 군단의 심장이 출시되고, 2015년 11월 10일 두 번째이자 마지막 확장팩인 공허의 유산이 출시되었다. 이후 DLC로 노바의 비밀작전이 출시되었다.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영어: StarCraft: Remastered)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1년 6개월동안의 비밀 리마스터 작업 끝에 2017년 3월 26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아이 러브 스타크래프트 행사에서 중대 발표를 통해 세계최초로 공개되었다. 기존작과 달리 SD 스프라이트가 HD 스프라이트로 전환하게 되었고, 16:9 HD와 4K UHD까지 지원한다. 한국어를 포함한 13개국 언어를 지원하고 클래식 베틀넷 계정과 현재의 베틀넷 계정까지 연동이 가능하다. 기존 스타크래프트 엔솔로지는 무료로 배포되며, 리마스터 업그레이드판은 유료로 2017년 8월 15일에 출시되었다.

다음은 《스타크래프트》가 세계 게임 매체들로부터 상을 받고 평가받은 내역이다. 대표적인 수상 실적만 표기하였으며 전체 수상 내역은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수상 목록 페이지에 정리되어 있다.

대한민국 내에서 열리는 스타크래프트 관련 경기 대회는 다른 국가에서는 블리자드가 직접 대회를 주관한 것과는 달리 대한민국 e-스포츠협회에서 주관한 것으로, 블리자드는 이것을 문제삼아 e-스포츠협회와 대회 중계방송사에 지적재산권 보상을 요구해왔으나 e-스포츠협회와 대회 중계방송사 측은 거절하였으며 대회 진행을 강행했다.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측은 다만 비영리 게임대회에 대해서는 지적저작권 보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고 결국 블리자드는 2010년 10월 28일 서울지방법원에 MBC플러스미디어(MBC GAME)에 대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다음해에 블리자드가 소송을 취하하고,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저작권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이어 11월 3일에는 온미디어(현CJ EM)(온게임넷)를 대상으로 저작권 침해에 관한 소송을 제기했다.




#Article 136: 시삽 (148 words)


시삽()은 전자 게시판(BBS)이나 온라인 서비스 가상 공동체 등 다중 사용자 컴퓨터 시스템의 관리자이다.  기타 인터넷 기반 네트워크 서비스들의 관리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시스템 운영자()의 줄임말이며, 시솝, 시샵 이라고도 한다. 사용자들과의 창구 역할을 맡고, 시스템 상의 문제를 고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용자에게 제재를 가하는 등의 일을 한다.

본래 기술자를 지칭하는 용어인 이 말은, 1989년 케텔의 등장 이후 PC통신 동호회들의 장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오프라인에서 동호회장으로 불렸을 말을 동호회 시삽으로 부른 것인데, 처음에는 PC통신 서비스 운영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가 동호회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동호회장을 가리키는 말로도 확장된 것이다. 이 당시의 동호회는 PC통신 내부의 단체로서 서비스 회사와 '운영계약'을 체결하는 형식을 취하여, 동호회 시스템을 할당해주는 형태였고 해당 시스템의 관리자 ID도 발급되었다. (하이텔의 경우 k2****, 천리안은 ZS**** 형식으로 ****부분은 동호회 인덱스로 된 ID였다.) 따라서, 동호회 운영진은 동호회의 동호회 내에서는 시스템 관리자의 역할도 맡게 되므로 시삽으로 지칭된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동호회 운영자들을 삽질하는 사람들이라고도 불렀는데, 시삽의 삽에서 말을 따온 것이다. '삽질'이란 표현은 쓸데없는 노력을 일컫는 유머스러운 속어로도 쓰인다.




#Article 137: 구간 (260 words)


수학에서, 구간(區間, )은 원순서 집합의 주어진 두 원소 사이의 모든 원소들의 집합이다. 특히, 표준적인 전순서를 부여한 실수의 집합 위의 구간을 생각할 수 있다.

원순서 집합 이 주어졌다고 하자. 두 원소 에 대하여 를 로 표기하자.  위의 열린구간(-區間, ) 또는 개구간(開區間)은 다음과 같은 꼴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

마찬가지로,  위의 닫힌구간() 또는 폐구간(閉區間) 은 다음과 같은 꼴의 집합이다 ().

마찬가지로,  위의 반열린구간(半-區間, ) 또는 반닫힌구간(半-區間, ) 또는 반개구간(半開區間) 또는 반폐구간(半閉區間)은 다음과 같은 꼴들의 집합이다 ().

표준적인 전순서를 갖춘 실수  위의 구간은 가장 흔히 사용되는 구간이다. 이 경우 공집합과 한원소 집합을 제외한 구간, 다시 말해 끝점이 를 만족하는 경우만을 구간으로 삼기도 한다.

임의의 원순서 집합 에 대하여, 와  꼴의 구간들의 집합을 부분 기저로 하여 생성된 위상을 순서 위상이라고 한다.

임의의 원순서 집합  및 에 대하여, 의 상폐포·하폐포는 각각 와 이다.

(공집합이나 한원소 집합이 아닌) 실수 구간의 크기는 실수의 집합과 같은 이다.

실수선 의 부분 집합 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실수 구간 의 양 끝점이 라고 하자. 그렇다면 구간 의 길이()는 다음과 같다.

특히, 공집합이나 한원소 집합의 길이는 0이다. 구간의 길이는  위의 보렐 측도로 유일하게 확장할 수 있으며, 이를 (보렐 집합에 국한된)  위의 르베그 측도라고 한다.

가산 개의 실수 구간들의 집합  () 및 실수 구간 이 주어졌을 때, 만약 가 의 덮개를 이룬다면,

이다.

우선, 가 닫힌구간이며, 가 열린구간들의 집합인 경우를 생각하자.

라고 하자. 만약 라면, 이므로, 인 가 존재하며, 가 되므로 모순이다. 따라서 이며,

인 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다.

이제 일반적인 경우를 증명하자. 임의의 양의 실수 에 대하여, 인 부분 닫힌구간 을 취하고, 각 에 대하여 인 열린구간 을 취하자. 그렇다면 는 의 덮개를 이루므로,

이다. 이에 을 취하면

를 얻는다.




#Article 138: 부등식 (139 words)


수학에서, 부등식(不等式, , )은 두 수 및 두 식에 대한 크기 비교를 나타내는 식이다. 부등식은 두 개의 수 및 두 개의 식 사이의 부등호(不等號, )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a  b는 a가 b보다 크다는 뜻이다. 반대로, a  b  c는 a  b이며 b  c인 것을 줄여 쓴 것이며, 물론 이 경우 a  c이기도 하다.

실수 집합 에서, 두 실수 에 대한 부등식은 다음과 같다.

절대 부등식(絕對不等式)은 모든 변수의 값에 대하여 항상 성립하는, 변수 있는 부등식을 말한다. 반면, 조건 부등식(條件不等式)은 특정한 범위의 변수의 값아래에서만 성립하는, 변수 있는 부등식이다. 어떤 부등식이 절대 부등식인 것을 보이는 과정을 그 부등식에 대한 증명이라고 한다. 어떤 부등식이 성립할 조건을 구하는 과정을 그 부등식에 대한 풀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실수 부등식

이 성립할 필요 충분 조건은

이므로, 이는 조건 부등식이다. 실수 부등식

가 성립할 필요 충분 조건은

이므로, 이는 절대 부등식이다.

토머스 해리엇()이 기호 ‘’ 및 ‘’를 도입하였다.




#Article 139: 마거릿 미첼 (208 words)


마거릿 머널린 미첼(, 1900년 11월 8일 ~ 1949년 8월 16일)은 1936년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유명한 미국의 작가이다.

그녀는 미국의 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을 애틀랜타에서 보내며 남부의 역사와 남북 전쟁 시기의 일화를 들으며 성장하였다.

독서광이었던 그녀는 애틀랜타 워싱턴 신학대학교()를 졸업한 후, 여성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의 뜻에 따라 북부에 있는 명문 여자 대학인 스미스 대학교(Smith College)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한다. 그곳에서 '헨리'라는 육군 장교와 연애를 하기도 하지만 헨리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사망하고, 이후 스페인 독감으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1918년에 학교를 중퇴하고 다시 고향 애틀랜타로 돌아왔다. (이 과정은 이후 그녀의 소설에 큰 영향을 준다)

그 후 애틀랜타의 언론사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결혼하여 평범하게 살던 중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신문사를 그만두고 남북 전쟁을 바탕으로 한 대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듣던 전쟁 시기의 일화와 치밀하게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10년 간 집필하여 1936년 출판된 이 장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몰며 빠른 시간내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이듬해 1937년 퓰리처상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3년 뒤인 1939년 비비언 리 주연의 영화로 출시되게 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러나 미첼은 소설가로서 이 한 작품만을 남겼을 뿐이며, 1949년 8월 11일 저녁, 남편 존 마쉬(John Marsh)와 함께 영화 를 보러가는 도중에 애틀란타 13번가의 피치트리 거리(Peachtree Street)를 건너다가 과속으로 달리던 자동차에 치었다. 완전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5일 후 그래디 병원(Grady Hospital)에서 48세로 사망했다. 애틀랜타의 에 묻혔다.




#Article 140: 이디 아민 (204 words)


이디 아민 다다 오우메(, 1923년 혹은 1925년 혹은 1928년 ~ 2003년 8월 16일)은 우간다의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1971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우간다 북서부의 서나일 아루아의 소부족 카크와 출신. 이슬람교도이자 농부인 아버지와 주술을 통해 사람들을 치료하는 루그바라 부족 주술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공식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한 문맹이었던 이디 아민은 193cm의 거구였으며, 권투 챔피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디 아민은 버마 전투에 참가하고, 1946년 영국 식민지 군에 입대하고,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케냐에서 대장으로 영국군으로 마우-마우 저항진압에 가담했다. 1961년 아민은 우간다 최초의 유색 장교가 되었다. 1962년 우간다가 독립하고, 1964년 대령이 된 이디 아민은 1966년 밀턴 오보테와 함께 대통령 무테사 2세를 제거하는데 동참한다. 1967년에는 군 통수권자가 되었다가 콩고 반란군 원조 문제에 연루되어 좌천당했다.

서구 국가들에게 이 쿠테타는 안도를 주었으며, 영국과 이스라엘은 아민 정권을 바로 인정했다. 그러나 쿠데타 며칠 후, 우간다의 지식인, 장교, 법관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오보테를 지지했던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고, 주민들은 살해당했다.

그가 권력에 있던 8년간, 10만에서 50만에 이르는 희생자가 있었을 것으로 인권단체는 추정하고 있다. 아랍권의 국가들과 경제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아민은 이스라엘의 적임을 자처했다. 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미화하고, 유대인들을 추방했다.

아민은 우선 리비아로 도망치고 나중엔 이라크로 향했다가 결국에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마지막 망명지로 택하였는데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지다에 그가 살 빌라를 내어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고혈압과 신경마비로 인한 혼수 상태에 빠져있다가 2003년 8월 16일 생을 마쳤다.




#Article 141: 일본 문학 (580 words)


일본 문학(日本文學, )은 일본어로 적힌 문학 작품, 또는 그러한 작품이나 작가를 연구하는 학문을 뜻한다. 일본문학의 정의를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어서, 언어, 발표된 지역, 문학의 형식 등 여러가지 요소가 고려된다(최근에는 외국 국적의 작가가 일본어 작품을 쓰는 사례와 같이, 국적이나 거주지가 언어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일본어문학이라는 호칭이 사용되는 일도 있다).

역사학과 같이 정권의 이동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언제나 합당하다고는 볼 수 없으나, 이것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또한 상대(上代)・중고(中古)・중세(中世)・근세(近世)・근현대(近現代)와 같은 구분에는 연구자에 따라 다른 의견도 있어서, 중고를 설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근대와 현대의 구분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설이 있어서 정해져 있지 않다.

마루야 사이이치는 《칙찬집》에 따라 일본문학사의 역사구분을 할 것을 제안했다.

약 나라 시대까지. 상대문학을 전기·후기로 나누어 보면, 전기는 신화·전설·가요가 많이 발생하였으나 문자가 없었던 시대이므로 입으로 전달되는 구송문학(口誦文學)이 발달하여 왔다. 그러다 후기에 들어와 문학 의식이 차츰 높아짐에 따라 여러 가지 장르로 나뉘어 발달하여 원시인의 소박한 모습으로부터 차츰 높은 문예적 성격을 나타내게 됨에 따라 한자 및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 기재 문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중국 대륙에서 한반도를 경유하여 한자가 유입되어, 한문과, 자신들의 말에 한자를 끼워맞춘 만요가나가 사용되었다. 이 무렵 신화·전설·가요를 집대성하여 《고지키》(712년) 《니혼쇼키》(720년)와 같은 역사서가 성립되었는데 특히 와카만을 모아 엮은《만요슈》가 나와 순문학을 수립했다.

약 헤이안 시대에 해당한다. 한시・한문이 계속해서 번영을 누림과 함께, 첫 칙찬와카슈인 고킨와카슈가 편찬되고, 와카가 한시와 대등한 위치를 점했다. 당시의 공식문서는 한자로 쓰여져 있었으나, 히라가나로 된 순수한 일본어에 의한 표현이 성행하기 시작하여, 기노 쓰라유키의 《도사 닛키》가 쓰여짐에 이어, 세이 쇼나곤의 수필 《마쿠라노소시》,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모노가타리》 등 고전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이 나타나 일본 문학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이 시대의 문학의 특징은 주관적이고 우미적 정취(優美的情趣)에 중심을 두었다는 데 있다. 또한 고유의 문자인 가나(假名)가 발달하여 특히 여성 작가에 의해 아름답고 고운 문학작품이 만들어졌다.

약 가마쿠라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까지. 헤이안 시대 문학의 영향으로 소설·수필 등이 성행하였고 무사계급의 전란을 반영한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 《호겐모노가타리》(保元物語) 등의 군담소설과 《호조키》(方戈記) 같은 수필문학이 나왔다. 무사들간의 전란이 오래 계속되었기 때문에 승려와 일부 은둔자들에 의해 씌어진 작품이 많아 불교사상과 염세적 사상이 깃들여 있다.

후지와라노 사다이에 등에 의한 화려한 기교에 특징이 있는 《신고킨와카슈》가 편찬되었다. 또한 현대일본어의 직계 선조라 할 수 있는 와칸콘코분을 사용한 많은 작품이 나타났다. 가모노 조메이의 《호죠키》, 요시다 겐코의 《츠레즈레구사》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작자 미상의 것으로 《헤이케 모노가타리》를 들 수 있다. 또한 사루가쿠의 발달이 눈에 띈다.

약 에도 시대의 문학. 오토기조시의 흐름을 따라 가나조시나 이하라 사이카쿠 등의 우키요조시가 나타났다. 또한 이제까지의 문학이 주로 귀족·승려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이 시대의 문학은 신흥 서민계급이 주체가 되었다. 이들은 낙천적 생활을 즐겼으므로 오락적인 문학이 발달하여 새로운 문학의 장르가 나타났다. 이 때 당시 가부키나 조루리가 흥하여 인기몰이를 했다. 하이카이가 유행하여 마쓰오 바쇼, 고바야시 잇사 등의 인물들이 활약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 개국과 함께 서양의 문명이 흘러들어와 문명개화가 일어나자 일본 문학도 큰 영향을 받았다. 서양 근대소설의 이념이 유입되어 쓰보우치 쇼요의 《소설 신수》,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소설 총론》《우키구모》 등에 의한 실질적 근대 일본문학이 출발했다. 흔히 말하는 '문학'이라는 개념은 이때 생겨났다.

메이지 20년 전후부터 근대문학이 싹트기 시작하여 사실주의에 이어 낭만주의가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리고 서구의 자연주의가 들어와 문단의 주류가 되어 시단에 혁신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자연주의에 반대하는 신이상주의문학이 일어났고, 다이쇼 말기로부터 쇼와 10년까지는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적 문학과 사회주의적 문학이 대립을 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전쟁에 협력하는 전쟁문학만이 허용되어 문학은 전쟁 일색으로 변하고 문학정신은 어둠 속에 잠겨 버렸다. 전후의 문학은 전전의 문학을 추구하여 전전(戰前)의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의 왜곡된 점을 시정하고 자유정신을 회복하고 새 정치와 문학의 관계를 수립하고자 했다. 이 점은 주로 근대문학에 의하여 비평가들이 정치의 우위성으로부터 문학을 탈환하여 문학의 자율성을 인정하고자 했다. 전전 일본의 지식인들이 파시즘과 전쟁에 대한 저항운동을 조직하지 못한 점을 반성하고, 거기에 일본인의 근대적 인간의 자아의 미성숙을 인정하려고 새로운 시대의 인간의 밑바닥에 근대적 자아의 확충을 꾀하게 됨과 동시에 전후 세대의 자기 주장과 관련된 문예비평의 전개와 호응하여 소설 분야에서도 전전의 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시대의 문학작품이 등장하였다.

그러한 작품들 속에 담겨진 공통된 특징은 다음과 같다.




#Article 142: 거리 공간 (221 words)


수학에서, 거리 공간(距離空間, )은 두 점 사이의 거리가 정의된 공간이다. 거리의 정의에 따라 표준적인 위상을 갖는다.

집합  위의 거리 함수(距離函數, )는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함수

이다.

마지막 두 공리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공리로 대체시킬 수 있다.

여기서 로 잡으면 가 되어, 대칭 공리를 얻는다. 거리 함수의 정의에서, 첫째 조건을 로 약화시키면 유사 거리 함수의 개념을 얻는다.

거리 공간 은 거리 함수가 주어진 집합이다.

거리 공간 에서, 점 를 중심으로 하는, 반지름이 인 열린 공 는 다음과 같다.

점 를 중심으로 하는, 반지름이 인 닫힌 공 는 다음과 같다.

거리 공간 의 유계 집합 는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부분 집합이다.

거리 공간 의 거리 위상(距離位相, )은 의 시작 위상이다. 즉, 열린 공들을 기저로 하는 위상이다. 즉, 거리 위상에서의 열린집합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부분 집합 이다.

이에 따라 모든 거리 공간은 표준적으로 위상 공간을 이룬다.

모든 코시 수열이 극한을 갖는 거리 공간을 완비 거리 공간이라고 한다.

거리 공간 의 지름() 는 그 속의 두 점 사이의 가능한 거리들의 상한이다.

마찬가지로, 거리 공간의 부분 공간은 거리 공간을 이루므로 그 지름을 정의할 수 있다.

지름이 유한한 거리 공간을 유계 공간이라고 한다.

거리 공간 의 임의의 부분 집합 에 대하여, 는 거리 공간을 이룬다.

모든 거리 공간은 다음 성질들을 만족시킨다.

거리 공간 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노름 공간 에 대하여, 거리 함수를

로 정의한다면, 는 거리 공간이다. 마찬가지로, 노름 공간 에 대하여 거리 함수를



#Article 143: 위상 공간 (수학) (431 words)


일반위상수학에서, 위상 공간(位相空間, )은 어떤 점의 근처(근방)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지만, 점 사이의 거리나 넓이·부피 따위의 정보를 포함하지 않는 공간이다. 이를 사용하여, 함수의 연속성이나 수열의 극한, 집합의 연결성 등을 정의할 수 있다.

위상 공간의 개념은 위상수학 및 이를 기초로 하는 기하학 · 해석학에서 핵심적으로 사용된다. 위상 공간의 일반적인 성질을 연구하는 분야를 일반위상수학이라고 한다.

집합  위의 위상(位相, )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다.

이 정의들은 서로 동치이다.

즉, 근방 · 열린집합 · 닫힌집합 · 폐포 · 내부 가운데 하나를 기본 무정의 개념으로 삼고, 이로부터 나머지 개념들을 정의할 수 있다.

위상 공간 은 위상을 갖춘 집합이다.

같은 집합  위의 두 위상 , 에 대하여, 다음 세 조건이 서로 동치이며, 만약 이 조건이 성립한다면 이 보다 더 섬세하다(-纖細-, )고 하며, 반대로 가 보다 더 거칠다()고 한다.

주어진 위상 공간 의 열린집합들은 완비 헤이팅 대수를 이룬다. 즉, 위상 공간은 직관 논리의 모형으로 여길 수 있다. 또한, 위상 공간은 양상 논리 S4의 모형으로 여길 수 있다. 이 경우 양상 기호 (필연 기호)는 집합의 내부에, 양상 기호 (개연 기호)는 집합의 폐포에 대응한다.

주어진 집합  위의 위상들은 섬세성 관계에 따라서 완비 유계 격자를 이룬다. 이 격자의 최대 원소(즉, 가장 섬세한 위상)는 이산 위상이며, 최소 원소(즉, 가장 거친 위상)는 비이산 위상이다.

주어진 집합  위의 위상들의 족 의 하한(만남)은

이다. 주어진 집합  위의 위상들의 족 의 상한(이음)은 를 기저로 하는 위상이다.

위상 공간과 연속 함수들은 범주를 이루며, 이 범주를 이라고 한다. 이 경우, 망각 함자

를 통해, 은 구체적 범주를 이룬다. 이 망각 함자는 좌 · 우 수반 함자를 갖는다.

여기서

은 집합을 이산 공간으로 대응시키고,

는 집합을 비이산 공간으로 대응시킨다.

은 완비 범주이며 쌍대 완비 범주이다. 즉, 모든 작은 (= 고유 모임 크기가 아닌) 극한과 쌍대극한이 존재한다. 시작 대상은 (유일한 위상을 갖춘) 공집합 이며, 끝 대상은 한원소 공간 이다.

유한 집합 위의 위상의 경우, 열린집합들을 그대로 나열할 수 있다. 예들 들어, 집합 X = {1,2,3} 위에서, 다음은 위상을 이룬다.

그러나 다음은 위상을 이루지 않는다.

좀 더 복잡한 위상 공간의 경우, 다양한 구조로서 위상들을 정의할 수 있다.

위상 공간의 개념은 매우 일반적이며, 대부분의 경우 특정한 성질을 만족시키는 위상 공간들을 고려한다. 대표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위상 공간은 근방의 개념 밖에는 다른 정보를 추가적으로 담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하여 여러 다른 정보를 추가하여, 다음과 같은 구조들을 정의할 수 있다.

위상 공간의 개념은 매우 일반적인 개념이지만, 대수기하학에서는 이보다 더 일반적인 개념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이 경우, 열린집합들의 포함 관계에 대한 부분 순서 집합을 범주로 추상화하여, 덮개의 개념을 공리화할 수 있는데, 이렇게 하면 범주 위의 그로텐디크 위상의 개념을 얻는다. 또한, 이를 한 단계 더 추상화하여, 공간의 열린집합들 대신 공간 위의 모든 층들의 범주의 성질을 공리화하면 토포스의 개념을 얻는다.

범주론 대신, 위상 공간의 열린집합들의 격자론적 성질(완비 헤이팅 대수)을 공리화하면 장소()라는 개념을 얻는다.




#Article 144: P2P (595 words)


P2P(peer-to-peer network) 혹은 동등 계층간 통신망(同等階層間通信網)은 비교적 소수의 서버에 집중하기보다는 망구성에 참여하는 기계들의 계산과 대역폭 성능에 의존하여 구성되는 통신망이다. P2P 통신망은 일반적으로 노드들을 규모가 큰 애드혹으로 서로 연결하는 경우 이용된다. 이런 통신망은 여러 가지로 쓸모가 있는데, 오디오나 비디오, 데이터 등 임의의 디지털 형식 파일의 공유는 매우 보편적이다. 또한, 인터넷 전화(VoIP)같은 실시간 데이터 등도 P2P 기술을 통해 서로 전달될 수 있다.

순수 P2P 파일 전송 네트워크는 클라이언트나 서버란 개념 없이, 오로지 동등한 계층 노드들(peer nodes)이 서로 클라이언트와 서버 역할을 동시에 네트워크 위에서 하게 된다. 이 네트워크 구성 모델은 보통 중앙 서버를 통하는 통신 형태의 클라이언트-서버 모델과는 구별된다. FTP 서버야 말로 P2P 파일 전송 형식이 아닌, 대표적 반례로 꼽을 수 있다. 어떤 사용자가 FTP 서버에 어떤 파일을 올리면 다른 사용자들이 내려 받는데, 올리는 쪽과 내려받는 쪽 모두 동시에 접속하지 않아도 된다.

냅스터, 오픈냅, IRC ) 등과 같은 네트워크와 채널은 클라이언트-서버 구조를 검색 등과 같은 일부 기능에 쓰고, 다른 기능은 P2P 구조를 쓴다. 누텔라나 프리넷 같은 네트워크는 모든 기능에 P2P 구조를 가지는데, 비록 그 네트워크가 다른 같은 계층의 사용자들(peers)의 네트워크 주소를 알려 주는 데 디렉터리(directory) 서버에 크게 의존하긴 하지만, 때때로 진정한 P2P 네트워크으로 인용된다.

P2P 네트워크 구조는 최근에 인터넷 상에서 멀티미디어 파일을 공유하는 용도로 많이 부각되긴 했지만, 1969년 4월 7일에 제정된 RFC(Request for Comments)란 인터넷 규약의 초기 버전부터 핵심적인 기술로 내제되어 있어 유래가 깊다.

최근의 P2P 서비스는 순수 파일 전송 네트워크에서 발달하여 그리드 컴퓨팅 기술로 진화해 웹하드 형태로 서비스되고 있다. 외부적으로 웹하드 형식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 유저들의 저장장치에 화일이 직접 전송되어 순수 초기 P2P 네트워크와 마찬가지로 유저들의 시스템에 부하를 유발하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웹하드 형태의 그리드 컴퓨팅 P2P 서비스로는 피디박스, 화일아이, 아이팝 등이 있다.

P2P는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여러가지 형태의 리소스 (저장 공간, 씨피유 파워, 콘텐츠, 그리고 연결된 컴퓨터를 쓰고 있는 사람 그 자체)를 이용하는 일종의 응용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이들은 고정된 ip 주소도 없고, 연결이 되었다 안 되었다 하는 '불안정한' 형태로 존재하는 분산된 리소스이다. 따라서 P2P 노드는 종래의 DNS '바깥에서' 운용될 수밖에 없으며 강력한 중앙의 서버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P2P를 독보적으로 만드는 핵심이다.

P2P 디자이너들은 그런 특징을 활용해서 CPU 싸이클들을 모을 수 있는 방법, 파일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 채팅하는 방법 등을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느냐이다.

냅스터나 ICQ, Popular Power, Freenet 등은 모두 기존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던 리소스를 발굴해서 지렛대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러한 서비스는 다양한 형태로 인터넷에 물려 있는 수천, 수만가지의 장치들을 잘 조합하고 연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혹자는 P2P 디자이너들이 해결하는 이러한 '연결 문제'(connectivity problem)가 단지 하나의 해프닝적인 것 아니냐는 식으로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컴퓨터끼리 연결하는 방법을 개선하겠다'는 모토가 그 유명한 IP 주소나 DNS, 또는 그전의 TCP, 심지어는 인터넷 그 자체를 태어나게 했다는 사실. 인터넷은 결국 위에서 말한 기술이 탄생한 순간 순간이 모여서 이뤄진 것이다.

Whois에 따르면 IP 주소가 처음 뿌리를 내린 1984년 이후 16년 동안 2천3백만 개의 도메인 이름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냅스터는 혼자서 16개월 만에 2천 3백만 개의 비 DNS 주소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만약 사용자가 모든 비 DNS 인스턴트 메시징 주소에 가입한다고 하면 동적인 IP 주소에 접근할 수 있는 P2P 주소의 개수는 모두 2억 개를 넘어선다. 평균 DNS 호스트가 10개의 second.first.com 같은 형태의 2차 주소를 갖고 있다고 가정해 보아도, 현재의 P2P 주소의 모든 개수는 불과 4년 뒤엔 DNS 주소의 모든 개수와 같아지게 될 것이며, 오늘날의 DNS 세계보다 훨씬 더 광대한 세계로 성장해 가게 된다는 셈이 된다.

무선 PDA 같은 새로운 종류의 인터넷 접속 장치나 TiVo, Replay 같은 디지털 비디오 레코더가 보급됨에 따라 이들 역시 인터넷의 중요한 일부가 될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현재로는 피씨 그 자체야말로 개척되지 않은 리소스의 절대 다수를 갖고 있다. 피씨는 인터넷의 다크호스이다. 그리고 그 피씨가 갖고 있는 '덜' 사용된 리소스는 P2P 혁명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알파벳순 표시 - 매우 비슷한 응용 프로그램 예외

P2P 시스템의 이전 세대는 메타컴퓨팅(metacomputing)이라 불리거나 미들웨어(middleware)로 분류됨. , , , 




#Article 145: 선택 공리 (714 words)


집합론에서, 선택 공리(選擇公理, , 약자 AC)는 공집합이 아닌 집합에서 한 원소를 고를 수 있으며, 또한 이를 무한 번 반복할 수 있다는 공리이다. 직관적으로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비직관적인 결과를 함의한다.

집합족  위의 선택 함수(選擇函數, )는 다음 성질을 만족시키는 함수 이다.

만약 라면, 는 물론 선택 함수를 가질 수 없다. 선택 공리 에 의하면, 공집합을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족은 선택 함수를 갖는다.

임의의 기수 에 대하여, 는 크기가  이하인, 공집합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족은 선택 함수를 갖는다는 명제이다. 특히, 일 때 를 가산 선택 공리(可算選擇公理, )라고 한다.

임의의 집합  및 이항 관계 가 주어졌고, 또한 이들이 다음 성질들을 만족시킨다고 하자.

그렇다면, 의존적 선택 공리(依存的選擇公理, ) 에 따르면 다음 성질을 만족시키는 열

이 존재한다.

집합론의 언어 에 1항 연산 를 추가하자. 그렇다면, 이 언어 에서, 대역적 선택 공리(大域的選擇公理, )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이 경우, 를 선택 연산()이라고 한다.

대역적 선택 공리는 선택 공리를 함의하며, ZF + 대역적 선택 공리는 ZFC의 보존적 확장이다.

집합족 가 주어졌으며, 각  위에 정렬 순서 가 주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선택 함수

를 다음과 같이 자명하게 정의할 수 있다.

특히, 만약  위에 정렬 순서가 주어졌다면, 이는 각 에 대하여 제한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선택 함수를 정의할 수 있다.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 아래, 임의의 자연수 에 대하여 을 증명할 수 있다.

즉,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에서는 유한 개의 선택을 할 수 있지만, 무한 개의 선택은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이 무모순적이라면) 불가능하다.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 아래, 선택 공리는 의존적 선택 공리를 함의하며, 의존적 선택 공리는 가산 선택 공리를 함의한다.

증명 ():

집합족 이 주어졌다고 하자. 집합

위에 다음과 같은 이항 관계 를 정의한다.

그렇다면, 

가 존재한다. 따라서 를 사용하여

를 고른 뒤

이라고 정의하면, 이다. 따라서 는 가산 무한 집합족 의 선택 함수이다.

증명 ():

집합  위의 이항 관계 가 주어졌다고 하고, 또한

가 성립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선택 공리에 의하여 집합족

의 선택 함수

가 존재한다. 임의의 원소 를 고르고

을 정의하면, 이는 의존적 선택 공리에 등장하는 조건을 만족시킨다.

만약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ZF)이 일관적이라면, 선택 공리는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과 독립적이다. 즉, 다음을 보일 수 있다.

구성 가능 전체에서는 선택 공리가 성립한다.

즉,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의 모형 이 주어졌을 때,  속의 구성 가능 전체 은 ZFC의 모형을 이룬다.

반면, 강제법을 사용하여 선택 공리가 실패하는 모형들을 구성할 수 있다.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 아래, 다음 명제들은 선택 공리를 함의한다.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을 가정하면, 선택 공리는 수많은 동치 명제들을 가지며, 다음과 같다. 즉,

인 명제 의 예는 다음을 들 수 있다.

만약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이 일관적이라면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으로 다음 정리들을 증명할 수 없지만, 선택 공리를 추가하면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선택 공리를 의존적 선택 공리(또는 가산 선택 공리)로 약화시킨다면,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증명 불가능하다.

공식적인 형식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까지 선택 공리는 암묵적으로 수학자들 사이에서 사용되어 왔다. 예를 들어, 집합 가 공집합이 아닌 집합만을 포함한다고 했을 때, 수학자들은 종종 “모든 에 포함된 (집합) 에 대해, 를 의 원소라고 하자” 라고 기술하곤 했다. 일반적으로 (함수)  가 선택 공리 없이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란 불가능했고, 그로 인해 체르멜로 이전까지는 이를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한편, 모든 함수가 선택 공리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유한 집합 의 경우, 선택 공리는 다른 집합론의 공리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각각에 적어도 하나의 물건이 담긴 (유한한) 여러 개의 상자들을 상상 해 보자. 이때 우리는 각 상자에서 정확히 하나의 물건을 선택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첫 번째 상자에서 물건 한 개를 선택하고, 두 번째 상자로 옮겨 여기서도 물건 한 개를 선택한다. 그 후 세 번째 상자에서도 물건을 하나 선택하고, 이런 방식을 유한한 횟수로 반복해서, 마지막 상자에서 물건을 하나 선택하는 것으로 이 과정을 마칠 수 있다. 이 때, 각 상자에서 하나 씩의 물건을 선택함으로써 보여지는 상자-물건의 관계를 선택 함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공집합이 아닌 집합의 모든 가산 집합족에 대해서도 선택 함수가 존재한다는, 가산 선택 공리를 증명하는 데에는 사용될 수 없다. 같은 방법이 공집합이 아닌 집합들의 무한열에 적용될 경우, 각각의 유한한 단계에서는 함수가 정의되나 전체 집합족에 대한 함수가 정의되는 단계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결과적으로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의 체계 아래서 선택 공리 없이는 어떤 “극한” 선택 함수도 구성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게오르크 칸토어는 선택 공리와 동치인 정렬 정리가 증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명한 사고 법칙()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다른 수학자들은 이 사고 법칙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1904년에 헝가리의 수학자 쾨니그 줄러()는 정렬 정리를 반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몇 주 뒤 펠릭스 하우스도르프가 이 반증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의존적 선택 공리는 1942년에 파울 베르나이스가 도입하였다.

현재까지도, 많은 수학자들은 선택 공리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을 보인다. 미국의 수학자 제리 로이드 보나(, 1945~)는 1977년에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농담하였다.

이는 위 세 명제가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 아래 서로 동치이지만 직관적으로는 그 참·거짓 여부가 모순되게 보인다는 것에 대한 농담이다.




#Article 146: 불교 (739 words)


불교(佛敎, , )는 기원전 6세기경 인도의 고타마 싯다르타에 의해 시작된 종교이다. 불교는 그가 펼친 가르침이자 또한 진리를 깨달아 부처(붓다깨우친 사람)가 될 것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구체적으로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또는 고통이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가르침의 목적인데 이는 노자가 구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건 도가 아니라고 한 가르침과 다르다. 상좌부 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눌 수 있다.

오늘날까지 2,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불교는 다양하고 복잡한 종교적 전통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불교는 일반적으로 개조(開祖)로서의 부처, 가르침으로서의 법, 그리고 이를 따르는 공동체인 승의 삼보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불교의 가르침을 반야 또는 보리와 혼동하는 주장이 있다. 해탈 또는 열반은 위 설명과 같이 벗어나는 것을 뜻하고 반야 등은 지혜를 뜻하므로 이들은 다르다.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은 열반에 도달하는 것과 동일하다. 불교경전인 《열반경》에는 이러한 견해가 뚜렷이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삼국시대에 중국을 통해 전래되었다. 중국의 불교는 후한 때에 전래되어 이후 불교의 경전이 개인 혹은 국가적 사업으로 한문번역되었다. 아함경 뿐 아니라 반야, 대승경전이 다량 동시대에 번역되어 유통되었다. 한역된 경전을 기본으로 한 불교는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불교(북방불교)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불교도들은 전통적으로 한역된 경전, 즉 대장경을 수지독송해 왔다. 근래에 남방에 전래된 초기의 불교경전의 한글번역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미 영국에서는 약 한 세기 전부터 괄목할 만한 수준의 니카야 번역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샤카족의 왕자로 태어난 싯다르타 고타마(Siddhārtha Gautama)에 의해 창시되었으며 현 네팔과 인도 북동부 지방에 있던 마가다(Magadha) 왕국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 싯다르타의 출생지는 룸비니(Lumbini)였고, 그의 성장지는 가비라 성(迦毘羅城, Kapilavastu)이었으나 그의 종교 활동인 수도(修道), 정각(正覺), 포교(布敎)는 마가다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의 출생지나 성장지보다는 마가다 왕국이 불교 발생의 중심지로 생각된다. 싯다르타는 갠지스 강 주변의 나라였던 슈라바스티(Srāvastī) 왕국의 기원정사와 마가다 왕국의 죽림정사 같은 곳에서 많은 제자를 이끌었다. 석가모니 생전의 주요 제자로는 사리불, 목건련, 가섭, 아난과 같은 십대제자가 알려져 있다. 싯다르타의 인생과 관련된 주요한 장소는 팔대성지라고 부른다.

인도 마우리아 왕조(기원전 4세기 - 2세기)의 3대 왕이었던 아소카왕은 정복 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였으나 전쟁의 참상에 큰 충격을 받고 불교로 귀의하였다. 이에 의해 인도 전역에 불교가 전파되었으며 인도 이외의 지역으로 불교가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간다라를 거쳐 티베트페르시아아프가니스탄타클라마칸 지역으로 전파 되었다. 이들 지역은 중국에서 서역이라 불리던 곳으로 대월씨(大月氏)안식(安息)강거(康居) 등의 이 지역 승려들에 의해 불경과 불상이 전래되고 경전이 한역되었다.
중국에 전해진 불교는 중국 고유의 도교 사상과 많은 융합이 일어났다. 한국과 일본에 전래된 불교는 중국의 한역 불경이 근간을 이루었으나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 역시 지속적으로 전파되었다.
티베트에 전래된 불교는 독자적인 발전을 거쳐 라마교라 불리게 되었으며 몽골에 전파되었고 원나라 시기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원나라 멸망 후 중국과 한국 등에서는 쇠퇴하였으나 이후 청나라 시기에 황궁의 종교가 되기도 하였다.
서쪽으로 전파된 불교는 유럽에까지 전파되어 칼미크 공화국은 불교를 국교로 삼기도 한다.
북방 경로를 거쳐 전파된 불교는 북방불교 또는 대승불교라 불리기도 한다.

한편, 동남아시아 지역에도 불교가 전파되었으며 스리랑카태국캄보디아미얀마베트남 지역의 절대다수 사람들이 불교를 믿는다.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부처님 당대의 구어인 빠알리어 경전을 갖춘 상좌부 불교가 있는데, 상좌란 곧 장로라는 뜻이다. 또는, 남방불교라고 부르기도 하며, 원래 명칭 그대로 테라와다 또는 테라바다(Theravada) 불교라고도 부른다. 상좌부 불교 지역에서는 상좌부 불교를 '테라바다'로, 대승불교를 '마하야나'라고 부른다.

불교는 교조인 싯다르타 고타마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이며, 깨달음을 얻어 궁극적으로 붓다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도에서 불교는 원시 불교, 부파 불교, 대승 불교, 밀교의 순으로 전개되었는데 불교의 사상도 이러한 전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싯다르타는 당시 인도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던 형이상학적 문제가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답하지 않았다. 싯다르타는 법(다르마)을 인정하였으나, 그 안에서의 총합적인 나(아트만)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았으며, (무아) 오히려 영원한 나에게 집착하기 때문에 번뇌가 따른다고 하였다. (일체개고) 싯다르타는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고 망집을 단절한다면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열반(니르바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불교에는 여러 개의 천국이 있으며, 모두 자신이 지은 업의 결과이다. 좋은 업을 쌓은 사람들은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인도에는 현재 8,000명 정도의 승려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승려 교육 기관은 없다고 한다.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망명 정부를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 세워서, 티베트 승려가 많아짐에 따라 인도인들에게도 불교가 전파되고 있다고 한다. 보통, 인도에서 평등을 추구하는 불교를 믿으면, 불가촉천민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미국에서 지식인들과 유명인사들 사이에 참선수행과 불교가 널리 확산되고 있다. 미국에서 불교를 널리 전한 인물로는 일본인 스즈키 다이세츠, 한국인 숭산 행원 선사 등이 손꼽힌다.

쇼펜하우어 등 불교를 이해하고 수용한 철학자, 사상가들이 있었다. 티베트 망명 정부의 정치 지도자이자 세계적 불교 지도자인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영향으로 티베트 불교가 널리 알려져 있다.

평화를 위해 헌신해 온 베트남 출신의 불교지도자 틱낫한(釋一行, Thich Nhat Hanh) 스님이 이끄는 수행공동체인 Plum Village가 프랑스 보르도에 소재하고 있으며, 유럽과 미국, 베트남 등지의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주로 모여 있다. 대도시에는 한국 사찰이 운영하는 포교당이 있는데 교민 중심의 포교 활동을 하고 있다.

러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 중 칼미키야 공화국과 투바 공화국이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있다. 그 밖에 부랴트 공화국도 불교를 믿는다.

한국 사찰 건축

강원, 찰을 총림이라고 하며, 해인사 해인총림, 송광사 조계총림, 수덕사 덕숭총림, 통도사 영축총림, 백양사 고불총림의 5대 총림이 있다.

반야심경화엄경묘법연화경부모은중경금강경법구경아함경숫타니파타공덕경관음경능엄경목련경무량수경밀란다왕문경미륵상생경미륵하생경백유경불유교경사십이장경아미타경약사경열반경원각경천수경잡아함경유마경, 팔만대장경 등이 있다.




#Article 147: 안토니오 살리에리 (143 words)


안토니오 살리에리(, 1750년 8월 18일 - 1825년 5월 7일)는 이탈리아 레가노 태생의 음악가이다.

살리에리는 당시 세간의 찬사를 얻었던 음악가였다. 유년기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1766년에는 빈 궁정으로부터 초청을 받는다. 그 후 빈에 머무르며, 1788년에는 궁정작곡가로 임명되며, 사망 직전인 1824년까지 그 지위에 있는다.

빈에서 작곡가로, 특히 오페라, 실내악, 종교음악에서 높은 명성을 쌓는다. 그의 43편의 오페라 중에 가장 성공한 것으론, 《Danaides》(1784)과 《Tarare》(1787)을 꼽을 수 있다.

살리에리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여, 하이든등 당대의 저명한 작곡가들과 교류가 있었다.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는 모두 어렸을 때, 그의 지도를 받았던 적이 있다.

그러나,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와의 열등감으로 가장 잘 알려졌을 것이다. 1790년대 빈에는 살리에리의 도작설, 독살설등의 소문이 돌았으나, 이들 중 사실로 입증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는 여러 연극, 영화의 소재가 된다. 이들 중 유명한 것이 1984년작 영화 《아마데우스》이며, 이 안에서 살리에리는 질투심이 강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렇게 주변 인물(1인자)로 인하여 2인자로서 열등감과 시기를 보이는 심리적 증상으로 살리에리 증후군(Salieri syndrome)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Article 148: 공학 (1385 words)


공학(工學, )은 과학적, 경제학적, 사회적 원리와 실용적 지식을 활용하여 새로운 제품, 도구 등을 만드는 것 또는 만드는 것에 관한 학문이다. 공학의 영역은 넓고, 여러가지 분야로 세분화되어 있다.

공학이라 하면 수학과 자연과학을 기초로 해서, 가끔은 인문, 사회과학의 지식을 이용해서, 공동의 안전, 건설 복지를 위해서 유용한 사물이나 환경을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다.

공학은 대부분의 분야에서 수학, 물리학, 화학 등의 자연과학을 기초로 하고 있으나, 공학과 자연과학의 차이점은 있다. 어떤 현상을 눈앞에 두고 자연과학도는, “이 현상은 어떻게 된 것 일까?”나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라고 하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상태의 이해를 추구하는 것에 반해, 공학은 '어떻게 하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상태나 물건을 현실에 만들 수 있을까'를 추구하는 점이 있다. 어쩌면 '어떻게 하면 목표로 하는 성과에 도달할 수 있을까'라고 하는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공학은 안전성, 경제성, 보안성 등 실용적인 관점에서 평가 및 판단을 한다. 사용할 수 있는 시간, 인원, 예산의 제약 속에서 공학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술적 검토와 그 평가를 공학적 타당성이라고 하며, 공학적인 성질의 분석에는 환경 적합성, 사용성, 정비성(整備性,), 수명주기비용 등 (질량, 속도같이 즉물적으로 단순하게 측정 가능한 성질과는 다르게, 인간에 대한 배려를 기본으로 한다.) 평가 방법이 필요한 것이 많다. 그렇게 해서 평가방법의 개발도 공학의 중요한 분야이다.

또한 공학은 다른 학문의 성과를 사회에 환원하기 위한 기술의 개발이라고 하는 면에서 공동의 복지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며, 공학 각 분야의 학회에 이론적인 내용을 쌓아 놓은 신조(）가 정해져 있다.

현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는 의미로서의 ‘엔지니어링’(engineering)이라고 하는 용법은 18세기에 돼서 생겨난 것이지만 ‘엔지니어링’의 개념에 합치하는 행위는 고대부터 행해져왔다고 생각되고 있다.

공학을 실천하는 것을 엔지니어(engineer) 또는 기술자라고 부른다.

후에 민간의 다리나 건축물의 건설법이 공학 분야로서 발전함에 따라 'civil engineering(토목공학)'으로 불리게 되었다. 애초에 'engine'이 무기를 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군사와는 관련이 없는 분야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civil(시민)'이라는 단어를 붙이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18세기 이전에 군사기술만을 의미하던 'engineering‘이라는 단어가 'civil engineering(=군사이외의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에너지 등을 이용해서 편의를 얻는 기술 전반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근대적인 공학의 개념은 상기한 경위로 형성된 것이지만, 인류의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밝혀내서 찾아본다면 고대에도 근대공학과 일치하는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바빌론의 공중정원,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 신전, 고대 로마의 수도와 도로나 콜로세움, 마야문명, 잉카제국, 아스테카의 테오티우아칸 등의 도시나 피라미드, 만리장성 등은 고대의 공학의 정교함과 기능을 보여준다.

최초로 토목기술자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로는 임호테프가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인 조세르왕을 섬기면서, 기원전 2630년부터 기원전 2611년쯤 사카라에서 조세르왕의 피라미드(계단식 피라미드)의 설계와 건설 감독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그리스에는 민간용과 군사용 양쪽의 분야에서 기계가 개발되었다. 안티키테라 섬의 안티키테라 기계가 알려진 것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아날로그 컴퓨터라고 하며, 아르키메데스가 발명한 기계는 초기 기계공학의 한 예이다. 그 후로 기계에 차동기어 또는 유성기어의 지식이 필요해지면서 그 두 가지 기계이론의 중요한 원리가 산업혁명의 기어 트레인의 설계를 도와주었으며 지금까지도 로봇공학이나 자동차공학 등 여러 가지 분야에 넓게 사용되고 있다..

기원전 4세기경엔 그리스에 투석기가 개발되었고, 중국과 그리스, 로마의 삼단범선은 물론, 바리스타나 캐터펄트라고 하는 복잡한 기계식 병기가 사용되고 있었다. 중세에는 트레뷰셋이 개발되었다.

월리엄 길버트는 1600년에 De Magnete을 저술하고, electricity(전기)라고 하는 단어를 세계 최초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전기공학자의 창시자로 여겨지고 있다.

기계공학에서는 토머스 세이버리가 1698년에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을 만들었다.이 증기기관의 개발이 산업혁명을 이끌어 대량 생산의 시대를 열었다.

토마스 세이버리와 제임스 와트의 발명에 의해 기계공학의 발전이 가속되었다. 산업혁명기(期)에 각종 기계나 그 수리와 보수를 위한 도구가 발달하고, 그런 도구들은 영국으로부터 다른 나라로 퍼져나갔다.

화학공학도 산업혁명기(期)였던 19세기에 기계공학과 같이 발전했다. 대량 생산은 신소재나 새로운 제조법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화학물질의 대량 생산이 필수적이었고 결국 그것이 1880년 경 까지 새로운 산업으로 확립되었다. 화학공학은 그러한 화학공장이나 제조법의 설계를 맡았다.

항공공학은 항공기의 설계를 취급하는 분야로 항공우주공학은 우주선의 설계까지 확장된 비교적 최근의 학문분야이다. 그 기원은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걸쳐진 항공기의 선구적 발전이지만, 최근엔 18세기 말의 조지 케일리의 업적이 기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초기의 항공기는 다른 공학 분야의 개념이나 기법을 도입해서 대부분 경험론적으로 발전해갔다.
라이트 형제가 첫 비행에 성공해서 약 10년 후에는 항공공학이 크게 발전해, 제 1차 세계대전에 군용 항공기가 발전되기까지 했다. 반면, 과학적 기초를 닦는 연구는 이론 물리학과 실험을 결합하는 것으로 행해졌다.

공학에서 컴퓨터의 역할은 커지고 있다. 공학에 관해서 컴퓨터가 지원을 하는 각종 소프트웨어가 존재한다. 수리모델의 구축이나, 그것을 기본으로 하는 수치해석도 컴퓨터를 사용해서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CAD소프트웨어는 3차원 모델링이나 2차원의 설계도의 작성을 용이하게 한다. CAD를 응용한 DMU(Digital Mock Up)이나 유한요소법 등을 사용한 CAE(Computer Aided Engineering)를 사용하면 시간과 비용이 걸리는 물리적인 프로토타입을 만들지 않아도 모델을 작성해서 해석할 수 있다.

컴퓨터를 이용하는 것으로 제품이나 상품의 결함을 알아내거나, 부품끼리의 맞물림을 조사하거나, 인체공학적인 면을 연구하거나, 압력, 온도, 전자파, 전류와 전압, 유체의 흐름, 운동이나 시스템의 정적 및 동적 특성을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특정 공학 분야를 위한 소프트웨어도 있다. 예를 들어, CAM소프트웨어는 CNC공작기계에 주어지는 명령렬을 생성한다.

생산 공정을 관리하는 소프트웨어로 공정관리 시스템(MPM)이 있다. EDA(Electronic Design Automation)는 반도체 집적 회로나 프린트 기반이나 전자 회로의 설계를 지원한다.간접재 조달을 관리하는 MRO소프트웨어도 있다.

최근엔, 제품 개발에 관련된 소프트웨어의 집합체로 제품 수명 주기 관리(PLM)소프트웨어가 사용되고 있다.

공학은 본질적으로 인간과 사회의 행동에 좌우된다. 현대의 제품이나 건설은 반드시 공학설계의 영향을 받고 있다. 공학 설계는 환경, 사회, 경제에 변화를 미치는 도구이며, 그 응용에는 큰 책임이 부여되어 있다. 많은 공학계의 학회는 행동규약을 제정하고, 회원이나 사회에 그것을 알리려고 하고 있다. 공학 프로젝트 중에는 논쟁이 되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핵무기개발, 중유 추출 등이 있다. 이것에 관한 사회적 책임에 대해 엄한 방침을 설정해놓은 기업도 있다.
공학은 인간개발의 중요한 원동력 중 한 가지다.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부근의 공학적 능력은 매우 낮고, 그 때문에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는 대개 자력으로 중요한 기반시설을 개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밀레니엄 개발 목표의 상당부분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반시설의 개발과 지속가능한 기술적 개발이 가능하기 위한 충분한 공학적 역량을 필요로 한다. 해외의 개발이나 재해 구조를 실행하는 NGO는 기술자를 다수 모으고 있다. 다음과 같은 자선단체가 인류를 위해 공학으로 도와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카르만은 고전적인 공학교과서 Foundation of Solid Mechanics의 개정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공학은 과학과 완전히 다르다. 과학자는 자연을 이해하려고 한다. 기술자는 자연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려고 한다. 기술자는 발명을 강조한다. 발명을 실현화하기 위해서는 아이디어를 실체화해서,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는 형체로 설계해야 한다. 그것은 장치, 도구, 재질, 기법, 컴퓨터 프로그램, 혁신적인 실험, 문제의 새로운 해결책, 기존의 무언가를 개량하는 것이다. 설계는 구체적이지 않으면 안 되며, 형태나 수법이나 수치가 설정되어야한다. 새로운 설계에 착수하려면 기술자는 필요한 정보가 모두 준비되어 있을 리 없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많은 경우 과학지식의 부족에 따라 정보가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기술자는 수학이나 물리학이나 화학이나 생물학이나 역학을 공부한다. 그러고 나서 공학에 있어서의 필요성에 따라 관련 과학의 지식을 추가하는 경우도 많다.

과학적 방법과 공학적 방법에는 겹치는 부분이 있다. 공학적 방법은 과학적으로는 엄밀히 해명돼있지 않은 과거의 여러 사례에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경험론적 법칙을 짜 맞추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본은 현상의 정확한 관찰이다. 관찰 결과를 분석해서 전달하기 위해, 공학적 방법이든 과학적 방법이든 수학과 같은 분류기준을 사용한다.

Walter Vincenti의 저서 What Engineers Know and How They Know it에 따르면, 공학의 연구는 과학의 연구와는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있다. 공학은 대체로 물리학이나 화학으로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분야지만, 문제 자체는 정확한 방법으로 풀기엔 너무 복잡하다. 예를 들어 항공기에 관해 공기역학적 흐름을 나비어-스톡스 방정식의 근삿값으로 나타내거나 재료의 피로(疲勞, 영어: fatigue) 손상의 계산에 마이너 법칙을 사용한다. 또한, 공학에서는 태반은 경험론적인 수업도 자주 채용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공학은 자연과학과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 발달해 왔다고 한다. 예를 들어, 증기기관의 효율이 관한 연구로부터 열에 관한 인식이 깊어졌다.열에 관해 자연과학에서의 연구가 진행될 수 있었던 것에 따라 냉각기술 또한 개발될 수 있었다.

목적이나 방향성은 다르지만, 의학과 공학의 일부 분야의 공통분모로 인체의 연구가 있다. 의학에 관해선 필요하면 기술을 사용해서도 인체의 기능을 유지, 강화해서 경우에 따라 인체의 일부를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도 있다.
현대의학은 이미 일부의 장기의 기능을 인공의 것으로 치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고, 심장 박동기 등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의용생체공학은 생체에의 인공물을 채워 넣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영역이다.

역으로 인체를 생물학적 기계로 취급해 연구대상으로 하는 공학 분야도 있으며, 기술로 그 기능을 진화시키는 것을 전문으로 한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 뉴런 네트워크, 퍼지 논리, 로봇 등이 있다. 공학과 의학의 학제적인 영역 또한 존재한다.

의학과 공학은 실세계에 관한 문제해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 때문에 현상을 좀 더 엄밀하고 과학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두 분야 모두 실험이나 경험적 지식이 필수로 되어있다.

의학은 인체의 기능도 연구한다. 인체는 생체 기계로 인식했을 경우에 공학적 수법으로 모델화 가능한 다수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심장은 펌프와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골격은 지렛대와 연결된 듯 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또한 뇌는 전기신호를 발생시키고 있다.이런 유사성이나 의학에 관한 공학의 응용의 중요성의 증대에 따라, 공학과 의학의 지식을 응용한 의용생체공학이 태어났다.

시스템 생물학 같은 새로운 과학 분야는 시스템의 모델링이나 컴퓨터를 이용한 해석 등 공학에서 사용되어 왔던 해석 수법을 채용해서 생명을 이해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공학과 예술의 사이에도 관련이 있다. 건축, 조원,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은 마치, 공학과 예술의 접점을 교환하는 분야이다. 다른 부분에도 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분야가 있다.

시카고 미술관은 NASA의 항공우주 관련 디자인에 관한 전람회를 개최한 적이 있다로베르 마야르가 설계한 다리는 예술적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남 플로리다 주립대에서는 국립과학재단의 지원을 받아, 공학부에 예술과 공학을 맞추는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르네상스기의 예술가 겸 기술자로 유명하다.

정치학에 '공학'이라고 하는 말을 도입한 사회공학이나 정치공학은, 공학의 방법론이나 정치학의 지식을 이용해서, 정치구조나 사회구조의 형성을 연구한다.




#Article 149: 라이너스 폴링 (2650 words)


라이너스 칼 폴링(Linus Carl Pauling, 1901년 2월 28일 - 1994년 8월 19일)은 노벨 화학상과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미국의 화학자이다.

DNA의 구조를 밝혀내 노벨상을 받은 제임스 왓슨이 자신이 쓴 《이중 나선(Double Helix)》에서 라이너스 폴링을 당시 생화학 분야의 권위자였으며, 가장 높은 수준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는 분자생물학 분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폴링은 오레건주 포틀랜드에서 헤만 헨리 윌리엄 폴링(Herman Henry William Pauling, 1876년 - 1910년)과 루시 이사벨 벨레 달링(Lucy Isabelle Belle Darling, 1881년- 1926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외할아버지 칼(Carl)과 친할아버지(Linus)를 기념하여 라이너스 칼(Linus Carl)을 따라 지어졌다. 아버지 헤만과 어머니 루시는 각각 23살, 18살에 오레건주 콘돈의 한 디너파티에서 만났고 6개월 후 그들은 결혼했다.

헤만 폴링은 미주리 주의 콘코디아에서 독일계 이주 농민으로부터의 후손이다. 칼 폴링은 가족과 함께 오레건주의 오스웨고에 정착하기전 캘리포니아로 갔다. 거기서 그는 주조공장의 철물상으로 일했다. 중등학교를 마친 다음 헤만 폴링은 약사가 되기위해 견습생으로 일했다. 그의 견습생 수행이 끝난다음, 그는 제과점 도매상인이 되었다.

폴링의 어머니 루시는 영국, 스코틀랜드계 후손이며 교사, 농민, 측량사, 우체국장, 변호사로으로 일한 라이너스 윌슨 달링의 딸이다. 라이너스 달링은 11세에 고아가 되었으며 학교선생이 되기 전에 제빵사 아래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다. 그는 오레건주 터너에서 온 엘리스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으며 결국 그들은 결혼했다. 1888년 7월 17일 엘리스는 다섯 번째 아이를 낳았으나 유산되었다. 그리고 한달이 채 가기도 전에 네명의 딸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앨리스는 사망했다.
라이너스 폴링 태어난 후 1년을 포틀랜드에서 그의 부모님과 함께 단칸방 아파트에서 보냈다. 1902년 그의 여동생 파울린이 태어난 후 폴링의 부모님은 도시를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포틀랜드에서 살면서 아파트는 매우 붐볐고 거주지가 공간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다. 루시는 헤만이 새로운 거주지를 찾는 동안 오스웨고의 헤만의 부모님의 집에서 머물렀다. 헤만은 Skidemore 제약회사의 외판원으로 일하게 된 살렘(Salem) 지역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1904년 루실의 출생과 함께 헤만 폴링은 오스웨고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으며 거기서 그는 개인 약국을 개업했다. 그러나 오스웨고의 경기는 안 좋았으며 그와 그의 가족들은 1905년 콘돈으로 다시 이주했다.

폴링은 어린 시절 대단한 독서광이었다고 한다. 폴링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본 아버지 헤르만 폴링은 지방신문 더 오리가니안(The Oregonian)의 편집장에게 아홉 살 아들이 더 읽어야 할 책이 무엇인지 묻는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폴링의 초등학교 친구인 로이드 제프레스는 자기 방에 작은 화학 실험실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프레스의 실험실에서 했던 실험은 폴링이 화학공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폴링은 할아버지가 수위로 근무했던 제철 공장에서 많은 실험 기구와 재료를 몰래 운반하여 화학 실험을 계속했다. 고등학생이 된 폴링은 책과 화학실험으로 쌓아온 엄청난 양의 화학지식으로 선생님들을 놀라게 했고 화학 담당 선생님의 방과후 실험을 돕기도 하였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폴링은 보수도 많이 받을 수 있는 화학공학자가 되고 싶어하였고 대학에 가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가난에 찌든 어머니 벨은 아들이 생계를 꾸리는 일을 더 적극적으로 돕길 원했고 폴링이 대학에 가고 싶다는 말에 화를 내었고 철물점에 취직시켜 주겠다고 하였다. 고민하던 폴링은 친구 제프리스 가족의 충고를 듣고 당시 오리건농업대학 (현 오리건 주립 대학) 화학공학과에 진학하기로 결심하였고 어머니를 설득하였다.

폴링은 15세의 3학년 1학기 이미 오리건농업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학점을 다 채워놓은 상태여서 대학에 진학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으나 당시 오리건 주 고등학교 3학년 1년동안 필수 학점이었던 미국사 듣지 못하였다. 폴링은 학교장에게 1학기에 일년 과정을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폴링은 고등학교 졸업장을 포기하고 대학에 진학했다. 폴링의 모교 워싱턴고등학교는 45년 뒤, 이미 폴링이 두 개의 노벨상을 수상한 후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 그 해 여름에 폴링은 식료품 잡화점에서 1주일에 8달러를 벌어가면서 아르바이트일을했다. 그의 어머니는 포틀랜드의 제조공장 다수를 운영하는 Schwietzerhoff와 면담을 하여 취직하도록 시켰다. 폴링은 견습공으로 한 달에 40달러를 받으며 고용되었다. 폴링은 그의 일에 매우 능숙해서 월급이 인상되어 한 달에 50달러를 받으며 일했다. 그는 여가시간에 그의 친구 둘과 함께 사진실험실을 세우고 작은 사진가게를 운영했다. 그는 이 비즈니스를 함으로써 후에 그가 대학생활을 할 수있도록 충분한 돈을 벌수있도록 소망했다. 폴링은 오레건주 농업대학에서 입학허가 편지를 1917년 9월에 받았고 그의 어머니와 직장 사장에게 그의 대학입학계획을 알렸다.

그의 마지막 2년간의 대학생활에서 폴링은 원자와 분자의 전자구조에 대한 일을 했던 Gilbert N. Lewis와 Irving Langmuir의 업적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그의 연구를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물질의 성질을 이용하여 어떻게 그것들이 분자를 이루는 원자들의 구조와 관련되어있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는 양자화학이라는 새로운과학분야의 창시자가 되었다. 폴링은 인류학 사회학에 대한 공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게다가 물리, 수학부의 필수과목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다루었다. Samuel Graf교수는 폴링을 높은 수준의 수학과정에서 그의 조교로서 선발했다. 4학년 겨울 무렵, 폴링은 가정경제학을 전공으로 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화학부 과목을 가르치는 것을 제안받았다. 그곳에서는 폴링의 미래 아내가 될 사람인 Ava Helen Miller가 있었다.

OAC에서의 마지막 2년 동안에,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화학과장 길버트 루이스와 제너럴 일렉트릭사의 공업화학자 어빙 랭뮤어의 원자의 전자구조와 분자를 이루는 화학결합에 대한 성과를 접하게 된다. 그는 두 원자 사이에 공유 전자를 가진 화학 결합이 생긴다는 그들의 이론에 매혹되었고 물리적, 화학적 성질이 원자들의 결합구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자신의 주 연구분야로 하기로 하고, 양자 화학의 기초를 세운다.

폴링은 그의 화학결합에 관한 연구들을 'The Nature of the chemical bond'에 집약시켜서 출판하였고 이 책은 가장 영향력이 큰 화학책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책의 초판이 출판된 1939년으로부터 30년이 흐를 때까지 이 책은 16000 번 이상 인용되었다. 심지어 8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 분야에 관련된 논문들은 종종 그의 책을 인용하고는 한다.

폴링의 화학결합에 관련된 업적 중 하나는 혼성오비탈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원자에 있는 전자는 s 혹은 p 오비탈등의 오비탈의 모양의 확률로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원자간의 결합을 설명할 때에는 다른 종류의 오비탈의 성질을 섞은 새로운 함수를 정의하면 훨씬 설명이 편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탄소원자의 경우 한 개의 2s 오비탈과 3개의 2p 오비탈을 가지고 있는데 이 4개의 오비탈이 혼성화를 하여 4개의 동일한 오비탈(sp3 혼성오비탈)을 만드는 것으로 메탄과 같은 탄소화합물에서 탄소가 4개의 결합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또한 탄소의 4개 오비탈 중 1개의 2s 오비탈과 2개의 2p 오비탈이 혼성화를 하여 3개의 동일한 오비탈(sp2 혼성오비탈)을 형성하고 2p 오비탈 한 개는 혼성화를 하지 않은 채 남아있을 수 있는데 이를 통하여 불포화 탄소화합물인 에틸렌과 같은 화합물의 결합을 설명할 수 있다. 이 외에도 탄소는 다른 화합물에서 다른 형태의 혼성화를 한다.
폴링의 화학결합에 대한 업적 중 또 하나는 이온결합과 공유결합간의 관계를 규명한 것이였다. 이온결합은 결합을 이루면서 원자간에 전자의 이동이 이루어지는 결합을 말하는 것이고 공유결합은 결합을 이루면서 전자의 균일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결합을 말하는 것이다. 폴링은 이 두 종류의 결합이 상극을 이루면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원자간의 결합의 성격은 이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였다. 또한 이 과정에서 폴링 자신이 제창한 '폴링의 전기음성도'의 개념이 쓰이게 된다. 결합을 이루는 두 원자의 전기음성도 차이가 결합의 이온성 즉 원자간의 결합이 이온결합과 공유결합중 어느 결합과 더 비슷하게 존재할 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폴링의 화학결합에 관한 업적 중 세 번째 것은 방향족 탄화수소의 구조를 규명하는 것이였다. 이 이전까지 벤젠의 구조에 대한 가장 나은 설명은 독일의 화학자인 케쿨레의 설명이였다. 케쿨레는 벤젠이 두 가지의 구조사이를 빠르게 왔다갔다 하면서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 때 첫 번째 구조에서 단일결합이였던 탄소-탄소간의 결합은 두 번째 구조에서 이중결합으로 이중결합이였던 탄소-탄소간의 결합은 두 번째 구조에서 단일결합으로서 존재한다고 설명하였다. 반면 폴링은 양자역학에 기초하여 새로운 설명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벤젠의 탄소-탄소간의 결합은 이중결합과 단일결합의 중간쯤 되는 결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벤젠의 구조는 케쿨레가 제시한 두 가지 구조의 사이의 구조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두 가지 구조가 존재하여 그 두 가지 구조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였다. 후에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공명(resonance)' 라는 이름이 주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폴링의 벤젠구조에 대한 설명은 앞서 그가 제시한 오비탈의 혼성화와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두 가지 설명 모두 여러 개의 전자구조가 합쳐저서 그러한 구조들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구조를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

폴링의 spheron model 에 깔린 기본적인 생각은 원자핵은 중성미자 무리의 집단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은 중성미자 무리에는 중양자, 알파입자, 3중양자가 있을 수 있다. 또한 짝수의 원자번호를 갖는 원자핵의 경우 알파입자의 무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폴링은 원자핵의 구 구조를 platonic solid 와 같은 기하적 구조로부터 도출 해내었는데 이는 이 당시의 독립 입자 모델로 부터 이를 도출해내는 일반적인 방법과는 달랐다. 또한 1990 년에 폴링이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모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최근에 나는 실험적으로 측정된 들뜬 상태와 바닥상태의 진동에너지를 분석함으로써 원자핵의 구조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Physical Review Letter' 나 다른 물리학 출판물을 보면서 나는 많은 물리학자들이 원자핵의 구조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물리학자 중 여태까지는 어느 누구도 내가 밝혀놓은 것까지 나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밝힌 사람은 없다. 따라서 나는 이 연구를 앞으로도 나의 속도에 맞추어 진행할 것이다.'

그 당시 폴링은 생명이 없는 화학물질이 생명체로 변환되는 데에 단백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을 밝힌다면 생명의 비밀을 풀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X-ray 회절 분석을 통해 헤모글로빈의 구조를 분석하려고 하였지만 단백질은 그 방법에 맞지 않았다. 왜냐하면 단백질은 크기가 너무 크고 다양한 거대 분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단백질은 조금만 가열해도 변성이 일어나기 때문에 정제, 분리도 어려웠다. 따라서 1930년대 영국의 결정학자 윌리엄 아스트버리가 찍은 가장 좋은 X-ray 사진에 대해 폴링은 양자역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11년이 걸렸다. 그의 수학적인 분석은 옳았지만, 아스트버리의 사진에서 단백질 분자는 예상 위치보다 기울어져 있었다. 폴링은 단백질의 변성 실험을 통해 단백질은 가역적인 약한 결합과 비가역적인 강한 결합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약한 결합을 수소결합, 강한 결합을 공유결합이라고 추정하였다. 이후 그는 미르스키와 함께 아미노산들이 공유결합의 일종인 펩티드 결합을 통해 사슬을 형성하고 이들이 약한 수소결합을 통해 특별한 모양을 가진 단백질이 형성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아미노산의 구조를 밝혀 펩티드 결합의 길이와 각도를 결정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단백질의 가능한 구조의 수를 대폭으로 줄일 수 있었고 단백질의 성질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폴링은 이 연구를 통해 헤모글로빈 구조 모델에서는 원자들이 나선형 구조로 배열되어있다고 밝혔고, 이 아이디어를 일반화하여 단백질에 적용시켰다. 1951년, 아미노산과 펩티드의 구조, 그리고 펩티드 결합의 평면 성질을 기반으로 하여 폴링과 로버트 코리, 그리고 헤르만 브랜손은 단백질 2차 구조에서 1차적인 구조적 특징으로서 알파 나선과 베타 병풍 구조를 제안하였다.

단백질에 대해 많은 것을 밝혀낸 폴링이었지만 여전히 생명의 비밀은 해결하지 못하였다. 1952년 허쉬와 체이스의 실험 결과로 유전자는 DNA로 구성되어있다는 결론이 나오고 나자 폴링은 DNA 연구에 관심을 쏟기 시작하였다. 그는 DNA의 구조를 연구한 끝에 DNA는 삼중나선 구조라고 제안하였고, 1952년 DNA의 구조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물론 그의 모델은 기본적인 실수가 있었다. 폴링은 DNA의 염기를 중심으로부터 바깥쪽에 배치시켰고 인산기를 안쪽에 배치시켜 서로 결합한다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폴링이 DNA의 구조의 분자적 모델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는 소식이 캐번디시 연구소에 전해졌을 때, 왓슨과 크릭은 DNA의 분자적 모델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킹스 칼리지의 모리스 윌킨스와 로잘린드 프랭클린가 아직 출판하지 않은 데이터에서 도움을 얻었는데 그들의 데이터는 나선과 그 축을 따라 평면의 염기가 있음을 밝히는 데에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였다. 1953년 초,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올바른 구조로서 DNA 이중 나선을 제안하였다. 사실 왓슨과 크릭도 DNA는 삼중나선 구조를 띠고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들의 생각에 대해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그들이 건넨 모형을 찢어버렸다. 그 모델의 문제점으로 음전하를 가진 인산기들이 DNA 분자 중심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분자가 너무 촘촘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왓슨과 크릭에게 자신이 찍어낸 DNA의 X선 회절사진을 제시하였고 이 때문에 왓슨과 크릭은 바른 길로 걸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폴링은 밀도 데이터를 잘못 해석하였고 좋은 품질의 X-ray 회절 사진을 얻지 못하는 등 DNA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서 실수한 부분들을 인정했다. 폴링이 그 문제를 조사하는 동안, 영국에서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X-ray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사진은 왓슨과 크릭의 성공에 대한 열쇠였다. 폴링은 자신의 동료 로베르트 코레이가 프랭클린의 사진 몇 장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DNA 구조를 고안하기 전에 그 사진을 보지 못했다. 그는 프랭클린의 연구소에 방문할 많은 기회가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폴링이 DNA 삼중나선]_ 이론을 급하게 논문을 통해 발표한 것은 그의 인생 최대의 실수이자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얻은 최악의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타민 C에 대한 폴링의 연구는 더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1966년 생화학자 어윈 스톤의 비타민 C 복용의 개념을 설명하였다. 거기에 대해 확신을 가져, 폴링은 감기를 예방하기 위해 매일 비타민 C 3 g을 복용하였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영향이 있음을 인지하고 1970년 라는 제목의 논문을 출판하였다. 그는 1971년 영국의 암 외과의사 카메론과 함께 말기 환자들에게 암 치료요법으로 비타민 C를 복용시키거나 정맥 주사를 통해 주입하는 장기 임상 실험을 공동으로 시작하였다. 카메론과 폴링은 그들의 관찰 결과를 담고 있는 많은 전문 논문과 라는 유명한 책을 출판하였다. 폴링은 비타민 C를 널리 알리게 되었고 결국 비타민 C를 투여한 환자는 그렇지 않은 환자에 비해 생존 확률이 4배나 더 높다는 결과를 담고 있는, 다소 진위가 의심스러운 말기 환자들 100명 그룹에 대한 두 연구를 출판하였다. 이후 메이오 클리닉에 의해 수행된 임상 시도에서 비타민 C의 많은 복용(10,000 mg)은 암을 치료하는 데에 있어서 플라시보 효과보다 좋지 못했고 비타민 C를 많이 복용하는 것은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이는 비타민 C가 암 치료에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의학 협회 역시 비타민 C가 감기를 예방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 엉터리라고 결론지었다. 폴링은 그 연구 결과들을 비난하였고 최종 연구를 “사기와 계획적인 잘못된 설명”으로 간주하였으며, 비타민 C를 정맥주사를 통해 주입하지 않고 구강 복용을 시킨 연구에 대해 비판하였다. 또한 실험에서 조작 변인은 비타민 C를 복용하는 것이었고, 비타민 C 복용 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메이오 클리닉을 비판하였다. 폴링은 암 환자들은 지속적으로 비타민 C를 복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두 번째 시도에서 메이오 클리닉 환자들은 두 달 반 동안만 비타민 C를 복용하였다. 그 결과는 공개적으로 오랫동안 폴링과 카메론, 그리고 메이오 클리닉 사이에서 상당히 신랄한 논쟁이 일었다. 특히 서로 간에 위법 행위와 과학적 무능력함에 대해 비난이 일었다. 최종적으로 메이오 클리닉 연구의 결과들이 암 치료제로서의 비타민 C에 대한 관심을 종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링은 비타민 C를 암과 감기 치료제로 진척시키기를 지속하였는데, 비타민 C를 뇌가 손상된 아이들에게 치료제로 이용하기 위해 인간능력계발연구소 (The Institutes for the Achievement of Human Potential) 와 함께 연구하였다. 그는 이후 캐나다의 내과의사 아브람 호퍼와 함께 부가적인 암 치료법으로서, 비타민 C의 많은 복용을 비롯한 미량 영양소 식이요법을 공동연구를 하였다. 아서 B. 로빈슨, 그리고 다른 동료와 함께 폴링은 1973년에 캘리포니아 먼로 파크에 분자교정의학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는 곧 라이너스 폴링 과학의학연구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폴링은 비타민 C에 대한 연구를 감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죽을 때까지 이론 화학과 물리 연구를 계속하였다. 말년에 그는 동맥경화증 예방에 대한 비타민 C의 역할의 가능성에 대해 특히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리신과 비타민 C를 이용해 협심증을 경감시키는 사례보고 3편을 발표하였다. 1996년에 라이너스 폴링 연구소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오리건 주 Corvallis로 이전하여 오리건 주립 대학교의 일부가 되었다. 이곳에서 미량영양소, 피토케미컬 (식물에 있는 화학 물질), 그리고 다른 물질들을 식이요법에 적용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연구를 수행하기를 지속하였다. 라이너스 폴링 연구소가 Palo Alto에 있을 때 그곳에서 일했던 연구 조감독을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은 연구소가 이전한 뒤에 유전 정보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폴링은 2차 세계대전까지는 정치에 무관심하였으나, 전쟁의 여파와 아내 아바 헬렌의 평화주의는 폴링 역시 평화주의자의 길을 걷게 해주었다. 그는 대부분이 유태인인 독일의 동료과학자들이 보내는 편지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국여행에 필요한 사증을 발급받아 나치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이때부터 폴링은 히틀러의 독재를 막아야한다고 생각하였고, 1939년 유니언 나우라는 단체에 가입한다. 이 단체는 전 세계의 모든 민주국가들이 미국의 연방제를 모형으로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체로, 폴링은 이 단체에 가입을 하게 된 후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도와 나치를 근절시켜야 한다고 연설하였다.. 폴링은 또한 미 해군 잠수함의 산소측정기, 폭약, 로켓 추진체 등 미국의 군수 관련 프로젝트에도 참여하였다. 맨허튼 프로젝트 초기 오펜하이머는 뉴멕시코 주의 일급비밀 프로젝트에 폴링을 화학분야 담당으로 초청하나 폴링은 가족과 멀리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여 거절한다. 전쟁 중 미국 정부가 서부해안에서 일본계 미국인을 감금하는 일이 발생하자 아바 헬렌은 이것에 항의하여 미국시민 자유연맹의 감금반대 투쟁을 돕는다.

전쟁에 승리하고 나서 폴링을 포함한 수많은 과학자들은 원자과학자연맹을 전국적으로 조직하면서 원자력기술의 공유와 원자력을 민간 통제 하에 둘 것을 요구하였다. 1946년에 아인슈타인은 대중에게 핵무기 개발의 위험을 알리는 것이 목적인 원자과학자 비상위원회를(Emergency Committee of Atomic Scientists) 조직하였고 폴링도 이에 가입한다. 그는 그의 정치적 지지자인 아내 아바 헬렌과 함께 원자폭탄의 위험성과 세계정부의 필요성에 대해 연설하였다. 그러나 1946년 가을 스탈린의 동유럽 봉쇄와 중국의 공산반군 등 공산주의의 세력이 강해지자 미국인들은 반공주의로 돌아섰으며 원자기술공유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냉전체제가 강화되고 국가적으로 반공주의가 대세였던 1950년대에도 그는 반핵연설을 계속하였다. 그 때문에 FBI의 조사를 받기도 하고, 미 정부로부터 여권발급을 거절당하기도 아였다. 그의 여권은 1954년 그의 첫 노벨상 수상에 앞서 잠시 재발급되었다. 칼텍의 많은 친구들도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고 총장 두브리지는 폴링에게 정치적 연설을 그만둘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1951년 논란이 되는 단체들을 탈퇴하고 연설들을 중지하였으며 연구에만 전념하였으나, 언론의 비난과 국회의 의심은 계속되었다. 1954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후에는 대중과 지인의 의심이 많이 풀렸고 폴링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원자폭탄 사용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다. 폴링은 다시 원자폭탄으로 인한 방사능 피폭과 낙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58년 폴링은 배리 커머너 등과 함께 방사성 동위원소 Sr-90의 유아 치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연구하였고 1962년에는 루이스 라이스 등과 함께 낙진으로 떨어진 Sr-90을 젖소가 먹고 젖소로부터 우유를 먹는 사람의 뼈에 축적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또한 물리학자이자 반공주의자인 텔러와 방사능 낙진의 위험에 대한 TV토론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폴링은 1958년 세계 각국의 과학자들로부터 핵실험 중지를 청원하는 서명을 받아 서명목록을 UN에 제출하였다. 대중의 압박과 낙진의 위험에 관한 연구결과는 1963년 미국과 소련이 지하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핵실험을 금지하는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에 서명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조약은 그해 10월 10일부터 효력이 발생했고 바로 그날 폴링은 196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폴링의 화학에 대한 공헌을 인정한 과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논객들은 폴링의 정치적 행보에 비판적이었으며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1960년 폴링은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낙인 찍은 상원의 한 조사 소위원회에 출두를 명령받아 그토록 많은 서명들을 모은 과정에 대해 해명을 요구받았다. 그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비판적인 여론은 계속되었다. 그가 1962년 노벨평화상을 받게 되자 미국 라이프 잡지사는 “노르웨이에서 온 수상한 모욕”이란 헤드라인을 냈다. 칼텍 총장 두브리지 역시 미적지근한 반응만을 보였다. 폴링은 노벨상 상금을 가지고 평화에 관한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1963년 10월 18일 기자회견을 열어 칼텍을 떠난다고 발표했다.

폴링은 1994년 8월 19일 캘리포니아주 Big Sur의 그의 자택에서 7시 20분경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다.




#Article 150: 빌 클린턴 (1091 words)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 본명은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3세·, , 1946년 8월 19일 ~ )은 1993년부터 2001년까지 재임한 미국의 제42대 대통령이다. 46세의 나이로 대통령이 된 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세 번째로 젊은 대통령이었다. 그는 냉전이 끝난 시대에 대통령이 되었고, 첫 번째 베이비 붐 세대 대통령이었다.

클린턴은 새로운 민주당(New Democrat) 계열로 묘사된다. 그의 정책 중 일부인 북미자유무역협정과 복지 개혁은 중도주의 제3의 길 통치 철학 때문에 추진한 것으로 추정되며, 반면에 그는 다른 정책에 대해서 중도 좌파적인 입장을 취했다. 클린턴은 나중에 미국 역사상 가장 긴 평화로운 경제적 확장 기간이 된 경제적 확장의 지속을 이끌었다. 의회 예산국은 2000년에 클린턴의 재임기간의 예산이 흑자라고 보고했다. 보건 보험 개혁의 실패 이후에 공화당은 1994년 미국 하원 선거에서 40년만에 처음으로 승리했다. 3년 뒤 1997년에 클린턴은 재선되었고 민주당 출신으로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이래 처음으로 두 번의 임기를 채운 대통령이 되었다.

아칸소주 호프에서 태어난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은 5번째 세대의 아칸소주민이었다. 그의 모친 버지니아 켈리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사망한 그의 부친의 이름을 따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3세로 이름을 지었다. 모친이 간호원으로서 훈련받는 동안 빌이 4세 때 그녀는 그를 그녀의 부모와 함께 두었다.

빌이 8세가 될 때 그의 모친은 로저 클린턴에게 결혼하였다. 가족은 핫스프링스로 이주하여 실내 수도가 없이 작은 집에서 살았다. 빌의 계부는 알콜 중독자였고, 가족 생활은 가정 폭력에 의하여 자주 혼란을 일으켰다. 그가 15세 때 빌은 자신의 계부에게 자신의 모친 혹은 이복 형을 절대 때리지 말라고 다시 경고하였다. 세월이 지난 후, 클린턴은 타임 잡지와 인터뷰에서 그 일은 극적인 것이었다고 상기하였다.

클린턴이 17세 때 그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다. 결과로서 클린턴은 자신이 정치에서 경력을 원했던 것을 결정하였다. 그는 1964년 조지타운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생으로서 그는 흑인 민권 운동 투쟁은 물론 베트남 전쟁에 대항하는 운동으로 헌신했다. 클린턴은 국제학에서 학위와 함께 1968년 조지타운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자신의 전공을 지속하는 다음 2년을 보내는 데 자신을 허용한 로즈 장학금을 수상하였다. 1970년 그는 예일 로스쿨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클린턴은 아칸소주 파예트빌에서 변호사로서 개인 실습으로 들어갔다. 그는 또한 아칸소 로스쿨에서 강의를 시작하기도 하였다.

클린턴이 아칸소주지사였던 동안 그는 학교, 보건과 보장을 위한 개혁을 위하여 밀고 나갔다. 그는 또한 민주당의 국내 정치에서 활동적이 되는 데 지속하였다. 1991년 그는 자신의 동배들에 의하여 가장 효과적인 주지사로 투표되어 민주당 리더십 회의를 사회보는 데 선택되었다. 동년에 클린턴은 대통령직을 위한 1992년 경주에 들어가고 있었다고 공고하였다.

클린턴은 대통령을 위한 민주당 후보 지명을 위하여 거의 경쟁을 가졌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섞인 것 없고 미개발로 생각한 작은 주에서 왔다. 비판들은 국가 정부에서 그의 부족한 경험이 그에게 외교 정책의 작은 이해를 주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클린턴은 자신이 정부에게 가져오는 데 신선한 관점을 가졌다고 주장하였다.

클린턴의 선거 운동은 또한 개인적 스캔들에 의하여 특정이 지어지기도 하였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일어난 동안 자신의 군사 복무의 기피에 관한 의문들과 혼외 관계들의 책임들을 향하였다. 클린턴은 경주에 남아있었고,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어 자신의 러닝메이트로서 테네시주 상원 앨 고어를 골랐다. 클린턴은 경제적 문제들, 특히 실업과 보건에 자신의 선거 운동을 전념하였다. 1992년 11월 클린턴은 당시 현직 대통령 공화당의 조지 H. W. 부시와 무소속 후보 로스 페로를 꺾어 4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선거 운동 본부의 캠페인 문구는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였다.

클린턴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후로 두번의 임기를 모두 채운 첫 번째 민주당 대통령이었다. 그의 당선으로 인해 12년 간(1981.1~1993.1)의 연속된 공화당 정권(레이건(1981.1~1989.1), 부시(1989.1~1993.1))이 막을 내렸다. 그 선거 이후 민주당은 지미 카터의 통치 이래 최초로 의회 및 행정부를 포함한 연방정부의 실권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그러나 재임 초기 계속된 실책으로 인기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1994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크나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특히 하원에서는 40년 만에 공화당에 다수당의 지위를 넘겨주었다.

즉각적으로 정권을 인수받은 후 클린턴은 1993년 가족 의료 법안에 관한 대선 공약에 즉각 서명하게 된다. 본 법안은 고용인에게 종업원의 의료 문제 발생 상황시 의료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근로 상황을 개선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보호 법안이었다.

이 정책이 대중적이었던 반면, 클린턴이 대선 초기에 공약했던 군대 내 성소수자 권리 정책에 대한 명확하지 않은 태도는 보수와 진보 양측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었다. 진보 진영은 정책이 다소 실험적이라고 주장했고 보수진영은 군생활에서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많은 토의가 있던 후 클린턴과 펜타곤은 일명 ‘묻지도 말고 대답도 하지 말라’는 정책에 합의하게 되며 그것은 오바마 대통령 때까지 유효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공약대로 연방공무원 10만명 감축 지시를 내렸고, 고어 부통령에게 정부를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고어 부통령의 주도 아래 국정성과평가팀(NPR)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당시 미국의 행정 개혁은 '정보기술을 통한 정부 재구축' 프로그램을 통해 공무원을 30만명 이상 감축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러한 미국 행정 개혁의 성공은 정보기술을 활용한 전자정부의 구현을 통해 이룬 결과라는 평가가 있다.

클린턴의 첫 기간의 말기가 접근하면서 새로운 스캔들이 일어났다. 스캔들은 클린턴과 힐러리 여사가 아칸소주에 있는 화이트워터강을 따라 놓인 대지를 매입한 것에 의심스러운 거래가 있던 후 화이트워터 사건으로 불렸다. 1996년 클린턴은 대통령으로서 2번째 기간으로 재선되었다. 그는 인기있는 투표의 49 퍼센트와 279개의 선거인단과 함께 자신의 공화당 상대 후보 밥 돌을 꺾어 압도적 대승리에 의하여 선거를 이겼다. 클린턴의 2번째 기간은 변호사 케네스 스타의 화이트워터 사건으로 들어간 조사에 의하여 그늘지게 되었다.

조사는 백악관 수련생 모니카 르윈스키와 함께 클린턴의 정사의 고발들이 공개될 때 더욱 심각해졌다. 처음에 클린턴은 정세를 부인하였으나 후에 그는 르윈스키와 부적당한 관계에 있어왔다고 진술하였다. 1998년 12월 19일 하원은 클린턴을 탄핵하거나 르윈스키와 자신의 관계에 관한 서언 아래 거짓말을 한 고발들로 그를 의회에서 재판을 내리는 데 지배하였다. 상원은 그러고나서 탄핵 재판을 지휘하였다. 클린턴은 상원의 탄핵 도청을 향하는 데 미국 역사상 두번째 만의 대통령이었다. 1999년 2월 12일 상원은 클린턴이 무죄였다는 것을 찾아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것에 국민과 의회에 사죄하였다.

화이트워터 사건 조사는 클린턴이나 힐러리 여사가 아무 범죄 행위에 참여한 것인지를 증명하는 데 충분한 증거가 없던 진술과 함께 9월 20일에 끝났다.

그해 후순, 클린턴은 0.08 퍼센트에서 만취를 위하여 혈중알콜 한도를 세운 법안을 법률로 서명하였다. 이 것은 이전에 대부분의 주들이 이용한 것보다 엄격한 수준이었다. 법안의 성원자들은 법적으로 술취한 운전자 여부를 결심시키는 데 이용된 이 국가 표준이 매년 수백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클린턴은 자신이 북동부를 위하여 난방유의 별도 준비금을 영구적으로 설립한 2000년 법률에 들어가는 또다른 법안을 서명하였다. 법률은 응급 상황에서 준비금들로부터 기름을 빼는 데 백악관을 위하여 더욱 쉽게 만들었다. 결국 11월 13일 클린턴은 아시아로 역사적 여행을 시작하여 베트남 전쟁 이래 베트남을 방문하는 데 첫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방문의 목적은 하노이와 워싱턴 D. C. 사이의 관계들에 일하는 것이었다.

클린턴은 많은 문제들을 대표하여 지속적으로 연설하고 모금하였다. 그가 시간과 돈을 바치는 많은 경우들은 작은 비지니스들, 시티 이어 (젊은이들을 위한 국내적 서비스 프로그램)과 후천성 면역 결핍 (에이즈) 연구와 교육의 경제적 개발을 포함한다.

자신의 대통령직의 후반을 괴롭힌 스캔들과 어려움들에 불구하고, 클린턴은 지속적으로 활발한 공공 인물로 세계에 중요한 많은 문제와 원인들을 후원하였다. 존 F. 케네디 이래 최연소 대통령인 그는 아칸소주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집으로부터 먼 길을 갔다.

빌 클린턴과 전 국무장관인 힐러리 여사 사이에 1980년생의 외동딸 첼시 클린턴이 있다. 백악관에서 사춘기를 보낸 첼시는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학사,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 옥스포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NBC 뉴스 특파원으로 일하다가 현재 클린턴 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첼시의 결혼 후, 클린턴 부부는 현재 3명의 손자, 손녀를 두었다.

나이에 비해 상당한 동안이다. 도널드 트럼프와 둘의 외모를 비교해보자면 트럼프 쪽이 훨씬 나이들어 보이지만 사실 둘 다 1946년 생 동갑내기 친구들이다.




#Article 151: 레온하르트 오일러 (1211 words)


레온하르트 오일러(, , 1707년 4월 15일 ~ 1783년 9월 18일)는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난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논리학자, 공학자이다. 그는 미적분학, 그래프 이론, 위상수학, 해석적 수론 등 수학의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함수 기호 (1734년에 처음으로 사용)와 을 처음 도입하였다. 고전역학, 유체역학, 광학, 천문학 및 음악 이론에서도 여러 업적을 남겼다.
오일러는 18세기의 가장 저명한 수학자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이 분야에서 다른 어떤 수학자보다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는데, 약 92권의 전집과 866편에 달하는 논문을 작성하였다. 두 여동생과 한 남동생이 있었다. 오일러가 바젤에서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위스의 리헨으로 옮겨 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였던 요한 베르누이와 친분이 있었으며, 이후 베르누이는 어린 오일러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후 오일러는 바젤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다. 13세에 바젤 대학교에서 입학 허가를 받았고, 1723년에 르네 데카르트와 아이작 뉴턴의 철학을 비교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에 그는 그의 놀라운 수학적 재능을 알아본 요한 베르누이로부터 토요일 오후마다 개인 교습을 받았다. 하지만 오일러가 목사가 되기를 바랐던 부친은 그에게 목사에게 필요한 여러 언어들을 배우게 했다. 그러나 요한 베르누이가 오일러는 위대한 수학자가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라며, 부친을 설득했다.

오일러는 1726년에 음향의 전파를 다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727년에는 파리 아카데미 문제 풀이 경연에 참가해 2등을 하였으며, 이후 매년 열리는 이 상을 12번 수상하였다.

이즈음 요한 베르누이의 두 아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1726년 7월에 니콜라스 베르누이가 충수염으로 사망하였고, 다니엘 베르누이가 수학/물리학부의 교수직을 승계하면서 공석이 된 생리학 교수직에 오일러를 추천했다. 오일러는 이 제의를 수락한 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것을 잠시 미루고 바젤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직에 지원하였지만, 탈락하였다.

표트르 대제가 세운 이 아카데미는 교육을 통해서 서유럽과 러시아의 과학 격차를 줄이는 것이 목표였다. 아카데미는 풍부한 재정과 표트르 대제와 귀족들의 장서들을 모아놓은 큰 도서관을 갖고 있었다. 또한 교수들의 강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학생들의 수는 매우 적었으며, 연구에 중점을 두어서 교수들에게 시간과 자유를 제공했다.

이에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던 예카테리나 1세는 오일러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날에 사망하는 바람에, 표트르 2세가 왕위를 승계하게 되었다. 하지만 표트르 2세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왕족들이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왕족들은 아카데미의 외국인 과학자들을 신뢰하지 않아서, 예산을 삭감하는 바람에 오일러와 동료들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

표트르 2세가 사망한 후에는 여건이 나아져서, 오일러는 아카데미 내에서 승진하여, 1731년에 물리학 정교수가 되었다. 2년 후에 이곳의 검열과 외국인 적대에 실망한 다니엘 베르누이가 사직하고, 바젤로 떠났다. 오일러는 그를 대신해서, 수학학부의 장이 되었다.

오일러는 또한 프리드리히의 조카이자 안할트 공국의 공주인 프리데리케 샤를로테(Friederike Charlotte)를 가르쳤다. 1760년대 초 오일러는 그녀에게 200여 통이 넘는 편지를 썼으며, 후에 이 편지들은 묶여 '독일 공주에게 보내는 오일러의 편지()'라는 저서로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오일러의 인격과 종교적 신념뿐만 아니라 수학 및 물리학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에 대한 그의 설명이 나타나 있다.

오일러의 많은 업적이 아카데미의 명성을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분노를 불러 일으켜 결국 베를린을 떠나야 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궁정에 많은 지식인 집단이 있었으며, 수학자가 수학 이외의 분야에서는 정교하지 않고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일러는 기존의 사회 질서나 관습적인 신념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단순하고 경건한 종교인이었는데, 이는 당시 프리드리히의 궁정에서 높은 명성을 누렸던 볼테르과는 여러 면에서 정반대였다. 오일러는 숙련된 토론자가 아니었고, 그가 잘 알지 못하는 주제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자주 볼테르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러시아에서 수학을 연구하는 동안 오일러의 시력은 점차 악화되었다. 고열로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지 3년이 지난 1738년에 그의 오른쪽 눈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의 시력은 독일에 있는 동안 더 악화되었고, 그런 오일러를 프리드리히 대왕은 키클롭스라고 부르며 놀리기도 하였다. 1766년에는 왼쪽 눈에 백내장이 발병하였고, 수술이 실패하여 왼쪽 눈마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오일러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뛰어난 암산 및 암기 실력으로 연구를 계속하였는데, 일례로 그는 약 1만 3천 행에 달하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조수의 도움을 받으며 연구를 계속하여 시력이 좋았을 때보다 더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1775년에는 매주 평균 한 편에 달하는 논문을 작성하였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책을 집필하면서 그렇게 내용도 잘 쓸 수 있는 거죠?라고 묻자, 아, 그거요? 사실 내 펜이 나보다 더 똑똑하거든요.라고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는 훗날, 헝가리의 저명한 수학자가 되는 에르되시 팔이 신발을 신고 죽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오일러가 뇌출혈로 쓰러질 때 나는 죽는다라는 문장을 석판에 썼다거나 말로 남겼다는 설이 있다.

오일러는 기하학, 미적분학, 삼각법, 대수학, 정수론 등 수학의 거의 모든 분야뿐만 아니라 연속체 역학, 천문학 등 여러 물리학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많은 수학 개념에 오일러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데,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상수가 두 개인(오일러-마스케로니 상수와 오일러 상수) 유일한 수학자이기도 하다.

오일러는 현재 사용하는 많은 수학 기호들을 도입하거나 대중화하였다. 그는 함수의 개념을 도입하였고, 변수 x에 대한 함수 f를 로 표기하였다. 또한 현대의 삼각함수 표기법을 도입했으며, 자연로그의 밑을 (오일러 상수라고도 함.)로 표기하였다. 수열의 합을 나타내기 위해 그리스 문자 Σ를 사용하였고, 허수 단위를 로 표기하였다. 그리고 원주율을 로 표기하는 것을 대중화시켰다.(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웨일스의 수학자 윌리엄 존스이다.)

오일러는 와 역탄젠트함수가 멱급수 꼴로 표현됨을 증명하였으며(간접적인 증명은 1670년과 1680년 사이에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제시하였다.), 1735년에는 멱급수를 이용하여 바젤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는 1741년에 바젤 문제의 더 정교한 증명을 제시하였다.

오일러는 지수함수와 로그함수를 해석적으로 정의하였다. 그는 로그함수를 멱급수 꼴로 표현하는 방법을 발견하였고, 음수와 복소수 영역으로 로그함수의 정의역을 확장시켰다. 또한 지수함수의 정의역도 복소수까지 넓혔으며, 삼각함수와 지수함수의 관계를 나타내는 오일러 공식을 발견하였다. 다음의 오일러 공식은 실수 에 대해 허수지수 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일 때는 다음의 오일러 항등식을 얻을 수 있으며, 오일러 항등식은 기본 연산인 덧셈, 곱셈, 지수와 수학에서 중요한 상수인 0, 1, , , 가 한 번씩 들어간다는 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식'이라고 불린다.

이 외에도 오일러는 감마함수를 도입하여 초월함수를 정교화하였고, 사차방정식의 새로운 풀이법을 제시하였다. 그는 복소수 극한의 적분을 계산하는 방법을 발견하였고, 이는 복소해석학으로 발전하였다. 또 오일러는 미적분학의 한 분야인 변분법을 창시하였으며, 오일러-라그랑주 방정식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일러는 정수론 분야의 문제를 해석적으로 접근하였는데, 이로써 수학의 서로 다른 분야였던 해석학과 정수론을 합친 해석적 수론이 탄생하였다. 오일러는 초기하함수, 쌍곡선 함수에 대한 이론 및 연분수에 대한 해석적 이론을 만들었다. 그는 조화급수가 발산함을 이용하여 소수의 무한성을 증명하였으며, 소수의 분포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해석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오일러의 업적은 이후 소수 정리로 발전하였다.

오일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학술원의 동료였던 크리스티안 골드바흐에게 영향을 받아 정수론에 흥미를 가졌다. 정수론에서 오일러의 많은 초기 업적들은 피에르 드 페르마가 한 일에 기반을 두었으며, 오일러는 페르마의 몇 가지 아이디어들을 발전시키거나 반증하였다.

오일러는 소수의 분포에 대해 해석적으로 접근하였으며, 소수의 역수의 합의 발산성을 증명하였다. 이로써 그는 리만 제타 함수와 소수의 관계를 발견하였고, 이는 리만 제타 함수에서의 오일러 곱으로 알려져 있다.

오일러는 뉴턴 항등식, 페르마 소정리, 페르마 두 제곱수 정리를 증명하였고, 라그랑주 네 제곱수 정리를 증명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또 양의 정수 n에 대해 n과 서로소인 1부터 n까지의 정수의 개수를 나타내는 오일러 피 함수 φ(n)를 만들었다. 그는 이 함수를 사용하여, 페르마 소정리를 일반화한 오일러의 정리를 증명하였다. 오일러는 완전수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는데, 짝수 완전수와 메르센 소수가 일대일 대응 관계에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오일러는 이차 상호 법칙을 추측하였으며, 이 법칙은 이후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증명하였다. 1772년에 오일러는 231 − 1 = 2,147,483,647이 메르센 소수임을 증명하였고, 이는 1867년까지 알려진 가장 큰 소수로 남아있었다.

오일러는 또한 1752년에 오일러의 다면체 정리로 불리는 식 를 발견하였다. 는 다면체의 꼭짓점 개수, 는 다면체의 모서리 개수, 는 다면체의 면의 개수이며, 상수는 3차원에서의 오일러 지표로 곡면 종수와 관련된 값이다. 이 식은 이후 오귀스탱 루이 코시와 시몽 앙투안 장 륄리에에 의해 발전하였으며, 위상수학의 시초로 여겨진다.

오일러는 실제 세계에서의 문제를 분석적으로 해결하는 것과, 베르누이 수, 푸리에 급수, 오일러 수, 자연로그의 밑, 원주율, 연분수와 적분 등을 응용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는 물리 문제에 미분을 쉽게 적용하도록 발전시켰고, 오일러 근사으로 알려진 적분의 수치근사를 개선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잘 알려진 오일러 근사로는 오일러 방법과 오일러-매클로린 공식이 있다. 오일러는 또한 오일러-마스케로니 상수를 도입하여 미분방정식의 사용을 용이하게 하였다.

오일러는 수학적 아이디어를 음악에 응용하는 것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는 1739년에 음악 이론이 수학의 한 분야로 통합되기를 바라면서 《Tentamen novae theoriae musicae》를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음악가에게는 너무 수학적이라는 이유로, 수학자에게는 너무 음악적이라는 이유로 폭넓은 관심을 받지는 못하였다.




#Article 152: 중국어 방 (419 words)


중국어 방 혹은 중국인 방()은 존 설(John Searle)이 튜링 테스트로 기계의 인공지능 여부를 판정할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 고안한 사고실험이다.

실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모르는 중국인이 보면 안에 있는 사람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안에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고, 중국어 질문을 이해하지 않고 주어진 표에 따라 대답할 뿐이다. 이로부터 중국어로 질문과 답변을 완벽히 한다고 해도 안에 있는 사람이 중국어를 진짜로 이해하는지 어떤지 판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능이 있어서 질문 답변을 수행할 수 있는 기계가 있어도 그것이 지능을 가졌는지는 튜링 테스트로는 판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논변의 내용을 좀더 이해하기 쉽게 비교해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지능'과 '영어만 할 줄 아는 사람'이 동급의 지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이다. 인간 또한 외부에서 접한 자극의 반응으로 습득된 기억속에서 대응방식을 도출하여 표현하게 되는데 이러한 골자를 그대로 따라한 중국어 방의 핵심인 '영어만 할 줄 아는 사람' 이 '인간의 지능' 과 같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중국어 방 논변이 갖는 논리적 바탕이다. 컴퓨터의 소프트웨어는 입력되는 Data 를 받아 미리 기록된 Database 와 비교 대조를 하여 Output 을 도출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연산과정에서 input 과 output 에 대해 '이해' 하였다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 이는 중국어방의 영어만 할 줄 아는 사람이 중국어 질문과 답변에 대해 '이해' 가 아닌 모양새의 비교 대조를 통한 '인지' 를 하고 있으며 이는 '컴퓨터로부터의 반응을 인간과 구별할 수 없다면 컴퓨터는 생각(사고, thinking)할 수 있는 것' 이라고 주장하는 튜링 테스트를 전적으로 반박할 수 있다.

두 번째 전제는 중국어 방을 통한 논변으로 뒷받침되었고, 때문에 존 설은 오직 형식적인 통사론적 규칙에 따르는 방을 유지시켰으며 또한 이 방 안의 존재는 중국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존 설은 곧바로 세 가지의 결론을 도출했다.

설은 이 논증을 “과도하게 조야한(excessively crude)” 것으로서 기술한다. 이 논증이 실제로 타당한지에 대한 고려할 만한 논박이 존재한다. 그 논의들은 전제를 분석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집중되어있다. 어떤 이는 전제 3이 컴퓨터 프로그램은 통사론적 내용을 포함할 수 있지만 의미론적 내용은 포함할 수 없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고, 또 전제 2, 3, 4는 타당하게 결론 1을 도출해 낸 것으로 결론낼 수도 있다. 이것은 논쟁을 컴퓨터 프로그램의 의미론적 내용의 기원으로 이끌고 간다.

이와 같은 논리를 뇌 안의 뉴런과 언어이해력에 대해 적용해 보면, 인간조차 언어를 정말 이해하고 있는지가 불분명해지고 만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안의 사람은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안의 사람과 중국어 방을 더한 총체는 중국어를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많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은 실제로 인공지능을 구현하는 방법이 중국인 방 이론과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예로 애플사의 시리는 본질적으로는 미리 저장된 데이터 베이스를 통해서 입력된 문장을 분석하고 적당한 문장을 출력하는 '중국인 방 이론'에 의해 프로그램되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시리가 아주 훌륭한 인공지능의 예시라고 생각한다.




#Article 153: 개인 정보 단말기 (842 words)


개인 정보 단말기()는 터치 스크린을 주 입력장치로 사용하는 한 손에 들어올 만큼 작고 가벼운 컴퓨터이다.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계산장치라는 의미의 휴대용 소형 컴퓨터에 개인의 일정관리와 검색, 관리 기능이 있는 주소록의 기능을 추가한 것을 말한다. 또, 데스크톱 컴퓨터와 노트북의 자료를 서로 주고 받기 쉽다. 현재는 PDA와 휴대 전화의 기능을 합친 스마트폰이 대중화됨에 따라서 PDA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슈퍼마켓 또는 편의점에서는 정보 누출 우려로 인해 PDA를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 용어는 1992년 라스베이거스 전자 전시회(CES; 소비자 가전 전시회)에서 선보인 애플사의 뉴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96년 Psion 3 와 팜 파일럿이 최초로 PDA 시장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하였다.

현재 PDA의 주요 운영 체제로는 팜소스사의 팜 OS,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우 CE, 리눅스, 심비안 등이 사용되고 있다.

초기에서는 개인 일정 관리 위주의 수첩 대용이었으나, PDA폰으로 대중화된 이후, 이동통신 기능뿐 아니라, 카메라, 무선랜, GPS 등의 여러 기능을 쓸 수 있게 발전하고 있다.

만약 PDA의 정의에서 터치 스크린을 주 입력장치로 해야한다는 조건을 제외한다면, PDA의 정의에 맞는 기기를 추적해 볼 때 현재로서 발견된 최초의 PDA는 영국의 Psion plc.가 출시한 포켓 컴퓨터 Psion Organiser이다. 이때는 PDA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Psion사는 이 제품을 최초로 쓸만한 포켓 컴퓨터로 정의하였다. 첫번째 모델은 현재의 공학용 계산기의 기능과 형태에 일정관리와 주소록 기능이 부가되어 있었으며, 개발자가 만든 프로그램의 구동이 가능하고 저장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두번째 모델은 다른 장치와 연결할 수 있었다.

최초의 PDA와 관련한 내용은 누군가 잘못된 정보로 작성된 글이 일반화되는 오류가 거듭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기기를 모두 PDA라고 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PDA들은 범용성을 위해 모바일 OS와 더불어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SDK를 제공한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최근 스마트폰이란 용어로 통일 되었으나 1990년대 2000년대 초에는 의미가 달랐다. 과거 PDA폰은 핸드폰과 PDA 기능이 결합된 제품, 스마트폰은 핸드폰과 PDA의 기능이 결합 되었으나 기능적으로 부족한 제품들로 구분되었다. 예를 들면 PDA폰에는 터치 스크린이 적용된 반면 스마트폰에는 일반 스크린이 적용되었다.

하루의 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약속 시간에 늦지 않도록 알람 기능을 제공한다. 데스크톱 컴퓨터와 입력 자료를 동기화시킬 수 있다. 또한 작업 스케줄을 조정하는 기능도 제공한다.

가나다/A to Z 순으로 조회를 할 수 있는 주소록은 데스크톱과 연동하여 관리할 수 있으며 대표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아웃룩과 연동할 수 있다.

개념이 애매 모호한 경우가 많은데 PDA는 개인 정보 관리에서 시작하여 개인용 컴퓨터를 대체 하기 위해서 발전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하지만 용량의 한계 때문에 UMPC 등이 출시되었지만 현재로서는 본래의 기능에 충실하고자 한 것이 일반 대중에게 흥미를 잃게 되는 계기가 되어 단종의 길로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

기타 응용에서는 운영 체제마다 원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하여 원하는 용도로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계산기 프로그램을 설치하여 계산기로도 활용할 수 있으며 게임을 설치하여 휴대용 게임기로도 활용이 가능한 등, 본래 기능 이외에 부가적으로 원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할 수 있는 것이 PDA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산업용 PDA는 산업시장에서 요구되는 휴대성·컴퓨팅 성능·높은 확장성·견고함을 충족하여 일반 PDA 및 스마트폰과 구별되는 PDA이다.

IP rate (방진,방수)과 낙하충격에 대응하는 견고함과 바코드 스캐너, 내장프린터, RFID reader, 마그네틱카드리더, GPS등을 내장 혹은 외장형으로 결합하여 다양한 업무용도로 적용될 수 있다.

현재는 다양한 vertical market에서 요구되는 제품들로 인해 굳이 산업용 (industrial PDA)라고 명명하기 어려우나 대표적으로는 industrial  enterprise PDA 또는 Rugged Mobile computer로 불리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TOP3 제조사로는 모토톨라(구 Symbol), Intermec, Honeywell(HHP를 인수)사가 있고 모두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다.
이중 모토롤라가 전 세계 약 40%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그 외에 메이저 업체로는 Psion Teklogix, DataLogic, Casio 등이 있다.
한국에서도 여러 산업용 PDA 제조사가 존재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산업용 PDA 제조사로는 블루버드 (Bluebird)가 있고,
그 외 캐치웰(구:이노텔리텍), M3 Mobile(구: 모바일컴피아), 대신정보통신, 포인트모바일, 웅진ST, 모비트론, ITwell, 비인터렉티브 등 여러 업체가 있다.

전 세계 Mobile Computer Manufacturer의 순위는 다음과 같다.

개인용 스마트폰 대형 제조사 중 하나인 대만 HTC에서도 바코드 스캐너를 내장한 PDA를 런칭하였고, 중국과 인도의 중소규모 전자업체에서도 산업용 PDA시장에 진입하고 있는 추세이나 영향력이 높지않다.

PDA의 운영 체제는 크게 4가지가 있다. 팜 OS, 마이크로소프트의 포켓 PC, 애플의 iOS 그리고 심비안의 EPOC 등 크게 3가지가 있다. 또 리눅스와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진 셀빅도 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PDA의 운영 체제는 윈도우 CE, 포켓 PC와 윈도우 모바일이 있다.

윈도우 CE는 PMP와 같은 기기에 주로 사용되며, 포켓 PC는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 운영 체제로 구형 PDA에, 윈도우 모바일은 최근의 PDA에 사용된다.

개인용 컴퓨터용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비슷하며 대개 배터리 소모가 많다. 초기 윈도우 CE 1.0의 경우는 엄청나게 많은 전력 소모와 느린 처리 시간 때문에 외면 받았지만 많은 업그레이드를 통해서 개선되었다.

윈도우 CE 코어를 기반으로 하는 운영 체제이다. 320x240, 640x480, 320x320의 해상도를 지원하며, 마이크로소프트의 승인을 거친 기기만 포켓 PC 라이선스를 취득할 수 있다.

애플의 iOS는 맥 OS XPC판과 비슷하며, 아이폰, 아이폰 4, 아이팟터치 및 아이패드에 채용되었다.

대한민국 기업인 제이텔이 만든 PDA이자 운영 체제의 이름이다. 셀빅 OS라는 독립적인 운영 체제를 자체 개발하였는데 한글 지원이 내장되어 있어 사용하기 편하다. 셀빅 OS는 팜 OS와 상당 부분 비슷한 점이 있으나 응용 프로그램은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 컬러를 지원하는 2.0까지 개발되었으나, 경영난으로 인해 현재는 사실상 회사가 없어진 상태로 더 이상의 지원은 없다.

리눅스를 기본 운영 체제로 탑재한 PDA는 여러 가지가 있다. 샤프(Sharp) 사에서 만든 자우루스(Zaurus)는 가장 많은 소프트웨어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우루스의 운영 체제는 큐토피아(Qtopia)로 리눅스 커널 2.4.20을 기반으로 한다. 오픈 자우루스(open zaurus)로 샤프(Sharp) 사와는 별도로 만들어진 리눅스도 있다. 또한 대한민국 벤처기업인 지메이트사에서 만든 요피(YOPY) 시리즈가 있으나,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사업을 접어 현재는 제품이 단종되고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참고로 요피의 운영 체제인 리누피(Linupy)는 커널 2.4 기반의 엑스 윈도우(X-Window) 시스템을 사용한다. 현재 HP iPaq, 팜 및 다른 여러 기기에 리눅스를 탑재하려는 노력이 개인 또는 회사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안드로이드는 구글이 리눅스 커널 기반으로 개발한 운영 체제로서, 스마트폰, PDA, 스마트북 등에 사용된다.




#Article 154: 개인용 컴퓨터 (367 words)


개인용 컴퓨터()는 기업이나 가정에서 개인이 사용하는 컴퓨터를 말한다. 보통 책상 위에 놓고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 PC라는 이름은 1970년대 초 미국의 IBM사와 휴렛 팩커드사가 발매한 기종에 처음 사용되었다. 이 때는 트랜지스터 방식이었으나 그 후 마이크로컴퓨터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PC 시대를 맞게 되었다.

PC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IBM에서 생산한 개인용 컴퓨터의 상품명인 IBM PC에서 유래하고부터이다.

한국에는 1980년대에 도입되어 1990년대 이후 인터넷과 함께 널리 보급되었다. 각종 디지털 정보의 저장·관리·통신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 음악 감상, 게임, 채팅 등에도 쓰인다.

최초로 상업적으로 판매된 개인용 컴퓨터는 MITs사의  이었으며, 이를 본따 많은 개인용 컴퓨터가 출시되었다. 이후 애플 II컴퓨터, 코모도어 VIC-20 등이 상업화에 성공하였다. 1980년대 이후, MS와 인텔은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MS-DOS와 윈텔 플랫폼으로 대부분 지배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1990년대 들어 PC가 16비트에서 32비트로 개편될 조짐을 보였고, 그 후 32비트로 전환되었다. 현재는 컴퓨터 성능이 발전하여, 64비트 컴퓨터가 보급되고, 코어가 여러 개인 CPU도 널리 보급되고 있다.

AIM - 65 1974 년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등장하면서, 개인도 구입할 수 있는 저렴한 소형 컴퓨터가 등장했다.

개인용 컴퓨터는 1974 년 미국에서 만들어졌다.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는 Altair 8800(앨테어 8800)이었다. 애초에 개인용 컴퓨터 (personal computer라는 말부터 Altair 8800의 설계자인 에드 로버츠가 최초로 언급해서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이다. 그 후 애플 컴퓨터, 탠디 라디오셱, 코모도, 아타리 등 8비트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탑재한 제품이 등장했다. 특히 애플 II는 스프레드시트의 VisiCalc가 킬러 애플리케이션이어서 큰 성공을 하였다.

IBM PC(IBM 5150) 1981년 16 비트 IBM PC가 등장하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IBM PC에서 사용되는 인텔의 x86 계열의 CPU와 마이크로소프트의 MS-DOS 프로그램이 주류(사실상 표준)가 되었다. 또한 컴팩 등으로 구성된 IBM PC 호환기종 시장이 형성되고, 개인용 컴퓨터의 명칭이 일반화되었다. 스프레드시트는 로터스 1-2-3, 워드 프로세서는 워드 퍼팩트(일본에서는 이치타로)가 보급되었다.

한편, 2000년대에는 많은 개인 PC가 보급되었다 하여 PC에 연결하여 이용하는 것을 전제로 한 정보 기기와 가전 제품이 보급되었다. 디지털 카메라, 디지털은 컴퓨터 사용의 확대를 배경으로 전통적인 필름 카메라와 미니 디스크 (MD)의 수요의 대부분을 대체했다. 2001년, 애플은 PC를 다양한 디지털 기기를 연결하는 허브 (중심)를 담당하는 디지털 허브에 자리잡는 비전을 제시하고 iPod을 윈도에 대응함으로써이 개념을 보급시켜 갔다. 다른 PC 메이커도이 기기의 정보를 저장하고 가공하는 기기로 PC를 입지 수요를 환기하고있다.

개인용 컴퓨터는 다음과 같은 종류로 나뉜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란, 컴퓨터 프로그램과 절차 및 컴퓨터에 대한 지시사항울 나타내는 일반적인 용어다.
소프트웨어는 워드프로세서같은 응용 소프트웨어, 운영 체제같은 시스템 소프트웨어, 그리고 미들웨어로 나뉜다.

해마다 독일의 하노버에서 열리는 세빗에서는 최신 컴퓨터 모델과 미래형 컴퓨터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Article 155: 터치스크린 (131 words)


터치스크린(, )은 화면을 건드려 사용자가 건드린 위치를 찾아내는 화면을 말한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손가락이나 손으로 기기의 화면에 접촉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를테면 모니터에 특수 직물을 씌워 이 위를 손으로 눌렀을 때 감지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터치스크린은 스타일러스와 같은 다른 수동적인 물체를 감지해낼 수도 있다. 이를테면 키오스크와 몇몇 노트북 컴퓨터에서는 직접 손으로 짚고, PDA와 몇몇 노트북 컴퓨터에서는 스타일러스 펜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라이트펜과 같이 감지된 물체가 능동적이라면 터치스크린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이에 적용되지 않는다.

E.A. 존슨은 1965년에 출간한 짧은 논문에서 정전식 터치스크린에 대한 그의 작업을 기술하였고, 그 뒤 1967년 출간한 논문에서 사진과 다이어그램과 함께 더 자세히 기술하였다.

멀티터치 기술은 1982년 시작하였고 당시 토론토 대학교의 입력 연구 그룹이 최초의 인간 입력 멀티 터치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광학식 터치스크린은 터치스크린의 꼭짓점에 장착된 적외선 카메라와 적외선 조명이 화면을 터치하려는 물체의 그림자로 좌표를 측정하여 작동한다.




#Article 156: 백과사전 (628 words)


백과사전(百科事典, , )은 학문, 기술, 예술 등 자연과 인간의 모든 활동에 관한 다방면의 지식을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항목마다 풀이한 책으로 주로 참고서로서 활용했다. 백과사전의 영어명 ‘encyclopedia’는 그리스어의 ‘ἐγκύκλιος’와 ‘παιδεία’의 결합을 어원으로 가지고 있는데, 온갖 종류의 지식을 가르쳐 기른다는 뜻이다. 즉, 백과사전의 원래 목적은 '교육'이었다. 한편 백과사전의 또 다른 목적으로는 '참고'가 있다. 현대의 백과사전들은 '교육'과 '참고' 모두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백과사전에서 내용 분류의 단위이자, 설명의 대상이 되는 것을 표준어라고 한다. 표제어의 범위에 따라 백과사전의 종류가 나뉘는데, 넓은 범위를 갖는 표제어들로 백과사전을 구성하는 것을 대항목주의라고 하고 상대적으로 좁은 범위의 표제어를 이용하는 것을 소항목주의하고 한다. 대항목주의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깊이 있고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교육 목적의 백과사전이 유명한 학자의 논문을 모아서 엮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소항목주의를 채택한 백과사전은 표제어별로 간결하고 압축적인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대항목주의에 비해 다양한 표제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장점이 있어서 참고 목적의 백과사전에 많이 쓰인다. 오늘날의 백과사전은 절충한 방식이 많으며, 내용에서도 문장 서술뿐만 아니라, 사진, 삽화, 도표 등 다양한 참고자료가 함께 제공되는 형태가 되었다. 현대에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라 전통적인 서적의 형태가 아니라 CD-ROM, DVD-ROM의 형태로 된 것도 있으며 인터넷으로 제공되는 것도 등장하였다.

대한민국에서 온라인으로 서비스해주고 있는 한국어 백과사전으로는 한국어 위키백과, 두산세계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 등이 있다.

백과사전의 기원은 플리니우스가 편찬한 박물지이다. 편찬방식이 중국에서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여러 책을 항목별로 분류하여 엮은 동양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유집(類集)과 같았다. 이 유집과 같이 편찬하는 것은 17세기까지 편찬하였다. 최초의 알파벳 배열 백과사전은 1674년 모레리가 역사대사전에서 시도하였고, 그 이후 알스티드가 Encyclopaedia Septem Tomisdistincta에도 이용하였다..

참고로 항목별로 종류에 따라 모았다는 의미에서 유집은 유서(類書) 및 유취(類聚), 휘집(彙集) 등으로도 불린다.

같은 세기 영국에서는 세계적인 백과사전 브리태니커를 1768년부터 매주 분책으로 발행하여 71년에 3권으로 만들었다. 백과사전은 더욱 발전하여 현재 대한민국에는 두산백과사전 등이 있다.

위키백과(Wikipedia)

현대적인 백과사전은 1972년에 전32권으로 완간된 고단샤(講談社)의 《휴먼라이프 엔사이클로페디아》을 시작으로,
, 1980년 가쿠슈겐큐사(學習硏究社)의 전32권 《그랜드 현대백과사전》, 헤이본샤(平凡社)에서 1988년 완간한 전35권의 《세계대백과사전》, 1988년 쇼가쿠칸(小學館)에서 전25권으로 간행한 《대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등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1980년부터 《중국대백과전서》가 발행되기 시작하였고, 타이완에서는 1981년에 중국문화대학 중화학술원이 편찬한 전20권의 《중화백과전서》가 발간되었다.

한국의 현대적 백과사전은 1958년 문학과 교양서적을 전문출판하던 학원사(學園社)에서 간행한 《대백과사전》을 시초로 한다. 4·6배판 전체 6권으로 1958년 9월 25일 제1권을 출판한 후 8년에 걸쳐 완성했다. 50여 명의 편집진과 435명의 집필진이 참여하였고, 원고는 10만 매가 넘었다. 그 후 증보판 2권이 출간되었으며, 1967년에는 전12권의 《세계백과대사전》으로 개정되어 1970년에 전15권, 1973년에 전20권으로 증보된 신판이 발간되었다.

사전류 전문출판사인 동아출판사에서는 1959년 한권으로 발간한 《새백과사전》, 1964년 전2권의 《국민생활백과사전》을 거쳐, 전30권의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을 1978년부터 제작에 착수하여 1982년 9월부터 2권씩 출간, 1984년 완간하였다. 여기에는 13만여 항목이 수록되고 4만여 컬러 사진 및 8천여 흑백 사진이 삽입됐으며, 1986년과 1990년에 각각 보유편이 발간되었다. 이것은 후에 1996년 8월에 두산동아(주)에서 출간된 전 30권의 《두산세계대백과사전》으로 이어졌는데, 128167개의 표제어가 수록되었으며 5개의 CD-ROM이 포함되었다.

동서문화사에서는 《한국세계대백과사전》을 1992년부터 시작하여 1995년에 전30권으로 간행하고, 1997년 8월 8일에 총 31권으로 완간하여 1999년에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으로 개편하였는데, 총13만 항목과 15만 색인이 수록되었고 기존의 백과사전에서 누락되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련 항목과 공산주의 이념까지 포함되었다.

학원출판공사에서는 전 32권의 《학원세계대백과사전》을 간행하는데, 3년의 준비 기간과 5년의 편집 기간을 거쳐 1993년 1월부터 출간하여 1994년에 완간되었다. 이것에는 14만 5천개의 표제어가 수록되었고 기존 백과사전과 달리 30여개의 기본 동사가 표제어로 포함되었다.

한편, 외국의 백과사전이 번역된 것으로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세계대백과사전》이 1989년부터 발간되어 1994년 3월에 전 27권으로 완간되었는데, 총 11만여 항목이 수록되었으며 제26권은 참고 문헌, 제27권은 색인으로 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2007년에 발행된 광명대백과사전(전20권), 조선대백과사전(전 30권, 10만여 항목), 그리고 백과사전(전3권, 3만 항목)이 있다. 그중에서 과학백과사전출판사에서 가장 먼저 발행된 백과사전은 정치 사전, 경제 사전, 역사 사전을 통합하여 편집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초의 백과사전이다.

인터넷이 보급된 90년대 중반 이후 출판형태의 백과사전들은 종이책 출간을 중지하고 CD롬이나 인터넷으로 변화해나갔는데 두산세계대백과의 후신인 두피디아가 2012년 현재에도 개정되고 있다.

물명류도 초기형태의 어휘모음이며 백과사전적인 성격을 띠지만 최초의 백과사전은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을 들 수 있다.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이나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의봉의 고금석림 등이 있었고 가장 방대한 것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이다.

박준식과 김문영은 A. B. Kroeger의 Guide to Reference Books (1902년)와 James I. Wyer의 Reference Work (1930년), Louis Shores의 평가 기준 (1950년대 중반), Kenneth Kister의 저서 (1978년)와 그의 후속 연구, Bopp와 Smith의 백과사전 평가에 관한 조언 (1994년), Sader와 Lewis의 평가기준 (1995년), William A. Katz의 저서 (1997년)을 참고로 하여 백과사전의 평가요소를 다음의 6 가지로 범주화 하였다.




#Article 157: 자연과학 (1889 words)


자연과학(自然科學, )은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를 조직화한 지식의 체계이며, 과학의 한 분야이다.

자연과학은 인간의 이성으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으로 일반 원리를 추구해 나가는 과정과 그 과정에 의해 얻어진 지식체계를 말한다. 따라서 과학은 결론도 중요하지만,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과학에 의해 얻어진 지식체계는 경험적인 방법에 의해 추론된 것으로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예를 들어 아이작 뉴턴의 고전 역학은 조건에 따라 자연 현상을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고전 역학의 실험 방법은 여전히 자연 과학의 한 분야이며 특정 조건 아래에서라면 뉴턴의 운동법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충실하게 과학적 방법을 따른 실험을 통해 얻은 지식체계도 다른 증거에 의해 수정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은 언제나 반례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열어두어야 한다. 자연 과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과학의 이러한 한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류는 선사 시대부터 이미 여러 가지 자연 법칙에 기반한 생활을 해 왔다. 도구를 만들고 기계를 사용하며 불을 이용한 것 등이 그것이다. 고대 시대에는 거대한 건축물이 들어서고 각종 기술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을 이용한 근대 과학은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근대 정신의 요체는 무엇보다도 거대한 기계로서 자연을 바라보고 자연은 수학적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고 파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기록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출발한 근대 자연과학은 데카르트의 과학적 방법론과 아이작 뉴턴의 운동법칙 발견에 의한 고전 역학의 성립으로 현재와 같은 학문 체계를 이루는 기반을 수립하였다. 즉 경험적인 실험을 통하여 자연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과학의 특징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과학적 방법이란 실험적인 증명에 기초를 두는 연구 방법이다. 즉, 믿음에 기초하여 이론적인 추측을 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논증과 증거를 통해 증명하는 방법이다. 자연과학에서는 연구 분야에 따라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나 다음과 같은 방법이 일반적이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많은 유적들을 통해 인류가 선사시대부터 과학적 지식을 이용하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톤 헨지와 고인돌 같은 석조물의 건축을 위해서는 지레, 빗면, 쐐기, 도르래와 같은 단순 기계들의 사용이 필수적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비롯한 초기 고대 사회 문명에서 이미 천체를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달력을 제작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지혜의 여신 이난나가 사람들에게 시간을 재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이야기한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시간을 재기 위해 해시계의 일종인 그노몬을 사용하였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큰개자리의 시리우스를 관찰하여 1년을 계산하였다. 시리우스가 해뜨기 전 동쪽 하늘에 나타나는 5월이 되면 나일 강의 범람이 시작되었다. 나일 강의 범람은 고대 이집트 농업에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계절의 계산 역시 중요한 일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1월을 30일로 하고 12개월을 1년으로 하였다. 마지막달에는 우수리로 5일을 더해 1년은 365일로 계산되었다. 이집트 달력에는 윤년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달력과 실제 계절이 차이를 보이게 된다.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나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같은 고대 석조 건축에는 다양한 단순 기계가 사용과 함께 역학 지식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고대의 거대 건축물들은 동력이 사용되지 않은 채 단순 기계의 원리를 바탕으로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어 세워진 것들이다.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건축 공법은 아치이며 이 역시 무게를 분산하여 지탱하는 역학 지식이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의 해부학적 구조를 직접 연구하는 등 생물학 연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동물의 역사와 같은 다양한 생물 관련 저서를 남겼다.

최초의 화약과 로켓은 중국에서 사용되었다. 화약의 발명은 다양한 화학 지식의 축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최초의 화약은 한나라 시기에 발명되었으나 폭발력이 크지 않아 주로 전쟁터에서 불을 붙이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점차 화약의 원료인 초석의 비율이 커지게 되고 폭발력이 강하게 되자 총과 대포가 제작되게 되었다. 중국의 화약 기술은 13세기 무렵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고대의 다양한 문화에서 지도가 제작되었다. 바빌로니아에서 이미 점토판에 그린 지도가 제작되었다. 본격적인 지도의 제작은 고대 그리스 때 이루어졌으며 아낙시만드로스는 서구 최초의 지도 제작자로 평가받는다. 고대 로마는 자신의 영토안에 있는 속주를 잇는 도로를 표시한 지도를 제작하였다. 아그리파가 제작한 지도에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라인 강까지의 모든 속주의 위치와 면적, 주민들이 기록되었으며 각 속주를 잇는 도로망이 표기되어 있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2천년 무렵 청동 정(鼎)에 새겨진 지도가 발견되었다. 한나라 후기에는 축척을 이용한 지도가 제작되었으며 3세기의 지도 제작자 배수는 직교하는 기준선과 축척을 이용한 《우공지역도》를 제작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학문은 논증을 통해 진리를 증명하고자 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은 논증을 통해 입증되지 않은 것은 참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철학의 개념 뿐만 아니라 수학의 법칙, 정치적 주장 등에 대한 논증 체계가 수립되었다. 고대 그리스 학문의 이러한 특징은 논리학의 발달과 다양한 논증 방법의 개발로 이어져 후일 과학적 방법의 근간이 되었다.

고대 로마의 붕괴 이후 서부 유럽에서는 한 동안 체계적인 교육 제도가 정착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학문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신학을 우선시 한 당시 상황에서 학문은 경험적인 지식보다는 종교에 기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하였다.

한편, 세속적인 욕망에서 시작된 점성술과 연금술은 그 동기와는 상관없이 다양한 실험을 통해 다양한 지식을 구축할 수 있었다.

고대 로마의 몰락 후 중세 서부 유럽에서는 한 동안 고대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학문적 성취가 지체되었다. 고대의 학문은 비잔틴 제국과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 계승되었다. 특히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는 의학, 화학, 천문학 등 여러 학문에서 큰 진전이 있었다. 중세 이슬람의 통치자들은 실용적인 목적에서 고대 그리스의 문헌들을 아랍어로 번역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의학과 관련한 서적들이 번역되었으며 점차 천문학, 점성술, 연금술, 자연사 분야의 지식들을 수용하였다.

처음에는 고대 그리스와 고대 인도의 서적들을 번역하여 도입하는 것에 불과하였던 이슬람 과학은 점차 독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갈레노스의 의학서를 바탕으로 발달한 의학은 이븐 시나의 《의학 정전》에 이르러 당대 최고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으며, 프톨레마이오스를 기반으로 발달한 천문학은 각종 관측기구의 고안과 함께 정교하게 발전하였다. 특히 사마르칸트에는 반지름 40미터, 3층건물 높이의 육분의를 쓰기도 했다. 알바타니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구면삼각법과 같은 기하학적 방법으로 개량·보완해서 태양과 달의 운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1년과 사계절의 길이를 정확하게 측정했다. 이슬람은 이슬람 세계 전역에 관측소를 설립하였고 알마문은 바그다드에 828년경에 세계 최초의 관측소를 세운다. 관측소에는 상당한 규모의 도서관이 딸려 있고 정부의 지원 하에 과학 교육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교육은 점성술의 예언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후기에는 고대 천문학을 능가하는 비 프톨레마이오스 모형을 만들어 행성 운동을 설명하였고 이를 고도로 정확한 관측으로 검증했다. 그러나 이 모형 역시 지구를 중심으로 한 모형이다. 이슬람의 수학은 이론적인 기하학보다 실용적인 산술, 대수학을 중시하였다. 인도로부터 쓰기 편한 아라비아 숫자를 도입하였고 사실상 고차방정식을 해결했으나 이슬람 수학은 순수 수학적 목적에 의한 발전이라기보다 세금, 유산 분배와 같은 실용적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슬람은 광학의 발전에서도 크게 기여하였다. 사막 기후로 인해 눈에 무리가 가기 쉬운 이집트에서 안과학 문헌이 많이 쓰여졌으며 이슬람의 의사들은 눈 치료법과 시각(눈)의 해부학, 생리학의 전문가였다. 이슬람의 물리학자 이븐 알 하이삼은 의사가 아님에도 눈병에 관한 글을 썼으며 그의 광학에는 시각, 굴절, 암실, 불을 붙이는 거울, 렌즈, 무지개 등 다양한 광학 현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중세 이슬람의 과학은 후일 유럽으로 전파되어 유럽 과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알코올, 알고리듬과 같은 낱말은 아랍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유럽은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러 다시 경험적인 지식을 중요하게 다루기 시작하였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중력, 마찰, 관성과 같은 과학적 현상을 관찰하였으며 망원경을 사용하여 천체를 관측하기도 하였다.

동아시아에서도 고대에서부터 중대한 조짐을 미리 살피기 위해 천체를 관찰하였다. 혼천의는 이슬람의 천문 관측기구를 참조하여 중국 원나라에서 제작되어 조선에 도입되었다. 한편, 조선의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강우량 등의 기상 기록은 500여년 간 빠짐 없이 기상 현상을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가치가 큰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찰스 다윈은 진화의 요인을 자연선택에 의한 종분화로 보는 진화 이론을 발표하였다. 다윈의 진화 이론은 당대에서 부터 기독교 등에 의한 극심한 반발을 받기도 하였으나 오늘날 현대 진화 이론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레고어 멘델은 완두콩을 이용한 실험에서 멘델의 유전법칙을 발견하여 유전학의 기초를 놓았다. 그의 유전법칙은 발표 당시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나 20세기 초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 재발견 되면서 고전 유전학의 핵심 원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근대 초기 과학자들은 과학의 발전이 인류의 복리 증진에 이바지 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바램과는 달리 과학의 결과물은 무기로 이용되어 더 큰 파괴와 살상을 불러왔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자신의 발명품이 무기로 사용되어 비난받자 자신이 번 자산을 인류의 복리 증진과 평화를 위해 노력한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데 사용하고자 결심하였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노벨상은 오늘날까지도 과학과 평화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수여되고 있다. 그러나, 노벨 이후에도 원자 폭탄과 같은 더 강력한 무기가 만들어져 더 많은 파괴를 가져왔다.

한편, 근대 과학과 산업 혁명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대량 생산과 교통의 발달은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연결시켰다. 이로써 인류는 이전의 그 어느 시기보다고 더 빠르게 더 많은 물자를 거래하게 되었으나 소위 열강이라 불리던 유럽의 강대국들은 이러한 발전을 바탕으로 다른 나라와 민족을 식민지로 삼는 제국주의 정책을 취했다. 제국주의 열강은 근대 과학의 결과물인 물자와 기술로서 세계의 거의 대부분을 억압하였다.

양자역학의 성립은 곧 고전역학이 더이상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동안 고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우주와 자연 현상이 실상은 확률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에 의지한다는 양자역학의 핵심 개념은 사람들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유명한 사고실험으로 양자 역학의 확률성을 잘 보여준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시간, 길이와 같은 물리량이 고전 역학의 관점과는 달리 더 이상 고정적인 상수로서 취급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장에 의한 공간의 변형을 예언하였으며 이는 훗날 태양의 중력장에 의한 빛의 굴절을 관측함으로써 증명되었다.

입자물리학의 발달은 기본입자의 발견을 가져 왔으며 양자 역학의 성과와 결합하여 표준 모형을 수립하게 되었다. 표준모형에서는 물질 사이에 존재하는 힘을 전자기력, 약력, 강력, 중력으로 정리하였으며, 20세기 후반부터 이들 힘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설명하려는 대통일이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20세기 말 스티븐 호킹은 그 동안의 이론물리학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현대 우주론을 종합하였다.

DNA 구조가 알려진 후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은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유전자 발현의 기제가 알려지고 유전성 질환에서 유전자의 역할이 하나 둘 밝혀지게 되었다. 2003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완료되어 인간의 전체 게놈 지도가 완성되었다. 또한 진화 현상이 직접 관측이 가능해지고,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했으며, 살아있는 화석들의 유전체 연구를 통해 진화이론은 증명되었고, 이는 진화학 혹은 집단 유전학으로 발달했다.

입자물리학의 발전은 19세기 이후 연구되던 여러 방사능 물질들의 핵분열과 핵융합의 조작을 가능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과학자들은 플루토늄과 같이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물질을 합성하였다. 핵물리학의 지식은 핵발전소와 같이 평화적인 분야에 이용되기도 하나 핵폭탄과 같이 재래식 무기를 초월하는 파괴력을 가진 무기가 되기도 한다.

물리학은 물체사이의 상호작용과 물체의 운동 물질의 구성과 성질과 변화 에너지의 변화등을  연구하여 자연을 이해하는 학문이다. 화학 생물학등과 더불어 자연과학을 이루며, 자연과학 중에서 제일 기본적이고 가장 먼저 체계화 된 학문이다. 물질에 대하여 연구하는 자연과학의 한 분야로서, 힘이나 에너지와 같은 개념을 포함한 시공간에서 물질의 운동을 연구하며, 더 나아가 우주의 존재 방식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물리학이 연구하는 대상은 아원자 입자에서부터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물리학이 다루는 물질에 대한 연구는 다른 모든 지식과 관련되어 있다. 이때문에 물리학은 흔히 기초 과학이라고 불린다. 현대의 물리학은 입자물리학, 핵물리학, 열역학, 양자역학과 같은 여러 하위 학문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생물학은 생물의 구조와 기능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생물의 종류에 따라 동물학, 식물학, 미생물학으로 나누며 대상현상이나 연구방법에 따라 분류학, 형태학, 해부학, 발생학, 생리학, 생화학, 세포학, 유전학, 생태학, 생물지리학, 진화학 따위로 나뉜다. 현대 생물학은 카를 프리드리히 부르다흐, 고트프리드 라인홀트 트레비라누스,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독립적인 학문으로서 자리잡았다.

생물학은 많은 하위 학문을 포괄하는 광대한 주제를 다루는 학문이다. 이 가운데 현대 생물학의 주요한 핵심 연구 분야는 세포 이론, 진화, 유전자, 에너지, 항상성 등을 들 수 있다. 생물학의 하위분야는 연구의 방법과 목적에 따라 나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생물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현상을 연구하는 생화학, 분자 수준에서 일어나는 생명 현상을 탐구하는 분자생물학, 생명의 진화 과정과 다양성 증가를 연구하는 진화생물학, 세포에서 일어나는 생명 현상을 다루는 세포생물학, 기관이나 조직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생리학, 환경에서 다양한 생물 개체들이 맺는 관계를 탐구하는 생태학 등이 있다.

생물학에서는 생물의 특성과 분류에 따른 학명을 명명하는데 동물은 동물 학명 국제 코드에 따르며, 식물과 균류는 각각 식물 학명 국제 코드와 균류 학명 국제 코드를 따른다. 이외에 바이러스, 바이로이드, 프리온과 같은 바이러스성 유기체는 바이러스 분류 및 명명 국제 코드를 따르고 있다. 한편, 여전히 분류되지 않은 바이러스 종들이 존재한다.

화학은 물질의 성질, 조성, 구조, 변화 및 그에 수반하는 에너지의 변화를 연구하는 자연과학의 한 분야이다. 물리학 역시도 물질을 다루는 학문이지만, 물리학이 원소와 화합물을 모두 포함한 물체의 운동과 에너지, 열적·전기적·광학적·기계적 속성을 다루고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통일된 이론을 구축하려는 것과는 달리 화학에서는 물질 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한다. 화학은 이미 존재하는 물질을 이용하여 특정한 목적에 맞는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는 길을 제공하며, 이는 농작물의 증산, 질병의 치료 및 예방, 에너지 효율 증대, 환경오염 감소 등 여러 가지 이점을 제공한다.

하위분야로 천문학이 포함된다.

지구과학은 지구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들을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지구과학으로 불리는 학문들은 대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기상학, 지구 표면의 물질을 주로 대상으로 하는 지질학, 바다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해양학, 지구의 깊은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지구물리학 등이 있다.

자연과학은 오랫동안 자연 현상에 대한 객관적 기술로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토머스 쿤이 제시한 패러다임의 전환 이론에 따르면 자연 과학의 과학적 방법 역시 시대적 상황에 의해 형성되는 지식 체계의 일부이다. 쿤은 과학의 발전은 과거의 지식을 토대로 쌓아 올려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지식 체계의 주도권 싸움의 결과로 보았다. 쿤의 이러한 주장은 과학 지식과 과학적 방법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으며 과학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자연과학의 지식체계와 과학적 방법 자체에 대해 고찰하고 연구하는 학문 분야를 메타 과학이라 한다.




#Article 158: 헬륨 (653 words)


헬륨(,  )은 화학 원소로,  He()이고 원자번호는 2이다. 질량수가 3인 3He과 4인 4He이 있다. 화학 원소 중 끓는점이 가장 낮으며, 상압에서는 영점에너지로 인하여 절대영도에서도 액체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원소다. 단, 액체 헬륨의 동위원소는 일정한 온도 및 압력 하에서 고체로 존재할 수 있다. 기체, 액체, 고체가 공존하는 3중점이 없는 유일한 원소이다.

헬륨은 1868년 프랑스 천문학자 피에르 장센이 발견하였다. 그는 1868년 8월 18일 일식의 관측에서 특정 대역의 노란 빛, 즉 587.6 나노미터 부분에 새로운 선이 존재하는 것을 알아내고 헬륨의 존재를 밝혔다. 헬륨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태양을 뜻하는 말 헬리오스(Helios)에서 유래하였다.

수소 다음으로 가벼운 원소이며, 다른 원소와 잘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에, 지구상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지구상의 헬륨은 대부분은 방사성 원소의 핵붕괴로 생성된 알파 입자가 천연 가스에 포획된 상태로 있다가 발굴된다. 1903년, 미국의 천연 가스전에서 다량의 헬륨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헬륨은 우주에서 수소 다음으로 두 번째로 흔한 원소로서, 은하계 전체 원소의 24%를 차지한다. 태양과 가스 행성(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들도 수소와 헬륨이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외에 항성이 주계열성으로 빛나면서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수소 핵융합 반응으로도 일부 생성된다.

헬륨은 가장 반응성이 적은 비활성 기체이다. 그뿐만 아니라 알려진 모든 화학 원소 중에서 가장 반응성이 적다. 거의 모든 조건에서 헬륨은 단원자 분자로 존재하며 반응하지 않는다.

헬륨은 매우 높은 압력하에서 고체나 액체의 상태가 될 수 있다. 실험실에서 조건을 맞춘 고압력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고체 헬륨은 맨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크기이며, 압력을 가함에 따라 30% 정도 부피가 감소될 수 있다. 5×107 Pa의 압력에서 헬륨의 용적율은 물의 50배에 달한다. 압력 1기압에서 헬륨은 절대 영도에 도달하여도 고체가 되지 않고 액체 상태를 유지한다. 이는 양자 역학으로 설명되는데, 즉 헬륨의 영점 에너지가 너무 높아 절대 영도에 이르러도 분자 운동이 활발히 유지되기 때문이다. 헬륨을 고체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1~1.5 K(약 −272 ℃)에서 약 2.5 MPa의 압력을 가해야 한다. 헬륨의 고체 상태와 액체 상태는 굴절률이 같아 분간이 매우 어렵다. 헬륨은 1기압의 압력에서 약 2.3K에서 초유체로 상변이한다. 고압에서 만들어지는 고체 헬륨도 초유체와 비슷한 현상이 발견되었다.

저온의 액체 헬륨에는 이상한 성질이 많다. 그중 여러가지가 헬륨이 원가자 보즈 입자라는 사실 때문에 일어난다. 한 가지는 액체 헬륨이 점성 저항(viscous resistance) 없이 흐른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속도가 작은 경우의 '마른 물(dry water)'의 이상적인 예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액체가 점성을 가지려면 내부 에너지의 손실이 있어야 한다. 즉 액체의 한 부분이 나머지와는 다른 운동을 할 방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원자 몇 개를 나머지 원자들과는 다른 상태로 때려서 보낼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충분히 낮은 온도에서는 열운동이 아주 작아지고 모든 원자는 같은 상태로 가려 한다. 몇 개의 원자가 움직이고 있다면 다른 모든 원자들도 따라서 같은 상태로 움직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 운동에는 어떤 경직성(rigidity)이 있어서 독립적인 입자의 경우에 생기는 불규칙한 난류이 형태로 움직임을 깨뜨릴 수가 없다. 보즈 입자로 이루어진 액체는 모든 입자들이 같은 상태로 가려는 강한 경향이 있다. 고온에서는 많은 원자들을 여러 다른 상태들로 보낼 수 있을 만큼 열에너지가 충분하기 때문에 이 같은 협력적인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충분히 낮은 온도에선 헬륨 원자들이 모두 같은 상태로 가려 하는 순간이 갑자기 찾아온다. 헬륨이 초유동체(superfluid)가 되는 것이다. 한 자기 덧붙이자면, 이 현상은 헬륨의 동위 원소 중 원자량이 4인 것들에서만 볼 수 있다. 원자량이 3인 동위 원소는 개개의 원자가 페르미 입자이기 때문에 액체 상태에서 보통의 유체가 된다. 초유동체 현상은 4He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이는 분명히 보즈 입자인 알파 입자의 성질에 의한 양자역학적 효과이다.

공기보다 가볍고 비활성 기체임을 이용해 폭발하기 쉬운 수소 대신에 비행선, 풍선, 애드벌룬에 이용된다. 또, 심해 잠수부의 산소통의 질소 대체로 이용된다. 그 이유는 질소보다 헬륨이 혈액에 대한 용해도가 작아 잠수병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헬륨의 끓는점이 매우 낮은 것을 이용해 초저온 냉각제로 사용되기도 한다.

헬륨은 산화흔적이 남으면 안 되는 용접을 할 때 산소의 접근을 막기 위한 용도로 헬륨 환경을 조성한다. 반도체 등의 제작을 위해 플라즈마를 생성시킬 때 플라즈마의 균일한 정착을 위해 헬륨을 적정량 사용한다.

또한 목소리 변조에 사용되기도 하는데, 헬륨 가스에서는 공기 중에 비해 약 3배정도 전송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약 10~20초정도 목소리의 음이 높아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단 많은 양을 마실 경우 질식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또 헬륨은 트리믹스에 사용되는데, 트리믹스는 압축 공기에서 질소의 비율을 줄이고 그만큼을 헬륨으로 채운 것이다. 헬륨은 용해도가 매우 낮기 때문에 압축 공기를 사용했을 때(30~40m)보다 더욱 깊이 잠수할 수 있다. 그러나 70m~80m 정도까지 내려가면 헬륨이 용해되어 헬륨 마취 현상이 일어난다.




#Article 159: 레드햇 (127 words)


레드햇(Red Hat,)은 1993년에 창립된 리눅스 배포판 제작회사로, 레드햇 리눅스를 제작했다.

레드햇은 오픈 소스를 비즈니스로 전개하면서 소프트웨어를 무료로 공급하고 지원을 유료로 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기본으로 하였지만, 최근에는 고도화된 소프트웨어를 유료로 판매하는 비즈니스도 시작하고 있다.

리눅스가 등장하고 초기에는 일반적인 사용자가 사용하기 쉽게 리눅스 커널을 중심으로 GNU 프로젝트, BSD, X11 등의 소프트웨어를 조합하여 공급하는 형태로 리눅스 초기의 확산에 많은 공헌을 해왔다.

레드햇의 리눅스 배포판(이후, 레드햇 리눅스)은 GPL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구성하여 자체 제작 소프트웨어도 GPL로 공개되고 있기 때문에, 래드햇 리눅스를 기반으로 하는 타 기업의 배포판도 많이 존재한다. (예, 수세 리눅스)

덧붙여 지금까지 레드햇은 주식을 나스닥(RHAT)에 상장하고 있었으나, 2006년 12월 12일에 뉴욕 증권거래소(RHT)로 거래소를 변경하였다.

Red Hat은 1999년 8월 11일 기업을 상장했고, 이날 월 가 역사상 8번째로 높은 상장일 주가 상승이 있었다. 1999년 12월  Matthew Szulik 이 Bob Young의 뒤를 이어 CEO가 되었다.




#Article 160: SF (장르) (2523 words)


공상과학, 사이언스픽션() 또는 줄여서 SF는 미래의 배경, 미래의 과학과 기술, 우주여행, 시간여행, 초광속여행, 평행우주, 외계생명체 등을 소재로 하는 장르이다. 소설인 경우, 과학소설(科學小說)이라고 한다. SF는 종종 과학적인것을 포함한 다른 혁신스런 잠재적인 결과를 탐구하여 아이디어문학이라 불리곤 했다.

SF는 광범위한 하위장르와 주제를 가지고 있어 정의하기 어렵다. 작가이자 편집자인 나이트는 이러한 어려움을 요약하기 위해, 우리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면 그것이 바로 SF이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작가 글래시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SF의 정의는 포르노그래피의 정의와 같다. 당신은 그게 뭔지 모르지만, 보는 순간 알게 된다. 나보코프는 엄밀하게 정의하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는 SF여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는 《프랑켄슈타인》 1818년판 서문에서 언급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하인라인에 따르면, 거의 대부분의 SF에 대한 간편하고 짧은 정의는 아마도 이것이다: 과학적 방법의 의미와 자연에 대한 철저한 이해, 그리고 미래와 과거의 현실 세계에 대한 충분한 지식에 기반한, 가능한 미래의 사건들에 대한 현실적인 추측. 셜링의 정의는 이렇다. 판타지는 개연성 있게 만들어진 불가능한 것. SF는 가능하게 만들어진 개연성 없는 것. 델레이는 헌신적인 애호가나 팬이라 해도, SF가 무엇인지 정의하기 힘들어 한다라고 적었다. 그 이유는 완전히 만족스러운 정의란 없고, SF의 윤곽에 한계란 없기 때문이다.

SF는 주로 합리적으로 그리는 대안적인 가능 세계와 미래에 기반해있다. 이 장르는 그런 면에서 판타지와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이야기의 맥락내에서, SF의 상상적 요소는 과학적으로 정립됐거나 과학적으로 가정된 물리 법칙으로 대부분이 가능해진다.(그렇지만 이야기 속 몇몇 요소는 여전히 순수하게 상상된 사변일 수 있다)

SF의 배경은 종종 합의된 현실과 반대이지만, 대부분의 SF는 다양한 가상의 요소로 가능성 있는 과학적 가설이나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마음에 촉진된 상당한 정도의 불신의 유예에 의존하고 있다. SF의 요소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SF를 사색과 스토리텔링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파악해보면, 이 장르의 기원은 신화와 역사의 경계가 흐릿하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2세기 루시안의 진짜 역사, 아라비안 나이츠 설화, 10세기의 다케토리 이야기, 13세기 이븐 알 나피스의 독학 신학(Theologus Autodidactus)을 비롯한 SF의 선구자격 문학들을 만나게 된다.

막 싹트기 시작한 이성의 시대의 생산물들과 근대 과학의 발전에 따라 나타난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1726)는 볼테르의 〈마이크로메가스〉(1752)와 케플러의 〈솜니움〉(1620~1630)과 더불어 최초의 사이언스 판타지 작품들 중 하나이다. 아시모프와 세이건은 〈솜니움〉을 최초의 SF로 여긴다. 《솜니움》에서는 달 여행과 달에서 바라본 지구의 움직임이 묘사됐다. 영국인 귀족 여성 마거릿 캐번디시의 〈빛나는 세계〉(1666) 역시 초기 SF의 전조로 여겨진다. 이보다 나중에 포는 달 여행을 그린 이야기 한 편을 썼다. 이밖에도 더 많은 예시들이 19세기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전기, 전보와 같은 새로운 기술, 새로운 교통시설의 출현에 따라 웰스와 베른은 사회의 다양한 계층에게서 광범위한 인기를 얻은 작품들을 창작했다. 웰스의 〈우주 전쟁〉(1898)은 발달된 무기를 장착한 세 발 달린 전투 기계를 탄 화성인들이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침략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것은 외계 침공을 실감나게 묘사한 소설이다.

기술적 변화의 급격한 속도에 대한 우려는 빈저의 소설 《실시간으로 버려지다》(Marooned in Realtime)로 대중화된 기술적 특이점이란 개념으로 구체화되고, 이는 다른 작가들에게도 채택된다.

영어 Science fiction은 흔히 '공상과학', '공상과학소설', '과학소설' 등으로 번역된다.

과거 대한민국에서는 일본의 아동용 소설 전집이나 외국어 사전류를 통째로 중역(重譯)하여 출간하는 일이 많았기에 일본에서 사용하던 '공상 과학'이라는 말이 사이언스 픽션에 대한 역어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현재 사전, 신문기사
등에서 통용되고 있는 표준어이다.

'공상과학'이 잘못된 용어이기에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며 다음을 근거로 들고 있다.

위와 같은 이유로 국내 SF계에서는 팬덤과 작가, 출판사 등을 통틀어 오랫동안 '공상과학소설'을 '과학소설'로 바꿔부르는 데 노력을 기울였고, 현재는 영화, 만화, 게임 등 여타 매체를 포함한 광범위한 장르명으로서 '공상과학'을 대체하는 용어로 'SF'가 선호되는 편이다.

한편 중국에서는 SF장르를 과학환상() 또는 간단히 과환이라고 부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과학환상작품'이라는 유사용어를 사용한다.

Sci-Fi(사이-파이)라는 약어는 1954년에 과학소설 연구가인 애커먼에 의해 공식 문헌에 사용되었다. 하인라인은 이보다 6년 먼저 사적인 글에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SF가 대중문화로 확산되면서 과거에 비해 더 오락 지향적인 SF물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고, 일부 영화 비평가들이 저급한 'B급 SF 영화'를 'Sci-Fi'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일부 평론가 등은 이 약어를 멸칭(蔑稱)으로 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SF와 마찬가지로 가치중립적인 용어로 간주된다.

SF는 발전과 미래 기술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혁신과 새로운 기술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 주제는 SF 포럼보다는 문학과 사회학에서 더 많이 논의되어왔다. 영화와 미디어 이론가인 비비안 소브책은 SF영화와 기술적 상상력 간의 영향관계를 검토했다. 기술은 예술가들과 그들이 허구적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지만, 동시에 가상 세계는 과학의 상상력을 확장시켰다. 《윌리엄 섀트너는 어떻게 세상을 바꿨는가》(How William Shatner Changed the World)는 현실에서 실현된 상상 속 기술의 다양한 예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새로운 작가들은 클라크 같은 초창기 SF작가들처럼 현재로선 불가능한 기술들을 곧 실현될 것처럼 보이게 만들 방법을 찾고 있다.

하드 과학소설, 혹은 하드 SF는,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 천체 물리학, 화학의 정확한 세부사항에 대한 엄격한 관심, 혹은 더 발전한 기술이 가능하게 만들었을 세계에 대한 정밀한 묘사로 특징지어진다. 하드 SF에서 몇몇 정확한 미래 예측이 나오기도 했지만, 수많은 잘못된 예측들 역시 많이 나왔다. 벤퍼드, 랜디스, 브린, 로버트 L. 포워드 같은 몇몇 하드 SF 작가들은 본인들을 현직 과학자로 여기며, 루디 루커, 버너 빈지 같은 수학자 작가들도 있다. 다른 중요한 하드 SF 작가들로는 아시모프, 클라크, 클레먼트, 베어, 니븐, 소여, 백스터, 레이놀즈, 셰필드, 보야, 로빈슨, 이건 등이 있다.

사회과학 소설과 소프트 SF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이야기와 연관된다; 오웰의 《1984》,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가 그 모범적인 사례이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같은 풍자 소설 또한 과학소설이나 사변소설로 여겨진다.

SF를 다양한 하위장르로 분류하는 것은 각각의 하위장르들이 간단히 정의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 어떤 연구들은 일반적으로 정의된 장르들을 중복된 것으로 파악하며, 동시에 장르 밖이나 그 사이에서 장르의 경계에 포섭되지 않는 공간도 존재한다. 더 나아가, 대중 시장과 문학 비평 사이에도 장르와 분류를 설정하는데 상당한 차이가 있다.

사이버펑크 장르는 1980년대 초반 나타났다. 이 용어는 사이버네틱스와 펑크의 합성어 로서, 베트케의 1980년 단편 《사이버펑크》를 통해 처음 만들어졌다.
시간적 배경은 주로 근미래이며, 설정은 대개 디스토피아적이고, 특유의 고통으로 형상화된다. 사이버펑크의 일반적인 주제는 정보 기술, 특히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해 시각적으로 추상화된 인터넷의 발전, 인공 지능, 보철학, 기업이 정부보다 강한 영향력을 지닌 포스트-민주주의 사회적 제어 등이다. 니힐리즘, 포스트 모더니즘, 필름 느와르 기법이 일반적인 요소이며, 주인공은 반항적인 안티 히어로일 때도 있다. 잘 알려진 작가로 깁슨, 스털링, 스티븐슨, 캐디건이 있다. 제임스 오흘레이는 1982년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사이버펑크 비주얼 스타일의 결정적인 예시라고 말했다. 이것은 후에 오시이의 《공각 기동대》나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시리즈 등의 영상물에도 강한 영향을 미쳤다.

시간여행물은 18세기나 19세기에 그 전신이 나타난다. 최초의 중요한 시간여행 소설은 트웨인의 〈아서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이다. 가장 유명한 소설은 웰스의 1895년작 《타임 머신》이다. 트웨인의 소설과 비교했을 때 웰스의 소설에선 시간여행 장치가 조종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는 차이가 있다. 타임 머신이라는 용어는 웰스가 만들어낸 것이며, 이젠 시간여행 장치를 부르는데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백 투 더 퓨처》는 이 분야의 가장 유명한 프랜차이즈 중 하나이다. 시간여행물은 조부모 패러독스 같은 논리적 문제로 인해 복잡해진다. 시간 여행은 현대 SF에서도 계속해서 인기있는 주제이며, 이를테면 《스타게이트 SG-1》이나 BBC의 텔레비전 드라마 《닥터 후》가 이것을 다루고 있다.

대체 역사는 역사적 사건이 다르게 전개됐을 수도 있다는 전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 분야의 소설들은 종종 과거를 바꾸기 위해 시간 여행을 동원하거나, 간단하게 우리의 역사와는 다른 우주를 설정한다. 미국 남북 전쟁에서 남군이 이겼다는 가정하에 전개되는 무어의 《희년을 선포하라》(Bring the Jubilee)나 독일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다는 가정하에 전개되는 딕의 《높은 성의 사나이》가 이 분야의 고전이다. 횡향 상은 최고의 대체역사물에 수여된다. 이 이름은 라인스터의 1934년 작품 《시간의 횡향》에서 가져왔다. 터틀도브는 이 분야의 가장 눈에 띄는 작가이며, 종종 대체 역사 마스터로 불린다.

한국에서는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가 이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밀리터리 SF는 국가, 행성, 항성간의 군사 분쟁을 배경으로 삼은 하위장르이며, 가장 중요한 캐릭터는 대개 군인이다. 밀리터리 SF는 군사 기술, 절차, 의식, 역사의 세부 사항을 포함하며, 종종 실제 일어난 역사적 분쟁을 거울처럼 비춘다. 하인라인의 《스타쉽 트루퍼스》는 고든 딕슨의 《도르세이》와 함께 이 분야 초기의 예시이다. 초기 작가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은 베트남 전쟁 시기 제2차 세계 대전 스타일로 창작된 이 장르에 대한 비판이다. 존 링고, 데이비드 드레이크, 데이비드 웨버, 톰 크래트먼, 마이클 Z. 윌리엄슨, S. M. 스털링, 존 F. 칼, 돈 호스론 등이 이 분야에서 눈에 띄는 작가이다. 밴 북스 출판사는 이 소설가들 여럿을 육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초인물은 평범한 인간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간들의 등장을 주제로 다룬다. 스테이플던의 소설 《이상한 존》과 스터전의 《인간을 넘어서》, 와일리의 《검투사》에서처럼 자연적 발생을 기원으로 삼거나, 아니면 밴보트의 소설 《슬ㅋ

랜》에서처럼  과학적 진보를 통한 의도적인 개조를 기원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초인물이 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초인들을 보는 사회의 반응과 초인들이 느끼는 소외감이다. 초인물은 현실 사회에서도 인간 개조에 대한 토론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 폴의 《맨 플러스》 역시 이 카테고리에 포함 된다.

아포칼립스물은 전쟁을 통한 문명의 종말(해변에서), 전염병(최후의 인간), 운석 충돌(세계가 충돌할 때), 생태학적 재해(미지에서 불어온 바람), 그리고 기타 일반적 재해나 재해 발생 이후의 세계와 문명에 대해 다루는 하위장르이다. 스튜어트의 소설 《견디는 지구》(Earth Abides)와 팻 프랭크의 아아, 바빌론 등이 이 분야의 전형이다. 포스트-아포칼립스물이 근미래(매카시의 《로드》)닥친 재앙의 여파부터 375년 후의 미래(바빌론의 물로 인해), 수백 수천년 후의 미래(러셀 호반의 리들리 워커, 월터 M. 밀러 2세의 레보위츠를 위한 송가)까지 광범위하게 다루는 데 비해, 아포칼립스물은 일반적으로 재앙 그 자체와 그 직후의 여파를 다룬다. 아포칼립스 SF는 비디오 게임에서 인기있는 장르이다.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은 폴아웃 시리즈는 핵전쟁의 생존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애쓰면서 점차 회복되어 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적인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작중 일부, 혹은 작중 전체를 외우주나 여러 개의 (때로 멀리 떨어진) 행성들을 배경으로 삼는 SF 모험물이다. 갈등은 대개 영웅적이고, 대규모로 발생한다.

스페이스 웨스턴은 미국 서부극의 책과 영화의 주제를 미래적인 우주 변경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 하위장르는 일반적으로 갓 테라포밍 됐거나 정착된 콜로니 세계를 다루며, 이것은 무법이 지배하고 경제적으로 확장되던 옛 미국 서부의 대역이다. 숀 코너리의 영화 《아웃랜드》, 하인라인의 《우주의 농부》, TV 시리즈 《반딧불》, 조스 휘던의 영화 《세레니티》 속편, 만화나 애니메이션인 《트라이건》, 《금지된 별》, 《카우보이 비밥》 등이 이 장르의 예시이다.

사회 과학 소설은 인간 사회와 SF적 설정에 배치된 인간의 본성에 초점을 맞추는 SF 하위장르이다. 대부분 인류에 대한 사변에 집중하는 대신 과학적 엄밀함엔 신경을 덜 쓰기 때문에 보통은 소프트 SF로 분류된다.

SF 팬덤은 아이디어 문학의 커뮤니티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사회에 출시되기 전에 나타나 길러지는 문화이다. 이 커뮤니티의 구성원인 팬들은 컨벤션이나 클럽, 종이나 온라인 팬진, 웹사이트, 메일링 리스트를 비롯한 여러 통로를 통해 서로 접촉한다.

미국의 SF 팬덤은 《어메이징 스토리즈》의 서한 칼럼을 통해 등장했다. 곧 팬들은 서로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후에 팬진으로 알려질 비공식 출판물을 통해 자신들의 논평을 모았다. 정기적인 연락이 이어지자 팬들은 서로를 만나고 싶어했고, 지역 클럽을 조직했다. 1930년대, 최초의 SF 컨벤션은 팬들을 더 넓은 공간에서 만나게 했다. 컨벤션, 클럽, 팬진은 인터넷이 더 많은 사람들 간의 통신을 용이하게 만들기 전까지 수십년간 팬 활동의 지배적인 양식이었다.

한국에서 최초로 유의미한 형태로 조직된 팬덤은 나우누리, 천리안 등의 PC 통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후 인터넷 시대가 개막하며 보다 개인적인 성향의 팬덤층이 나타났다. 2017년에 이르러 SF작가들만으로 구성된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SFWUK)와 넓은 범위의 팬 중심 단체인 한국SF협회가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세계 SF 학회(World Science Fiction Society)의 월드콘에서 수여되는 휴고상, SFWA와 작가 커뮤니티의 투표를 통해 선정되는 네뷸라 상, 최고의 과학소설을 위한 존 W. 캠벨 기념상, 테오도어 스터전 기념상(단편) 등이 가장 권위있는 SF상으로 취급된다. SF영화 분야에서 유명한 상으로 SF, 판타지, 호러 영화 아카데미가 매년 수여하는 토성 상이 있다.

그밖에 캐나다의 프릭스 오로라 상(Prix Aurora Awards)이나 일본의 성운상 같은 국가별 상, 태평양 북서부 오리콘에서 수여되는 엔데버 상 같은 지역별 상, 판타지 분야의 세계 판타지 상이나 미술 분야의 첼시 상처럼 하위장르에 수여되는 상들이 존재한다.

한국에는 과학기술 창작문예가 있었으나 곧 폐지됐고, 2014년 과천SF영화제의 일환으로서 SF 어워드가 시작됐다. 2016년에는 한국과학문학상이 생겼다.

컨벤션(팬덤에서는 주로 콘으로 줄여부름)은 세계 각지의 도시에서 열리는 지방, 지역, 국가, 국제 행사이다. 일반적인 컨벤션은 SF의 모든 측면을 다루지만, 미디어 팬덤이나 펄킹을 비롯한 몇몇은 특정한 분야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대부분 NGO의 자원봉사자들로 조직되지만, 미디어 지향적 이벤트들은 주로 상업적인 프로모터들로 조직된다. 컨벤션의 행사들은 프로그램으로 불리며, 이는 패널 토론회, 독서회, 사인회, 코스튬 무도회 등을 포함한다. 프로그램의 일환이 아닌 컨벤션 내내 지속되는 행사들로는 딜러의 방, 아트 쇼, 환영 라운지(콘 스위트룸) 등이 있다.

컨벤션엔 수상식이 포함될 수도 있다. 월드콘은 매년 휴고상을 수여한다. 형식적인 맥락에 집착하지 않는 클럽이라 불리는 SF 조직들은 SF팬들을 위한 연중 행사를 연다. 이것은 SF 컨벤션이나 정기 클럽 미팅과 연계될 때도 있다. 대부분의 모임은 도서관, 학교, 대학교, 커뮤니티 센터, 술집, 식당, 조직원의 집에서 열린다. 전통 있는 모임인 뉴잉글랜드 SF 협회, 로스 앤젤레스 SF 협회 등은 모임을 위한 클럽하우스와 컨벤션 자료와 연구 자료들이 보관된 창고를 보유하고 있다. 전문 SF 작가들을 위한 미국 SF판타지 작가 모임(SFWA)는 1965년 데이먼 나이트에 의해 비영리 단체로 설립됐다. 24년 후 데이먼 나이트의 에세이 단결 또는 저런!은 국립 판타지 팬 연합에 인계됐다. 팬덤은 미디어 팬덤, 창조적인 시대착오를 위한 모임, 게이머, 플리커, 퍼리 팬덤 등의 관련 그룹이 탄생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최초의 SF 팬진 《혜성》은 1930년에 출간됐다. 팬진의 출판 방식은 젤라틴판, 둥사판, 저두 기계에서 현대적인 복사 방식에 이르기까지 수십년에 걸쳐 변화했다. 유통과 배급은 가끔씩 상업 인쇄물의 가격을 결정한다. 현대 팬진은 컴퓨터 프린터나 지역 인쇄소, 혹은 이메일을 통해서 발행된다. 현재 가장 유명한 팬진은 데이빗 랭포드가 편집하는 《앤서블》이며, 해당 팬진은 여러 차례 휴고상을 수상했다. 최근 상을 받은 다른 팬진들로 《파일 770》, 《미모사》, 《플록타》가 있다. 브래드 W. 포스터, 테디 할비아, 조 메이휴처럼 팬진을 위해 일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이 업계에서 주목 받고 있으며, 휴고상은 최고의 팬 아티스트 항목을 신설했다. 가장 초창기에 조직된 온라인 팬덤은  커뮤니티이며, 이것은 본래 1970년대 후반 정기적으로 업데이트 되는 아카이브 파일을 받던 메일링 리스트에 기반한 것이다. 1980년대, 유즈넷 그룹이 온라인상에서 크게 확장했다. 1990년대, 월드 와이드 웹의 개발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말그대로 수천 수만개의 SF와 관련 장르, 매체를 다루는 웹사이트가 나타났다. 대부분의 사이트는 소규모에 짧게 지속됐으며, 좁은 분야에 집중했지만, SF 사이트처럼 광범위한 SF 관련 레퍼런스와 리뷰를 제공하는 사이트도 있었다.

애호가들 사이에선 주로 팬픽으로 불리는 팬 픽션은 기존의 책, 영화, 비디오 게임, TV 시리즈(드라마) 등의 설정을 바탕으로 창작되는 비영리적 픽션을 일컫는다. 이 현대적인 의미의 용어는 (1970년대 이전의) 전통적인 팬 픽션의 의미와 헷갈리기 쉽다. 본래 팬덤 커뮤니티내에서 팬 픽션이란 팬들이 창작해 팬진에 실은 (종종 팬들 자신을 작중 인물로 활용한) 오리지널, 패러디 픽션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 예로 1956년 아일랜드 팬 존 베리가 그와 아서 톰슨의 팬진인 《징벌》(Retribution)에 실은 군 디펙티브 에이전시(Goon Defective Agency) 이야기가 있다. 최근 몇년간, SF 우주간의 콜라보레이션을 지향하는 오리온의 팔, 갤럭시키 등의 사이트가 각광을 받고 있다. 어떤 경우엔 책, 영화, TV 시리즈의 저작권자가 그들의 변호사를 통해 팬들에게 중단 및 단념 권고를 통지하기도 한다.

중요한 로망스 작가로 여겨지는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비롯한 SF소설을 여럿 썼다. 《유년기의 끝》를 비롯한 많은 SF소설들이 비평적 호응을 이끌어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오웰의 《1984》, 버지스의 《시계태엽 오렌지》,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 등 주류 문학에서 존경받는 여러 작가들이 SF를 썼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레싱은 SF 시리즈 《아르고스의 카노푸스》를 썼고, 보니것이 쓴 대부분의 작품은 SF의 소재나 테마를 포함하고 있다.

학자 시피는 SF에서 끊임없이 논의되는 주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SF와 판타지의 관계란 무엇인가? SF 독자는 여전히 남자 청소년들이 지배적인가? SF는 성숙하지만 괴벽하지 않은 문학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취향인가? SF 작가 르귄은 그녀의 여러 차례 재판된 에세이 과학소설과 브라운 부인(Science Fiction and Mrs Brown)에서 이러한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영국 작가 울프의 에세이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르귄은 이러한 기준이 SF에도 성공적으로 적용된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에세이 초입부에 수사적으로 던진 SF 작가가 소설을 쓰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시피 는 그의 에세이에서 르귄의 주장에 반론하지는 않으나, SF 소설과 SF 분야 밖에서 쓰인 소설 간에 놓인 본질적 차이를 논의하고 확인한다. 이를 위해, 그는 오웰의 《숨쉬러 나가다》와 폴과 C. M. 콘블루스의 《우주 상인》을 비교하고, SF 소설의 기반과 특성은 노붐(다코 수빈이 블로흐에게서 가져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하지만 동시에 사실과 다르지 않은, (현재의 지식으로는) 확실하게 불가능하지 않은 정보의 개별 조각 이라고 정의한 용어)의 존재라고 결론짓는다.

한편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창자라 불리는 피들러는 1970년대부터 주류 문학과 SF를 구분하기가 황금기 시절 작가들이 주장하던 때처럼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해석학에서나 적절한 불모의 언어를 통해 학문적 해석을 하는 아카데미 학자들이 부적절하게도 엘리트 비평이론을 빌어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테면 하인라인, 아시모프, 특히 밴보트, 닥 스미스, 스테이플던 같은 작가들이 영문학계에서 종종 SF소설에 애착을 가진 학자들에게조차 부당하게 무시당하는 현실은 과학소설의 실패가 아니라 윤리적, 심미적인 엘리트비평이 평가의 잣대로 삼는 전통적 기준의 실패를 말하고 있다고 논한다.

SF는 고전적 문학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명확하고 직설적인 문장을 구사한다. SF와 비SF 소설을 모두 쓰는 작가 카드는, SF에서 작품의 메시지와 지적 의미는 이야기 내부에 포함되며, 따라서 문체의 기믹이나 문학적 게임이 있을 필요가 없다고 가정했다. 하지만 일부 작가들과 평론가들은 언어의 명확성을 예술성의 부족과 혼동한다는 것이다. 카드의 말을 인용하면,

판타지 작가 줄리엣 E. 매케나는 비슷한 견지에서 말하길,

SF 작가이자 물리학자인 벤퍼드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SF는 아마도, 비록 SF의 점령군이 여전히 문학의 성채, 로마 바깥에 야영하고 있더라도,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장르이다. 이러한 배제의 의미는 책 《빌리지 보이스》에 실린 조나단 레뎀의 에세이 근접 조우: 과학소설의 낭비된 약속을 통해 뚜렷이 지적됐다. 레뎀은 1973년, 네뷸러상에 핀천의 《중력의 무지개》가 노미네이트되고, 클라크의 《라마와의 랑데부》가 수상했을 때, SF가 주류와 융합될 수 있다는 희망의 죽음을 선언하는 숨겨진 묘비가 세워졌다.고 주장했다. 라고 되물었다. 이 시점에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데이비드 버넷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베넷은 그의 최근 에세이에서 이 끝없는 전쟁의 새로운 전개를 지적했다:




#Article 161: 원자 (1795 words)


원자(原子, atom)는 일상적인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이다. 일상적인 물질들이 원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는 화학 반응을 통해 더 쪼갤 수 없는 단위와 동의어이다. 모든 고체, 액체, 기체, 플라즈마가 전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자핵은 중성자와 양성자로 구성된다. 또 핵반응을 통해서는 더 작은 단위로 나뉜다. 원자와 혼동하기 쉬운 개념으로 '원소'를 들 수 있는데, 원자가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라고 한다면, 원소는 물질을 이루는 성분의 종류라고 하겠다. 한편, 여러 원자의 화학적 결합으로 이루어진 분자는 물질의 성질을 가지는 가장 작은 입자이다.

원자(原子)라는 용어는 우다가와 요안이 독일어 atom을 번역한 것이다. 이 독일어 atom은 고대 그리스어 a-tomos에서 온 것으로서 더 이상 나뉠 수 없는(a-: 부정, tomos: 쪼갬)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뜻과는 약간 달리 동양에서 쓰이는 원자(原子)라는 한자어는 물체의 근본이 되는 것이라는 현대 물리학적 해석에 준용하여 atom을 번역한 것이다.

atom이라는 낱말은 언어적으로 고대 그리스어에 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추상적 개념은 이미 기원전 5세기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쓴 것이다. 이러한 어원대로라면 당대에 알고 있는 가장 작은 기본 단위(현재는 쿼크와 렙톤)가 원자가 되어야 마땅하겠지만, 물리학과 화학에서는 이 항목의 정의에 따른다.

세상의 물질들이 작은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상은 고대 그리스와 인도에서부터 발견된다. 물론 이는 과학적 방법에 따른 결과가 아닌, 사상적 철학적 논증의 결과 나타난 사상의 한 갈래이다.

존 돌턴은 1803년에 과학자들의 실험 결과를 분석하여 화합물이 만들어질 때 필요한 원소의 질량비가 간단한 정수비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배수 비례의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다. 이에 따라 물질들이 기본적인 질량단위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돌턴은 논문에서 세 종류의 화학반응을 예로 들었다. 첫 번째 예시는 산화 주석이다. 검은 가루(SnO)는 주석 88.1%와 산소 11.9%로 이루어져 있고, 흰 가루(SnO2)는 주석 78.7%와 산소 21.3%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질량비로 나타내면 검은 가루는 주석 100g에 산소 13.5g이고, 흰 가루는 주석 100g에 산소 27g이다. 이 때 필요한 산소의 질량인 13.5와 27은 1:2의 정수비를 가진다. 실제로 각 산화물은 주석 1개당 산소 1개 혹은 2개를 가져간다.

두 번째 예시는 산화 철이다. 검은 가루는 78.1%의 철과 21.9%의 산소, 빨간 가루는 70.4%의 철과 29.6%의 산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질량비로 나타내면 검은 가루는 철 100g에 산소 28g이고, 붉은 가루는 철 100g에 산소 42g이다. 이 때 필요한 산소의 질량인 28과 42은 2:3의 정수비를 가진다. 실제로 각 산화물은 철 2개당 산소 2개 혹은 3개를 가져간다.

마지막으로 돌턴은 질소 산화물을 예시로 든다. 아산화 질소는 63.3%의 질소와 36.7%의 산소로, 일산화 질소는 44.05%의 질소와 55.95%의 산소로, 이산화 질소는 29.5%의 질소와 70.5%의 산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곧 각각 140g의 질소마다 80g의 산소, 160g의 산소, 320g의 산소가 필요하다는 의미인데, 이 필요한 산소의 질량비는 1:2:4의 비율을 이룬다.

원자로 이루어진 음극 판에서 음극선이 방출되므로, 원자가 쪼개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녕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1907년에 톰슨은 양전하를 가지는 물체에 음전하를 가지는 전자가 빵 속의 건포도처럼 박혀있는 원자모형을 제시한다.

위의 음극선 실험으로 톰슨은 음전하를 띄는 전자라는 입자가 양전하를 띄는 푸딩 안에 박혀있는 형태의 원자를 제안하게 된다. 이 모형은 푸딩 모형이라고도 불린다.

영국의 과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와 그 제자인 한스 가이거, 어니스트 마스덴은 알파 입자의 비전하를 측정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입자가 측정기구 내부의 공기중에서 산란되는 현상이 계속 발생하고, 결국 실험을 진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차가 쌓인다. 톰슨도 음극선을 사용해 실험을 계속 진행하며 같은 현상을 마주했는데, 톰슨은 실험기구 내부를 진공으로 만들어 이를 해결했다. 그러나 러더퍼드는 전자보다 수천배 이상 더 무거운 알파 입자를 가지고 실험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톰슨처럼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톰슨의 원자 모형에 의하면, 양전하는 원자 내부 어딘가에 뭉쳐있는 것이 아니라 원자 전체에 균질하게 퍼져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충분한 크기의 전기장을 형성하지 못할 텐데, 알파 입자가 산란되는 현상이 계속 발생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러더퍼드와 제자들은 이 산란을 주제로 연구를 시작한다.

러더퍼드는 1908년부터 1913년까지 무려 5년의 시간동안 알파입자를 얇은 금박에 쏘는 실험을 진행한다. 대부분의 알파입자는 금박을 통과했지만, 90° 이상 산란되어 튕겨 나오는 알파입자도 관측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러더퍼드는 원자 내에 양전하가 한 군데 모여있으며, 그 위치는 원자의 중심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논증한다. 이 때 제안된 원자모형은 행성모형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은 원자의 흡수 방출 스펙트럼을 설명할 수 없었고, 전자가 가속운동할 때 전자기파를 방사하는 싱크로트론 방사로 인해 운동에너지를 잃어버려야 하지만, 실제 원자가 물리적으로 안정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1913년 덴마크의 과학자 닐스 보어는 전자가 각기 다른 에너지를 가지는 층에 존재한다는 양자화된 궤도 개념을 도입하여 가설을 세우고 이에 근거한 원자모형을 제시했다. 이 모형에서 전자는 광자를 흡수 또는 방출하면서 각 궤도 사이를 오갈 수 있다. 이처럼 양자화된 궤도 개념을 통해 전자궤도의 안정성, 불연속적인 흡수 방출 스펙트럼을 설명할 수 있었다.

같은 해 말엽, 헨리 모즐리는 보어 모형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실험 결과를 얻는다. 또한 이 실험은 어니스트 러더포드와 안토니우스 반 덴 브룩의 가설, 즉 원자는 원자번호 갯수만큼의 핵전하를 띌 것이라는 가설을 검증한다. 이로써 원자 번호가 물리적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원자간 화학 결합은 1916년에 길버트 뉴턴 루이스에 의해 설명된다. 루이스는 이 원자들이 전자를 공유함으로써 화학 결합이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또 1919년에는 미국의 화학자 어빙 랭뮤어는 원소의 화학적 성질이 주기율표를 따라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이유는 한 원자 안에 있는 전자들이 물리적으로 긴밀하게 상호작용하여 하나의 집단을 이루기 때문임을 논증한다. 보어의 모형은 전자껍질이라는 개념을 통해 랭뮤어의 전자집단론이 맞았음을 보이고 있다.

이후 슈뢰딩거에 의해 더 완벽하고 정확한 원자모형이 제시되긴 하지만, 보어 모형은 당시까지 밝혀진 원자의 성질들을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최초의 완전한 원자모형이었다. 다만 수소가 아닌 다른 원자들의 선스펙트럼을 설명하지 못하고, 등속 원운동을 할 때 라모 공식을 따르자면 광자가 방출되어야 한다는 오류를 검증되지 않는 가정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등의 문제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더 나은 모형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입자를 파동으로 해석함으로써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밀하게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자연스레 유도되었다. 이처럼 원자를 파동으로 해석함으로써 기존의 보어 모형으로서는 설명될 수 없었던 원소들의 선 스펙트럼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또한 실제 관측결과도 잘 부합하는 터라 행성모형은 폐기되고, 원자 오비탈의 개념이 채택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에 독일의 과학자 보른은 슈뢰딩거 방정식이 전자의 파동함수가 아니라 전자가 존재할 확률함수라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확률적 해석을 바탕으로 원자 주위에서 전자를 발견할 확률을 계산하여 확률의 분포를 점으로 찍어 구름처럼 표시하는 현대의 원자모형이 탄생하였다.

질량 분석기의 발달로 인해 원자의 질량을 더욱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랜시스 윌리엄 애스턴은 이 기구를 통해 동위원소들이 서로 다른 질량을 가지며, 원자 질량이 일정 정수비를 가진다는 정수율을 발견했다. 이러한 현상은 1932년에 제임스 채드윅이 양성자와 비슷한 질량을 가지지만 전하를 띄지 않는 입자인 중성자를 발견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이로써 동위원소란 같은 수의 양성자를 가지나 다른 수의 중성자를 가지는 종류의 입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러더퍼드의 제자이자 독일의 화학자인 오토 한은 초우라늄 원소를 만들고자 중성자를 우라늄 원자에 충돌시켰으나, 예상과는 다르게 우라늄보다 더 가벼운 원소인 바륨이 생성되었다. 이듬해 리제 마이트너와 그녀의 조카인 오토 프리슈는 한이 수행한 실험이 핵분열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아낸다. 1944년, 한은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다. 한은 마이트너와 프리슈에게도 공을 돌리고자 했으나 아쉽게도 오직 한만이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전자는 음의 전하를 띄며, 매우 작아 현대의 기술로 형태를 관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로 위의 세 아원자 입자들 중 가장 가벼워서 모든 입자들 중 가장 가벼울 것으로 여겨졌으나, 더 가벼운 중성미자가 발견되었다. 일반적으로 양의 전하를 띄는 원자핵 주변에 전자기력으로 포착되어 존재한다. 만일 원자가 가지고 있는 전자의 갯수가 원자번호와 다르다면 원자 자체가 전하를 띄게 되는데 이를 이온이라고 부른다. 조지프 존 톰슨이 1897년에 처음을 발견하였다.

양성자는 양의 전하를 띄며, 전자보다 1,836배 더 무거운 의 질량을 가진다. 원자가 가지고 있는 양성자의 갯수는 원자 번호와 동일하다.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1919년에 질소 원자를 알파 입자와 충돌시키는 실험에서 처음으로 관측하였다. 1886년에 수소의 원자핵으로 처음 발견되었으나 이 실험으로 인해 원자의 일반적인 구성성분임이 널리 인정받아 러더퍼드가 양성자라는 이름을 새로 붙이게 된다.

중성자는 전하를 띄지 않고 전자보다 1,839배 더 무거운의 질량을 가진다. 이 세 종류의 입자들 중 가장 무겁지만 핵결합에너지 때문에 실제 질량은 이보다 작다. 양성자와 함께 핵자라고도 불리는데, 둘 다 의 비슷한 크기를 가지지만 둘 다 어떤 특정한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1932년에 제임스 채드윅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표준 모형에서는 전자를 기본 입자로 보는 반면, 양성자와 중성자는 쿼크로 이루어진 합성 입자로 본다. 원자에는 두 종류의 쿼크가 있는데, 양성자는 + 전하를 가지는 위 쿼크 2개와 − 전하를 가지는 아래 쿼크로 한 개로 이루어진다. 중성자는 두 개의 아래 쿼크와 하나의 위 쿼크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전하와 질량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쿼크들은 글루온이 매개하는 강한 상호작용으로 서로 묶여있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서로 핵력으로 붙잡고 있는 형태이다. 글루온은 게이지 보손중 하나로 쿼크와 마찬가지로 기본 입자이고, 힘의 매개자로 작용한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가 강한 상호작용으로 결합해 있다. 이들 양성자와 중성자의 개수에 따라 원자를 주기율표로 분류할 수 있으며 화학적인 성질이 결정된다. 이 결합을 바꾸면 아주 강한 힘이 나온다.

원자 내의 양성자와 중성자들은 결합하여 원자핵을 만들고, 이러한 성질로 인해 핵자라는 명칭으로 따로 구분되기도 한다. 원자핵의 반지름은 를 원자의 핵자 수라고 했을 때 대략  펨토미터로 근사된다. 핵자들은 굉장히 짧은 거리에 작용하는 힘인 핵력으로 서로 결합되어있는데, 2.5 펨토미터까지는 이 힘이 정전기력보다 강하기 때문에 양성자들이 서로 밀어내는 힘보다 끌어당기는 힘이 더 강하여 서로 결합될 수 있다.

같은 원소에 속하는 원자들은 같은 갯수의 양성자를 가지는데, 이 갯수를 원자 번호라 한다. 양성자와는 달리 같은 종류의 원자끼리도 서로 다른 갯수의 중성자를 지닐 수 있다. 이처럼 양성자의 수는 같으나 중성자의 수는 다른 원자들의 관계를 동위원소라 하고, 더 세분화하여 핵종을 여러 가지로 나누기도 한다.

양성자 수와 중성자 수가 다른 원자들은 쉽게 방사성 붕괴를 일으킨다. 그러나 원자 번호가 커져서 양성자의 갯수가 많아질수록 원자핵의 안정에 필요한 중성자의 갯수가 늘어나게 된다. 따라서 양성자 수에 대한 중성자 수의 비율은 방사성 동위 원소 원자핵의 안정성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전자, 양성자, 중성자는 모두 파울리 배타 원리를 따르는 페르미온이다. 그러므로 양자적으로 동일한 상태의 입자가 동시에 두 개 이상 존재할 수 없다.

매우 높은 에너지를 통해 원자핵의 양성자나 중성자 갯수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런 기술로 여러개의 원자를 강하게 충돌시켜 무거운 원자핵을 합성하는 핵융합이 가장 대표적이다. 핵융합을 위해서는 쿨롱 장벽을 뛰어넘을 만큼 높은 에너지가 필요한데, 태양의 중심에서 충분한 에너지의 공급을 통해 핵융합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음이 알려져 있다. 이와는 반대로 큰 원자핵을 두 개 이상의 작은 원자핵으로 나누는 과정인 핵분열도 있다. 이 핵분열은 고에너지의 아원자 입자나 광자를 원자핵에 충돌시킴으로써 유도할 수 있다.

핵융합 후의 원자핵은 그 재료들의 원자핵의 질량의 합보다 더 작은 질량을 가진다. 이 질량의 차이만큼의 에너지는 감마선과 베타 입자로 빠져나가게 되는데, 이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 등가 공식 를 따라 감소한 질량 이 빛의 속력 를 두 번 곱한 만큼의 에너지가 방출된다.

원자 내의 전자들은 핵의 양성자에 의해 전자기력으로 포섭되어 있다. 에너지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자는 원자핵을 둘러싼 정전기적 퍼텐셜 우물에 둘러쌓여 있어서, 이를 탈출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에너지가 추가로 필요한 상태이다. 핵에 더 가까이 위치한 전자일수록 더 강한 인력이 작용하게 되고, 결국 원자 중심에 가까울 수록 전자가 탈출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가 더 많이 필요한 것이다.

전자는 다른 입자들과 마찬가지로 파동-입자 이중성을 가진다. 전자 구름이란 퍼텐셜 우물 내에 형성된 정상파로서 전자가 분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형태는 전자가 각 위치에 존재할 확률을 계산함으로써 유추할 수 있는데, 이를 원자 궤도 또는 오비탈이라고 부른다. 오비탈들은 크기나 형태, 방향에 있어서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또한 각각 다른 에너지 준위를 가지고 있고 양자화되어있어서, 충분한 에너지를 가진 광자를 흡수한다면 더 높은 에너지 준위의 오비탈로 전자가 이동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너무 높은 에너지의 광자가 조사된다면 자연방출을 통해 광자를 방출하면서 오히려 더 낮은 에너지의 오비탈로 전자가 이동할 수도 있다. 각 오비탈간 에너지 차이는 선스펙트럼을 관찰하여 알아낼 수 있다.

전자를 떼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인 이온화 에너지는 핵자를 뗄 때 필요한 에너지보다 많이 작다. 일례로, 정상상태의 수소 원자에서 전자를 떼어내려면 13.6 eV가 필요하지만, 중수소의 원자핵을 쪼개기 위해서는 2.23 MeV가 필요하다. 원자핵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전자는 근처의 원자로 이동하거나, 아니면 여러 개의 원자핵에 동시에 포섭될 수 있다. 분자가 바로 이러한 형태의 화학 결합으로 형성된다. 공유 결합으로 형성된 결정이나 이온 결정같은 경우는 이처럼 단순하게 분석할 수 없다.

원자 단위의 물리학은 원자 광학과 나노 과학에서 이루어진다. 이들 실험은 원자를 옮기고 운동 속도를 조정하며 이루어진다. 원자보다 더 작은 원자핵의 물리학은 핵물리학과 입자물리학의 주제가 된다.




#Article 162: 극좌표계 (806 words)


극좌표계(極座標系, )는 평면 위의 위치를 각도와 거리를 써서 나타내는 2차원 좌표계이다. 극좌표계는 두 점 사이의 관계가 각이나 거리로 쉽게 표현되는 경우에 가장 유용하다. 직교 좌표계에서는 삼각함수로 복잡하게 나타나는 관계가 극좌표계에서는 간단하게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2차원 좌표계이기 때문에 극좌표는 반지름 성분과 각 성분의 두 성분으로 결정되며 주로 로 나타내는 반지름 성분은 극(데카르트 좌표에서 원점)에서의 거리를 나타낸다. 주로 로 나타내는 각 성분은 0°(직교 좌표계에서 x축의 양의 방향에 해당)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잰 각의 크기를 나타낸다.

각과 반지름의 개념은 이미 기원전에 사용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히파르코스(기원전 190 ~ 120년)가 여러 각마다 현의 길이를 나타내는 표를 만들었는데, 그가 항성의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 극좌표를 사용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아르키메데스가 묘사한 아르키메데스 나선은 반지름 성분이 각에 따라 변하는 함수로 주어진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은 완성된 좌표계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극좌표를 정식 좌표계로 도입한 예는 여러 번 있었다. 이에 대한 역사는 하버드 대학교 교수인 줄리언 로웰 쿨리지의 《극좌표의 근원》에 서술되어 있다. 17세기 중반에 그레구아르 생뱅상과 보나벤투라 카발리에리는 독립적으로 극좌표의 개념을 발표하였다. 생뱅상은 1625년에 작성해 1647년에 출판하였으며, 카발리에리는 1635년에 출판하였으며, 개정판은 1653년에 나왔다. 카발리에리는 아르키메데스 나선의 넓이를 구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 극좌표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블레즈 파스칼은 포물선의 길이를 계산하기 위해 극좌표를 사용하였다.

아이작 뉴턴은 《유율법》(Method of Fluxions, 1671년 작성, 1736년 출판)에서 “일곱 번째 방법: 나선에 대하여”로 표현한 극좌표와 다른 아홉 가지 좌표계 사이의 변환을 분석하였다. 야코프 베르누이는 학술지 《Acta Eruditorum》(1691년)에서 점과 선을 이용한 좌표계를 사용하고 각각을 극과 극축이라 불렀다. 좌표는 극에서의 거리와 극축에서의 각으로 정의하였다. 베르누이의 연구는 곡선의 곡률반지름을 찾는 데까지 확장되었다.

극좌표계의 점은 반지름(r)과 각(θ)로 표현된다. r은 극에서의 거리를 의미하고, θ는 0°(직교 좌표계의 x축 양의 방향에 해당)에서의 각도를 의미한다. 만약 r이 음의 값을 갖는다면, θ가 가리키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거리 |r|만큼 떨어진 점을 뜻한다.

예를 들어, 극좌표 (3, 60°)는 극에서 60° 방향으로 3단위만큼 떨어진 곳을 나타낸다. 극좌표 (3, -300°)도 같은 위치에 그려진다.

데카르트 좌표와는 달리 극좌표에서는 하나의 점을 나타내는 방법이 무한히 많다. 여러 바퀴를 돌아 제자리에 돌아와도 위치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r, θ)는

로 표현될 수 있다(n은 임의의 정수).

(0, θ)는 일반적으로 극을 뜻하며, 반지름이 0이기 때문에 어떠한 각이든 상관이 없다. 점을 나타내는 방법을 하나로 제한할 때에는 r은 양수로, θ는 구간 [0, 360°) 또는 (−180°, 180°](라디안으로는 [0, 2π) 또는 (−π, π])의 수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극좌표의 각은 라디안을 이용한 호도법으로도 표현할 수 있으며(2π rad = 360°), 이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항행에서는 60분법으로 각을 나타내며, 물리 분야(특히 회전 역학)와 거의 모든 미적분에서는 호도법이 쓰인다.

r와 θ는 삼각함수를 이용해 데카르트 좌표의 x와 y로 변환할 수 있다.

데카르트 좌표의 x와 y는 극좌표의 r로 변환할 수 있다.

θ를 정의할 때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0, 2π)에 한정할 때는 다음과 같은 함수가 사용된다. (는 의 역함수이다.)

(−π, π]에 한정할 때는 다음과 같은 함수가 사용된다.

극좌표를 이용하여 곡선을 나타내는 방정식을 극좌표 방정식 또는 극방정식이라고 한다. 보통은 r 를 θ 에 관한 함수로 정의한다. 곡선 위의 점은 로 정의되며 함수 r 의 그래프로 생각할 수 있다.

극좌표 방정식 r(θ)의 형태로부터 대칭성을 추론할 수 있다. 만약 r(−θ) = r(θ) 이라면 곡선은 수평 반경(0° / 180°)에 대하여 대칭이 되며, r(π−θ) = r(θ)이라면 수직 반경(90° / 270°)에 대하여 대칭이 되며, r(α−θ) = r(θ)일 때는 α/2만큼 반시계 방향으로 돌린 곳에서 대칭이 된다.

극좌표계의 성질 덕에 많은 곡선이 간단한 극좌표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이에 반해 데카르트 좌표로 표현되려면 난해한 곡선이 많이 있다. 극좌표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곡선은 극좌 장미 곡선, 아르키메데스 나선, 달팽이꼴 곡선, 심장형 등이 있다.

아래에 서술된 내용에는 정의역과 치역의 범위의 제한은 없다.

원의 중심이 (r 0, φ)이며 반지름이 a인 원의 일반적인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위의 방정식은 상황에 따라 여러 방법으로 단순화될 수 있다.

극을 통과하는 선은 다음과 같은 방정식으로 표현된다.

위의 방정식에서 φ는 극을 통과하는 선의 기울기를 각도로 표현한 것이며(φ = arctan m), m은 데카르트 좌표에서의 기울기이다. 직선 θ = φ에 수직이면서 점 (r 0,φ)를 지나는 직선은 로 나타낼 수 있다.

수학에서 장미 곡선은 꽃잎을 지닌 꽃처럼 보이는 유명한 곡선이며, 다음과 같은 간단한 극좌표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k가 홀수일 때는 k개의 꽃잎을 지니며, k가 짝수일 때는 2k개의 꽃잎을 지닌다. k가 정수가 아닐 때에는 꽃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이때는 꽃잎이 겹쳐 보이게 된다. 즉, 4n + 2개의 꽃잎을 지닌 장미 곡선을 그릴 수는 없다. 변수 a는 꽃잎의 길이를 의미한다.

아르키메데스 나선은 아르키메데스가 발견한 나선이며, 다음과 같은 간단한 극좌표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매개변수 a는 나선의 위치를 돌려 놓으며, b는 나선 사이의 폭을 조정한다. r(θ) = bθ일 경우, 각이 θ  0일 때와 θ  1일 때 이 방정식은 쌍곡선이 되며, e = 1일 때는 포물선이 되고, e  1일 때는 타원이 된다. e = 0일 때는 반지름 인 원이 그려진다.

모든 복소수는 복소평면 위의 점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직교 좌표계와 극좌표계의 방식으로 모두 표현 가능하다. 복소수 z는 다음과 같이 직교 좌표계의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는 허수 단위이다. 이 식은 아래와 같이 극좌표계로 나타낼 수 있다. 이를 복소수의 극형식이라 한다.

자연로그의 밑 e를 이용하면 다음처럼 나타낼 수 있다.

이는 오일러의 공식으로 표현된 것과 같다(이러한 공식은 각 θ의 단위가 라디안일 때에만 성립된다). 복소수의 직교 형식과 극형식 사이의 변환은 위에서 서술한 변환 공식을 사용하면 된다.

복소수의 곱셈, 나눗셈, 거듭제곱 연산을 할 때에는 직교 좌표계보다는 극좌표계로 표현하는 것이 계산이 더 간편하다. 지수 법칙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성질이 성립한다.




#Article 163: 덩샤오핑 (1482 words)


덩샤오핑(, 1904년 8월 22일 ~ 1997년 2월 19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3대 최고지도자이다. 1978년부터 1983년까지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1981년부터 1989년까지는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역임했다. 소위 중국 공산당 당료 2세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이래 1929년 제7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4년 대장정에 참여하였다. 1945년 공산당 중앙위원이 된 후, 정무원 부총리, 재정 부장, 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서기처 총서기, 중소 회담 중공측 대표단장 등을 역임했다. 1968년 문화 대혁명 때 박해를 받기 시작한 이래, 여러 번 마오쩌둥의 박해를 받기도 했지만 기적적으로 복귀, 중화인민지원군 총참모장,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등을 지냈고 1981년 6월 28일부터 1989년 11월 7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최고권력자로 군림하는 한편, 1982년 6월 28일부터 1983년 3월 15일까지는 중공 과도정부 국가원수 권한대행직에 있었으며 1983년 3월 15일부터 1983년 6월 18일까지 후야오방(胡耀邦)이 마지막 후임 중공 과도정부 국가원수 권한대행직(당시 중공 국가부주석: 우란푸)을 수행하였고 1983년 6월 18일을 기하여 8년 5개월 남짓의 중공 과도정부 체제(1975년 1월 17일~1983년 6월 18일)가 종식되었으며 1983년 6월 18일, 리셴녠(李先念)이 정식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취임하였다.

오랜 정치 경력을 거치며, 권력을 다졌으며,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경제정책은 을 통한 실용주의 노선을 추진하고, 정치는 기존의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정경분리의 정책을 통해 덩샤오핑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중국식 사회주의인 덩샤오핑 이론을 창시했다.

덩샤오핑은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았으며 충칭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다 근공검학(근면하게 일하고 검약해서 공부한다) 곧 해외유학을 만난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진 프랑스와 서구문물을 배우려는 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1,500명의 중국사람들이 프랑스에서 공부하였다. 이들은 중국 혁명의 지도자가 되었다. 덩샤오핑도 1920년 상하이에서 마르세유로 가는 배를 타고 프랑스에 갔다. 유학생일 때에 덩샤오핑은 파리의 르노자동차 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를 배웠다. 1924년 중국 공산주의 청년동맹 유럽지부에 들어갔으며, 기관지인 적광(赤光,붉은 태양)을 만들었다. 저우언라이를 만난 때이기도 한데, 저우언라이는 자신보다 여섯살 어린 덩샤오핑을 아꼈으며, 덩샤오핑도 저우언라이를 큰형님으로 따랐다.

덩샤오핑은 유학을 마치고 중국 공산당 당원으로서 혁명에 참여했다. 1933년 중국 공산당에서는 소련파와 마오파의 당권경쟁이 치열했는데, 마오쩌둥이 지면서 덩샤오핑도 실각했다. 하지만 소련파의 이론은 중국에 맞지않았다. 소련파는 도시 노동자계급이 혁명의 중심이라면서 도시 무장투쟁을 시도했으나, 도시 노동자 계급이 없는 중국에서는 실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의 대부분이 농민이라며 농민소비에트를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이 맞다는 것이 입증되자, 1935년 대장정 도중에 열린 회의에서 마오쩌둥의 이론(마오이즘)이 인정되었다.

그는 세 번의 결혼을 했다. 첫 번째 아내는 장 시유안으로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에 있을 때 함께 공부한 동료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그의 첫아이를 낳고 며칠 뒤인 24살 때 죽었다. 그 아이 또한 아기 때에 죽었다. 두 번째 아내인 진웨이잉은 그가 1933년에 정치적인 공격을 받게 된 직후 그를 떠났다. 세 번째 아내인 줘린은 윈난성의 한 실업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1938년에 공산당의 당원이 되었고, 그 이듬해 야난에 있는 마오쩌둥의 동굴 앞에서 덩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5명의 자식을 두었다(2남 3녀).

덩샤오핑 서기장은 젊은 시절에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으며, 르노에서 트랙터를 만드는 금속 노동자로 살았다.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금속 노동 경험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유지되는지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학생시절 중국 공산당(CCP)에 가입한다. 그는 장정의 베테랑이었으며 마오쩌둥(모택동)의 오랜 전우였다. 마오쩌둥은 혁명 직후 그를 공산당의 비서장으로 임명한다.

류사오치와 그는 최종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마오쩌둥을 명목상의 지도자로 앉히려는 계획을 세웠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을 때, 공산주의 사상을 존중하되 중국의 현실에 맞게 해석하는 합리적인 생각에 근거한 경제개혁이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당 조직과 전체 인민들 사이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 당시 마오쩌둥은 자신이 권력에서 소외될까 염려하고 있었다.

권력의 누수를 걱정한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유발시켰고, 이 시기에 덩샤오핑은 실각하여 당직에서 은퇴한다. 1974년 복귀하고 1975년에는 중화인민지원군의 총참모장에 내정되지만 재차 1976년에 고초를 겪었다. 당시 그가 겪은 가장 큰 슬픔은 홍위병에 쫓겨다니던 큰아들 덩푸팡(1944년-)이 베이징대학교에서의 추락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지체장애인이 된 것이었다. 덩푸팡은 1984년 장애인복지기금,1988년 장애인연합회,1999년엔 지적장애인의 자활을 돕는 단체등의 장애인 인권단체들을 만드는 등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하고 있다. 그 해 마오쩌둥의 사망으로 복직한다. 여러번 숙청당했다가 기적적으로 복귀를 반복하여 그에게는 오뚜기 또는 부도옹이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이후 마오쩌둥에게 사적인 원한을 품지 않고 그에게는 '공이 7이요 과는 3이다'라고 냉정한 평가를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6년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마오쩌둥의 직계는 물론 자신에게 잠재적인 정적이 될 만한 세력의 숙청을 감행한다.

의지가 굳고 매우 지적이었던 농부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체구가 극히 작고 늙어가는 그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의 지도자로서 비공식적이긴 했지만 거대한 인물로 부상하였다. 사실 그는 중국을 이끈 농부 출신의 몇 안되는 혁명가 중의 하나였다. 그 몇 중에는 마오쩌둥과 한나라의 고조와 명나라의 태조가 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점을 유난히 강조하였다.

중국 공산당 내에 있는 그의 지지자들을 조심스럽게 선동하여,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화궈펑을 교묘하게 따돌릴 수 있었다. 덩샤오핑 자신을 사면해 준 화궈펑을 권력으로부터 축출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권력 변동 때와는 달리, 아직도 화궈펑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고위직으로부터 물러나있었지만 신체적으로는 해를 당하지 않았다.

이 시기부터 그는 두 가지 결정으로 인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한 가지는 문화혁명에 대한 재평가였다. 그는 그 시기에 벌여졌던 극단적인 행위와 이로 인한 고통에 대해서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또 하나는 출신성분제도를 혁파한 것이었다. 그 출신성분제도는 공산 혁명시기에 있었던 조상의 행위를 근거로 전 중국을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누어 버렸다. 이 제도 아래에서는 지주 계급은 제도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두 행동은 그가 그의 정적을 따돌리기 위한 주요 전략 중의 일부였다고 믿고 있다. 문화혁명에 대한 대중의 비판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그 사건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있던 사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그 시기에 고통받았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그가 중국 공산당에 대한 통제력을 서서히 재장악하면서 화궈펑은 수상에서 물러나고 자오쯔양(조자양)이 그 자리에 교체되었고, 후야오방(호요방)이 당의장이 되었다. 그의 공식 직함은 비록 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의장이었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그는 중국의 지도자중에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이었다.

본래 실제 권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상과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손에 있지만, 주석은 국가를 대표하는 역할을 감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상과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별도의 사람이 맡기로 되어 있었다. 본래의 계획에는 당에서는 정책을 개발하고 정부에서는 수행하도록 하여, 마오쩌둥이 했던 것처럼 권력이 개인의 취향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분립되도록 했다.

덩샤오핑이 권력에 있을 때, 서방과의 관계가 확연히 증진되었다. 덩샤오핑은 해외순방을 했고, 서방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만남을 가졌다. 1979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백악관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과 만났다. 카터 대통령은 마침내 UN의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정식 공인했다.

그 뒤 1983년 국가 주석직이 부활하여 리셴녠에게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직책을 본격적으로 넘겼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위원회와 당 군사위원회의 주석직을 그가 차지하므로써 1983년 6월 18일을 기하여 실권을 회복하는 등 아직도 실권은 그가 쥐고 있었다.

덩샤오핑이 이루어 낸 것들 중의 또 하나는 1984년 12월 19일 영국과 중국 간에 체결한 중영 공동 선언이다. 이 조약에 따라서 홍콩이 1997년 7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되었다. 99년 동안의 조차를 마치는 홍콩에 대하여 덩샤오핑은 향후 50년 간 홍콩의 자본주의 체제를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1국 2체제라고 불리며 이러한 접근방법은 중국 재통일의 근거로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소비에트 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덩샤오핑의 개혁의 목표는 4대 현대화에 요약되어 있는데, 농업의 현대화, 공업의 현대화, 국방의 현대화, 과학기술의 현대화이다. 현대화되고 산업화된 국가가 되는 목표를 성취하려는 이 전략이 공산주의 시장경제다.

덩샤오핑은 중국은 공산주의의 초기단계에 있고 당의 의무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의 해석은 경제 정책 결정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감소시켰다. 마르크스-레닌주의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가치관의 우선 순위를 하향 조정하여 덩샤오핑은 어떤 정책이 단순히 마오쩌둥이나 더 보수적인 진연과 관계가 없다고 해서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덩사오핑은 자본주의 국가의 정책과 비슷하다고 해서 어떤 정책을 반대하지 않았다.

덩샤오핑이 경제 개혁이 일어나도록 하는 이론적인 배경과 정치적 지원을 제공했지만, 덩샤오핑 본인으로부터 나온 경제 개혁은 거의 없었다. 일반적으로 개혁은 지역 지도자들로부터 들여왔는데, 이러한 것들은 종종 중앙 정부의 지도방향과 충돌하곤 하였다. 이러한 개혁이 성공적이었고 유망하다고 밝혀지면 대규모로 여러 분야에 채택되었고 종국에는 국가 전체에 도입되었다. 많은 개혁들이 동아시아의 호랑이들이 경험한 것들이었다.

이것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한 페레스트로이카의 패턴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한 페레스트로이카는 대부분의 개혁들이 고르바초프 자신에 의하여 제안되었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페레스트로이카의 하향식 접근과 대조되는 덩샤오핑의 개혁은 상향식 개혁이 성공의 열쇠였다고 이야기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덩샤오핑의 개혁은 기술적으로 숙련된 관료들에 의하여 계획된 중앙 집중적 대규모 경제 제도를 소개하였다. 이것은 마오쩌둥의 대중 선동적인 경제 건설 방식을 버린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의 모델이나 마오쩌둥의 모델과 다르게 시장 경제를 통한 간접적인 관리 방식이었고, 이 방법은 대부분 서구 국가의 경제 계획과 조정 매커니즘을 본 딴 것이었다.

경제를 개혁하고 개방하면서, 덩샤오핑은 그 절차를 정형화하여 공산당의 힘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덩샤오핑의 후속 행보는 지도부가 본래 의도했던 것보다 더 큰 권력을 갖도록 야기했다. 1989년에 양상쿤 주석은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의장인 덩샤오핑과 협력하여 주석의 명의로 1989년 천안문 사태를 진압하도록 베이징에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과 당의 다른 원로들에게 발탁된 촉망받는 후계자였고, 당 서기 자오쯔양을 대신할 인물로 뽑혔다. 장쩌민은 학생 시위대에게 온건하다고 평가되었다. 톈안먼 사건과는 직접적으로는 관련되지 않았지만, 장쩌민은 텐안문 사건 이후에 상하이에서 비슷한 시위를 예방하기 위한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중앙위원으로 승진되었다.

덩샤오핑은 1997년 2월 19일 장쩌민을 권력의 중심에 올려 놓은 후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향년 93세.

언론인 짐 로워는 덩샤오핑의 1979년에서부터 1994년의 개혁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인류 복지 향상의 가장 큰 향상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언급한 것과 같이 덩샤오핑의 정책은 공산주의 틀안에서 외국 자본에 경제를 개방하였고 시장을 개방하였다. 그는 저우언라이의 유언과 같이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라고 유언하였으며, 실제로 그의 유해는 홍콩 앞바다에 뿌려졌다. 화장 정책을 추진한 중국 정부답게, 시민들에게 솔선수범을 보이기 위하여 그렇게 유언했다. 죽고 난 뒤 장쩌민의 지도아래 중국은 연평균 8%의 GDP 성장을 계속 했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국민소득 성장률을 기록했다. 천안문 사태를 불러 일으켰던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개혁 절차가 제도화되고 농민혁명가에서 교육을 잘 받은 전문기술인으로 세대 교체가 이루어져서 정치 제도는 안정되었다. 사회문제도 중국본토가 매년 빠르게 현대화되고 번영하게 됨에 따라 개선이 되었다.

하지만 덩샤오핑의 개혁은 몇 가지의 남겨진 과제를 가지고 있다. 시장개혁의 결과로 1990년대 중반에는 중앙정부소유의 국영기업들이 부실화되었고, 그들이 이윤을 내지 못하고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그들은 정리될 필요가 있다.

마침내, 공산당의 지배를 유지하면서도 마오쩌둥의 공산주의적 가치보다 실용주의가 더 낫다는 것을 확증시키는 덩샤오핑주의는 서양에 많은 질문들을 생겨나게 했다. 중국과 그 밖의 여러 관찰자들은 더 역동적이고 풍성해지는 중국 사회를 하나의 당이 어느 정도까지 통제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Article 164: 10월 (202 words)


단,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04년, 2032년) 및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1982년, 1993년, 1999년, 2010년, 2021년, 2027년, 2038년)일 경우에는 10월의 공휴일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고,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20년, 2048년) 및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1981년, 1987년, 2015년, 2026년, 2037년)일 경우에는 한글날만 공휴일이며,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1988년, 2016년) 및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1983년, 1994년, 2005년, 2011년, 2022년, 2033년, 2039년)일 경우에는 개천절만 공휴일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추석이 있는 해도 있다. 이런 경우는 모두 음력 7월 이전에 윤달을 끼고, 이 가운데에는 9월 30일이 추석 당일인 경우 혹은 대체휴일이 적용된 경우도 포함한다. (예: 2001년, 2006년, 2009년, 2012년 (10월 1일), 2017년, 2020년, 2025년 등)

북한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윤년과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노동당 창건일이 주말과 겹쳐 10월에 공휴일이 사실상 없는 해가 된다.

그리고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16년, 2044년) 및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2011년, 2022년, 2033년, 2039년)일 경우에는 문화의 날이 체육의 날과 겹쳐지며, 토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28년, 2056년) 및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2006년, 2017년, 2023년, 2034년, 2045년)일 경우에는 문화의 날이 경찰의 날과 겹쳐진다.

음력 8월과 음력 9월이 이 달에 있으며 10월에는 음력 8월 15~16일, 9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윤달일 경우는 윤8월이나 윤9월이 양력 10월에 낀다.

영어의 October는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에서 유래되었다. 또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eight(8)을 의미하는 octo에서 유래되었다.




#Article 165: 1월 (142 words)


음력 11월과 음력 12월이 이 달에 있으며 1월에는 음력 11월 15~16일, 12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영어 'January'(라틴어 Mensis Ianuarius, month of Janus)는 문(door)을 뜻하는 라틴어 ianua에서 유래했다. 문의 신인 야누스(Janus)에서 따왔으며, 야누스는 하늘의 문지기로서 한해를 여는 신이기도 하다. 앞뒤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문은 시작과 전환(beginnings and transitions)을 나타내는 데서 모든 사물의 출발점의 신이라고 생각되었다. 

원래 고대 로마 달력은 10개월 (304일)로 구성되어 있었고, 겨울은 달로서 생각되지 않았었다. 기원전 713년경, 로물루스의 계승자였던 누마 폼필리우스가 1월과 2월을 추가해 태음년(354일)과 같은 길이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비록 원래의 고대 로마 달력에서는 3월이 한 해의 시작이었지만, 누마 통치기, 혹은 기원전 450년경 데켐비리에 의해 1월이 한 해의 첫 달이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유럽에서는 3월 25일(성모 영보), 12월 25일(크리스마스) 등을 포함한 다양한 기독교적 축일들이 새해의 첫 날들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16세기 초에 공식적으로 다시 1월 1일을 새해의 첫날로 사용하기로 했는데, 이는 1월 1일이 그리스도 할례축일이기 때문이었다.




#Article 166: 3월 (138 words)


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2008년, 2036년, 2064년, 2092년)과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윤년(2003년, 2014년, 2020년, 2025년, 2031년, 2042년, 2048년, 2053년, 2059년, 2070년, 2076년, 2081년, 2087년, 2098년)일 경우에는 3월의 공휴일이 대통령 선거일이 3월 초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는 경우도 있다. 북한의 경우 정월 대보름이 3월 초가 아닌 경우에는 3월에 공휴일이 없다.

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2024년, 2052년, 2080년)과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2002년, 2013년, 2019년, 2030년, 2041년, 2047년, 2058년, 2069년, 2075년, 2086년, 2097년)일 경우 3월 2일이 토요일, 3월 3일이 일요일이 되어 3월 4일 월요일에 시업/입학식(대학교의 경우 개강)을 시행하고, 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2008년, 2036년, 2064년, 2092년)과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2003년, 2014년, 2025년, 2031년, 2042년, 2053년, 2059년, 2070년, 2081년, 2087년, 2098년)일 경우 3월 2일이 일요일이 되어 3월 3일 월요일에 시업/입학식(대학교의 경우 개강)을 시행한다.

음력 1월과 음력 2월이 이 달에 있으며 3월에는 음력 1월 15~16일, 2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이 달에 윤달이 낄 경우 춘분 이전은 윤1월, 춘분 이후는 윤2월이 된다.




#Article 167: 6월 (227 words)


어느 해건 6월이 시작하는 요일은 그 해의 다른 달이 시작하는 요일들과는 항상 다르며, 이는 5월과 6월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또한, 6월이 끝나는 요일은 그 해의 3월이 끝나는 요일과 항상 같으며, 6월이 시작되는 요일은 내년 2월이 시작되는 요일과 항상 같다. 또한, 전년도 9월, 12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단, 평년의 경우에만 해당). 다음 해가 평년이면 다음해 3월, 11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다음 해가 윤년이면 다음 해 8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중국, 한국, 일본, 미국과 같은 북반구에서는 여름이 되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같은 남반구에는 겨울이 된다. 대한민국에서는 6월이 호국보훈의 달이다.

단,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20년, 2048년, 2076년)과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윤년(예 : 2004년, 2009년, 2015년, 2026년, 2032년, 2037년, 2043년, 2054년, 2060년, 2065년, 2071년, 2082년, 2088년, 2093년, 2099년) 그리고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2010년, 2021년, 2027년, 2038년, 2049년, 2055년, 2066년, 2077년, 2083년, 2094년, 2100년)일 경우에는 6월의 공휴일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북한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과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6월의 공휴일이 아예 없고,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과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위대한 김정일의 날만,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과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소년단 창립기념일만 공휴일이다.

일본에는 이 달에 공휴일이 아예 없다. 과거에는 8월과 12월에도 없었으나 1989년 아키히토 천황의 생일인 12월 23일이 천황절, 2016년 8월 11일이 산의 날로 지정되면서 6월만 일본에서 유일하게 주말을 제외한 휴일이 하루도 없는 달로 남게 되었다.

음력 4월과 음력 5월이 이 달에 있으며 6월에는 음력 4월 15~16일, 5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6월에 윤달이 들 경우 하지 이전이면 윤4월, 하지 이후이면 윤5월이 들게 된다.




#Article 168: 8월 (102 words)


한중일월 4개국에서 공휴일이 빈약한 달 중 하나로 중국과 베트남은 건국 이래 8월에는 공휴일이 없고 일본은 2015년까지 8월에 공휴일이 하나도 없었다.

단,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20년, 2048년, 2076년)과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윤년(예 : 2004년, 2009년, 2015년, 2026년, 2032년, 2037년, 2043년, 2054년, 2060년, 2065년, 2071년, 2082년, 2088년, 2093년, 2099년) 그리고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2010년, 2021년, 2027년, 2038년, 2049년, 2055년, 2066년, 2077년, 2083년, 2094년, 2100년)일 경우에는 8월의 공휴일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 휴가철이 끝나는 달이다.

음력 6월과 음력 7월이 이 달에 있으며 8월에는 음력 6월 15~16일, 7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이 달에 윤달이 들 경우 처서 이전은 윤6월, 처서 이후는 윤7월이다.




#Article 169: 구면좌표계 (254 words)


구면좌표계(球面座標係, spherical coordinate system)는 3차원 공간 상의 점들을 나타내는 좌표계의 하나로, 보통 로 나타낸다. 원점에서의 거리 은 0부터 까지, 양의 방향의 z축과 이루는 각도 는 0부터 까지, z축을 축으로 양의 방향의 x축과 이루는 각 는 0부터  까지의 값을 갖는다. 는 위도로, 는 경도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기도 한다.

이 세 수치를 보고,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공간의 점을 찾을 수 있다.: 원점 에서 만큼 z축을 따라 간다. 그 지점에서 x z 평면 안에 있으면서 z축에서부터 만큼 회전한다. 이 xz 평면 전체를 z축을 축으로 만큼 반 시계방향(+x축에서 +y축 방향으로)으로 돌린다.

구면좌표계라는 이름은 이 좌표계에서 ''이 단위구(單位球)를 표현하기 때문에 붙여졌다. 또한 이 좌표계가 구대칭을 기치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구면좌표계와 원통좌표계는 평면 극좌표계를 공간으로 확장한 것이며, 구면좌표계는 구대칭이 나타나는 문제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예를 들어, 수소원자와 같이 구대칭이 있는 경우에 슈뢰딩거 방정식을 풀 때 구면좌표계를 사용한다.

아래 변환식을 통해 직교좌표계와 변환할 수 있지만, 변환식에서 사용하는 역삼각함수는 일의적이지 않기 때문에, 공간상의 각 점마다 하나의 좌표만 대응하는 직교좌표계와는 달리, 구면좌표계는 한 점을 나타내는 표현이 여러가지일 수 있다. 예를 들어, (1, 0°, 0°), (1, 0°, 45°), 과 (-1, 180°, 270°)는 모두 같은 점을 나타낼 수 있다.

세 좌표의 표시를 위한 여러가지 다른 약속이 존재한다. 국제 표준 기구의 지침(ISO 31-11)에 따라 물리학에서는 (r, θ, φ)의 문자를 사용하여 원점에서의 거리, 천정과 이루는 각도(천정거리), 방위각 등을 표시하고, (미국의) 수학에서는 고도와 방위각이 바뀌어 'φ'와 'θ'로 표시된다.

좌표 는 다음과 같이 정의 된다. 주어진 점을 P라 하자.

구면좌표계의 경우는 좌표값에 따라 한 점을 여러 좌표가 가리키는 경우가 있으므로, 각 변수의 범위를 보통 아래와 같이 제한한다.

다른 3차원 좌표계로 변환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각 단위벡터의 직교좌표에서의 표현은 다음과 같다.



#Article 170: 잭슨 5 (914 words)


잭슨 5()는 1964년에 결성하고, 잭슨 형제들로 이루어진 미국 인디애나 주 출신의 대중음악 그룹이다. 아버지 조지프 잭슨이 매니저를 맡았으며, 멤버는 재키(1951년생), 티토(1953년생), 저메인(1954년생), 말론(1957년생), 마이클(1958년생)이며, 이 중 막내가 나중에 팝의 황제로 불리게 되는 마이클 잭슨이다.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하여 버블검 소울이란 스타일의 음악을 유행시켰다. 1972년엔 에픽 레코드으로 계약사를 바꾸었으며, 모타운이 잭슨 파이브란 이름의 소유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더 잭슨스(The Jacksons)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했다. 현재까지 약 3천만 장의 앨범을 팔았으며 1989년에 해체했다. 2001년에 잠시 재결성하였으나, 얼마 못 가서 도로 해체하고 2012년에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잭슨 파이브의 구성원은 모두 시카고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개리의 작은 집에서 자라났다. 레비, 티토, 재키, 저메인, 라토야, 말론, 마이클, 랜디, 자넷으로 이어지는 무려 아홉 명이나 되는 형제자매를 키운 어머니 캐서린은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고, 아버지 조셉은 블루스에 심취한 금속공장 직원이었다. 부부는 아이들을 아주 엄격하게 키우는 반면 음악에 대한 취향과 노력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어머니 캐서린은 젊었을 때는 아이들과 함께 노래도 부르고 클라리넷도 연주했다. 조셉은 자신의 형제와 친구들과 함께 결성한 그룹 팔콘스로 활동하며 마을의 바와 클럽, 시카고와 인디애나 북부 지방의 대학 행사들을 휩쓸다가, 결국은 몇 달 동안 고전을 면치 못하다 그룹을 해체한다. 밤마다 아이들 모두가 아버지 곁에 모여 위대한 고전 팝송을 연주하는 일이 허다했다.

아버지 조는 자식들이 자신의 예술적 기질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진짜 재능을 타고났다는 걸 아주 일찌감치 간파했다. 그렇게 해서 맨 위의 세 형제 재키, 티토, 저메인으로 구성된 최초의 그룹 더 잭슨 브라더스가 결성되었다. 세 아이들은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을 군소리 없이 받아야 했다. 그러다 말론과 특히 마이클이 합류하면서 그룹은 완전한 규모를 갖추게 된다. 어느날 꼬마 마이클이 꼭 제임스 브라운처럼 춤추고 노래하는 걸 보고 놀란 어머니의 제안으로 그룹에 합류하게 된 마이클은 한동안은 봉고를 연주하다가 그룹의 싱어가 된다.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었는데도 몸과 목소리를 다루는 그의 재능은 이미 집안에서 가장 뛰어났다.

그 세계에서는 감히 무시하지 못할 도전자들이 된 잭슨 일행은 무엇 하나 거저 되는 일이 없는 만큼 의상이며 헤어스타일이며 액세서리며 이것저것 신경쓰기 시작했고, 조셈은 모든 것이 완벽하길 바랐다. 그래서 주말마다 시카고로 가서는 흥행하는 공연들을 찾아냈자. 관중이 좋아하는 제스처며 음악이며 몸동작을 기억해두었다가 자식들이 무대에서 그대로 재현해내도록 만들었다. 콘테스트를 거듭할 수록 잭슨 형제는 하루가 다르게 노련해졌고 창의력 역시 견줄 데 없을 정도로 발달했다. 공연마다 따라다니는 일부 극성팬들이 실증내지 않도록 연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꾸준히 신곡을 만들어내야 했던 덕분이었다. 하지만 우승해서 상을 받는 만큼 그 대가도 따르는 법이었다. 집에서 연습이 끝나는 시간은 갈수록 늦어졌고, 조셉은 아들들의 명성에 어울리는 마이크며 악기들을 갖추어가느라 가산을 탕진했다. 어쨌든 그런 희생이 다음 단계에서는 도움이 되었다.

잭슨 파이브는 아마추어 콘테스트 순회를 계속해 나갔다. 로열 시어터 상에 심취한 잭슨 파이브는 경쟁자들에게 막대한 미해를 끼쳐가며 매주 새로운 곡을 들고 나왔다. 로열 시어터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것도 좋긴 했지만, 아버지 조는 음악의 신전이랄 수 있는 뉴욕의 아폴로 시어터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는 편이 훨씬 더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희소식이 들려왔다. 인디애나 주와 미시간 주에서 잭슨 파이브가 워낙 대단한 성공을 거둔 덕에 아폴로 시어터에서 예선 없이 곧장 본선에 진출시켜준다는 것이었다. 이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잭슨 형제는 두 시간 전에 미리 도착해서 전국 최고 가수들의 얼굴로 도배가 된 공연장을 둘러보았다. 잭슨 파이브는 아폴로 시어터 콘테스트에서도 우승했다. 공연비로 당시 600달러를 받았고, 무엇보다 그룹 최초의 음반을 녹음할 수 있게 해준 값진 우승이었다. 아폴로에서 성공을 거둔 다음에 잭슨 일행은 아버지의 동료인 고든 키스 덕분에 처음으로 앨범을 취입할 기회를 얻었다. 고든 키스는 그 역시 음악에 심취한 사람이자 개리의 스틸타운 녹음 스튜디오 사장이기도 했다.

어느 날 저녁, 조는 집에 올 때 고든 키스에게 들려주기 위해 연습해야 할 곡이 담긴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손에 들고 왔다. 아이들은 그 곡의 멜로디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실망스런 마음을 애써 감추고 연습을 시작했다. 조는 데모 테이프르 제작자에게 넘기라 갔다가는 저력 무렵이 되면 새로 연습할 노래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몇 주 후, 잭슨 일가는 최초의 음반을 녹음하기 위해 키스의 사무실을 찾았다, 코러스며 금과악기 연주자들이 이미 대기 중이었다. 악기를 연결하고 첫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녹음 작업은 주로 일요일에 진행되어서 앨범 전체 녹음을 끝내기까지는 일요일이 여러 번 지나야 했다. 조는 주중에 내내 쉬지 않고 아들들을 연습시켰다. 몇 차례의 시도 끝에 그룹은 마침내 그들의 첫 노래 〈Big Boy〉의 녹음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첫눈에 반한 소녀와 사귀로 싶은 소녀의 마음을 노래하는 발라드 곡이었지만, 정작 그런 가사를 읊조리는 마이클은 자신이 노래하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렸다. 서둘로 음반을 준비하고 나자 이제 잭슨 가족이 거머쥔 각종 콘테스트의 막간이나 끝났을 때를 이용해서 싱글을 파는 일만 남았다. 그 첫 번째 싱글은 지방 라디오 방송곡에선 작은 성공을 거두었다.

다이애나 로스가 아이들에게 불쑥 초대장 하나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어느 저녁 파티에 잭슨 파이브가 등장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당시 마이클의 나이는 11살이었지만, 나이가 어릴 수록 실력에 감탄한다는 상업적 전략에 따라 그의 나이는 8살로 표기되었고 잭슨 파이브 모두의 나이가 두 살씩 내려갔다. 1969년 8월 음박 저널계와 상류츨 인사들과 기자들이 다이애나 로스의 집에 도착했고 파티는 성공적이었다. 〈Who's Loving You〉와 〈Zip-a-Dee-Doo-Dah〉를 감칠맛 나게 부르는 마이클의 목소리에 다들 넞을 잃었다. 이내 기자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그 공연이 끝나고 채 며칠도 되지 않아 고디는 작곡가 다크 리처드로부처 원해 글래디스 나이트에게 줄 작정이었던 곡 〈I Wanna Be Free〉를 다이애나 로스의 무대에서 직접 보았던 잭슨 파이브를 위해 다시 손을 보겠다는 동의를 얻어냈다. 그 곡은 머지않아 잭슨 파이브가 처음으로 성공을 거두는 곡 〈I Want You Back〉이 된다. 그 뒤로는 내놓은 노래마다 연달아 성공을 거두었다. 잭슨 파이브는 4년 동안 11개의 앨범을 취입하고 순회공연과 텔레비전 방송을 오가며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살게 된다.

투어는 1984년 7월에 시작되었다. 공연이 거듭될수록 다섯 형제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리무진으로 제각기 이동했다. 한편, 여동생 자넷이 당시에 사귀던 남자 친구와 비밀리에 결혼해버리는 일까지 일어나 마이클은 벅찬 시련을 감당해야 했다. 아버지가 유럽 투어를 연장하려 한다는 사실을 마이클이 우연히 알게 되면서 가족 관계는 부쩍 더 나빠졌다. 자신의 의견도 묻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을 마이클은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다. 그 함정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그 소식이 팬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기 전에 재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12월 9일, 미국 투어 마지막 날, 마이클은 결국 공연 마지막에 마이크를 잡고 그룹의 해체를 선언하면서 자신은 이제 전격적으로 솔로 활동에 매진할 작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Article 171: 야세르 아라파트 (2012 words)


야세르 아라파트(, , 1929년 8월 24일 ~ 2004년 11월 11일)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초대 수반 (1996년 ~ 2004년)이었다.  또한 쿤야 아부 아마르 (أبو عمار)로도 알려진 그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의장 (1969년 ~ 2004년)이었다.  아라파트는 1993년 오슬로 협정에서 결과를 가져온 성공적인 협상들로 이스라엘의 시몬 페레스와 이츠하크 라빈과 더불어 1994년 노벨 평화상의 공동 수상자였다.

아라파트는 자신의 장기적 경력을 통하여 논쟁적이며 양극화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 활동으로 들어가는 팔레스타인의 국민들의 꿈과 열정을 구체화한 운동으로서 1957년 자신이 창설한 파타 (Fatah)를 지도한 것으로 넓게 인정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팔레스타인 국민들의 국가 열망을 상징한 영웅적인 자유 투사로서 그를 간주하였다.  많은 그의 이스라엘의 반대자들은 폭력을 흥행하는 장기적 유산과 함께 완고한 테러리스트로 그를 여겼다.  아랍의 국수주의자들은 오슬로 협정이 있던 동안 그가 이스라엘 정부에게 너무 많은 양보를 만들었다는 것을 믿는다.  다른이들은 그를 부패하거나 약하거나 혹은 솔직하지 않았던 것으로 비난하였다.  자신의 약점이 무엇이든 아라파트는 국가의 민족 자결권에 관한 팔레스타인의 꿈을 위하여 싸우고 바친 시작부터 종말까지 애국자였다.

팔레스타인 정치가로서 많은 일을 했지만, 투명하지 않은 재산 관리, 아내의 사치 등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본명은 모하메드 압델-라우프 아라파트 알쿠드와 알후세이니 (محمد ياسر عبد الرحمن عبد الرؤوف عرفات القدوة الحسيني)로 카이로에서 태어났다.  직물 상인이었던 그의 부친은 어떤 이집트의 계통과 함께한 팔레스타인인이었다.  그의 모친은 예루살렘에 있는 옛 팔레스타인인 가족으로부터 왔다.  자신이 야시르로 불리면서 5세 때 모친이 사망하였다.  그는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외삼촌과 사는 데 보내졌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하여 약간 드러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일찍이 추억들 중의 하나는 한밤 중 후에 영국의 군인들이 자신의 삼촌의 집으로 침입하여 가족의 일원들을 패고 가구를 부수어 버렸던 것에 관해서이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통곡의 벽 혹은 유대인, 기독교인과 무슬림들에 의하여 신성한 곳으로 숙고된 현장 알아크사 모스크 혹은 성전산 근처에 있던 집에서 살았다.  8세가 되었을 때 그의 부친은 두번째로 결혼하여 가족은 카이로로 다시 배치되었다.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의 부친이 세번째로 결혼했을 때 아라파트의 누이 이남은 자신의 형제·자매를 키우는 임무에 남겨졌다.

아라파트는 이후에 카이로 대학교로 이름이 다시 붙은 파우드 2세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후에 유대인들과 토론에 참여하면서 유대교와 시온주의의 더욱 나은 이해와 테오도르 헤르츨과 다른 시온주의자들에 의한 출판물들을 읽는 것을 추구한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1946년까지 그는 아랍의 국수주의자가 되었고, 아랍의 원인을 위하여 팔레스타인으로 밀수될 무기들을 획득하고 있었다.

대학으로 돌아온 후, 아라파트는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하여 1952년부터 1956년까지 팔레스타인 학생 연합의 회장을 지냈다.  1956년까지 아라파트는 토목 공학에서 학사 학위와 함께 졸업하였다.  그는 후에 수에즈 위기가 일어난 동안 이집트 육군에서 소위로 복무하였다.  또한 1956년 프라하에서 열린 회의에서 자신의 상징이 된 전통적 체크 무늬 머리 장식 쿠피야를 입었다.

아라파트의 동생 파티 아라파트 박사는 아랍의 붉은 초승달을 창설한 것으로 소문이 났고, 분쟁의 인도주의적 측면에 연루되었다.

아라파트는 쿠웨이트에서 일을 한 많은 팔레스타인인들로부터 기부를 통한 파타의 미래 재정적 성원을 위한 기초를 설립하는 데 거기서 열심히 일하였다.  그들은 석유 산업에서 자신들의 높은 봉급에서 아낌없이 주었다.

많은 젊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파타의 계급들에 가입하였고, 장비는 향상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파타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지배하였다.  1969년 2월 3일 카이로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전국 의회에서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1967년 12월 아흐마드 슈케이리가 사임한 이래 임시 대행 지도자로 지낸 야히야 하무다를 대체하였다.  2년 후에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1973년 그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정치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다른 아랍 정부들은 평화로운 해결을 협상하는 데 시도하였으나 9월 12일 3개의 팔레스타인 해방대중전선에 의하여 납치되어 자르카에서 잡힌 3개의 국제 항공기들의 파괴 같은 요르단에서 지속된 파이딘 활동들은 그 영토에 통치를 다시 얻는 활동들을 취하는 데 구실로서 요르단 정부에 의하여 이용되었다.

검은 9월 사건과 요르단으로부터 제명에 이어 아라파트는 레바논으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다시 배치하였다.  레바논의 약한 중앙 정부 때문에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사실상으로 독립 국가로서 운영할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시민들을 포함한 이스라엘의 목표물들에 대항하는 레바논으로부터 간헐적인 국경간 공격들을 가하였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레바논 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베이루트 서부를 장악하고 이스라엘군에 의한 포위 후에 아라파트는 베이루트가 두번째 스탈린그라드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베이루트는 이어서 일어난 이스라엘의 포병과 공중 폭격의 결과로서 폐허가 되고 말았다.  17,000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살해되었다.

내전이 있어난 동안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레바논의 무슬림 단체들과 제휴시켰다.  하지만 권력을 잃을 것에 두려워한 시리아의 하페즈 알아사드는 편을 바꾸어 급진파 우익의 기독교 팔랑헤당을 돕는 데 자신의 군대를 보냈다.  내전의 첫 단계는 아라파트를 위하여 탈알자타르의 난민 캠프의 포획과 몰락과 함께 끝났다.  아라파트는 좁게 탈출하였으며 그의 탈출은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 의하여 원조되었다.

아라파트는 실제로 베이루트로부터 자신이 퇴거된 1년 후에 레바논으로 돌아가 이번에는 트리폴리에서 자신을 설립하였다.  이스라엘에 의하여 쫓겨난 대신 이번에 아라파트는 하페즈 알아사드를 위하여 일을 한 동료 팔레스타인인에 의하여 쫓겨났다.  많은 파타 투사들이 그렇게 했어도 두번째 제명 후에 아라파트는 직접 레바논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모래 폭풍이 일어난 동안 자신의 비행기가 리비아의 사막에 부딪치면서 착륙했을 때 1992년 4월 7일 다시 죽음을 좁게 탈출하였다.  아라파트는 몇몇의 뼈가 부러지고 다른 부상들을 겪었다.

아라파트는 2000년 캠프데이비드에서 열린 정상 회담에서 네타냐후의 후임자 에후드 바라크와 협상들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네타냐후가 우익의 리쿠드당 소속인 동안 바라크는 좌익의 노동당 소속이었다.  이 변화는 협상의 활력들에 변화를 가져왔으며 클린턴은 타협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바라크는 아라파트에게 그 수도로서 예루살렘 동부의 외부에 놓인 외곽과 함께 요단강 서안 지구의 다수와 가자 지구의 전부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의 국가를 제공하였다.  이스라엘은 네게브에서 대지를 위한 교환에서 큰 정착권들을 에워 싼 요단강 서안 지구의 남은 9 ~ 10 퍼센트를 병합하려고 하였다.  추가로 이스라엘의 제안 아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국가의 국경, 관세들과 국방의 어떤 통치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또한 제공에서 포함된 것은 작은 수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귀환과 나머지를 위한 배상이었다.  바라크는 또한 2개의 수도들 -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옆에 팔레스타인 통치의 알쿠드스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을 진술하였다.

넓게 비판을 받은 운동에서 아라파트는 바라크의 제공을 거절하였고, 반대 제안을 만드는 데 거부하였다.  그는 아마 팔레스타인인들이 예루살렘과 난민들을 여기는 불충분한 이스라엘의 제안들로 마지못해 동의하는 데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추정하였다.  이것에도 불구하고 2001년 타바에서 열린 정상 회담에서 협상들은 지속되었다.  이번에 바라크는 이스라엘 총선에서 캠페인을 벌이는 데 교섭에서 철수하였다.  2001년을 통하여 알아스크 인티파다 혹은 제2차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는 맹렬히 자라났다.  아리엘 샤론의 선거에 이어 평화 과정은 완전히 쇠약해졌다.

이스라엘의 새롭게 선출된 총리 샤론은 라말라에 있는 모카타 본부로 아라파트를 감금하였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아라파트가 평화의 장애물이었다고 단언하였다.  다른 방면에 유럽 연합은 이 힘든 자세를 반대하였다.  2004년 11월 11일 아라파트의 사망에 이어 마흐무드 압바스가 2005년 1월 수반 선거를 이겨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지도자로서 아라파트를 대체하였다.

중동에서 정치의 가장 위험한 자연과 자주 일어나는 암살 사건들이 주어진 아라파트의 장기적인 개인적과 정치적 생존은 비대칭 전쟁의 숙달로서 징후와 전술가로서 그의 실력으로서 대부분의 서방 주석자들에 의하여 취해졌다.  어떤이들은 그의 생존은 만약 자신이 암살되거나 이스라엘에 의하여 체포마저 된다면 팔레스타인의 원인을 위하여 그가 순교자가 될 수 있던 이스라엘의 위협의 두려움에 큰 이유였다고 믿는다.  다른이들은 하마스와 아라파트의 세속 조직에 후원을 얻는 다른 이슬람주의 운동들보다 적게 아라파트를 두려워하는 데 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라파트를 살려둔 것이라고 믿는다.  미국,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와 다른 아랍 국가들 사이에 관계들의 복잡하고 깨지기 쉬운 방송망도 또한 팔레스타인의 지도자로서 아라파트의 장수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새로운 전술적과 정치적 상황들로 적응시키는 아라파트의 능력은 하마스와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지하드 조직들이 상승하는 가운데 예시되었다.  이 이슬람주의 단체들은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거부파를 지지하였고, 자살 폭격 같은 새로운 전술들을 고용하여 심리적 손해들을 증가시키는 데 쇼핑몰과 극장들 같은 비군사적 목표물들에 고의적으로 목표를 삼았다.  1990년대에 이 단체들은 국가로서 지위의 목표와 함께 통일한 비종교적 국수주의 단체를 함께 소유하는 아라파트의 수용력을 위협한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아라파트의 영향력과 통치로부터 나온 것으로 나타났으며 아라파트의 파타 단체와 활동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어떤이들은 이 단체들의 활동들이 이스라엘에 압력을 가하는 의미들로서 아라파트에 의하여 동석되었다는 것을 단언한다.  어떤 이스라엘 정부의 공무원들은 2002년 파타의 당파 알아크사 마르티르의 여단들이 하마스와 함께 완료하는 데 이스라엘에 공격들을 시작하였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그해 3월 아랍 연맹은 6일 전쟁에 포획된 전체의 영토들로부터 이스라엘군의 후퇴와 팔레스타인의 국가로서 지위와 아라파트의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를 위한 교환에서 이스라엘을 승인하는 데 제공을 만들었다.  후원자들은 이 제공을 지방에서 포괄적인 평화를 위한 역사적 기회로서 보았다.  제공의 비평가들은 자살 폭발 공격들의 중단을 보증하지 않은 동안 그것이 이스라엘의 안정에 큰 타격을 가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스라엘은 피상적으로 간주된 이 제공을 무시하였다.

곧 후에 공격들은 135명 이상의 이스라엘 시민들을 살해한 팔레스타인의 무장 단체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이전에 아라파트가 자살 폭발에 대항하는 데 아랍어에 강하게 용기를 내어 말해버리는 것을 요구했던 샤론은 아라파트가 테러리스트들을 원조하고, 자신을 이스라엘의 적으로 만들어 아무 평화 협상들에 부적절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고나서 이스라엘은 요단 서안 지구로 들어가는 주요 군사 공격을 발포하였다.

팔레스타인의 국민들을 대표하는 데 또다른 팔레스타인의 지도자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데 이스라엘 정부에 의한 완고한 시도들은 실패하였다.  아라파트는 자신과 다루거나자신을 성원하는 것에 보통 꽤 조심스러워 왔던 자신 소유의 역사를 준 단체들의 성워을 즐기고 있었다.  알아크사 인티파다가 일어난 동안 마르완 바르구티가 지도자로서 나타났으나 이스라엘은 그를 체포하여 4개의 무기 징역 선고를 내렸다.

격렬한 협상들 후에 5월 3일 아라파트는 결국 자신의 울안을 떠나는 데 허용되었다.  아라파트와 함께 숨어 온 이스라엘에 의하여 원해진 6명의 무장 단체들이 이스라엘에 넘겨지거나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 의하여 구금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과 미국의 합쳐진 보안 요원은 원해진 남자들이 여리고에서 투옥되어 남아있던 것을 확실히 하였다.  추가로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인들에 공격들을 멈추는 데 아랍어에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부탁을 발표할 것을 약속하였다.  아라파트는 석방되어 5월 8일 부탁을 발표하였으나 크게 무시되었다.  많은이들은 이것은 그가 비밀적으로 공격들을 지지하였기 때문이었다고 느낀다.  이 믿음은 심각하게 아라파트의 부탁을 응하지 않은 전체의 팔레스타인의 무장 조직들 중에 넓게 퍼졌다.

기껏해야 아라파트는 다른 아랍 국가들의 지도자들과 섞인 관계들을 가졌다.  하지만 그는 일반인 중에 가장 인기있던 아랍 지도자로 남아있어 많은 세월 동안 단 하나의 선출된 아랍 지도자였다.  서방과 이스라엘의 매체에 의하여 아라파트의 가장 빈번한 비판은 그가 팔레스타인 국민들의 손해에 타락했다는 것이었다.  아랍 지도자들로부터 아라파트의 성원은 그가 이스라엘에 의하여 압력을 받았던 때마다 자라난 것으로 이바지하였다.

이 전부의 다른 사정들과 아라파트의 그것들을 다루는 것을 합친 것은 더욱 큰 그림을 보는 데 퍼즐의 조각들을 연결한 것 같다.  나타나는 것은 아라파트가 이용할 수 있단 이해이며 자신 만의 생존이 아닌 또한 자신이 계획한 정치적 종말들에 이익을 준 상황들마저 교묘하게 다룬 것이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매체에서 2002년의 시작에 재정적 부패의 지속되지 않는 진술들이 드러났다.  2003년 국제 통화 기금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감사를 실시하고 아라파트과 자신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최고 경제 금융 고문에 의하여 통제된 특별 은행 계좌로 공공 기금에 미국돈 9억 달러를 전환한 것을 진술하였다.  하지만 국제 통화 기금은 아무 부적당한 일들이 없었다는 것을 단언하지 않았고, 기금들이 국내 및 해외 모두 팔레스타인의 자산들에 투자하는 데 이용되어 오지 않았다는 것을 명확하게 진술하였다.

아라파트 정부의 전직 내각 일원들은 자신을 위하여 팔레스타인 국민들의 부를 몰수한 것으로 아라파트를 고발하였다.  2002년 아라파트가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던 전 세계은행의 공무원 살람 파이야드는 아라파트의 필수품 독점권이 특히 더욱 가난하고,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고 부도덕한 가자 지구에서 자신의 국민들에 속임수를 썼다고 말하였다.  전 내각 일원 하난 아슈라위에 의하면 아라파트를 보유물들을 넘기는 데 하는 것은 이빨을 뽑는 것 같았다.  아라파트 씨는 유럽 연합 같은 원조 기증자와 자신의 재무 장관이자 영토들에서 국제 통화 기금의 전 대표 살람 파이야드로부터 압력을 가했다.  그들은 아라파트 씨가 더욱 나가서의 원조의 상태로서 투자들을 넘기는 것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유럽 연합의 기금들이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 의하여 잘못 쓰이고 있었다는 단언들로 유럽 연합에 의한 조사는 기금들이 영토의 활동들로 전환되었다는 증거를 찾지 않았다.  유럽 연합은 그 재정적 관리를 향상시키는 것을 포함하여 팔레스타인에서 깊은 개혁을 납득시킨 것으로 남아있고, 감사 능력은 기금의 잘못된 사용과 부패에 대항하는 최고의 예방적인 전략이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재정적 관리의 개혁은 유럽 연합의 재정적 원조로 접착된 몇몇의 주요 상태들의 목적이다.라고 말해졌다.  아라파트에게 전 재정 측근 파우드 슈바키는 보고적으로 아라파트가 무기들을 사고 무장 단체들을 성원하는 데 원조금의 몇백만 달러를 이용했다는 것을 이스라엘의 신베트에게 말하였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재무부에서 무명의 출처들에 의한 단언들은 아라파트의 부인 수하 여사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예산안으로부터 한달에 10만 달러의 연금을 받는 것을 진술하였다.  런던에 기지를 둔 신문 알하야트와 인터뷰에서 수하 여사는 샤론 총리가 향하고 있던 부패 변증들로부터 매체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목적으로 자신에게 기금의 옮기는 것을 연루한 돈 세탁에 관한 퍼지는 소문들로 그를 고발하였다.  프랑스의 검사들에 의한 2003년 철저한 조사는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다.

아라파트의 대변인이 말한 것에 그의 의사들에 의한 그의 치료의 첫 보고들이 말한 감기의 소식이 그가 회의 도중에 구토를 한 후 2004년 10월 25일에 나왔다.  그의 상태는 이어진 날들에 악화되었다.  그는 10월 27일 10분 동안 의식을 잃게 되었다.  튀니지, 요르단과 이집트에서 온 팀들을 포함한 다른 의사들에 의한 방문들과 그의 복귀를 막지 않는 데 이스라엘에 의한 동의에 이어 아라파트는 프랑스 정부의 제트기에 실려 10월 29일 파리 근처 클라마르에 있는 페르시 군사 병원으로 모셔졌다.  11월 3일 그는 차차 깊은 혼수상태로 빠졌다.  아라파트의 건강은 그가 중독 혹은 에이즈로부터 고통을 겪고 있었던 의심과 함께 사색의 주제였다.  아라파트가 식물인간 혹은 뇌사에서 혼수상태였던 사색들은 아라파트의 요르단인 의사에 의하여 맹렬히 부인되었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공무원들과 수하 여사 사이에 더욱 많은 논쟁들이 터졌다.  아라파트는 11월 11일 새벽 3시 30분 75세의 나이로 사망이 선언되었다.  그의 질병의 정확한 원인은 전혀 공식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아라파트의 사후, 프랑스 국방부는 아라파트의 의료 서류들이 그의 가까운 친척에게 전해져야만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아라파트의 조카 나세르 알키드와는 수하 아라파트의 남편의 질병에 관한 그녀의 침묵을 주위로 일을 했던 충분히 가까운 친척으로 결심되었다.  11월 22일 나세르 알키드와는 프랑스 국방부에 의한 아라파트의 558 페이지 의료 서류의 사본이 주어졌다.

아라파트는 교활한 정치인이자 헌신된 애국자였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리더십의 그의 10년 세월들은 팔레스타인 국가를 위한 합법적인 옹호와 쉽게 그에게 더듬어 올라가지 않아온 군사 작전 행동과 전술들 사이에 불확실한 균형을 지켰으나 그의 협의 사항을 반대한 자들에 격동을 지켰다.  그 전체를 통하여 그는 팔레스타인 국민들에 국내적 대망으로 세계적으로 넓은 인정을 가져왔고, 그 목표에 도달하는 데 거의 성공하였다.




#Article 172: 나쓰메 소세키 (499 words)


나쓰메 소세키(, 게이오 3년(1867년) 2월 9일 ~ 다이쇼 5년(1916년) 12월 9일)는 일본의 소설가이자 평론가, 영문학자이다. 본명은 나쓰메 긴노스케()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마음》 등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있으며, 모리 오가이와 더불어 메이지 시대의 대문호로 꼽힌다. 소설, 수필, 하이쿠, 한시 등 여러 장르에 걸쳐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사상과 윤리관 등은 후대 일본의 많은 근현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초상은 일본 지폐 천엔(千円)권에 담겨 있었으나, 현재 천엔(千円)권에는 노구치 히데요의 초상이 담겨 있다. 현재는 해외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져서 중국, 미국, 영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일본의 근대작가 중에서 가장 폭넓게 연구되고 있다.

게이오 3년(1867년) 2월 9일(음력 1월 5일)에 에도의 우시고메 바바시모요코초(오늘날 신주쿠구 기쿠이 정)에서 나쓰메 고효에 나오카쓰()의 막내로 태어났다. 자식 많은 집에서 늦둥이로 태어났으므로,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겼다. 긴노스케라는 이름은 태어난 날이 경신일(庚申日, 이날 태어난 아이는 큰 도둑이 된다는 미신이 있었다)이었으므로, 액을 막는 의미에서 긴(金)이라는 글자가 이름에 들어갔다. 세 살 때쯤 걸린 천연두 흔적은 이후에도 남았다.

당시 에도 막부가 붕괴한 이후 혼란기였고, 생가는 몰락하고 있었으므로 태어난 직후에 요쓰야()의 낡은 도구점(일설에는 야채가게)에 양자로 갔지만, 늦은 밤까지 물건 옆에서 나란히 자는 것을 지켜본 누나가 불만을 품고 곧 본가로 데리고 왔다. 이후 1세 때 부친의 친구였던 시오바라 쇼노스케()의 양자로 갔지만, 양부였던 쇼노스케의 여성 문제가 들통나는 등 가정불화가 불거지면서 7세 때 양모가 잠깐 생가로 데려왔다. 이후 양부모 이혼과 함께 9세 때 생가로 되돌아오지만, 친부와 양부 대립으로 말미암아 나쓰메가로 복적한 게 21세 때 일이다. 이러한 양부모와 관계는 이후 소설 《한눈팔기》의 소재가 되었다.

어수선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이치가야 학교()를 거쳐 니시키하나 소학교()로 전학했다. 12세 때인 메이지 12년(1879년)에 도쿄부 제1중학 정칙과(正則科, 훗날 부립 1중, 오늘날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예비문 수험에 필수였던 영어 수업이 없던 것과 함께 한학과 문학에 뜻을 두었으므로 2년 뒤 중퇴했다. 메이지 16년(1883년)에 대학 예비문 수험을 위해 영어를 가르치던 영학숙 세이리쓰 학사)에 입학해 두각을 드러냈다.

메이지 17년(1884년)에 무사히 대학 예비문 예과에 입학했다. 당시 하숙 동료로 훗날 남만주 철도 총재가 되는 나카무라 요시코토가 있다. 메이지 19년(1886년)에 대학 예비문이 제1고등중학교로 개칭하고, 이후 맹장염 등으로 인해 예과 2급의 진급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요시코토와 함께 낙제하였다. 이후 사립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영어실력이 우수했다.

귀국 이후 도쿄 제국대학의 강사나 메이지 대학의 강사 등을 전전하던 소세키는, 신경쇠약을 완화하기 위해 처녀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집필하고 시키 문하의 모임에서 발표하여 호평을 얻었다. 1905년 1월에 《호토토기스》에 1회만 게재할 계획이었지만, 호평으로 속편을 집필한다. 이때부터 작가의 길을 열망하기 시작했고, 이후 〈런던탑〉이나 《도련님》 등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인기를 얻어간다. 소세키의 작품은 세속을 잊고 인생을 관조하는, 이른바 저회취미(低徊趣味, 소세키의 조어)적 요소가 강해 당시 주류였던 자연주의와 대립된 여유파로 불렸다.

같은 해 10월에 용태가 안정되었고, 다시 입원하였으나 이후에도 위궤양 등으로 수차례 고통을 겪는다. 1912년 12월에는 병으로 《행인》의 집필도 중단한다. 이후의 작품은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을 따라가면서, 후반기 3부작이라고 불리는 《피안이 지날 때까지》, 《행인》, 《마음》으로 연결되었다.

소세키가 타계한 다음 날, 사체는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 해부실에서 나가요 마타로에 의해 해부되었다. 이때 적출된 뇌와 위는 기증되어, 뇌는 현재도 에탄올에 담긴 상태로 도쿄 대학 의학부에 보관되어 있다. 묘는 도쿄도 도시마구 미나미이케부쿠로의 조시가야 묘원()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원래 지폐의 인물은 아니였다. 일본은 맨 처음 이토 히로부미를 1,000엔 지폐의 인물로 선정해서 인쇄를 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등의 주변국들과 심각한 외교 마찰을 는 바람에 일본 정부에서는 1,000엔의 인물을 이토 히로부미에서 그 자리에 나쓰메 소세키로 바꾸는 것으로 일단락했다. 헤이세이 16년(2004년) 이후로는 노구치 히데요로 초상이 바뀌었다.




#Article 173: 북한 (지역) (159 words)


북한(北韓) 또는 북조선(北朝鮮)은 한국(조선)의 지역으로서 한반도(조선반도) 군사 분계선 이북의 지역을 말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한반도 전체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한국어 사전상 남한(南韓)과 북한(北韓)은 이를 전제로 한 단어다. 대한민국의 사전상 사전상 남한(南韓)은 대한민국의 영토 중 휴전선 이남 지역, 북한(北韓)은 대한민국 영토 중 휴전선 이북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지리적 범위 = 남한(대한민국의 남쪽 지역) + 북한(대한민국의 북쪽 지역)」이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또한 조선반도 전체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토로 규정하여 남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쪽 지역, 북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북쪽 지역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한국어(조선어) 사전상 남한(남조선)과 북한(북조선)은 국가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한국(조선) 내 지역을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이러한 사전적 의미와 별개로 한국어 화자들 사이에서 남한(남조선)은 대한민국을, 북한(북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칭하는 말로도 많이 쓰인다.

일제 강점기에는 북한과 비슷한 지리적 의미를 가지는 말로 서북이라는 말이 존재했다. 서북은 지리적인 서북인 평안도만을 의미하지 않고, 서도와 북관을 합쳐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일컫었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자국을 공화국이라고 불러, 북한 지역을 가리켜 공화국 북부라는 표현이 흔히 사용된다.

중화민국, 홍콩, 마카오 등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부를 때 대한민국에서와 같이 북한()이라는 명칭을 쓰고, 일본에서는 북조선()이라는 명칭을 쓴다.




#Article 17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8257 words)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 또는 줄여서 북한은 동아시아의 한반도의 북반부를 통치하고 있는 국가이다. UN이 추정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구는 2019년 기준으로 약 2,550만 명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용어는 조선어(한국어)이며, 평양말을 중심으로 이룩됨을 내세운 문화어를 표준어로 삼는다.

수도는 평양직할시이며, 이밖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광역지자체로는 남포특별시, 개성특별시, 라선특별시 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치 형태는 형식상 정당이 여러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정당이 조선로동당의 정책과 유사한 관계로 사실상 일당제 국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초대 최고지도자 김일성은 6.25 전쟁, 8월 종파 사건 등을 거쳐 정적을 제거하여 수령 중심 정치 체제를 완성하였다. 그의 자손인 김정일, 김정은은 차례로 집권을 하며 선대의 수령주의를 이어받은 정치를 펼쳤다. 이 체제는 '주체사상'이라는, 김일성 일가와 그들의 당인 조선로동당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대표된다.

분단 이후부터 현재까지 김일성 일가의 의지에 따라, '조선이 없는 지구는 깨버려야 한다'는 김정일의 언급, '수령결사옹위정신', '자력갱생'으로 대표되는 강경한 수령 중심의 체제의 성립과 유지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보여왔다. 이를 위해 경제 개방을 포함한 외부와의 전면적 교류를 꺼려 외부에서 이 국가의 상황을 자세히 알기 어렵다. 단, 체제 유지를 위해 군사 부문에 많은 지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앰네스티, 휴먼 라이츠 워치 같은 단체에서는 이 국가의 인권 문제를 지적한다.

정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지만 동국가 내에서는 자국에 대한 약칭, 혹은 조선반도 전체에 대한 통칭으로 ‘조선(朝鮮)'이 사용되며, 중화인민공화국 등에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단지 조선이라고 하면 대개 1392년에 건국된 왕조 국가왕조 시대를 가리키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와 자국에 대한 호칭의 구별을 위해 ‘리씨조선(리조)'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대한민국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가리킬 때 대개 북한(北韓)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다만, 북한이라는 단어의 이러한 쓰임은 동 단어의 한국어 사전상 의미와 차이가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한반도 전체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데, 한국어 사전상 남한(南韓), 북한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대한민국의 입장에 따른 의미를 갖고 있다. 즉, 한국어 사전상 남한은 대한민국의 남쪽 지역(대한민국 영토 중 휴전선 이남 지역), 북한은 대한민국의 북쪽 지역(대한민국 영토 중 휴전선 이북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영토는 남한과 북한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적 의미와 달리 대한민국의 한국어 화자들 사이에서 북한이라는 단어는 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북한'이라는 용어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었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은 자국을 이 명칭으로 부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편 '남측'(대한민국) 에 대비하여 '북측'(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호칭을 양국간의 외교 혹은 문화 교류 등에서 사용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북한과 비슷한 지리적 의미를 가지는 말로 서북이라는 말이 존재했다. 서북은 지리적인 서북인 평안도만을 의미하지 않고, 서도와 북관을 합쳐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일컫었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자국을 '공화국', '조국' 등으로 부르고, 북한 지역을 가리켜 '공화국 북반부, 혹은 북조선이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한다.

중화민국, 홍콩, 마카오 등에서는 대한민국에서와 같이 북한()이라는 명칭을 쓰고, 일본에서는 북조선()이라는 명칭을 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45년 8월 15일 이전 한국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간주한다.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발해, 조선은 모두 이 국가가 통치하는 지역의 일정 부분을 통치한 국가다.

평안도와 평양 일대는 고조선(古朝鮮)의 수도 왕검성(王儉城)이었다.  평양직할시 강동군 문흥리에 있는 단군릉(檀君陵)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를 고조선의 지도자였던 단군(과 그의 부인)의 능이라고 주장한다.  함경남도 금야군 비단리에 있는 소라리토성도 대표적인 고조선 유적이다.

고조선이 한나라에게 망한후 평안도 일대는 한나라에 의해 설치된 한사군의 영토였으나 원삼국시대 고구려가 314년 한사군을 축출하고 평안도를 탈환하였다. 427년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천도하여 고구려의 중심권역이 되었다. 수도인 평양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로 여겨지던 황해남도 재령군으로 추정되는 한성이 있다. 바로 옆 안악군에서 고분이 3호까지 나와서 그 신빙성을 더 해주고 있다.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동명성왕의 묘라 추정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보 36호 동명왕릉과 고구려의 궁이었던 국보 2호 안학궁터와 국보 8호 대성산성 복원물과 더불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보 공동 2호 보통문, 국보 4호 대동문, 국보 19호 을밀대등의 고구려 장안성에 관련된 유적도 남아있다. 2004년 7월 1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WHC)에 의해 평안도와 황해도일대의 고구려 고분군(高句麗 古墳群)이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발해의 수도인 5경중 남해부(南海府)는 남경(南京)이라 불렸으며 함경남도 함흥시에 위치하였다. 황해도는 신라에 귀속되었다.

고려 때에는 개성특별시 일대가 개경으로 중심지였으며 평양은 “서경”(西京)으로 불리며 수도인 개경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았다. 승려 묘청은 한 때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으나 실패하자 난을 일으켜 대위국을 세웠으나 곧 망했다. 한편 함경도 지역은 고려가 차지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여진족 등의 치하에 있었다. 

고려시대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는 개성역사유적지구(開城歷史遺蹟地區)는 2013년 6월 23일, 제37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WHC) 프놈펜 회의에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는 “동북면”(東北面)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었으며, 지금의 함경도 일원이다. 8도제가 도입되면서 평안도와 함경도가 설치되었다. 김종서와 최윤덕은 세종의 명을 받아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북쪽으로 오늘날과 거의 동일한 경계를 만들었다.

조선의 중심권역이었던 경기도, 충청도 출신을 가리키는 기호인과  평안도, 황해도, 개성을 출신은 가리키는 서북인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811년(순조 11년)에 평안도의 홍경래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관서 지방에서는 외래사상이 일찍 유입되어 선천(宣川)·정주(定州)를 중심으로 개신교가 전파됨에 따라 많은 개신교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당시 개신교는 관서지방에서 보수적 관료층이 아닌 근대화의 경향을 강하게 지녔던 자립적 중산층에 의해 수용되었고, 이 자립적 중산층은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나라의 모든 모순을 제거하고 개화를 이룩하게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관서지방의 기독교적 전통은 상당히 강하였다. 또한 관서 지방의 대표격인 평양에서 1907년에 평양 대부흥이 일어나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였다.
근대 한국을 가르는 기준으로는 1862년 고종의 즉위식을 시작으로 구분되지만,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른 개항 이후,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등 여러 이견이 있다. 다만, 현재 대한민국 헌법은 1919년 3.1운동에 따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현재 대한민국의 기원으로 본다. 

건국 이래 38도선 부근에 걸쳐 국지전이 빈번하였다. 특히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관할하에 있던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 등의 접경지역을 주 공격 목표로 삼았다. 김일성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남침을 48번이나 건의했고 스탈린은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이를 거절했다. 결국, 미군이 철수한 시점에 김일성은 스탈린의 남침 승인을 받아내고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적 지원을 등에 업고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에 대대적인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한국전쟁
전쟁 초기 기습으로 인해 패전을 거듭한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군은 3일 안에 수도 서울을 점령당하는 등 정부 주요인사들은 대전, 대구,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하고 조선인민군이 낙동강 부근까지 진출했다. 국제연합군 파병과 더글라스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측이 반격을 시작해 9월 27일에 서울을 점령하고, 10월 1일에는 38도선까지 점령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임무를 완수한 국제연합군은 철수할 것을 검토했으나, 이승만의 주도로 응징론이 대두되면서, 국제연합군은 새로운 총회 결의를 바탕으로 거듭해서 10월 26일에는 압록강 부근까지 진출하지만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과 소련의 지원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멸망의 위기를 극복하였고 전쟁은 국제전의 양상을 띠며 38도선 부근에서 장기화되었다. 이후 교착을 거듭하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설정된 군사 분계선을 경계로 오늘날까지 휴전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 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 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반도 내에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으로 인해 양측 간의 적대감이 극도로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구조는 초기에 남로당 계열, 갑산파 계열, 소련파 계열, 연안파 계열 등으로 이루어진 연립내각 체제였다.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은 당시 정적들이였던 박헌영, 리승엽 등 남로당 간부들을 대거 숙청했다.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의 지반은 계속 확대되었다. 1956년 8월에는 최창익 등 연안파 세력들이 지도자 위치에 있던 김일성을 끌어내리려던 시도(8월 종파 사건)를 했지만, 무산되면서 얼마 후 주동세력인 소련파와 연안파는 숙청되었다. 이로 인해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어서 김일성은 갑산파계열내에 온건세력들을 숙청함으로써, 정치구도는 김일성 유일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 권력을 국가원수인 주석에게 몰아준 것이었다. 즉 내각수상을 주석으로 그 이름을 바꾸고, 주석에 직속된 중앙인민위원회에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권한을 집중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같은해 대한민국에서 10월 유신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는데, 사회주의헌법은 수령 유일체제의 법제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학자 김당택은 주체사상 채택을 비판하였다. 그는 본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수령이라는 직책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그러함에도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할 당시부터 수령으로 호칭되었다고 비판했다. 이어서 그는 이러한 수령이 점차 신격화되기 시작했다고 비판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 제국의 천황과 흡사하게, 종교적·신화적인 요소를 수령제도에 가미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수령의 영도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수령 유일체제로서, 수령인 김일성을 중심으로 전체 사회를 일원적으로 편제했다. 수령은 위대한 사상과 탁월한 영도력, 그리고 지고의 인격을 지닌 절대적인 존재이므로, 수령의 교시는 무조건 복종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회주의헌법의 요지다. 이후 김일성의 사상은 주체사상으로 명명되었다. 따라서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유일체제를 옹호하는 이론으로 변모해 갔다.

김일성은 1994년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인 김영삼과 만나 대담하기로 약속했으나,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결국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은 이때에 성취되지 못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4개월 뒤인 2012년 4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공화국 헌법을 개정하면서 국방위원장직을 폐지하고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직을 신설해 김정은 체제를 공식 출범시켰다.

동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북불가침합의를 폐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또한 각종 미사일이 핵탄두를 장착한 채 대기상태에 있다고 위협했으며, 1991년 남북 불가침 합의 폐기와 판문점 남북 직통전화 단절을 선언했다. 이에 대한민국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우리 한국을 공격한다면 인류의 의지, 대한민국은 당연하고 인류의 의지로 김정은 정권은 지구상에서 소멸될 겁니다.라고 주장했다. 국방부 또한 조선인민군이 대규모 훈련을 위해 집결한 상태라며, 만약에 공격할 경우 대응 규모와는 상관 없이 응징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 CIA조사에서 풍계리와 동창리 이외 미사일기지와 핵 실험 장소를 비밀리에 더 보유 및 실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고체 연료를 사용한 미사일 시험 발사도주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킬체인체계 하의 미사일방어체계와 사드는 액체연료는 잘 감시, 탐지, 타격 할 수 있지만, 고체연료는 감지가 매우 어렵고, 고도를 낮추면, 방어체계에 노출되지 않고 비교적 수월하게 특정지역을 타격 할 수 있기 때문에, 북한군은 이를 노리고 미사일 개발을 진행 중 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체제는 수령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한 일당 독재 체제다. 주체사상과 마르크스-레닌의 공산주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표방하며, 권력을 부계 세습하는 점에서 다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정당을 비롯한 계급의 소멸을 시사하고 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지배계급이 유교적인 세습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한사람의 지도자가 당과 군을 장악하고 있고, 조선로동당 이외의 정당도 여러 가지가 있긴 하지만 조선로동당이 곧 국가라는 관점은 조선로동당 규약과 헌법이 뒷받침한다. 또한, 1990년대 말부터 선군정치라는 적색파시즘적 이념이 추가되었다. 또한 국가원수이자 국방 전반의 최고 지도자는 국방위원장이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입법부 수장이다. 현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김영남(金永南)이다. 2010년 김정일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이 대장 칭호를 받고 김정일의 후계로 추대되고 있었으며, 2011년 김정일이 죽자 김정은이 실권을 장악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본 국가 운영 원칙은 국가는 당(黨, 조선로동당)이 “령도(領導)”하고 당은 수령이 “령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국가 전반의 체제가 작동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다. 당은 전인민의 대표자들이 모이는 회의체, 즉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정강정책을 실현한다. 그러므로 국가 최고권력기관은 최고인민회의며 헌법에 이러한 권리가 따로 기술되어 있을 정도다. 다만 이러한 정치체계는 대통령 중심제도 의원내각제도 아니므로 회의제라 할 수 있다. 과거 소련의 최고 소비에트나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 등도 동일한 체제의 형태로 볼 수 있다. 최고인민회의는 내각의 조직 및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위원장 1인, 부위원장 2인, 명예부위원장 2인, 서기장 1인)과 국방위원회위원을 선거로 선출한다. 산하 위원회로 법제위원회(위원장 1인, 위원 6인)와 예산위원회(위원장 1인, 위원 6인)를 설치한다.

국방위원회는 국방사업 전반을 관장하는 위원회로 행정상 내각 및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동등한 위치에 있다. 다만 김정일이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던 시기에는 조선로동당 총비서를 겸직해 국정을 주도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권력 우위를 점했다. 실제로 1998년 9월 5일 10기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 추대연설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언급한 바에 따르면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나라의 정치, 군사, 경제 력량의 총체를 통솔지휘하여 공산주의 조국의 국가체제와 인민의 운명을 수호하며 나라의 방위력과 전반적 국력을 강화발전시키는 사업을 조직령도하는 국가의 최고직책이며 우리 조국의 영예와 민족의 존엄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성스러운 중책이라 함으로써 사실상의 우위를 점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국방위원회는 전반적 무력과 국방건설사업의 지도, 국방부문의 중앙기관 신설 및 폐지, 중요 군사 간부의 임명 및 해임, 군사칭호 제정 및 장령 이상의 군사 칭호 수여, 나라의 전시상태와 동원령의 선포와 같은 결정과 명령을 내며 자기사업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 앞에 책임을 진다. 위원회 구성은 위원장 1인, 제1부위원장 1인, 부위원장 1인, 위원 5인이며 산하기관으로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무력성을 둔다.

내각은 과거에는 정무원으로 불린 기관으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조직 및 인사권을 통해 구성되며 헌법에 의해 정부를 대표하는 권한을 가진다. 1998년 9월 5일 10기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의 헌법개정을 통해 내각으로 그 조직이 변경되었다. 내각은 내각총리 1인과 부총리 3명으로 구성된다. 2005년 5월 30일 금속기계공업성을 금속공업성과 기계공업성으로 분리한 것을 기준으로 볼 때 산하에 3위원회, 29성, 1원, 1은행, 2국을 두고 있다. 그 외에 필요에 따라 임명되는 무임소상도 임의로 구성되기도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당제를 택하고 있다. 현재 여당은 조선로동당이며, 수십 년 간 장기집권하고 있다. 그러나 로동당은 이름일 뿐 실제로는 조선로동당이 국가를 관리하며 야당으로는 조선사회민주당과 천도교청우당이 있으나, 국호에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붙이기 위한 형식적인 야당이며, 조선로동당의 통제를 받는다. 사실상 정치적 권한은 전무하다. 그 중 천도교청우당은 종교적 성격을 가진 유일한 당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통적으로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동독, 베트남, 쿠바, 라오스 등 구 공산권 국가들과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1990년 독일의 통일, 1991년 소련의 붕괴, 그리고 동구권 국가들의 민주화로 인하여 국제 사회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수립과 동시에 지금까지 “혈맹”까지는 아니지만 지원을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와의 관계는 소련 붕괴 이후 소원해졌으며 우려스러운 시각으로 보고 있다. 베트남은 베트남 전쟁 때 조선인민군 일부를 파견받는 등 우호적이었으나 미국-중화인민공화국 관계가 개선되고 1992년 대한민국과 수교한 이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보다 대한민국과의 교류가 괄목하게 증가하였다. 아프리카, 인도, 파키스탄 등 제3세계 국가들과도 활발한 대사급 관계를 맺어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있다. 반미 국가인 쿠바, 시리아와는 계속 우호 관계를 유지했었다. 이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단독 수교국이지만, 대한민국과의 수교 의지가 강하다. 하지만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수교하지 못하고 있다. 이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무기 교류가 활발하기 때문에 우호적이다. 대한민국이 하나의 한국을 폐기한 이후 스웨덴, 스위스, 영국 등 많은 서방 국가들이 조선을 승인하였다. 스웨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우호적인 몇 안 되는 서방 국가다. 중화민국과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등으로 인해 교류가 드물었으나, 1992년 한중 수교 이후부터는 민간 차원의 교류를 확대하였다.

대한민국과 미국과는 건국 이래로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과는 과거사 문제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로 인해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스라엘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비이슬람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정부를 괴뢰정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역시 적대관계이다. 1983년 아웅 산 묘역 폭탄테러사건 이후 미얀마는 자국의 독립 영웅인 아웅산의 묘역에서 폭탄테러를 일으킨 결례에 대해 분노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즉시 단절하였고, 이 사건으로 비동맹국 회의에서 발언권이 약화되었으며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때는 유고슬라비아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신 폭파범들의 당시 종적을 조사해서 미국 측에 자료를 제공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에 방화사건이 나면서 관계가 악화되어 단교하였다. 루마니아의 경우 한때 김일성과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의 친분으로 인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1989년 말 차우셰스쿠가 유혈 혁명으로 총살되고 1990년 3월 루마니아가 대한민국과 수교하면서 관계가 소원해졌다.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면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영토로 하므로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반국가단체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현 실효지역은 미수복영토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내에서는 자국을 조선(朝鮮), 공화국, 조국, 혹은 북조선이라고 지칭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 때부터 국무원 고시에 의하여 확연한 구분을 위해 조선이란 명칭을 금지하고 북한(北韓)이라는 명칭만 쓴다.

양측의 관계는 70년대 이전에는 6.25 전쟁 등의 여파로 적대적이었고, 70년대 이후 5년 이내의 주기로 화해와 대립을 반복하였다. 한국 정치권에서 이 정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큰 상황이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각자 자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하며 서로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조선 정권이란 미제국주의자들의 총칼에 의하여 꾸며진 괴뢰정권으로서 미국상전의 지시를 충실히 집행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김일성의 말에 따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을 합법 정부 내지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더불어 대한민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보고, 남조선혁명을 통해 조국통일을 이루자는 적화통일론을 고수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화를 통해 통일을 하자는 주장, 이 정부가 없어져야 통일이 가능하다는 주장,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주장 등이 대립하고 있다. 남북은 대화를 하며 남북한 상호 체제인정과 상호불가침, 남북한 교류 및 협력 확대와 같은 방안이 논의된 적도 있으나, 이것이 다시 무산되다가 대화가 추진되기도 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남북 관계에서 일어난, 기존의 남북 관계를 바꾼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헌법의 제1장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고 규정하며, 국가보안법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가 아닌 대한민국에 반대하는 반(反)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의 반국가단체 조항이 평화 통일 원칙을 명시한 대한민국 헌법 제4조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주장도 있으며, 2000년의 6·15 남북 공동선언과 2007년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을 직시하였으므로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으나, 대한민국 대법원은 인정하지 않는다.

유엔은 1948년 12월 12일 총회 결의 195(III)호(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에서, 대한민국 정부(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를 한반도에서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통제 아래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선거가 치러진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합법 정부임을 결의했다. 1949년 10월 21일 293(IV)호 결의 또한 이를 확인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49년 10월 6일 수교하였다. 한국 전쟁 시기에는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했으며 이들 군대는 1958년 10월 26일에 철수했다. 1961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우호 협력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김정은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 지도자가 된 이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 개발을 계속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던 중 2018년 3월 김정은은 집권 이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베이징에서 시진핑과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로써 조중 관계는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에는 다롄에서 2차 정상회담을 가졌고, 김정은과 시진핑은 또한 북미정상회담 직후인 6월 19일 베이징에서 3차 정상회담을 가졌다.

일본은 수교 협상을 통해 관계개선에 나서려 했으나, 일본인 납북자 문제과거사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일 병합 조약에 대한 평가나, 배상문제·청구권문제 등에 대하여도 결말이 나지 않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1962년부터 일본은 한반도에 두 개의 정권이 사실상 존재하고 있다고 시인해 왔다. 일본 정부는 1965년 이후에 한국의 주권은 대한민국이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휴전선 이남에 한한다고 공식적으로 말하면서, 일본은 정경분리 원칙을 적용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실체를 따로 취급하여 왔다. 한편, 배상 문제도 한국과의 조약에 의해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일본 수상으로는 처음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나눈 적이 있다. 2002년의 양국 정상회담에서 배상권을 상호 포기하고 일본으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경제 협력을 얻는 방법에 합의했다고 발표되었으나, 이후 수교 협상은 정지되었다. 그 배경에는 일본인 납치 문제와 괴선박 사건으로 대표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동에 대한 일본 여론의 반발과 핵 문제 등으로 고립이 심화된 데에 있다. 일본은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적 제재에 동참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사조직인 조선인민군은 제도상 노동당의 '당군'이며, 선군정치 하에서 권력의 기반이다. 최고사령관은 국방위원회 위원장이다.
조선인민군은 징집병이며 2002년 병력은 약 110만 명이상으로 추정된다. 부문별로는 육군 120만명, 해군 4만 6000명, 공군 8만 6000명으로, 병력만 보면 세계 4위다. 그러나 상당수의 장비가 노후되었기에 실질적인 전투 능력에 일정한 제한이 따른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주적인 대한민국 국군의 장비들이 질적으로 우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유사시 장비들이 전력으로서 큰 기여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

평양-원산선 이남에 총전력의 70%를 배치하고 있으며, 170mm 자행포 및 240mm 방사포는 대한민국의 수도권 지역을 기습 선제 타격할 수 있다. 현재 이라크 전쟁의 전훈을 받아들여 특수전 전력의 확충과 갱도 건설과 기만기 개발로 후방지역의 생존성 확보에 노력하고 있다.

백령도 인근 장산곶과 옹진반도, 연평도 근처 강령반도의 해안가를 비롯한 장재도, 무도, 대수압도 등에는 해안포 900여문이 배치돼 있다. 군항인 해주항 일원에만 100여문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해안포는 사정거리 27km의 130mm,사정거리 12km의 76.2mm가 대표적이며 일부 지역에는 사정거리 27Km의 152mm 지상곡사포(평곡사포)가 배치되어 있다. 또 사정거리 83~95Km에 이르는 샘릿, 실크웜 지대함 미사일도 NLL 북쪽 해안가에 다수 설치됐다.

조선 인민군은 로동 1호, 대포동 1호, 대포동 2호 등 탄도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 대포동 2호는 미국의 영토인 알래스카를 타격할 수 있는 사정거리를 가지고 있다.  2012년 12월 12일 인공위성 은하 3호 발사에 성공하면서 대기권 재진입 기술도 확보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10,000 ~ 13,000 km 이상의 ICBM 사정거리를 확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1만 km는 미국 서부 지역까지, 13,000 km는 미국 대부분 지역까지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KN-08 대륙간 탄도 미사일의 엔진 성능개량 시험을 실시했다. 몇 기를 개발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TEL에 탑재되어 있는데 TEL은 정찰 위성이나 레이다 탐지 사각지역에 숨어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위협적인 무기체계다. 150~250여 기가 실전배치된 사정거리 1300Km의 노동 탄도 미사일의 TEL도 27~40대로 파악되고 있다. 괌을 사정권에 둔 무수단 탄도 미사일 운용부대는 14대의 TEL을 보유한 것으로 분석된다.

중국 등을 통해 무인 정찰기(UAV) 도입을 해서 서해상에서 운용 중이다. 

또한 세계 3위에 준하는 생화학 무기 보유국이기도 하다.

조선인민군은 전시에 대비해 군 보관시설에만 150만t의 전시용 유류를 비축해 놓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스스로 세계에서 9번째 핵무기 보유국임을 주장하고 있다. 미국 등 서방 각국은 공식적으로는 핵무기 보유국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나 사실상 핵보유국임을 기정 사실로 보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80년대 후반 핵개발 의혹이 있는 시설에 대한 핵사찰 요구에 반발하여 NPT 탈퇴를 선언하기도 하였지만, 1994년 제1차 북핵위기 이후 미국과 제네바합의를 맺어, NPT 잔류와 핵시설 동결을 선언하였다. 2003년 초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우라늄 농축 의혹을 제기하면서 제네바합의를 파기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영변의 핵시설을 재가동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6년 핵실험을 실시했으며 몇 개의 플루토늄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사회의 핵폐기 요구에 대응하여 미·일·러·중·남·북 6자회담을 진행하고 있으며, 2007년 초기 단계를 합의하였다. 절차가 예정대로 진행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만간 핵시설을 불능화하게 된다. 기존의 핵무기에 대한 처리는 결정되지 않았다. 미국은 보고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처음 핵을 보유한 국가로 지정한 것이 알려지면서 논란을 빚었다.

최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9년 3월 24일에 6자회담의 폐기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7월 16일 김영남(金永南)이 '6자회담은 영원히 끝'이라고 하며 6자회담의 종료선언을 했으나, 9월 18일 김정일은 양자 및 다자회담의 틀에 대해 재언급하였다. 조선 인민군 총사령부는 정전협정 백지화를 선언하였고 판문점 전화를 차단하였다. 또한 불가침 조약을 폐기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주체105, 2016년 1월 6일' 수소탄 실험을 성공했다고 발표했으며 그 진위 여부는 현재 밝혀지고 있다. 이 실험이 성공으로 밝혀질 경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수소탄 보유국이 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은 1직할시, 3특별시, 9도, 3지구로 나뉜다. 수도는 평양직할시이며, 면적 상으로 국토의 1%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의 실효 지배 지역에 대한 모든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해당 부분은 6과에서 관리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반도 북부를 차지하고 있는 국가로 아시아대륙 동부 중앙에 있다. 국토의 90%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용하는 시간대를 평양시간이라고 부르며, 현재 동경 135˚ 기준 자오선 표준시(UTC+09:00)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쪽 경계는 1948년 9월 9일부터 1950년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38선(북위 38˚선)이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로는 군사분계선이다. 북으로는 대략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중화인민공화국 및 러시아와 인접한다. 국토 북단은 북위 43˚ 00' 36˝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 남단은 북위 37˚ 41' 00˝ 황해남도 강령군 등암리, 서단은 동경 124˚ 18' 41˝ 평안북도 신도군 비단섬, 동단은 동경 130˚ 41' 32˝ 라선특별시 우암리이다. 면적은 123,138 km²로, 한반도의 약 55%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대한민국 영토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주장하는 영역과 거의 같다. 이를 따르자면 영토의 남단은 북위 33˚ 6' 32˝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리, 동단은 동경 131˚ 52' 40˝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로 바뀌게 된다. 이 영토의 면적은 222,209.231 km²이며 한반도 본토를 제외한 섬은 5,974.655 km²이다. 섬을 포함한 남북의 최장 거리는 1,127.16 km, 동서의 최장 거리는 645.25 km이다.

한반도는 긴 지질 시대의 거듭되는 지각운동, 침식, 퇴적작용 등에 의해, 산지, 평지, 계곡, 해안, 고원 등 변화가 많은 지형이 되었다. 국토의 약 90%를 산지가 차지하여, 육지의 평균 표고는 440m이다. 많은 국토가 산지 속에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형은 백두대간인 낭림산맥(狼林山脈)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려 서쪽으로 강남산맥(江南山脈), 적유령산맥(狄踰嶺山脈), 묘향산맥(妙香山脈), 언진산맥(彦眞山脈), 멸악산맥(滅惡山脈) 등이 펼쳐져 있고, 함경북도에서 함경남도에 걸쳐 함경산맥(咸鏡山脈)과 부전령산맥(赴戰嶺山脈) 등이 낭림산맥과 이어져 북부와 동부가 높고 서부와 남부로 오면서 점차 낮아진다. 이들 산맥으로부터 발원한 여러 개의 큰 강들은 서해 및 동해로 흐르고 있으며 이들 강을 중심으로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가장 큰 산맥은 북부에 위치하는 랑림산맥, 최고봉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경에 위치하는 백두산(2744m)이다.

평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실질적으로 점유하는 영토 면적의 약 5분의 1로, 서해안 연안이나 서해안에 도달하는 하천의 유역에 집중하고 있다. 하천 연안에는 비옥한 토양이 있지만, 산지의 토양은 유기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개 불모지이다.

주요 하천은 대개 산지의 수원지에서 서쪽으로 흘러 황해로 간다.

가장 긴 압록강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경이다. 다른 주요 하천은 대동강, 예성강, 청천강, 재령강 등이 있다. 두만강만은 동쪽으로 흘러서 동해로 간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부분 대륙성 냉대 기후로 일부 지역에서는 온대 기후가 나타난다. 냉대 지역에서는 냉대 동계 소우 기후, 냉대 습윤 기후가 나타나고 온대 지역에서는 온난 습윤 기후, 온대 하우 기후가 나타난다. 그 외에도 고지대에서는 기후가 Dwc를 띈 아극 기후를 가지고 있는 지역도 있고, 백두산 근처의 높은 지대에서는 툰드라 기후를 띈다.

현재 한반도 전역에 10만여 종의 동식물이 분포하며, 식물계에서는 북쪽 함경북도 백두산의 경우 시베리아나 만주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북방 침엽수림이나 북방계 식물류가 자생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아시아에서 광물 자원이 풍족한 국가 중의 하나이며, 종류로는 철, 은, 납, 아연, 구리, 니켈, 코발트 등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고, 경제적 가치가 있는 광물은 금속광물 19종, 비금속 광물 20종, 에너지 3종을 합한 40여 종에 달하며, 이 중에서 마그네사이트, 중석, 몰리브덴, 흑연, 중정석, 금, 운모 등의 광물은 세계 10위권 내의 매장량을 갖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근거 대부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발표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석유의 경우 서한만(서조선만)에서 하루 약 700배럴 정도의 경미한 양은 생산되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과거의 다국적 석유 기업들의 탐사 결과에 따르면, 한때 의문시되었던 수십조원 규모의 대량의 원유의 매장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부분적인 시장화 정책이 도입되었으나, 전반적인 시장 경제 체제를 받아들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1인당 GDP는 구 공산권 국가보다 낮은 것으로 추정되나, 구체적인 경제상황이 어떠한지는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1인당 명목상 GDP는 2012년 기준 583달러, 인구는 약 2500만명이며 수도 평양의 인구는 약 300만, 국내 총생산은 약 123억 달러로 추계되고, 이것은 남한 1인당 국민소득의 40분의 1, 국내 총생산이 남한의 80분의 1에 해당하며 2012년 UN 기준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180위인 개발도상국이다. 

곽인옥 숙명여자대학교 교수의 의견에 따르면 2017년 기준 북한 내부 현금보유액은 총 1,000억달러 정도인 것으로 조사되었음을 알수가 있고  그 중 민간 부문에서는 430억달러, 정부 부문이 700억달러 정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략 평양 주민의 100만 명이 부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부분 3만 달러 이상인 경우가 많으며 평양 외곽 지역까지 따지면 100만 명 보다도 훨씬 많을 가능성이 높고 특히 GDP 규모로 따지면 평양만 2,700달러가 넘는다. 평양시는 상류층인 왕돈주와 대돈주와 중돈주가 합하여 5%이고 중류층인 소돈주가 15%가 있고 중산층인 돈주급은 20%가 존재하고 있다. 그 반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체 지방에는 대돈주 2부류와 중돈주를 합한 상류층은 1.7%가 존재하고 중류층인 소돈주는 4.5%가 존재하며 특히 돈주급은 전체 지방의 2%가 존재한다. 즉 지방은 대돈주와 중돈주 그리고 소돈주를 포함한 상류층 5%, 돈주급과 중간층을 포함한 중류층 25%, 150달러를 버는 하류층 70%로 구성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모든 산업은 국유화되고 농업은 집단화되었다. 그 후의 통제경제는 일관해서 중공업의 발전과 농업의 기계화를 중시해 왔다. 1954년 전후복구 3개년 계획, 1957년 5개년 계획, 1961년 7개년 계획, 1971년 인민경제 6개년 계획을 시행했다. 이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에 비해 높은 경제성장력을 보였다고 알려졌지만 당시 폐쇄적이고 선전선동을 앞세운 공산권 국가들이 경제성과를 대외에 과도하게 과장한 사례가 많은데 소련만해도 경제성과를 5배이상 허위로 대외에 알렸던 걸 감안할 때 60~70년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개한 경제성과는 신뢰하기 힘들다. 그렇다하더라도 일제시대 건설된 산업시설 대부분이 휴전선 이북에 있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60~70년대까지 공업부분의 경제성과가 어느정도는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대한민국은 박정희 대통령이 시행한 수출주도 경제정책의 성과로 인하여 1970년대부터 대한민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력을 뛰어넘었다.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들은 사회주의 경제모델의 한계를 인정하고 개혁개방과 변화를 통해 경제위기상황을 이겨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가주도형 경제모델을 유지하면서 경제난은 계속해서 가중되고 있고, 이러한 경제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가장 취약한 약점이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은 1993년 공식적으로 계획경제의 실패를 자인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장마당과 시장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2004년부터 시장을 개장하여 시민들이 생활 소비품들을 구매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표적인 시장은 락랑구역에 있는 통일 거리 시장과 만경대 구역에 있는 칠골시장이 있다. 통일 거리 시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상품 및 남한과 미국의 상품을 판매하고 있으며, 진품이 아닌 것들도 있다.

하지만 2009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화폐개혁으로 인하여 결국 물가가 폭등을 하면서 결국 2010년 2월부터 다시 시장이 개방이 되었고 5월 26일에는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에서 5.26 지시를 발표하여 부분적인 경제 개혁안들이 실행을 하여 시장경제를 공식적으로 인정을 하였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임수호 책임연구위원의 의견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생산수단 사유화를 제한적으로나마 인정하고 있으며 특히 기업들의 의무 달성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가격을 결정할 수 있는 기업소 지표도 확대했으며 특히 농지의 돈을 주고 1년 임대도 가능하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회주의 시장 경제의 초입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며 향후 개혁 성과에 따라 중국식이나 베트남식 개혁 모델을 따라 사회주의 시장경제 개혁을 심화시켜나갈 것으로 전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시장 경제의 도입이 이뤄지고 있다고 강조했으며 김정은이 단행한 각종 경제개혁조치가 더해진 결과라는 게 많은 탈북자와 전문가의 분석이 더해졌으며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포함하여 전세계에 사실상 공산주의가 붕괴가 되어 있음을 알수가 있고 전세계가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 국가의 식량난이 어느 정도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고난의 행군 시기의 식량난은 심각하다는 평가를 받으나, 2010년대에 들어서는 식량난이 과장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대남 경협기구를 축소, 개편한다는 설에 대해서 남한 정부나 전문가는 가능성이 낮거나 남북관계 차단의 의도가 아니라고 했다. 식량난이 심각해지면서 북은 라면 대량생산을 통해 극복하겠다고 발표했다.

유럽연합(EU) 전문매체인 '유랙티브닷컴'은 17일 세계 식량의 날(10월 16일)에 즈음해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 등이 최근 발표한 '글로벌 기아 지수(GLOBAL HUNGER INDEX·GHI)' 보고서를 인용해 이같이 보도했다. 이 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기준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5세 미만 아동의 발달장애율이나 사망률은 많이 줄었지만 전반적인 기아지수는 여전히 28.6점으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대한민국 통계청 등에 따르면 201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발전량은 216억 kWh로, 한국의 70년대 후반 1인당 발전량 수준에 불과하고 같은 해 한국의 발전량은 5220억 kWh로, 북한의 24배에 달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발전설비용량은 2007년 795만kW로 정점을 찍은 뒤 줄어들다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희천발전소를 비롯한 발전소 잇단 준공으로 2014년 725만kW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이는 북한이 1987년에 발표한 제3차 7개년 계획의 발전 설비 용량 목표치인 1천700만kW에 비하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고 대한민국 통일부가 지난 2013년 탈북자 1,070여 명을 대상으로 심층 면접 조사를 실시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공장기업소의 하루 평균 전력 공급 시간은 거의 12시간으로 조사되었다.

전력 공급 중단 시 자체 발전을 통해 전력 공급을 한 곳은 14.9%에 불과하고 2011년 이후 공장 내 생산라인 평균 개수는 거의 19개로, 이 가운데 가동된 라인은 절반 미만에 그쳤다.

문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력 수급의 60%를 담당하는 수력 발전이 가뭄과 겨울철 갈수기 등 기상 여건에 따라 전력 생산이 불안정하다는 데 있고 지난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았던 것도 2014년에 이어 지난해 6월까지 이어진 가뭄으로 수력발전소의 가동률이 떨어졌음을 한국 산업연구원 이석기 선임 연구 위원이 말했다.

하지만 이 전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정책적으로 태양열 이용을 권장하고 있으며 김정은은 2010년대 중반부터 태양열 등을 활용한 자연 에너지를 더 많이 생산해 이용하라고 주문한 바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태양열 패널 가격은 2 - 3년 전에 비해 많이 내렸고 태양열 발전 시설은 제재 대상이 아니라 중국에서 수입이 자유로워 열 효율이 개선돼 패널의 크기나 무게도 줄었으며 웬만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가정에서는 대부분 태양광 설치가 끝나 수요도 감소세로 보이고 있고 대신 공장과 기업소, 협동농장에서 사용하는 대용량 태양열 시설은 늘고 있다.

데일리 NK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개성이나 원산 등 주요 도시뿐만 아니라 평북 염천 등 내륙 산간 도시를 촬영한 사진과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세대별 태양광 발전 보급률은 50%에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살만한 주민들은 밥은 먹고 살 만한 주민은 거의 모두 태양광 패널을 달며 크기가 작은 건 150W 태양광 패널이고 큰 것은 200 - 250W라고 밝히고 있음을 알수가 있고 사용 시간은 최소 8시간에서 최대 13시간까지 사용을 할 수 있으며 예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전기가 일정하게 안 와서 인버터도 따로 해야 했는데 요즘에는 태양광 패널에 축전지와 인버터가 함께 나온다고 밝히고 중국에서 파는 태양광 패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실정에 맞게 인버터가 같이 나와서 이제는 인버터를 잘 안 산다고 밝혔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2010년대 경제 개혁 이후 사적 고용의 확대를 지적하는 사례가 몇 존재한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적 고용의 확대는 아직까지 대부분 비공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돈주는 물론 평범한 장사꾼들과 가정주부들도 일공을 채용해 구멍탄을 빚는 것이 시간과 돈을 절약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고 종전에는 자신이 석탄을 구입해 구멍탄을 직접 만들어 온 주민들이 최근에는 구멍탄을 만들어 주는 일공을 고용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주택을 아파트 또는 문화 주택으로 부르며, 이는 크게 3층에서 4층까지 있는 콘크리트 고밀도 건축물을 말한다. 이 또한 공산주의 국가의 법에 따라 주택을 국가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매달 사용료를 내는 형식으로 운영되고 남한 주택제도와 달리 가정 총노동 월급에서 전기료, 수도료 등을 충당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직업에 따라 주택의 구성이 달라진다. 조선로동당, 내각, 조선인민군 간부들은 독립식 다층 주택으로 정원과 수세식 화장실이 구비되어있는 곳에서 거주하는 반면, 말단 노동자 등은 방 1~2개와 부엌이 딸린 공영주택에서 거주한다. 또한 상위계층은 주택보급률이 굉장히 높은데 일반 주민들은 주택을 배정받기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 입사증을 받고 이동허가를 받아 이사하는데 이를 받기 위해서 몇 년이 소요된다. 그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들은 서류수정작업을 통해 거주지를 변경한다.

대표적인 주택지구는 평양시 중구역 아파트단지와 천리마 거리 아파트 단지, 함경남도 단천시 신단천동 주택단지와 황해북도 개성시 청년거리 아파트 단지 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주택을 흔히 경제문제에 비유했기 때문에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주택건설에 주민들을 독려하고 있지만, 요즘 정부에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식생활을 강조하기 때문에 주택건설도 부진한 면이 없지 않다.

이들은 30평대 아파트를 3 ~ 4만 달러에 분양받아 인테리어를 한 뒤 최고 10만 달러에 되팔아 2배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다.

이들 브로커는 국내 돈주뿐만 아니라 화교 상인이나 조선족의 자본을 유치하는 역할을 하며 이들 민간 사업자는 자금력을 가진 국내외 개인일 수 있고 여러 명의 컨소시엄 형태나 단체일 수도 있다.

이들은 건설 자금 - 자재 - 장비 등에 필요한 일체의 자금과 현물을 제공하고 대개 자재는 중국에서 수입하기 때문에 달러로 거래되고 수입권도 수도건설총국이나 제2경제, 인민보안성 등과 같은 극히 일부 기관이 독점하고 있다.

가구당 구화페 100,000원을 신화폐 1,000원으로 교환해주고 그 외에는 교환해주지 않았다. 다만, 정부에서 한 사람당 신화폐 500원(구화폐 50,000원)을 일괄적으로 지급했다. 즉 4인가구인 경우 정부으로부터 지급 받은 2,000원과 1,000원(구화폐가 100,000원 이상이 있었을 경우임)을 합한 3,000원정도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화폐개혁은 모두가 비슷한 조건으로 다시 출발한다는 점과 구화폐가 단 10,000원도 없던 하위층의 경우엔 공짜돈이 생겼다는 점, 또 2-3,000원정도의 월급이 생활에 실제적으로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점, 등으로 하, 중상위층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화폐 교환조건을 제대로 정해놓지 못하여 주민들의 반발이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화폐개혁을 주도한 김정일의 실정을 숨기기 위해 박남기를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초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을 지고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 박남기 조선로동당 전 계획재정부장이 '남조선 간첩' 혐의를 받아 숙청된 것으로 확인됐지만 실제는 충언을 하다가 결국 김정일의 분노를 사서 숙청되었다는 설이 있음을 알수가 있다.

하지만 2013년 이후 2019년 북한연구학회 추계학술회의에서 반론이 나왔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2013년 이후 극심한 물가 상승을 잡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당국의 통화 정책이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라는 전문가의 분석이 나왔다.

정연욱 박사에 따르면 쌀 가격 등으로 추정한 북한의 물가 상승률은 2011년 229%까지 폭등했지만, 2014년에 마이너스를 기록한 이후 5% 이내로 안정됐음을 알수가 있고 계속 안정중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제시한 북한의 환율 추이를 보면 불안정하던 환율은 2013년부터 8천원 선을 굳게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 그가 가능하던 이유로는 통화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와 악화일로로만 걷지 않는다면 악화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평하였음을 알수가 있다.

김정일이 살아있을 때 후계자였던 김정은은 새로운 중국식 경제개혁 준비를 2011년 8월부터 12월까지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와 대외 경제 부서의 과장급 혹은 부원들을 파견보내어 중국식 경제개혁 사업을 지시하였다.

이때 12월 14일 연구 결론은 생산 공장 및 서비스 업종에 대하여 임대정책을 기본으로 내세우는 작업을 하기로 결론내리고 2012년 4월에 경제개혁을 시행을 하려고 하였음을 알수가 있었고 이때부터 상무조가 편성이 되려고 하는 시점에 결국 김정일이 사망하였는데 결국 김정은의 지시로 중단없이 계속 4월로 확정이 되어 추진을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결국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으로 한마디 때문에 4월의 경제 개혁 지시가 6월로 미루어져 있었으나 간신히 무마되어 6월에 내각 상무조가 편성이 되어 12.1 경제개혁조치로 시행이 되어 독립채산제 및 포전 담당 책임제 시범 실시를 한 끝에 3월 1일 3.1 경제개혁조치가 실시됨으로 북한 전역에 독립채산제가 실시가 되었다.

기업소는 제품 개발권과 품질 관리권, 인재 관리권을 행사해 지식 경제 시대의 요구에 맞게 새기술, 새제품을 적극 개발하고 제품의 품질을 개선해 기업소의 경쟁력을 높이도록 했다.

더불어 과학자와 기술자가 근로자들과 함께 첨단 돌파의 주인으로 내세워 기업소가 새 기술의 적극적인 수요를 충족되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으며 그리고 차등 임금제를 수립하여 월급을 일한만큼 많이 주어야 하고 공정하게 받아야 한다고 역설을 하였음을 김정은이 담화로 발표를 하였다.

현재 김영환 준비하는 미래 대표의 말에 의거하면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대 월급 인상률은 일반 공업인에게는 25배의 월급 인상률이 올라 150달러의 월급 인상률이 올랐고 일반 편의 서비스 업종에 대하여서는 100달러의 월급 인상률이 올랐다는 것이 확인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환산하면 현재 계획형 기업에도 상당한 액수가 인상이 되었으며 현재 가동률도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에 60% 가까이 가동률이 올라갔다.

은행에 자금을 예치함으로써 은행이 기업에게 넘겨줌으로 특히 영향력을 크게 감소할 수 있는 기반을 담은 규정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위험 요소도 크게 감소할 수 있는 투자방식이다.

차후 채무 상환 불응시 현금 계좌 선 압류 및 현금 수입이 들어오는 즉시 선입금되는 조치로 인한 강제 집행을 통한 사전에 예방할 수 있도록 하는 안전 조항들도 수록이 되어 있다.

특히 고정 자산을 임대하거나 혹은 내각에 관할하에 소규모 기업에게 이관할 수 있음을 차후인 2015년에 공식화 하였으며 이를 2015년 기업소법에 명확히 하였다.

한반도 지역은 세계적으로 비교적 민족적 동질성이 높은 편에 속한다. 한반도 북부에는 과거 퉁구스계 민족(말갈족·여진족 등)의 유입이 잦았으나, 한국 전쟁 이후 외부 민족 유입이 사실상 차단되었다. 현재는 주민의 절대다수가 한민족이며, 매우 소수의 외국인 거주자(주로 중국인, 그 밖에 러시아인, 몽골인 등)가 있다. 그리고 1950년대~1970년대에 월북한 대한민국 주민도 일부 거주하고 있다.

UN이 추정하는 인구는 2019년 기준 약 2550만명이지만, 이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주장 이 있다.

공용어는 조선어이며, 대한민국과 동일하게 한글로 표기된다. 표준어는 문화어라고 하며,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 방언에 바탕을 둔 언어를 표방한다. 표기상 한자의 사용은 완전히 폐지하였으며, 두음법칙(예: 북-녀자, 남-여자)과 사이시옷(예: 북-시내물, 남-시냇물)을 사용하지 않고, 자모의 사전 배열 등에서도 대한민국과 차이가 있다. 어휘는 외래어 대신 고유어를 활용한 어휘를 많이 만들어 쓰고 있다. 영어와 일본어에서 들어온 말이 외래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한민국과 달리 중국어, 러시아어에서 온 외래어가 많다. 일상 생활, 정치 등의 분야에서는 대한민국 표준어와 통역 없이 소통이 가능하나 의학 용어와 같은 기술적 어휘에는 차이가 커 이 부분은 의사소통이 어렵다.

외국어로는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으나 중국과의 경제교류 등의 교류강화로 중국어를 많이 가르치고 있다. 러시아어는 소련 해체 이후 인기가 많이 줄어들었다. 영어는 영국식 영어를 기준으로 채택하고 있다.

지역 방언으로 방언연구회(2001)의 구분에 따르면 서북 방언, 동북 방언, 중부 방언이 통용된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 유수의 인권단체들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권상태가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이 가장 열악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파악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범수용소 6곳에는 인구의 0.85% 정도인 15만 4천여 명의 주민이 감금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정치범들과 그 가족이 재판 없이 이들 수용소로 보내지며, 이곳에서는 심문, 강간, 고문, 강제노동, 의료 서비스 배제, 강제낙태, 생체실험 등이 행해진다. 또한 이곳에서 그들은 결혼의 자유도 박탈당하며 턱없이 낮은 식량배급을 받고, 외부와의 연락은 일절 차단된다..

또한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농촌지원을 명분으로 아편 재배에 어린이를 동원하고 있는 실태를 지적하였으며, 同 위원회에 출석한 북측 대표단은 유사시 미성년 아동들을 소년병으로 활용할 의도가 있음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평안남도 개천(14호 관리소)과 북창(18호 관리소), 함경남도 요덕(15호관리소), 함경북도 화성(16호 관리소), 청진(25호 관리소), 회령(22호 관리소) 등 6곳의 정치범 수용소가 있다.

《조선중앙연감》에 따르면, 광복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역은 대한민국보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먼저 전파된 지역으로 교회의 수가 남한보다 더 많았으며 종교 활동도 더욱 활발했다. 광복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천도교도 약 150만 명, 불교도 약 37만 5000명, 개신교도 약 20만 명, 천주교도 약 5만 7000명 등 총계 약 200만 명의 종교인이 있었다. 이는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구의 22.2% 수준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많은 신도수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탄압을 단행했던 이유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종교가 ‘반동적이며 비과학적인 세계관’으로서 어떤 형태의 종교이든 인간의 의식이 환상적으로 왜곡 반영된 ‘허위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종교를 완전히 억제할 수 없었지만, 분단 이후 북한에 들어선 사회주의 정권은 종교억압 정책을 추진했다. 이 사회주의의 이념적 배경을 제공했던 칼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규정했다. 종교는 사람들을 사후세계의 행복에 몰두하게 만들고 현실세계의 불평등과 비인간적인 사회질서를 허용하게 만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련 군정과 사회주의 정권은 종교를 반동주의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보고 배척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국가차원에서 기존의 민간종교조직을 흡수하고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11월 조선기독교연맹과 조선불교도연맹을 세워 이러한 정책을 반영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종교의 자유는 한국전쟁 이전까지 허용되었다. 당시 북한의 사회주의 정권은 사회주의 체제의 정착과 개혁을 위한 지지기반이 취약했다. 해방 이전 대부분의 조직들은 일제의 이익을 위해 설립되고 운영된 조직으로서 해방 이후 급속히 힘을 잃고 없어졌다. 신속한 개혁의 차원에서 북한의 혁명주체세력은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세력 중 하나이자 지식인들의 집결지인 종교조직을 용인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명절은 민속명절과 국가명절로 나뉜다. 민속명절은 설, 정월 대보름, 단오, 추석 등을 말하며 시기는 대한민국과 대체적으로 동일하다. 신정은 1월 1일부터 2일까지로 대한민국의 신정(1월 1일)보다 오래 휴식을 취한다. 국가명절은 대표적으로 8개를 기념하는데 태양절(김일성 생일, 4월 15일), 광명성절(김정일 생일, 2월16일), 인민군 창건일(4월 25일), 노동절(5월 1일), 조국 해방일(8월 15일), 공화국 창건일(건국일, 9월 9일), 조선로동당 창건일(10월 10일), 사회주의헌법절(12월 27일)이 있다. 이 가운데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부터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까지는 연속적인 축제기간이며 특히 김일성의 생일을 가장 크게 기념하고 있다.

기념일으로는 노동자들의 의무 휴식을 위한 농업근로자절(3월 5일), 어부절(3월 22일), 탄부절(7월 7일)이 있고, 조선광복회 창건일(5월 5일), 철도절(5월 11일), 국제아동절(6월 1일), 김일성 서거일(7월 8일), 타도제국주의 동맹결성일(10월 17일), 학생독립기념일(11월 3일)이 있다.

문화 활동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보호되고 장려되고 있다. 대도시에는 역사 박물관이나 영화관, 도서관이 정비되고 있다. 정부는 국립의 교향악단, 극장, 무용단 등을 갖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든 면에서 군사문화와 연관 짓고 있으며 농사나 공장에서의 물자 생산을 농업전투, 공업전투, 생산전투 등의 단어로 표현할 만큼 아주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군인뿐만 아니라 철도공무원도 군대식 계급을 부여(역장 – 대위, 차장 – 소위, 개찰담당 – 상등병, 기관사 – 중사 등)할 정도이다.

문예활동은 당책 구현, 공산주의 선전, 공산주의적 인간개조, 노동의욕 제고와 주체사상 강화 등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문예정책 또한 선전과 선동의 일환으로서 문학이나 예술을 이용하고 있다. 창작활동은 이른바 공산주의헌법 45조에 규정되어 있는 `민족적 형식에 공산주의적 내용을 담은 혁명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공산주의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묘사방법이 그 기조가 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체육정책은 주민들을 공산혁명과 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인한 투사형 인간으로 양성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김일성 우상화와 국방력 강화의 수단으로, 대외적으로는 스포츠를 통한 정치외교수단으로서 이용하고자 하며, 반미사상, 대남전략수단으로까지 이용하고 있다. 체육정책의 기준은 공산주의 혁명과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자들을 육성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체육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1958년 9월 1일 개교한 평양체육대학과 1977년에 설립한 중앙체육학원, 그리고 73년부터 각 도에 1개교씩 설치한 고등전문학교를 두고 있으며, 교원대학과 사범대학에 체육학부가 있다. 최대의 체육시설은 김일성경기장이며, 그 밖에 지방도시인 혜산· 함흥· 사리원· 원산· 신의주 등지에 경기장을 두고 있다. 실내체육관으로는 배구· 농구· 탁구· 체조 등 11개 종목의 경기를 할 수 있는 원산· 남포· 함흥· 강서 체육관 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학단체는 조선문학가동맹이며, 일제 강점기 1920년대 활동했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통칭 카프)이라는 문단이 전신이다. 이 단체는 사회주의 사실문화를 한국에 전파하면서 지식인들을 개몽하고, 항일운동을 펼쳤다. 조선문학가동맹은 1960년대에 숙청당한 한설야와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이 가입했다. 한설야의 작품은 오늘날 청소년들이 읽을 정도로 해금되어 있다. 왜냐하면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그의 저서 문학예술론을 통해서 읽을 수 있는 문학작품을 고쳐서라도 읽게 하면 좋다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조선문학 2003년 5월호는 한설야의 작품 《승냥이》가 발표되었다.

김일성 국가주석과 김정일 조선로동당 총비서의 행적을 찬양하는 문화를 수령형상문학이라고 하는데, 이 문화는 1960년대 중반부터 만들어졌다. 이 문화는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이어지는 후계체제 구축을 위해 사용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체사상을 창시할 수 있게 된 계기이다. 한편, 역사 문학이나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대한 문학, 외국 문학이 있는데, 역사 문학으로 대표되는 사람이 홍명희와 그의 손자 홍석중이다. 홍명희의 작품인 림꺽정은 조선 전기의 도적인 임꺽정을 그린 역사적 장편소설로서, 이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졌고, 한국에서도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갑오농민전쟁도 제국주의에 맞써 투쟁한 전봉준의 일대기를 그린 것인데, 이 작품도 역시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홍석중은 홍명희의 손자로써, 그도 역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학의 자랑거리이다. 외국소설로는 중국 소설과 러시아 소설이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 시인으로는 조기천과 백하와 신흥국 등 이 있는데, 조기천은 시 백두산과 휘파람으로 유명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흥시인 신흥국은 얼마 전 음력설에 풍경을 묘사한 시로 유명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학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공산혁명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소련의 소비에트 작가동맹을 본따 만든 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은 당과 깊이 연관되어 당의 통제를 받으며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예정책은 당정책을 반영하는 것인데 한설야는 1953년 9월 26일 전국 작가.예술가 대회에서 진술한 보고에서 우리의 문학예술은 당적인 문학예술이라고 천명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53년 10호, 125쪽).

악단으로는 보천보전자악단, 왕재산경음악단,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 조선인민군군악단, 조선국립교향악단 등이 있다. 근래 들어서는 삼지연악단, 모란봉악단 그리고 청봉악단 등이 창단되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중가요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찬양하는 노래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여러 대학생이 대한민국의 가수 안재욱의 노래를 부르다가 처벌받는 경우도 있었다.

평양직할시에는,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윤이상 (尹伊桑)의 음악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된 윤이상음악연구소가 있다.

대부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노래는 혁명가요와 선전가요들이 많지만, 꽤 서정적인 노래도 있다.

보천보전자악단에서 연주한 〈다시 만납시다〉, 〈우리 민족 제일일세〉, 〈반갑습니다〉는 보천보전자악단의 단원인 여성가수 리경숙이 부른 노래로 조선민족제일주의 원칙을 바탕으로 작곡한 노래이며, 〈 기러기떼 날으네〉, 〈운명의 갈림길〉이라는 노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예술 영화 《민족과 운명》의 주제곡이다. 이밖에 혁명가요로 〈적기가〉, 〈총동원가〉가 있는데, 대한민국에서 《실미도》라는 영화를 만들 때 〈적기가〉를 배경음악으로 쓰다가 이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 국가보안법에 위반되는 소동이 있었다.

왕재산경음악단에서 연주하는 음악은 이미 부른 노래를 전자악기로 연주한 경음악이 많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격대 말파리 달리네〉, 〈통일아리랑〉, 민요 〈바다의 노래〉가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영화를 많이 만드는 데 애를 써서, 자신이 직접 《영화예술론》이라는 논문을 집필할 정도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예술영화는 조선인민군 4.25예술영화촬영소에서 제작된다. 가장 대표적인 영화는 김일성 전 국가주석의 일제강점기 때 생애를 그린 《조선의 별》, 1992년에 해외동포들의 행적을 그린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예술영화 《온달전》, 스포츠를 장려하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책을 바탕으로 만든 예술영화 《가족롱구선수단》, 조선 제 13대 임금 명종 때 도적, 임꺽정을 배경으로 하는 예술영화 《림꺽정》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에서는 정책을 따르도록 선동하거나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인민들의 생활조건을 상향시키려는 장면들이 많이 있다.

또한 과학기술을 설명하기 위해서 만든 과학영화가 방송되고 있는데, 관람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다양한 효과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중앙텔레비죤의 20시 보도가 끝나기 전에 과학영화에 대한 예고편이 방송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천연기념물〉, 〈고구려의 동명성왕-고주몽〉, 〈평양의 4계절〉, 〈강냉이오사리종이〉, 〈우리 생활에 필요한 콤퓨터상식〉, 〈우리나라의 최초의 철갑선-거북선〉, 〈좋은 나무를 많이 심자〉, 〈3·26전선공장이 어떻게 모범기업이 되었는가〉, 〈조선의 천연기념물 클락새〉, 〈룡정어를 많이 기르자〉, 〈우리나라의 저작권소유법〉이 있다.

어린이들에게는 조선중앙텔레비죤의 17시 보도 이후 방영되는 아동영화가 인기가 많다. 아동영화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어린이가 볼 수 있도록 만든 영화로 그림을 그려서 만들거나, 인형극을 통해 만드는 경우가 있다. 2019년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아동영화는 조선4·26아동영화촬영소에서 제작된다. 최근 컴퓨터를 이용해서 새로운 아동영화를 제작하는 중이며, 이 촬영소에 대해서 로동신문과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직접 기자들이 취재하기도 했다. 아동영화의 문학은 촬영소의 영화문학가가 담당하지만, 김일성의 탄생일인 태양절을 기념하여 전국 아동영화문학현상모집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당선된 문학작품이 아동영화의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아동영화의 대사는 방송연극단에서 담당한다.

아동영화의 내용은 도덕, 예절, 과학기술에 관해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아동영화는 다부작 아동영화인, 《령리한 너구리》와 《소년장수》가 있다. 그 중 《령리한 너구리》는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과학의 원리로 쉽게 풀이해 과학 교양을 어린이들에게 함양시키는 아동영화이며, 《소년장수》는 간약한 호비와 착한 쇠매의 결전이 내용으로, 권선징악을 주요 내용으로 삼은 아동영화이다. 이외에도 친어머니의 병을 고치려고 딸이 인삼을 찾아 험난한 일을 하는 《산삼꽃》과 교통질서에 대한 캠페인 만화인 《교통질서를 잘 지켜요》, 그리고 온갖 나쁜 일을 저질러 동물을 괴롭히다가 고슴도치에게 혼줄이 나는 《호랑이와 고슴도치》, 분도기()를 이용해 적을 물리치는 《연필포탄》, 늑대에게 잡아먹힐 뻔하다가 나중에 자신의 꾀로 늑대를 물리치고 살아남은 《승냥이를 이긴 너구리》, 돌고래를 훈련하여 경제활동을 보다 수월하게 하려는 《곱등어를 기르는 소년》 등이 있다. 2008년, 조선4·26아동영화촬영소의 부총장 김관선은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좋아하는 아동영화를 창작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각종 영화 음악은 영화 및 방송음악단이 제작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의 식량 조달 방법은 크게 배급과 스스로의 조달이 있다. 배급은 정부 당국에서 미리 나누어 놓은 9등급에 따라 지급된다. 예를 들자면 유아에겐 100g을, 노동자에겐 900g을 배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식량부족으로 인해 공급이 끊긴지 오래되었으며 주민들은 스스로 조달하기 위해 장마당을 이용한다. 장마당은 대한민국의 시장같은 곳이나 암시장 성격이 강하다. 장마당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성행하고 있으며 상류층을 제외한 주민들은 사실상 식량공급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생필품을 장마당에서 조달한다.

음식은 평양냉면 (平壤冷麵)이나 조선인삼 (朝鮮人參)이 유명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식당은 옥류관과 청류관, 평양메기탕집, 평양숭어국집 등이 있는데, 평양냉면과 평양온반으로 유명한 곳이 바로 옥류관이다. 옥류관은 김정일 조선로동당 총비서가 6.15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저녁만찬을 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자주 개를 잡아먹지 않으나, 보신탕을 전문으로 하는 락랑구역의 평양단고기집과 중구역의 고려단고기집이 있다. (보신탕을 단고기로 한 것은 김일성 주석이 요리사에게 단고기로 부르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경제난을 타파하고, 외화를 모으기 위해 해외에서 소수의 식당들을 운영하고 있는데, 거기서 중국계가 제일 많다. 심지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식당이 존재하고 있을 정도이다. 해외의 식당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해외에서 온 유학생이나 국내의 요리사들이 직접 그 식당에 가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식당들은 대한민국에서 살다가 이주한 재중동포들이나 중국인들이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끔 손님들이 적은 편이다(대표적인 해외 식당은 해당화와 목란관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심양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만든 김치를 파는 평양김치대리소라는 가게가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정부의 배급제도가 의생활에도 적용되었다. 공급이 원활하게 진행되던 때에는 대다수 주민들이 인민반에서 공급카드를 발급받은 뒤 각자 상점에 가서 카드를 제시해 자신에게 돌아올 옷감과 의복을 국정 가격으로 구매하여 사용했다. 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의복 배급은 식량 배급보다 먼저 중단되었고 주민들은 장마당에서 옷감을 구한다. 작업복을 많이 입었으나 외국과의 교류를 진행하면서 여성은 양복이나 치마같은 것들이 많이 발전했고 머리모양도 파마를 하는 등 외국 문화를 따라갔다.

최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경공업분야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증가하고 있다. 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최근시기 질좋은 경공업제품을 만들 수 있는 튼튼한 토대가 갖추어졌다”며 평양양말공장, 신의주방직공장, 보통강신발공장, 평양방직공장 등을 예시했다. 또한 김정은이 현지지도를 나서는 모습까지 포착되면서 직물생산은 더욱 활기를 띄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공급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유네스코 (UNESCO)의 세계유산 리스트에 등록된 고구려 고분군이 평양직할시와 남포특급시(평안남도)에 있다. 이 유적은, 2004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 (WHC)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초의 세계 유산으로서 등록되었다. 고구려 고분군은, 선명한 벽화 고분을 포함하는 63기의 고분에서, 벽화는, 일본의  이나  벽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지고 있다(덧붙여, 중화인민공화국 동북부에 있는  도 동시에 세계 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특히 서비스 문물 개방 과정에도 소홀히 하지 않아서 2016년부터 만수대 TV를 케이블 TV로 전격 송출하여 UEFA 유로파리그나 혹은 동구권 영화들을 시청할 수 있도록 전격 조치를 하였다.

만수대 TV에서 직접 운영하는 사이트인 목란비디오에서 판권을 사들여서 미국 애니메이션 영화나 혹은 동구권 영화들을 DVD로 발매하여 판매를 하고 있다.

더군다나 나의 길동무 앱 스토어를 통하여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금지되었던 외국 도서들까지 대부분 허용하여 구매할 시 구독할 수 있는 자유까지 주었고 이를 김흥광 대표가 밝혔다.

아예 2017년 8월에는 김정은의 재가 하에 HSPA 모바일 인트라넷 서비스를 허용하여 HSPA USB Stick 판매를 허용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들에게 판매를 하였음을 알수가 있었고 이를 고려링크에서 인트라넷 서비스 이용자로 개통을 하였다.

현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바일 FPS 게임이 유명하여 스마트폰으로 다운로드 받아서 게임을 즐기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는 것이고 특히 카운터 스트라이크와 같은 게임을 즐기고 있다.

더군다나 스포츠 게임이 유명하여 유로파리그 선수나 혹은 국가 대표팀을 직접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며 특히 그래픽도 상당히 좋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년간의 취학전 교육인 탁아소와 유치원이 있으며, 한국의 초등학교와 비슷한 소학교 5년, 고등중학교 6년, 합계 12년간의 의무교육 제도가 정비되고 있다.

유치원은 높은 반과 낮은 반으로 나뉘어 있는데, 높은 반부터는 12년제 의무교육과정에 포함된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00~35,000개의 유치원과 탁아소가 있고, 약 2,500개의 고급중학교, 2,500여개 초급중학교와 5,000여 개의 소학교가 운영된다. 또한 도서지방과 산간지방에서 약 100개의 분교가 운영하고 있다.

고등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인 반면 대학의 경우 상위 25~30%의 인원만 입학이 가능하며 교육비는 모두 국가가 지급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영국식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토플 응시자 평균점수는 2006년의 경우 120점 만점에 평균 69점으로, 대한민국의 72점, 일본의 65점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었다.

결국 리승기 박사가 월북한 뒤 섬유 과정을 생략하고 원료 공정을 개발하여 무연탄으로 전용하는 과정과 카바이드 공정, 아세트 알데히드를 아세트산으로 변경하여 원료과정을 개발하여 1957년 개발에 성공하여 김일성으로부터 축전을 받았다.

주체철은 원래 입철이라는 구단광을 청진 제강소에서 만들었으나 36만 톤의 규모로는 부족하여 개건 공사를 거쳤고 특히 성진제강련합기업소에도 공사를 거쳐서 입철을 더욱 강화하여 삼화철이라는 구단광을 새로 만들어 제강과정과 함께 사용하였으나 결국 노폐물이 자주 회전로에 끼며 특히 코크스도 상당부분 많이 넣어야 하여 결국 경제난은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1998년부터 주체철 사업이 시작하여 회전로 부문과 산소열법 용광로 부문 그리고 갈탄 제철 용광로 부문을 나누어 회전로 부문은 성진제강련합기업소가 산소열법용광로 부문은 황해제철련합기업소가 갈탄 제철 용광로 부문은 김책제철련합기업소가 나누어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회전로 부문에서는 결국 이사업이 10년을 끌동안 이 공법은 실패를 연속으로 하였으며 국내 기술로 활용할 수 없는 인식이 쌓여갔고 특히 결국 젖은 물가마니를 쓰고 특히 불속으로 뛰어들었으며 거기서 문제점을 발견을 하였다.

실패를 통한 학습으로 2004년 50%의 코크스 배합 사용 공법을 달성을 하여 산화 배소 구단광을 만들게 되었으며 하지만 결국 60%로 실수율이 떨어지고 특수강을 생산하여 수출을 하여야 하는데 품질이 떨어지는 등 결국 원점으로 돌려서 개발을 다시 하였다.

결국 산소 용융 방법을 채택하기로 하고 특히 실험 공장에서 6kg의 산소를 주입하여 2kg의 용선을 출선하는데 성공하자 결국 공업로 도입을 추구하였다.

성진제강련합기업소에서도 특히 공장이 책임지겠다는 각오와 함께 실험을 계속하자고 하였고 특히 점결제 무사용과 함께 저질 석탄으로 기술 경제 지표를 개선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회전로가 계속 폭발하자 방법이 없던 한 박사가 결국 용융로 안에 들어가서 결국 폭발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거기서 문제점을 해결해 품질이 좋은 용선이 출선이 되어 김정일이 극찬하고 이를 치하하였다.김책제철련합기업소에서는 결국 2003년에는 국가 과학원 5월 28일 금속 연구소에서 발명 특허를 내어 결국 갈탄 제철에 의한 용선 생산법을 완비를 하는데 성공을 하여 이것을 통하여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고 여기에 김책 제철 연합 기업소가 주도하여 시험 공장을 차려서 실험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오류가 나기 쉬웠고 특히 불량이 많았으며 가는 곳곳마다 실패를 하여 결국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컸으며 특히 이것에 대한 포기론도 있었으나 결국 김정일은 한발짝이 아니라 반발짝도 후퇴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때 100만 달러를 추가로 투자를 하면서 힘을 내기 시작을 하였다.

결국 갈탄 용광로가 개발이 완료되고 실험을 계속한 결과 1차 실험에서는 결국 지표 달성에 실패를 하였는데 반하여 2차 실험에서는 부분적인 달성에만 하였을 뿐 그리하여 결국 성과가 없자 결국 3차 실험에서 정상적인 지표 달성에 성공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공을 시키고 특히 2010년에 출선을 하는데 성공을 하여 김정일이 치하를 하면서 기뻐하였고 특히 성진제강련합기업소에 버금가는 주체철 개발이라면서 좋아하였다.

그리고 2010년에 결국 김정일은 현지지도를 가면서 결국 김책 제철 연합 기업소 갈탄 용광로를 보면서 흐뭇하였고 출선 장면을 봤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가장 야심차게 준비하는 게 전자 공학 부문 특히 반도체 사업이며 특히 반도체 공학은 1983년부터 준비하여 평양과 성천 그리고 은정지구를 기준으로 반도체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특히 김정일과 김정은이 가장 투자를 많이 하는 것도 반도체 장비에 투자를 하고 있다.

반도체 공장을 알아본다면 리철호가 사업하는 기계 공장과 89호 집적회로 공장, 평양 집적회로 공장, 평양 집적회로 시험 공장, Glocom, 111호 마스크 제작소에가장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다.

특히 제프리 루이스 박사와 통일연구원에서도 연구보고서가 나와 현재 반도체 사업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고 특히 리철호가 사업하는 기계 공장과 89호 집적회로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는 마이크로프로세서는 대부분 군수 공장에 납품이 되고 있다.

그리고 하태경 의원도 현재 일본이 조총련을 통하여 북한으로 불화수소와 그외의 장비를 납품하고 있고 특히 조선민주주인민공화국 스스로도 전자빔 리소그래피 장비를 공급받았다고 인정을 하였다.

현재 조선중앙통신과 내나라에서도 SoC 제작에 성공하였다고 보도 하였으며 한술더떠 로동신문에서는 삼성전자에서 개발한 저전력 LP형 HKMG 개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공하였다고 보도하였고 이를 김정은이 축하문을 111호 마스크 제작소 과학자들에게 직접 송부하였다고 밝혔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반도체 개발 공정 과정을 거치자면 2014년에는 20nm 공정을 개발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고 2017년에는 LP형 HKMG를 개발하는데 성공을 거두었으며 2019년에는 10nm FinFET 공정을 개발하여 역시 파운드리하여 입증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전화 통신망의 포화로 인하여 2000년대 전국적인 광케이블 부설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독자적인 인트라넷 망을 갖게 되었으며 2000년 기준으로 도 - 시 - 군까지 광케이블 공사가 부설이 완료가 되었고 특히 리 기준과 가정집에는 56Kbps 수준의 모뎀 통신망이 부설이 되어 있었고, 2010년 기준으로 도 - 시 - 군 - 면 - 리 기준으로 광케이블 부설 공사가 완료가 되었고 가정집에서는 ADSL 모뎀 통신망이 부설이 완료가 되었다.

현재 광명망 서비스 중에서는 메일 서비스와 전자 게시판 서비스, 채팅 서비스, 온라인 게임 서비스를 추진을 하여 평양 주민들에게 유흥을 즐기기 위한 서비스를 하고 있음을 알수가 있었고 한때는 자체로 게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고 2008년 중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이집트의 오라스콤과 이동통신 계약을 하게 되면서 오라스콤이 광명망을 활용하며 디지털 이동통신망을 구축하였고 지방 지사를 연결해 관리하게 되었다.

오라스콤에서 휴대폰을 이용한 WAP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광명망을 개인이 이용하도록 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광명망 내에 개설된 게시판에 글을 쓰게 되면 홈페이지의 관리자나 감독 기관에서 글을 검열한 후에 게시하는 방식의 제한이 생기게 되었다.

현재 여기에 저장되어 있는 과학기술문헌 중 총 8,600여만 건이 광명망에 수록이 되어 있으며 발명특허는 3,600만 건이 광명에 수록된 과학기술문헌은 4,500만 건이 수록이 되어 있다.

이중에 10% 이상은 반도체와 컴퓨터 과학 문헌이며 이 기술 문헌들을 유료화 하여 반도체 연구와 소프트웨어 연구에 참고가 될 수 있도록 설정을 하였다.

특히 이 과학기술문헌의 대부분은 조선컴퓨터센터에서 대부분 외국 사이트에 자체 자산으로 구입하여 대부분 소장을 한 것으로 그만큼 과학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0년대부터 소프트웨어 개발을 이미 전폭적으로 시작하여 하드웨어는 군수 전용 개발 부문으로 소프트웨어는 민수 전용 개발로 돌려 개발을 하였다.

특히 자체 네트워크 개발은 물론 특히 스마트폰의 게임이나 혹은 애니메이션 같은 것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개발하거나 혹은 복제하여 평양타치 스마트폰이나 아리랑 121 스마트폰에 설치를 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래서 현재는 자체 앱 스토어인 나의 길동무 4,1이나 혹은 자료봉사 2,0을 개발하여 미국의 애니메이션 영화나 혹은 UEFA 유로파리그 혹은 게임 엔진 계열인 카운터 스트라이크 계열도 개발하여 평양 주민들에게 서비스를 하였다.

현재는 많은 국가 특히 중국이나 혹은 미국 등지에서도 소프트웨어 기술을 합작 개발하여 많은 수익 사업을 하고 있으며 특히 대한민국에서도 많은 작품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합작한 경우가 많다.




#Article 175: 북위 38도 (150 words)


북위 38도(北緯三十八度)는 적도를 기준으로 북쪽으로 38도를 지나는 위선이다. 유럽과 지중해, 아시아, 태평양, 북아메리카, 대서양을 지난다. 특히 한반도의 중앙을 가로지나며,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미국과 소련은 1945년 9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였다. 해주항이 위치한 해주시의 룡당포(龍塘浦)는 38도선 이남이지만, 미·소군정은 이를 38선 이북으로 간주하기로 합의하였다.

미군정은 38도선 이남의 연천군을 파주군에, 양구군을 춘천군에, 인제군을 홍천군에, 양양군을 강릉군에 편입하고, 벽성군은 해주시의 서쪽 지역을 옹진군에, 동쪽 지역을 연백군에 편입시켰다.
소련군정은 38도선 이북의 춘천군 사내면(가평군 포함)을 김화군에, 그 밖의 춘천군 지역을 화천군에 편입시켰고, 개풍군과 장단군의 38선 이북 지역은 장풍군으로 통합하였으며, 옹진군의 38선 이북 지역은 벽성군에 편입하였다. 또, 포천군의 38선 이북 지역은 영평군으로 개칭하여 관리하다가 1946년 12월에 철원군에 편입하였다.

현재도 38선은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파주시 적성면, 양주시 남면, 홍천군 내면은 38선 분단에 따라 변경된 행정 구역이 유지되고 있고, 북위 38도선 이북인 화천군 사내면과 연천군 미산면 삼화리는 38선 분단 전과는 다른 행정 구역에 속해 있다.

본초 자오선에서 동쪽 방향으로 다음 지역을 지난다.




#Article 176: 모뎀 (255 words)


모뎀(, )은 정보 전달(주로 디지털 정보)을 위해 신호를 변조하여 송신하고 수신측에서 원래의 신호로 복구하기 위해 복조하는 장치를 말한다. 주로 컴퓨터 정보통신을 위한 주변기기로 많이 사용한다. 변조를 하는 이유는 전송선에 디지털 신호를 바로 보내면 신호 전달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데이터가 같은 비트로 연속되면 전송특성상 신호 전달에 문제가 발생하므로 전송선의 특성에 맞추어 변조한다.

모뎀은 아날로그/디지털 변환기의 일종으로 컴퓨터의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 신호로 바꾸어 전송하고, 아날로그 신호를 받아 디지털 신호로 읽어낸다. 좁은 의미에서는 개인용 컴퓨터와 전화선을 이어주는 주변기기이다.

초기 모뎀은 주로 전화선을 통한 데이터 전송을 위해 사용하였다. 개인이 사용하는 인터넷망이 활성화되기 이전에 개인이 통신망에 접속하는 것이 비용측면에서 쉽지 않았기 때문에 전화망을 통해 개인컴퓨터와 서버와의 통신을 하게 되었다. 개인 컴퓨터와 서버 간에, 개인 인증과 망 접속을 위해 PPP프로토콜을 통해 접속한다. 하이텔 같은 망이 대표적이다.

초기 모뎀이 전화망을 통해 전송되기 때문에 주파수가 제한된다. 따라서 전송 속도에서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전화망은 음성을 전달하는 망이긴 하나, 가청 주파수 전체를 전달하지 않고 음성의 일부 주파수만 전송한다.

모뎀의 속도는 BPS로 나타내고 초당 비트 수를 의미한다. 한글 한 문자가 2바이트(16비트)로 되어 있으므로, 16BPS는 초당 한 글자를 전송하는 속도이다.

일반 음성 회선으로는 1990년대에 PC통신용으로 널리 쓰였다. 속도는 300, 600, 1200, 2400, 4800, 9600, 14400, 19200, 28800, 33600, 38400, 56000 bps가 있었다.

초기에는 컴퓨터와 아마추어 무선의 무전기(RIG)를 연결해주는 진정한 의미의 무선 모뎀이 있었다. 여기에는 간단한 저장 장치가 있어, 컴퓨터를 켜지 않아도 편지 등을 저장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

DSL용 모뎀이나 케이블 텔레비전의 회선을 이용하는 HFC 방식의 동축 케이블, 광 섬유 케이블 방식의 FTTH 모뎀도 개발되어, 2000년대에 기존의 전화선을 통해서 초고속 인터넷을 값싸게 공급하는 주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현재 인터넷의 속도는 수 Mbps에서 수십 Mbps에 이른다.




#Article 177: 오픈 소스 (1294 words)


오픈 소스() 제품에는 소스 코드, 디자인 문서,
또는 제품의 내용을 사용할 권한이 포함된다. 대체적으로 이를 오픈 소스 모델이라고 부르며 여기서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나 기타 제품들이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운동의 일부로서 오픈 소스 사용권으로 출시된다. 이 용어의 사용은 소프트웨어와 함께 기원되었으나 소프트웨어 부문을 넘어서 다른 오픈 콘텐츠 및 개방형 협업의 형태로 확장되어가고 있다.

소프트웨어를 기술하기 위해 사용된 오픈 소스라는 용어는 자유 소프트웨어(free software)라는 용어에 암시된 정치적 선전과 도덕적 철학을 비판했던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처음 제안한 것이다. 게다가 프리 소프트웨어(free software)라는 용어의 모호성(자유 소프트웨어, 무료 소프트웨어)은 비즈니스 채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그룹에는 크리스틴 피터슨, 토드 앤더슨, 래리 어거스틴, 존 홀, 샘 오크먼, 마이클 타이먼, 에릭 레이먼드가 포함되었다. 피터슨은 팰로앨토에서 개최된 한 회의에서 넷스케이프의 1998년 1월 내비게이터의 소스 코드 출시에 반응하면서 오픈 소스를 제안하였다. 리누스 토르발스는 다음날 그를 지지하였고 필 휴즈는 리눅스 저널에서 이 용어를 지지하였다.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창립자 리처드 스톨먼은 처음에 이 용어를 채택하는 것처럼 보였다가 나중에 마음을 바꾸었다. 넷스케이프는 넷스케이프 퍼블릭 라이선스로 소스 코드를 출시하였다가 이후 모질라 공용 허가서로 출시하였다.

레이먼드는 특히 이 새로운 용어를 보급하는 시도에 활동적이었다. 그는 1998년 2월 자유 소프트웨어 커뮤니티에 이 용어의 채택을 최초로 호소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브루스 페런스와 협업하여 오픈 소스 이니셔티브를 창립하였다.

이 용어는 1998년 4월 기술 출판사 팀 오라일리에 의해 조직된 행사를 통해 더 가시화되었다. 원래 제목은 프리웨어 서밋(Freeware Summit)이었으나 나중에 오픈 소스 서밋(Open Source Summit)으로 변경된 이 행사는 가장 중요한 자유 및 오픈 소스 프로젝트 다수의 지도자들이 참석하였는데 여기에는 리누스 토르발스, 래리 월, 브라이언 벨렌도르프, 에릭 올먼, 귀도 반 로섬, 마이클 타이먼, 폴 빅시, 제이미 자윈스키, 에릭 레이먼드가 포함된다. 이 회의에서 자유 소프트웨어라는 용어의 대안이 논의되었다. 타이먼은 소스웨어를 새로운 용어로 찬성하였으나 레이먼드는 오픈 소스를 찬성하였다. 이렇게 모인 개발자들은 투표를 거쳤고 가장 우세한 용어가 그 날 저녁 언론 콘퍼런스에서 발표되었다.

이전의 수많은 대형 기관들이 등장하여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운동의 발전을 지지하였으며, 여기에는 오픈 소스 프레임워크 아파치 하둡과 오픈 소스 HTTP 서버 아파치 HTTP 등 커뮤니티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아파치 소프트웨어 재단이 포함되어 있다.

오픈 소스 모델은 개방형 협업을 장려하는 탈중앙식 소프트웨어 개발 모델인데, 이는 기여자와 비기여자들에게 이용이 가능할 경제적 가치의 산물(또는 서비스)를 창출하기 위해 소통하는, 목표 지향적이지만 느슨한 공동 작용을 하는 참여자들에 의존하는 혁신 또는 생산 시스템을 의미한다.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개발의 주된 원칙은 일반이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소스 코드, 청사진, 문서 등 제품의 동료 생산(peer producdtion)이다. 소프트웨어의 오픈 소스 운동은 사유 코드의 제한에 대한 반응으로 시작되었다. 이 모델은 (open-source appropriate technology), 오픈 소스 신약 개발(drug discovery) 등의 프로젝트에 사용된다.

소프트웨어 개발의 오픈 소스 모델은 인터넷 포럼, 메일링 리스트,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처럼 다른 형태의 개방형 협업을 가리키는 용어 사용에 영감을 주었다. 개방형 협업은 또한 비트코인, TED, 위키백과 등 전반적인 다양한 벤처 기업들을 분명히 나타내주는 운영 원칙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개방형 협업은 동료 생산, 집단적 협업, 위키노믹스의 기저를 이루는 원칙이다. 이는 처음에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로 관찰되었으나 인터넷 포럼, 메일링 리스트, 인터넷 공동체, 그리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와 같은 수많은 오픈 콘텐츠 등의 예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또, 이는 크라우드소싱, 공동 구매, 의 일부 예를 설명하기도 한다.

Riehle 등은 개방형 협업을 평등주의, 능력주의, 자기조직화라는 세 가지 원칙에 기반한 협업으로 정의한다. Levine과 Prietula는
개방형 협업을 기여자와 비기여자들에게 이용이 가능할 경제적 가치의 산물(또는 서비스)를 창출하기 위해 소통하는, 목표 지향적이지만 느슨한 공동 작용을 하는 참여자들에 의존하는 혁신 또는 생산 시스템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는 여러 예시를 포착하며 이 예시들은 모두 유사한 원칙에 의해 결합된다. 예를 들어, 목적의식은 있으나 느슨한 공동 작용을 하는 작품에 기여하고 소비하고 소통할 권한이 개방된 경제 가치 상품인 요소들 전반이 위키백과와 같은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나 사용자 포럼, 공동체에서 관찰된다. UCC 기반 상업용 웹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개방형 협업의 예시에서는 누구든지 느슨히 공동 작용을 하는 소통하는 참여자들이 생산한 공유의 산물에 자유로이 기여하고 참여할 수 있다.

개방형 협업의 연구와 실천에 헌신하는 연례 콘퍼런스는 OpenSym(과거 이름: WikiSym)이다. 웹사이트에 따르면 이 단체는 개방형 협업을 평등주의적이고 능력주의적이며 자기조직화적인 협업으로 정의한다.

오픈 소스는 오픈 소스나 자유 라이선스를 통해 제품의 설계나 청사진의 보편적인 접근, 그리고 해당 설계나 청사진의 보편적인 재배포를 촉진한다. 오픈 소스라는 용어가 널리 채택되기 전까지 개발자들과 생산자들은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오픈 소스는 인터넷의 성장과 함께 대중화되었다.
저작권, 라이선스, 도메인, 소비자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운동이 발생하였다.

오픈 소스 라이선스는 소스 코드, 청사진, 설계를 정의된 조항에 의거하여 사용, 수정, 공유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소프트웨어와 기타 제품을 위한 라이선스의 일종이다. 이 경우 최종 사용자와 상업 기업들은 자신들의 맞춤식 수정, 호기심, 또는 문제 해결 요구를 위해 소스 코드, 청사진, 설계를 검토하고 수정할 수 있다. 오픈 소스 라이선스를 받은 소프트웨어는 대부분 무료로 이용이 가능하지만 꼭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다. 개인 목적으로만 소스 코드의 비상업용 재배포와 수정을 허가하는 라이선스는 일반적으로 오픈 소스 라이선스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픈 소스 라이선스는 일부 제약이 있을 수 있는데, 특히 코드 안에 개발자 이름과 저작권 문구를 보존할 것을 요구하거나 라이선스를 받은 소프트웨어를 동일한 라이선스(예: 카피레프트 라이선스에서처럼)로 재배포할 것을 요구하는 등 소프트웨어의 기원의 관점에 대한 표현에 관련해서 그러하다. 대중적인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들은 오픈 소스의 정의(OSD)에 기반한 오픈 소스 이니셔티브(OSI)의 승인을 받은 것들이다.

일반적으로 오픈 소스는 (상업적 목적을 포함한) 모든 목적을 위해, 또 원래의 디자인으로부터 수정을 할 수 있도록 소스 코드를 일반에 공개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말한다. 오픈 소스 코드는 프로그래머들이 소스 코드를 개선시키고 공동체 내의 변경사항을 공유하는 협업적인 노력의 산물을 의미한다. 코드는 소프트웨어 사용권 조항에 의거하여 출시된다. 해당 사용권 조항에 의거하여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버전(포크/fork)을 다운로드, 수정 후 공동체에 게시할 수 있다.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Free and open-source software, FOSS) 또는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Free/libre and open-source software, FLOSS)는 사용, 수정, 배포에 어떠한 제한도 없이 라이선스된, 공개적으로 공유되는 소스 코드를 말한다. 이 완전히 제한이 없다는 정의에 관한 혼동이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자유로운으로 알려진 프리(free)라는 용어가 무료의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being free to speak의 free는 자유로운인데, 이는 free beer의 free(무료)와 동의어가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리처드 스톨먼은 오픈 소스라는 용어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용어의 지지자들이 오픈 소스의 정의의 조항을 충족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꼭 다른 권한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조사를 위해 소스 코드가 공개되고 접근이 가능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오픈 소스 프로젝트에 도움이 되는 모든 활동을 컨트리뷰션(contribution) 또는 기여라고 한다. 버그 수정, 기능 추가, 소스 코드 수정, 코드 테스트와 같은 중요한 활동 이외에도, 오타 수정, 번역, 가이드 문서 작성, 디자인 작업, 의견 제시와 같은 사소한 활동도 컨트리뷰션에 해당한다.

사람들이 컨트리뷰션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로 사용하던 오픈 소스를 개선한 경우 자신만 사용하면 버전 업이 될 때마다 추가로 패치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컨트리뷰션을 한다. 둘째로 개인의 개발 실력 향상과 영어능력 향상을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있다. 오픈 소스 커뮤니티로부터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 특히 개발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셋째로 오픈 소스 활동은 공개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구직 활동 시 자신의 이력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명성을 높이려고 기여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은 기여에 참여한다.

대부분 오픈 소스 프로젝트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소스가 공개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편 웹 브라우저를 예로 들어보면 과거 웹 브라우저의 전설처럼 여겨졌던 1994년 당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였던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Netscape Navigator)를 MS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시장에서 밀어내고 2004년을 전후로 전 세계 웹 브라우저 전체 사용량의 90%를 점유하기도 했었으며 약 20년 간 우월적 지위를 누렸다. 또한 인터넷 익스플로러(IE) 웹 브라우저는 독과점 문제로 이슈가 제기된 바 있었다.
그러나 2013년을 기점으로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구글 크롬 웹 브라우저에 의해 우월적 자리를 내주고 나서는 윈도우 그룹의 부사장 존 벨피오레는 2018년 12월 6일 회사 블로그에서 우리는 고객들을 위해 웹 호환성을 높이고 모든 웹 개발자들을 위해 웹 분열화를 줄이고자 크롬 오픈 소스 프로젝트를 도입하려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로써 지난 지속적인 익스플로러 버전별 지원 중단에 따른 사용자들의 불편과 관련해서 향후 웹 브라우저의 시장 점유율의 의미는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이후 현재 웹 브라우저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구글 크롬 웹 브라우저는 적어도 넷스케이프나 마이크로소프트(MS)의 전철을 밟지않을 가능성이 높다. 크롬은 크로미움이라는 오픈 소스를 기반하고 있어서 독과점에 의해 소스 공개나 신생 상용 브라우저에 의한 경제적인 경쟁 부담이 이미 오픈 소스에 의해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픈 소스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대기업의 사례는 기업과 사용자와의 긍정적인 관계형성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클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얻은 교훈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장점은 다음과 같다.

단점은 다음과 같다.

오픈 사이언스는 확인 가능한 공유된 지식의 열린 발견 과정으로서 과학적 방법을 사용한다. 이는 프로세스와 연구가 공개적으로 공유되지 않는 회사 소유 과학, 그리고 논문이 유로화 벽 뒤에 감춰졌거나 사적 저널로 출판되는 클로드즈 사이언스와는 대조된다.




#Article 178: 오일러 피 함수 (231 words)


수론에서 오일러 피 함수(-函數, )는 정수환의 몫환의 가역원을 세는 함수이다. 즉, n이 양의 정수일 때, ϕ(n)은 n과 서로소인 1부터 n까지의 정수의 개수와 같다. 예를 들어, 1부터 6까지의 정수 가운데 1, 5 둘만 6과 서로소이므로, ϕ(6) = 2이다. 1부터 10까지의 정수는 모두 11과 서로소이며, 11은 자기 자신과 서로소가 아니므로, ϕ(11) = 10이다. 1은 자기 자신과 서로소이므로, ϕ(1) = 1이다.

양의 정수 의 오일러 피 함수 은 정수환의 몫환 의 가역원군의 원소 개수이다. 즉, 1부터 까지의 정수 가운데 과 서로소인 것들의 개수이다.

오일러 피 함수는 곱셈적 함수다. 즉, 만약 두 정수 이 서로소라면, 다음이 성립한다.

오일러 피 함수 값은 소인수를 통해 다음과 같이 구할 수 있다. 이를 오일러 곱 공식()이라고 한다.

특히, 소수 의 거듭제곱 의 오일러 피 함수 값은

이다. 특히 소수 의 경우

이다.

오일러 피 함수를 통해 항등 함수를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이는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증명하였다.

또한,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는 뫼비우스 함수이다.

만약 양의 정수 이 서로소라면, 다음과 같은 합동식이 성립한다. 이를 오일러의 정리라고 한다.

오일러 피 함수는 수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등장한다. 예를 들어, 군론에서는 순환군 의 가능한 생성원(generator)의 수는 이다. 이는 과 서로소인 임의의 수를 사용하여 를 생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n각형이 작도 가능한 다각형인지, 즉 눈금없는 자와 컴퍼스만으로 작도할 수 있는지는 이 2의 거듭제곱수인지와 동치이다. 즉,

이라면

이므로 정n각형을 작도할 수 있지만, 다른 값의  경우에는 작도할 수 없다. 특히, n이 소수인 경우를 페르마 소수라고 한다.

오일러 피 함수는 암호학의 RSA 암호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Article 179: 윤보선 (11075 words)


윤보선(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국회의원과 1948년 12월 15일부터 1949년 6월 5일까지 서울 시장을 지냈고, 1960년 8월 13일부터 1962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일시적으로 참여하였고, 신규식의 권고로 영국 유학길에 올라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과를 나왔다. 영국이 국왕이 있는 내각책임제 국가인 관계로 그는 자신이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할때까지 에든버러가 배출한 두 명의 대통령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미군정기와 제1공화국의 야당 정치인이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의 비서관과 서울특별시장, 상공부 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거쳐 제2공화국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대통령 사퇴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기도 했고, 허정, 이갑성과 함께 3.1절과 광복절 기념식 때 늦게까지 초대된 독립운동가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5·16 군사 정변 협력 논란이 양립하고 있다. 5·16 군사 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아왔으나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중 박정희의 라이벌이었으며, 3공과 유신시절 내내 민권투쟁에 앞장섰고, 각종 사회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김영삼·김대중이 등장하기 전까지 야당을 이끌었으며 '선명야당'을 강조하였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자(字)는 경천(敬天), 호(號)는 해위(海葦)이다. 해위라는 호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스승인 신규식이 지어준 것으로 바닷가 갈대는 바람에 휘날려도 꺾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신적 대통령', '영국 신사', '재야 대통령'으로도 불렸다.

해위 윤보선은 1897년 8월 26일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신항1리 새말부락에서 중추원의관 동야 윤치소(尹致昭)와 중추원의관을 지낸 전주이씨 이재룡(李載龍, 다른 이름은 이봉하(李鳳夏))의 장녀인 이범숙(李範淑)의 장남으로 출생하였고, 유아기를 잠시 한성부에서 보낸 적이 있다. 그의 선조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음 윤두수였고, 할아버지 윤영렬과 종조부 윤웅렬은 당대의 고관이었다. 대한제국 시대 말기 개혁자 윤치호는 윤웅렬의 아들로 그의 당숙이었다.

윤보선의 10대조 윤두수와 윤근수는 조선 선조 때의 형제 재상이었다. 9대조 윤흔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삼사를 거쳐 자헌대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고, 호종공로로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8대조 윤취지는 광해군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관직은 가선대부 중추부동지사에 이르렀다. 7대조 윤채(尹埰, 1603~1671) 인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은 세자익위사 사어에 이르렀다. 6대조 윤세겸(尹世謙, 1668~1748)는 윤채의 아들이며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를 지냈다.

그러나 가계가 몰락하여 5대조 윤발(尹潑, 1728~1798)은 관직을 지내지 못했고 사후에 증직으로 증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고조부 윤득실(尹得實, 1768~1823)은 생전 관직이 통덕랑이 최종 관직이었고 사후에 증 이조참의와 증 의정부공찬에 거듭 추증된다. 그러나 윤득실이 일찍 사망하여 형제들은 일찍 고아가 되었지만, 윤득실의 셋째아들이자 윤보선의 증조부였던 윤취동의 대에 농토를 마련해 부농이 되고 한직인 지중추부사로 관직에 올랐다.

종조부 윤웅렬이 무과에 급제하고 조부 윤영렬이 중앙 관직에 진출하였고, 당숙 윤치호가 다시 대한제국에서 외무부, 학부 협판과 한성부판윤으로 출세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다시 가계를 일으킨 조부 대에 100칸의 집을 마련했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윤치영이 태어났는데, 윤치영은 그의 숙부였다. 아버지 윤치소는 아산군의 만석꾼이었다. 외가 역시 부유하였는데 어머니 이범숙 역시 아산의 만석꾼의 딸이었다.

그는 부유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집안은 부유하였고 선대(先代)는 대대로 벼슬을 해온 집안이었기에 부러운 것을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스스로 회고하였다. 그가 어려서 자란 안국동의 자택 안동장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

윤보선은 3백 석 이상을 걷는 대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또한 윤보선의 집은 증조할아버지 윤취동 이후 다시 아버지 윤치소가 이재와 수완에 밝아 대농토를 꾸렸다. 큰아버지 윤치오가 친구들의 빚보증을 섰다가 막대한 빚을 졌지만, 아버지 윤치소의 재력으로 그의 집안은 거지가 되는 것을 면하였다.

그의 조부 윤영렬은 삼도 토포사를 지낸 고관으로, 윤영렬이 삼남 토포사로 부임했을 때 그의 일가는 충남 아산에 거주하고 있었다. 머리가 좋고 기억력이 비상하였던 그는 유아기 때 '조부가 토포사로 직인을 찍거나 먹찰 하는 것, 집안에서 사무를 보며 죄수들과 병사들이 드나드는 모습'을 기억하였다. 그 뒤 집안에서 선생을 두고 한문을 익혔다. 할아버지 윤영렬은 틈틈이 그들 형제를 불러 충과 효를 강조하고 삼국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다. 이때 그는 유비의 의로움과 관운장의 전공치적과 그의 충의에 감동받았다 한다. 할아버지 윤영렬은 그의 고조부 대에 약주가 과하여 가세를 기울게 하였다 하여 술을 입에 대지 말라고 훈계를 여러 차례 하였다. 이 때문에 윤보선은 여행지에서나 정계에 입문한 뒤에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총명하고 명석했던 그는 한편으로 아쉬울것 없는 환경에서 자라 성격적으로 다소 고집이 센 측면도 갖게 되었다.

충청남도 아산 향리에서 지내던 윤보선은 을사늑약 체결 사건 직후 한성부로 본격 이사하였는데, 10세 때 집 근처에 있었던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그의 선조들은 당색으로는 서인과 노론 계열이었는데, 서얼 가문이었지만 아버지 윤치소나 조부 윤영렬로부터 가계와 선조들의 이야기를 훈육받고 자란 그는, 양반가의 후예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일출소학교 5학년에 편입학한 뒤 1912년 일출소학교를 졸업하였다. 소학교 시절의 윤보선은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는 어렵지 않은 유학생활을 하였다. 집에서 월 25원의 학비를 부쳐오므로 학업에 별다른 곤란은 없었으나 당시 그의 관심사는 중국의 신해혁명에 쏠려, 학업에 정진하기 힘들어서 귀국하게 되었다. 1911년 중국에서 일어났던 신해혁명에 자극을 받아 학업을 마칠 수 없었다 고 한다. 귀국이후 한동안 집에 머물러 있었다. 이후 그는 신문에서 신해혁명 관련 기사를 찾아서 읽곤 했다. 그는 여운형을 만났는데, 당시 여운형은 독립운동에 가담하려 하는 청년들을 중국으로 비밀리에 망명시키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집안에서 안다면 반대를 할 것이었으므로 그는 비밀리에 일을 추진하며 자금을 모았다.

바로 상하이로 가서 독립 운동에 투신한다면 집안에서 반대할 것이 예상되었으므로 그는 아버지 윤치소에게 미국으로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러 간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근처에 사는 어느 양반가의 자제도 기독교 집안이 된 뒤, 목사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뒤 목사가 된 것을 그의 부친도 알고 있었다. 그는 상하이를 경유하여 미국으로 건너간다고 하였고, 아버지 윤치소는 그에게 상하이로 갈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귀국해 일본에서 돌아온 여운형을 만난 걸 계기로 여운형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화민국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임시정부로 찾아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가 중국 대륙으로 건너 가고자 희망할 때 중화민국에 있던 여운형이 귀국하였다. 그는 청년회관을 통해 여운형의 소재지를 파악, 그가 머무르고 있던 한성은행 사무원의 집을 찾아가 중국으로 갈 의향을 밝혔다. 그의 뜻을 들은 여운형은 윤보선의 망명을 적극 협조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혁명을 하러 상하이로 가겠다고 하면 아버지 윤치소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는 신학을 한다는 핑계를 댔다. 아버지 윤치소의 친구들 중에는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목사가 된 이들이 있었고, 그는 아들이 같은 과정으로 목사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간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여권을 얻기 위해 상해를 경유해 간다고 하였고, 아버지 윤치소는 아들의 출국을 허락해 주었다. 이후 윤보선은 여운형을 따라 상하이로 건너갔다.

여운형의 주선으로 그는 배편을 타고 인천항을 떠나 중화민국 상하이에 도착한다. 그가 출국한 뒤에야 그의 집안에서는 윤보선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러 상하이로 망명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승만이 궤변으로 그를 현혹하여 버려놓았다며 원망하기도 했다. 윤보선의 당숙 윤치호, 아버지 윤치소, 백부 윤치오 등은 이승만과 인연이 있었는데, 그가 상하이를 떠나 영국으로 유학한 뒤에야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거두게 된다.

그러나 일본을 거쳐서 도착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했으나, 노선을 바꾸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일하기 직전 그는 중국 법무장관 서겸(徐謙)이 주일 중국대사 앞으로 쓴 소개장을 받고 서겸의 조카이자 일본으로 유학하는 중국인 유학생으로 가장하여, 변장 후 일본 경찰들을 피해 배편으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 갔다. 국내에 잠입하면 신분노출을 우려해 비밀리에 일본 도쿄에 잠입하여 재일본 중국 기독교 청년회 간부 집에 은신하며 동생 윤완선과 접촉, 그곳에 체류중인 동생 윤완선을 시켜 고국에서 활동자금을 가져오도록 했다. 국내로 잠입한 윤완선은 집안의 사재 3천원의 자금을 마련해 왔고 윤보선은 이 자금을 들고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윤치영의 회고에 의하면 '1910년, 한일합방 후 윤보선은 중국으로 망명을 갔다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자금 조달 중책을 맡고 일단 일본으로 들어왔는데 그때 차림새가 너무도 말쑥한 신사였다'고 한다. 윤치영이 도쿄 YMCA 회관에서 회의를 주관하고 있는데 누가 찾는다고 해서 나가 보니 해위가 정말 말쑥하게 영국신사처럼 쏙 빼입고 거기 섰더라는 것이다. 그때 윤치영은 그곳에 있던 몇 사람과 2.8 동지회를 구성 해서 활동하였다. 2.8 독립 선언에 가담한 일로 윤치영은 일본 경시청의 감시를 받던 때인데 그렇게 정정당당히 나타나 너무나 놀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아무 걱정 마시라는 표정으로 빙끗 웃으며 들어와서는 포켓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주는데 그 때 중국에서 이름을 날리던 서겸(徐謙)의 서한이었다고 한다. 서겸은 당시 중국 혁명정부의 법무부장관을 지냈는데 주일중국대사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준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사람은 내 조카인데 볼 일이 있어 일본으로 보내니 모든 여행길에 편리를 도와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때 그곳에서 공부하던 집안 사람들은 모두 떨었다고 한다. 윤일선 박사, 동생 윤완선 등도 교토에서 올라왔는데 일단 윤보선이 오라 해서 왔지만 그들도 떨었다고 한다. 그 때 윤완선은 형의 전갈을 들고 한국으로 들어가 부모님에게 사정을 말하고 그때 돈 삼천원을 마련해 와 윤보선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해위는 동생에게서 돈 삼천원을 받아 들고 다시 상해로 가서 이승만 박사에게 전했다고 한다.

도쿄에 체류하는 동안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동경에 있는 백관수, 유억겸, 김준연, 김도연 등을 만나고 윤치영과도 만났다. 이들과 손을 잡고 독립운동을 할 목적으로 백관수·김도연 등과 함께 이월회(二月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했으나 실패하고, 되돌아와야 했다.

자금을 싣고 상하이로 돌아온 후 1919년말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다시 피선되었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었다. 연령 미달로 의정원 의원 피선거자 자격 이 없었으나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승인으로 20대 초반에 의정원 의원이 될 수 있었다. 장래를 위해 유럽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라는 신규식, 이시영, 신익희 등의 충고로 상하이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갔다. 상하이 체류 중 신규식은 그에게 해위 라는 아호를 지어 주었다. 신규식이 그에게 해위(海葦)라는 호를 준 것은 '바닷가에 선 갈대처럼 연약해보이면서도 억센 파도에도 꺾일 줄 모르는' 지조를 갖고 살라는 뜻이었다.

상하이 생활 3년 만에 중국을 떠나 영국으로 유학하였다. 1921년 6월 경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해 중국인 여행권을 소지하고, 중국인 유학생들 틈에 끼어서 프랑스 배로 출항하였다. 이때 선상에서 임정 총리를 지낸 이동휘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한인들의 승선을 눈치챈 일본 관헌들이 호출해 중국언어로 대화하라고 시켰고. 윤보선은 간단한 단어로 대답하여 중국인으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이동휘의 정체가 탄로나 하선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중국인 학생을 가장하고 3등 선실에 숨어서 42일만에 마르세유에서 하선, 프랑스로 가는 열차를 탑승했다. 이후 정기 여객선을 타고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는 의학공부 중인 그의 당숙 윤치왕이 와 있었다.
영국에 도착하여 화물을 취급하는 하물표를 발급받으려다가 거절당하고, 당숙 윤치왕(尹致旺)을 만나 영국에 도착했다. 당숙인 윤치왕이 공부하던 영국에서 체류하며 우드블록 대학에서 약 1년동안 영문학을 공부하고 중퇴하였다.

그 뒤 영국 글래스고의 스캘리쉬 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고, 버밍엄으로 건너가 퀘이커 교단에서 설립한 학교에서 1년간 공부했다. 이후 다시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 3개월간 수학하다가 다시 에든버러 대학교로 옮겼다.

에든버러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대학에서 고고학을 선택·전공하였다. 그가 고고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로는 인간으로서 그 내용을 충실히 하고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 주는 것은 정치학이나 신학 보다는 순수과학일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재학 중 정신적 스트레스와 과로로 신경쇠약에 걸려 2년간 병중에 있었다. 의사는 절대휴양을 위해 귀국을 처방하였으나, 학업을 마치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결심으로 귀국권유를 사양했다. 이후 병으로 2년간 휴학하였다. 병으로 2년간 휴학한 기간을 합쳐 6년 만에 에든버러 대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에든버러 대학 졸업 이후에도 에든버러를 근거지로 하여 구주를 순방하였다. 대학재학 중 3년간 한반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수학하였으나 일본인 학생들의 접근을 피하고 멀리하였다. 영국 체류 중 그는 꾸준히 기금을 마련하여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구미위원부로 100불씩 송금했다가 일본 경찰의 첩보망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재외 유학생 신분이었고 일본 조계나 일본 영사관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으므로, 일본 경찰 역시 그를 쉽게 체포할 수 없었다.

윤보선은 신앙이 개인의 영혼 구원에 치중해야 하느냐와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 참여하여 사회를 구원해야 하느냐를 두고 오래 고민하였다. 결론은 신앙이 사회를 구원하여 더 많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는 적극 참여해서 저항하기로 결심한다.

윤보선은 영국의 대학과 석사학위 과정을 배우면서 정치인들과도 어울려서 지냈다. 그러나 일본인에게만은 예외였다. 그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거나 맡겨진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를 밥먹듯 했다. 에든버러 대학 유학 시절 6~7명의 일본인 유학생들과는 졸업할 때까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일본인들과는 대화 한마디 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면모를 보였다.

윤보선은 1930년 12월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후 독립운동의 장소로 미국과 중국 상하이를 고민하던 중 졸업했으니 집에 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집에는 졸업사실을 전하지 않았으나, 논문을 쓰기 위해 영국에 2년간 머물렀던 장덕수가 귀국후 윤보선 댁에 들러 아버지 윤치소에게 그의 졸업사실을 전했던 것이다. 아버지 윤치소를 비롯하여 문중에서는 그에게 귀국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6년간의 대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후 조선총독부 왜경으로부터의 신변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집에서는 여비를 보내며 귀국을 독촉하였고, 귀국하기 싫어했던 그는 귀국 대신 구주 여행을 떠났다. 두 번째 여비를 발송했을 때도 유럽여행을 하다가 세 번째 여비와 함께 '부자지정을 생각해 다시 여비를 보내나 다음에는 보내지 않는다'는 최후통첩을 받고 귀국하게 되었다. 유럽을 여행하며 지내던 그는 생활비가 떨어지자 1932년에 귀국했다.

유학 6년 만인 1932년 아내 여흥 민씨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부산역에 도착한 후, 안내원의 소개로 여관을 잡게 되었으나 일본인이 운영하는 여관은 가지 않겠다고 고집하여 안내원의 집안이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묵게 되었다. 당일 서울로 도착전보를 보내자, 아버지 윤치소와 어머니 이범숙, 딸 완구(玩求), 완희(玩姬) 등이 부산까지 내려왔다.

귀국 이후 그는 조용히 지냈다. 그의 생활은 대부분 조부모에게 문안 인사하러 찾아오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러나 총독부 경찰의 심한 감시를 받았고, 안국동 집밖에 나서지 못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로부터 요시찰인물로 분류된 그는 일본경찰이 찾아와 그의 동향을 살펴보고 질문을 하면 고개를 숙이고 한시간, 두시간, 일본경찰이 자리를 뜰때까지 계속 침묵을 지켰다. 일본인형사는 그를 정신이상자 취급을 하였다.

한동안 몇몇 신뢰 가능한 지인들을 통해 이승만의 은신처로 방문, 이승만을 간간히 만나곤 했다 한다. 1937년 아내 여흥 민씨와 사별하였다. 이후 윤보선은 10년 이상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생활했다.

영국에서 귀국한 뒤에는 엽권연을 입에 물고 있다시피 할 정도로 애연가였다. 그러나 폐렴을 계기로 담배를 꼭 피워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뒤 담배를 꼭 피워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자 그는 금연을 하였다. 1942년 이후 숙부 윤치영이나 송진우, 김성수 등으로부터 이승만의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접하였으나 그는 이를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문중에서 결의된 창씨개명을 거절했던 그는 바깥 출입으로는 기독교 선교 활동과 강연, 문중 종친회 관련 행사 이외에는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철원군 어운면 월성리의 월성소학교에 2만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후반 그는 집안에 칩거하면서 함경남도 안변군 사기리에 있는 문중의 별장을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이에 1945년 9월 16일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창당발기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윤보선은 집과 기타 비용을 제공했고, 한민당의 회합은 윤보선의 집에서 하였다. 한민당의 주요 회합장소였던 그의 안국동 사저는 안동궁(安東宮) 또는 안동장이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한민당 총무 선출에서 떨어지자 한민당은 그를 한민당 서울시지구당을 맡겼다. 이후 그는 한민당 중앙집행위원과 한민당 서울시당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그 뒤 김구, 김성수 등의 주도로 반탁운동이 벌어지자 소극적으로나마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1946년 2월 독립촉성국민회에 참여하였다. 5월 27일에는 한민당 지역유세대 조직에 참여하여 충청남도 아산군 일대를 다녔다. 1946년 6월 15일 저녁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이승만은 허정과 이기붕을 보내와 주 중화민국 대사, 주 일본 대사, 주 미국 대사직을 제의했지만 모두 거절하였다. 1948년 12월 8일 서울에서 조직된 충무공 이순신 기념사업회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동사무소에도 국문 보급반을 설치하게 하여 성인들에게 한글 정도는 동서기들이 직접 가르치게 했다. 또한 매점매석을 단속하고, 식량 배급을 1가구별로 받도록 정리, 기록케 하였다.

그가 서울시장으로 부임할 무렵의 서울특별시는 거리에 쓰레기와 인분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무질서하게 자동차나 열차, 전차에서 혹은 도보로 길에 투척한 쓰레기와 인분, 주취후 구토물로 몸살을 앓았다. 윤보선은 시장이 된 뒤 공무원과 단속요원, 경찰들을 통해 이들을 단속, 정리 및 정리를 시도하였다.

그는 '당시 시장으로서 제일의 당면과제는 다름 아닌 청소문제였다'라고 회상하였다.

그런데 시청에 가서 보니 그때까지는 청소가 큰 이권으로 화해서 각구에서 청소기재와 도구를 개인에게 청부를 주고 있었다. 이 청부를 맡은 개인들이란 꽤 유력자들이었고 그중에는 그와 친분이 매우 두터운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이 책임수행은 않고 국고금만 축내며 이권화시키고 있었는데 모든 원인이 있었다.
 그리하여 우선 이 청소권을 모두 회수해서 서울시의 직영으로한 후에 시장인 그가 직접 감독하여 전 시청직원이 총출동하고 각 구마다 책임제로 경쟁을 붙여 쓰레기 반출작업을 대대적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버스 승강장과 철도역, 공원 등에 공중 쓰레기통을 설치하여 보급하였다. 당시 윤보선이 보급한 공중 쓰레기통이란, 말뚝을 박고 큰 양동이를 걸어둔 것이었지만, 이는 공중 휴지통 설치의 시발점이 된다.

후일 그는 '이 청소작업은 단시일 내에 커다란 성과를 거두어 반출되는 쓰레기는 마치 폭풍에 씻겨 내려가는 형국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서울이 깨끗해졌을 뿐 아니라 시장으로서의 나의 명성을 크게 떨치게 만들어 한 때 청소시장이란 별명을 듣게까지 되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청소문제를 수습한 후 그는 시민에게 다시 호소하여 재래의 자기 집 문전을 알뜰히 하는 미풍을 되살리도록 촉구하였다. 시민들의 호응은 말할 것도 없고 각 학교와 각 부인회 그리고 경찰관들마저 비를 들고 나서게 되어 청소작업은 명실공히 완전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는 시정의 투명성을 선언하고, 서울시 시정사항을 일체 공개하고 공고문을 붙였다. 서울시 시정 공개는 이후 지방행정 사항을 공고, 공시하는 것의 모범 사례가 되었다. 역사 이래로 신라, 고려, 조선왕조시대 이후에도 일부 교서만이 반포되었고 지방 수령의 행정사항은 대부분 공포되지 않았다.

청소 문제를 일단락 짓자 그는 그 다음 착수한 것은 서울시청이 복마전이라는 악명을 일소하는 것과 민원서류의 속결문제였다. 그는 이러한 지방 수령과 이속들의 독단적인 결정이 부정부패와 담합, 암투를 불러오는 요인이라 지적하고 모든 행정사항을 관보 또는 시청과 구청, 동사무소의 게시판에 공개할 것을 지시, 시행하였다. 시정 사항이 공개되면서 복마전이라는 비아냥은 사라지게 되었다.

서울시정이 복마전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자 그는 신생활운동을 본격 전개하였다. 윤보선은 이를 두고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신생활 운동이라고 하였다. 후일 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꼭 실현을 보고자 했던 것인데, 그 실천단계에 들어설 때 상공부장관으로 발령이 나게 되어 중단할 수 밖에 없게 되어 매우 애석한 일이었다.'라고 했다.

윤보선은 서울시장 취임 초기부터 양복을 보급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는 취임 초 직원들과 구청, 동사무소 서기들을 통해 양복과 미국에서 반입된 의류들을 보급하였다. 이때 활동하기 편한 운동화도 시중에 보급하였다.

윤보선은 생활의 개량, 의복 개량, 위생상태 점검 등의 시정을 추진했다. 그는 '우리 재래의 가정생활에서 모순되고 불편한 여러 면을 의식주 전반에 걸쳐 개혁해 보려 했던 것인데 특히 한복의 개량과 주택의 개량이다. 주택에는 주방과 변소를 수세식으로 개량한다는 것이 주안점이었다.'고 하였다.

주택에는 주방과 변소를 수세식으로 개량 하겠다고 공포하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윤보선은 서울시장 재직 당시 관공서와 기타 공중화장실을 대부분 푸세식에서 수세식 화장실로 교체, 개조하였다. 따라서 흉한 대소변 얼룩과 여름철 파리, 모기 등의 번식을 차단하고 주변에 대소변 악취를 대부분 제거하였다.

사람들은 버튼만 누르면 물이 나와서 변기가 흘러가는 것을 희한하고 신기하게 여겼다. 또한 악취가 사라진 것을 놀라워했다. 윤보선은 자신이 1920년대, 30년대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수세식 변기에 대해 설명하였고, 이것이 종전 이후 유럽에 보편화되었음을 설명했다.

서울시장 재직 때 보급한 수세식 양변기들은 6.25 전쟁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그의 수세식 양변기 보급은 6.25 전쟁으로 확산되지 못하였다. 비록 서울시에 한한 것이었지만 수세식 양변기는 그 후 윤보선이 대통령이 된 뒤 1960년에는 경기도로 확대 시행시켰다. 그리고 1982년 이후에 와서는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윤보선은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에서 서울특별시장으로 지낸 기간은 나의 역대 관직생활 중 가장 보람있고 만족스런 기간이었다. 그러나 이 시장직도 내가 선뜻 응해서 취임한 것은 아니었다 라고 하였다. 그는 또 서울시장은 당시 나로써는 퍽 떠나기 싫은 자리였다 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서울시장 재직 중 공덕귀(孔德貴)와 재혼하게 되었다. 어머니 윤명사(尹明師) 가 덕수교회 목사 최거덕(崔巨德)에게 아들의 혼사를 부탁하자, 최거덕 목사는 다시 한국신학대학장 송창근(宋昌根)을 통해 공덕귀와 중매를 섰다. 안동교회는 윤치소 등이 주도로 설립한 교회였다. 공덕귀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였으나 송창근의 만류로 중단하고, 윤보선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혼수는 최 목사 사저에서 마련했고, 결혼식은 1949년 1월 6일 윤보선의 안국동 집에서 함태영 목사의 주례하에 간소하게 했다.

박사 과정을 밟으려 유학하려던 공덕귀는 최거덕 등의 권고로 그와 결혼하였다. 공덕귀는 세 아이를 낳았는데, 곧 장남 윤상구를 낳고, 뒤이어 둘째 아이는 6.25 전쟁 중 대포 소리에 놀라 유산하였고 셋째 아들 윤동구를 연이어 낳아 주었다. 아들을 바라던 그의 어머니 이범숙이 크게 기뻐하였다 한다.

부인 공덕귀는 '나는 어디 갔다 오다가 벽보를 보게 되었는데 상공장관 윤보선이라는 글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고 하였다. 거듭된 정부의 요청에 공석으로 둘수 없다고 본 그는 상공부장관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상공장관이 되던 날 가족들을 모아놓고 누구든 이권 운동을 한다면 나는 이 직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장관직에 임했다. 그는 상공부 장관으로 출근하던 날부터 도시락과 함께 손 씻을 비누까지 싸들고 갔다.

그는 아내 공덕귀에게 부탁하여 손수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고, 누구에게도 식사 대접 한번 받지 않는 고집을 보였다. 전임 장관이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는데도 정권 실세 유력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다가 뇌물수수 누명을 쓴 것을 그는 늘 신경쓰고 각별히 염두에 두었다. 그는 사소한 종이 한장도 사적으로 쓰지 않았고, 비품과 치약 등도 손수 준비해서 다녔다. 또한 저녁식사나 선물 등도 일체 거절하였다.

윤보선은 상공장관에 취임해 업무를 거의 파악한 서너달 후엔 벌써 입맛이 떨어져 버렸다라고 밝혔으며, 국회에 진출해 원내총무를 맡고는 사임을 해도 안받아줘 병 난 것을 기화로 부산에 내려가 요양하며 겨우 수리시켰다라고 회상했다. 상공부 장관 재직 중 두 가지 문제로 이승만과 갈등하게 되었다. 고무조합 배정사건과 경전사장 이태환 경질문제였다. 그 동안 외자청을 거쳐 상공부로 와서 고무조합에 배정되어 오던 생고무를 금융조합 연합회가 이승만 대통령을 움직여 상공부 장관 재가 없이 임의로 처리했고, 그 명분은 짚신을 신는 농부들에게 고무신을 신기겠다는 명분으로 처리되었다.

그는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하며 이권이 집약된 상공부장관직을 바르게 수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상공부 일을 놓고 이승만과 의견이 엇갈리면서 고집센 이승만 대통령의 비위를 거슬리게 되었다. 그러나 윤보선은 사사로운 대접 한번 받아본 일이 없었으므로 이승만의 부당한 인사 요구를 모두 거절했다.

그는 이승만에게 사태를 바로 볼 것을 촉구했고, 주변에서 아첨하는 측근들을 내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윤보선이 그의 숙부인 윤치영이 자신에게 총애를 잃은 것에 불만을 품고 사적으로 청탁하는 것으로 여겨 이를 멀리했다. 실망한 그는 이승만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러나 이승만과의 결별 선언을 계기로, 1920년대부터 이승만의 열성적인 추종자였던 숙부 윤치영과 멀어지게 된다. 그는 그 대로 한민당을 탈당한 윤치영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윤치영은 윤치영 대로 그가 이승만 박사에게 대든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의 배척을 당하게 되었던 그는 이승만의 독단으로 국무회의가 공전하자 흥미를 잃어오던 그는 1950년 5월 9일 상공부 장관직을 사임하였다. 장관직은 5월 10일 국회에서 사직처리 되었다.

이후 민주국민당의 원내총무를 거쳐 한영협회(韓英協會) 회장직에 선출되었다.

한국전쟁 중 부산으로 내려가 피난생활을 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윤보선에게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맡으라고 했다. 1950년 11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한 그는 전쟁으로 인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막심하여 주로 상이군경과 일반 전재민의 구호물자 공급, 부상자 치료를 위한 의료관계 일에 주력했다. 그러던 중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나 민심이 흉흉하고 가는 곳마다 정부 비난의 소리가 높아만 갔다. 어느날 그는 장덕수의 미망인 박은혜와 함께 수영비행장에 갈 일이 있어 동행했다가 도중에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삼삼오오 떼지어 있는 걸인 군상을 목격한 것이다. 그들은 국민방위군들이었다. 옷은 다 해지고 사람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얼굴은 모두 부어 있는 상태였다. 많은 청년들을 그토록 떼거지로 만들어 병들고 죽어가게 한 것이었다. 국민방위군들은 다수가 목숨을 잃고 살아 남은 사람들조차 굶주림과 병고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 현장을 목격하고 돌아온 그는 즉시 대통령 관저로 찾아가 이승만에게 목격한 대로 상세히 보고했다. 그러자 이대통령은 아! 윤 총재도 세상 사람들 모략에 걸렸군.하더니 장장 한 시간에 걸쳐 변명만 늘어놓았다. 나는 내심으로 이 박사도 이제 큰일났구나 하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일 그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라의 대통령이 발생이 가능한 일을, 그것도 직접 목격하고 보고하는 내용을 믿으려 하지 않다니 원망하기에 앞서 불쾌감 마저 들었다.고 회상하였다.

이박사와는 정치적으로 하관 노릇을 했고 지난 날 혁명 선배로 애국하는데 도와 왔으나,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 사태에서는 그와 일할 수 없다고 절실히 느껴 정치적인 결별을 하기로 작정했다. 1952년 9월 1일 대한적십자사 총재직을 사직했다. 윤보선에 의하면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나로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하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4.19 혁명으로 이대통령이 하야할 때까지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었다.' 윤보선은 '회고하면 내가 이 박사와 결별하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결국 그는 이승만과의 오랜 감정대립 끝에 결국 그와 결별하였다.

그는 이승만이 한민당을 배척하는 것도 내심 불만이었다.

이승만과 친위 세력의 한민당계열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도 그가 이승만에게 등을 돌리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의 독단에 의해 국무회의는 공전하기 일쑤라 흥미를 잃어오던 나로써는 사임해야 할 때를 만났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50년 5월 사임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윤보선은 이승만이 한민당을 팽하고 독립촉성중앙회를 설립한 것, 그밖에 윤치영, 이인(李仁) 등을 중심으로 친위정당인 민주국민당을 조직되자 국민당을 편애한 것, 1951년에는 이범석, 이기붕 등을 중심으로 자유당을 결성한 것에 대해서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는 이승만의 일민주의 사상은 올바른 민주주의 사상이 아니라고 봤다.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대종교 신자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도 불만이었다. 이승만이 당숙 윤치호의 문하생이라는 점과 아버지 윤치소, 삼촌 윤치성과의 친분관계, 당시 삼촌 윤치영이 이승만의 최측근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갈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복잡한 감정과 일민주의 사상, 국민 방위군 사건에 대한 편협한 대답과 부산정치파동에 반감을 가진 그는 공개적으로 이승만과 결별을 선언하였다.

당시 종로 갑구에는 박순천, 주요한, 장후영, 유석현 등 쟁쟁한 인사들이 모두 13명이나 출마하여 전국에서 최대의 격전지로 꼽혔다. 그러나 그는 압도적인 표차로 박순천과 주요한을 누르고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신익희, 장택상, 조병옥 등이 술자리에 갈 때면 자신은 기독교 신앙인임을 들어 술을 마실 수 없다고 거부하였고, 증조부 윤득실이 술을 즐겨서 가산을 탕진, 할아버지 윤영렬이 절대 술을 마시지 말라고 훈계한 것을 이유로 들어 술자리 참여를 거부했다. 회식과 술자리 불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술자리에서 회자화되고 언급되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여성 의원들과 기독교도 의원들도 회식이나 술자리에 참여하여 술을 마셨으므로 그의 술자리 참석 거부, 회식 거부는 독특한 취향으로 취급되었다.

그는 뚜렷하게 색채를 나타내지 않고 야심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당내 신구파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내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다. 1956년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선출되고, 1월 24일에는 신병을 이유로 민주당 중앙당 의원부장직을 사퇴하고 민주당 중앙당 의원부 간사가 되었다. 5월 30일 민주당 중앙당 간사직을 사퇴했다. 1956년 9월 7일 서울 재동국민학교에서 특별 강연을 하였으나 경찰의 방해로 무산되어 경찰에 강력 항의하기도 했다.

당내 활동을 하면서 그는 민주당 구파였지만 특정 파벌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색채나 야심을 드러내지 않고 당무에만 전념했는데, 조병옥은 그에게도 야심이 있음을 간파하였다. 한번은 조병옥이 '언젠가는 윤보선이 전면에 나서는 날이 올 것이다'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였던 신익희, 조병옥이 연속으로 사망하면서 그는 일약 민주당 구파의 최고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러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11월 25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민주당의 대선 후보 선출과 함께 이뤄진 최고위원 개선에서 조병옥, 장면, 곽상훈 등과 함께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당초 최고위원회는 조병옥과 백남훈 등 구파 2명, 장면, 박순천, 곽상훈 등 신파 3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구파의 강력한 요구로 구파 위원을 한 명 추가하기로 하면서 그 자리가 윤보선에게 돌아간 것이었다. 당초 구파 내에서는 김도연과 유진산이 새 최고위원에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별로 야심 있는 정치인으로 평가 받지 않아 신파의 견제를 가장 덜 받던 윤보선이 최종 낙점된 것이었다.

그는 마산시장과 경남도지사, 마산경찰국장, 그리고 법원 사람들을 만나 회의를 열고 군중에 대한 발포금지와 감금된 시민들을 석방할 것 등을 골자로하는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회의장을 에워싸고 기다리던 시민들이 회의 결과가 빨리 발표되지 않자 무차별 투석을 가하고 전기를 끊는가 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등 난폭한 행동을 벌였던 것이다. 그는 직접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다.

이튿날 그를 비롯한 민주당 조사단은 다시 경찰서장과 지방법원 관계자들을 만나 해결책을 협의했으나 뚜렷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당시 내무부차관은 마산 시민의 1차 봉기 배후에 공산당 조직과 민주당이 개입돼 있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2차 봉기 역시 공산당 조직의 조정에 의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윤보선은 그런 사실이 없다며 즉각 반박성명을 냈다.

마산 현지에서 조사를 마치고 국회발언을 통해 그는 마산 시민 봉기는 공산당의 폭동이 아니라 애국시민의 의거라고 규정지었다. 그러자 자유당은 윤보선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자유당 회의장에 이 말을 남기고 거리로 나와 시내를 둘러보았다. 이를 두고 자유당 의원들은 윤보선이 돌아다니며 데모대를 선동했다고 비난하였다. 자유당은 그가 불순한 목적으로 시위대를 선전 선동한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윤보선은 '(나는 누군가에게) 데모를 선동한 일이 없다. 다만 상황을 살펴본 결과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더라.'고 응수하였다.

그 해 8월 12일 민의원, 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재적의원 263명 중 208명의 지지를 얻어 29표를 받은 김창숙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내각책임제 개헌 뒤 실권자가 국무총리라는 점에서 그는 한때 국무총리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구파 내 다른 국무총리 후보 희망자였던 김도연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상징적 지위인 대통령을 택했다.

민주당 구파는 대통령에 윤보선을, 국무총리에 김도연을 선출하기로 결의하였다. 신파는 국무총리로는 신파의 장면을 지지하되 대통령은 구파에 내주자는 전략을 갖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가장 선호하고 있었다. 결국 윤보선은 구파와 신파 모두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의 당적 보유를 금하였으므로, 윤보선은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날인 8월 13일 민주당에 탈당계를 제출하였다.

내각출범 20일 뒤, 국무총리 장면은 개각을 단행하여 5명의 장관직을 구파로 교체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내각책임제에 개입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으나, 내각인사에 개입 구파에게 준 자리는 빈탕이라고 비아냥댔다. 한편 그는 자신의 얼굴이 든 우표나 화폐 발행을 반대했다. 우표나 화폐 등은 죽은 사람이거나 공적이 뚜렷한 인물만 등재해야 된다는 것이 그의 반대 이유였다. 8월 경무대에서 특별히 그의 생일 기념 축하를 주관하였다. 그는 성대한 축하식 대신 간단한 파티와 주변 친지들을 초대하는 것으로 간략하게 하였다. 파티에는 장면 총리와 각료들 외에 어머니 이범숙, 윤치영, 윤치왕, 윤치창, 윤일선, 윤영선 등 일족들과 김도연, 유진산 등의 당직자, 몇몇 친한 친구 등 소수만이 초청되어 간략히 하였다.

그는 민주당 구파의 의원들을 모아 그들과 각종 대책을 숙의하였다. 그러나 민주당 신구파간 정치다툼에 대해서는 상당히 냉소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고, 이들의 대립을 외면하였다. 민주당 구파에서는 싸움에 동참하지 않고, 냉소적으로 대하는 윤보선을 두고 아군은 맞느냐며 공격했다.

장면 내각 출범 20일 마인 9월 12일 국방 권중돈, 부흥부 김우평, 교통부 박해정, 체신부 조한백, 보사부 나용균 등 구파 5명을 받아들인 개각이 단행되었다. 구파로서 처음부터 입각한 정헌주는 교통장관에서 국무원 사무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도 구파의 불만은 여전했다 윤보선은 구파에게 준 자리가 빈탕이라고 비아냥댔다.

그동안 윤보선은 많은 사람들에게 무난한 인물로 비춰졌기 때문에 신파도 대통령직에는 윤보선이 적임자라 생각하였으나, 대통령이 된 뒤에는 전혀 다른 모습을 취하였다. 윤보선은 민주당 구파 정치인들을 청와대로 자주 불러들여 모임을 가졌다. 모임에서 장면 내각의 정책과 반대되거나 장면을 비난하는 성명을 내고는 했다. 장면은 청와대를 갖은 정략을 꾸미는 구파들의 참모본부로 여겼다.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였던 그는 제2공화국 정부가 각계에서 분출된 자유화 요구로 정권 초기 현상을 겪고 있을 때 당시 의원내각제 헌법 하에서 대통령은 명목상, 의전상 국가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간섭으로 장면 정부에 다소 부담을 주었다. 나아가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이를 방조했다는 논란도 있다.

한편 그는 군통수권을 행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1960년 6월 15일에 제정된 제2공화국 헌법 61조 1항에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군을 통수한다.'라고 되어 있었으나 장면 내각 출범 후에도 내각은 법률을 정하지 않았다.

윤보선은 자유당 정권 때의 관료라고 해서 무조건 파면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인재가 있다면 가려서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결점, 단점을 찾기 보다 그 사람의 좋은 점과 재능을 살리는 것이 정치가 아니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유당 시절의 인사나 과도 내각의 인사까지 해임시키는 장면 총리와 갈등하였다. 장면 총리의 내각 운영 태도를 답답하다고 여긴 그는 장면에게 그럴 것이면 총리 직에서 물러나라고 했다. 장면은 어이없어 하면서 그 영감이 나더러 총리 직을 내려놓으란다 며 성토하였다.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하려고 민주당을 탈당했다.

에든버러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던 윤보선은 전국 각지의 유적지 보존, 보호 사업에도 후원하고 기금을 마련하였다. 1961년 1월 12일 민의원·참의원 합동회의에 참석하여 신년치사를 하였다. 그런데 윤보선은 시국을 '국가적 위기'라고 규정하고 정쟁의 휴전을(당파간에) 협정하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한 개인, 한 당파가 당면한 난국을 타개할 수 없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당파 이익을 위해 이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장면 내각을 겨냥해 거국내각을 구성하라는 촉구였다. 장면 내각과 민주당 신파는 당연히 발끈하였다.

장면 내각에서 민주당 신파 인사들만 채용한다는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자 그는 국무총리 장면의 권한이던 인사권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민주당 구파 인사들은 주로 그가 머무르고 있던 청와대 대통령 관저에 모였고, 신파 인사들은 국무총리 장면의 관저인 반도 호텔을 중심으로 모여서 각자 자파의 정책을 의논하였다. 4월 19일 4·19 혁명 1주기 추도식에 참석하였다. 장면내각은 그의 참견이 지나친 간섭이라 비판했고 그는 이를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충고라며 맞받아쳤다.

윤보선은 가족들만 피신시키고 나는 대통령이니 죽더라도 청와대를 지키겠다고 하고는 가족들만 피신시켰다.

매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과 린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군사 정변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시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아닌가'하고 힐책하였다.

박정희, 장도영 등이 각료들을 체포하고 청와대에 등장하자 체념한 그는 '올 것이 왔구나'라고 자탄하였다. 그러나 그가 놀라거나 저항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자 현석호 등은 '영원히 잊을수 없는 한마디'라며 그를 원망하였다. 한편 그는 군사 정변 직후 청와대에 나타나 위스키와 소주를 찾는 군인들의 무례함을 질책하였다. 이때 바로 계엄군 사령관 장도영 중장이 사과를 하여 넘어갔다.

 적개심 때문에 진압 행동을 거부했다는 분석도 있다. 한편 그는 여러 비판 중에도, 자신이 사퇴할 경우 국제사회로부터 합법적인 정부의 대표자로 나설 사람이 없으므로 국가전체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대통령직 사퇴를 번복했다고 하였다.

윤보선의 사퇴발표가 있자 군정 측은 그의 사퇴를 만류하였다. 5월 19일 밤 9시, 박정희와 장도영이 청와대를 찾아와 윤보선의 사퇴를 만류했다.

윤보선은 5월 20일 하야 번복 성명을 발표했다. 장도영에겐 윤보선이 좀더 필요했던 것 같으나, 박정희는 윤보선의 사퇴를 속 시원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사퇴를 고사한 일로 후일 민주당 신파 계열에서는 그가 군사정권에 협력했거나 내통, 또는 매수했다며 공격하였다.

결국 윤보선은 저녁 6시 예정돼 있던 고별회견 대신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하야하겠다는 나의결정이 국제적, 국내적으로 영향이 크다 하므로 나라 일을 해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만부득이 이 나라 형편을 생각하여 번의해야 할 것 같다.”며 하야를 번복, 번의 회견을 하였다. 1961년 6월 6일 국가재건 최고회의와 현충일 행사에 참석하였다.

이후 윤보선은 경제정책의 틀을 수립하고 정책을 추진하려 하였으나, 그를 명목상의 대통령에 앉히고 실권을 쥐려는 5.16 군부와 수시로 충돌하게 되었다.

군사정변 이후에도 1년 이상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했으나, 정치정화법이 제정되자 정변주체세력과의 의견 차이로 결국 1962년 3월 하야했다. 서중석에 의하면 '윤보선이 아무리 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했다. 하야의 배경에 관련되어서는 박정희의 구정치인 활동금지법에 반발했다는 주장도 있다. 퇴임후에는 안국동 사저인 안동장에 칩거하였다. 4·19 혁명으로 청와대의 주인이 되었던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세력이 마땅치 않다면서 박정희가 나오게 해서 나왔어도 감시와 연금이 되풀이 되는 불행한 나날을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윤보선은 대통령을 사퇴한 후 박정희 정권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야당 공격의 선봉에 선 윤보선은 대통령(권한대행)과 공화당 의장이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역적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또한 군정 세력의 민정이양은 허구이며 군정 세력의 정권 연장이 그들의 목적이라고 지적했다. 1962년 6월 29일 반공유격전적비 제막식에 참석하였다.

이에 그는 '3.16 성명이 박의장의 깊은 사려에서 나온 줄은 모르는 바가 아니나...세상 만사가 그렇게 박의장이 제안한 것처럼 척척 될는지도 의문이고 또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은 바로 이승만 박사의 사고방식과 같다. 인간 개조라는 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고 20년이고 30년이고 점진적으로 이룩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이어 군인의 사명은 국방에 있으니 만큼 군인들은 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윤보선의 말을 듣던 박정희는 노하며 오죽 당신네들의 과오를 못 참았으면 군인들이 일선에서 돌아 왔겠느냐 며 응수했다. 논쟁이 격화되자 장택상이 화제를 돌려 논쟁을 막았다.

한편 야당이 난립하게 되니까 통합해야 한다는 요구가 많았다. 그러나 통합야당으로 국민의당을 만들게 되지만 바로 깨져버렸고, 아주 난장판이 되었다. 통합야당 국민의당 붕괴에는 민주당 구파의 실력자 유진산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 이 당시 유진산은 윤보선의 오른팔 노릇을 하고 있었다.

허정은 5·16 군사 정변 당시의 그의 묵인을 지적하며 처신문제를 질타했다. 매그루더 사령관과 마셜 그린 주한미국 대사 및 미국무성 관리들로부터 '군사혁명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혁명이 일어난 직후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시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하닌가'하고 힐난까지 했다는 것이다. 허정은 그가 장면에 대한 적대심 때문에 정변을 묵인했다며 그의 자질을 의심했고, 윤보선은 자신이 군사 정변을 추인하지 않은 점과, 장면 내각 당시 데모와 부정 부패가 심했음을 들어 반박, 심한 말싸움이 벌어졌다.

허정은 1963년 9월 24일 혁명을 합법화시키고 정치정화법에 도장을 찍어놓고 대통령 후보를 사퇴한다, 출마한다고 하는 윤보선씨야말로 신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허정은 그가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상 자신이라고 대통령 후보로 나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그 뒤 허정은 그가 5.16 군사 정변에 호응한 점과 혁신 세력의 반발을 들어 김병로에게 후보자리를 양보하라고 종용하였으나 윤보선은 양보할 이유가 없다며 거절했고, 허정은 그가 독단적이고 고집에 세다며 질타했다. 윤보선이 대통령 후보로 지목되자 허정은 양보할 수 없음을 들어 끝까지 경선에 나서 경합하였으나, 결국 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해 허정이 자진 용퇴하면서 윤보선은 야당의 범야권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그 뒤 최종 지명되어 출마, 유세 도중 박정희의 공산주의 활동을 지적, 비판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63년 9월 24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 지방 유세에서 그는 '여순 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안에 있으며 박 의장의 민족주의 사상을 의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상 논쟁은 더욱 치열하게 되었다. 윤보선의 유세는 언론에 의해 사상 논쟁으로 묘사되었다. 공화당은 윤보선을 미국 상원의원을 역임한 존 매카시 의원의 사상에 사로잡힌 과격분자로 규정하고, 그의 주장은 얄팍한 술책이며 중상모략이라고 비난하였다. 박정희는 시대착오적 매카시즘이라며 맞받아쳤고, 윤보선은 그가 친일파, 공산주의자라며 조국을 두 번이나 배신했으며 검증이 필요하다고 맞받아쳤다.

선거 운동이 한고비에 이르렀을 무렵, 9월 28일 윤보선 후보는 다시 전라북도 전주에서 여순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다. 는 연설을 통해 박정희 후보가 여순 사건에 관련됐다는 시사를 했다. 이로써 전국은 발칵 뒤집혔다. '여순반란 사건의 관련자라면 박정희는 공산주의자였단 말인가, 박정희가 말하는 민족적 민주주의는 그럼 공산주의를 가리킨 것이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박정희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고의로 공산주의 의혹을 부풀려 올리려고 박정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분격을 금치 못했다. 김형욱을 필두로 하는 충성파와 민주공화당의 추종자들은 윤보선에게 강경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서둘러 즉각 고발조치를 취했다.

김사만은 여순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는 듯하다라고 한 윤보선의 전주 발언이 (김준연의 폭로에 비교하면) 그 얼마나 점잖은 표현이냐며 윤보선을 옹호하고 박정희씨는 그렇게 민족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사람이 일본 제국주의의 군인이 되겠다고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더 출세하겠다고 일본에 가지 않았느냐며 맹비난을 가했다. 바로 공화당에서 김준연을 고소하겠다고 선언하고 윤보선과 신민당을 매카시즘에 사로잡힌 무리들이라며 공격하고 나섰다.

윤보선은 내가 할 말 그사람이 했다.라고 서두를 꺼내고, 지금은 민주주의와 가장된 민주주의, 즉 이질적 민주주의와 대결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 '이질적 민주주의'가 무엇을 가리키느냐인데, 윤보선은 이어서 9월 23일의 여수 강연에서 특별히 느낀 것은 여순 반란 사건의 관계자가 지금 정부에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가 여순 사건 관계자이기 때문에 그의 민족 사상이나 민주주의 사상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고 했다. 이에 대하여 박정희는 9월 28일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용공주의 세력을 혁명으로 일소하여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반박했다. 한편 윤보선의 삼촌인 윤치영은 윤보선의 경쟁자인 박정희의 선거사무장이기도 했다. 9월 30일 윤치영은 썩은 구정치인이 집권하면 또다시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일각에서는 윤보선의 의혹을 사상공세라고 비난하였고, 숙질간의 싸움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윤치영이 박정희의 선거사무장으로 선거관리를 총괄하면서 야당인사인 허정, 김준연과 야당의 대선 주자인 윤보선과도 갈등하였다. 윤보선의 어머니이자 윤치영의 형수인 이범숙이 윤치영의 안국동 집에 찾아와 통곡하는 사태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나 윤치영과 윤보선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고, 화가 난 윤보선은 윤치영을 만났을 때 악수를 거절한다.

야당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10월 2일 국민의당 허정이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했고, 10월 8일에는 자민당의 대통령 후보 송요찬이 사퇴함으로써 윤보선은 사실상의 야당의 단일 후보로 공화당의 박정희와 맞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 논쟁은 윤보선 후보에게 오히려 불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공화당에서는 윤보선을 매카시스트로 몰아붙였고,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를 극우적인 정치가의 전형으로 간주하여 그의 정견에 동의를 표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지식인과 도시민은 그의 사상 논쟁을 과거 보수 정치가들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공산당의 스파이로 매도하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간주하였다. 야당인사들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1963년 10월 대통령 후보인 윤보선은 박순천, 이범석, 김병로, 장면의 자택을 각각 방문하였다. 허정과 변영태의 집 역시 방문하였으나, 이들은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사상 논쟁에서 윤보선이 손해를 본 것으로 분석한다. 서중석에 의하면 당시 경상도 · 전라도 쪽이 좌익이 강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그 지방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1950년 7월~8월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 선거 13년 전 일이어서 그때까지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게 좌익으로 몰려 많이 죽고, 또 살아남은 가족들은 연좌제에 묶여서 몹쓸 고생을 하고 있던 터라, 윤보선 같은 사람이 대통령 되면 큰일 나겠다. 여순 관계로 저렇게 몰아세우는 사람이니..... 하는 소리가 나왔다. 이 때문에 막판에 박정희 지지로 돌아섰다. 윤보선이 6·25 전쟁 당시 양민학살을 반대하여 이승만과 틀어졌다는 사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감옥소에 들어가 있는 혁신계 일부도 한민당 간부였던 윤보선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혁신계는 당시까지만 해도 한민당을 굉장히 미워하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민당에 대한 혁신세력의 혐오는 지속되어 차라리 윤보선이나 민주당 구파 계열을 지지하느니 박정희를 지지하겠다는 여론이 지속되었다. 6대 대통령 선거 때에도 그는 박정희의 전력과 사상이 전혀 민주주의적이지 못하다고 공세를 했다. 이 때에도 박정희의 공산주의 경력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선거 결과 박정희가 46.6%에 해당하는 4,702,640표를 받았고 민정당의 윤보선은 45.1%에 해당되는 4,546,614표를 받아 불과 15만 표차로 윤보선이 패배하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공화당이 모든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한 불법적인 선거로 규정하였다. 대통령 선거 유세 과정에서 위협을 받기도 하여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녔고, 미국 대사관의 직원이 윤보선 내외를 위한 차량을 비밀리에 마련하기도 했다. 1963년 11월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12월 17일 다시 국회로 복귀했다.

한편 그의 숙부인 윤치영은 박정희를 지지하고 그의 선거사무장을 지냈는데, 그는 끝내 수인사 조차 나누지 않았다. 윤치영과의 관계는 198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개선되었다.

선거 결과 박정희가 4,702,640표, 윤보선은 4,546,614표로 15만여 표 차이였다.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 제주도에서는 박정희가, 충청 남북도와 서울, 경기도, 강원도에서는 윤보선이 이겨서 남북선거 양상을 띄게 되었다. 서중석은 이를 두고 경상북도는 이때만 해도 몰표가 아니어서 박정희가 83만여 표였고, 윤보선 표도 54만 표나 나왔다. 충청북도도 그렇고, 두 지역은 여당 표가 많이 나오는 곳 이라고 지적했다.

선거가 끝난 직후 윤보선은 스스로 나는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했다. 사상 논쟁은 얘기할 것이 없었고, 윤보선 측에서는 막판에 개표 부정이 있지 않았겠느냐고 추측 했지만 증거는 없었다. 서중석에 의하면 그 당시 선거에서 공무원 가족, 경찰관을 포함해 관권에 의해 좌우되는 표를 10퍼센트 내지 20퍼센트로 보고 있었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윤보선이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말한 것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 라고 하였다.

대선 기간 중 윤보선은 암살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 1967년 5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육군 중령 방준모를 직접 불러 놓고는 ‘이 선거가 아무래도 위험해. 백중지세야. 까닥하다간 지겠어. 박 대통령의 혁명과업 완수와 경제계획을 완수하려면 할 수 없소. 암살할 준비를 하시오’라고 윤보선 암살을 명령했다. 표 대결에서 박 대통령이 패배한다면 ‘윤보선씨를 총으로 저격한다’는 암살 명령이었다. 방준모는 김형욱의 이 지시에 따라 개표 날 장총을 든 저격수와 함께 윤씨 집 안방이 내려다 보이는 서울 종로구 덕성여고 2층에서 비밀리에 대기했으나, 실제 개표 결과 박 대통령이 승리하는 바람에 그냥 철수하게 되었고 후일 방씨의 이런 폭로는 책으로까지 출판됐지만, 국내 일간지에는 윤보선에 대한 암살미수 관련 기사가 한차례도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민주당 구파를 함께 이끌어오던 유진산과의 갈등 끝에 1964년 8월 유진산과 결별했다. 1964년 8월 윤보선과 유진산이 결별한 이후 민주당 구파는 양분되었다. 신언론법안 제정을 쟁점으로 야당 내에서도 윤보선과 유진산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윤보선은 유진산이 이 법안을 통과시키자, 그가 민주공화당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수뢰하였다고 비난하였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야당의 공격의 선봉에 서게 된 그는 '대통령 박정희와 공화당 의장이 집권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역적'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박정희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 이후 그의 주변에는 중앙정보부의 감시요원이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다. 윤보선의 안동장 건너편에는 망루를 설치하고 그의 집 출입자에 대한 감시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윤보선은 자신의 발언을 철회할 수 없다며 고집하였다. 또한 미국의 월남전 파병에 박정희가 호응할 것이라는 설이 정가에 돌자 그는 월남 파병은 한국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는 매국행위, 젊은이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고 박정희 자신이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는 행위라며 비판하였다. 그는 이후 장준하와 함께 월남 파병 반대 운동도 준비한다.

당선을 위한 들러리냐하는 반발을 사게
되었다. 결국 그의 강경노선에 동조하는 윤제술,김도연,김재광,정성태,정일형,정해영,서민호 등 7명의 의원들과 더불어 의원직사퇴후 그들과 함께 초강경 선명야당 신한당의 창당을 선언하였으나 여기서도 자신의 당수직과 대통령후보직을 위협할수 있는 서민호와 김도연의 합류를 거부하는 옹졸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한동안 비록 의원직은 내놨을지라도 민중당에서 자신을 능가하는 대선후보를 내지 못할것이라 보고 느긋한 태도를 나타냈다. 한동안 그랬지만 청천벽력같은 일이 일어났다. 민중당이 대선후보로 고려대 총장인 유진오를 영입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67년 대선이 박정희와 윤보선 그리고 유진오의 3자대결구도로 간다면 윤보선은 당선은 고사하고 참신성 등에 있어서 유진오에 밀려 3등으로 밀릴수도 있는 입장이었다. 이에 다급해진 윤보선은 민중당 측에 합당과 대통령후보 단일화를 위해 유진오와의 회동을 제안하였고 민중당이 이를 받아들여 윤보선ᆞ유진오 간 회동결과 신한당과 민중당은 신민당으로 통합하고 당 대표에는 유진오,대선후보는 윤보선으로 하기로 극적으로 합의하였다.
그는 근본적으로 군정의 연장으로 간주되는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에 대해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윤보선은 박정권 자체가 국민의 진정한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는 불법 정부이므로 박정권에 의해 추진되는 한일정상화조약은 무효이며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정책은 박 대통령의 그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애꿎은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으려는 수단이므로 단호히 반대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서중석에 의하면 당시 윤보선과 장준하만 베트남 파병을 맹렬히 비난했다 이후 장택상, 장준하, 함석헌 등과 함께 한일굴욕외교 반대 활동을 적극 전개했으며 박정희의 경제개발 정책 역시 국민을 쥐어짜는 경제 정책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베트남 전쟁 파병 역시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 집권에 이익을 주려는 행위라며 월남 참전을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정부가 한일 교섭을 비밀리에 추진, 조속 타결하려는 움직임을 64년 벽두부터 표면화되었다. 곧 도쿄에서 정치협상을 하겠다고 서둘렀고 2월이 되자 정부와 여당은 3월 중 대일 교섭의 기본 방침을 밀고 나가겠다는 결정을 발표
 하였다. 64년 2월 22일 민정당에서는 당론으로 확정된 한일 교섭에 관한 대안(代案)을 발표했다. 박정권은 일반 여론의 추세를 무시한 채 3억불의 청구권 보상으로 만족하면서 우리 어민들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일본에게 내주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는 것이다. 윤보선은 학생 대표자들과 면담, 박정희 정부가 일본과의 협상을 서두르자 재야 세력이 총궐기하여 구국의 봉화를 들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시위 준비 작업을 독려하였다.

윤보선은 서울대 문리과 학생회장 김덕룡의 선언문을 비장한 선언문 이라며 예찬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식농성에 참여하는 학생들 수가 점점 늘어갔다. 무저항적인 학생들의 농성 현장에는 교수들과 시민들이 줄을 이어 찾아와 그들을 격려하고 먹을 것을 놓고 갔다. 윤보선과 함석헌은 함께 농성현장을 찾아갔다. 윤보선은 이를 두고 정치적인 목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자식 같은 학생들의 애처로움을 위로해 주기 위한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 라고 하였다. 윤보선과 함석헌은 현장을 돌며 학생들을 위문했다. 단식하다 지쳐 쓰러진 학생들은 들것에 실려 서울대 문리대 앞에 있는 서울대 의대로 옮겨졌다. 의대생과 간호학과 학생들은 교대로 철여하면서 단식학생들을 보살펴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목격한 윤보선은 그들 의대생, 간호학과 학생들도 단식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 보았다. 사건을 주동한 이명박 등은 피신했고 주동자를 찾지 못하고 학생들 348명을 기소한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시위의 배후로 윤보선, 장택상 등을 지목했다. 시위의 배후로 지목된 윤보선과 장택상은 정부가 보낸 사복경찰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감시를 당했다.

윤보선은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하는 학생들을 의로운 학생들이라며 손수 부인 공덕귀, 비서관, 함석헌 등을 대동하고 방문하여 격려하였다.

그린 부차관보는 '한일 국교회담의 조속한 정상하를 바라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전달'하고 윤보선과 야당에게 적극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한잃회담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마셜 그린은 '본국에 돌아가면 한국의 이익을 살릴 수 있도록 최대한 힘쓰겠다.'고 약속하였다. 윤보선과 마셜 그린의 회담을 불쾌하게 여긴 박정희는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박정희는 이 사실을 보고한 박상길 청와대 대변인에게 그 X버선인지 헌 버선(편집자 註-윤보선을 지칭)인지 하는 자가 하는 말을 나는 다 알고 있지. 새카만 일본 헤이타이(兵隊) 출신인 째그마한 내가 … 제까짓 게 뭘 알겠느냐, 이런 말 아니오?라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윤보선은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라며 그것이 박정희 씨의 인격이고 수준이라고 응수하였다.

한·일 협정 비준 반대투쟁에 나섰는데, 박순천은 한·일 협정 반대 투쟁에 적극적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박정희와 단독회담을 한 뒤로는 이상하게 돼버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일 협정 반대 시위에서 그는 정신적 대통령을 자처하였다.

민중당 내에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구별되는 뚜렷한 대립 노선이 노정되었다. 윤보선으로 대표되는 강경 노선은 군정의 연장으로 간주되는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에 대해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윤보선은 박정희 정권 자체가 '국민의 진정한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는 불법 정부'이므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추진되는 한일정상화조약은 무효이며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국군의 월남 전쟁 파병 정책은 박정희가 그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애꿎은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으려는 수단이므로 단호히 반대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한일회담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윤보선은 다시 1963년의 제5대 대통령 선거를 불법선거라며 비판했다. 윤보선은 1963년 대통령 선거를 공화당이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한 불법적인 선거로 규정하였다.

민정당에서 윤보선과 유진산이 심한 싸움을 벌이게 된다. 갈등을 벌이는 것을 지적하였다. 윤보선 측은 유진산을 박정희 정권과 모종의 흑막이 있다고 해서 벚꽃의 일본말인 '사쿠라'라고 하면서 권력과 내통하고 있는 사쿠라를 당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했다.

윤보선은 유진산을 사꾸라라고 공격했다. 유진산은 한편 그가 지나치게 고집이 세고 비타협적이라며 몰아붙였다. 윤보선과 유진산의 난타전은 계속되었고, 민주당 구파는 1965년말 6대 대선 준비기간 직전까지 양분된다.

민중당은 1967년 대통령 선거에 대비해서 박순천으로는 안되겠으니까 고려대 총장을 지낸 유진오를 당수로 영입하였다. 이때 윤보선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민중당은 유진오를 당수로 모셔서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려고 해봤는데 실패하였다. 서중석은 '유진오를 국민들이 잘 알지도 못했'고, 당시는 '어두웠던 시대라 유진오를 알 만한 유권자는 많지 않았다'는 단점을 지적했다. 윤보선이 대통령에 나올 것은 확실해졌다. 장준하는 주선을 해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 이범석 4자 회담을 주선했다. 회담 결과 당수에는 새로 통합야당을 만들어서 유진오가 차지하기로 했다. 이렇게 생긴 당이 신민당이다.

윤보선은 원칙론을 고수했고 유진산은 타협을 하면서 어느 정도 얻어낼 것은 얻어내자는 견해를 제시했다. 윤보선은 유진산을 사꾸라라고 공격했고 유진산은 오히려 윤보선이 1963년 3월과 4월 박정희와 면담 때 박정희의 구정치인 배격을 비판하고 잡토도 섞어야 된다고 발언한 것을 언급하며 조롱하였다.

민중당을 탈당하고 1966년 2월 28일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신한당(新韓黨)을 창당, 운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됐으며 3월 30일 신한당 총재에 취임하였다. 그해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5월 26일 전라북도 남원에서 신한당 지구당 창당 및 대선 예비주자로 유세를 개회하려 하였으나, 유세장소허가가 취소되고 강연은 좌절되었다. 윤보선은 정부의 야당탄압이라며 비판, 윤보선 총재를 비롯한 100여 명의 당원은 침묵시위를 벌였다. 한편 윤보선은 6대 대선에서 박정희의 사상이 민주주의인가 이질적인 사상인가 의혹을 제기하였다. 1966년 5월 26일 오후 윤보선 총재는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를 비판하였다. 박정희씨의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는 결국 월남 전쟁의 청부행위에 그치고 말았다. 월남증파가 미국의 뜻을 승인한 것도 아니고 민주주의를 신봉한 때문도 아닌 어디까지나 우리 청장년의 피를 팔아 정권을 유지하고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행동으로 밖에 볼 수 없다라고 하여 박정희의 민주적 민족주의 주장의 허구성 및 국군의 월남파병을 청장년의 피를 파는 행위라며 강도높게 비난하였다. 기자들이 기록을 주저하자 윤보선은 반복해서 재발언하였다.

윤보선의 발언은 화제가 되었고 국회와 검찰에서 다같이 문제가 되었다. 국회에서는 내무위원회와 본회의에서 집회불허사건에 대한 야당측의 비판이 제기됐고, 국회는 여야간 갈등으로 번졌으며 검찰은 윤보선 총재의 발언에 대하여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 수사하고 검찰에 출두하도록 소환장을 발부하였다. 그는 군사 독재정권의 언론 탄압이라며 바로 항의하였다. 윤보선의 비판 발언은 국회의 1966년 6월 7일에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와 1966년 6월 15일 열린 본회의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되었다. 윤보선은 국회에 출두하였고, 과정에서 야당의원들은 북괴찬양이나 이적의 목적이 없는 정치적 발언에 법률적 추궁을 하는 것은 야당탄압이라고 주장하고, 정치집회나 정당활동을 부당하게 방해하고 있는데 대한 시정대책, 반공법 적용의 남용문제 등에 관하여 질의가 있었다. 공화당에서는 윤보선을 구속, 처벌하라고 비난하였으나 처벌받지는 않고 비난은 곧 가라앉았다.

이후 장준하와 함께 베트남 파병을 반대하였다. 당시에 다른 이들도 베트남 파병을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윤보선과 장준하는 특히 베트남 전쟁 파병을 맹렬히 비난했다. 윤보선과 장준하는 박정희의 월남파병 강행은 국익의 이름으로 젊은이들의 피를 파는 매국행위이며, 국민적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기만술이라며 비판을 가한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유신독재정권 치하에서 3.1 구국 선언, YMCA 위장 결혼 사건 등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윤 전 대통령의 출석교회였던 안동교회(예장통합측의 장로교회. 안국동 소재)는 형사들의 감시대상중 하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야당의 후보 단일화를 위해 강원용은 윤보선에게 후보 사퇴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김대중을 대단히 불신하였다. 강원용이 윤보선을 찾아가서 신민당 후보 김대중을 지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윤보선은 강 목사가 사람을 몰라도 그렇게 몰라? 김대중이란 사람은 머리털부터 발톱까지 완전히 정치적인 사람이야라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리고는 윤보선은 오히려 정치적으로 이용할 지도 모른다면서 김대중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강원용은 다시 윤보선을 설득하였다.

다음날 오후에 박기출이 기자회견을 갖고 물러났고 윤보선은 김대중 지지로 돌아섰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 이후에도 윤보선은 신민당에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은 유신에 의해 1972년 강제 해산당했다. 72년 10월 박정희가 유신 선포를 하자 장기집권을 위한 음모라며 규탄성명을 발표하였고, 그가 발표한 긴급조치는 모두 무표라고 주장했다. 1973년 서울 YMCA에서 기도회 모임에 참석하였다. 서울 YMCA에서 기도회 모임에서 인혁당 사건 관련 사형 집행자 추모예배가 문제되어 목요기도회는 중단되고 문동환, 이해동, 김상근 목사 등이 연행되었다. 모임 참가자들은 중앙정보부의 집요한 강요에 동아일보에 목요기도회를 하지 않는다는 광고를 게재하였다. 이때 윤보선은 그들에게 회의장소로 자신의 집을 내 주었다. 73년 3월 23일 윤보선은 정구영, 지학순 주교 등 10명과 함께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하였다.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는 75년 4월 22일 오후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김상진의 추도식을 갖기로 했다. 4월 22일 윤보선은 김상진 추도식에 참석하려 하였으나 제지당하였다. 윤보선은 명동성당 추도식에 참석하여 민주학생의 명복을 빌어줄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경찰관들이 그의 안국동 사저에 모여들더니 윤보선의 바깥 출입을 막았다. 윤보선은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불법적으로 연금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윤보선은 이태영으로부터 김대중이 초안한 선언문을 입수 하였으나, 선언문이 ‘온건하긴 했으나 독재를 비판하는 강도면에서는 약한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윤보선은 아내 공덕귀를 시켜 이태영을 만나, 서명문이 온건하다 하여 서명을 거절하였다.

며칠 뒤 문익환이 서명을 작성하여 그를 찾아왔다.

문익환으로부터 봉투를 건네받은 윤보선은 내용을 읽은 뒤 ‘강도가 높고 할말을 별로 빠뜨리지 않은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며 문익환이 초안한 선언문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법정에 출두했다. 당시 삼복더위에도 단추 셋 달린 양복을 입고 젊은 판검사 앞에 부동자세로 서서 깍듯한 존댓말로 응했다. 77세 노령에 전 대통령으로서 구태여 법정에 나가지 않아도 끌어갈 사람은 없었고 더구나 박정희와는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정권은 반대하지만 법은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법정에 출두한 것이다. 재판정 앞에 선 그의 당당함과 깎듯함에 군정 관계자들은 당황하였고, 박정희가 무리하게 고령자를 법정에 세웠다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발 여론이 형성되었다.

윤보선은 이후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독재행위라며 노골적으로 공격하였다. 1976년 3월 1일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민주지도자들과 함께 '3·1 명동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기도 했다. 1976년 3월 문익환, 함세운 등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700여명의 신자가 모인 가운데 유신헌법 철폐, 긴급조치 폐지 등을 주장하는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했다가 가택수사를 당하였고, 뒤이어 '사실 왜곡 전파', '헌법 왜곡 비방 및 폐지 선동'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아, 최고 징역·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그 뒤 형량은 징역 8년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징역 8년을 선고받았으나 그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법정구속되지 않았다. 5월 김대중은 3.1 민주구국선언 혐의로 전격 구속되었고, 윤보선은 공덕귀 및 이희호, 김홍일 등과 함께 김대중 석방 농성을 벌였다.

이때 반유신 운동의 해외홍보를 위해 해외인사들과의 연대를 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1978년 윤보선은 일본에 체류중인 정경모를 통해 국민연합 일본지부를 세우려 할 때, 문익환은 '아직도 그의 사상을 믿을 수 없다'며 반대해버렸다. 스승 김재준 목사가 정경모를 강력히 추천했을 때도 문익환은 그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결국 문익환의 반대로 국민연합 일본지부 결성 계획은 취소되었다. 그 해 10월 17일 윤보선은 함석헌, 문익환 등 야당 및 재야인사 402명과 12개의 시민 사회단체와 함께 10·17 민주국민선언을 발표하였다. 1978년 12월 7일 민주주의 국민연합과 함께 성명서 '12ㆍ12 선거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발표하다.

김영삼 제명 파동 소식을 듣자 그는 독재정권이 최후의 발악을 한다며 박정희에 대한 비판을 가하였다. 10월 26일 그는 안국동 사저에서 박정희의 피격 운명소식을 접하였다.

당시 그는 벌써 80이 넘었다. 주목되는 점은 유신체제에서 민주화 투쟁과 관련된 윤보선의 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미국의 국무부가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논평도 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편 김영삼은 김대중이 신민당에 입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월 7일 김대중은 신민당 입당을 거부했다. 윤보선은 다시 중재에 섰다. 4월 7일 윤보선의 중재로 두 사람은 4월 12일 윤보선과 함께 3자 회동을 했지만 대권을 향한 두 사람의 꿈을 막을 수는 없었다. 윤보선은 다시 한번 힘을 합치라고 권고했지만 회의는 결렬되고 만다. 4월 28일 김영삼이 신민당 당직자와 함께 대권과 관련해 현충사를 참배하자 같은 날 김대중은 신민당 내 동교동 의원들을 데리고 현충사 부근 윤봉길 생가를 방문한다. 두 김씨에게 다시 한번 단일화를 추진시키려고 자리를 주선했지만 실패하자 윤보선도 더이상 이들과의 접촉을 단념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그해 8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정계를 은퇴한다. 그가 물러나자 민주당 구파는 장택상과 조병옥이 발탁한 김영삼이 영도하게 된다.

제5공화국 출범 이후에도 박정희 정부시절과는 달리 정부에 적극협력하여 국정자문회의등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줄곧 국정자문회의 의원을 지냈다. 1980년 초 전두환과 신군부는 안국동의 윤보선 자택을 직접 방문, 면담하였다. 전두환 등은 윤보선에게 박정희정권의 부패상 등을 지적 자신들은 박정희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고 민주화를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할테니 도와 달라 고 했다. 오랫동안 박정희에게 핍박을 받아온 데다가 기약 없는 민주화 운동으로 지칠 대로 지친 그의 마음이 움직이고 말았다. 강원룡과 천관우, 지학순 등과 함께 국정자문회의 의원 직을 수락하는데 세간에서는 윤보선 천관우 지학순 강원룡을 가리켜 '변절자 윤천지강'이라는 비아냥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부인 공덕귀는 두 아들과 함께 제발 가만히 있으라며 남편을 말렸다. 그러나 말리는 공덕귀와 남편 윤보선 간에 고성이 오갔다. 윤보선은 아니 공덕귀의 말을 듣지 않았고, 국정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 참석하였다. 그가 전두환의 독재에 협력하였다며 학생운동가들은 맹비난을 퍼부었다. 동시에 그는 학생운동가들의 반미주의적인 활동은 야당 운동, 학생 운동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며 비판했다. 이후 줄곧 제5공화국 전두환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야당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편 윤보선은 공산주의 혁명론과 민족 해방론, 반미주의 사상을 가진 운동권을 극도로 불신하였다. 강원용은 이를 두고 '윤보선씨는 그처럼 위험한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바에는 박정희처럼 장기 집권만 안 한다면 당분간 군인들에게 가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듯해요.'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학생운동가들은 대한민국이 남북협상으로 태어날 통일정부 수립을 방해하고 생겨난 부산물로 여기고, 단독정부 수립론을 비판하였다. 그는 재야, 학생운동가들의 입장을 옹호하였지만 정부수립을 분단의 원흉으로 보는 시각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곧 극우 세력과 학생운동가들의 날선 비난이 있었지만 그는 이를 방관하였다. 1985년 6월 제4회 전국사회복지대회준비위원회에서 사회복지협회 명예회장직에 선임되었다. 1985년 3월 경희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와 12월 미국 US 국제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6년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 의장이 되었다.

그밖에 강원룡, 김수환 등의 강연회와 기독교단체의 운동에 적극 후원, 참여하기도 했다.

만년의 윤보선은 양복 한 벌이 유일한 재산이었다. 그 양복은 어려운 중에 있던 자신을 찾아준 것을 감사히 여긴 디자이너 이정송이 재단해준 양복이었다.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당뇨로 고생하였는데 조카 윤남경에 의하면 1975년경부터 당뇨로 고생하였다 한다.

사후 부인 공덕귀는 앞서 간 남편을 추모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집안에 상청을 차려두고, 거기에 남편의 사진과 촛대와 꽃을 두었다. 그리고 3년 동안 매주 교회에 예배보러 나갈 때는 남편이 늘 앉았던 자리에 꽃을 갖다 놓곤 했다. 안동교회에 아버지 윤치소와 그의 사후 윤보선이 앉아있던 좌측 맨 앞줄의 왼쪽 끝 좌석은 윤보선이 앉던 자리라는 표석이 붙여졌다.

그의 사후에도 1997년까지 부인 공덕귀가 살던 그의 서울 안국동 사저는 서울특별시 사적 제438호로 지정되었다. 윤보선의 생가 역시 1984년 12월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19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12월 고향인 충청남도 아산의 생가에 아산시와 윤보선대통령기념사업회 등의 주최로 윤보선 기념전시관이 열린 뒤, 바로 윤보선 기념관이 개관되었다. 1998년 한때 건국훈장 추서 대상자로 한때 논의되었으나 곧 흐지부지되었다.

그의 서울특별시 안국동 사저는 대지 1천400평에 99칸의 거대한 한옥으로 후에 100칸을 넘게 되었다. 그의 안국동 사저는 한민당때부터 정계 거물들이 출입하던 곳으로, 48년 9월 윤보선이 스스로 자신의 안국동 사저 별채를 한국민주당의 회합장소로 제공한 이래 계속 한민당과 민국당, 민주당의 주요 회합 장소로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사저를 이승만의 이화장이나 김구의 경교장, 김규식의 삼청장, 박헌영의 혜화장에 비교하여 '안동궁'(安東宮)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의 정치관은 흑백 양자택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타협을 모르고 한 길로만 내달았다.

윤보선은 항상 비서관과 젊은이들에게 민주주의는 물과 공기와 같은 것으로서 어느 나라에서든 보편적이고 타당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민족적 민주주의, 우리식 민주주의, 한국적 민주주의, 일민주의 등을 거짓 민주주의로 규정하고, 민주주의의 원칙을 그대로 적용할 것을 역설했다. 다만 무조건 다수의 의견이 민주주의라는 주장에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소수의 의견이라고 하더라도 상식적이고 타당하다면 그것을 따를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라는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는 매사에 상식을 강조하였다. 비서관 김준하에 의하면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일을 할 때 잊어서는 안되는 마음가짐을 꼼꼼히 설명했다. 그때 대통령이 내세운 것은 상식이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는 민주주의의 종주국인 영국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기본이 되는 헌법이 따로 없다. 그들은 '상식'을 헌법으로 대치한다. 사고와 행동의 잣대를 상식으로 삼으면 나라의 일이나 개인 생활이나 정상적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김준하 비서관은 이를 그의 '첫 가르침'이라 회상하였다.

그는 국익을 위해서는 초당적인 협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62년 군사 정권 집권 초, 미국의 잉여농수산물 무상 지원을 시도하면서 야당인사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자 김병로 등은 반대했지만 윤보선과 장택상은 적극 동조하였다. 오히려 윤보선은 그것은 가인이 잘못 생각한 것이라며 일침을 놓기도 했다.

군사 정권에서 도움을 요청한 밀사가 장택상을 방문하였다. 밀사는 장택상에게 정부대표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비밀리에 미국을 설득해서 식량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다음날 아침 장택상 가인 김병로를 찾아가 상의하였다. 김병로는 장택상과 군사정권 인사 사이에 오고 간 말을 듣고 나더니 난색을 보였다. 그는 비록 국민의 식량 문제라고 할지라도 미국 잉여 농산물이 한국에 때맞춰 들어오고 보면 이 군사정권이 오래 지속될 것이 아닌가하고 말하면서 좀더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장택상은 그자리에서 나와 즉시 안국동 윤보선댁을 찾아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장택상이 김병로가 '나의 도미하는 문제에 대하여 난색을 표하더라'고 덧붙였더니 윤보선은 대뜸 '그게 무슨 말이냐?'면서 김병로가 잘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것은 가인이 잘못 생각한 것으로 문제가 국민의 식량 문제인만큼 누구 심부름이든 가릴 것 없이 하루빨리 미국에 가서 힘닿는대로 해결지어야 한다.고 강경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주한미국대사는 장택상이 정부대표 자격이 아니면 받아줄수 없다고 했고 결국 실패했다. 장택상이 기자회견까지 마치자 윤보선은 직접 환송한다고 자택까지 불러서 저녁 대접까지 해 주었다. 그러나 군사정부에서는 장택상에게 취소됐다고 연락했고, 장택상과 윤보선은 분개했다. 그는 국익을 위해서라면 일단 정당을 초월해서 협력을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군사정권 기간 내내 그는 당리당략보다는 국민의 생존권이 우선이라 판단했다. 특히 식량이나 약품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정치싸움보다는 일단 협력할 것을 역설했다.

윤보선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반감과 불신이 대단하였다. 강원룡에 의하면 '윤보선 씨는 박정희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사상적으로는 대단히 뿌리깊은 반공입니다. 박정희가 무너질 때까지 재야 인사들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며 힘을 합했지만, 내심 이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도저히 안심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소위 운동권이 성공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이것이 전두환 정권을 멀리 하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예요.'라고 지적했다. 강원용은 오히려 박정희가 좌익이며 위험 인물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강원용에 의하면 그는 한때 이범석과 가깝게 지냈던 김정례와도 가까이 지냈다고 하였다.

그는 영국 생활과 유럽 생활 중 영수증을 잘 주고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워하였다. 이는 한국인들은 영수증을 받지 않으면 바가지를 씌운다는 점과 적당히 바가지를 씌우는 상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변모하였다.

'중국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어 내 딴에는 중요한 물건과 현금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되어 가방에 넣어 수하물로 부쳤는데, 내 수하물을 취급하는 사람이 어찌된 일인지 하물표(영수증)를 발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짐표를 요구했더니 하물취급하는 사람이 도리어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며, 당신 짐은 글래스고에 가서 찾으면 되지 않소? 표는 무슨 표요?하고 주지 않았다. 그는 잔뜩 의심하고 경계하였다.

글래스고 시에 도착해서는 마중나와 있는 윤치왕에게 이를 걱정해서 말했더니, 윤치왕은 그를 이끌고 따라오라며 화물차가 있는 방향으로 갔다. 윤치왕은 그에게 짐을 가지고 가자고 하였다. 영국인들은 각자 자기 짐만 집어가지고 가는 것이었다. 남의 짐도 좋은것이 있다 싶으면 가져가는 조선인들의 습성을 봐온 그는 이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나는 이 허술한 사실에 어안이 벙벙하였다.'고 한다. '그때 영국은 이만큼 탄탄한 사회구조에 이미 서 있었으니 10전어치 물건을 사고도 반드시 영수증을 주고받아야만 하는 사회에서 온 이 동양인에게 그 사회가 어떻게 보였을까.'하며 이를 오래도록 부끄럽게 여겼다.

그는 한국 사회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려면 정신적인 혁명부터 이룩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부도덕성과 비정직성으로 들었다. 윤보선은 '조국의 근대화'가 아니라 '조국의 민주화'와 '정신적 근대화' 역시 병행되거나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대의의 원칙에 기반한 의회주의, 보통선거, 정당간의 공정한 경쟁을 통한 정부 구성을 이행할 것을 여러번 촉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박정희와 그의 유신을 반민족, 반민주, 반민생, 빈민권 세력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원칙을 강조하되, 그 원칙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상식을 제시했다.

윤보선은 박정희와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의 후유증이 한국 사회의 비윤리적이고 그릇된 사고와 의식, 타성과 풍조를 심었다고 진단했고, 국민들 스스로 씻어내고 정신혁명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정책이 부패와 퇴폐의식을 조장했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풍조를 남기는 등 한국 사회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봤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윤보선의 자택은 대지 1천400평에 99칸의 거대한 한옥이다. 3.1 구국 선언, 민주화 운동 단체 가입, 크리스찬아카데미, 민주화이후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날조한 사법살인으로 확인된 인혁당 사건, YMCA 위장 결혼 사건 등 민주화 운동에 참여·지원하거나 민주화운동 탄압에 연루되어 때문에, 그가 출석하던 안동교회는 중앙정보부와 형사들의 감시, 사찰대상이 되었다. 안동교회는 윤보선의 아버지인 윤치소가 설립하여 헌당에 참여한 예장통합측 장로교회이다.

그의 집인 안동장 앞에도 중앙정보부는 3층 높이의 초소를 세워두고 그의 집 출입자들을 감시하였다 한다. 윤보선은 이를 대단히 불쾌히 여기면서도 박정희가 죽고 난 뒤, 이를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였다.

윤보선은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취임기념우표와 기념주화가 없는 유일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1960년 8월 대통령 취임 후 취임기념우표 발행 건의가 들어왔으나 그는 살아있는 인물을 도안할 필요가 있느냐며 거절하였다 기념 주화의 발행에 대한 건의 역시 거절하였다. 또한 그는 대통령 취임 후 각료에게 각하라는 명칭은 자제할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얼굴이 도안된 주화 발행 역시 거부했다. 그는 우표와 화폐에는 나라에서 기념할 만한 인물을 넣는 것이 상식이라며 반대의 이유를 밝혔다. 다만 1960년 8월 27일과 1961년 8월 27일의 청와대에서의 대통령 탄신일 기념행사(의전에 의한 행사)는 수용하였다.

대통령 재직 중 청와대의 명칭을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바꿨다.

정원의 화단 가꾸기와 독서를 즐겨하였다.

그는 밥은 꼭 잡곡밥으로 식사를 했다고 한다. 흰 쌀밥으로만 식사를 할 수 있었음에도 콩, 보리, 팥, 조 등 여러 가지 잡곡을 섞어 식사를 한 것이 궁극적으로는 장수의 비결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집권 16년간 비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제3공화국 당시 박정희의 대선 경쟁자이자 박정희의 제3공화국, 제4공화국 16년 동안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대학교수 겸 역사학자 서중석은 그가 박정희와 정면으로 붙은 것을 높이 평가한다. 정통 야당을 고수하며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인사로도 평가된다. 또한 박정희 정권에서 추진한 경제정책의 기초를 마련한 것 역시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의 복권 운동을 벌인 점은 학생운동가들로부터 높이 평가받는다.

그가 추진하려던 경제개발 계획에 관련하여 '경제정책 프레임은 비록 미완이었지만 박정희 정권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꽃을 피워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논리적이고 사리가 밝은 사람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반박정희 투쟁에 있어서의 그의 비타협적인 자세는 원칙을 고수하는 민주주의자, 합리주의자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으나 반면에 융통성이나 타협능력이 부족하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비서관이었던 김준하는 평하기를 '그분이 1960년 제2공화정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대변인을 맡게 되어 5·16군사정변을 함께 맞게 되고 그 이후 반독재 투쟁에도 뒤따르게 됐다. 그분은 영국신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성격이 온화하고 따뜻하셨다. “관습법 국가인 영국에서는 상식이 곧 헌법”이라면서 매사를 보고 결정하는 기준으로 상식을 내세웠다. 또 무슨 일이든지 한번 결정하실 때는 오래 심사숙고하신 후에 결정을 내리시고 일단 한번 결정하면 요지부동으로 강직하게 밀고 나가셨다.' 한다. 이어 김준하는 그가 지극한 효자였다고 평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노모에게 꼭 문안을 드리고 노모의 건강을 체크했다. 5·16 아침 비서들이 대통령에게 청와대를 피하도록 권유했을 때 그것을 거부한 이유 중의 하나도 자기 혼자만 피신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내지 못하고 군부에 정권을 넘겨주었던 나약한 정치인으로도 그려진다. 한영우는 5.16 군사정변 당시 그의 묵인적 행동을 지적, '이 사건(5·16군사 정변) 중심으로 그를 이해한다면, 그는 한국민주당에서 민주국민당, 그리고 민주당과 신민당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보수 야당에서 구파 계열을 대표하는, 한 파벌의 정치인일 뿐이다.'라고 보았다. 더한 지적도 많다.

친일파 집안의 덕으로 학창시절을 어렵지 않은 환경에서 수학한 것을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그가 친일파라는 비난도 있으나 그가 직접적으로 친일행위에 가담하지 않았으므로 친일파로 보기는 어렵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윤보선은 자유주의자였지만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원칙론만 되풀이했다 는 비판도 있다.

정대철은 '그가 내심 5·16 쿠데타를 지지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지지성명 요구를 거부하는 등 반대했다는 기록도 남겼다. 노회한 정치인의 처세라 아니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5ㆍ16쿠데타가 일어난 지 1년이 되는 시점에서 당시의 한 신문은, 쿠데타 주체의 한 사람이었던 유원식의 말을 인용해 윤보선은 이미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군인들과 교감하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쿠데타를 승인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폭로했다. 이러한 폭로는 올 것이 왔구나라는 해석을 둘러싼 논쟁을 일으켰다. 5·16 군사 정변을 방조, 묵인했다는 의혹과 비판은 계속 제기되고 있다.

서중석은 민주당 신파의 지도자였던 장면 국무총리가 일을 못하게 된 큰 이유가 윤보선이 딴지를 걸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의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비판했고 박정희와 제3공화국 유신 체제에 정면도전하였으며, 1970년대 내내 인혁당 사건, 크리스찬 아카데미, 김상진 할복 사건, 명동구국민주선언, YMCA 위장 결혼식 사건 등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를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또한 수시로 내사를 당하고 감시인이 따라붙는 등의 고초를 겪었던 점 등을 높이 평가해 왔다. 그러나 제5공화국 이후에는 협력적으로 변하면서 재야인사 및 신민당계 인사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허정은 그가 야당 대열에 복귀할 자격이 있느냐며 수시로 공격했다. 허정은 자신의 회고록에도 '1963년 1월 초 정치정화법이 해제되었다. 그리고 63년 1월 2일 김병로, 윤보선 등이 모여 민정당의 발기에 합의했다. 허정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윤보선 씨의 성급한 정치활동 재개는 나로서는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허정에 의하면 윤보선은 혁명정권과 한 동안 같이 일한 사람인 만큼, 혁명 세력과 대결하는 야당 대열에 복귀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생각이었다.'고 기술하였다.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매카시즘 공세를 일으키다가 되려 역공세당했다는 비판적인 지적도 있다. 한국 전쟁 당시 이른바 '빨갱이 파문'과 '연좌제'로 심한 상처를 안고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 윤보선의 '매카시즘 대선 전략'은 과거의 상처만 되살린 꼴이 되어 버렸고 이들은 도리어 '박정희가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린다'는 동정심을 가져 박정희에 지지표를 쏟았다. 결국 박정희는 15만표차로 당선 되었는데 여기에는 윤보선의 '매카시즘 공략'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윤보선은 이승만의 권위주의와 박정희의 권위주의적인 행동에 대해 권위주의, 전체주의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데 전북대학교 신방학과 교수 강준만에 의하면 윤보선도 권위주의적이라는 것이다. 강준만은 권위주의적인 윤보선과 다툼을 싫어하는 장면의 대조적인 성격이라고 비평하기도 했다. 강준만은 그를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으며',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고 평하였다.

그는 쉽게 누군가에게 호감을 주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번 자기 사람이 되면 각별하게 챙기고, 그의 가족의 생일, 기일까지 챙기는 자상함을 보였다. 그러나 김남 비서관의 결혼식에 장면이 온다는 말을 듣고 가지 않으려다가 선우종원이 만류하는 바람에 참석하였다. 이것이 사람들 뒤에 들어가면서 그가 김남 비서의 결혼식을 기피하더라는 말들만 돌고 돌았다.

냉정하고 합리적이라는 인물평이 있다. 한편 그가 권위주의적이고 조선시대의 양반적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평도 있다.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의 정치관은 흑백 양자택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타협을 모르고 한 길로만 내달렸다. 1960년 8월 29일 민정시찰 시 각료들을 불렀다가 월권행위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자존심을 중히 여기는 명사형 정치인이라는 평가도 있다. 옳다고 믿는 것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이었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전까지 윤보선은 영국 에든버러 대학을 나온 신사다., 대부호 명문집 아들이다 이렇게만 알았는데, 이주 잘못 안 것이었다 한다. 서중석은 그가 상당히 정치적이었고 야심도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을 알게 된 것은 대통령이 된 직후 내각 책임제하의 수반이었던 장면 국무총리와 싸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했다.

서중석은 윤보선이 1960년 4·19 혁명이 나기 전까지는 세상에서 잘 몰랐는데 대통령이 되었다고 봤다. 서중석은 '윤보선처럼 박정희와 정면으로 붙은 사람은 없다'며 '그것을 보면 사람은 겉보기하도 다르'다고 평가했다.

깔끔하고 말쑥한 신사였던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아랫배가 나오지 않았고, 피부결이 늘어지지도 않았다. 눈가 주변에 약간의 주름과 검버섯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나이에 비해서 상당히 젊어보이는 편이었다.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들 탓에 그는 자신의 외모에도 각별히 신경썼다. 1950년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윤보선은 최기일을 면담했다. 최기일에 의하면 '윤보선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아서 나는 그이를 싫어했지만 계속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조금씩 그와 가까워졌다. 내가 미국에 유학을 왔을 때 그는 미장 그릴에서 점심 대접을 하기도 했다. 윤보선은 후덕한 사람은 아니지만 논리적이고 사리가 밝은 사람이었다.'는 평을 내렸다.

윤보선 본인은 5·16 군사정변을 승인할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하였으나 제2공화국의 국가원수임에도 5·16 군사정변을 추인 내지는 저지하지 않았다는 비판론이 제기되고 있다. 더 나가 학생혁명만 혁명이고 군사혁명은 혁명이 아니냐고 항의했다고도 한다. 그가 5·16 군사 정변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주장 외에 지지는 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군사정변 당시 장면의 포기로 사실상 국군통수권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38선 전방부대를 서울로 보내 군사 정변을 저지하지 않았고, 박정희의 국군통수권 이양 요구 당시 올 것이 왔다라는 말과 함께 순순히 국군통수권을 이양한 것 때문에 그가 군사정변을 묵인하는 대신 박정희와 대통령 중심제 개헌을 매개체로 타협을 보려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학자들이 있다. 왜냐하면 내각 책임제 치하에서 대통령은 별 볼 일없는 자리였기에 이에 분개한 윤보선이 박정희와 타협하였다 한다.

윤보선의 정변 방조 의혹은 1962년 5월 유원식이 제기하였다. 유원식은 인터뷰에서 '윤보선이 이전부터 쿠데타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았고 이를 방조했다'고 주장하자, 윤보선은 이를 부인하며 '혼란한 장면 정부하에서 무슨 사태가 터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다기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의 자신의 회고록인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 회고록》에서 유원식과는 만난 적이 없으며, 유원식이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윤보선은 내각책임제 하에 정부 수반으로서 실권을 행사했던 장면 총리의의 실권을 부러워하여 5·16 군사정변을 방조 내지는 묵인했다는 분석도 있다. 국가원수 신분으로서 정치적 라이벌인 장면의 몰락을 바라며 제2공화국 붕괴를 방관했다는 이러한 주장은, 야당 지도자로 활동 중이었던 윤보선에게는 도덕적으로 치명적이었다. 윤보선 측은 5·16 군사정변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이를 사실상 승인했다는 의혹을 전면 부인하여, 유원식의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김도연으로부터 폭동발생, 정변 음모 등의 정보를 입수하고, 김도연에게서 들은 정보를 국무총리 장면에게 알려 철저한 대응을 지시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장면은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알아보니 별일이 아니다. 걱정할 것 없다'고 반응했다고 한다.

장면은 윤보선이 비서관들을 보내 쿠데타 진압을 저지시켰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장면은 윤보선 대통령이 비서관들을 1군 사령관 이한림에게 보내서 쿠데타 진압을 저지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국군 통수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의 태도가 이러한 것을 알고눈 쿠데타가 진압되리라는 희망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장면의 주장이다.

윤보선이 5·16 군사 정변을 지지한다고 생각한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박정희, 장도영, 김종필 등을 진압할 생각을 포기했다.

장면의 비서관이었던 박종률은 후일 그의 태도가 애매했다고 봤다. 박종률에 의하면 ‘윤 대통령이 쿠데타를 인정한 것은 사실 이라는 것이다. 박종률에 의하면 당시 국방차관인 우희창으로부터 들은 말을 인용, 윤보선은 명백하게 쿠데타를 인정하고 진압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우희창 역시 매그루더 대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접견실에서 박정희 일행을 만난 윤보선은 “올 것이 왔구나” 라는 말로 입을 열었다. 혼자 하는 말이었지만 소리가 워낙 커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들었다. 현석호는 대통령의 입에서는 듣기에 민망한 혹독한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나왔다. 요약을 하면 장면 총리는 진작에 물러났어야 했으며 민주당은 무능했다는 얘기였다.

현석호는 회고록에서 윤보선은 이 말에 이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그 길밖에 없었다면서 장면 정부에 비난을 퍼붓고 박정희의 거사에 찬사를 보냈다고 했다.

군부에 의해 청와대로 온 현석호는 윤보선의 이 발언을 가리켜 ‘한마디 평생토록 잊지 못할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

허정에 의하면 UN군이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국에서 군사혁명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안도감도 있었으나 군사혁명은 성공해 가고 있었다. 매그루더 UN군 사령관의 원대 복귀 호소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허정의 증언에 의하면 그 무렵 매그루더 사령관과 주한미국 대리대사가 허정을 찾아갔다. 그들의 말로는 군사혁명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혁명이 일어난 직후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사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하닌가'하고 힐문 조차도 했다는 것이다.

그의 비서관을 지냈던 김준하에 의하면 그는 5·16 군사 정변에 협력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김준하에 의하면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내통하거나 묵인한 일은 결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국군통수권이 없었던 윤 대통령은 마셜 그린 주한 미 대사와 카터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에게 미군을 동원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는 등 피를 흘리지 않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고 덧붙였다. 김씨는“정치군인들의 치밀한 사전계획과 장면 정권의 무능과 분열 때문에 쿠데타 세력이 집권에 성공했다' 고 증언하였다.

또 그는 일부 '혁신세력이 주도한 야간 데모 등 사회적 혼란, 물가 폭등과 경제 파탄,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의 태도 등이 쿠데타의 빌미가 됐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5·16 군사 정변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거나 군인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지 않았던 점도 있어 그를 협력자라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대학시절 고고학을 택한 이유로 그는 고고학을 선택한 배경에 대해 그는 인간으로서 내용을 충실히 하고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주는 학문으로 순수과학을 할 생각이었으며, 그 가운데 고고학을 택했다고 한다. 양반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윤보선과 장택상은 박정희가 자신의 가계와 가난한 가정 환경에 대한 열등감을 가진 것을 간파하고 이를 경멸하였다.

윤보선은 풍수설을 맹신하였다. 윤보선이 1990년 사망했을 때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고 충남 아산군 음봉면 동천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그는 자신이 죽어 묻힐 자리, 즉 신후지지를 미리 만들어놓고 즐겨 찾았다.

눈 질환과 호흡기 질환이 있던 윤보선은 안과와 이비인후과를 자주 다녔다. 그중 그는 당시 서울에 있던 정귀섭 안과·이비인후과 단골이었다. 정귀섭 안과와 이비인후과는 윤보선 외에도 이승만, 그의 당숙 윤치호도 단골이기도 했다.

사망 직전까지 허정, 이갑성과 함께 3.1절과 광복절 기념식에 초대된 독립운동가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전직 대통령의 자격으로 초대되는 것이었으나 전직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그는 독립운동가 자격으로 초대될 수도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 중 최초로 최면시술에 참여하기도 했다. 1980년대 당시 그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건강문제로 류한평 박사 등의 상담을 받고 최면시술을 받기도 했다.

그의 둘째딸은 그의 스승이자 독립운동가인 신규식의 장남과 결혼하여, 스승 신규식과는 사돈간이 된다. 또한 독립운동가 민필호, 신명호, 김준엽은 사위 신준호를 통해 인척관계를 형성한다. 음악가 겸 방송인 남궁연은 그의 동생 윤완선의 외손자였다.




#Article 180: 나도향 (407 words)


나도향 (羅稻香) (1902년 3월 30일 한성부 ~ 1926년 8월 26일)은 일제 강점기의 한국 소설가이다. 본명은 나경손(慶孫)이며 필명은 나빈(彬)이다. 호는 도향(稻香)이다.

한성부 용산방 청파계(지금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중퇴한 뒤 영문학부에 입학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가 고학으로 공부하였다. 그러나 학비 부족으로 귀국하여 1920년에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22년 《백조》의 창간호에 소설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상화, 현진건, 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파라는 낭만파를 이루었다. ≪백조≫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했다. 같은 해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을 발표한 뒤, ≪동아일보≫에 장편 ≪환희≫를 연재했고, 이어 ＜옛날의 꿈은 창백하더이다＞를 발표했다. 여기서 장편 《환희》를 통해 19세의 소년 작가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 때부터 작품 경향을 바꾸어 자연주의적 수법이 보이기 시작했다. 1923년에 ＜은화 백동화＞, ＜17원 50전＞, ＜행랑자식＞을, 1924년에는 ＜자기를 찾기 전＞, 1925년 《여명》 창간호에 《벙어리 삼룡이》를 발표하였는데, 한국 근대 문학사상 가장 우수한 단편 중의 하나로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날카로운 필치로 많은 작품을 써서 천재 작가로 알려졌으나 폐병으로 인해 2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초기에는 주로 작가의 자전적 측면에 연관된 내용을 소설로 썼기 때문에 주관적이고 낭만적인 감정 토로, 감상적인 예술가형 주인공이 주로 등장하는 작품을 많이 썼다. 그러나 곧 습작기의 이런 서툰 창작 형태를 벗어나 ＜행랑자식＞, ＜자기를 찾기 전＞ 등의 작품을 발표하는데, 이후의 작품은 빈곤, 사회적 계급 관계 등 현실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낭만주의를 벗어난 사실주의적 성격을 뚜렷이 보여준다.

장편 소설 ≪환희≫는 ≪동아일보≫의 청탁에 의한 것인데, 작자 자신도 “사색과 구상에 들어서 조금도 생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붓이 내려가는 대로” 썼다고 고백했듯이, 통속 소설의 취향을 따르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사건을 자세히 묘사하기보다는 모호한 내면, 환상, 영탄을 사용하는 등 비극적 운명에 대한 감상주의가 두드러진 작품이다. 이러한 나도향의 낭만적 감상주의풍은 ＜여이발사＞를 발표하면서 소설적인 간결함과 냉정한 시선, 객관성을 확보한 문체와 구성으로 극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초기 소설의 단점을 극복해 낸 이런 소설적 성취는 나도향의 작품에 독특한 개성을 부여한다. 즉, 낭만주의적인 감상성, 미학주의와 현실 비판의 냉정한 관찰력이 결합된 그의 소설은 인간의 욕망, 내면을 중요시하는 낭만주의적인 것과 그런 욕망이 사회 속에서 드러내는 행태에 대한 객관적 묘사와 관찰을 동시에 보여준다.

생에 대한 원초적 의지와 욕망이 사회적인 제 관계 속에서 드러내는 현상에 대한 그의 고찰은 낭만적 열정과 사실주의적인 ‘관계성의 냉정한 분석’을 포함한 것이다.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뽕＞ 등의 토속성과 원시적 건강성, 생명력이 낭만주의적인 것이라면, 이 세 작품이 암시하는 욕망의 실패와 좌절은 사회적 관계의 부조리가 원인이 된 것이다. 결국, 낭만적 이상이 지닌 건강성은 현실의 타락한 관계, 환경에 의해서 일그러지고 왜곡된다.

나도향의 소설은 이런 일그러진 원초성, 문명 이전의 건강성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점에서 또한 중요한 특징과 가치를 지닌다.

주요작품으로 《물레방아》, 《뽕》, 《벙어리 삼룡이》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 등이 있는데, 민중들의 슬프고 비참한 삶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다. 작품들 중 《벙어리 삼룡이》,《뽕》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Article 181: 디지털 (101 words)


디지털(, )은 아날로그를 연속적 실수가 아닌, 특정한 최소 단위를 갖는 이산적(離散的)인 수치를 이용하여 처리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 용어는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낱말 digit에서 나온 것으로, 숫자를 세는 데 쓰인다.

디지털 컴퓨터에서는 모든 자료를 디지털 방식으로 처리한다. 문서와 통계 자료뿐만이 아니라 음성 자료도, 영상 자료도 이산적인 값으로 처리한다. 디지털 자료는 복제, 삭제, 편집이 간편하며, 복사물과 원본의 차이가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음악이나 화상과 같은 아날로그 자료 샘플을 일정한 주기로 채집하여 디지털로 변환하는 과정을 샘플링이라 한다. 이 때, 초당 샘플링 회수는 아날로그 주파수보다 2배 더 높아야 앨리어싱 현상(계단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품질은 필히 떨어지기 마련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이어주는 대표적인 기계로는 모뎀이 있다.




#Article 182: 헤르만 민코프스키 (192 words)


헤르만 민코프스키(, 1864년 6월 22일 - 1909년 1월 12일)는 러시아 제국 태생 독일 수학자이다. 수론의 문제를 기하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푸는 기하학적 수론, 수리물리학, 상대성 이론 등에 업적을 남겼다.

러시아 제국 카우나스에서 태어났으나, 어렸을 때 당시 프로이센에 속했던 쾨니히스베르크(오늘날 러시아 칼리닌그라드)로 가족과 함께 이주해 독일의 베를린 대학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등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1885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고, 이후 본 대학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등에서 강의하였다. 취리히 시절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민코프스키는 n개의 변수를 갖는 2차 형식(quadratic forms)을 연구하는 과정에 n차원 공간의 기하학적 성질과 관련된 것을 알아차렸다. 1896년 출판한 저서 《수의 기하학》()에서 수론의 문제들을 기하학적인 방법과 연관시켰다.

민코프스키는 또한 최초로 시공간을 통일된 기하학으로 다룬 사람이다. 1907년에 민코프스키는 특수 상대성 이론이 민코프스키 공간이라 불리는 비유클리드 공간을 이용해 쉽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민코프스키 공간에서 시간과 공간은 서로 상관없는 두 개체가 아니라, 합쳐져 4차원 시공간을 이루며, 그를 통해 특수 상대성 이론의 로렌츠 대칭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다. 이 기하학적인 방법은 나아가 일반 상대성 이론이 만들어지는데 핵심적인 동기 중 하나가 되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민코프스키 공간을 일반화 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고 실제로 그 방향으로 연구되었다. 1908년 9월 21일 민코프스키는 제80회 독일 자연과학자 모임에서 〈공간과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는데, 이 연설은 지금도 유명하다.




#Article 183: 화성 (1831 words)


화성(火星, )은 태양계의 네 번째 행성이며, 4개의 지구형 행성 중 하나다. 붉은색을 띠기 때문에 동양권에서는 불을 뜻하는 화(火)를 써서 화성 또는 형혹성(熒惑星)이라 부르고, 서양권에서는 로마 신화의 전쟁의 신 마르스의 이름을 따 Mars라 부른다. 오늘날 영어에서 3월을 뜻하는 March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지구와의 거리는 7800만 km이다. 화성의 지름은 지구의 1/2 정도이고, 하루는 지구보다 37분 22초 더 길다.

매리너 4호가 1965년에 화성을 처음으로 근접 비행을 하기 전까지 과학계 안팎의 사람들은 화성에 대량의 물이 존재하리라고 기대하였다. 이러한 기대의 근거는 화성의 극지방에서 밝고 어두운 무늬가 주기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이었다. 60년대 중반 이전까지 사람들은 농업을 위한 관개수로가 화성에 있으리라 기대하기까지 했다. 이는 사실 20세기 초·중반의 공상과학 작가들의 상상에 영향받은 것으로, 1950년대 이후의 탐사선에 의한 관측으로 화성 운하는 존재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물과 생명체의 발견에 대한 기대로 많은 탐사선들에 미생물을 찾기 위한 센서들이 탑재되어 화성에 보내졌다. 화성에서는 다량의 얼음이 발견되었고,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화성 표면에서의 액체상태의 물은 낮은 대기압으로 인하여 존재 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편 화성의 극관은 물로 구성되어 있어, 이 극관에 존재하는 물은 화성의 표면을 11m 의 깊이로 뒤덮기에 충분히 많은 양이 존재한다. 2016년 나사는 화성 표면 안에 얼음이 존재할 것이라고 새로운 발표를 하였다.

화성의 자전 주기와 계절의 변화 주기는 지구와 비슷하다. 화성에는 태양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올림푸스 화산이 있으며, 역시 태양계에서 가장 큰 계곡인 매리너스 협곡과 극관을 가지고 있다.

화성은 밤하늘에 붉은 빛을 띄며 맨눈으로 쉽게 관측이 된다. 겉보기 등급은 +1.6~-3.0등급이며 태양, 달, 금성, 목성 다음으로 밤하늘에 가장 밝은 천체이다.

화성은 붉게 타는 듯한 외형을 가지고 있다. 화성의 표면적은 지구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으며, 부피는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화성은 두 개의 작은 위성을 가지고 있다. 화성의 대기권은 매우 얇으며, 표면의 기압은 7.5밀리바밖에 되지 않는다. 화성 표면의 95%는 이산화탄소로 덮여 있으며, 이 밖에 3%의 질소, 1.6%의 아르곤과 흔적만이 남아 있는 산소와 2015년 NASA에서 발견한 액체 상태의 물이 포함되어 있다.

궤도선의 관측과 화성 기원의 운석에 대한 분석 결과에 의하면, 화성의 표면은 기본적으로 현무암으로 되어 있다. 화성 표면의 일부는 지구의 안산암과 같이 좀 더 이산화규소가 풍부하다는 증거가 있으나 이러한 관측은 규산염과 같은 유리의 존재를 통해서 설명될 수도 있기 때문에 결정적이지는 않다. 표면의 대부분은 산화철의 먼지로 덮여있다. 화성의 표면에 일시적이나마 물이 존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화성 표면에서 발견된 암염이나 침철석과 같이 대체로 물이 존재할 때 생성되는 광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화성 자체의 자기장은 없지만, 과거 행성 표면의 일부는 자화된 적이 있음이 관측을 통해 밝혀졌다. 화성에서 발견된 자화의 흔적(고지자기)은 지구의 해양지각에서 발견되는 교대하는 띠 모양의 고지자기와 비교되어 왔다. 1999년에 발표되고 2005년에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로부터의 관측 결과의 도움으로 재검토된 이론에 따르면, 이들 지자기의 띠들은 과거에 있었던 화성의 판구조 활동의 증거일 수 있다. 극 이동(polar wandering)으로도 화성에서 발견된 고지자기를 설명할 수 있었다.

화성의 내부는지구와 마찬가지로 화성은 밀도가 낮은 물질로 중첩된 고밀도 금속 중심부로 분화했다. 현재 내부 모델은 반경이 약 1,794 ± 65km(1,115 ± 40 mi)인 코어를 의미하며, 주로 유황 16–17%의 철과 니켈로 구성된다. 이 황화 철(II) 황화핵 지구의 핵보다 가벼운 원소가 두 배더 풍부하다고 추측된다. 중심부는 행성에서 많은 지각과 화산 형상을 형성한 규산염 맨틀에 둘러싸여 있지만, 휴면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리콘과 산소 외에 화성 지각에서 가장 풍부한 원소는 철, 마그네슘, 알루미늄, 칼슘, 칼륨이다. 화성 지각의 평균 두께는 50km(31mi)이며, 최대 두께는 125km(78mi)이다.지구의 지각은 평균 40 km(25 mi)이다.

노아키안 시대는 노아키스 테라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화성의 형성으로부터 38억~35억 년 전까지의 시대이다. 노아키안 시대의 표면은 많은 거대한 크레이터로 덮여 있다. 타르시스 벌지는 이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대의 후기에는 엄청난 양의 액체 물에 의한 홍수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헤스퍼리안 시대는 헤스퍼리안 평원으로부터 이름이 붙여졌다. 35억 년 전부터 18억 년 전까지의 시대이다. 헤스퍼리안 시대의 화성에서는 넓은 용암대지가 형성되었다.

아마조니안 시대는 아마조니스 평원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18억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대이다. 아마조니안 지역은 크레이터가 거의 없으나 상당한 변화가 있는 지형이다. 올림푸스 화산이 이 시대에 형성되었고, 다른 지역에서 용암류가 형성되었다.

마스 익스프레스 오비터의 OMEGA 가시광-적외선 광물학 매핑 스팩트로메터 자료를 기초로 또 다른 시대 구분이 제시되고 있다.

화성의 좌표를 설정하기 위하여서는 자오선과 0점 고도가 정해져야 한다. 화성에는 바다가 없기 때문에, '해수면'이 없어서, 0점 고도면이나 평균 중력 표면이 임의의 지점으로 선택될 수밖에 없다. 또한 적도와는 달리 경도의 기준점은 임의로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에 공통된 규약을 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임의적으로 사이너스 메리디아니(Sinus Meridiani, 적도만('Equatorial Gulf')) 안의 분화구가 0점 자오선을 나타내는 것으로 선택되었다.

화성 지형의 몇 가지 기본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화성은 극 지방이 언 물과 이산화탄소를 포함하는 얼음 지대로 덮여 있다. 또한 화성에는 발레스 매리너리스(Valles Marineris) 또는 화성의 흉터라고 불리는 태양계에서 가장 큰 [협곡 지대]가 있다. 이 협곡 지대는 4000km의 길이에 깊이는 7km에 이른다.

화성은 밀도가 낮은 물질로 중첩된 고밀도 금속 중심부로 분화했다. 현재 핵의 반지름이 약 1,794 ± 65km(1,115 ± 40 mi)이며, 유황 16–17%의 철과 니켈로 구성된다. 이 황하 철 핵은 지구의 핵보다 가벼운 원소가 두 배더 많다고 추측된다. 중심부는 규산염 맨틀로 둘러싸여 있어 많은 지각과 화산 형상을 형성 했지만, 휴면상태로 보인다. 실리콘과 산소 외에 화성 지각에서 가장 풍부한 원소는 철, 마그네슘, 알루미늄, 칼슘, 칼륨이다. 화성 지각의 평균 두께는 약 50km(31mi)이며, 최대 두께는 125km(78mi)이다. 참고로 지구의 지각은 평균 40km(25mi)이다.

화성 북반구와 남반구 지형의 비대칭성은 매우 인상적이다. 북쪽 부분은 용암층이 흘러내림으로 인해 평평하고, 남쪽은 고지대에 오래전의 충격으로 인해 구멍이 파이고 분화구가 생겨나 있다. 지구에서 본 화성의 표면은 확실히 두 부분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먼지와 산화철이 섞인 모래로 뒤덮인 좀 더 창백한 부분은 한때 '아라비아의 땅'이라 불리며 화성의 대륙으로 여겨졌고, 어두운 부분은 바다로 여겨졌다. 지구에서 보이는 가장 어두운 부분은 시르티스 메이저(Syrtis Major)이다. 화성에서 가장 큰 분화구는 헬라스 충돌 분지(Hellas impact basin)인데, 가벼운 붉은 모래로 덮여 있다.

화성 표면 지역의 이름을 짓는 작업은 국제 천문 연맹의 '행성계 명명법 워킹 그룹'이 담당하고 있다.

화성의 대기압은 0.6에서 1.0kPa로, 지구의 대기 밀도와 비교하면 1/100 정도로 매우 낮다. 대기가 적으므로 기압이 매우 낮고 물이 있더라도 기압 때문에 빨리 증발하게 된다. 과학자들은 과거의 화성은 물이 풍부하고 대기도 지금보다 컸으리라고 추측한다.
대기의 주성분인 이산화탄소가 얼어 거대한 극관을 형성하는 과정이 양극에서 교대로 일어나고 이산화탄소는 눈층을 형성하고 봄이 되면 증발한다.

아주 오래전 화성은 태양풍을 막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한 자기권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40억 년 전 화성의 다이나모가 멈추고 난 뒤에는 투자율이 높은 광물에 잔류자기가 남아있는 정도밖에는 자기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광물은 풍화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남반구의 고지의 일부에서만 고지자기를 관측할 수 있다. 태양풍은 화성의 전리층에 직접 닿기 때문에 화성의 대기는 조금씩 벗겨져 나가고 있다고 여겨지나 그 양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와 마스 익스프레스는 화성이 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는 이온화된 대기의 입자를 탐지하였다.

화성의 궤도 이심률은 약 9%로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태양계에서 이보다 더 이심률이 큰 궤도를 가지는 행성은 수성밖에 없다. 태양까지의 평균거리는 약 2억 2천만 km(1.5 천문단위)이며, 공전 주기는 686.971일이다. 화성의 태양일(솔; sol)은 지구보다 약간 길어서 24시간 37분 22초 정도이다.

화성의 자전축은 25.19도만큼 기울어져 있어서 지구의 기울기와 거의 비슷하다. 그 결과 화성에서는 지구와 마찬가지로 계절이 나타난다. 하지만 공전 각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계절의 길이는 지구에 비해 약 2배정도 된다.

포보스(Phobos)와 데이모스(Deimos)가 화성의 위성이다. 이들은 늘 달 쪽으로 같은 면을 향하고 있다. 포보스의 화성 주위 궤도가 화성 자체가 자전하는 속도보다 빠르며 아주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화성에 가까워지고 있다. 언젠가 미래에는 포보스가 화성 표면에 충돌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반면에 데이모스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고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

두 위성은 모두 1877년 미국인 천문학자 아사프 홀(Asaph Hall)이 발견했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르스의 두 아들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액체상태의 물의 존재를 가지고 생명가능성을 논의한다. 이러한 생명가능성을 논하는 곳은 생명가능지대의 안에 존재하는 곳이다. 태양의 생명가능지대는 금성을 넘은 곳 부터 시작하여 화성 부근 까지 존재한다. 화성은 근일점에 도착하였을때, 이 지대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화성의 옅은 대기가 액체상태의 물이 화성의 표면에 존재하는 것을 막는다. 화성의 과거 물의 흐름은 생명거주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최근 연구는 화성에 존재하는 물은 너무 염도가 높거나 산도가 높아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화성에는 자기권이 없기 때문에 강렬한 태양풍을 막을 수 없다. 또한 화성의 옅은 대기로 인한 낮은 대기압으로 화성의 표면에 액체상태의 물의 형태가 유지 될 수 없다. 지질학적으로 화성의 화산 활동은 종결되어 화성의 내부 화학물질이 화성의 표면으로 순환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화성의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여러 증거로부터 미루어 볼 때 화성이 과거에는 지금보다 더 생명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지금까지는, 실제 화성에 생명이 존재한 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바이킹 탐사선은 70년대 중반에 화성 표면에서 미생물을 탐지하기 위한 실험을 수행하여, 과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이 되고 있다.
존슨 우주센터 연구소는 화성에서 날아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운석 AL 빨리 분해되기 때문에 소량의 이들 분자는 화성에 생물이 사는 증거로 여겨질 수 있으나, 이들 원소는 화산이나 사문함화작용 같은 지질학적 작용에 의해서도 공급될 수 있다.

물론 과거에 물이 흘렀던 적이 있기는 하다. 화성에는 또한 자기권이 없으며 대기가 희박하며, 지각 열류량은 매우 적으며, 외부의 운석 또는 소행성들과의 충돌~ 또는 태양풍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
낮은 대기압 때문에 얼음은 액체상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기화해버리며, 지질학적으로 사실상 완전히 죽은 행성으로 본다. {화산 활동이 없기 때문에 표면과 행성 내부 사이의 화학 물질과 광물의 순환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지질활동이 멈춘 화성의 환경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으며, 생명활동에 의해서만 공급되므로,
안면석이나 화성 피라미드와 같은 음모론적인 가설도 있으나 과학적인 의미로 주목받지는 못하다.

화성 탐사

지금까지 인류는 다수의 로봇 탐사선을 화성에 보냈고, 그중 몇몇은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탐사의 실패율은 매우 높았다. 실패 사례 중 몇은 명백한 기술적 결함에 따른 것이었지만, 많은 경우 연구자들은 확실한 실패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런 사례는 지구-화성 버뮤다 삼각지대 혹은 화성탐사선을 먹고 사는 은하귀신(Ghoul)라는 농담을 낳았다. 화성 로봇 탐사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발사 시간대가 약 2년 남짓(화성의 공전 주기)의 기간을 주기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아두어야 한다.

매리너 3호와 4호는 동일한 기체로, 최초로 화성을 지나치며 관찰하도록 설계되었다. 매리너 3호는 1964년 11월 5일 발사되었으나, 우주선의 윗부분을 덮은 뚜껑이 적당히 열리지 않았고, 화성에 도달하지 못했다. 3주 후 1964년 11월 28일 매리너 4호는 성공적으로 발사되어 8개월의 항해를 시작한다.

매리너 4호는 1965년 6월 14일 화성을 지나며, 다른 행성의 근접 사진을 최초로 찍어냈다. 오랜 기간 동안 작은 테이프 레코더에 기록된 그 사진들은 달 모양의 분화구들을 보여 주었다. 그 분화구 들 중 몇몇은 서리가 덮여 추운 화성의 밤을 보여주었다.

NASA는 계속해서 매리너 계획을 수행했다. 그들은 다음 발사 시간대에 근접 비행 시험을 또다시 수행하였다. 이 비행선들은 1969년에 화성에 도달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매리너 6호 와 7호를 참조하라. 다음 발사 때 매리너 계획은 두 대의 비행선 중 한 대를 잃는 사고를 겪었다. 살아남은 매리너 9호는 성공적으로 화성 궤도에 진입하였다. 매리너 9호가 화성에 도달했을 때, 그것과 두 대의 소련 인공위성은 행성 전영역에 걸쳐 먼지 폭풍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폭풍이 가라앉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화성 표면의 사진을 찍는 것은 불가능하였으므로, 매리너 9호는 포보스의 사진을 찍었다. 폭풍이 화성의 표면 사진을 찍기에 충분할 만큼 가라앉았을 때, 전송된 사진은 이전 임무의 결과로 온 사진보다 더 높은 품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진들이 화성에 한때 액체 형태의 물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증거하는 첫 번째 사진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화성 탐사 계획에서 발사한 우주선들은 바이킹보다 몇 년 일찍 수많은 착륙을 시도했다. 그러나 매리너 계획이 수행했던 것보다 성공적인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마스 패스파인더는 1997년 7월 4일에 화성에 착륙하여, 소저너라는 매우 작은 원격 조정체를 움직여 착륙 지점 주위의 몇 미터를 여행하고, 화성의 환경 조건을 탐색하고 표면의 돌들을 수집해왔다.

다음 탐사는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Mars Global Surveyor)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임무는 20여 년간의 화성 탐사역사에서 첫 번째로 성공적인 것이었고, 1996년 11월 7일에 발사되어 1997년 9월 12일에 화성 궤도에 도달하였다. 1년 반 정도가 흐른 후, 회전 궤도가 타원형에서 원형으로 자리를 잡았고, 우주선은 1999년 3월부터 기초적인 매핑 임무에 돌입했다. 우주선은 화성을 화성력으로 1년, 지구력으로는 거의 2년간 저고도에서 관찰했다.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호는 최근인 2001년 1월 31일 그 기초적인 임무를 완료하고 현재는 2단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 탐사는 화성 표면, 대기권, 그리고 내부에 대한 전체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지난 탐사 계획에서 거둬들인 모든 결과물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가져왔다. 이 가치있는 데이터들은  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원전 1600년경에 화성에 대한 관측이 시작되었다고 여겨지며, 화성은 불과 같이 붉게 빛나고 다른 천체와 달리 하늘에서 이상하게 움직인다고 알려졌다.




#Article 184: 다비트 힐베르트 (267 words)


다비트 힐베르트( , 1862년 1월 23일 ~ 1943년 2월 14일)는 독일의 수학자이다. 19세기 말 및 20세기 초에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 하나로 손꼽힌다.

도형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인 기하학을 공리화하였으며, 힐베르트 공간을 정의하여 함수해석학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일반 상대성 이론을 수학적으로 정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생전 수학계의 지도자로 활동했고 사후에도 힐베르트 문제를 통해 수학계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힐베르트는 1885년 여름 후르비츠의 권유로 펠릭스 클라인이 있던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갔다. 1886년 펠릭스 클라인의 권유로 파리 유학을 떠나, 당시 최고의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 등과 교우하고, 귀국길에 레오폴트 크로네커도 만났다. 귀국 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불변식에 관한 논문과 《가장 일반적인 주기함수》라는 제목의 강의시험을 통과하여 하빌리타치온을 취득하였다.

힐베르트는 1892년 30세의 나이로 혼인하였고, 취리히로 간 후르비츠의 후임자로 부교수 자리에 오른다. 1893년에는 e와 원주율의 초월성에 대한 새로운 증명을 발표하였다. 곧 뮌헨으로 떠난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의 뒤를 이어 정교수가 되었다.

수학뿐만 아니라, 힐베르트는 물리학의 공리화를 꿈꾸었다. 물리학의 공리화는 힐베르트의 6번 문제였고, 이 문제의 일환으로 힐베르트는 중력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1915년 11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과 거의 같은 시기에 《물리학의 기초》()라는 논문으로 같은 결론을 출판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뒤 라위트전 브라우어르 등은 직관주의를 주장하였고, 고전적 수학의 귀류법 등 여러 증명법들을 배척하였다. 힐베르트는 직관주의에 대응하여 수학은 공리계를 통한 수식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형식주의를 주장하였다. 1925년 악성빈혈증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나, 미국에 있던 제자들의 도움으로 다음 해 쾌유하였다. 1928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개최된 세계 수학자 대회에 독일의 수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단의 수학자들을 이끌고 참석하였다.

힐베르트는 1930년 봄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하였고, 같은 해 가을 쾨니히스베르크 명예 시민증을 수여받았다. 1931년에 쿠르트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하여, 힐베르트가 꿈꾸었던, 모든 참인 명제를 증명할 수 있는 공리계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힐베르트는 불완전성 정리를 피하기 위하여, 조건을 약화시켜 증명론을 발전시키려는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Article 185: HTML (1439 words)


하이퍼텍스트 마크업 언어(, )는 웹 페이지를 위한 지배적인 마크업 언어다. 또한, HTML은 제목, 단락, 목록 등과 같은 본문을 위한 구조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링크, 인용과 그 밖의 항목으로 구조적 문서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미지와 객체를 내장하고 대화형 양식을 생성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HTML은 웹 페이지 콘텐츠 안의 꺾쇠 괄호에 둘러싸인 태그로 되어있는 HTML 요소 형태로 작성한다. HTML은 웹 브라우저와 같은 HTML 처리 장치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자바스크립트와 본문과 그 밖의 항목의 외관과 배치를 정의하는 CSS 같은 스크립트를 포함하거나 불러올 수 있다. HTML과 CSS 표준의 공동 책임자인 W3C는 명확하고 표상적인 마크업을 위하여 CSS의 사용을 권장한다.

HTML 최초의 일반 공개 설명은 1991년 말에 버너스리가 처음으로 인터넷에서 문서를 HTML 태그(HTML tag)로 부르면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머릿글자로 이루어진 20개의 요소를 기술하였고, 상대적으로 HTML의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하이퍼링크를 제외한 HTML 태그들은 CERN 자체의 SGML 기반 문서화 포맷인 SGML GUID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이 요소 중 13개는 HTML 4 버전에서도 여전히 존재한다.

HTML은 동적인 웹 페이지의 웹 브라우저를 통한 문자와 이미지 양식이다. 문자 요소의 대부분은 1988년 ISO 기술 보고서 9537 SGML을 이용한 기법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SGML 개념의 일반적인 마크업은 단지 개별 효과 보다는 요소 기반이고 또한 구조와 처리의 분리(?)(HTML은 CSS와 함께 이 방향으로 점진적으로 이동해 왔다.)

버너스리는 SGML 응용 프로그램이 되는 HTML을 고안해야 했고 그것은 공식적으로 IETF(국제 인터넷 표준화 기구)에 의하여 1993년 중반, HTML 규격에 대한 최초의 제안을 간행물로 정의했다. (버너스리와 덴 콘놀리에 의한 문법을 규정하는 SGML 문서 형식 정의(SGML DTD)가 포함된 )
이 초안은 6개월 후 만료된다. 하지만 NCSA 모자이크 브라우저의 인라인 이미지를 내장하는 사용자 정의 태그의 사례는 주목할 만 했고, 성공적인 프로토타입에 대한 표준을 기반한 IETF의 철학을.
 마찬가지로 데이브 라그렛의 경쟁 인터넷 초안인 HTML+ (하이퍼텍스트 마크업 포맷)은 1993년 말에 테이블과 기입양식 같은 요소들을 이미 구현하여 표준화 제안을 했다.

이후 1994년 초 HTML과 HTML+ 초안은 만료되었고, IETF는 HTML 작업 그룹을 설립해 1995년에 HTML 2.0을 완성한다. 최초의 HTML의 규격은 미래에 수행될 HTML 표준을 기반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었다.RFC 1996년에 HTML 2.0은 HTML과 HTML+ 초안의 아이디어가 포함됐다고 발표했다.
HTML 2.0 지정은 이전의 초안들로부터 새로운 버전을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IETF의 후원하에 개발은 상충하는 이해 관계 때문에 지연되었다. 1996년부터 HTML 규격은 상용 소프트웨어 제작사의 투입으로 월드 와이드 웹 컨소시엄(W3C)에서 유지해 왔다. 하지만 2000년부터 HTML 또한 국제 표준(ISO/IEC 15445:2000)이 되었다. 현재 W3C에 의해 발표된 최신 규격은 1999년 말에 발표된 HTML 4.01 권고안이며 2001년에 문제와 오류들이 수정되어 발표된 안이 최종 승인되었다.

이 W3C 권고안으로 출시되었다. HTML 4.0은 세 가지 문서 형태를 제공한다:

이 버전이 증가되지 않고 조금 수정되어 재발표되었다.

이 W3C 권고안으로 출시되었다. HTML 4.0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 문서 형태를 제공한다. 그리고 2001년 5월 12일에 그것에 대한 최종  이 발표되었다.

 (ISO HTML, HTML 4.01 Strict 기반)이 ISO/IEC 국제 표준과 함께 출시되었다. ISO에서 이 표준안은 ISO/IEC JTC1/SC34 (ISO/IEC 공동 기술 위원회 1, 소위원회 34 - 문서 표현과 처리 언어)의 범위에서 떨어져 나왔다.

XHTML은 XML 1.0을 이용하여 HTML 4.01을 새로 만든 독립된 언어다.

HTML 마크업은 HTML 요소(엘리먼트, )와 그들의 속성()과 문자 기반 데이터 형태와 문자 참조와 엔티티 참조를 포함하는 몇 가지 핵심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또 다른 중요한 구성 요소로는 문서 형식 정의(DTD, )를 명시하는 문서 형식 선언()이다. 차기 HTML 5에서는 DTD를 지정하지 않아도 되고 오직 레이아웃 모드로 지정된다 .

Hello world 프로그램은 프로그래밍 언어와 스크립트 언어 그리고 마크업 언어를 비교하기 위해 사용되는 일반적인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HTML에서의 Hello world 프로그램은 단 9줄에 불과하다:

  
    Hello HTML
  
  
    Hello World!
  

(과 사이의 문자는 웹 페이지를 표현한다. 와 사이의 문자는 표시되는 페이지의 내용이며, 와 사이의 문자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웹 페이지를 표현하기위해 필요한 해더 정보를 담고 있다.과 사이의 문자는 웹 브라우저의 페이지 제목을 정의하는데 사용된다.)Hello world 프로그램을 최대로 짧게 만들고 싶다면:

Hello world

이라고 해도 되지만, 웹 표준에 위배된다.이 문서 형식 정의는 HTML 5이다. 만약 로 선언하지 않은 경우 대다수의 브라우저는 쿽스 모드로 렌더링한다.

HTML 문서는 완전한 HTML 요소로 구성되어 있고, HTML 요소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세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진다:

HTML 요소는 태그의 사이와 포함되는 모든 것이다.
태그는 꺾쇠괄호()로 둘러싸인 키워드이다.

 보이는 내용

HTML 요소의 이름은 태그의 이름이다.
그리고 종료 태그의 이름은 슬래시 문자 (/)로 시작된다.

 보이는 내용
속성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시작 태그의 기본값을 사용하게 된다.

HTML의 머리부분 (...), 보통 제목은 의 안에 포함된다. 예제:

제목

단락 1 단락 2
새 줄(),  와  간의 차이점은 'br'은 페이지의 의미론적 구조를 변경하지 않는 줄바꿈(breaks a line)인 반면 'p'는 단락으로 페이지를 구분한다.
이것은  줄바꿈을  포함하는  단락이다. 

 주석은 코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웹 페이지에는 표시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요소 속성들은 이름-값 형태이고, =로 구분하고, 요소의 시작 태그 안에서 요소의 이름 다음에 쓰인다. 값은 외따옴표 또는 쌍따옴표로 둘러쌀 수 있다. 비록 어떤 문자로 구성된 값들이 HTML에서 인용부호 없이 사용될 수도 있지만(XHTML에서는 허용되지 않음), 그 값은 따옴표나 쌍따옴표 또는 쌍 인용부호로 둘러쌀 수 있다. 인용부호를 사용하지 않고, 속성값을 사용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이름값 쌍 속성과 대조하여, 요소 태그의 시작에 단순히 그 존재만으로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태그가 있다.

대부분의 요소는 몇 가지 일반적인 속성을 가질 수 있다.

단축 요소(abbr)는 아래와 같이 다양한 속성을 설명하는데 쓰일 수 있다:

이 예제는 대부분의 브라우저에서 HTML처럼 보인다. 이 단축에 커서를 가리키면 그 제목인 하이퍼텍스트 마크업 언어가 보일 것이다.

대부분의 요소 또한 언어와 관련된 속성인 lang과 dir을 취한다.

HTML은 스크립트 데이터와 스타일시트 데이터, 그리고 ID, 이름, URI, 숫자 길이의 단위, 언어, 미디어 기술자, 색상, 문자 인코딩, 날짜와 시간 등을 포함하는 속성 값의 종류를 위한 몇 가지 데이터 형태를 정의 내린다. 이러한 모든 데이터 형식은 문자 데이터를 최적화하기 위하여 분리되었다.

HTML 문서는 문서 형식 선언 (비공식적으로, doctype)으로 시작해야 한다. 브라우저에서 doctype의 기능은 렌더링 모드를 지시하는 것이며, 부분적으로는 쿼크 모드를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doctype의 원래의 목적은 문서 형식 정의 (DTD)에 기반한 SGML 도구를 통하여 HTML 문서의 파싱과 유효 여부 확인을 가능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DOCTYPE에 대한 DTD는 DTD에 순응하는 문서를 가진 허용 또는 금지된 내용을 지정하고 기계가 읽을 수 있는 문법을 포함하도록 지시한다. 반면 브라우저는 HTML을 SGML의 애플리케이션으로 수행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DTD를 읽지 않는다. HTML 5는 기술적인 제한으로 인해 DTD를 정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HTML5에서 doctype 선언 lt;!doctype html는 DTD를 참조하지 않는다.

HTML 4 doctype의 예제는 다음과 같다.

이런 선언은 엄격한 HTML 4.01을 만들기 위해 DTD를 참조한다. 이것은 선언적인 요소인 font 같은 요소는 포함하지 않으며, CSS나 span, div 요소는 유지한다. SGML 기반의 유효 확인자(validator)들은 문서를 적절히 해석하거나, 유효 여부 확인을 실행하기 위해 DTD를 읽는다.

최근의 브라우저에서 이 doctype은 쿼크 모드에 반대되는 표준 모드를 활성화한다.

게다가 HTML 4.01은 임시적이고 프레임 단위의 DTD를 제공한다.

HTML 문서를 다른 컴퓨터 파일과 같은 방법으로 전송할 수 있다. 하지만 HTML 문서들은 대부분 웹 서버에 의한 HTTP나 또는 이메일을 통하여 전송된다.

월드 와이드 웹은 주로 웹 서버에서 하이퍼텍스트 전송 프로토콜 (HTTP)을 이용하는 웹 브라우저로 전송되는 HTML 문서를 위해 고안되었다. 그러나 HTTP는 HTML 이외에도 이미지나 소리, 그리고 기타 내용물을 서비스하는 데 사용된다. 브라우저가 받는 각 문서를 어떻게 다른지 알려주게 하기 위해, 다른 정보가 문서와 함께 전송된다.

이 메타데이터는 보통 MIME 타입 (예, text/html or application/xhtml+xml)과 문자 인코딩을 포함한다. (HTML에서 문자 인코팅 참조)

최근의 브라우저에서 HTML 문서와 함께 전송되는 MIN 타입은 문서가 초기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지에 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XHTML MIME 타입과 함께 전송된 문서는 잘 구성된 XML로 기대되며, 문법 오류는 브라우저가 그것을 해석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HTML MIME 타입과 함께 전송된 동일 문서가 HTML에 관대한 브라우저에서는 성공적으로 출력될 것이다.

W3C 권고안에서는 권고안 부록 C에 나오는 가이드라인을 따르는 XHTML 1.0 문서는 MIME 타입으로 표시될 것이다. 현재의 XHTML 1.1 작업 초안은 또한 XHTML 1.1 문서는 MIME 타입으로 표시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대부분의 그래픽 이메일 클라이언트는 단순 텍스트로는 불가능한 어휘적 마크업과 형식을 제공하기 위해 종종 정의되지 않는 HTML 부분집합 사용을 허용한다. 이것은 색상 제목, 강조, 인용문, 인라인 이미지와 도표와 같은 인쇄정보를 포함한다. 그러한 많은 클라이언트들은 HTML 이메일 메시지를 작성하는 GUI 편집기와 그것을 해석하여 보여주기 위한 렌더링 엔진을 포함한다. 그러나 전자 메일에서 HTML를 포함시키는 것은 호환성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논쟁의 대상이 된다. 그 이유는 피싱 공격의 은닉을 도와줄 수 있고, 스팸 필터를 혼동시킬 수 있으며, 또한 단순 텍스트보다 크기가 더 커지기 때문이다.

웹 문서의 가장 일반적인 파일 확장자는 .html이다. 일반적으로 줄여서 .htm라고도 하며, DOS나 FAT와 같은 초기 운영 체제와 파일 시스템이 파일 확장자를 3자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HTML 애플리케이션 (HTA; 파일 확장자 .hta)는 애플리케이션의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제공하기 위해 브라우저에서 HTML과 DHTML을 사용하는 윈도용 애플리케이션이다.

정상적인 HTML 파일은 웹 서버와 통신하면서, 웹페이지 객체와 HTTP 쿠키만 다루는 웹 브라우저의 보안 모델에 제한된다. HTA는 완벽히 신뢰된 애플리케이션으로 동작하기 때문에 파일의 생성/편집/제거와 윈도 레지스트리 엔트리에 보다 더 많은 특권을 가진다. 그 까닭은 그것은 브라우저의 보안 모델 외부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HTA는 HTTP를 경유하여 실행되지 않지만, 실행 파일과 같이 다운로드가 될 수 있으며, 로컬 파일 시스템에서 실행된다.

몇 가지 위지위그(What You See Is What You Get, WYSIWYG) 편집기는 HTML 문서를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이용하여 직관적으로 나타내고 편집기가 HTML 문서로 생성하여 더 이상 사용자가 HTML에 대한 광대한 지식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웹 페이지 편집은 위지위그 편집 방식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생성된 코드의 질이 낮았고 위지윔(What Your See IS What You Mean, WYSIWIM)방식으로의 변화를 옹호하는 목소리 늘어났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었다.

위지위그 편집기는 다음과 같은 결함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있는 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지위그 편집기가 페이지를 작성하는데 편리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저자들의 HTML에 대한 상세한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위지위그 방식이 웹 저작을 지배하고 있다.




#Article 186: 웹 브라우저 (399 words)


웹 브라우저 또는 브라우저(, )는 웹 서버에서 이동하며(navigate) 쌍방향으로 통신하고 HTML 문서나 파일을 출력하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기반의 응용 소프트웨어이다. 웹 브라우저는 대표적인 HTTP 사용자 에이전트의 하나이기도 하다.

주요 웹 브라우저로는 모질라 파이어폭스, 구글 크롬, 인터넷 익스플로러/마이크로소프트 엣지, 오페라, 사파리가 있다.

최초의 웹 브라우저는 1990년에 팀 버너스 리가 발명하였다. 버너스 리는 W3C의 감독자로서 웹의 지속적인 발전을 감독하며, 월드 와이드 웹 재단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그의 브라우저는 월드 와이드 웹으로 불리다가 넥서스(Nexus)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갖추면서 대중이 사용할 수 있었던 최초의 웹 브라우저는 Erwise이다. Erwise의 개발은 로버트 카이유가 시작하였다.

웹 브라우저는 웹 페이지를 가져오기 위해(웹 문서를 열기 위해) 대부분의 웹 서버가 사용하는 HTTP(hyper-text transfer protocol)로 통신한다. HTTP를 이용해 웹 페이지를 가져올 뿐 아니라 웹 서버에 정보를 송신하기도 한다. 작성한 시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HTTP는 HTTP/1.1로 RFC 2616에 정의되어 있다. HTTP/1.1은 현 세대의 다른 브라우저와는 달리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 완벽하게 지원하지 못하는 표준이 있어야 한다.

페이지들은 주소처럼 이용되는 URL(uniform resource locator)을 통해 장소가 정해지고, HTTP 접근을 위해 http:로 시작된다. 많은 브라우저가 FTP를 위한 ftp:, HTTPS(암호화된 HTTP)를 위한 https:와 같은 다양한 URL 종류와 대응 프로토콜을 지원한다.

웹 페이지의 파일 포맷은 보통 HTML(hyper-text markup language)이 쓰이고 HTTP 프로토콜의 MIME content type에 의해 확인된다. 대부분의 브라우저는 HTML 외에 JPEG, PNG, GIF 이미지 포맷들을 지원하고, 그밖에도 플러그인을 통해 확장할 수 있다. HTTP의 content type과 URL 프로토콜 명세의 조합으로 웹 페이지 설계자들은 이미지, 애니메이션, 동영상, 소리, 스트리밍 미디어 등을 웹 페이지에 덧붙이거나 웹 페이지를 통해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초기의 웹 브라우저는 단순한 HTML만을 지원했다. 독점적인 웹 브라우저의 빠른 개발로 HTML의 비표준 확장이 많이 이루어졌고, 웹 호환성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났다. 현대의 웹 브라우저들은 모든 브라우저에서 동일하게 표시되어야 할 표준 기반의 HTML과 XHTML(HTML 4.01에서 출발한)을 지원한다.

부가적으로 유즈넷 뉴스나 IRC(Internet relay chat), 이메일 등을 지원하는 브라우저도 있다. 이들은 대체로 NNTP, SMTP, IMAP 등의 프로토콜 지원이 포함된다.

브라우저 간의 차이는 그들이 지원하는 기능에 따라 구별된다. 오늘날 브라우저와 웹 페이지는 웹 초기에는 없었던 기능과 기술을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브라우저 전쟁 때 브라우저와 월드 와이드 웹에는 확장 기능이 급속도로 무질서하게 생겨났다.

아래는 특징이 있는 기능에 대한 목록이다.

파일:Browser Market Map June 2015.svg|섬네일|나라별 가장 흔히 쓰이는 웹 브라우저 ()

 (2015)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2008년 말까지는 70%에 육박하는 점유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파이어폭스, 사파리, 구글 크롬 등 새로운 웹 브라우저들이 나오며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점유율이 계속해서 떨어져 2011년 12월, 38%에 이르게 되었으며, 다음으로 크롬 27%, 파이어폭스 25%로 뒤따랐다.
그 후, 2013년 8월 18일 시점으로 크롬의 점유율이 43.17%로 1위이며,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25.03%, 파이어폭스가 19.31%, 사파리 8.65% 오페라 1.14%의 순이다.




#Article 187: 인터넷 익스플로러 (1577 words)


인터넷 익스플로러(, IE)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웹 브라우저이다. 1995년에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운영 체제에 이 소프트웨어를 기본으로 포함하기 시작하며 사용자가 급격히 증가했다. 1999년 이후로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웹 브라우저가 되었고, 2002년과 2003년에 인터넷 익스플로러 5, 6 버전의 사용률이 정점에 이르러 95%에 달했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제품 이외의 플랫폼에서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지원을 중단하고, 모질라 파이어폭스 등 대체 브라우저가 개발되면서 후기 버전의 출시에도 불구하고 하락세가 계속되고 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공개되지 않은 윈도우 97의 주된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로 개념이 자리잡혀 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윈도우 95의 연장선으로 그려나갔다. 이 프로젝트는 1994년 여름에 토머스 레던(Thomas Reardon)이 시작하여 벤자민 슬리브카(Benjamin Slivka)가 주도하였다. 소스 코드는 스파이글래스사에서 도입했다. 이 소스는 초기 상용 웹 브라우저였던 모자이크에서 가져온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한때 맥 OS, 유닉스 등에 사용할 수 있는 버전을 개발해 배포했지만 오래전부터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를 위한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개발하지 않았다. 맥 OS용도 2006년 1월 31일부터 개발하지 않고 있고 다운로드 또한 중지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1은 1995년 8월에 공개되었으며, 스파이글래스 모자이크의 수정판이였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2는 윈도우 95 OSR1, 윈도우 NT 4.0 영어판 두 곳에 포함되었으며. SSL 프로토콜 등의 기능을 지원했으며. 맥 OS도 지원했던 브라우저다. 윈도우 1.0, 윈도우 2.0, 윈도우 2.1x, 윈도우 3.0, 윈도우 3.1x, 윈도우 NT 3.1, 윈도우 NT 3.5, 윈도우 NT 3.51, 윈도우 95, 인터넷 익스플로러 1과 같이 지원이 2001년 12월 31일 종료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3은 1996년 8월 13일에 공개되었으며, 가장 널리 쓰이는 최초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되었다. 윈도우 95 OSR2, 2.1, 윈도우 NT 4.0 한글판에 기본 내장되어있고, 버전 3에서는 HTML 3.2 및 액티브엑스 제어와 자바 애플릿의 실행 환경을 갖추고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에 견줄 만한 기능까지 만들었다. 윈도우 NT 4.0, 윈도우 2000 RTM과 같이 지원이 2004년 6월 30일 종료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4는 1997년 9월에 공개되었으며, 윈도우 95 OSR2.5, 윈도우 98에 기본 내장되어 있다. 버전 4부터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윈도우 NT 4.0 서버, 윈도우 NT 4.0 워크스테이션, 윈도우 2000 서비스팩 1과 같이 지원이 2004년 12월 31일 종료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5는 1999년 3월 18일에 공개되었으며 5.0은 윈도우 98 SE에 5.01은 윈도우 2000에 포함되어 있다. 이 버전은 윈도우 3.1x, 윈도우 NT 3.1, 윈도우 NT 3.5, 윈도우 NT 3.51에서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다.  2000년 7월에 나온 인터넷 익스플로러 5.5는 인쇄 미리 보기, CSS, HTML 표준 지원, 개발자 API가 개선되었으며 128 비트 암호화를 지원한다. 이 버전은 윈도우 Me에 기본 포함되어 있었고, 윈도우 95에서 지원했던 마지막 버전이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6은 윈도우 XP 출시 몇 개월 전인 2001년 8월 27일에 공개되었다. 이 버전은 DHTML 향상, 콘텐츠 제한 인라인 프레임, CSS 수준 1, DOM 수준 1, SMIL 2.0의 부분 지원을 포함하고 있다. 2001년에 출시된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에 인터넷 익스플로러 6이 포함되어 있다. 그 뒤에 버전 6.0 서비스 팩 1이 배포 되었으며, 이 버전은 윈도우 98, 윈도우 98 SE, 윈도우 Me, 윈도우 NT 4.0, 윈도우 2000에서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다. 윈도우 XP 서비스 팩 2에 인터넷 익스플로러 6.0 서비스 팩 2가 포함되었고, 이는 다른 운영 체제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사용이 쉬었으나 웹 표준화가 되어있지 않다는 평가도 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6은 보안상의 문제로 2006년 PC월드 '전대 미문의 최악의 기술' 25위 중 8위에 선정된 바가 있으며, IE6 장례식을 거행하는 등 세계적으로 인터넷 익스플로러 7 또는 8로 업그레이드 하거나 모질라 파이어폭스, 구글 크롬, 애플 사파리 등 다른 브라우저 사용을 권고하였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7은 오랜 공백을 깨고 2006년 10월 18일에 공개되었다.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를 지원하며, 윈도우 비스타에는 기본으로 내장되어 있다. 버전 6에까지 제공되지 않던 탭 기능과 피싱 필터 등 다양한 기능이 포함되었다.  윈도우 XP용은 윈도우 XP, 오피스 2003 그리고 윈도우 XP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과 같이 지원이 2014년 4월 8일 종료되었고,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용은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와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과 같이 지원이 2015년 7월 14일 종료되었으며, 윈도우 비스타용은 윈도우 XP 임베디드, 윈도우 8과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과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9,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0과 같이 지원이 2016년 1월 12일 종료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은 2009년 3월 19일 (한국시간)에 정식 출시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은 인터넷 익스플로러 8 표준 모드로 알려진 새로운 렌더링 모드를 포함하고 있다. 2008년 2월에 마이크로소프트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의 개인 베타 버전의 공개에 대한 초대장을 제공하였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은 액티브X 기능을 최소화시키기로 했으므로 액티브X 기술을 많이 사용하는 한국 사이트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며,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를 지원하는 마지막 웹 브라우저다.  윈도우 XP용은 윈도우 XP, 오피스 2003 그리고 윈도우 XP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같이 지원이 2014년 4월 8일 종료되었고,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용은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 그리고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같이 지원이 2015년 7월 14일 종료되었으며,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은 윈도우 XP 임베디드, 윈도우 8과 윈도우 비스타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9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0과 같이 지원이 2016년 1월 12일 종료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9는 2011년 3월 14일에 정식 출시되었다. 웹 표준을 보다 준수하여 Acid 3에서는 95/100으로 이는 전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8보다 높은 수치이다. 일부는 한국에서 호환성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그렇게 큰 문제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부 사이트에서 문제가 발생할 여지는 있다. 그리고 인터넷 익스플로러 9부터는 GPU 가속의 지원으로 CPU 뿐만 아니라 GPU도 함께 쓰고 이 기술이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에서는 지원하기 힘들다는 문제로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는 지원 대상에는 제외되었다.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만 지원하며,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을 지원하는 마지막 웹 브라우저다.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은 윈도우 XP 임베디드, 윈도우 8과 윈도우 비스타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0과 같이 지원이 2016년 1월 12일 종료되었고, 윈도우 비스타용은 윈도우 비스타와 같이 지원이 2017년 4월 11일 종료되었으며, 윈도우 서버 2008용은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서버 2008 R2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1과 같이 지원이 2020년 1월 14일 종료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라스베이거스의 MIX 11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을 발표하면서 최초의 플랫폼 프리뷰를 공개하였다. 이 자리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이 개발에 3주 정도 걸린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이번 출시는 CSS3 그라디언트를 포함한 표준 지원을 더 개선한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는 데스크톱 모드에서는 액티브X를 지원하지만 모던 UI에서는 지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은 9와 달리 한국의 대부분의 웹에서 호환성 문제를 일으키며 급기야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으로의 업데이트를 막는 킷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제공하기도 했다.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용은 윈도우 XP 임베디드, 윈도우 8과 윈도우 비스타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9와 같이 지원이 2016년 1월 12일 종료되었으며, 윈도우 서버 2012용은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윈도우 서버 2012 R2 그리고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1과 같이 지원이 2023년 1월 10일 종료될 예정이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11 빌드가 2013년 3월 유출된 윈도우 8.1 업데이트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빌드에는 탭 동기화를 위한 불완전한 매커니즘을 포함하며 자체 사용자 에이전트에서 Gecko와 비슷한 것으로 식별한다. 나중에 나온 빌드들에는 SPDY, 확장된 개발 도구에 대한 지원을 포함하며 웹GL 지원도 제공할 것으로 예측된다. 또한 윈도우 7과 윈도우 서버 2008 R2를 지원하는 마지막 인터넷 익스플로러다.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은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서버 2008 R2 그리고 윈도우 서버 2008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9와 같이 지원이 2020년 1월 14일 종료되었고,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R2용은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윈도우 서버 2012 R2 그리고 윈도우 서버 201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0과 같이 지원이 2023년 1월 10일 종료될 예정이며, 윈도우 서버 2016용은 윈도우 서버 2016과 같이 지원이 2027년 1월 12일 종료될 예정이다. 그러나 윈도우 10용과 윈도우 서버 2019용은 해당사항이 없다.

모든 지원이 종료된 경우 * 표시가, 일부 지원이 종료된 경우 - 표시가 붙는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모바일(Internet Explorer Mobile)은 윈도우 모바일을 위한 웹 브라우저이다. 윈도우 모바일 5.0 이전에는 포켓 인터넷 익스플로러(PIE)라고도 불렸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윈도우 폰에서도 쓰인다. 다만 윈도우 10 모바일에서 보조프로그램으로 격하되고, 모바일에선 CPU 미지원으로 액티브X를 쓸 수 없다.

윈도우 서버 2003 이후부터 제공되는 보안 설정이 강화된 서버용 한정판이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과거에는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이 가장 높은 브라우저였다. 그러나 파이어폭스, 오페라, 구글 크롬 등 다른 웹 브라우저들의 시장 점유율이 오름에 따라 2004년 90%에 육박하던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시장 점유율은 점차 떨어져서 2008년에는 모든 버전을 합쳐서 60% 후반대를 유지하였다. 2011년 3월 14일 인터넷 익스플로러 9가 정식 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익스플로러 전체 버전의 시장 점유율은 반등하지 못하고 계속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같은 날 스탯카운터 통계 기준으로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점유율은 30% 후반대를 머물고 있다. 2016년이후부터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시장 점유율은 10%이하로 내려갔다.

스탯카운터의 통계에 따르면 2011년 1월부터 8월까지 대한민국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전체 버전 점유율은 매달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2011년 9월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점유율이 처음으로 90% 아래로 떨어졌다. 2011년 12월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버전별 점유율은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이 46.48%로 가장 높고, 인터넷 익스플로러 7 13.43%, 인터넷 익스플로러 9 13.06%, 인터넷 익스플로러 6 7.99% 순이다. 이처럼 대한민국에서는 전 세계에 비해 인터넷 익스플로러 한 브라우저의 점유율이 매우 높고, 구 버전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점유율도 높기에 웹 표준 문제가 지적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편 국내에서도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시장 점유율은 계속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2019년 4월기준 점유율은 24.6%대로 구글 크롬(63.6%)에 이어서 아직까지는 2위로 사용빈도가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이는 온라인 뱅킹 호환성 문제와 더불어 한국의 대다수 웹사이트 개발자들이 여러 웹 브라우저와 운영 체제들의 호환성을 고려하지 않고 ActiveX를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일부 웹사이트에서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웹 브라우저를 사용하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게 만든 것도 그 까닭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의 웹 호환성 문제를 참고.) 다만 현재는 여러 대체 브라우저를 지원하는 웹사이트가 많아지고 어떤경우에는 아예 익스플로러만 지원하지 않게하는 웹사이트도 늘어나면서 지금은 그런 문제가 많이 줄어들었다.




#Article 188: 마이크로소프트 (208 words)


마이크로소프트 코퍼레이션()은 미국의 세계 최대의 다국적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기업이다. 기업명의 공식 약칭은 MS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다양한 컴퓨터 기기에 사용되는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제품들을 개발, 생산, 판매, 관리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가장 유명한 제품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라는 운영 체제이다. 1975년에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개발하여 판매하기 위해 미국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 Micro-soft라는 이름으로 이 회사를 세웠다.

직원은 2013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약 10만 여 명이며, 인도, 중국, 영국 등에 컴퓨터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IBM 호환 개인용 컴퓨터(PC)에 MS-DOS를 납품하였고, 때마침 PC의 성공에 힘입어 도스 시장에서 지배적인 입지를 구축했다.

또한 경쟁 업체들이 인터넷에서 앞서나감에 따라, 윈도 95용으로 별도 판매된 PLUS! 팩에 처음 제공된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윈도우 98부터는 운영 체제에 포함하여 끼워팔기를 하여 비판을 받았다. 인터넷 익스플로러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는 지나친 시장 장악으로 경쟁사들을 시장에서 도태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익스플로러는 점유율 95%의 독점 상태에까지 이르러서, 모질라 파이어폭스 등의 대체 브라우저가 등장하기까지 5년여동안 업그레이드가 없었다.

위에서 언급된 것을 포함하여 말 그대로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들이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들은 'Micro$oft'라고 비꼬기도 한다. 원래는 네티즌들 사이에서 사용하던 말이었지만 밸브 코퍼레이션이 레프트 4 데드 관련 포럼에서

라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연도별로 크게 아래와 같은 로고를 사용했다. 맨 처음 사용된 초기의 로고는 1987년 9월까지 사용되었고, 로고의 이름은 blibbet이라고 불렸다.

그 뒤 1987년 10월에 들어서면서 스캇 베이커(Scott Baker)라는 사람이 현재와 같은 모양과 형태를 갖춘 팩맨(Pac-Man)이라는 별명을 가진 로고를 만들었다.




#Article 189: 웹사이트 (230 words)


웹사이트(, )는 인터넷 프로토콜 기반의 네트워크에서 도메인 이름이나 IP 주소, 루트 경로만으로 이루어진 일반 URL을 통하여 보이는 웹 페이지 (Web Page)들의 의미 있는 묶음이다. 대한민국에서 흔히 말하는 홈페이지는 엄밀히 말해 웹사이트를 지칭한다. 최초의 웹사이트는 팀 버너스리가 1990년에 CERN에서 만든 info.cern.ch이다.(지금도 CERN사이트 안에 존재함.)

웹사이트는 인터넷이나 랜과 같은 네트워크를 통해 접속할 수 있는, 적어도 하나의 웹 서버 상에서 호스팅된다. 웹 페이지는 HTML/XHTML의 형식으로 표현되지만 일반적으로 순수 문자열로 쓰여진 문서이다. 웹 페이지는 HTTP를 통하여 접속되며 가끔씩은 HTTPS를 통한 암호화를 사용하여 웹 페이지 콘텐츠를 이용한 사람들에게 보안과 개인 정보 보호를 제공한다. 사용자가 이용하는 웹 브라우저는 HTML 마크업 명령을 모니터에 표시하는 그대로 페이지 내용을 표현한다.

공식적으로 접속할 수 있는 모든 웹사이트는 총체적으로 월드 와이드 웹을 이루고 있다.

월드 와이드 웹(WWW)는 1989년 CERN의 팀 버너스리가 만들었다. 1993년 4월 30일에 CERN은 월드 와이드 웹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HTML과 HTTP가 도입되기 전에 파일 전송 프로토콜과 고퍼 프로토콜과 같은 다른 프로토콜들이 서버로부터 개별 파일을 내려받는 데 쓰였다. 이러한 프로토콜들은 사용자가 탐색하고 파일을 내려받는 단순한 디렉터리 구조를 제공한다. 문서는 워드 프로세서 형식 등으로 형식화되지 않은 순수 문자로만 된 글자로 표현되었다.

기능으로 분류하면 웹사이트는 다음과 같이 나뉜다.

각각의 모든 웹사이트 또는 홈페이지는 특수한 단하나의 예약된 'index.html'이라는 페이지를 갖고있다.
이는 최초 인트로 웹페이지이며  웹브라우저는 디폴트로 브라우저가 방문한 사이트(디렉토리)의 'index.html'의 이름을 갖는  HTML파일을 우선적으로 읽어들이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index.html 파일은 일반적으로  태그와 하위의 태그로 영역 구획 및 여기에 콘텐츠를 넘겨주는 기능을 하는 간단한 구조의 그릇 역할처럼 설정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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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190: 하이퍼텍스트 (145 words)


하이퍼텍스트(Hypertext, )는 참조(하이퍼링크)를 통해 독자가 한 문서에서 다른 문서로 즉시 접근할 수 있는 텍스트이다. 주로 컴퓨터나 다른 전자기기들을 통해 표시된다.
하이퍼텍스트라는 낱말은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이자 철학자인 테드 넬슨이 처음 고안하여 쓰이게 되었다.'hyper(건너 편의, 초월, 과도한)'와 'text'를 합성하여 만든 컴퓨터 및 인터넷 관련 용어로서, 파생텍스트라고도 한다. 인터넷과 결합하여 HTML의 주된 구성요소가 되었다. 기존의 문서가 순차적이면서 서열형 구조라면, 하이퍼텍스트는 링크에 따라 그 차례가 바뀌는 임의적이면서 나열형인 구조를 가진다. 즉, 출판된 책처럼 작가의 의도대로 사용자가 따라가는 것이 아닌, 하이퍼링크로 연결된 문서들을 어떠한 행위(클릭)에 따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이런 하이퍼텍스트의 등장은 검색엔진과 더불어 정보습득의 새로운 장을 인류에게 가져다 주었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문학, 특히 라는 새로운 예술장르를 탄생케 하였다.
웹이라는 것은 컨텐츠들이 하이퍼텍스트로 묶인 집합이라고 볼 수 있다. 하이퍼텍스트가 쓰인 기술들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HTML과 HTTP이다. HTTP는 하나의 프로토콜으로서, 이 통신규약을 이용해서 컴퓨터가 다른 컴퓨터와 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 있다. 이 HTTP로 HTML 문서가 전달될 수 있다.




#Article 191: 문자 인코딩 (284 words)


문자 인코딩(), 줄여서 인코딩은 사용자가 입력한 문자나 기호들을 컴퓨터가 이용할 수 있는 신호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넓은 의미의 컴퓨터는 이러한 신호를 입력받고 처리하는 기계를 뜻하며, 신호 처리 시스템을 통해 이렇게 처리된 정보를 사용자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신호를 입력하는 인코딩과 문자를 해독하는 디코딩하기 위해선 미리 정해진 기준을 바탕으로 입력과 해독이 처리되어야 하는데, 이를 문자열 세트 또는 문자셋이라고 한다. 
초기 보급형 컴퓨터의 문자열 세트는 아스키나 EBCDIC이 표준이었으나, 이러한 문자열 세트는 세계 곳곳에 인터넷이 보급되며 표현해야 할 문자가 증가하면서 이러한 문자셋들을 표준화하기 위해 많은 대체 방식이 개발되었다. 표준 문자셋을 개발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고, 후에는 유니코드가 등장하게 되었다.

문자 정보는 정보를 표현하기 위한 글자들의 집합을 정의한 것으로, 직접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수도 있고 한 문자 집합을 여러 문자 인코딩에서 쓸 수도 있다. 특히 집합 안의 문자들에 음수가 아닌 정수들을 배정한 것을 부호화된 문자 집합(coded character set, CCS)라 한다. 문자 집합은 ASCII와 같이 더 이상의 문자가 추가될 수 없기도 하고, 유니코드와 같이 문자가 계속 추가될 수 있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문자 집합과 문자 인코딩은 어떤 문자를 사용할 수 있으며 어떤 식으로 표현되는지를 나타낸다는 데서 동의어로 취급되기도 한다. 역사적인 이유로 MIME이나 그에 기반한 시스템은 문자 집합(charset)을 문자 인코딩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다.

문자 인코딩 형태(character encoding form, CEF)는 특정한 문자 집합 안의 문자들을 컴퓨터 시스템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일정한 범위 안의 정수(코드값)들로 변환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유니코드 코드 포인트를 8비트 숫자의 집합으로 나타내는 UTF-8이나, 16비트 숫자의 집합으로 나타내는 UTF-16, 그리고 대부분의 일반적인 문자 인코딩들이 포함된다.

문자 인코딩 구조(character encoding scheme, CES)는 문자 인코딩 형태로 변환된 코드값을 옥텟 기반의 시스템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옥텟들로 변환하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문자 인코딩 형태는 이 과정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 나지 않으며, 8비트 이상의 숫자를 사용하는 UTF-16과 같은 문자 인코딩 형태의 경우 엔디안을 지정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에는 ISO 2022와 같은 복합 인코딩이나, SCSU와 같은 압축 방법 등이 속한다.




#Article 192: 서버 (287 words)


서버()는 클라이언트에게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컴퓨터 시스템으로 컴퓨터 프로그램(server program) 또는 장치(device)를 의미한다. 특히, 서버에서 동작하는 소프트웨어를 서버 소프트웨어(server software)라 한다. 주로 리눅스 등의 운영 체제를 설치한 대형 컴퓨터를 쓰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서버는 프린터 제어나 파일 관리 등 네트워크 전체를 감시·제어하거나, 메인프레임이나 공중망을 통한 다른 네트워크과의 연결, 데이터·프로그램·파일 같은 소프트웨어 자원이나 모뎀·팩스·프린터 공유, 기타 장비 등 하드웨어 자원을 공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서버는 사용자(클라이언트)의 요청에 의하여 서비스를 하는데 이와 같이 구성된 시스템을 클라이언트-서버 시스템이라고 하며, 이는 하나 이상의 응용 프로그램을 상호 협력적인 환경에서 운용하는 분산처리 형태를 의미한다. 즉, 서비스를 요청하는 클라이언트와 클라이언트의 요청을 처리하는 서버와의 협동작업을 통해서 사용자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 처리방식이 클라이언트-서버 시스템이다.

클라이언트의 수가 5~20대 정도인 소규모 LAN의 경우에는 한 대의 서버로 충분히 모든 서비스를 소화할 수 있으나, 대규모 LAN의 경우에는 여러 대의 서버를 배치하고, 파일 관리는 파일 서버, 프린터 제어는 프린터 서버, 인터넷 등의 외부와의 교환은 통신 서버가 담당하는 등 각각 역할을 세분하게 된다.

컴퓨팅에서의 서버(server)라는 용어의 이용은 대기행렬이론에서 비롯한 것으로, 20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켄들의 기호를 선보인 논문 에서 서비스'와 함께 눈에 띄게 사용되었다. 와 같은 초기의 논문들의 경우 전화 교환원과 같은 더 구체적인 용어가 사용된다.

컴퓨팅에서 서버는 적어도 RFC 5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 RFC는 ARPANET(인터넷의 선구자)을 기술하는 최초의 문서들 가운데 하나이며 사용자와 대비되고 있고 두 가지 종류의 호스트와는 구별하고 있다: 서버 호스트, 사용자 호스트.

잘 알려진 서버 운영 체제로는 이를테면 FreeBSD, 솔라리스, 리눅스 등이 있다. 유닉스는 본래 미니컴퓨터 운영 체제였으며 전통적인 미니컴퓨터를 서버가 대체해감에 따라 서버는 효율적인 유닉스 기반의 운영 체제가 되었다.

서버 지향 운영 체제는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서버 환경에 적합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인터넷의 전반적인 구조는 클라이언트 서버 모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전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동작하고 있으면서도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서버는 수백만 대에 이른다.

인터넷 서버가 제공하는 수많은 서비스 가운데 다음을 포함한다:




#Article 193: 코드분할다중접속 (473 words)


코드분할다중접속(, CDMA)은 이동 통신에서 코드를 이용한 다중접속 기술의 하나이다. 1996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에서 최초로 상용화되었다.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은 1996년에 세계 최초로 CDMA를 기반으로 한 이동통신 서비스를 상용화하였다.

CDMA는 미국의 퀄컴에서 기술규격을 개발하여, 1989년 샌디에이고에서 최초로 CDMA 기술을 이용한 통화시험에 성공하였다. 1993년 CDMA 기술 규격인 IS-95A가 정립되었으며, 1995년 9월 홍콩에서 허치슨텔레콤에 의해 상용화하였다. 1997년에 이르러 전 세계 가입자 수는 700 ~800백만이었다. 1998년 LG텔레콤(현.LG유플러스)은 CDMA 데이터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1999년 전 세계 가입자는 5000만명으로 늘었다. 2000년 CDMA 2000 1x EV/가 3세대 이동통신 규격으로 국제시장에 출시되었지만, KT의 경우, 4G LTE 주파수 재배치의 일환으로, 2012년 3월초에 2G PCS 서비스를 전국적으로 일제히 종료하였다.

더욱이, SK텔레콤의 경우, 2020년 7월 27일에 2G 서비스를 최종적으로 종료하였다. 이는, 2G 장비 노후화가 심해 통신망 장애 문제가 우려되고, 핵심부품의 단종으로 인한 유지보수의 불가로, 정상적인 서비스를 계속적으로 유지하기가 곤란하다는 전제 조건으로, 2G 서비스 종료를 선언한 것이다.

코드분할다중접속은 코드를 이용하여 하나의 셀에 다중의 사용자가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이동통신은 제한된 주파수 대역을 활용하여 다수가 통신을 하므로 다중접속 기술이 반드시 필요하다. 코드분할다중접속 이외의 기술 중 널리 사용되고 있는 기술로는 GSM에서 사용되고 있는 시분할다중접속(TDMA)가 있다.

코드분할다중접속은 동일한 주파수 대역에서 다중의 사용자가 동시에 접속할 수 있도록 코드화한 신호를 대역 확산하여 전송한다. 단말기는 확산된 신호를 디코드하여 복조함으로써 사용자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

다중접속(Multiple Access)은 동일한 주파수 대역에 다수의 사용자가 서비스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다중접속은 기술 규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뉜다. 기술 별 다중 접속의 대략적 개념은 오른쪽 그림에서 참조할 수 있다.

TDMA는 GSM의 기반기술로 상용화되었다. CDMA는 대한민국 등에서 사용된다. 주파수 사용의 효율성이 낮은 FDMA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대역 확산 기술은 일반적으로 전송할 정보신호의 대역폭보다 훨씬 큰 대역폭을 통해서 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정보의 다중화와 고속처리가 가능해진다. 대역확산에는 주파수를 변조하는 주파수 도약과 동일 주파수 내에서 변조되는 직접 확산의 방식이 있다. CDMA는 직접확산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다.

s(t)Acos(ωet+Φ)

s(t): 확산용 코드   Acos(ωet+Φ):신호

위 수학적 표현의 통신상 의미는 결국 비교적 큰 신호인 통신 신호를 아주 작고 무작위적인 코드신호로 곱하여 변조시킨다는 것이다. 신호 변조의 개념도는 아래의 그림과 같다. 아래의 그림에서 제일 위는 전달하고자 하는 신호를 가운데는 코드를 나타낸다. 제일 아래는 두 신호를 XOR시킨 결과 변조된 신호이다. 이렇게 변조된 신호가 송출되게 된다.

변조에 사용되는 코드가 다르면 변조된 결과도 다르게 되므로, 사용자마다 다른 확산용 코드를 부여하여 하나의 주파수 대역 내에서 여러 명의 사용자가 통신을 이용할 수 있다. 이를 다중화라 한다.

다중화에 사용되는 코드는 되도록 백색잡음과 같이 무작위적이어야 한다. 코드가 일정한 경향을 가질 경우 충분히 많은 사용자가 동시에 접속하면 혼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CDMA에서는 상호상관(Cross-Correlation)이 거의 없는 일종의 무작위 신호를 코드로 사용한다. 이 코드를 생성하는 기술의 특허는 퀄컴이 소유하고 있다.

CDMA의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다.

실제적으로는 몇 개의 채널(파일럿, 동기, 통화 등)로 구분되어 있어서, 파일럿 채널을 통해 단말기와 기지국 사이에 기본적인 확인을 하고 동기 채널에서 코드 동기화를 하여 통화채널로 음성 데이터를 보내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존의 IS-95 방식에서 현재는 CDMA2000과 같은 보다 고속의 데이터 통신을 위한 방식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들 근본 기술에 대한 칩셋 설계와 관련 기술 특허는 퀄컴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 이에 대한 로열티를 지불하고 있다.




#Article 194: 블루투스 (764 words)


블루투스()는 1994년에 에릭슨이 최초로 개발한 디지털 통신 기기를 위한 개인 근거리 무선 통신 산업 표준이다. ISM 대역에 포함되는 2.4~2.485GHz의 단파 UHF 전파를 이용하여 전자 장비 간의 짧은 거리의 데이터 통신 방식을 규정하는 블루투스는, 개인용 컴퓨터에 이용되는 마우스, 키보드를 비롯해, 휴대전화 및 스마트폰, 태블릿, 스피커 등에서 문자 정보 및 음성 정보를 비교적 낮은 속도로 디지털 정보를 무선 통신을 통해 주고 받는 용도로 채용되고 있다.

블루투스는 수 미터에서 수십 미터 정도의 거리를 둔 정보기기 사이에, 전파를 이용해서 간단한 정보를 교환하는데 사용된다.
당초에는 에릭슨을 필두로, 인텔, IBM, 노키아, 도시바 등의 5개 회사가 프로모토로서 규격의 책정에 참가했으며, 그 후 마이크로소프트, 모토로라, 3COM, 루센트 테크놀로지 등의 4개 회사가 추가 참여했다. 현재는 3COM과 루센트 테크놀로지 대신, 애플, Nordic Semiconductor가 추가되어, 총 9개 회사가 프로모터 기업으로 참가했다.

IEEE에서는 규격명 IEEE 802.15.1으로 등재되어 있으나, 현재 블루투스는  (SIG)을 통해 관리되고 있다. 이 그룹에는 전기통신, 컴퓨터, 네트워크, 가전 등의 분야의 30,000사 이상의 기업들이 멤버에 가입되어 있다. 블루투스 SIG는 규격의 개발을 감시, 규격의 인증 프로그램의 관리 및 트레이드마크의 보호를 관장하고 있다.
장비 제조사가 블루투스 장비로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SIG에서 제정한 표준 규격을 만족해야 한다.

'블루투스'라는 이름은 10세기 경 처음으로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통합한 덴마크의 하랄드 블라톤(Harald Blåtand) 국왕의 별칭이 '파란 이빨의 왕'으로 불렸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Blåtand를 영어식으로 번역한 단어가 블루투스(Bluetooth)이다.

블루투스 이름의 아이디어는, 1997년 인텔 출신의 Jim Kardach 라는 시스템 엔지니어가 제안하였다. 제안했을 당시에, 그는 Frans G. Bengtsson의 역사 소설 The Long Ships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이 책은 바이킹과 하랄드 블라톤 국왕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하랄드 블라톤 왕이 스칸디나비아를 통일했던 것처럼, '난립하는 여러 무선 통신 규격을 통합하자'는 염원이 담겼다고 한다.

블루투스의 로고는, 북유럽의 룬 문자(옐링 거석의 비석에서 찾을 수 있는)로 하랄드 블라톤 국왕의 이름의 앞글자   (H)와  (B)를 결합한 모양에서 유래한다.

PANs의 산업 표준중 하나인 블루투스는 ISM 대역인 2.45GHz를 사용한다. 버전 1.1과 1.2의 경우 속도가 723.1kbps에 달하며, 버전 2.0의 경우 EDR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를 통해 2.1Mbps의 속도를 낼 수 있다. 블루투스는 RS-232, 유선 USB를 대체하는 개념이며 이는 와이파이가 이더넷을 대체하는 개념과 유사하다. 암호화에는 SAFER을 사용한다. 장치끼리 믿음직한 연결을 성립하려면 키워드를 이용한 페어링이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 버전은 1.1 버전과 호환되며 주요 향상 점은 다음과 같다: 빠른 접속과 가까운 거리에서의 주파수 간섭 및, 먼 거리에서의 분산스펙트럼(frequency-hopping spread spectrum)에 대비하였다. 실제 전송 속도는 1.1과 같은 723kbit/s이다. 패킷의 오류나 재전송에 따른 음성이나 음원신호의 quality손실을 막는 Extended Synchronous Connections (eSCO)를 지원하게 되었고, three-wire UART를 위한 Host Controller Interface (HCI)를 지원하게 되었다. 2005년 802.15.1 IEEE 표준으로 승인되었다.

블루투스 3.0은 2009년 4월 21일에 발표되었다. 블루투스 3.0의 큰 특징은 802.11 PAL(Protocol Adaptation Layer)를 채용해서 속도를 최대 24Mbps로 향상시켰다. (+HS 가 붙어있지 않은 제품에서는 이와 같은 High Speed 연결을 지원하지 않으며 3.0에서 추가된 기능만을 지원한다.) 그리고 블루투스 기기간에 대용량 그림, 동영상, 파일을 주고받게 되었다. PC를 모바일 기기와 동기화를 할 수 있고 프린터나 PC로 많은 사진을 내려받을 수 있다. 추가된 점으로 내장된 전력 관리 기능을 통해 전력소모를 크게 줄일 수 있다.

Bluetooth SIG는 블루투스 사양서 버전 4.0(Bluetooth Smart)을 2010년 6월 30일에 채택하였다. 이 사양에는 클래식 블루투스(Classic Bluetooth), Bluetooth high speed 와 Bluetooth low energy 프로토콜이 포함되었다. Bluetooth high speed는 Wi-Fi를 바탕으로, 클래식 블루투스는 기존의 레거시 블루투스 프로토콜을 바탕으로 한다.

한편, 종래의 버전과 비교해 대폭적으로 소비전력을 낮춘 Bluetooth Low Energy 는, Bluetooth SIG 공개자료에 의하면, 버튼형 전지 1개만으로도 수년간 구동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전송 속도는 1Mbps로, 데이터 패킷 사이즈가 8 - 27옥테드로 매우 작아졌다. 가전제품 등에 탑재된 센서와의 데이터 통신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사양으로, 기존 3.0+HS과 방향성을 달리하여, 제품 제작자는 3.0+HS 및 4.0을 별도로 목적에 맞춰 채용하는 식이 되었다.

블루투스 SIG는 2013년 12월 블루투스 4.1의 새로운 기능을 발표했다. 블루투스 4.1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오래된 블루투스 하드웨어는 4.2를 데이터 패킷 Length Extension으로 받아들이고, 펌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보안을 개선했다.

주요 개선 사항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Isochronous 채널 (ISOC) - CIG (Connected Isochronous Group) 좌측 우측 이어버드를 그룹으로 묶어 전송동기화 하여 좌우측 딜레이 차이를 최소화

LE 파워 컨트롤 (LEPC) - LC3(저복잡성 통신코드)  고품질 저전력 오디오 코덱 지원 , 이어버드에 직접 동기화된 오디오 스트림 , 멀티 스트림 , 

향상된 특성 프로토콜 (EATT)

블루투스는, 여러 종류의 장비로의 통신에 사용되는 규격인 이유로, 장비의 종류에 따라 규정되는 각각의 별도의 프로토콜이 존재한다. 이들 프로토콜의 사용법을 프로파일이라는 용어로 표준화하고 있다. 통신하고자 하는 장비와 장비 간에, 동일한 프로파일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만, 그 프로파일을 이용한 통신이 가능하다.

대표적인 프로파일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블루투스는, 통신에 이용되는 전파의 강도를 클래스라는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다. 블루투스 지원 장비는, 어떤 장비든 한 클래스로 분류된다. 쌍방이 같은 클래스일 필요는 없다.

블루투스는 2.402 GHz ~ 2.480 GHz 대역의 마이크로파 무선주파수 스펙트럼을 사용하며 이는 암을 일으키지 않는, 무해한 비전이성 방사선이다.
블루투스 무선이 내뿜는 최대 전기 출력은 클래스 1 장치의 경우 100 mW, 클래스 2 장치의 경우 2.5 mW, 클래스 3 장치의 경우 1 mW이다. 클래스 1의 최대 전기 출력 조차, 가장 전력이 낮은 휴대전화 보다도 수준이 더 낮다. UMTS 및 W-CDMA은 250 mW를, GSM1800/1900은 1000 mW를, GSM850/900은 2000 mW의 출력을 낸다.




#Article 195: 역사 (673 words)


역사(歷史, , )는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지난 시대에 남긴 기록물, 이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 등을 가리킨다. 또 인간이 거쳐온 모습이나 인간의 행위로 일어난 사실을 말하는 단어로도 쓰인다. 또한 역사는 시간의 흐름으로써 어떤 사람이 겪은 일에서 중요한 일들 중 후대에게 쉽게 잊히지 않는 과거의 사실을 의미하며 명예와는 미래에서 잊히지 않고 이어 전해진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역사라는 말은 객관적 사실과 서정적 표현, 주관적 기술의 세 측면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는데, 레오폴트 폰 랑케는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밝혀내는 것이 역사가의 사명이라고 하여 객관적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에 비해 에드워드 핼릿 카는 과거의 사실을 보는 역사가의 관점과 사회 변화에 따라 역사가 달리 쓰일 수 있다고 하였다. 역사 연구란 이야기(narrative)를 통해 연속된 사건들을 검증하고 분석하며 종종 인과 관계를 객관적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역사학은 고고학, 사회학 등의 주변 학문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역사라는 개념은 또한 넓은 의미에서 사건이나 사물의 자취를 총칭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역사학자들은 과거를 연구하기 위하여 많은 역사적 자료를 탐색한다. 이 자료들은 1차 사료와 2차 사료로 구분되는데, 1차 사료는 어떤 사건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남긴 문서, 기록 등이다.

영어의 “히스토리(history)는 고대 그리스어의 히스토리아(ἱστορία)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다”·“보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원시 인도유럽어의 *wid-tor-에서 나온 말로, 알다, 보다를 뜻하는 *weid-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어근은 영어의 wit, wise, wisdom, vision, idea, 산스크리트어의 베다(veda), 슬라브어의 videti, vedati 등에 남아있다. 역사는 두 학문 영역의 방법론을 통합함으로써 양자를 이어주는 다리라고 볼 수도 있다. 어떤 역사가들은 역사를 두 범주 중 한 곳에 포함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현대 학계에서 역사는 점차 사회과학으로 분류되고 있다. 20세기에 프랑스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은 세계사 연구에서 경제학, 인류학, 지리학을 이용하여 역사 연구에 혁명을 일으켰다.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거나 말로 전하며, 기록이나 구전 자료를 연구하여 역사적 의문에 해답을 찾고자 했다. 처음에 역사가들은 기념물, 비문, 그림 같은 자료들도 이용했다. 일반적으로 사료란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글로 쓴 기록, 구전(口傳), 물리적으로 보존된 것들(유물, 유적). 역사가는 대개 이 세 가지를 모두 참고한다. 그러나 글로 쓴 기록은 선사와 역사의 구분이 된다.

고고학은 땅에 묻힌 유적지나 유물이 발굴되었을 때 역사 연구에 유용한 분야이다. 그러나 고고학은 혼자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고고학적 발견을 보충하기 위해 이야기 자료가 쓰인다. 그러나 고고학은 역사학과는 별개의 방법론과 접근법들로 이루어져 있다. 즉 고고학은 텍스트 사료의 틈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역사 고고학(Historical Archaeology)은 고고학의 한 분과로서, 종종 현존하는 텍스트 사료와는 상반되는 결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아메리카의 역사상의 아나폴리스(18세기 동부 해안의 한 마을)를 발굴하고 연구하는 마크 리오니(Mark Leone)는 당시 기록 자료에서 보이는 자유 이데올로기 불구하고, 이때의 모든 역사적 환경의 연구를 통해 노예 소유와 부의 불평등을 밝혀서 텍스트 자료와 발굴 자료 사이에 차이를 이해하고자 했다.

역사를 배열하는 방법에는 연대기, 문화, 지역, 주제 등 다양한 기준이 있다. 이런 구분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며, 가령 1800~1945년 과도기 시대의 국제 여성 운동같은 경우 처럼 서로 겹치기도 한다. 현대 학문이 전문화 추세를 보이기는 하나, 역사가들은 매우 특정한 것과 매우 일반적인 것을 연관지어 볼 수 있다. 역사 연구 분야의 하나인 큰 역사(Big history)는 이러한 전문화에 반대하여 보편적인 양상이나 추세를 탐구한다. 역사는 종종 어떤 실용적인 혹은 이론적인 목적을 가지고 연구하기도 하며, 단지 지적 호기심에 의해 연구하기도 한다.

현대 동서양의 인류 문명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인류의 4대 문명의 발상지 그리고 많은 사멸된 고대의 찬란한 문명은 인류 역사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분야로 여겨진다. 고대 인도 그리고 중국의 황하 유적은 동양 문명 역사의 발판을 이루고 있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기원전 4000년 전후에 형성된 수메르 문명은 서양 문명의 근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고대 문명이 이룩한 찬란한 유산, 예컨대 세계의 7대 기적 건축물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찬탄과 경이심을 자아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 시대, 즉 역사가 글로써 기록되지 않고 그 역사를 유물로써 알 수 있는 시대다.

문자가 발명된 후 인류가 역사를 글로 기록하여 남긴 시대를 일컫는다. 밑의 시기 구분은 서양 역사관에 입각하여 구분한 것이다.

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을 위해서 역사학자들은 종종 지리학의 도움을 받는다. 날씨의 패턴, 물의 공급, 그리고 지표면의 생태 등은 모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왜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렇게 성공적인 문명화를 이룩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집트의 지리학을 참고해야 한다.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변에 세워졌다. 강물은 매년 범람하였고, 그 강둑에 흙이 쌓였다. 비옥한 토양은 농부들이 도시 사람들이 먹기에 충분한 곡식을 기를 수 있게 하였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문명화를 돕는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하였다. 이처럼 역사적 사건들 중에는 지리적 요인에 영향을 받은 일들이 많다.

링크




#Article 196: 인터넷 프로토콜 스위트 (178 words)


인터넷 프로토콜 스위트()는 인터넷에서 컴퓨터들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데 쓰이는 통신규약(프로토콜)의 모음이다. 인터넷 프로토콜 슈트 중 TCP와 IP가 가장 많이 쓰이기 때문에 TCP/IP 프로토콜 슈트라고도 불린다.

인터넷 프로토콜 슈트는 1960년대 말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수행한 연구개발의 결과로 탄생하였다.

TCP/IP는 패킷 통신 방식의 인터넷 프로토콜인 IP (인터넷 프로토콜)와 전송 조절 프로토콜인 TCP (전송 제어 프로토콜)로 이루어져 있다. IP는 패킷 전달 여부를 보증하지 않고, 패킷을 보낸 순서와 받는 순서가 다를 수 있다.(unreliable datagram service) TCP는 IP 위에서 동작하는 프로토콜로, 데이터의 전달을 보증하고 보낸 순서대로 받게 해준다. HTTP, FTP, SMTP 등 TCP를 기반으로 한 많은 수의 애플리케이션 프로토콜들이 IP 위에서 동작하기 때문에, 묶어서 TCP/IP로 부르기도 한다.

인터넷 프로토콜 스택은 보통 네 계층으로 나눌 수 있다.

두 모델은 관련은 있으나 서로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는다. 가장 큰 차이는 계층의 수이다. 앞의 모델은 네 계층, 혹은 (링크 계층을 물리 계층과 데이터 링크 계층으로 나눈다면) 다섯 계층 을 사용하고 있는 반면, OSI 모델은 일곱 계층을 사용한다.

OSI 모델이 더 잘 맞는 경우는 SSL이나 TLS를 설명할 때이다. 보통 SSL이나 TLS는 TCP의 상위에, 그리고 HTTP나 SFTP, 그 밖에 stunnel이나 VPN 위에서 동작하는 애플리케이션보다는 하위에 있는 세션 계층 프로토콜로 쓰인다.




#Article 197: 프레디 머큐리 (231 words)


프레디 머큐리(, 본명은 퍼루크 벌써러 또는 프레드릭 벌써러(), 1946년 9월 5일 ~ 1991년 11월 24일)는 잔지바르에서 태어난 영국의 음악가이자 음악 프로듀서이다. 퀸의 리드 보컬로서 4옥타브를 넘나드는 화려한 보컬이 압권이며 특유의 무대 장악력과 퍼포먼스로 록 역사상 최고의 보컬워크(Vocal Work)를 남긴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한 곡들로 〈Bohemian Rhapsody〉, 〈We Are the Champions〉, 〈Love of My Life〉,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Somebody to Love〉, 〈Killer Queen〉, 〈Don't Stop Me Now〉 등이 있다.

프레디 머큐리는 1946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잔지바르에서 영국 총독부 공무원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파로크 불사라()였다. 가계나 이름, 외모 등의 면에서 일반적인 영국인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 국적을 가졌으며 8세기에 무슬림들에게 쫓겨 인도로 망명한 페르시아인 조로아스터교 교도의 후손이었다.

프레디 머큐리는 인도의 뭄바이로 보내져 10년간 기숙학교에 다녔으며, 이 시기부터 프레디(Freddy; Frederick의 애칭)라는 별칭을 사용하였다. 학창시절 프레디는 '헥틱스(Hectics)'라는 밴드를 결성하였는데, 그 때는 리드 보컬을 맡지 않고 키보드를 연주했다.

프레디는 1960년대 후반 아마추어 밴드 (Ibex)에서 리드 보컬로 활약했는데, 후에 퀸의 앨범에 수록되는 〈Stone Cold Crazy〉와 〈Liar〉의 기본이 되는 곡을 이 시기에 작곡했다고 한다.

브라이언 메이는 프레디 머큐리 탄생 70주년을 기념해 17473 프레디머큐리라는 소행성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현재 퀸의 활동을 담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흥행으로 다시금 큰 인기를 얻고있다. 그리고 이 인기에 더불어 퀸은 2020년 1월 18일과 19일에 고척돔에서 내한 공연을 진행했다.

Mr. bad guy(1985)

The great pretender(1987)

Barcelona(1988 with 몽셰리 카바예)

Living on my own .remix(1993)

Time waits for no one(2019)

Love me like there's no tomorrow(2019)




#Article 198: 루트비히 볼츠만 (712 words)


루트비히 에두아르트 볼츠만(, 1844년 2월 20일 - 1906년 9월 5일)은 통계역학과 통계열역학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물리학자이다. 그는 과학적 모델에 대해 대단히 논쟁이 심할 시기에 원자론을 주창한 가장 중요한 사람 중에 한 명이다.

볼츠만은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 1844년에 빈에서 태어났다. 볼츠만의 아버지인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George Boltzmann)은 세무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베를린에서 이주한 시계공이었다. 어머니인 카테리나 파우에른파인트(Katharina Pauernfeind)는 잘츠부르크 출신이었다. 볼츠만은 양친으로부터 가정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으며, 나이 15세에 린츠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해에 볼츠만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볼츠만은 그의 나이 25세가 되는 1869년에 그라츠 대학의 이론물리학(수리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1869년의 몇 달간은 하이델베르크에서 로베르트 분젠과 레오 쾨니히스베르거와, 1871년에는 베를린에서 구스타프 키르히호프와 헤르만 폰 헬름홀츠와 공동 연구를 했다. 1873년 볼츠만은 빈 대학의 수학교수로 임용되었으며 1876년까지 일했다.

볼츠만은 1890년 독일에 있는 뮌헨 대학의 이론물리학 학장으로 임명되었고, 1894년에는 다시 빈 대학으로 돌아와 요세프 슈테판의 자리를 이어 이론물리학과 교수가 되었다.

볼츠만은 빈 대학의 여러 동료들과 친해지지 못했는데, 특히 당시 빈 대학의 철학 교수이자 과학사 교수였던 에른스트 마흐와 원자론을 둘러싸고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곧 빌헬름 오스트발트의 초청으로 1900년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이직했다. 마흐의 퇴임 이후에 볼츠만은 1902년에 다시 빈으로 돌아갔다. 거기에 칼 프르지브람(Karl Przibram), 파울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같은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빈에서 볼츠만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철학도 가르쳤다. 볼츠만의 자연철학에 관한 강의는 매우 인기가 많아서 그 시대에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그의 첫 번째 강의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가장 큰 강의실도 모자라서 사람들은 계단사이에 서서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볼츠만의 철학 강의 때문에 황제들이 궁전으로 초대하기도 하였다. 그가 가르친 학생 중에는 린츠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있었다.

볼츠만의 기체분자운동론은 원자와 분자의 실재를 전제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독일 철학자들과 에른스트 마흐와 물리화학자인 오스발트같은 과학자들은 그것들의 존재를 반대했다. 1890년대 동안 볼츠만은 원자론자들과 비원자론자 모두가 원자에 대한 논의 없이 물리학을 할 수 있도록 타협안을 만드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그의 해결 방법은 원자는 곧 Builder라고 하는 헤르츠의 이론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비원자론자들은 그 그림이 실제 원자를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반면에, 원자론자들은 그림 자체가 실제 원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각 집단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오스발트나 순수 열역학의 옹호자들은 볼츠만의 원자와 분자에 관한 가정과 특히 열역학 제2법칙의 통계 해석 때문에 기체분자운동론과 통계역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백여년에 걸쳐 볼츠만의 과학은 다른 철학적 반대에 계속 위협을 받고 있었다. 마흐의 학생과 구스타프 야우만 등을 포함한 물리학자들은 헤르츠의 이론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그것은 모든 물리적 운동은 궁극적으로 전자기적 운동이며, 전자기적 운동은 원자와 분자 없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1900년대의 이러한 움직임은 그것이 볼츠만의 운동론과 열역학 2법칙의 통계적 해석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볼츠만을 깊게 우울하게 만들었다.

볼츠만의 가장 중요한 과학적 업적은 기체의 분자 속도에 관한 맥스웰-볼츠만 분포를 포함한 기체분자운동론에 관한 것이다. 맥스웰-볼츠만 통계역학과 에너지에 대한 맥스웰-볼츠만 분포는 고전 통계 역학의 기초로 남아있다. 그것들은 양자 역학에 맞지 않는 여러 현상에 적용가능하며, 온도의 의미에 대해 훌륭한 통찰을 제공한다.

대부분의 물리학의 확립은 원자와 분자의 실재에 대한 그의 믿음과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 믿음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과 미국의 조사이어 윌러드 기브스 그리고 1808년 존 돌턴의 원자 발견의 이후로 대부분의 화학자와 공유되었다. 그는 분자와 원자에 관해서 독일 물리학지 편집자와 긴 논쟁을 벌였다. 볼츠만이 죽고 2~3년 뒤에 페랭의 브라운 운동 연구에서 아보가드로 수와 볼츠만 상수가 확인되었고, 이로 인해 작은 물질이 실제 존재한다는 사실을 세계에 납득시켰다.

그의 업적으로는 볼츠만 인자라고 불리는 분배법칙을 들 수 있다. 이 법칙은 종래의 분자들의 속도에 관한 맥스웰 분배법칙을 확장시켜 외적인 힘의 작용을 외적인 힘의 작용을 함께 고려하여 얻은 것으로 분자들의 에너지가 주로 절대온도가 플랑크상수의 곱으로 주어지는 열적인 에너지 근처에 분포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그는 또 슈테판-볼츠만 공식을 유도해냈다. 흑체의 단위표면적에서 방출되는 모든 파장의 빛에너지의 총합이 흑체의 절대온도에 4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이다. 1879년에 슈테판이 실험적으로 발견하고, 이를 1884년에 이론적으로 유도해내었다. 이것은 20세기 양자론이 등장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플랑크의 말을 인용하면 엔트로피와 확률이 로그로 연결된다는 것을 처음 진술된 것은 볼츠만의 기체분자이론에서였다.
그 유명한 엔트로피 S에 관한 식은

여기서  = 1.3806505(24) × 10−23  J K−1 는 볼츠만 상수이다. W는 거시상태의 기회의 빈도, 더 엄밀하게 말하면 계의 거시적인 상태에 상응하는 가능한 미시상태의 수를 말한다. W는 아래의 식을 이용하여 구해낼 수 있다.

이는 열적인 평형상태에 있는 계에 대하여 열역학적인 성질을 구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엔트로피는 계의 주어진 거시적인 상태에 해당하는 가능한 모든 미시적인 상태의 수의 대수를 취한 양에 비례함을 나태낸 것이다. 이 관계식은 모든 미시적인 상태들의 사전확률이 같다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으나 이 가정을 보완하기 위하여 볼츠만은 에르고드 가정을 도입하였다. 이 가정에 의하면 하나의 계가 궁극적으로 모든 가능한 미시적인 상태를 두루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볼츠만 방정식은 이상기체의 동역학을 묘사하기 위해 발전되었다. 이전에는 기체분자들이 평형상태에 도달해있다고 가정하고 문제를 풀었으나, 볼츠만은 그러한 가정을 배제하고, 비평형상태에 있을 경우 어떻게 평형상태로 변화해 나갈 지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다. 볼츠만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Article 199: 만화 (783 words)


만화(漫畵, , )는 시각 예술의 일종으로, 일반적으로 말풍선이나 자막 형태의 글과 그림의 조합을 이루어 생각을 표현한다. 초기에는 캐리커처로써나 간단한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많은 하위 장르를 가진 예술 매체로 발전했다.

만화는 종종 그림의 컷이 나란히 연결된 형식이다. 대화, 서술, 음향 효과 기타 정보를 표현하기 위해 말풍선, 짧은 해설, 의성어 등의 방법을 사용하며, 컷의 크기와 배열로 묘사의 속도를 조절한다. 만화와 유사한 형태의 삽화는 만화에 쓰이는 가장 흔한 이미지 제작의 수단이다. 사진 소설은 사진 그림을 사용하는 형태이다. 만화의 흔한 형태로는 연재 만화, 시사 만평, 만화책 등이 있다. 20세기말 이후, 그래픽 노블, 코믹 앨범, 단행본 등의 합본이 점차 흔해졌고, 21세기 들어 인터넷상의 웹 만화가 확산되었다.

만화의 역사는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쳐 왔다. 20세기 중반, 만화는 미국, 유럽(특히 프랑스와 벨기에), 일본 등에서 유난히 번창했다. 유럽의 만화는 1830년의 로돌페 퇴퍼( )의 연재 만화로 거슬러 올라가며, 땡땡의 모험 등의 1930년대의 연재 만화와 만화책의 성공에 힘입어 널리 확산되었다. 미국의 만화는 20세기 초 신문 연재 만화의 등장으로 대중 매체로 부각되었다. 뒤를 이어 1938년 슈퍼맨이 나타난 이후로 슈퍼히어로  잡지 형태의 만화책 장르가 유행했다. 일본에서는 12세기부터 만화가 시작되었음을 제시한다. 일본의 현대적인 만화는 20세 초에 등장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시기에 테즈카 오사무와 같은 만화가의 인기와 함께 만화 잡지와 만화책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만화는 대부분의 역사에서 저급 문화로 취급받았으나, 20세기 말로 진행되면서 대중과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만화의 기원은 만화의 정의에 따라 달라지는데, 15세기 유럽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이집트 상형문자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나 컷과 그림 안의 말풍선을 가진 현재의 만화 형식 및 '만화'라는 단어 자체가 생겨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만화의 정의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리며, 또한 만화의 매체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학자들 중 윌 아이스너는 '그림과 단어를 배치하여 이야기를 만들거나 생각을 각색하는 것'이라 정의했다. 그는 1996년에 만화를 최종적으로 '만화책 등에서 삽화와 말풍선이 순서에 따라 나열된 것'으로 정의했다.

《만화의 이해》(1993)에서 스콧 매클라우드는 아이스너의 연속예술이라는 표현을 만화의 매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며, 그것을 정보를 전달하거나 보는 이에게 미적인 반응을 일으킬 목적으로, 그림과 그밖의 형상들을 의도한 순서로 나란히 늘어놓은 것(juxtaposed pictorial and other images in deliberate sequence, intended to convey information and/or to produce an aesthetic response in the viewer)으로 정의했다. 이 정의에서는 패밀리 서커스나 풍자 만화와 같은 한컷 만화를 만화가 아닌 카툰으로 분류한다. 그 반면, 코믹스 저널은 20세기 최고의 만화 100선이라는 기사에서 수많은 카툰 및 캐리커처 작가들의 한컷 작품을 포함시켰다.

문화를 크게 고맥락(high context) 문화와 저맥락(low context) 문화로 구분된다. 일본과 한국, 중국과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은 고맥락 문화에 속하는 나라들인데, 고맥락 문화란, 민족적으로 동질을 이루며 역사, 습관, 언어 등에서 볼 때 공유하고 있는 컨텍스트, 즉 맥락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집단주의와 획일성이 발달하는 문화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서로 깊은 인간관계로 묶여있으며 멤버 간에 공유하는 정보가 많으며 간단한 메시지라도 깊은 의미를 갖기 쉬운 문화이다. 또한, 언어 코드보다 컨텍스트(context: 비언어코드,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 환경, 인간관계)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고맥락 문화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은 언어적으로 애매하고 추상적인 표현이 많고 비언어행동에 있어서는 미묘한 것이 많이 존재한다. 반면에, 저맥락 문화는 다인종,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미국이 대표국이며, 멤버 간에 서로 공유하고 있는 컨텍스트의 비율이 낮아 개인주의와 다양성이 발달하는 문화를 가진다. 저맥락 문화에 속하는 미국만화는 정교한 그림체와 짧은 이야기 구성으로 특징지어지며, 선악의 확실한 구분과 수많은 말풍선을 사용한 스토리 전개, 소설식 설명구조 등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처럼 동서양의 만화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서양독자들은 처음 망가를 접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동양식 이야기 관습에 당황하게 된다. 예를 들어 동양 특유의 느긋한 스토리 구조와 속도조절을 위해 사용되는 감성적 이미지들, 말없는 칸들은 서양 독자들에게 낯설고 어색하며, 감정을 나타내는 많은 기호들과 소리와 움직임뿐 아니라 상황과 심리적 상태까지 표현하고 있는 수많은 그림문자들은 또 하나의 전혀 다른 표현매체로서 받아들여진다.

한국 만화 생태계의 기본 구조는 '창작-제작-유통-소비'의 흐름을 가진다. 창작 단계는 개인 창작, 공동 창작, 수입 라이선스 만화로 나뉘며 제작 단계는 온라인과 만화전문 출판사, 일반 출판사, 대여점용 출판사 등의 출판으로 나뉜다. 이 밖에도 신문, 동인지 시장, 모바일 등도 제작 단계에 포함된다. 만화 산업은 다양한 제작 단계와 패키징 과정을 거쳐서 제작되며, 하나의 콘텐츠가 동시다발적으로 가치사슬을 만들며 활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 콘텐츠는 기획에서부터 다수의 가치 사슬에서 활용될 것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다.

온라인이라 하면 보통 웹툰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웹툰 작가들은 개인창작 위주로 활동한다. 혼자 작업을 하기도 하지만, 다른 작가와 함께 작업을 하는 경우 또한 있다. 웹툰은 대개 규모가 큰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 연재가 된다. 포털 사이트에 연재가 되기 위해서 작가들은 수많은 노력을 통해 정식 연재를 하게 된다. 웹툰은 만화 연재 수에 따라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다. 포털 사이트와 계약을 맺어 일정한 원고료를 받고 포털 사이트에서 무료로 제공한다. 포털 사이트 방문 횟수를 늘리기 위한 포털 사이트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네이버'라는 포털 사이트가 있다. 네이버에서는 무료로 이용자들에게 요일별 웹툰을 제공한다. 요일당 평균 24개 정도의 웹툰을 제공하며 작가들과 계약을 맺어 원고료를 제공하고 웹툰을 무로료 제공하고있다.

신문 만화는 전통적으로 '시사만화'의 영역이었다. 1개 신문에 적어도 네 칸 만화와 한 칸 만화가 동시에 실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한겨레신문》, 《중앙일보》 등에서 네 칸 만화 지면을 폐지할 정도로 시사만화의 창작·제작환경은 점차 악화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으로 신문의 판매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주로 대여점용 성인 만화를 그리는 작가들과 협조해 적은 비용 혹은 무료로 만화를 연재하게 되었다.




#Article 200: 인터넷 프로토콜 (192 words)


인터넷 프로토콜(IP, Internet Protocol)은 송신 호스트와 수신 호스트가 패킷 교환 네트워크(패킷 스위칭 네트워크, Packet Switching Network)에서 정보를 주고받는 데 사용하는 정보 위주의 규약(프로토콜, Protocol)이며, OSI 네트워크 계층에서 호스트의 주소지정과 패킷 분할 및 조립 기능을 담당한다. 줄여서 아이피(IP)라고도 한다.

IP의 정보는 패킷 혹은 데이터그램이라고 하는 덩어리로 나뉘어 전송된다. IP에서는 이전에 통신한 적 없는 호스트에 패킷을 보낼 때 경로 설정이 필요없다.

IP는 비신뢰성(unreliability)과 비연결성(connectionlessness)이 특징이다. 비신뢰성은 흐름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보낸 정보가 제대로 갔는지 보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전송과정에서 패킷이 손상될 수도 있고, 같은 호스트에서 전송한 패킷의 순서가 뒤죽박죽이 될 수도 있고, 같은 패킷이 두 번 전송될 수도 있으며, 아예 패킷이 사라질 수도 있다. 패킷 전송과 정확한 순서를 보장하려면 TCP 프로토콜과 같은 IP의 상위 프로토콜을 이용해야 한다.

현재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표준 프로토콜은 인터넷 프로토콜의 4번째 판인 IPv4이다. 그러나 IPv4는 주소공간 고갈 문제를 겪고 있어 조만간 6번째 판인 IPv6가 대중화될 것으로 보인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7, OS X, 리눅스 등 현재 널리 쓰이고 있는 대부분의 운영 체제는 IPv6 프로토콜을 지원한다.

다음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IP 주소 (ip address)체계이다.

관련 버전은 현재 IPv4와 IPv6가 있다.

IP 버전 0부터 3까지는 실험적인 버전으로, 1977년부터 1979년까지 사용되었다. 다음의 IEN(Internet Experiment Note) 문서들은 현대 버전의 IPv4 이전의 인터넷 프로토콜 버전을 기술한다:




#Article 201: 페르마 소정리 (268 words)


수론에서, 페르마 소정리(Fermat小定理, )는 어떤 수가 소수일 간단한 필요 조건에 대한 정리이다. 추상적으로, 소수 크기의 유한체 위의 프로베니우스 사상이 항등 함수임을 의미한다.

가 소수이고, 가 정수라고 하자. 페르마의 소정리에 따르면, 법 에서 와 는 서로 합동이다.

위 식은 일 때 자명하게 성립한다. 만약 일 경우, 양변을 약분하여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이는 모든 소수가 만족시키는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다. 즉, 페르마의 소정리에 나타난 합동식을 만족하는 수가 반드시 소수가 되지는 않는다.

를 만족하면서 소수가 아닌 를, 를 밑수로 하는  카마이클 수라고 부른다.

피에르 드 페르마의 이름이 붙어 있지만, 페르마는 이 정리를 언급했을 뿐, 정확한 증명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현재 기록상 남아 있는 증명 가운데 최초는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의 것이다.

페르마의 소정리를 증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쉬운 방법으로 합동식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그 증명 방법을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와 서로소인 소수 에 대해 인 개의 수를 살펴보자. 이 수들을 로 나눴을 때 나오는 나머지는 모두 다르다.

 또 인 에 대해  역시 의 배수가 아니다. 이에 대한 증명은 위와 같으므로 생략한다.
 이제 집합

를 정의하자. 이는 첫 번째에 가정한 개의 수들의 집합이다. 여기서 집합

인데, 와 서로소인 수를 로 나눌 때 생기는 모든 나머지들의 집합이다. 처음에 했던 증명에 의해, 와 의 크기는 같다.

 따라서,

이다. 양변을 로 나누면,

을 얻는다.

이 정리는 오일러 파이 함수를 이용하여, 소수가 아닌 정수 n에 대해서까지 다음과 같이 일반화할 수 있다. n이 자연수, a가 n과 서로소인 자연수일 때,

이 성립한다. 식에서 는 오일러 파이 함수를 나타낸다.

유한체 이론에서 다항식의 나눗셈에 관련된 결과를 통해 페르마의 소정리를 일반화할 수도 있다.
표수가 인 유한체 에 대하여, 다음 두 명제가 성립한다.

여기서, 뫼비우스 반전 공식에 따라 C(p, k)를 얻는 일반적인 공식을 구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는 뫼비우스 함수이다.




#Article 202: 아키라 (만화) (548 words)


《AKIRA》()(국내수입명: 폭풍소년)는 오토모 가쓰히로가 창작한 일본의 만화이다. 고단샤가 발행한 만화 잡지 주간 영 매거진에서 연재되었다. 애니메이션 영화화(1988년) 및 게임화도 되었다.

근미래의 황폐한 세계를 그린 SF 작품으로, 치밀하고 현실적인 묘사나 연출 등이 화제가 되었으며, 만화와 영화 모두 대히트함과 동시에 혁신적인 기술을 가져왔다. 이후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 작품들에 준 영향도 크다. 원작인 만화판은 '만화계의 두 번째 혁명'이라고도 일컬어진다(첫 번째는 물론, 데즈카 오사무). 제목인 AKIRA는 오토모 자신이 팬으로 삼고 있으며 큰 영향을 받은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에서 유래한다. 붓으로 쓴 제목은 만화가인 히라타 히로시가 쓴 것이다.

단행본은 주간지와 같은 대형판 사이즈와 절단면에 채색을 하는 등, 이목을 끄는 디자인으로 되어 있지만, 프랑스의 만화가 뫼비우스의 영향을 받은 작자의 치밀한 묘사로서는 이 판으로 출판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일본 국외에서는 아메리칸 코믹의 스태프가 채색한 외국어판이 유통되었으며, 이것을 일본어로 역번역한 것이 《국제판 AKIRA》 및 《총천연색 AKIRA》라는 제목으로 일본에 발매됐다.

영화는 제작비에 10억 엔을 건 대규모 작품으로, 치밀한 작화나 음악, 파괴 영상 등으로 당시의 애니메이션계에 혁신을 가져왔다. 제작 기법으로 애프터 레코딩가 아닌 프리 스코어링을 채용했다. 또, 통상적으로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에서 인물의 입의 움직임은 3종류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모음의 수와 같은 5종류로 그려졌다. 일본에만 그치지 않고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았으며, 일본 애니메이션의 재평가나 수출의 증가에 공헌했다. 비디오화가 될 때에 많은 컷을 손보거나, 음악과 관련해서도 손을 보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진화를 계속하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본 작품은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서양의 대중시장으로 폭발적으로 넓힌 마일스톤이 되어 해외에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 2009년 여름에 공개할 예정인 실사영화 제작이 계획되어 있다. 제작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감독은 로리 로빈슨, 워너브라더스 배급이다.

하지만 원작이 워낙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이 많은 탓에 원작의 분위기를 그대로 가져오기란 쉽지가 않았고 각본마저 제작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다가 2013년 결국 백지화되고 말았다

데쓰오는 다카시와 함께 연구 기관에 끌려가게 되고 거기서 초능력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극장판과 원작에서는 인물의 설정에 다소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양자의 공통 사항을 기술하고, 특히 극장판과 원작에서 다른 부분에 관해서는 그 점을 설명한다.

영 매거진에서 1982년 12월 20일호부터 1990년 6월 25일호에 걸쳐 연재되던 도중 애니메이션 제작으로 인해 일시 중단됐다. 전 120화.

제작비 약 10억 엔. 총 셀화 매수 약 15만 장.

본작에서 AKIRA(28호)가 철인 28호의 오마주인 것은 분명하다. 또, 이것은 주인공인 가네다(쇼타콘의 어원인 가네다 쇼타로)나 데쓰오(철인을 비꼬고 있음)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본 작품은 일본에서도 1960 ~ 70년대에 유행한 서브컬처인 사이키델릭 문화(마약 문화・히피 문화와도 관계 있음)의 영향이 작중에 있다고 보인다. 이것은 주인공이나 크라운 등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흥분제(이것은 가네다의 자켓의 등에 그려진 캡슐에도 관계 있음), 더욱이 초능력자가 복용하는 치사량에 달하는 위험한 약물 등의 관련성을 밝혀내는 서브컬처 연구자도 적지 않다.

작중에서 주인공인 가네다가 다루는 '가네다의 바이크'를 시작으로, 다른 모든 개성적인 바이크는 카울부터 프레임 레이아웃에 이르기까지 세미 이지 오더 시스템(semi-easy order system)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차륜 안에 설치된 상온 초전도 모터를 통해 양륜구동을 실현하고, 전력은 가솔린 엔진에 의한 발전(영화 앞부분에서 데쓰오가 제멋대로 찾아왔고, 원작에서는 가네다가 약을 연료 탱크에 숨기고 있음). 또, 보디의 이곳저곳에 붙여진 스티커는, 1980년대 회고 붐에 의한 유행인 것 같다.

하지만 조커가 타는 대형 아메리칸은 현재와 같은 가솔린 엔진의 후륜구동차라는 설정이며(그의 취미), 큰 머플러가 몇 개씩이나 나와 있다.

단행본 4권이 간행된 후에 영화판의 제작이 개시됐으며, 원작 만화의 연재는 장기간 휴재되었다. 5권의 간행까지 실로 3년간을 필요로 했지만, 영화의 세계적인 히트로 발매된 국제판 AKIRA(해외에서 발매된 원작 영어판의 역수입)에는 당시 일본에서는 미발매된 5권의 전반에 상당하는 이야기가 게재되어 있었다. 국제판은 1권당 수록화가 일본의 것보다 적었는데, 일본에서 5권으로 발매되기에는 부족한 화수라도 간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 4권의 권말에는 5권의 광고가 게재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5권이 최종권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연재 재개 후에는 장기에 걸쳐 정력적으로 연재가 계속되었으며, 5권은 사전 정도의 두께가 되는 게 아닐까 예상되었지만, 결국 5권과 6권으로 나뉘면서, 6권이 최종권이 되었다.




#Article 203: 일본의 애니메이션 (2302 words)


아니메(), 애니메 또는 재패니메이션()은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통틀어 일컫는다. 주로 기존에 연재되는 동명의 인기있는 만화를 원작으로 제작되며, 장면의 대부분은 셀 애니메이션 방식이 사용된다. ' 아니메 '는 영어 단어 'Animation (애니메이션)'이 변형된 형태이다. 다른 언어에서, 이 용어는 일본에서 온 애니메이션이나 다채로운 그림, 활기찬 캐릭터와 판타지적 주제를 가진 일본풍의 애니메이션 스타일을 가진 애니메이션을 의미한다. 초기 일본의 상업적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 이후에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은 점차적으로 증가했다. 캐릭터풍의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경우 1960년대에 테즈카 오사무의 작품에서 나왔으며, 20세기 후반에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거대한 국내외 시청자를 만들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의 경우 극장에서, 텔레비전 방송으로, 직접 홈 미디어로, 인터넷으로 배포되었고, 다양한 대중의 수요를 잡기 위해 다양한 장르로 나뉘었다. 아니메는 원래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Animation)을 지칭하는 약자였지만, 일본의 애니메이션 산업이 전 세계 애니메이션 중 60% 이상을 제작할 정도로 거대해진 오늘날에 '아니메'는 각국의 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널리 쓰여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어권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  또는 줄여서  일본 애니  ,  일애니  라고 하고 있어 아니메란 용어의 비중이 낮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새로 나온 기술에 반응하여 시간에 적응해 온 독특한 제작 방법과 기술을 이용한 다양한 예술의 형태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은 움직임에는 초점을 덜 맞추고, 패닝과, 줌. 앵글 샷을 비롯한 카메라 효과의 사용과 더불어 주위 환경의 사실성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다양한 예술 형태가 사용되었으며, 강조된 감정 표현이나 현실적인 크기의 눈을 포함하여, 등장 인물의 조화와 특징은 꽤 다양하다.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430여 회사가 있는데 그 중 유명 회사는 스튜디오 지브리, 가이낙스, 토에이 애니메이션 등이 있다. 국내 시장을 나눠먹고 있기는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DVD 판매량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외국어 더빙이 증가함에 따라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어서 일본 밖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 많아지기는 했지만, 팬과 산업계 모두 이를 단지 일본 애니메이션에 영향을 받은 애니메이션으로 정의할 뿐이다.

현재는 일본 아니메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라는 평이 주로 작품성측면에서 많이 나돌고 있지만 해외수익성 면에서는 어느때보다 전성기이다. 방송영상컨텐츠 수출액에서 일본 아니메는 'k-pop'에 조금 밀리지만 10,13년 때보다 17년 현재 많이 따라잡았고 특히 'k-pop'은 일본을 필두로 주로 아시아에서 수익이 90%이상 북미, 유럽은 10%도 채 되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일본 아니메는 북미, 유럽 수익이 35%가량 될 정도로 세계적 범용성 측면에서는 'k-pop' 보다 크게 앞서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탄생 배경은 191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당시 일본은 세계대전 특수를 맞이해 경제 부흥을 맞아 해외 문화를 탐닉하던 시대였다. 특히 영화는 대중오락으로 정착되며 영화 스타가 등장하던 시기였고, 닛카쓰, 덴카쓰 등의 영화사들도 설립되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이제 막 제작되기 시작했던 미국 (존 랜덜프 브레이)과 프랑스 (에밀 콜)의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일본에도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시모카와 오텐, 고치 준이치, 기타야마 세이타로의 삼인방은 영화사들로부터 제작 의뢰를 받아 해외 애니메이션 작품을 접하고 분석, 기법을 연구한 뒤 1916년부터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1917년 1월 시모카와 오텐은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인 《문지기 이모카와 무쿠조 이야기》를 제작하였는데을 개발하게 되었다. 기타야마 세이타로는 1917년 5월 《원숭이와 게의 전투》를, 고치 준이치도 6월 《하나와 헤코나이 명검 이야기》를 제작하였다. 이 세 작품은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들로 항상 언급된다. 기타야마 세이타로의 경우 일본에서 최초의 애니메이션 독립 스튜디오인 기타야마 영화 제작소를 설립하기까지 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설비가 파괴되면서 제작을 중단한다.

관동대지진 직후 일본 애니메이션은 공백기를 맞았지만, 위기를 딛고 발전을 계속하였다. 기타야마 영화제작소의 애니메이션 기술자 출신이었던 야마모토 사나에는 1925년 야마모토 만화제작소를 설립, 《노인을 버리는 산》을 시작으로 정부 홍보 애니메이션들을 제작하였고, 요코하마 시네마 상회 출신의 무라타 야스지는 1926년 첫 작품 《기린의 목은 왜 긴가?》 이후 '무타라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컷 아웃 방식의 교육용 애니메이션들을 제작, 전쟁 전 최다 작품을 만들어내 달인으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오후지 노후로는 1929년 일본 최초의 발성 애니메이션 《검은 고양이》를 제작하였으며, 마사오카 겐조는 1932년 셀 방식을 이용해 제작된 본격적인 발성 애니메이션인 《힘과 여자세상》으로 기술을 한층 진보시켰으며, 수년 뒤 《거미와 튤립》을 제작해 애니메이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와중에 1927년 단편 《증기선 윌리》를 시작으로 하는 월트 디즈니의 작품을 비롯한 해외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1930년부터 일본에 연이어 수입된다. 이제 막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일본 애니업계는 수입 작품에 비해 비싼 제작비, 엉성한 움직임과 스토리 등으로 경쟁력이 낮았고, 각 영화사들은 흥행 실패를 예감하여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손을 떼었다. 극장에서 물러난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정부 주관의 교육·홍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마침 일본 사회는 군부독재 시절로 서서히 접어들며 1931년 중일 전쟁 발발, 1933년 국제연맹 탈퇴, 그리고 1941년 진주만 공습에 이르렀고, 정부는 이에 맞춰 전의를 고조시키기 위한 선전 홍보 애니메이션들을 여럿 의뢰 제작하였는데 대표적으로는 세오 미쓰요의 《모모타로의 바다독수리》, 《모모타로·바다의 신병》, 오후지 노부로의 《바다의 사나운 독수리》, 야마모토 사나에의 《스파이 격멸》 등이 있었다. 이들 작품은 진주만 공습을 소재로 하는 등 군국주의 색채가 짙었지만, 1945년 일본 패전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정책 홍보를 위해 애니메이션을 활용하려 했으며, 《모모타로·바다의 신병》을 비롯한 다수의 작품은 전후 애니메이터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GHQ는 신속한 점령정책을 집행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홍보를 활용하고자 했고, 이에 따라 1945년 가을 야마모토 사나에, 무라타 야스지, 마사오 겐지 등을 중심으로 100여명의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소집되어 신일본동화사가 설립되었다. 마사오카 겐조는 봄꽃의 평화를 강조하는 《벚꽃》(1946)을 제작하였으나 극장가에 공개되지는 않았고, 《버려진 고양이 도라짱》 (1947) 등을 제작하였지만 GHQ가 바라던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진척되자 디즈니의 역할을 염두에 두었던 GHQ도 이내 포기, 신일본동화사는 1947년에 해산되었다. 신일본동화사의 세 사람은 같은해 일본만화영화사를 설립하나 무라타 야스지만 남고, 무라타는 세오 미쓰요를 불러들여 《임금님의 꼬리》 (1949)를 제작하나 배급사 도호에서 내용 문제를 이유로 비공개 처리, 일본만화영화사는 큰 투자금을 보전하지 못하여 파산하였다. 이외에도 전쟁 전에 활약하던 작가 대부분은 패전의 충격과 사회격변에 순응하지 못하고 애니메이션 업계를 떠나던 실정이었다.

야마모토 사나에, 마사오카 겐조는 도호의 투자를 받아 '일본동화'를 설립하였는데 여기에는 모리 야스지, 후쿠이 에이치 등의 인사도 들어와 있었다. 이후 도호의 관련사를 흡수해 투자를 늘려 회사명을 니치도 (日動) 영화로 바꾸고, 1995년에는 도에이의 위탁으로 단편 《흥겨운 바이올린》을 제작한 것을 계기로 도에이가 니치도영화를 매입, 도에이 교육영화 소속으로 들어갔다. 이후 동양의 디즈니를 목표로 삼으며 1956년 7월 '도에이동화'라는 이름으로 새출발하였다. 도에이동화는 기존의 가내수공업 방식을 타파하고 미국식 분업 제작시스템을 차용, 대형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설립하였다. 1957년 13분 분량의 첫 작품 《새끼 고양이의 낙서》를 발표한 뒤, 1958년 10월에는 일본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인 《백사전》을 개봉하였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영상으로 인기를 끌며 절찬리에 상영된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를 비롯한 수많은 애니메이터 지망생을 낳게 되었다. 이후로도 도에이는 《원숭이 소년 사스케》 (1959), 《서유기》 (1960) 등을 공개하였다.

한편 1952년 〈철완 아톰〉을 연재하며 인기를 끌던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는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두다, 도에이동화 측에서 자신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서유기》의 제작협력 의뢰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애니메이션의 기본을 배웠다. 1961년 도에이동화에서 퇴사한 데즈카는 사카모토 유사쿠, 요코야마 다카이치 등과 함께 도쿄 후지미다이에 '데즈카 오사무 프로덕션'을 설립하였다. 실험작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 (1962)을 계기로 데즈카 프로덕션은 '무시 프로덕션'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본이 고도경제성장기에 접어들던 1950년대부터는 애니메이션 환경의 변화도 이뤄졌다. 1953년 일본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이 개시되고, 1959년에는 주간 단위의 만화잡지들이 창간되어 어린이들은 매주 만화를 볼 수 있었다.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를 제작한 무시 프로덕션은 앞으로의 방향을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으로 설정하고, 철저한 상업적 작품을 기획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가의 제작비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애니메이션 표현을 생략하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방식을 도입하고, 에피소드 방식의 미국 애니와는 다른 '재미있으면서 복잡한 스토리', 즉 이야기와 세계관에 충실한 작품을 대상으로 삼았다. 무시 프로덕션의 첫 정기작품은 탄탄한 이야기와 세계관을 쌓아가고 있던 〈철완 아톰〉으로 결정되었고, 1년 간의 제작 끝에 1963년 1월 1일 저녁 6시 15분, 후지테레비에서 《철완 아톰》이 처음으로 텔레비전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철완 아톰은 당시 엄청난 시청률로 인기를 구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캐릭터 상품 권리, 최초의 팬클럽 설정 등 여러가지 면에서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철완 아톰》의 성공에 주목한 TV 방송국과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TV 애니메이션 제작에 속속 참가하였다. TCJ 스튜디오는 1963년 한 해에 《신선부락》, 《철인 28호》, 《에이트맨》을 제작해 방영 개시하였는데 모두 공상과학 장르에 속해 SF 작가가 각본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도에이동화는  《늑대소년 켄》을 제작하였지만 그간 장편애니에 집중한 탓에 비효율적인 제작방식이라는 문제를 겪기도 했다. 1964년 데즈카 오사무는 최초의 컬러 TV 애니메이션을 기획하였는데 이미 방영되던 《철완 아톰》이 첫 대상이었으며, 그해 가을에는 《정글 대제》를 풀 컬러 애니메이션화하였다.

기본적으로 판매 구조에 따라 결정된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다양한 화풍, 애니메이션 기법, 생산, 제작에 있어서 다른 형태의 애니메이션과 다른 형태를 띈다. 시각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은 원화가, 감독, 원작가, 스튜디오에 따라 그림체가 상당히 다르다. 어느 한 그림체가 우세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애니메이션 기법과 캐릭터 디자인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일반적 애니메이션 제작과 마찬가지로 콘티 작성, 목소리 녹음, 캐릭터 디자인, 셀 제작 등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1990년대 이후 애니메이터들은 점차적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의 효율성을 올리기 위해서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적극 사용하기 시작했다. 오후지 노부로와 같은 예술가들은 일본 애니메이션 초기를 개척한 사람으로, 실험적이었고 흑판에 그린 그림, 종이를 잘라 만든 스탑 모션 애니메이션, 실루엣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셀 애니메이션은 점차적으로 유명해져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21세기 들어서는 모치나가 타다히토, 카와모토 키하치로, 무라타 토모야스가 만든 스탑 모션 인형극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독립 단편 영화를 제외하고 다른 애니메이션 기법들은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컴퓨터는 1990년대를 기점으로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에 포함되게 되었으며,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컴퓨터로 만들어낸 이미지를 셀 애니메이션과 섞은 공각기동대, 모노노케 히메와 같은 작품이 있다. 셀을 제작하는 주요 회사인 후지필름은 셀 생산을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산업 전반에 셀을 모아야 한다는 충격을 주었고 서둘러서 디지털 작화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디지털 시기가 오기 전에,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pose to pose approach를 사용하는 전통적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추세는 비싼 원화를 덜 사용하고 중간에 동화를 많이 끼워넣는 기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기존의 사용했던 장면을 재사용하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의 선구자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움직임에 중점을 두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은 프레임을 조금 줄여서 움직임이 조금 부자연스러운 단점을 정성을 들인 작화로 극복하는 등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한다. 그러한 기법은 납품 기한을 맞추기 위해 사용될 뿐만 아니라 예술적 장치의 개념으로서도 사용된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장면은 삼차원 뷰를 달성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배경은 작중 분위기를 연출하는 도구이다. 배경은 항상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과 같이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에서 배경을 따 오는 경우도 있다. Oppliger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모든 스타급 캐스팅을 합쳐서 매우 강한 감동을 자아내는 드문 매체라고 말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화적 효과는 미국 애니메이션과 차별화된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마치 카메라가 찍은 것과 같이, 패닝, 줌, 원거리/단거리 샷과 같이 영화같은 샷을 사용하는데, 현실에서는 만들기 까다로운 훨씬 동적인 샷을 사용하기도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우, 대사 녹음을 먼저 하고 동화 작업을 하는 북미 애니메이션과 달리 동화 작업을 끝낸 다음에 대사를 녹음한다. 따라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입 모양과 대사가 맞지 않는 오류도 생길 수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신체의 비례는 현실계의 신체 비례를 정확하게 반영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제작자는 머리 높이를 비례의 기본적인 단위로 생각한다. 머리 길이는 다양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키는 7등신에서 8등신 정도이다. 캐릭터 디자이너는 신체가 상당히 변형된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몸의 비례를 의도적으로 바꿔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 몸은 작은데 머리는 큰 균형에 맞지 않는 캐릭터가 있으며 이 경우 2등신에서 4등신 정도가 되는 경우도 있다. 짱구는 못말려 같은 애니메이션은 이러한 신체 비례를 완전히 무시해버린 예이며, 서양 애니메이션과 유사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관습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눈 크기는 매우 과장되어 있다. 눈이 큰 아니메 캐릭터는 베티 부프와 같은 초기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상당히 영향을 받은 테즈카 오사무가 눈이 상당히 큰 캐릭터를 그린 것이 시초이다. 테즈카는 일본 만화애니 역사의 중심에 있는 사람으로, 테즈카가 만든 상징적 예술 스타일과 캐릭터 디자인은 사람 감정 전체를 눈 모양을 통해서 묘사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제작자는 눈 색깔을 다양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밝은 음영, 색조, 어두운 음영을 섞어서 눈 색을 표현한다. 문화 인류학자 Matt Thorn은, 일본 애니메이터들과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들은 그러한 스타일의 눈이 다소 외국인같은 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모든 일본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눈이 다 큰 것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사실적인 눈 크기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캐릭터의 머리카락 색도 현실적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머리카락은 자연스럽지 않게 생생하고 다채로우며 독특한 스타일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머리카락의 움직임은 과장되어 있으며 머리카락의 과장된 움직임은 액션과 캐릭터의 감정을 시각적 효과로 강조하는 데에 쓰인다. Poitras는 만화 표지 일러스트의 머리카락 색을 조사했는데, 눈을 사롭잡는 그림과 다채로운 색채는 어린이용 만화에 매력적이라고 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일본 국내 시장에서 제작되기는 하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인종이나 국적은 항상 정의되는 것은 아니며,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 시리즈와 같이 의도적으로 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만화, 애니메이션 작가들은 특정한 감정과 생각을 이미 정해져 있는 표정 그림을 통해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특징은 서양 애니메이션과 다르다. 또한, 그러한 특징에는 특정한 감정과 기분을 나타내기 위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사용하는 고정된 도해법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종종 과장되어 있으며 자연스럽게 전형적인 웃음을 유발한다. 예를 들어, 일본의 전설에서 유래한 것인데, 남캐가 화를 낼 때에는 코피가 난다. 순간적으로 단순그림체가 단순해질 때도 있다. 긴장감을 표현하기 위해 땀을 그린다거나, 부끄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얼굴을 붉게 그린다거나, 집중해서 보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눈을 반짝거리게 표현하는 것 같은 다양한 시각 기호가 사용된다.

일본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의 대부분의 오프닝, 엔딩곡은 J-Pop이나 락 음악에 속해 있으며, 때때로는 유명한 밴드의 곡이 사용되기도 한다. 작중 스토리를 마음에 두고 가사를 쓰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음악 시장도 목표를 해서, 주제를 살짝만 내비치는 곡도 나타나며 아예 줄거리와 전혀 관련이 없는 곡도 나오기도 한다. 음악은 작중에서 중요한 장면을 강조하기 위해 삽입 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배경 음악은 줄거리 노선을 이어가거나, 아니면 단지 애니메이션 장면을 꾸미기 위해 사용된다. 몇몇 애니메이션의 경우 작중에 쓰인 음악을 전부 모아서 OST 앨범을 발매하기도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타겟 연령층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아동 만화, 소녀 만화, 소년 만화, 청년 만화, 여성 만화 등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소녀 만화와 소년 만화는 다양한 성별의 독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남녀 어린이 모두에게 인기가 있는 애니메이션 요소를 포함하기도 한다. 성인 애니메이션의 경우 작중 전개 속도가 느리고 줄거리 복잡성이 더 크기도 하며, 성인이 좋아할 만한 주제와 상황을 포함하고 있다. 성인 애니메이션 작품 중 일부는 일본에서 R18로 분류가 되는데, 이러한 애니메이션을 헨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조적으로, 다양한 애니메이션 장르의 하위 장르로, 성적 행위를 직접 묘사하지는 않으면서 성적인 주제나 암시가 들어가 있는 '엣치'라는 것이 있는데 전형적으로 코미디 애니메이션이나 하렘 애니메이션에 이 요소가 들어가기도 한다. 청소년 계층과 성인 계층에게 인기가 많아서 애니메이션에 판치라를 비롯한 엣치 요소를 넣는 것은 팬 서비스의 일종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분류는 다른 애니메이션의 분류와 달라서 간단한 특징으로 분류할 수 없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만화에 대해 책을 쓴 Gilles poitras는 전쟁과 평화를 전쟁 소설로 여기게 하는 것과 유사하게 '건담 0080'과 그것의 복잡한 전쟁 묘사를 거대 로봇으로 여기도록 하는 것을 비교했다. SF는 일본 애니의 주된 장르이고 테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이나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철인 28호와 같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작품도 있다. SF의 하위 장르 중에는 메카물이 잇는데 건담과 같은 작품이 있다. 다양한 판타지 장르 애니메이션 중에은 일본의 옛 이야기에서 소재를 따 온 '이누야샤'와 같이 동서양의 전통과 설화에 기반한 작품이 있고, 위그드라실이라 불리는 컴퓨터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으로 옮겨 온 스칸디나비아 여신을 묘사한 '오! 나의 여신님'이란 작품도 있다. 애니메이션의 장르는 일반적인 경우도 있는데, 드레곤 하프와 같이 판타지와 코미디가 섞인 작품, 카리오스트로의 성과 같이 범죄 애니메이션에 익살스러움을 첨가한 경우도 있다. 다른 하위 장르로는 마법소녀, 하렘, 스포츠, 무술, 문학의 애니화, 전쟁 등이 있다.

동성애를 다룬 장르도 있다. 원래 용어에는 외설적인 면이 있기는 했지만, 야오이(남성간 동성애)와 백합(여성간 동성애, 百合)는 널리 쓰이는 용어가 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동성애 관계를 다룬 작품을 설명하는 데에 쓰이기 시작했다. 2000년 이후 동성애 성향이 있는 캐릭터는 재미를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동성애 캐릭터를 진지하면서도 공감적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 일본에 서브컬쳐는 그렇게 좋은 인상이 아니다. 오타쿠 즉 '애니를 좋아하는 사람은 일본인이거나 찐따다'고 하며 놀리기 일쑤이다. 옛날 대한민국은 국가에서 만화책을 불량도서 취급하며 태우고 없애서 우리 어른들에게는 나쁘다는 인상이 박혀있어 그렇게 좋게 자리잡고 있진 않다.

역대 최고 시청률은 다음과 같다.




#Article 204: 해양학 (139 words)


해양학(海洋學, )은 바다(해양)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지질학, 물리학, 생물학, 화학 그리고 이들 각 분야의 학문을 바다와 그 주위에 적용할 공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분야를 포함한다. 해양학의 세부학문으로는 해양지질학(海洋地質學), 물리해양학(物理海洋學), 해양생물학(海洋生物學), 화학해양학(化學海洋學), 해양공학(海洋工學) 등이 있다. 해양지질학은 지구 내부의 성분, 지각의 변동, 해저퇴적물의 특성, 고기후에 대한 연구를 한다. 해양지질학은 순수 학문분야를 넘어 지진예측이나 지하자원의 분포를 분석하는 실용적인 학문에도 영향을 주는 학문분야이다. 물리해양학은 파랑역학, 해류, 해양-대기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학문분야이다. 최근 물리해양학은 공해로 인한 기후 변화에 대한 예측이 중요해짐에 따라 학문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해양생물학은 해양생물의 분포와 특성, 해양-대기의 상관관계로 인한 생물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며, 해양생물로부터 유용한 물질을 얻기 위해 연구하는 분야이다. 화학해양학은 해양의 용존 고체 및 기체와 이들 성분이 해양에 미치는 지질학적·생물학적 관련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해양공학은 석유 플랫폼, 선박, 항만 등 해양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 구조물의 건조·설계 분야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또 항해의 안전성 제고에 대한 연구가 이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Article 205: 안나 린드 (197 words)


안나 린드(, 1957년 6월 19일 ~ 2003년 9월 11일)는 스웨덴의 정치가이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환경부 장관, 1998년부터 2003년 암살당할 때까지 외교부 장관을 역임했다.

스톡홀름 태생이며, 1982년 웁살라 대학의 법학부를 졸업했다. 1998년 총선 이후에 예란 페르손 내각에서 외교부 장관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정치적 능력과 인기로 사회민주당에서 페르손의 뒤를 이을 총리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그녀는 쇠데르만란드주(Södermanland)의 주지사였던 보 홀름베리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안나 린드는 2003년 9월 10일 오후 4시 정각 직후에 스톡홀름 시내 누디스카 콤파니엣(Nordiska Kompaniet) 백화점에서 쇼핑 중 칼을 든 한 괴한에게 공격을 받아 가슴과 배, 팔 등을 찔리고 말았다.

당시 관례에 따라 경호원은 곁에 없었으며, 공격직후 카롤린스카(Karolinska)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어 9시간에 걸친 1차 수술을 받았고,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서 2차 수술에 들어가지만 다음날 아침 5시 29분 결국 사망하고 만다. 이후 암살범은 사건 현장을 빠져나갔다가 미야일로 미야일로비치가 체포되어 범행을 자백,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안나 린드는 스웨덴에서 지난 10년 동안 암살된 두 번째 정치인이며, 19세기부터 따지면 3번째이다. 전 총리 올로프 팔메도 1986년 알 수 없는 범인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린드는 생전에 스웨덴의 유로화 채택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그녀의 암살은 유로화 사용에 대한 국민투표(9월 14일)가 있기 불과 사흘 전에 일어났다. 암살 사건 이후에 유로화 도입 찬반 진영은 찬반 유세 활동을 중지했지만 국민투표는 예정대로 실시하여 스웨덴 국민은 유로화 채택을 반대하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다.




#Article 206: 브라이언 메이 (393 words)


브라이언 메이(, CBE, 1947년 7월 19일 ~ )는 영국의 음악가이자 천체물리학자이다. 록 밴드 퀸의 기타리스트로, 독특한 기타 음색과 그가 아버지와 함께 직접 만든 수제 기타 레드 스페셜로 유명하다. 그가 작곡한 히트곡으로는 〈We Will Rock You〉, 〈Tie Your Mother Down〉, 〈Who Wants To Live Forever〉, 〈Too Much Love Will Kill You〉 등이 있다.

브라이언 메이의 기타 연주는 독특한 음색을 가지고 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굳어진 그만의 기타 음색은 많은 사람들이 카피를 시도하지만 완벽히 같은 음색을 따라하는 것은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이는 다양한 종류의 기타를 연주했는데 주로 레드스페셜을 연주한다. 레드스페셜은 그가 아버지인 헤럴드 메이와 함께 디자인한 기타로, 18세기에 화로로 썼던 나무로 만들었다. 레드스페셜에 대한 그의 설명을 《Queen In Their Own Words》(믹 마이클 저, 1992)의 62페이지에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가 직접 만들었다는 그 독창성은 메이가 오묘하고 독특한 사운드 효과를 낼 수 있게 도왔다. 예를 들어 〈Procession〉이란 노래에선 오케스트라를 흉내낼 수 있었고, 〈Get Down, Make Love〉에서는 신시사이저로 착각할만한 특이한 사운드 효과를 연출했다. 또한 〈Good Company〉에선 트롬본, 피콜로등을 흉내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수제 기타와 함께 플라스틱 피크 대신에 영국의 6펜스 동전을 사용하는데, 동전이 딱딱하기 때문에 연주하면서 컨트롤하기에 더 좋다는 이유 때문이다.

메이는 어린 시절에 클리프 리처드와 더 섀도스의 팬이었는데, 이들은 메이가 거칠고 빠른 곡을 즐겨 연주하도록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퀸의 코러스에서 그는 보통 낮은 음의 배킹 보컬을 맡았다. 그리고 그가 작곡한 노래 중 〈Some Day One Day〉, 〈All Dead, All Dead〉, 〈Leaving Home Ain't Easy〉, 〈’39〉와 같은 노래에선 직접 보컬을 맡기도 했다.

브라이언 메이는 프레디 머큐리의 사후, 2개의 솔로 앨범(《Back to the Light》, 《Another World》)을 내기도 했다.

메이는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에 진학하여 물리와 수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행성간 먼지의 속도에 따른 빛의 반사에 대해 연구하였다. 1970년대 초 퀸 활동이 성공하면서 학업을 중단했다가, 2007년 10월 황도광에 대한 박사 논문(A Survey of Radial Velocities in the Zodiacal Dust Cloud)을 완성하여 2008년 5월 14일 졸업하였다.

메이는 동료 프레디 머큐리, 로저 테일러, 존 디콘과는 달리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며, 마약이나 문란한 여성 관계 등과도 거리가 멀었다. 술은 아주 가끔 마시며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맥주는 기네스, 가장 좋아하는 리큐르는 베일리스다.

그는 꽤 조용하며 내성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1980년대 후반에 자살을 기도할 정도의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고백했었다. 그 당시 그는 아내와 이혼했고, 아버지가 사망했으며, 프레디의 건강 악화로 라이브 투어까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인 헤럴드 메이가 애연가였기 때문에 메이는 담배를 싫어하며 특히 실내에서의 흡연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는 개인 홈페이지에서 담배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종종 글 중에 내비치곤 한다.

메이는 2000년 11월 18일 배우 애니타 돕슨과 재혼했으며, 그에겐 3명의 자녀가 있다.




#Article 207: 화소 (138 words)


화소(畵素) 또는 픽셀(; pictures의 축약형 pics와 element의 축약형 el, 즉 pictures element에서 유래한 혼성어)은 화면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이다.

표준 디스플레이 해상도는 크게 다음과 같다.

메가픽셀 (줄여서 MP, Mpx)은 100만 화소를 가리키며 영상의 화소 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디지털 카메라의 이미지 센서 요소의 수나 디지털 디스플레이의 디스플레이 요소의 수를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된다. 이를테면 2048x1536 센서 요소는 3.1 메가픽셀 (2048 x 1536 = 3,145,728)를 가진다는 말과 같다.

많은 디스플레이와 영상 획득 시스템들은 여러 이유로, 다른 색의 채널들을 하나의 소재에서 보여 주거나 인지할 수 없다. 따라서 화소 그리드는 표시되는 단일의 색 영역이나, 일정한 거리에서 보이는 느낄 수 있는 색으로 나뉘게 된다.

컴퓨터 화면에서는 화소 단위보다 세세하게 표현할 수 없다. 벡터가 아닌 비트맵 방식의 사진이나 그림을 확대하면 거칠게 각져서 두드러진 화소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줄이기 위해, 화소의 모서리를 주변의 색과 비슷하게 바꾸어 색을 매끄럽게 바꾸는 것을 앤티에일리어싱(anti-aliasing)이라고 한다.




#Article 208: 천문학 (3667 words)


천문학(天文學, ) 또는 천체학은 별이나 행성, 혜성, 은하와 같은 천체와, 지구 대기의 바깥쪽으로부터 비롯된 현상(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의 한 분야이다. 현재 민간에서는 전래되어 오는 몇 개의 별자리 이름이나 그의 얽힌 전설, 또는 몇 개의 별의 이름이나 미리내라고 하는 은하수에 대한 고유명들을 볼수 있다. 이는 한국에도 중국의 천문사상과는 관련이 없는 특유한 천문학적인 지식이 발달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볼수있다. 우주의 시작 및 진화, 천체의 운동, 물리, 화학, 기상, 진화 등을 그 연구 대상으로 한다.

천문학은 인간이 하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면서 가장 일찍 태동한 학문 중의 하나이다. 선사 시대의 여러 문명들은 피라미드, 스톤헨지 같은 천문학적 유물들을 남겼으며, 바빌론, 그리스, 중국, 인도, 이란, 마야문명 같은 동서양의 초기 문명들은 밤하늘에 관한 많은 관측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망원경이 발명됨으로써 천문학은 현대 과학으로 발전을 하였다. 역사적으로 천문학은 측성학, 역법, 천체 항법, 그리고 심지어 점성술까지 수많은 분야들을 포함했었는데, 현대의 천문학은 물리학, 화학, 공학 등을 이용한다. 중력파를 측정한 LIGO나 허블 우주망원경, 지구스케일로 분포하여 아주 큰 하나처럼 작동하는 전파 망원경, 웹스터 망원경  등 우주를 관측하는 장비 제작은 공학적으로 도전적인 일이다. 또한 천체의 움직임에서 가장 비중이 큰 힘은 중력이므로 일반상대론을 많이 이용하며, 별의 핵융합, 중성자별, 블랙홀, 퀘이사등등의 연구에는 물리학과 화학의 여러 분야를 쓰고 있다.

이 두 분야는 상호 보완적이며, 이론 천문학은 관측 결과를 설명하는 틀을 제공하고, 관측 천문학은 이론 결과를 확증해 주는 역할을 한다.

천문학은 여러 자연과학 분야 중 아마추어들의 공헌이 아직도 큰 분야 중의 하나이다. 아마추어 천문학자들은 특히 혜성·소행성·초신성 같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현상()들을 발견하고 관측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다.

천문학()은 점성술()과 혼동되어서 안된다. 비록 점성술은 천문학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현재는 완전히 다른 분야이다. 점성술은 천체들의 하늘에서의 위치가 인간의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신념체계로서, 자연과학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천문학의 영어 낱말 astronomy은 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astron ()과 법칙, 문화를 뜻하는 nomos ()에서 유래했는데, 문자 그대로 별의 법칙(또는 별의 문화)를 의미한다. 천문학은 점성술학(인간의 사건이 천체의 위치와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믿음 체계)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두 분야가 공통된 근원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제 완전히 구별된다.

일반적으로 천문학()과 천체물리학()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엄밀한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천문학은 지구 대기 밖의 물체들의 물리·화학적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며 천체물리학은 천문학의 한 분야로서 천체 및 천문현상의 물리적, 운동학적 특성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한편, 천문학 개론서인 물리적인 우주(The Physical Universe)에서처럼 천문학은 우주·천체·천문현상을 정성적으로 기술하는 분야를,

그러나 측성학 같이 전통적인 천문학에 가까운 분야도 있는 반면, 대부분의 현대 천문학 연구는 물리와 관련된 주제를 다루므로, 천문학은 실제로는 천체 물리학으로 불릴 수 있다. 여러 대학이나 연구소는 주로 역사적인 이유나, 구성원들의 가지고 있는 학위 등에 따라서 종종 천문학과나 천체물리학과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예를들어 천문학과가 역사적으로 물리학과와 같이 붙어 있었다면, 주로 천체물리학이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된다. 저명한 천문학 저널로는 유럽의 천문학과 천체물리학()과 미국의 천문학 및 천체물리학 저널(), 천문학 저널()이 있다.

천문학은 인간이 하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면서 동·서양의 양쪽에서 가장 일찍 태동한 학문 중의 하나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농사와 날씨 예견 그리고 해양, 지리 관측과 측량이 그 주요 동기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스톤헨지처럼 천문학적 목적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유적이 건설되기도 했다. 제사 같은 종교적 목적 외에도 이러한 천문대들은 1년의 길이를 재거나, 매해 일정한 시기에 농사를 짓고, 수확하기 위해 하늘을 관측하는데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에는 천문관측은 높은 건물 같은 곳에서 맨 눈으로 이루어졌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특히 메소포타미아, 중국, 이집트, 그리스, 인도, 마야 문명 등에서 천문대가 만들어졌고, 우주의 본질에 탐구가 시작되었다. 초기 천문학은 오늘날에는 측성학으로 알려진, 하늘에서 별과 행성들의 위치를 측정하는 것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러한 관측으로부터, 행성의 운동, 태양, 달, 지구의 본질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당시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과 달은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다고 믿어졌다. 이를 지구중심설, 천동설 또는 프톨레마이오스 모형이라고 부른다.

역사적으로 특히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는 바빌론에서 수학·과학적 천문학이 시작된 것이다. 예를 들어, 바빌론 천문학자들은 월식이 사로스라는 주기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바빌론 천문학자들은 이 후 다른 문명에서 발달할 천문학적 전통의 기반을 닦았다.

바빌론 이후의 천문학에서의 중요한 발전은 고대 그리스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 천문학은 천문 현상에 대해 이성적이고 물리적인 답을 구하려 했다는 특징이 있었다.
기원전 3세기에는 그리스의 아리스타르코스가 지구의 크기를 계산하였고, 달과 태양까지의 상대적 거리를 측정하였다. 한편 그는 처음으로 지동설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2세기에는 히파르쿠스가 세차를 발견하였고 달의 크기와 거리를 계산하였으며, 어스트로랩()이라고 불리는 천문기구를 발명하였다.
히파르쿠스는 또한 방대한 1020개 별의 목록을 작성했으며, 북반구의 대부분의 별자리는 이러한 그리스 천문학에서 유래했다.
반면에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을 주장하였고, 당시의 천문학을 집대성한〈알마게스트〉를 남겼다. 천동설은 기독교의 교리에 더 부합하였으므로, 중세에 들어서는 이 책은 천문학에서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받아들여졌고, 코페르니쿠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천동설이 널리 믿어지게 된다.

다른 자연과학 분야와 마찬가지로 천문학도 중세 유럽에서는 13세기까지 거의 정체 되었지만, 이슬람과 다른 지역에서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약 9세기 초에는 이슬람 지역의 최초의 천문대가 등장했다.

역사상 기록된 가장 밝은 초신성인 SN 1006가 이집트 출신 아랍 천문학자인 과 중국의 천문학자들에 의해 1006년에 관측되었다. 이슬람 세계에서 천문학에 많은 공헌을 한 유명한 천문학자로는 , , , , 알비루니, , 등과 ,  천문대의 천문학자들이 있다. 이 당시의 아랍 천문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는 많은 (예를들어, 베가, 알골)을 도입하였다.
또한 그레이트 짐바브웨와 팀북투의 유적들도
과거에 천문대를 포함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사하라 남쪽의 아프리카에서도 식민지 시대 이전에 천문학 관측이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르네상스 기간에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설을 제안했으며, 이는 갈릴레이와 케플러에 의해 좀 더 확장되고 발전되었다. 갈릴레이는 처음으로 천문학에 망원경을 도입하였다. 케플러는 마침내 행성들이 태양을 초점에 놓는 타원궤도를 공전하는 정확한 태양계 모형을 고안해 냈지만, 행성들이 타원 궤도를 그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알지 못했다. 이는 마침내 뉴턴이 천체역학과 중력의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뉴턴은 또한 새로운 방식의 반사 망원경을 고안하기도 했다.

망원경의 크기과 성능이 향상되면서 많은 천문학적 발견들이 이루어졌다. 프랑스 천문학자 라카유에 의해 방대한 별의 목록이 만들어졌으며, 허셜은 방대한 성운·성단목록을 제작했고, 1781년에는 처음으로 새로운 행성인 천왕성을 발견하게 된다. 1838년에는 베셀이 백조자리 61별의 연주시차를 측정함으로써 처음으로 별까지의 거리를 측정하였다.

분광학과 사진술 같은 새로운 기술의 발전으로 천문학에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프라운호퍼는 1814–15년에 태양의 스펙트럼에서 약 600여개의 어두운 띠를 발견하였는데, 이는 1859년에 키르히호프에 의해 각기 다른 원소들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 밝혀졌다. 분광학을 다른 별들에 적용함으로써, 별들이 태양과 같은 천체이며, 다만 온도, 질량, 크기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이 정립되었다.

현대 천문학은 또한 펄사, 퀘이사, 블레이져, 전파은하 같이 특이한 천체들을 발견하였고, 이러한 관측들은 이를 중성자별·블랙홀로 설명하는 이론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허블의 법칙, 우주의 원소 함량 등의 관측이 지지하는 대폭발 이론의 등장으로, 물리적 우주론은 20세기 들어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우주 망원경의 발전으로 지구 대기에 흡수되어서 그동안 관측 할 수 없었던 전자기파의 영역을 통한 관측이 가능하게 되었다.잘못알고 있는데,빅뱅 이론을 말하기 전에,천동설과 지동설의 뜻을 알아두어야 한다.

천문학에서의 모든 정보는 주로 천체로부터의 가시광 영역의 빛, 또는 일반적으로 다른 파장대의 전자기파를 감지하고 분석함으로써 얻어진다. 관측천문학은 전자기파의 파장대별로 나눌 수 있다. 지상에서 관측이 가능한 파장대의 빛도 있지만 어떤 영역대는 높은 고도의 지역에서나 또는 우주에서만 가능하다.

전파천문학은 약 1mm보다 긴 파장대의 전자기파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전파천문학은 관측천문학의 다른 분야와는 달리 관측된 전파를 개개의 광자로 다루기보다는 파동으로 다룬다. 그러므로 짧은 파장 영역의 전자기파와 달리, 전파의 세기(amplitude)뿐만아나라 위상()을 측정하는 데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어떤 전파는 열적 발산의 형태로 천체에 의해 생성되기도 하지만, 지구상에서 관측 가능한 대부분의 전파는 싱크로트론 복사의 형태이다. (싱크로트론 복사는 전자가 자기장 주변에서 진동할 때 생성된다.

적외선천문학은 적외선 영역대(가시광의 붉은색 빛보다 파장이 긴 대역)의 빛을 감지하고 분석하는 분야이다. 근적외선(1-3μm)을 제외하고는, 적외선 영역의 빛은 대기에 의해 대부분 흡수되고, 지구대기 또한 많은 양의 적외선을 내뿜는다. 그 결과, 적외선 관측은 높은 고도의 건조한 곳에 위치한 천문대, 또는 우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적외선을 이용하면 행성이나 원시 행성 원반같이 온도가 매우 낮아서 가시광선을 거의 내지 않는 천체들을 관측할 수 있다. 파장이 긴 적외선은 가시광선을 쉽게 가로막는 성간먼지를 투과할 수 있으므로 우리은하의 중심부와 분자구름 깊은 곳에서 형성되고 있는 젊은 별들을 연구하는데 유용하다.
어떤 분자들은 적외선에서 특히 강한 방출선을 내는데, 이를 이용하여 성간물질의 화학을 연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적외선 분광학으로 혜성에 존재하는 물분자를 검출하기도 한다.

광학천문학(가시광선 천문학)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천문학 분야이다.
오랫동안 광학 영상은 손으로 그려져 기록되었으며,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는 사진이나 건판을 주로 이용하였다. 현재는 디지털 검출기, 특히 CCD 카메라(빛을 전하로 변화시켜 이미지를 얻어내는 기기)를 사용하고 있다. 가시광영역은 400 나노미터에서 700 나노미터로, 근자외선(400나노미터에 가까운 자외선 영역)과 근적외선(1μm에 가까운 적외선영역)의 관측에도 같은 기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자외선천문학은 10 나노미터 에서 320 나노미터 영역대의 자외선 파장을 관측하는 천문학이다. 이 파장대의 빛은 지구대기에 의해 흡수되기 때문에 자외선천문대는 지구대기층이 얇은 높은 고도, 또는 우주에 세워져야 한다. 자외선천문학은 뜨겁고 파란 별들로부터 나오는 열복사와 방출선들을 연구하는데 가장 적합한 분야이다. 우리은하 밖의 다른 은하에 위치한 푸른 별들은 몇몇 자외선관측의 주요 관측대상이 되어 왔다. 자외선영역의 또다른 관측대상으로는 행성상 성운, 초신성 잔해, 활동은하핵 등이 있다. 그러나, 자외선은 성간 먼지에 의해 쉽게 흡수되기 때문에 자외선 관측은 소광()을 정확히 보정해 주어야 한다.

X-선 천문학은 엑스선 파장대의 빛을 내는 천체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전형적으로 X-선은 매우 뜨거운 천체들로부터 싱크로트론 복사, 제동복사(), 그리고 흑체복사()의 형태로 방출된다. X-선은 지구대기에 의해 흡수되기 때문에, 높은 고도로 띄우는 풍선, 로켓, 비행선을 이용하거나 우주망원경 형태로 관측이 이루어지고 있다. 잘 알려진 X-선 천체로는 엑스선 이중성, 펄사, 초신성 잔해, 타원은하, 은하단, 활동은하핵 등이 있다.

감마선 천문학은 가장 짧은 전자기 파장대의 천체를 연구하는 천문학 분야이다. 감마선은 콤프턴 감마선 천문대(Compton Gamma Ray Observatory)와 같이 인공위성에 의해, 또는 대기 체렌코프 망원경(atmospheric Cherenkov telescopes)이라 불리는 특화된 망원경을 사용하여 관측된다. 체렌코프 망원경은 감마선을 직접적으로 검출하진 않지만, 감마선이 지구대기에 의해 흡수되었을 때 생성되는 가시광 영역의 반짝임(체렌코프 복사)을 감지한다. 대부분의 감마선을 내뿜는 천체는 감마선 폭발이다. 감마선 폭발은 짧은 시간 동안 강한 감마선을 방출하고 금방 어두워지는 천체이다. 그 외에 감마선을 내뿜는 천체로는 펄사, 중성자별, 활동은하핵이 있다.

전자기파(빛)이외에도 중성미자, 중력파등을 이용하여 우주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측할 수 있다. 또한 탐사선을 이용하여 달이나 혜성같은 지구밖의 천체에서 직접 시료를 채취하기도 한다.

뉴트리노는 주로 태양 내부나 초신성 폭발에서 만들어지며, 고에너지 입자인 우주선()이 차례로 붕괴하거나 대기의 입자와 반응하면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뉴트리노는 물질과 거의 반응하지 않으므로, 지하시설에 위치한 커다란 용기에 많은 양의 물과 얼음을 채워 놓고 이들이 뉴트리노와 아주 가끔 반응할 때 나오는 미세한 빛을 검출하는 방식으로 관측을 한다. 이러한 뉴트리노 검출기로는 , , Kamioka II/III같은 특별한 지하 시설이 있다.

중력파 천문학은 새롭게 발생한 천문학의 분야로서, 블랙홀, 중성자별등으로 구성된 쌍성들이 내는 것 같은 중력파를 검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현재까지 레이저 간섭계 중력파 관측소() 같은 관측소가 만들어졌고, 2016년 중력파 검출에 성공함으로써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행성과학자들은 직접적인 관측을 위해, 우주탐사선을 행성에 보내거나 시료를 채취해서 돌아오는 방식을 이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탐사선이 행성을 지나쳐 가면서 사진을 찍거나, 행성표면에 직접 착륙해서 실험을 수행하기도 하고, 표면에 탐사선을 충돌시키고 이 때 발생하는 물질들을 원거리에서 관측하기도 한다.

측성학()는 천문학뿐아니라 자연과학에서 가장 오래된 분야중의 하나로써,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학문분야이다. 역사적으로 해, 달, 행성, 별들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은 항해나 달력을 만드는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측성학은 행성의 위치를 매우 정확하게 측정함으로써 중력의 섭동에 관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기여했으며, 이는 행성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천체역학()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근지구천체를 추적함으로써 이러한 혜성이나 소행성들이 지구와 충돌하거나 비껴가는 위험한 경우를 예측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가까운 별들의 연주시차를 측정하여 별까지의 거리를 구하는 것은 우주의 크기를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차근차근 정립해나가는 소위 우주 거리 사다리를 구성하는본가 되는 일이다. 또한 가까운 별까지의 거리를 재는 일은 별의 절대 광도같은 물리량을 정확히 잴 수 있으므로 매우 중요하다. 별들의 시선속도를 재는 것과 함께 고유운동을 재면 별들의 3차원적인 운동을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은하 내의 천체들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를 연구할 수 있다.

이론 천문학자들은 천체나 천문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해석적인 모형이나 컴퓨터를 이용한 수치 모형 같은 방법을 이용한다. 이러한 방법들은 각각 장점이 있다. 해석적인 모형은—다시말해 어떤 문제를 수식으로 서술하는 방법—어떤 현상에 대하여 보다 직접적인 통찰력을 제공하며, 수치적인 모형은 매우 복잡한 현상을 몇 가지 기본 물리 법칙으로부터 계산해 냄으로써 어떤 현상이 존재할 수 있는지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론 천문학자들은 모형을 만들고, 그 모형이 옳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를 연구한다. 이를 바탕으로 관측자들은 여러 이론들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를 가려줄 관측 자료들을 모으거나 실험을 계획하게 된다. 새로운 관측 자료가 얻어지면, 이론 천문학자들은 이 관측 결과를 설명할 수 있게 꾸준히 모형을 바꾸고 발전 시킨다. 만약 자신의 이론이 새롭게 얻어진 관측 자료와 양립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 관측 결과를 맞출 수 있게 모형을 약간 수정할 수 있지만, 만약 이론이 아주 많은 관측 자료와 모순된다면, 그 모형은 폐기되기도 한다.

이론 천문학의 주제로는 천체 역학, 별의 진화, 은하의 형성과 진화, 우주의 거대 구조(), 우주선의 기원, 일반 상대론, 물리우주론 등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이론 천문학은 다양한 물리법칙·이론들을 적용한다. 예를 들어 천문학에서 상대론은 중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우주 거대 구조를 연구하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며, 중력파와 블랙홀등을 연구하는 데 바탕이 된다. 현대 이론 천문학은 급팽창 이론, 암흑 물질, 그리고 기본적인 물리법칙들을 바탕으로 하여 ΛCDM 모형을 정립하였고, 이는 현재 천문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편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는 현대 천문학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주제이다. 다음은 이론 천문학에서 어떤 물리 법칙을 바탕으로, 어떤 실험.관측 결과에 기반하여, 이론적인 모형을 만들고, 이로써 어떠한 현상을 설명 또는 예측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태양은 지구에서 빛의 속도로 8분 거리에 있으며 가장 연구가 자세하게 이루어진 항성이고 전형적인 G형 분광형을 지닌, 46억 살의 주계열성이다. 태양은 변광성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흑점 주기로 알려진, 주기적인 밝기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는 11년 주기에 걸쳐 흑점의 숫자가 변화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흑점은 강력한 자기장 활동과 관련되어 있으며, 태양 표면의 다른 곳에 비해 온도가 낮은 지역이다.

태양은 나이를 먹으면서 밝기가 천천히 증가하고 있으며, 처음으로 주계열성으로 생애를 시작했을 때에 비해 지금 40퍼센트 정도 더 밝다. 태양은 탄생 이후 지구의 생태계에 뚜렷한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밝기가 변해 왔다. 예를 들어 마운더 극소기로 인해 중세에 작은 빙하 시대 현상이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태양의 바깥 표면을 광구라고 부른다. 광구 위에는 채층으로 불리는 얇은 지대가 존재한다. 채층 위에는 코로나가 형성되어 있으며, 온도는 급격하게 올라간다.

태양의 중심부에는 핵이 있으며 핵융합 작용이 일어날 정도로 충분히 뜨겁고 압력 또한 크다. 중심핵 위에는 복사층이 있는데 여기서 플라즈마는 에너지 플럭스를 복사 형태로 전달한다. 복사층 위에는 대류층이 존재하는데 이 곳에서는 에너지가 물리적인 가스 교환 형태를 통해 전달된다. 이러한 태양의 대류층이 자기장을 발생시키는 원인이며, 이 자기장으로 인해 태양 표면에 흑점이 생겨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플라즈마 입자로 이루어진 태양풍은 태양으로부터 꾸준히 우주 공간으로 흘러 나와서 태양권계면까지 이어진다. 태양풍은 지구의 자기권과 반응하여 밴 앨런대를 형성하고, 지구의 자기력선이 대기로 내려와 만나는 지점에서 오로라를 형성한다.

행성천문학은 행성, 위성, 왜행성, 혜성, 소행성, 기타 태양을 공전하는 다른 천체들, 그리고 외계 행성 집단들을 연구 대상으로 다룬다. 태양계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으며, 과거에는 관측 도구로 주로 망원경을 이용했으며 최근에는 우주 탐사선이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일련의 탐사로 인해 태양계의 형성과 진화에 관해 많은 지식을 얻게 되었으며, 새로운 사실들이 계속하여 발견되고 있다.

태양계는 내행성, 소행성대, 외행성의 세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내행성계로 일컫는 지구형 행성들로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이 있다. 바깥쪽을 공전하고 있는 외행성계는 가스 행성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왕성 너머로는 카이퍼대가 존재하며, 가장 바깥쪽에는 최대 1광년에 이르는 거리까지 오르트 구름이 펼쳐져 있다.

행성들은 원시 태양을 두르고 있던 원시행성계원반에서 생겨났다. 중력에 의한 끌어당김, 충돌, 강착 과정을 통하여 원반에 있던 물질들은 큰 덩어리들로 자라났으며 이후 원시행성들로 진화했다. 태양풍에 의한 복사압으로 인해 덩어리로 뭉치지 못한 물질들은 쓸려 나갔고, 자기가 지닌 가스 대기를 잃지 않을 정도로 무거운 천체들만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행성들은 계속 커지거나 또는 극심한 충돌로 인해 자기가 갖고 있던 물질을 방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극심한 충돌의 증거는 달이나 수성 등에 있는 많은 충돌구를 통해 알 수 있다. 현재 지지를 받고 있는 이론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원시행성들 중 일부는 충돌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행성들은 충분한 질량을 획득한 뒤, 무거운 물질은 행성 중심부로 가라앉고 가벼운 물질은 위에 남는, 행성 구별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행성들의 중심에는 철이나 석질의 중심핵이 생성되고 그 위는 보다 가벼운 물질들로 이루어진 맨틀이 형성되었다. 핵 부위는 고체 또는 액체 성분을 지니고 있으며, 일부 행성의 중심핵은 고유의 자기장을 형성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이러한 자기장은 행성의 대기를 태양풍으로부터 보호하여, 벗겨져 나가지 않게 한다.

행성이나 위성들의 내부열은 이들을 만들었던 물체(방사성 물질로 예를 들면 우라늄, 토륨, 26Al 등이다)들끼리 충돌하여 발생한 열 및, 조석가속으로 인하여 생겨났다. 일부 천체들의 경우 화산이나 지각 운동 등 지질학적 활동이 생겨날 정도의 열을 간직하게 되었다. 이들 중 대기를 갖게 되는 천체는 바람이나 물로 인하여 지각의 침식 과정을 겪는다. 질량이 작은 천체들은 빠르게 식었고, 충돌구 생성을 제외한 일체의 지질학적 활동을 멈추었다.

항성 및 그들의 진화 과정을 아는 것은 우주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천체물리학은 관측 및 이론, 항성 내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항성 연구에 기여해 왔다.

항성 생성은 거대 분자 구름으로 알려진, 먼지와 가스의 밀도가 높은 곳에서 시작된다. 분자 구름이 불안정 해지면, 분자 구름이 중력때문에 붕괴하면서 여러 조각들로 깨지게 되고, 각각의 조각들은 원시별을 형성한다. 중심핵 부분이 충분히 밀도가 높고, 뜨거워지면 핵융합 작용이 시작되며, 여기서 주계열성이 탄생하게 된다. 수소와 헬륨, 리튬보다 무거운 모든 원소들을 천문학에서는 중원소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항성의 내부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주계열성을 벗어난 항성의 진화 과정은 주로 별의 질량에 의해 결정된다. 별이 질량이 크면 클수록 더욱 밝아지며 중심핵에서 수소 연료를 더 빨리 태운다. 시간이 지나면서 별이 갖고 있던 수소가 헬륨으로 모두 바뀌면, 항성은 진화하기 시작한다. 헬륨 융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중심핵의 온도가 더 뜨거워져야 하기 때문에 항성의 중심핵 밀도는 증가하며, 부피 또한 커지게 된다. 부피가 증가한 항성은 헬륨을 다 태울 때까지 잠시 동안 적색 거성 단계에 머무른다. 질량이 매우 큰 별들의 경우 헬륨보다 무거운 원소들을 태우는 일련의 진화 단계를 따로 걷게 된다.

항성의 최후 양상 역시 마지막에 남은 별의 질량에 따라 달라진다. 태양 정도 질량을 갖는 별은 행성상 성운의 형태로 질량을 방출하고 중심부에 백색왜성을 남긴다. 주계열 시절 질량이 태양의 8배 이상이었던 별들의 경우 중심핵이 붕괴하면서 초신성으로 일생을 마친다. 초신성 폭발 후 중심에 남은 물질은 중성자별이 되거나, 혹은 폭발 후 남은 질량이 태양의 3배가 넘는 경우 블랙홀로 진화한다.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 쌍성의 경우 주성에서 나온 물질이 반성인 백색 왜성으로 흘러들어가서 신성 폭발을 일으키는 것처럼, 더욱 복잡한 진화 경로를 겪게 된다. 행성상 성운 및 초신성은 중원소를 성간 공간에 퍼뜨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생명체가 탄생할 재료를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만약 이들이 없다면 새롭게 탄생하는 별들 및 행성들은 수소와 헬륨으로만 이루어질 것이고, 지구형 행성은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태양계는 국부 은하군에 속해 있는 막대나선은하인 우리 은하()에 속해 있으며, 우리 은하의 중심을 공전하고 있다. 가스, 먼지, 별, 암흑물질 등이 서로의 중력을 통해 묶여 우리은하를 구성하고 있으며, 이들은 공통 질량중심을 축으로 회전하고 있다. 태양계는 성간 먼지를 포함하는 바깥쪽 나선팔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먼지가 시야를 가려, 지구에서 볼 수 있는 우리 은하의 모습은 제한되어 있다.

우리 은하 중심부에는 막대 모양의 팽대부가 있으며, 은하 중심에는 거대한 블랙홀이 있는 것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은하중심부는 바깥쪽으로 소용돌이처럼 퍼져나가는 네 개의 나선팔로 둘러싸여 있다. 나선팔은 금속함량이 많고 젊은 항성종족 I 별들이 탄생하는 곳이다. 은하 원반을 구형의 은하 헤일로가 둘러싸고 있는데, 여기에는 주로 늙은 항성종족 II 별들과 별들이 조밀하게 뭉친 구상성단들이 분포하고 있다.

별들 사이에는 가스와 먼지 등으로 이루어진 희박한 성간 물질이 분포하고 있다. 성간 물질의 밀도가 높은 곳에서는 수소 분자 및 다른 원소들로 구성된 분자 구름이 만들어지고, 이 곳에서 별들이 태어난다. 별의 생성은 처음에는 분자구름이 밀집된 암흑 성운의 형태로 시작되며, 이들은 압축되고 붕괴되어 원시별을 형성하게 된다.

질량이 큰 별들이 태어나는 곳의 주변은 빛을 방출하는 가스와 플라스마로 이루어진 H II 영역으로 진화한다. 무거운 별들은 강한 항성풍을 방출하고 초신성 폭발로 일생을 마치는데, 이로 인해 주변의 성간물질이 흩어지게 된다. 때로는 여러 별들로 이루어진 산개 성단이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산개 성단의 별들은 점차 흩어지게 되면서 우리 은하의 항성 종족에 편입된다.

우리 은하 및 외부 은하에 대한 운동학적 연구를 통해 보이는 물질보다 더 많은 질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빛을 내지 않지만 질량은 가지는 암흑물질의 본질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으나, 암흑물질 헤일로가 우주에 있는 물질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외부은하 천문학은 우리은하 밖의 천체와 현상을 연구하는 분야로서, 주로 은하의 형성과 진화, 외부은하의 형태와 분류, 활동성은하, 은하단과 은하군, 그리고 이들로 이루어지는 우주의 거대 구조를 연구한다.

대부분의 은하들은 모양에 따라 타원은하, 나선은하, 불규칙 은하로 분류된다.
이름대로 타원은하는 하늘에 투영된 모습이 타원을 띄는 은하이다. 타원은하의 별들은 무작위적인 궤도를 가지고 움직이며, 성간물질이 적으며, 새로 생성되는 별이 적은, 주로 나이가 많은 별들로 이루어져 있다. 타원은하들은 주로 은하단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여러 은하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졌다고 여겨지고 있다.
나선은하는 납작한 회전하는 원반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중심부의 팽대부(또는 막대)와 나선 모양의 팔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선팔들은 성간먼지를 많이 포함하고, 주로 별들이 형성되는 곳으로 푸른 빛을 띠고 있다. 나선은하들은 주로 나이가 많은 별들로 이루어진 헤일로에 둘러 싸여 있다. 우리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가 대표적인 나선은하이다.
불규칙은하는 나선은하와 타원은하로 분류할 수 없는 일정한 모양을 갖지 않는 은하이다. 이러한 불규칙한 모양은 다른 은하와의 상호작용 때문에 만들어진다.

활동성 은하는 방출하는 에너지의 상당 부분이 별, 먼지, 성간물질 같은 것이 아닌 은하 중심의 다른 에너지 원(블랙홀)으로부터 나오는 은하이다. 이러한 활동은하핵()은 응축원반()을 가진 매우 무거운 블랙홀()이라고 여겨진다. 활동은하에는 시퍼트 은하(), 퀘이사(), 블레이저(), 전파은하()등이 있다. 전파은하는 일반적인 은하와 달리 전파에서 매우 강한 빛을 내며, 퀘이사는 우주에서 가장 밝은 천체 중 하나이다.

우주의 거대구조는 이러한 개개의 은하들이 모여서 이루는 구조를 의미한다. 우주의 거대 구조는 계층적으로 만들어지는데, 은하들이 모여 은하군을 이루고, 이 은하군들이 모여 은하단을 형성하며, 다시 초은하단을 만드는 식이다. 이러한 거대한 군집들은 다시 필라멘트()와 그 사이의 공동()을 이루며 분포한다.

물리 우주론()은 우주가 처음에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진화했는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다루는 분야이다. 우주론의 연구 대상으로는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대폭발 핵합성, 우주의 거대구조, 암흑물질, 암흑에너지 등이 있다. 우주론의 밑바탕이 되는 이론은 우주가 약 137억년 전에 시공간의 한 점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팽창하여 왔다는 대폭발 이론이다. 1965년에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이 발견됨으써 대폭발 이론은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다.

우주가 팽창하는 동안, 우주는 여러 중요한 단계를 거치게 된다. 대폭발 직후 아주 초기에는 우주가 급팽창이라고 불리는 기하급수적인 빠른 팽창을 겪었다고 생각되며, 이 급팽창 때문에 우주가 현재 관측되는 것처럼 균질()하고 등방적()이게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급팽창 이후에는 중수소, 헬륨과 같은 기본적인 원소들이 만들어졌는데, 우주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물질(바리온)이 만들어진 이 과정을 대폭발 핵합성 또는 원시 핵합성이라고 부른다.

우주가 팽창하고 식어감에 따라 중성 원자들이 처음으로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 덕분에 빛이 이온화된 전자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여행할 수 있게 되어 우주가 투명해지게 된다. 이 때 발생한 빛이 현재의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으로 관측이 된다. 그러나 아직 빛을 낼 수 있는 별들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후의 시기를 우주의 암흑시대()라고 부른다.

우주에 존재하던 작은 밀도 요동으로부터 처음으로 천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물질들이 밀도가 높은 지역으로 뭉치면서, 거대한 가스 덩어리를 만들고, 여기서 처음으로 별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 별들은 내부의 핵융합을 통해 무거운 원소들을 만들게 되고, 이 때 발생하는 빛들은 주위의 가스를 이온화시켜서, 소위 재전리라는 과정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별들이 중력에 의해 모이면서 처음으로 은하들을 만들게 되고, 이 은하들이 다시 중력에 의해 분포하면서 은하군이나 은하단 같은 더 큰 구조들을 만들고, 이는 우주의 거대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소위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는 이러한 우주론의 근본적인 구성성분이 되어왔으며, 두 성분을 합쳐서 우주 전체의 96%를 차지한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가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현대 우주론과 천문학의 주요 미해결 문제 중의 하나이다.

천문학과 천체물리학은 다른 과학분야와 관련된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y studies)를 활발하게 발전시켜왔다. 예를 들어 고천문학 ()은 고고학과 융합된 학문으로서 고대 또는 전통적인 천문학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연구하는 분야이다. 한편, 천문생물학()은 지구 이외에도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우주 생명체의 등장과 진화에 대해 연구하는 분야이다. 우주에서 발견되는 화학물질의 생성, 변화, 소멸등을 연구하는 분야는 천문화학()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물질들은 주로 분자운, 온도가 낮은 별들, 갈색왜성, 그리고 행성들에서 주로 발견된다. 우주화학()은 태양계내에서 발견되는 화학물질들을 연구하는 분야로서, 원소와 동위원소의 상대적인 비율을 다룬다. 이 두 분야들은 천문학과 화학이 융합된 분야이다.

천문학은 비전문가들(아마추어들)이 가장 많이 기여를 하는 과학분야 중 하나이다.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다양한 천체와 천문 현상들을 관측한다. 일반적인 관측대상으로는 달, 행성, 별, 혜성, 유성우, 심원천체(성단, 은하, 성운)등이 있다. 때로는 이러한 관측에 자신들이 직접 제작한 장비가 사용되기도 한다. 일부 아마추어 천문인들은 밤하늘이나 특정 천체들의 사진을 찍기도 하는데, 이러한 예술적인 사진을 천문사진 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취미활동 뿐만 아니라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천문학 연구에 꾸준히 공헌해왔다. 실제로 천문학은 아직까지도 비전문가들이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분야 중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혜성을 처음으로 발견해내기도 하고, 변광성을 꾸준히 관측한다. 디지털 관측기기의 발전으로 아마추어 천문학자들은 천문 사진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루어왔다.

비록 천문학은 우주와 그 구성원들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엄청난 발전을 이룩해 왔지만, 아직도 중요한 미해결 문제들이 남아 있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상·우주 망원경, 그리고 획기적인 이론·실험 물리의 발전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Article 209: 애니메이션 (294 words)


위의 애니메이션은 총 6개의 프레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이 애니메이션은 초당 10 프레임으로 움직인다.

애니메이션()은 여러 장의 화면을 연속촬영 하고, 조작하여 화면이 움직여 보이게 만든 영화의 한 일종이다. 이 용어는 살아있는을 뜻하는 라틴어 낱말 Anima에서 비롯하였다. 간단히 동화(動畵)라고도 부른다. '만화'나 '동화'는 그림의 의미를 갖고 있으나, 각 장면은 그림이 아닐 수 있다. 3차원 모델링을 통해 컴퓨터 화면상으로 재현된 영상의 경우도 애니메이션에 포함된다.

대한민국에서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애니라고 짧게 표기하기도 하며 일본에서는 아니메()로 줄여 부르거나 도가(, 동화)라고 말한다. 외부적으로는 일본에서 만드는 애니메이션을 일본(Japan)과 애니메이션(animation)의 합성어인 재패니메이션(Japanimation)으로 부르기도 한다.

초기 애니메이션은 배경에 그림을 그려 움직이게 하는 셀 애니메이션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과 함께, 찰흙이나 모형 등의 피사체를 조금씩 변형하여 각 장면을 촬영하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생겼고, 컴퓨터의 발전과 함께 프로그램으로 등장인물의 각 동작과 배경을 구현하는 3D 애니메이션이 발전하였다. 하지만 특수한 분야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는 2D의 셀 애니메이션만을 쓰거나, 3D와 셀을 조합하여 사용한다.

애니메이션은 유통 형식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이 외에도 페이퍼 애니메이션, 모래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제작 기법이 있다.

현재 애니메이션은 다양한 소스들을 바탕으로 창작되고 있다. 성격상 가장 유사한 만화에서 제작되는 경우가 많지만,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하는 경우도 있고, 자체적으로 창작하여 제작되는 경우도 많다. 그 외에 게임을 바탕으로 제작되는 경우도 있다.

캐릭터를 표현하는 방법은 결국 애니메이션 기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독자들이나 필자가 디자이너라면 캐릭터를 미술이나 예술적인 관점으로 보았다. 프로그래머에게 캐릭터란 결국 메시들의 집합일 뿐이다. 이런 메시들의 집합을 어떤 애니메이션 방식과 결합시키는 것이 캐릭터의 표현 방식과 한계가 정해져 있다.

심리현상 중 하나인 투사는 지니고 있을 법한 자신의 측면을 타인의 것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타인이 지닌 자신의 측면을 혐오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등장인물의 태도나 특성이 보기 언짢다면 그 캐릭터는 자기 내면의 모습일수도 있고 가정된 상황에서 드러날 수 있는 본인의 측면 중 하나일 수 있다.

전이는 특정 상황에 각별한 정서가 느껴지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장면의 유사 요소가 많은 상황이 찾아오면 해당 애니메이션 장면을 보면서 느꼈던 정서가 그 실제 상황에 반영돼 느껴진다.




#Article 210: 태풍 매미 (1915 words)


태풍 매미(태풍 번호: 0314, JTWC 지정 번호: 15W, 국제명: MAEMI, 필리핀 기상청(PAGASA) 지정 이름: Pogi)는 2003년 9월 12일 한반도에 상륙해 경상도를 중심으로 막대한 피해를 일으킨 태풍이다. “Super Typhoon Maemi” 혹은 “2003년 태풍 제14호”라고도 불리며, 한반도에 영향을 준 태풍 중 상륙 당시 기준으로 가장 강력한 급이고, 2003년 태풍 중에서 가장 강한 태풍으로 발달하였다. '매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곤충 매미에서 온 이름이다. 한편 이 태풍의 막대한 피해로 인해 태풍 이름 목록에서 매미라는 이름이 영구 제명되어, 후에 태풍위원회 총회에서 무지개로 재명명되었다.

최성기를 맞이한 태풍은 진로를 서서히 북쪽으로 바꾸기 시작했고 9월 11일 새벽에는 일본 오키나와현 미야코 섬을 통과해 동중국해로 들어갔다. 태풍의 중심이 지나간 미야코 섬의 기상관청에서는 최저해면기압 912.0 hPa, 최대순간풍속 74.1 m/s 가 관측, 일본에서는 수십 년 만의 기록이 되었다. 동중국해에 들어가서는 북북동 방면으로 전향하여 한반도를 향해 북상, 그러면서 차츰 쇠퇴기에 접어들어 11일 오후에 중심 기압 920 hPa / 최대 풍속 50 m/s 의 강도 “매우 강”으로 조금 약해진 뒤, 9월 12일 15시에는 중심 기압 935 hPa / 최대 풍속 45 m/s 의 세력으로 제주도 남동쪽 해상에 이르렀다. 같은 날 20시 20분경에는 약간 더 쇠약해진 중심 기압 950 hPa / 최대 풍속 40 m/s 의 “중형의 강한 태풍”으로서 경상남도 고성군 일대에 상륙, 이후 빠른 속도로 한반도 남동부를 관통하여 상륙 후 약 6시간 만인 9월 13일 2시 30분경에 울진 앞 바다로 빠져나와 동해상으로 진출했다. 이어서 일본 홋카이도 부근 해상까지 나아가, 9월 14일 6시경에는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 남부 지방과 일본 미야코 섬의 큰 피해, 그리고 경로, 위력 등에 있어서 1959년의 제14호 태풍 사라와 여러모로 닮아 있는 태풍이다.

태풍 매미의 최대 세력은 대한민국과 일본 기상청의 해석으로 중심 기압 910 hPa / 최대 풍속 55 m/s (105 kt)이며, 풍속 값을 1분 평균으로 산출하는 JTWC의 해석으로는 중심 기압 885hPa / 최대 풍속 75 m/s (150 kt) 가 된다. 그 위력은 2003년에 발생한 모든 태풍 중에서 으뜸인 것은 물론, 그 해의 모든 허리케인과 사이클론을 통틀어도 가장 강하다.

게다가 북위 30도 이북에까지 진행하였음에도 중심 기압 930 hPa / 최대 풍속 50 m/s (95 kt)의 강도 “매우 강”에 해당하는 세력을 유지, 북상하면서도 좀처럼 그 세력이 약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에 상륙한 태풍 중에서 가장 강한, 중심 기압 950 hPa / 최대 풍속 40 m/s (80 kt)의 세력으로 상륙 했다. 상륙 시의 중심 기압 950 hPa 은 이전에 강한 세력으로 상륙했던 2000년 제14호 태풍 사오마이 (상륙 시 중심 기압 959 hPa), 2002년 제15호 태풍 루사 (상륙 시 중심 기압 960 hPa)의 기록을 크게 경신하는 것이다.

태풍이 이렇게 강력한 세력으로 한반도에 상륙한 원인을 꼽자면, 당시 한반도 주변 해역의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높았던 것과 비교적 빨랐던 태풍의 이동속도를 들 수 있는데, 평년보다 2~3도 높았던 해수면 온도는 태풍이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으며, 다소 빨랐던 태풍의 이동속도는 태풍이 미처 쇠약해지기 전에 한반도에 도달할 수 있게 하였다. 이에 따라, 태풍의 상륙 지점에 가까웠던 여수, 통영, 마산 등의 지역에서는 기록적으로 낮은 기압이 되어, 그중 통영에서는 최저해면기압 954.0 hPa를 관측했다. 이것은 태풍에 의해 관측된 최저해면기압 부문 역대 2위가 되는 기록이다.

특히 일본 기상청의 기록 에 의하면 중심 기압 930 hPa 이하의 세력을 북위 30도 이상까지 유지한 태풍은 극히 드물어, 이러한 태풍은 1951년부터 2008년까지 발생한 1450여개의 태풍 중 매미를 포함하여 11개밖에 없다.

매우 강한 바람을 동반했던 것이 이 태풍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비록, 상륙 시의 폭풍역 (풍속 25 m/s 이상의 폭풍 범위) 이 남동쪽으로 반경 150 km, 북서쪽으로는 반경 55 km 정도로 북서 방향의 폭풍역이 다소 작았기 때문에 중심에서 북서쪽으로 멀리 떨어져있던 경기도와 충청도에서는 최대순간풍속 10~20 m/s 내외의 수준에 그쳤지만, 태풍의 폭풍역에 해당했던 제주도와 전라남도, 경상도, 그리고 대마도 등지에서는 기록적인 강풍이 되었다. 그 결과, 해당 지역에 속한 대부분의 관측 지점에서 종전의 풍속 기록이 바뀌었다.

관측된 최대순간풍속은 제주 60.0 m/s, 고산 60.0 m/s, 여수 49.2 m/s, 부산 42.7 m/s 등으로, 제주도와 여수 등의 지역은 태풍의 가항반원에 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수치를 기록했으며, 상위 기록의 대부분은 태풍의 중심권에 가까웠던 남부 지방에 집중되었다. 고산에서는 최대 풍속 51.1 m/s 가 함께 관측되어, 기존의 최대순간풍속, 최대 풍속 부문 역대 1위 기록이었던, 2000년 제12호 태풍 프라피룬이 흑산도를 내습하면서 세운 최대순간풍속 58.3 m/s, 최대 풍속 47.4 m/s를 3년 만에 다시 경신했다. 기존의 최대순간풍속 역대 1위를 바꾼 60.0 m/s 의 풍속이 제주와 고산 두 지점에서 동시에 관측된 것은 대단히 진기한 기록이기도 하다.

한편, 최대순간풍속은 비공식으로는 공식 기록보다 훨씬 높은 값을 관측한 경우가 있어, 일본 미야코 섬 자위대 주둔지에서는 공식 기록 (최대순간풍속 74.1 m/s, 미야코 섬 기상관청 관측) 을 훨씬 뛰어넘는 86.6 m/s를 기록했는가 하면, 부산에서도 공식 기록인 42.7 m/s를 넘는 비공식 기록이 잇달아, 구덕산 레이다에서 53.4 m/s, 광안대교에서 56.2 m/s, 신선대 부두에서 52.0 m/s 등을 기록했다.

이와 같이 기록적인 강풍이 일었던 원인은 물론 강력했던 태풍의 세력이 일차적이지만, 부가적인 요인으로서 두 가지를 더 꼽을 수 있다. 먼저 한반도 상륙 시 45 km/h 정도의 상당히 빨랐던 태풍의 이동속도를 들 수 있는데, 이 이동속도가 태풍의 풍속 (상륙 시 최대 풍속 40 m/s) 에 더해져 위험반원에서의 바람의 힘을 그만큼 더 강하게 했다.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태풍의 특성상 진행방향의 오른쪽, 다시 말해 위험반원에서는 태풍의 회전과 진행방향이 중첩되어, 태풍의 이동속도가 그대로 풍속에 더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태풍 상륙 일인 9월 12일 오후의 한반도 주변 기압배치는 남쪽으로부터 북상하는 매우 낮은 중심 기압의 태풍과 북쪽의 고기압이 마주치는 형국이 되어 있어, 이 부근의 기압경도를 급격하게 만듦에 따라 강풍을 유발시키는 또 하나의 조건을 형성했다. 즉, 이 두가지 요소가 함께 작용하여 태풍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했던 바람의 힘을 이중 삼중으로 강화시킨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바람의 이미지가 크게 각인되어 있으나, 강수에 있어서도 꽤 큰 영향을 끼친 태풍이다. 전체적인 강수량은 큰 비를 수반한 대표적인 태풍으로 꼽히는 2002년의 제15호 태풍 루사나 태풍 아그네스 등이 몰고왔던 호우와 같이 극단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남해 410.0 mm, 강릉 307.5 mm, 고흥 291.0 mm 가 기록되는 등, 남해안과 영동 지방을 중심으로 최대 450 mm 에 달하는 매우 많은 비가 내렸다.

무엇보다 태풍이 다소 빠른 속도로 한반도를 가로질러 나감에 따라 비구름대가 한반도에 머무른 시간이 그렇게 긴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만한 강수량이 기록된 것으로서, 비교적 단시간에 강수가 집중되는 형태를 보였다. 위에 언급된 강수량의 대부분은 태풍이 한반도 가까이에 존재했던 12일 오후 늦게부터 13일 새벽 사이에 기록된 것이다.

또한 지역별로 강수량의 편차가 꽤 크게 나타났는데, 주로 태풍의 중심권이 통과한 제주도, 전남 동부, 경남 서부, 대구 근방 지역에서 총강수량 200 mm 이상의 기록적인 호우가 관측된 반면, 그 외의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비가 기록되었다. 그리하여, 남해의 강수량은 약 400 mm 에 이르렀지만 동쪽으로 불과 100 km 정도 떨어진 부산의 강수량은 60 mm 안팎에 지나지 않아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태풍 진행방향의 서쪽 (가항반원) 으로 꽤 떨어진 경기도, 충청도 등지에서는 그보다도 적은 강수를 기록했다.

특히, 대관령과 강릉을 포함한 영동 지방에서는 태풍이 몰고온 온난 다습한 기류와 북동쪽에서 유입된 비교적 한랭한 기류가 태백산맥에서 부딪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강한 비구름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2002년의 제15호 태풍 루사로 인한 집중호우 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지형 효과와 유사한 것으로, 영동 지방에 300 mm 가 넘는 비가 쏟아진 원인이다.

태풍 매미 강타시 일본 미야코 섬에서 관측된 최저해면기압 912.0 hPa 과 최대순간풍속 74.1 m/s 는 강력한 태풍의 영향을 자주 받는 일본에서도 수십 년에 한 번씩 기록될 만한 값으로, 최저해면기압은 해당 부문 일본의 역대 4위 기록, 최대순간풍속은 해당 부문 일본의 역대 7위 기록이다.

태풍 매미는 발생에서 소멸까지 태풍의 전형적인 패턴이라고 할 수 있는 포물선 형태에 가까운 경로를 밟았기 때문에, 진로를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고 한반도 상륙의 가능성도 꽤 일찍부터 예상되었다. 기상청은 9월 10일 오후 5시에 보도자료를 통해 태풍의 한반도 남해안 상륙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공표하여 이 소식은 주요 언론기관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9월 11일 오전 4시에는 태풍이 최대순간풍속 74.1 m/s 의 맹렬한 강풍과 함께 일본의 오키나와현 미야코 섬을 직격하여 태풍에 대한 방재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이곳에서조차 심대한 피해가 발생, 태풍의 위력이 실상으로 드러나게 되면서 태풍이 곧 당도할 대한민국 역시 큰 피해가 우려되기 시작했다. 이에 기상청은 9월 11일 오후 2시 30분에 2차 보도자료를 발표해 주의를 촉구했으며, 오후 6시에는 본청을 포함한 전국의 기상관서에서 태풍 비상 근무에 들어갔다. 주요 방송사 및 신문에서는 태풍의 북상 소식을 헤드라인으로, “59년의 태풍 사라에 비견되는 태풍 매미가 북상 중”등으로 연달아 보도함에 따라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태풍의 영향이 본격화된 9월 12일에는 초특급 태풍의 한반도 내습 소식을 주요 방송사에서 따로 특보를 편성,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정부 당국의 대처는 매우 미흡해 마산 지하 상가 참사 등의 결과로 이어졌으며, 또한 전봇대나 송전 철탑 등의 전기 공급 시설을 확실히 정비하지 못한 지역이 대부분으로, 강풍에 의해 정전이 속출하여 이 일대는 뉴스 특보마저 시청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정도 세력의 태풍은 당시 대한민국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생소한 것으로서 안전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에 따른 희생자가 매우 많았고, 재산 피해액은 전년의 태풍 루사에 이어 사상 최대 급에 이르렀다.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워낙 커, 수도권 일대를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지역이 “특별재해지역”으로 선포되었다.

태풍의 상륙 시각이 남해안의 만조 시각과 겹쳐 가공할 만한 해일이 발생, 마산에서는 지하 노래방에 갇힌 사람들이 그대로 익사하는 등 10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냈다. 당시 마산의 고조(高潮) 높이는 약 180 cm 로 예측되었으나 태풍에 의한 해일은 최대 439 cm 에 달해 예측치를 훨씬 뛰어넘었다. 해일을 예상하지 못했던 마산 당국은 제대로 된 대피령을 내리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부두의 원목 수천여 개가 바닷물과 함께 밀려와 지하 건물의 출구를 막으면서 피해를 더욱 키웠다. 부산에서는 해일에 가까운 높은 파도가 해안가를 휩쓸었는데 이에 대한 신속한 대피가 이루어져 인명 피해는 최소화 할 수 있었지만 해운대에 위치한 부산 아쿠아리움이 침수되고 해안가에 자리 잡은 많은 건물들이 폐허로 변해 재산 피해가 매우 컸다. 이밖에, 태풍을 피해 남해안에 정박해 있던 선박들의 피해가 상당하여 수천 척의 선박이 해일에 의해 파손되거나 침몰했으며 도심에서는 해일에 밀려온 크고 작은 선박들이 널려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피해 지역이 워낙 넓었고, 유입된 물의 양이 많아 복구가 늦어졌기 때문에 함께 밀려왔던 쓰레기 및 폐수의 처리가 늦어져 위생 상태가 나빴던 지역이 많았다.

태풍에 동반된 최대순간풍속 50 m/s 가 넘는 강풍으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전신주와 철탑이 쓰러져 전국적으로 145만여 가구가 정전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특히, 거제도 지역에서는 송전 철탑이 강풍에 파괴되어 약 4일 동안이나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고층 건물에서는 유리창이 바람에 의해 파손되는일이 잇달았고 도심에서는 날린 간판과 뽑힌 가로수, 깨진 유리창 등이 뒤엉켜 굴러다녀, 일부 거리는 마치 폭격을 당한 전쟁터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날려지던 물체의 일부는 주차된 차량을 덮쳐 곳곳에서 파손된 차량이 수천 대에 달했으며 부산항에서는 800톤이 넘는 컨테이너 크레인 11대가 강풍에 의해 무너지거나 궤도를 이탈 하는 한편, 해운대에서는 7000톤이 넘는 해상관광호텔이 높은 파도와 강풍으로 전복되어 피해액은 헤아리기 힘든 수준이었다. 여기에, 옥상에서 물건을 줍던 사람이 바람에 떠밀려 추락하여 숨지거나 폭풍속에서 배를 살피러 나온 노인이 파도에 휩쓸리는 등, 바람에 대한 경계심 부족이 인명 피해를 가져오는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바람 피해는, 태풍의 위험반원에 해당했던 부산·경상남도 지역에서 대부분을 차지했다.

태풍이 통과하던 9월 12일에서 13일 사이에 쏟아진 폭우로 강원도 영동 지방과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는 400 mm 에 가까운 강수를 관측, 더욱이 이 강수량의 대부분이 태풍이 한반도 내륙에 위치했던 6시간 동안에 집중되어, 짧은 시간 동안의 강렬한 호우로 산간 지역에서는 산사태가 발생해 주택가를 덮쳐 많은 인명 피해가 나왔다. 호우에 따른 산사태의 위험성이 제대로 경고되지 않은 것과 대피 명령이 없었던 것이 주된 원인으로, 지난 2002년의 제15호 태풍 루사의 교훈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또한 단시간에 쏟아진 많은 양의 비는 곳곳의 하천을 범람시켜, 농경지가 침수되고 주택가에는 물이 들어차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강원도 영동 지방에서는 지난 2002년 태풍 루사 때의 복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태풍 매미에 의한 폭우가 쏟아져 심대한 피해가 되었다.

태풍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사망 3명, 부상자 110명의 인명 피해를 초래 했고, 그 피해는 주로 미야코 섬에 집중되었다.

태풍 매미는 거의 최성기의 세력을 유지한 채 일본 오키나와현 미야코 섬의 상공을 통과하여, 미야코 섬에 1968년의 제16호 태풍 이래 35년 만의 대 재해를 낳았다. 강력한 폭풍으로 약 1300여 동의 주택이 파손되거나 침수된 것과 함께 160여 억엔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으며, 1명이 사망하고 90여 명이 부상했다. 미야코 섬은 태풍에 대한 수준 높은 방재시스템이 있어 웬만한 태풍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는 곳인 만큼 태풍 매미에 의한 이 같은 피해는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태풍이 대한민국에 입힌 피해가 너무나도 극심했기 때문에, 2005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38차 태풍위원회 총회에서는 이 태풍의 이름이었던 “매미(MAEMI)”를 퇴출시키고 “무지개(MUJIGAE)”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2015년에 사용한 무지개라는 이름도 필리핀과 중국에 끼친 심대한 피해로 퇴출되었고 대신 수리개(SURIGAE)가 쓰이게 되었다.

속보 해석으로 태풍 매미는 북위 30도를 넘은 시점에서 중심 기압 945 hPa 까지 약화된 것으로 발표되었으나, 일본 기상청의 사후 해석 에 의해, 북위 30.5도에서의 세력이 “중심 기압 945 hPa / 최대 풍속 40 m/s”에서 “중심 기압 930 hPa / 최대 풍속 50 m/s”로 상향 수정 되었다. 또한, 사후 해석을 참고하면 태풍의 상륙 지점은 당초 대한민국 기상청이 발표했던 경상남도 사천시 부근보다는 경상남도 고성군에 가까운 것이 된다.




#Article 211: 베른하르트 리만 (186 words)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베른하르트 리만(, 1826년 9월 17일~1866년 7월 20일)은 독일의 수학자이다. 해석학, 미분기하학에 혁신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리만 기하학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술에 사용되고 있다. 그의 이름은 리만 적분, 코시-리만 방정식, 리만 제타 함수, 리만 다양체 등의 수학 용어에 남아 있다. 그는 리만 가설을 최초로 고안한 수학자로도 유명하다.

현재 독일의 다넨베르크(Dannenberg) 근처인 하노버 왕국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 프리드리히 베른하르트 리만(Friedrich Bernhard Riemann)은 루터 교회의 가난한 목사였고, 리만은 6명의 자녀들 중 둘째였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다고 한다. 부끄러움을 잘 타고, 자주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어릴 적부터 보기 드문 수학적 재능을 나타냈지만, 대중 앞에서 말하기에는 너무 수줍음을 잘 타는 편이었다.

짧은 일생을 통해서 발표한 논문의 수는 비교적 적지만, 수학의 각 분야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복소함수론(複素函數論)에서 복소 로그나 제곱근 같은 1대1이 아닌 함수의 역을 고려하는 경우에 어울리는 리만 면을 정의하였고, 복소기하학의 초창기에 해당한다고 평가된다. 리만 사상 정리를 통해 복소 평면 상에서 하는 해석학에서 근본적인 정의역의 종류에 대한 위상 수학적인 고찰을 하였고 이를 앙리 푸앵카레가 균일화 정리로 일반화 하였다.

생애 마지막에 가까워서는 W. E. 베버의 영향을 받아서, 이론 물리학에 흥미를 가졌으며,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편미분방정식(偏微分方程式)에 관해서 강의하였고, 그가 죽은 뒤 베버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리만은 40세 생일의 두 달 전인 1866년 7월 20일 사망했다.




#Article 212: 기타 (610 words)


기타()는 현(Strings)을 튕겨 소리를 내는 발현악기로, 스페인 지방에서 유래하였다. 머리(Head), 목(Neck), 몸체(Body)로 구성되어 있으며, 목 부분에는 20여 개의 프렛(Fret)이 박혀 있다. 기타는 주로 6개의 현을 갖고 있다. 특이한 경우에는 머리가 없는 기타()나, 프렛이 없는 기타()도 있다.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재즈, 록, 팝 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 사용된다. 또한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을 기타리스트()라고 부른다.

기타는 기타 몸체의 울림구멍(Sound Hole)을 통해 소리를 증폭하고, 프렛을 통해 음정을 제어한다. 현의 양 쪽에는 몸체의 브릿지(Bridge) 위에 위치한 하현주(Saddle)와 목 부분의 상현주(Nut)가 있다. 그리고 현의 장력을 조절하여 음정을 맞추는 페그(Peg)가 머리에 고정되어 있다. 6개의 현은 연주를 위해 기타를 안았을 때 위쪽이 가장 굵고 아래쪽으로 갈수록 가늘어진다. 또한 현이 가늘어질수록 음역이 점점 높아진다. 목 부분에는 손가락을 짚는 지판(Finger Board)이 있는데, 지판 위의 프렛에 현을 닿게 하여 음의 높낮이를 조절한다.

기타의 종류로는, 몸체의 울림을 통해 소리를 증폭하는 통기타(Acoustic Guitar)와 마그네틱 픽업(Pickup)과 앰프(Amplifier)를 통해 소리를 증폭하는 전기 기타(Electric Guitar), 크게 2가지로 나뉜다.

근대 기타는 기턴(gittern)에서 유래되었다. 기턴은 류트와 비슷한 작은 악기로 13세기 후반에 무어인의 지배 하에 있던 스페인을 거쳐 유럽에 도입되었다. 4줄의 거트 현이 있는 기턴은 음유시인뿐 아니라 귀족 사이에서도 인기 있었다. 이 악기는 15세기 동안 길게 만들어졌고 현은 3줄의 복현이 각각 D, G, B로 조현되었으며 단현은 E로 조현되었다. 각 복현의 제2현은 한 옥타브 높다.

스페인에서 기턴은 비우엘라(vihuela)로 변형되었다. 비우엘라는 평평한 악기로써 옆면은 구부러져 있고, 복현 5줄과 단현 1줄로 되어 있다. 이 악기는 스페인 외의 지역에서는 거의 볼 수 없지만, 영국의 헨리 8세는 스페인 비우엘라를 4개나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아라곤왕 페르디난드의 딸 케서린과의 결혼을 통해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비우엘라는 궁정용 악기인데 반해, 복현 4줄의 기타는 대중적인 음악에 사용된 악기로 16세기 후반에 유럽 도처에 알려졌다. 16세기 중엽에는 특별히 기타를 위한 곡이 작곡되었고, 후안 카를로스 아마트는 1586년에 최초의 교본 《기타라에스파뇨라》를 출판하였다. 100년도 안 되어 기타는 스페인에서 인기 있는 악기가 되었고 비우엘라는 서서히 사라졌다.

클래식 기타(좌)와 일렉트릭 기타(우)의 모습과 부위별 번호매김.

현은 6개가 주류이지만 그 밖에 7현, 10현, 12현 기타 등도 존재한다. 또, 베이스 기타는 4개의 현을 갖춘 것이 보통이지만, 5, 6현을 갖춘 것도 널리 사용된다. 현은 금속, 나일론 등이 쓰인다.

클래식 기타에서 고음의 1~3현에 부드러운 나일론 현을 이용한다. 저음의 4~6현에는 가는 나일론 심에 금속을 휘감은 현을 이용한다. 과거에는 양의 창자를 말려 만든 거트 현을 이용하였으나 안드레스 세고비아 이후로 현대에는 내구성이 높은 나일론 등의 화학 합성 섬유로 만든 현이 주로 쓰인다.

통기타나 전기 기타 대부분은 강철 현의 금속(니켈, 스테인리스 등)의 현을 사용한다.

이 가운데 저음의 현은 가는 금속의 심에 금속을 휘감은 현을 사용한다. 보통 통기타가 3~6현, 전기 기타는 4~6현을 감는다. 현의 종류나 두께에 따라 기타의 음색이 달라지며, 이에 따라 저마다 기타의 느낌이 다르다.

현의 튜닝도 여러 가지가 쓰인다. 보통 저음의 현(6현)부터 E-A-D-G-B-E라는 표준 튜닝이 일반적이다. 이는 수많은 코드나 음계 등을 연주할 때 알맞은 튜닝으로 정착하고 있다.

보통 오른손잡이는 반대쪽 왼손으로 넥 부분을 잡고 현을 누르며 오른손으로 현을 탄현한다. 그러나 반드시 이러한 자세를 갖출 필요는 없다. 왼손잡이인 사람은 가격, 상품 수 등이 크게 불리하기 때문에 왼손잡이용 기타를 준비할 수 없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오른손잡이에 맞춰진 기타에 기존의 반대 자세를 사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는 있지만, 전기 컨트롤러의 위치가 다를 수 있다.

현을 누르는 손은 넥 부분의 아래쪽을 빠져나가듯이 하여 엄지를 목 뒤쪽에 잡고, 집게손가락부터 새끼손가락까지 4개의 현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것이 클래식 스타일, 곧 기본 자세이다. 또 엄지를 넥 위쪽 핑거보드에 가깝게 목 부분을 잡는 스타일도 주로 록 음악에서 이용된다. 시각이나 신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목의 아래쪽부터 손가락을 위치해 현을 누르지 않고, 위쪽부터 손가락을 감싸듯이 하여 현을 눌러 연주하는 연주인도 있다.

클래식 기타의 경우 왼발을 발판에 실어 다리의 위치를 높여서 몸체 측면의 움푹한 곳을 왼발의 넓적다리에 실어 기타를 몸 전체로 감싸 안는 자세로 연주한다. 그 밖의 통기타나 전기 기타의 경우는 발판은 쓰지 않고 기타 측면의 움푹한 곳을 오른쪽 다리의 넓적다리에 실어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또, 무대에서 클래식 기타는 반드시 의자에 앉아 연주하며, 그 밖에는 주로 기타 끈을 매고 어깨에 내려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재즈 기타리스트는 앉아서 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한 때 빅 밴드 시대의 무대 형태의 흔적이라고 여겨진다. 록 음악인은 앉아서 연주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Article 213: 전자우편 (203 words)


전자우편(電子郵便) 또는 이메일()은 컴퓨터통신망(주로 인터넷)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을수 있는 시스템과 해당편지를 일컫는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전자메일(electronic mail)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대한민국최초의 무료전자우편인 한메일이나 구글의 지(G)메일처럼 해당편의에 가입함으로써 인터넷이 연결되면 어디서나 쓸수 있는 망우편, 자신의 컴퓨터에 선택적으로 내려받을수 있는 POP3, 간단하게 우편을 보내는 SMTP방식 등이 주로 쓰인다. 개인콤퓨터통신시절에는 유료로 아이디를 만들어서 전자우편을 쓰곤했다.

전자우편은 인터넷의 발단으로 거슬러올라가며, 사실, 인터넷이 만들어지는데에 없어서는 안되는 도구였다. 여러명이 원격전화접속터미널에서 IBM7094에 기록할수 있게하였고, 디스크에서 온라인으로 파일을 저장할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기능은 사용자들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정보를 주고받는데 힘을 북돋어주었다. 전자우편은 1965년에 시분할 본체컴퓨터의 여러명의 사용자들을 위한 방법으로 시작했다. 이렇다할만한 역사를 갖춘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시설을 갖춘 첫 시스템들 사이에 SDC의 Q32와 MIT의 CTSS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전자 우편은 빠르게 퍼져나가 네트워크 전자 우편이 되었으며, 사용자들이 적어도 1966년까지 다른 컴퓨터들 사이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허용하였다. (SAGE 시스템이 이전에 이와 비슷한 것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아파넷(ARPANET) 컴퓨터 네트워크는 전자 우편의 개발에 큰 공헌을 했다. 1969년에 실험적인 교환 시스템 전자 우편은 만들어지자마자 바로 전송된다는 보고가 있다. 1971년에 레이 톰린슨(Ray Tomlinson)은 컴퓨터와 사용자의 이름을 구분하기 위해 @ 사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파넷은 전자 우편의 대중성을 점진적으로 늘려 나갔으며 아파넷의 킬러 애플리케이션이 되었다.

현대적형태의 전자우편은 1979년, 당시 14살의 인도계미국인인 시바 아야두라이()에 의해 구상되었다고 알려져있는 경우가 있으나, 전자우편은 이미 1970년대중반에 활발히 사용되고있었으며, 아파넷의 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지속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Article 214: 행렬 (886 words)


수학에서, 행렬(行列, )은 수 또는 다항식 등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배열한 것이다. 예를 들어, 실수 1, 9, −13, 20, 5, −16을 2×3 직사각형 위에 배열한 행렬은 다음과 같다.

행렬에는 덧셈과 스칼라배, 곱셈 연산이 존재한다. 크기가 같은 두 행렬은 같은 위치의 성분별로 더할 수 있으며, 첫째 행렬의 열과 둘째 행렬의 행의 수가 같은 두 행렬은 첫째 행렬의 각 행벡터와 둘째 행렬의 각 열벡터의 스칼라곱을 통해 곱할 수 있다. 곱셈의 교환 법칙이나 소거 법칙 등 복소수의 일부 성질들은 행렬 연산에서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가환환 위의 유한 차원 자유 가군(특히, 체 위의 유한 차원 벡터 공간)의 선형 변환을 행렬로 유일하게 표현할 수 있으며, 이는 행렬의 중요한 응용이다. 예를 들어, 3차원 유클리드 공간의 회전은 회전 행렬 을 각 열벡터 에 곱하여 새 열벡터 를 얻는 함수이다. 행렬의 덧셈과 스칼라배는 선형 변환의 점별 덧셈과 점별 스칼라배, 행렬의 곱셈은 선형 변환의 합성에 대응한다. 행렬은 가우스 소거법 등 연립 일차 방정식의 풀이에도 응용된다. 정사각 행렬과 그 선형 변환의 일부 성질들은 그 행렬식 또는 고윳값과 고유 벡터에서 반영된다. 예를 들어, 가환환의 원소를 성분으로 하는 행렬이 역행렬을 가질 필요 충분 조건은 행렬식이 가역원인 것이며, 특히 체의 경우 필요 충분 조건은 행렬식이 0이 아닌 것이다.

행렬은 과학과 수학의 수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응용이 있다. 물리학의 전기 회로 이론, 고전역학, 광학, 전자기학, 양자역학, 양자 전기역학 등 분야에서 응용되며, 컴퓨터 그래픽스에서 3차원 이미지를 2차원 평면에 투영하거나 사실적인 움직임을 그려내기 위해 사용한다. 확률론과 통계학의 마르코프 행렬과 다변수 미적분학의 헤세 행렬 등 역시 행렬의 응용이다. 행렬 계산은 수치해석학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이다. 행렬 분해는 행렬 계산을 이론과 실제 응용에서 모두 단순화할 수 있다. 희소행렬, 띠행렬 등 널리 사용되는 특수한 구조의 행렬들의 경우 특화된 고속 알고리즘들이 존재한다. 천체물리학과 양자물리학 등 분야에서는 무한 행렬도 등장한다.

환  위의  행렬은 각 행  및 열 의 순서쌍 에 환의 원소 를 대응시키는 함수 이다.

행렬 는 모든 성분을 직사각형으로 배열한 다음 소괄호 또는 대괄호를 추가하여

또는

와 같이 표기한다.

각 를 의 번째 행 번째 열의 성분(成分, ) 또는 원소(元素, ) 또는 계수(係數, )라고 한다. 행렬 의 각 성분은 행과 열의 번째수를 첨수로 사용하여 , , , , ,  등과 같이 나타낸다. 행과 열의 번째수가 같은 성분  ()을 의 대각 성분(對角成分, ) 또는 대각 원소(對角元素, ) 또는 대각 요소(對角要素) 또는 주대각선 성분이라고 한다.

환  위의  행렬의 집합은  또는 로 표기한다.

행렬 의 크기()는 행과 열의 수의 순서쌍  또는 을 뜻한다. 일부 특수한 크기의 행렬들은 특별한 이름으로 불린다.

특히, 행렬 의 번째 행벡터와 번째 열벡터는 각각

와

이며, 이를 통해 행렬을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행렬들에 대하여 덧셈, 스칼라배, 곱셈, 전치 행렬 등의 연산을 정의할 수 있으며, 정사각 행렬은 역행렬, 대각합, 행렬식 등 연산이 추가로 정의된다. 덧셈은 같은 크기의 두 행렬에 대해서만 정의되며, 곱셈은 오직 첫 번째 행렬의 열의 수와 두 번째 행렬의 행의 수가 같은 경우에만 정의된다. 역행렬은 가역 정사각 행렬에 대하여 정의되며, 행렬식은 가환환 위의 정사각 행렬에 대하여 정의된다.

환  위의 두 의 행렬 의 합 은 두 행렬을 성분별로 합한  행렬이다. 즉, 각 행과 열 , 에 대하여,

이다.

실수 행렬의 예는 다음과 같다.

환  위의 의 행렬  및 환의 원소 에 대하여, 왼쪽·오른쪽 스칼라배 는 각각 행렬의 각 성분의 왼쪽·오른쪽에 스칼라를 곱한  행렬이다.

만약 가 가환환일 경우, 이 두 연산은 일치하며, 이를 스칼라배라고 부른다.

실수 행렬의 예는 다음과 같다.

환  위의  행렬의 집합 은 위 덧셈과 왼쪽·오른쪽 스칼라배에 따라 -쌍가군을 이룬다. 만약 가 가환환일 경우, 이는 (덧셈과 스칼라배에 따른) -가군이 되며, 특히 만약 가 체일 경우 -벡터 공간이다. 이 쌍가군의 덧셈 항등원은 영행렬(즉, 모든 성분이 0인 행렬)

이며, 각 행렬 의 덧셈 역원은 성분별 덧셈 역원

이다.

특히, 두 행렬 의 차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환  위의  행렬의 -쌍가군 는 왼쪽 가군으로서 차원 왼쪽 자유 가군을 이루며, 오른쪽 가군으로서 차원 오른쪽 자유 가군을 이룬다. 가 가환환일 경우 차원 자유 -가군이다. 그 한 기저는 다음과 같다.

환  위의  행렬 와  행렬 의 곱 는  행렬이며, 그 번째 행 번째 열 성분은 의 번째 행벡터와 의 번째 열벡터의 ‘스칼라곱’이다 (둘 모두 차원 벡터이므로 ‘스칼라곱’이 정의된다).

다음은 실수 행렬의 예다.

행벡터와 열벡터

를 통해 행렬 곱셈을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행렬 곱셈은 결합 법칙을 만족시킨다. 즉, 환  위의 임의의  행렬  및  행렬  및  행렬 에 대하여,

가 성립한다.

행렬 곱셈은 함수

로서 -쌍선형 함수를 이룬다.

특히, 환  위의 정사각 행렬들의 -쌍가군 는 그 위의 행렬 곱셈에 따라 -결합 대수를 이룬다. 특히 환을 이루며, 행렬환(行列環, )이라고 한다. 행렬환의 곱셈 항등원은 단위 행렬(즉, 모든 대각 성분이 1, 그 밖의 성분이 0인 행렬)

이다.

행렬환은 일반적으로 가환환이 아니다. 즉, 행렬 곱셈의 교환 법칙은 (체의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실수 2×2 행렬의 경우

이지만

이다.

물론 가환하는 두 행렬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가환환 위의 스칼라 행렬은 (같은 크기의) 모든 행렬과 가환한다. 또한, 가환환  및 정사각 행렬 에 대하여,

는 가환환이다.

행렬환은 일반적으로 0이 아닌 왼쪽·오른쪽 영인자를 갖는다. 즉, 0이 아닌 두 행렬의 곱은 0일 수 있으며, 소거 법칙이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실수 행렬에서

이다.

행렬환 의 가역원은 가역 행렬이라고 하며, 그 곱셈 역원은 역행렬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행렬환은 (체 위에서도) 0이 아닌 비가역 행렬을 갖는다. 예를 들어, 실수 2×2 정사각 행렬

은 가역 행렬이 아니다.

만약 가 가환환일 경우, 가역 행렬은 행렬식이 환의 가역원인 것과 동치이며, 특히 체의 경우 행렬식이 0이 아닌 것과 동치이다. 또한, 가역 행렬 의 역행렬은 행렬식과 수반 행렬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환  위의  행렬 의 전치 행렬 는 행과 열을 교환한  행렬이다. 즉, 각  및 에 대하여,

이다.

다음은 실수 행렬의 예다.

이다.

전치 행렬은 함수

로서 -쌍가군 동형을 이루며, 그 역함수 또한 (정의역과 공역이 뒤바뀐) 전치 행렬이다.

또한, 임의의  행렬  및  행렬 에 대하여,

이다.




#Article 215: 요리 (108 words)


요리()는 음식을 가공 행위 자체를 의미한다. 크게 나누어 지역별로, 시대별로 그 종류를 구분할 수 있다.

각종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터 여러가지 과정을 거쳐 음식을 만들고 시식 후 처리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요리는 여러 조리과정을 거쳐 음식을 만드는 것이나 그 음식을 말하며 주로 가열한 것을 말한다. 조리(調理)는 요리를 만드는 일이나 그 방법, 과정 등을 말한다.

음식의 조리법을 뜻하는 레서피(레시피)()는 조리법으로 순화어를 쓰도록 되었다.

문명이 출현하면서 사회집단 또는 부족에 따라서 전통적인 요리법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기후, 토양, 동물 분포와 같은 지역적인 요인에 따라서 서로 다른 전통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얼마나 청결한 것을 좋아하는가와 자신들의 사회구조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종교적 금기를 지키는가에 따라서 요리법이 달라지기도 했다. 전통 음식은 국가, 지역별로 다음과 같이 나뉜다:




#Article 216: 중국 요리 (770 words)


중국 요리(中國料理)는 중국의 음식을 말한다. 중식(中食), 중화요리(中華料理), 또는 청요리(淸料理)로도 불린다. 중국의 화교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나가 세계 지역의 특성에 맞게 바꾼 요리를 말하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중궈차이()라고 부른다. 중국은 국토가 아주 넓어 각 지방의 기후, 풍토, 산물 등에 각기 다른 특색이 있다. 그에 따라 경제, 지리,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요소가 작용하여 4대 요리를 형성하였다.

중국 요리 거의 대부분은 적당한 크기로 손질되어 바로 집어 먹을 수 있게 되어있다. 전통적으로 중국 문화는 식탁에서 칼과 포크를 이용하는 것을 야만스럽게 본다. 이는 이런 도구들이 무기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손님이 직접 음식을 자르는 것도 무례한 것으로 여긴다.

생선 요리는 보통 완전히 요리되어 나오며 젓가락으로 살코기 덩어리를 집어 먹는다. 다른 종류의 요리는 보통 발라내서 먹는데 이와 대조된다. 가능한 신선하게 대접해야 한다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물고기는 문화적으로 완전함을 상징하므로 머리와 꼬리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수많은 식당에서 두 개의 숟가락을 이용하여 고기를 나눠 식탁에 올려 놓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닭고기 또한 중국 요리에 있어 자주 사용되는 재료이다. 닭의 살코기를 여러 갈래로 찢어 놓아 벼슬까지 대접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완전함을 상징한다.

베이징 요리와 난징 요리와 쓰촨 요리와 광둥 요리가 대표적이며, 이 외에도 산둥 요리, 후난 요리, 푸젠 요리, 회족들의 음식에서 유래한 칭전 요리가 있다.

중국에서는 사대 요리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화이양 요리 대신 저장 요리(江浙菜)가 손꼽히기도 한다.

중국에서 가장 일반적인 구분법은 중국 8대 요리이다.

식재를 다듬을 때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

중화 요리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조리를 한다.

채식주의는 서양과 사실상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흔하지 않다. 중국 채식주의자들은 두부를 많이 먹는다. 중국의 채식주의자들 절대다수가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며 고통을 줄이는 불교적 가르침을 따른다. 중국의 채식주의적 요리는 커다랗고 다양한 야채를 포함하고 있으며 고기를 모방한 음식도 몇 가지 넣는다. 고기 모방 요리는 대부분 콩 단백질과 글루텐으로 만들어 오리, 닭, 돼지와 유사한 모양과 맛을 낸다. 콘작을 이용한 해산물 모방 요리도 존재한다.

전통 중국 문화에서, 차가운 음료는 뜨거운 음식을 잘 소화시킬 수 없다는 믿음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므로 차가운 물이나 청량 음료와 같은 액체는 전통적으로 식사 시간에는 취급하지 않는다. 죽이 나오면, 뜨거운 차나 뜨거운 물 등의 음료가 식탁에 오른다. 차는 기름진 음식의 소화를 돕는다는 믿음이 있다.

이러한 전통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맥주와 청량 음료를 중화 음식과 함께 널리 받아들이고 있다. 중국 지방의 조그마한 식당의 많은 수가 찬 맥주에 핫 팟을 둔 렁단베이(冷淡杯)라는 음료를 취급하며 이는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에서 차는 아주 널리 사랑받고 있다. 북방지역에서는 화차, 상해와 절강성 등 중부지방에서는 녹차, 남부지방에서는 우롱차를 즐겨마신다. 이외에도 중국내 생산량의 1/4을 차지하는 홍차와 백차 등도 있다. 손님이 오면 주인은 거듭 석 잔을 권하는데, 처음 두 잔은 자유롭게 마셔도 되지만 마지막 잔은 한 번에 마시는 것이 예절이다.

황주는 3~4천 년의 역사가 있는 술로 곡식으로 제조하는 발효주이며 종류가 다양한데 홍여주가 유명하다. 백주는 천 년의 역사가 있는 곡주로 40도 이상의 증류주로 무색투명하며 특이한 향이 난다. 우량이에, 마오타이가 유명하다. 포도주도 2천 년의 역사가 있으며 장백산 포도주, 통화 포도주 등이 있다. 중국의 맥주 생산량은 세계 3위를 차지한 적도 있는데, 청도맥주, 오성맥주가 유명하다. 보통 식사가 나오기전에 건배를 하며, 술잔을 돌리지 않는다. 상대방의 술잔이 비면 즉시 따라 주는데, 비우지 않았는데도 첨잔하며 계속 권한다. 술잔은 술을 마신 후 밑을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주인이 손님에게 권한다.

보통 만찬을 위한 식당에 가면 요리가 나오는 순서가 있는데, 보통 차가운 요리를 먼저 내온 후 더운 요리를 내온다. 더운 요리도 흔히 먹는 볶음요리(热炒)가 먼저 나오고, 가장 중요한 주요리는 그 다음에 나온다. 주요리는 해삼, 전복, 샥스핀, 제비집 등으로 만든 고급 요리 또는 오리나 돼지를 재료로 만든 요리가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요리 중간 중간에 디옌신(딤섬)이 나오는데 보통 식욕을 돋우기 위하여 짠맛의 디옌신이 올라오고, 단맛의 디옌신은 디저트로 먹는다. 주요리가 끝나면 밥이나 면으로 식사를 하는데, 요리가 충분하면 건너뛰고 탕을 마신다. 그 다음 단맛이 나는 디저트와 과일을 먹는다.
주문을 할 때에는 이 순서를 고려해서 냉채, 볶음요리, 주요리, 디예신을 각각 선택을 하되, 보통 사람 수 만큼의 주요리를 시키면 적당하다.

초대를 받았을 때 정해진 자리에 앉아야 한다. 원형 테이블이 놓인 자리에서는 안쪽의 중앙이 주인석이다. 일반적으로 식단은 전채 2~4종, 탕 6~8종, 디저트 2종 등 짝수로 나오는데, 커다란 접시에 담긴 요리를 각자의 접시에 먹을 만큼 덜어내어 먹는다. 보통 손님이 먼저 덜고 주인이 나중에 덜어 낸다.

요리는 한 접시에 한 가지씩만 먹고 여러 요리를 한꺼번에 가져다 먹지 않는다. 음식의 맛이 섞이지 않도록 접시를 바꾸어 먹는데, 접시를 들고 먹거나 국수를 소리내어 먹거나 죽 종류는 그릇을 입에 대고 먹지는 않는다. 생선을 먹을 때에는 뒤집어서 먹지 않는데, 이는 배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요리가 나올 때 주인이 권하면 주빈부터 사양하지 말고 먹도록 한다. 찰기가 없는 중국쌀의 특성으로 인해 국그릇과 접시는 식탁에 올려둔 채로 먹고 밥그릇은 들고 먹어야 한다. 밥그릇을 들고 먹는 이유는 중국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먹는 모습을 마치 동물이 먹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릇에 입을 대는 것은 금물이다.

대화도 중요하지만 대화 때문에 음식을 식어버리게 하거나, 자기 앞에 고정시키면 안된다. 중국에서는 음식을 조금 남기는 것이 예의이다. 음식을 남김없이 모두 다 먹으면 준비한 음식이 부족했다는 의미로 해석되므로 주인이 미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단 개인의 앞접시에 담은 음식은 모두 먹는 것이 예의이다. 디저트는 주로 단 음식이 나오기 때문에 조금씩 덜어서 먹도록 한다.




#Article 217: 짜장면 (375 words)


짜장면(--麵) 또는 자장면(--麵)은 양파 등 채소와 돼지고기에 춘장을 넣어 식용유와 함께 볶은 양념을 굵은 국수에 비벼서 먹는 한국식 중국 요리이다. 짜장면은 중국의 자장몐이 한국식으로 변형된 것이다.

굵은 국수에 검은색에 가까운 양념을 얹어 비벼 먹는다.

짜장면 1인분의 열량은 대략 700kcal 정도로, 이는 한국 성인 기준 남성 1일 섭취량의 28%, 여성의 35%이다.

종류는 다양하며,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짜장면은 1980년대 중반부터 인스턴트 식품으로 가공되어 짜장라면 (짜파게티, 짜짜로니 등)이 판매되고 있다.

그 밖에도 일반 짜장면에 다양한 토핑을 얹어서 먹는 종류의 짜장면도 있다.

짜장면은 중국의 산둥 반도 지역의 가정식이었던 자장몐(炸醬麵)이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하여 만들어진 음식이다. 지금도 베이징에서는 라오베이징자장몐다왕(老北京炸醬麵大王)등 전문점이 산동식 자장몐을 판다. 1890년대 중국 산둥(山東) 지방에서 건너 온 부두 근로자인 쿠리(苦力·하역 인부)들이 인천항 부둣가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춘장에 국수를 비벼 먹던 음식이 짜장면의 시작이었다. 이후 청조계지를 중심으로 짜장면을 만들어 파는 중식음식점이 많이 생겼는데, 흔히 '원조 짜장면 집'으로 알려진 공화춘은 1905년에 문을 열었다.

짜장면은 저렴한 가격에 어디서나 시켜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북극해 횡단을 3개월 만에 마친 등산가 허영호씨는 인터뷰에서 가장 먹고 싶은 음식으로 짜장면을 꼽기도 해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 외식산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전인 1980년대 이전에는 서민들이 외식할 때 가장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각광 받았으며, 특히 입학·졸업·생일을 축하할 때, 이사를 가는 날 등에 가족들이 같이 즐겨 먹었다.

god의 1집에 수록된 《어머님께》에서도 짜장면을 통해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노래뿐만 아니라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 《살인의 추억》과 드라마 《환상의 커플》 등 많은 작품에서 짜장면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 허영만 화백의 만화 《식객》에서는 중화요리의 대를 이어온 화교 삼부자 이야기에 등장했다.

문교부(현 교육부)가 1986년 고시한 외래어 표기법과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자장면'만이 표준어이고 맞춤법에 맞는 표기로 실려 있었다. 국립국어원 박용찬의 설명에 따르면, 자장면은 짬뽕과는 달리, 중국 된장을 가리키는 '자장'과 한자어인 '면'(麵)이 결합한 형태로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2002년에 발행된 표준 발음 실태 조사(최혜원,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서울·경기 지방 사람 210명 중, 72%가 '자장면'이 아닌 '짜장면'으로 발음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한편, 시인 안도현은 그의 작품 《짜장면》의 제목과 관련해 짜장면을 먹자고 해야지, 자장면을 먹자고 하면 영 입맛이 당기지 않을 게 뻔하다.라고 썼다. 그 밖에도 짜장면은 자장면으로 쓰면서 짬뽕은 왜 잠봉이 아닌지 의문이 들게 만든다라면서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비판하는 견해가 있었다.

한편, 2009년 5월 17일, SBS TV의 시사·교양 프로그램인 SBS 스페셜의 164회 자장면의 진실에서 짜장면이란 표기의 정당성을 내세웠다. 이와 더불어 해당 프로그램에서 자체적으로 자장면과 짜장면의 표기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당시 응답자 중 91.8%가 짜장면으로 부르고 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Article 218: 블랙데이 (157 words)


블랙데이(Black Day)는 매년 4월 14일,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에 선물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짜장면을 먹는 날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대중 문화에서 매월 14일째 되는 날 일정한 의미를 담아 특별한 행동을 하는 비공식 기념일의 일종이다. 2월 14일인 발렌타인데이와 3월 14일인 화이트데이 바로 다음에 돌아오는 14일이라는 점에서 그 두 기념일의 의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블랙데이 다음에 돌아오는 5월 14일은 로즈데이이다.

블랙데이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990년대 신문 기사들로, 어느 신문은 블랙데이에 대해 “애인이 없는 남녀 청소년들이 검은색 옷을 입고 끼리끼리 몰려다니다 짜장면과 블랙 커피, 아메리카노등 검은색 계통의 음식을 먹으며 서로 위로하는 날”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쪽에서는 청소년 사이에서 시작된 유행이 2000년대 들어 2-30대로 퍼져나가게 된 것은 아니냐 하는 해석도 있다. 한편 솔로의 우울함을 블랙으로 표현했다는 설도 있다.

여느 '데이'와 마찬가지로, 빼빼로데이처럼 마케팅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으나, 특정회사의 독점 상품이 아닌 일반적인 짜장면이기 때문에 비판의 근거는 약한 편이다. 실제로 중국집()들이 블랙데이 기념으로 특별히 짜장면을 판촉하지도 않으며, 이날에 한해 매출이 크게 오르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Article 219: 성당과 시장 (205 words)


에릭 레이먼드가 쓴 〈성당과 시장〉(The Cathedral and the Bazaar)은 자유 소프트웨어 철학을 대변하는 유명한 글이다. 레이먼드는 이 글에서 리눅스 커널 개발과정과 패치메일이라는 오픈 소스 프로젝트를 개발한 경험을 들어 오픈 소스 개발 방식의 유효성을 설명한다. 1997년 5월 27일 리눅스 회의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1999년 같은 이름의 책에 포함되어 출판되었다.

글에서 저자는 두 가지 방식의 자유 소프트웨어 개발 모델을 대조한다.

글의 주제는 그가 리누스 법칙이라고 이름붙인 보는 눈만 많다면, 어떤 버그라도 쉽게 잡을 수 있다는 명제이다. 이 말은 많은 사람이 테스트하고 훑어보고 실험해 볼 수 있도록 코드가 공개되어 있으면 버그는 빨리 잡힐 것이란 뜻이다. 이에 대해 성당 모델에서는 소스 코드를 여러 명의 개발자들만 볼 수 있으므로 버그를 잡는데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든다고 주장했다.

이 글로 인해 GNU 이맥스와 GCC를 포함한 많은 오픈 소스와 자유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들이 시장식의 열린 개발 모델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넷스케이프가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터의 소스를 공개한 것과 모질라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성당 모델은 상용 소프트웨어의 전형적인 개발 방식이다. 더욱이 상용 소프트웨어는 보통 출시 때 소스가 같이 제공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장과 성당이라는 구문은 종종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와 상용 소프트웨어를 비유하는 데에 쓰인다. 그러나 원래 글에서는 자유 소프트웨어들 중에 두 종류를 비교하여 설명하고 상용 소프트웨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성당과 시장의 예는 소프트웨어 프로젝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위키백과는 시장식의 프로젝트이고, 누피디아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성당형의 프로젝트이다.




#Article 220: 대한민국 기상청 (167 words)


기상청(氣象廳, , 약칭: KMA)은 기상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대한민국의 중앙행정기관이다. 1990년 12월 27일 중앙기상대를 개편하여 발족하였으며, 서울특별시 동작구 여의대방로16길 61에 위치하고 있다. 청장은 차관급 정무직공무원으로, 차장은 고위공무원단 가등급에 속하는 일반직공무원으로 보한다. 

대한제국 농상공부 설치한 관측소가 기상청의 전신이다. 당시 관측소는 러일 전쟁 때 일본의 필요로 설치되었는데 이 때문에 인천광역시에 설치된 것이 중앙관상대의 역할을 수행했다. 1912년에는 내무부 학무국 소관이 되었다가 해방 후 학무국이 문교부로 독립하면서 문교부 소관이 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유지되었으며, 인천에 위치한 중앙관상대가 서울로 이전한 것은 1948년 3월 1일의 일이다. 다만, 근거 법령은 1949년 8월 18일에 제정되었다.

초기에는 관상대라고 불렀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관상감'(觀象監)이라는 직책에서 유래했다. 천문·지리·책력·측후 등을 관장한 기관으로 천체 현상을 관찰해 백성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기상청에 두는 공무원의 정원은 다음과 같다.

총수입·총지출 기준 2020년 재정 규모는 다음과 같다.

기상청은 슈퍼컴퓨터 1호기를 2000년 9월에 도입하였고, 2005년 8월 2호기, 2010년 12월 3호기, 2015년 12월 4호기를 도입하였으며, 2020년 12월 5호기를 도입할 예정이다.

날씨ON은 기상청에서 국민에게 기상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2007년 5월 10일부터 시험운영하는 인터넷 기상방송으로 2007년 8월 4일부터 정식 개국하였다.

기상청은 2015년 6월 말 애플리케이션을 폐지하였다.




#Article 221: 열대 저기압 (1233 words)


열대 저기압(熱帶低氣壓, tropical cyclone)은 지구의 열대 지역에서 발생하는 저기압이다. 이들은 발생 지역에 따라 '태풍', '허리케인', '사이클론' 으로 불린다. 오스트레일리아 부근에서 발생하는 열대 저기압을 '윌리윌리'로 불른다.

열대 저기압은 여러날 동안 지속될 수 있고, 예보에서 올 수 있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름이 붙는다. 주변 관계국들이 이름을 붙이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정한다.

북서태평양에서 발생하는 열대 저기압의 최대 풍속은 대한민국 기상청, 일본 도쿄에 위치한 지역특별기상센터(RSMC) 등 대부분의 기관에서 1미터 상공의 풍속을 10분간 측정한 평균값을 사용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1미터 상공의 풍속을 1분간 측정한 평균값을 사용하고 있다. 기압은 헥토파스칼(hPa), 강수량은 밀리미터(mm)를 표준 단위로 사용한다.

미국에서는 사피어-심프슨 허리케인 등급(SSHS)이라는 등급을 이용하여, 5등급을 가장 강력한 열대 저기압으로 분류하고 있다. 2003년에 대한민국을 강타한 태풍 매미는 5등급 태풍이었고,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도 5등급 허리케인이었다. 2008년 미얀마 최대도시 양곤 등을 강타하여 10만 명 이상을 사망하게 한 사이클론 나르기스는 4등급 사이클론이었다.

미군은 전 세계에 배치되어 있으며, 특히 전 세계에 10여 대의 항공모함 함대가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태풍의 경보와 그에 따른 함대의 이동이 중요하다. 그래서, 하와이주 진주만의 해군해양기상센터(Naval Maritime Forecast Center) 내에 미국 해군과 미국 공군이 합동으로 운영하는, 합동태풍경보센터(JTWC)가 있다. 대부분의 해역에서 발생하는 열대 저기압의 이동 상황 등을 전 세계 미군에게 알려주고 있다.

대한민국은 2008년 4월 21일 국가태풍센터를 제주도에 설립하였다. 대한민국의 국가태풍센터는 전 세계의 열대 저기압을 감시 하지 않으며, 일본 도쿄 지역특별기상센터처럼 북서태평양의 태풍만 감시하고 관측한다.

열대성 저기압은 열대의 넓은 해상에서 발생하고 발달하기 때문에 그 실태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주로 남태평양에 있는 몇몇 섬에서 관측이 행해졌고, 그 외에는 때때로 그 해역을 지나가는 배에서 전해 주는 기상통보에 의해 열대성 저기압의 존재를 알 뿐이었다. 따라서 열대성 저기압의 위치도 정확하지 않았고, 강도 또한 열대성 저기압이 때때로 섬을 통과할 때나 배가 태풍 중심에 휘말려 들어갈 때 외에는 알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면 미군의 비행기가 그 중심까지 날아가 관측하게 되어 이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열대성 저기압이 관측지 근처에 가까이 오면 각지에 있는 레이다에 의해 저기압을 연속적으로 감시할 수 있게 되었다. 열대성 저기압을 레이다로 관측하면 열대성 저기압 주위에 있는 특유한 구름 분포가 찍히는데, 이것으로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위치를 정할 수 있다. 또한 1977년부터 쏘아올린 기상위성에서 열대성 저기압 주위의 구름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현재는 일기도에 의해 열대성 저기압의 정황을 알 수 있게 된 것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열대성 저기압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게 되어 갑작스럽게 열대성 저기압이 엄습하여 피해를 입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할 것 같다는 정보가 들어오면 하루에 두세 번 미군 비행기가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까지 들어가 레이다나 드롭 존데를 이용하여 열대성 저기압을 자세히 관측한다. 열대성 저기압의 등압선은 거의 원형이므로 비행기가 언제라도 왼쪽으로 바람을 받아 날아가면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에 다가갈 수 있다. 중심에 가까이 가면 레이다로 중심의 위치를 잡아 더욱 중심에 가까이 접근한다. 격렬한 동요와 강한 비가 내리는 지역을 뚫고 나가 열대성 저기압의 눈 안에 들어간 다음 그 안에서 8자를 그리듯이 비행한다. 그러면 정확한 중심 위치가 정해지기 때문에 여기에서 드롭 존데를 떨어뜨려 비행 고도에서 해면까지 사이의 기온과 습도를 측정하고, 또 해면에서 중심 기압을 구한다. 그리고 파도의 상태로 해면 부근의 풍속을 추정한다.

열대성 저기압이 200 ~ 300km 거리까지 다가오면 레이다로 열대성 저기압을 관측할 수 있다. 레이다로 찍은 열대성 저기압을 보면 중심 주위를 나선형 구름이 몇 줄 에워싸고 있는데, 이 사진으로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위치를 알 수 있다.

레이다의 경우는 비가 내리고 있는 구름밖에 찍을 수 없지만 위성에서 본 경우에는 상층의 구름 등 비가 내리고 있지 않은 곳도 찍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진에 의해 열대성 저기압의 위치를 알 수 있으며, 연속 사진으로 열대성 저기압의 진로나 강도의 변화 등도 추정할 수 있다.

미국의 극궤도 기상위성 NOAA는 하루에 두 차례 대한민국 상공을 통과한다. 이러한 기상위성의 관측 데이터는 기상위성센터에서 처리하는데, 구름 화상 사진으로 작성하여 태풍감시나 기상예보에 이용되고 있다.

열대성 저기압은 여러 가지 점에서 온대성 저기압과는 다르다. 열대성 저기압은 그 중심부에 눈을 갖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인데, 열대성 저기압의 구조도 눈의 안과 밖으로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

열대성 저기압을 레이다로 관측하면 고도 십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적란운이 중심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이 고리 모양의 구름을 벽운(壁雲)이라 하며 그 안쪽을 태풍의 눈이라고 한다. 눈의 크기는 평균 15 ~ 20km 정도이지만 열대성 저기압에 따라 다르며, 같은 열대성 저기압이라도 시간적으로 매우 다르다. 눈의 모양은 거의 원형이나 타원형으로, 길다란 띠 모양으로 연결된 적란운이 주위에서 모여들어 벽운을 형성하고 있다. 레이다에 찍히는 것은 굵은 빗방울을 내리게 하는 구름뿐이며, 찍히지 않는 검은 부분이라도 실제로는 구름이 있다. 또한 비행기로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에 들어가 보면 태풍의 눈 안에도 구름이 있다. 이 구름은 벽운처럼 길다란 것이 아니라 틈이 있어 해가 비치거나 별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일기도상에서는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주위에 동심원 모양을 한 등압선이 많이 그려져 있으며, 중심에 가까울수록 그 간격은 좁아진다. 또한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이 지나간 관측소의 기압이나 풍속의 변화를 보면, 기압은 중심에 가까우면 급격히 낮아지고 바람도 급격히 강해지지만, 태풍의 눈 안에서는 갑자기 약해진다. 지표의 열대성 저기압의 주위에서는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쳐 바람이 등압선과 20 ~ 30°각도로 열대성 저기압 안으로 불어들고 있는데,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고 있는 상공의 바람을 비행기에서 보면 중심에서 극히 가까운 곳을 제외하면 중심에서 바깥쪽을 향해 불어나오고 있다.

열대성 저기압이 열대 지역에 있는 동안은 지표의 열대성 저기압 지역 내의 기온에 큰 차이가 없다. 이러한 점에서 온대성 저기압의 경우에는 난역과 한역(寒域) 사이에 커다란 온도차가 있으므로 열대성 저기압과 상당히 다르다. 열대성 저기압 주위의 상공의 기온은 매우 특징있는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것을 비행기에서 관측해 보면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부근에서는 온도가 매우 높고, 주위로 갈수록 온도가 낮아진다. 그리고 그 도중에는 온도가 높은 곳과 낮은 곳이 서로 교대로 나타난다. 온도가 높은 띠 모양의 구역은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부근에서 사방으로 뻗어 있는 띠 모양의 구름과 일치한다. 태풍의 눈 내부가 기온이 매우 높은 것은 이곳이 하강기류 영역이기 때문이며, 중심 부근에서 일반적으로 기온이 높은 것은 구름 속에서 다량의 수증기가 응결하여 잠열(潛熱)을 방출하기 때문이다.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는 곳은 편동풍 골의 끝부분이나 중위도에서 뻗어 있는 기압골 위쪽 등 상승 기류가 있는 곳이다. 열대의 해면은 수온이 높고 햇빛이 강하기 때문에 증발이 활발하여 대기는 충분히 습해져 있다. 또한 라디오 존데 관측 결과에 의하면 열대의 대기는 조건부 불안정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대기가 어느 정도 상승하여 포화 상태에 도달하면 그 다음은 점점 상승하려는 성질이 있어서 적란운이 형성된다. 적란운 안에는 다량의 수증기가 응결하여 잠열이 방출되기 때문에 온도가 높아진다.

한편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는 것은 상공에서 커다란 기류의 발산이 있을 때라는 것이 알려져 있다. 해면의 적란운 주위에서 수렴하여 상승한 기류가 상공에서 발산하여 그것이 하층의 수렴을 웃돌게 되면 기압이 내려간다. 또한, 적란운으로 에워싸인 눈 안에서는 강한 하강 기류가 있기 때문에 공기는 단열적으로 온도가 상승하여 기온이 한층 높아진다. 기온이 높아지면 밀도가 감소하기 때문에 중심부의 기압은 눈 주위보다 더욱 낮아진다. 계산에 따르면, 태풍의 중심부에서는 온도의 상승에 의해 밀도가 감소한 것만큼 기압이 낮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하여 기압이 내려가면 주위에서 기류가 수렴하여 적란운을 더 한층 발달시킴에 따라 열대성 저기압이 점점 발달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열대성 저기압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해면에서 다량의 수증기가 증발하여 대기가 충분한 습기를 가지는 것이 첫째 조건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태풍이 발달하려면 표면 수온이 26 ~ 27℃ 이상이어야 한다. 열대의 해양에서도 남동태평양에서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지 않는 것은 수온이 낮기 때문이다. 또한 북서 태평양에서 강한 태풍이 된 것은 모두 수온이 28℃ 이상인 곳에서 급속히 발달한 것이다. 지금까지 비행기 관측으로 얻은 열대 저기압의 중심 기압의 최저치는 870hPa로, 열대에서의 평상시 기압보다도 135hPa나 낮은 수치이다.

열대성 저기압은 해면의 수온이 높고 상승 기류가 있는 곳에서, 그리고 상공에서 큰 발산이 있는 경우에 발달한다. 실제로 태풍의 발달 상황을 조사해 보면 발생하고 나서 2, 3일 후에 급속히 발달하는 경우가 많다. 하루에 한 차례만 기상 통보를 수신하던 배가 갑자기 열대성 저기압이 발달하여 당황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넓은 해면에서는 수온이나 기류의 상태가 열대성 저기압이 발달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장소가 있다. 열대성 저기압이 이와 같은 곳으로 오면 발달이 멈추고 쇠퇴한다. 그러나 일단 발달한 열대성 저기압은 열대 해상에서 금방 소멸하지는 않는다.

열대성 저기압은 육지에 오르면 해면에서 수증기의 보급이 없어져 표면 마찰이 커지기 때문에 급속도로 쇠퇴한다.

가을에 중위도까지 와서 일단 주춤한 열대성 저기압이 온대성 저기압 성질을 갖기 시작하여 다시 발달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진행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특별히 경계를 필요로 한다.




#Article 222: 자유민주당 (일본) (2657 words)


자유민주당(, ), 약칭 자민당()은 1955년에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이 합쳐져 창당된 일본의 보수주의 정당이며 2021년 현재 총재는 스가 요시히데, 간사장은 니카이 도시히로이다.

소속 의원들은 당내의 특정 파벌에 속해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총리나 내각 인사의 선출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민당은 창당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당 지도부의 힘이 약했고, 대신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이 각각 자신을 따르는 의원들로 구성된 파벌을 형성해 각 파벌 간의 대립과 합종연횡을 통해 당이 운영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이는 한 정당이 한 선거구에 여러 명의 후보를 내야만 하는 중선거구제를 선거 제도로 채택했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는데, 중선거구제 하에서는 같은 선거구에 출마한 자민당 후보들은 서로가 같은 당에 소속된 동지임과 동시에 당선을 다투는 라이벌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한 선거구에 입후보자가 여러 명이어서 한 후보자가 중앙당의 선거 지원을 독차지할 수 없었기에 각 후보자는 선거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개인 후원회를 조직하거나, 영향력이 강한 정치인의 파벌에 들어가 그 정치인의 뜻에 따르면서 선거 때마다 파벌의 지원을 받는 방법을 택했다. 이렇게 형성된 파벌 정치는 서로가 유권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돈을 선거에 이용하는 금권 정치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자민당은 보수, 우익 정당이지만, 55년 체제 하에서는 서방의 보수 정권과 비교해 사회, 경제 전반에 있어 정부의 개입이 심했고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자민당 정권은 정부가 국가 경제 정책을 모두 관리하면서 여러 산업 분야 중 경쟁력이 부족한 분야의 기업들이 낙오되지 않도록 행정 절차상 인허가 권한 등을 이용해 이들을 적극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또한 농업 종사자에게 보조금을 교부하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합동으로 여러 공공사업을 실시했다. 이렇게 강력한 정부 개입으로 추진된 일련의 정책들이 소득 격차 해소 및 리스크의 사회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비추어진다는 평가와 함께 일본의 전후 자민당 체제는 그들의 이념과는 결함되게도 성공한 사회주의 체제였다라는 비아냥마저 나오기도 했다.

자민당은 일본의 여러 유명 정치인을 배출했다. 1990년대 이후 정계계편을 통해 야당의 유력 정치인이 된 사람들도 그 뿌리를 따져보면 자민당 출신이 꽤 많다. 자민당 출신으로서 야권에 자리를 잡은 인사로는 호소카와 모리히로, 하타 쓰토무, 하토야마 유키오, 오카다 가쓰야, 오자와 이치로, 가메이 시즈카 등이 있다.

창당 이후 언론 매체 등에서는 본 명칭인 자유민주당과 약칭인 자민당을 자유롭게 혼용해 왔으나, 1990년대에 간 나오토 및 하토야마 유키오가 민주당을, 오자와 이치로가 자유당을 창당하고 나서부터는 혼동을 막기 위해 자유민주당을 언급할 때는 본 명칭인 자유민주당은 잘 쓰이지 않고 약칭인 자민당이 더 자주 쓰인다. 같은 이유로 당의 기관지 이름도 자유신보에서 자유민주로 바꾸었다.

제45회 총선거 패배로 야당이 된 직후인 2009년 9월에 열린 자민당의 집권 구상 회의에서는 자유민주당이라는 당명에 여론의 거부 반응이 있다며 당명 변경론이 나왔다. 새 당명으로는 화혼당(), 자유신당() 등이 제안되었지만, 당의 체질 개선이 먼저인데 당명을 바꾸자는 건 본말전도인 것 같다는 등 당 내부의 비판이 나오자 결국 무산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50년대 초반까지 일본의 정치 구도는 좌익과 우익 모두 분열된 상태에 있었다. 전후 일본의 우익 세력은 전쟁 전의 입헌정우회나 입헌민정당의 계보를 잇는 여러 정당으로 나뉘어졌고, 이들의 통합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지만 실현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1955년 10월 13일, 4년 간 온건 세력 및 급진 세력으로 갈라져 있던 좌익 세력이 일본사회당에 재통합되면서 이에 위기감을 느낀 재계 및 각계 인사들이 우익 세력의 통합을 요구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시각차 및 일본국 헌법의 정당성 및 개헌 문제, 미국 등 서방 세력에 대한 시각차 등으로 갈등을 빚고 있던 우익 세력들이 통합되는 계기가 마련, 보수합동이 이루어지며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었다.

창당 초기에는 요시다 시게루를 지지하는 요시다파 및 이에 반대하는 반(反)요시다파와 함께 당인파, 관료 세력, 전전파(戰前派), 전후파(戰後派) 등 내부 세력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보수합동을 주도했던 미키 부키치를 비롯해 당내에서 10년만이라도 통합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면 다행인 것이다라는 인식이 퍼지기도 했다.

창당 후 첫 총선거인 1958년 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무소속 입당자를 포함해 총 298석을 확보했다. 일본사회당 역시 167석을 획득하여, 자민·사회 양당이 전체 의석의 99%를 차지하는 양당 체제가 성립되었다(55년 체제).

또한 자민당이 창당 직전인 1954년부터 1964년까지 미국 백악관 및 국무부의 반공 정책의 일환으로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았던 사실이 훗날 밝혀지기도 했다. CIA는 일본에서 사회당 정권이 탄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민당에 금전을 지원하고 나아가 선거 승리를 위한 조언까지 해주는 등 일본 내 우익 세력에 대한 조직적인 지원을 펼쳤다. 훗날 이러한 내용이 담긴 보고서가 공개되자 미국 정부는 이 사실을 인정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자민당은 부정했다.

기시 노부스케 내각 기간인 1959년부터 1960년까지 미일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둘러싼 안보투쟁의 일환으로 전국에서 대규모 시민·학생 운동이 벌어지고, 여야 갈등이 심화되는 등 정국 불안이 이어졌지만, 1960년 제2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사회당과 민사당의 분열을 틈타 의석을 오히려 늘렸다. 시민 주도의 대규모 시위에 놀란 자민당 정권은 국가 운영의 우선 순위를 경제 발전에 초점을 맞추어, 정부 주도의 장기 경제 발전 계획인 국민 소득 배증 계획을 실시하고, 여기에 한국 전쟁 기간 동안의 특수 효과까지 겹치면서 급속도로 경제를 재건한 일본은 1955년부터 1973년까지 무려 18년간 연평균 10% 이상의 경제 성장을 이룩하는 고도경제성장의 시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렇게 일본에서 고도경제성장이 일어남에 따라 여러 사회 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감소하면서 사실상 안보투쟁 이후 일본의 사회운동은 퇴조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후 자민당은 대화의 정치를 내세우며 일본사회당 등 야당과의 협력을 도모하여 정국 또한 안정되어 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자민당은 창당 때부터 1960년대까지 선거를 치를 때마다 입후보자가 감소하고 득표율도 조금씩 감소해 갔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안정기였다. 한편 자민당은 타지역으로부터의 유입 인구가 많은 대도시나 베드타운 지역에서는 비교적 열세를 보였으며, 이들 지역에서는 일본사회당이나 일본공산당 등 진보 성향 정당이 강세를 보였다. 그러나 이후 사회당이 분열되어 민주사회당이 창당되고, 공명당 등 중도 성향 정당이 약진하며 진보 성향 정당이 도시 지역의 기반을 상당 부분 잃은데 비해, 자민당은 지지 기반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사토 에이사쿠의 장기 집권이 막을 내리며 열린 197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당의 중진들로 이른바 삼각 찹쌀떡이라 불린 미키 다케오,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마사요시, 후쿠다 다케오 등 4명이 출마하였고, 선거 결과 일본 열도 개조론과 중일 국교 정상화를 내세운 다나카 가쿠에이가 총재에 당선되었다. 이렇게 성립된 다나카 내각은 1972년 9월에 중일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중일 수교가 결정되자 자민당 내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강경파들이 정책 기구를 만들고 중일 수교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다나카 내각은 일본 열도 개조론의 일환으로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건설과 신칸센의 정비 등 사회 간접 자본(SOC) 사업비를 증액한 1973년도 예산을 편성했다. 그러나 직후 제1차 오일 쇼크가 발생하였고, 광란 물가로 불릴 만큼 비정상적인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일본 경제는 큰 혼란에 빠졌다. 다나카는 본인의 경쟁자이면서 균형 재정을 지향했던 후쿠다 다케오를 대장대신(현재의 재무대신)에 임명하며 총력 대응을 주문했다. 후쿠다는 정부 예산의 감축, 금융 긴축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으며, 이와 함께 다나카 내각은 소비 환기 정책에서 소비 억제 정책으로 기조를 전환해 나갔다. 1974년 일본은 전후 처음으로 경제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익년인 1975년 다시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일본은 고도경제성장 시대를 마감하고 경제 성장률이 안정을 이루기 시작했다.

오히라는 1979년 10월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소비세의 도입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자민당은 직전 총선거에 이어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했다. 이에 당내에서 오히라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되었으나 오히라는 사퇴 요구를 일축했으며, 이후 자민당은 차기 총리대신 지명을 둘러싸고 극심한 당내 갈등에 빠졌다. 선거 결과에 따라 열린 임시 국회에서의 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오히라가 승리했다. 같은 해 11월, 제2차 오히라 내각의 출범으로 당내 갈등은 봉합되었지만, 이 기간의 혼란은 이후 40일 항쟁으로 불리며 지금까지도 자민당 역사상 최악의 당내 갈등 사례로 꼽히고 있다.

나카소네는 정권의 슬로건으로 전후 정치의 총결산을 내걸었다. 구체적으로는 행정 개혁, 공기업의 민영화, 산업 규제 완화, 민간 분야 활용 확대 등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교육 개혁, 국방 정책의 재검토, 정치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등의 면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보였다. 외교 면에서는 1983년 1월 방미 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미일 양국은 태평양을 끼고 있는 운명 공동체라고 발언하는 등 미일 관계 강화를 강조하고, 냉전 체제에서 서방 국가에 우호적인 나라로서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냈다.

나카소네 내각은 일본전신전화공사 및 일본전매공사의 민영화와 국철분할민영화를 성사시키고, 1987년도 예산에서 방위 예산 1% 한도를 철폐하는 등의 정책을 실현하며 4년 11개월간의 집권을 마쳤다.

나카소네의 후임을 선출하는 1987년 10월의 당 총재 선거에서는 뉴 리더로 불렸던 아베 신타로, 다케시타 노보루, 미야자와 기이치 등 이른바 안치쿠미야 3인방이 모두 입후보했다. 과거처럼 상대 후보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들 3명은 토론을 벌인 결과 후보 단일화 문제를 나카소네에 맡겼다. 결과적으로 다케시타를 후보로 한다는 나카소네의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는 등 불상사도 일어났다.

같은 해 4월 1일에는 소비세가 도입되었다. 다케시타 노보루는 소비세 도입 직후 총리직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5월 22일 도쿄 지검 특수부는 나카소네파 소속인 후지나미 다카오를 리쿠르트 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뇌물죄를 적용해 불구속 기소하였고, 후지나미는 자민당을 탈당하였다. 5월 25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증인으로 출석해 리쿠르트 사건과 관련해 심문을 받았으며, 심문 직후 나카소네 역시 자민당을 탈당했다. 다케시타의 후임으로는 여러 사람이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리쿠르트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고 외무대신을 지내고 있던 우노 소스케가 추천되었다. 6월 2일 우노는 자민당 양원 의원총회에서 기립 투표를 거쳐 총재에 선출되었고, 다음 날인 6월 3일에 다케시타 내각은 총사직했다.

그런데 우노가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여성 스캔들이 발각되었다. 우노는 이를 명확하게 부인하지는 않았다. 이후 7월에 열린 제15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이 스캔들을 비롯해 리쿠르트 사건, 소비세 도입 문제, 농산물 수입 자유화 문제 등 3종 세트가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자민당이 역풍을 맞아 겨우 36명의 당선자를 내는 데 그쳤다. 한편, 도이 다카코 위원장이 이끄는 일본사회당은 여성 후보자들이 돌풍을 일으키며 46석을 얻어 약진했다. 자민당은 참의원 제1당을 유지하긴 했으나 여야의 의석 구도가 역전되었다. 우노는 선거 직후 총리 및 당 총재직을 사임했다.

약 2개월만에 다시 열린 자민당 총재 선거에는 가이후 도시키, 하야시 요시로, 이시하라 신타로 등 3명이 출마했다. 여기서 다케시타파, 옛 나카소네파의 지지를 바탕으로 가이후 도시키가 과반수 득표로 총재에 당선되었다. 가이후 내각은 가이후가 당내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당내 최대 파벌이었던 다케시타파 회장인 가네마루 신과 역시 같은 다케시타파 소속이자 자민당 간사장이던 오자와 이치로가 사실상 배후에서 조종하는 구조였으며, 이를 이중 권력이라 지칭한다.

가이후 내각 시절 폐안되었던 정치 개혁 법안을 다시 추진한 미야자와 내각은 법안 성립을 목표로 했으나 결국 이전과 마찬가지로 폐안되고 말았다. 이후 이에 반발한 미쓰즈카파 회장이었던 다케무라 마사요시와 하네다파 등 일부 세력이 대거 자민당을 탈당했다. 미야자와 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되며 이루어진 중의원 해산으로 치러진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해산 당시의 의석을 획득하며 중의원 제1당을 유지했지만 과반수에 이르지 못했고, 대신 자민당을 탈당한 의원들이 만든 신당이 돌풍을 일으켰다. 한편 자민당과 함께 전후 일본 정치를 좌우해 온 55년 체제의 한 축이었던 일본사회당 역시 참패했다. 그 결과,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하는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이 최초로 성립되어 창당 이래 줄곧 집권 여당의 지위를 유지해왔던 자민당을 야당으로 전락시켰다. 미야자와 기이치는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임했으며, 같은 해 7월 30일에 열린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와타나베 미치오를 꺾고 고노 요헤이가 당선되었다. 한편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하자 자민당 내부에서 연립 여당으로 이적하는 의원도 생겨났다. 선거 결과에 따라 출범한 호소카와 내각은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 병립제를 도입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정치 개혁 법안의 성립을 목표로 하였고, 법안 심의 과정에서 소선거구제를 채택하되 석패율제를 도입하자는 자민당의 요구를 받아들여 결국 1994년 1월 29일에 공직선거법 개정안의 수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바뀐 선거 제도는 1996년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부터 적용되었다.

연립 정권은 호소카와 내각을 지나 신생당의 하타 쓰토무가 총리직을 이어받으면서 계속되었지만, 모두 오래가지 못했고 오히려 정책을 둘러싼 의견차로 연립 정권 내의 불협화음이 심화되고 있었다. 자민당은 55년 체제 하에서 대립 구도에 있었던 일본사회당과 함께 새로운 연립 정권을 구성하기로 하였고,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위원장을 총리로 하고 여기에 신당 사키가케가 참여하는 형태로 자민당·사회당·신당 사키가케의 3당 연정이 출범하였다. 이로써 자민당은 약 1년만에 연립 여당으로서 정권에 복귀했다.

하시모토 정권의 경제 정책 실패로 자민당은 1998년 제18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과반 확보에 실패하는 참패를 기록하며 하시모토 내각이 총사직했다. 후임은 오부치 게이조가 되어 오부치 내각이 출범했다. 자민당은 정권의 안정을 위해 1999년 1월 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자유당과 연립 정권을 구성, 자자 연립 정권이 출범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공명당이 연정에 합류하여 자자공 연립 정권으로 바뀌었다. 2000년에는 자유당이 연정에서 이탈하고 대신 자유당에서 갈라져 나온 보수당이 연정에 들어와 자공보 연립 정권으로 또다시 바뀌었다. 이 시기부터 자민당과 공명당의 본격적인 공조 관계가 시작되었다.

이후 오부치가 질병으로 총리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모리 요시로를 새 총리로 하는 모리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모리의 계속되는 실언에 자민당의 정치 공작 의혹까지 더해지며 내각 지지율은 침체 상태에 빠졌고, 이에 당내 일부 세력이 모리 내각의 퇴진을 요구하자 코너에 몰린 모리 내각은 총사직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후 야마사키 다쿠, 가토 고이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이른바 YKK가 고이즈미 내각을 수립했다.

기존의 정치인들과는 달리 사자 모양의 헤어 스타일을 가지는 등 차별화를 꾀한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고이즈미 돌풍으로 불릴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고이즈미 내각 출범 직후인 2001년 4월에 실시된 요미우리 신문의 여론조사에서 내각 지지율은 역대 내각 지지율 중 최고 수치인 87.1%를 기록했으며, 동기간에 실시된 여론조사 중 가장 낮은 수치인 아사히 신문 조사에서도 78%를 기록했다. 고이즈미 내각은 내각관방 산하 내각공보실이 발행하는 인터넷 잡지인 고이즈미 내각 메일 매거진을 발행하였는데, 구독자가 200만 명을 돌파하는 등 큰 화제가 되었다. 이러한 고이즈미의 인기에 힘입어 자민당은 같은 해 7월의 제19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고이즈미는 2002년 9월, 전격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사상 최초의 북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고이즈미 정권 후반기인 2005년부터는 포스트 고이즈미로 불리며 고이즈미를 이을 차기 주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소 다로, 다니가키 사다카즈, 후쿠다 야스오, 아베 신조는 포스트 고이즈미의 대표 4인방으로 꼽혔다.

그러나 아베 내각은 사회보험청의 연금 가입자 기록 문제가 드러나 국민적 공분을 샀으며, 연이어 각료들의 스캔들이 터지는 등 위기에 직면하여 2007년 7월 제21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은 37석을 얻는 데 그쳐 60석을 얻은 민주당에 참패하고 말았다. 결국 자민당은 창당 이후 처음으로 참의원 제2당으로 전락했다. 이렇게 해서 중의원과 참의원의 다수파가 서로 다른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네지레 국회). 이로 인해 안건을 통과시키려는 여당과 어떻게든 참의원에서 안을 부결시키려는 야당의 대립이 격화되어 국정 운영의 효율성이 저하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자민당 정권의 레임덕도 가속화되었으며, 총리도 1년마다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로 바뀌는 등 총리의 지도력도 약화되었다.

아소의 예고대로 2009년 7월 21일 중의원이 해산되었고, 8월 30일에 실시된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119석을 얻는 데 그쳐 308석을 얻은 민주당에 대참패를 기록했다. 전직 총리와 유력 파벌의 수장을 비롯한 거물급 인사들이 줄줄이 민주당의 신인 후보에 패하였고, 창당 이후 처음으로 중의원 제2당이 되어 야당으로 전락했다. 직전인 1993~1994년의 야당 기간에는 그래도 중의원 제1당의 지위는 유지했지만, 이번에는 완벽한 패배였다. 자민당이 선거 패배의 충격으로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하자 각료 경험자를 비롯한 현직 국회의원의 탈당자가 속출했으며, 2010년 6월까지 약 7개월동안 탈당자가 15명에 달했다. 아소 다로 총재는 선거 다음 날 아침, 참패에 책임을 지고 사임을 발표했다. 이후 9월 16일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출범하면서 아소 내각이 총사직하였고, 아소에 사임에 따라 9월 28일 열린 2009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차기 총재에 당선되었다.

야당이 된 후 처음 치른 전국 단위 선거인 2010년 7월 제22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민주당 정권의 핵심 인사인 오자와 이치로가 소비세율 인상을 주장하여 여론의 반발을 불렀고, 여기에 오자와의 불법 정치자금 문제, 오키나와현의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 등을 둘러싼 정권 내부 갈등이 겹치며 민주당의 지지율이 하락하였으며, 이를 틈타 자민당은 개선 의석 기준으로 51석을 획득하여 44석을 획득한 민주당을 누르고 연립 여당의 참의원 과반 의석 확보를 저지했다.

이후 2012년 12월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절대 안정 의석인 294석을 획득(하토야마 구니오의 복당으로 선거 직후 295석으로 증가)하며 중의원 제1당에 올라섰다. 이후 12월 26일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이 출범하며 자민당은 공명당과 함께 약 3년 3개월 만에 집권 여당에 복귀했다.

자유민주당의 당수이며, 당의 최고 책임자로서 당을 지휘하는 직책이다. 임기는 3년으로, 연속 3기에 한정하여 재임할 수 있다. 제1당의 총재가 내각총리대신직을 맡게 되는 관례에 따라 일반적으로 자유민주당의 총재는 총리직을 겸하게 된다. 현재 총재는 제99대 총리대신인 스가 요시히데이다.

농업 종사자에 보조금을 교부하고, 전국 각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망을 건설하는 사회 간접 자본(SOC) 사업의 적극적인 추진 등 도시와 농어촌 지역의 경제 격차를 줄이는 정책을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이래 답습해 온 자민당은 농어촌 및 지방 소도시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고, 반대로 대도시 및 베드타운 지역에서는 열세를 보여왔다. 그러나 근래에는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TPP) 등의 자유 무역 협정을 추진하여 농수산물 수출입의 전면 개방이 이뤄지면서 농어촌 지역의 지지율이 빠지는 한편,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 이후 언론 홍보 및 당의 이미지 개선에 공을 들이면서 종래의 자민당 지지층 외에 대도시 지역 무당층과 정치에 무관심했던 층으로부터도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 결과 구체적인 것은 잘 모르겠지만 당수의 이미지를 보고 자민당을 지지한다는 이른바 B층이 생겨났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인구 밀도가 낮은 지자체에서는 자민당의 득표율이 높고, 인구가 밀집된 도시 지역으로 갈수록 득표율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 이유로는 자민당이 농업협동조합(농협)을 매개로 한 두터운 기반을 지방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자민당은 현직 내각총리대신이자 당 총재인 아베 신조가 지역구를 두고 있는 야마구치현과 호쿠리쿠 지방 3현(도야마현, 이시카와현, 후쿠이현)에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다. 그 밖에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자민당의 득표율이 비교적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과거 10년 간의 자민당 지지율 추이를 가구 소득별로 보면 2005년에는 부유층부터 빈곤층까지 모두 지지율이 비슷했던 반면, 2015년에는 상대적으로 부유층의 자민당 지지가 상승하고 빈곤층의 지지는 하락했다(아래 표 참조). 이에 대해 아사히 신문은 가구당 연 소득이 300만 엔 미만인 경우 자민당 지지층에서 이탈하여 무당층으로 이동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총무성 통계국의 자료에 따르면 2016년 제24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의 도쿄도 선거구에서 자민당 후보자의 득표율(나카가와 마사하루 및 아사히 겐타로의 합)은 가구당 평균 소득이 높은 지자체에서는 높았던 반면, 평균 소득이 낮은 지자체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었다(오른쪽 그래프 참조).

연령별로는 20대와 70대 이상에서 많은 표를 얻는 추세이다. 이 때문에 일부 언론에서는 자민당이 70대 이상의 고령층 뿐만 아니라 젊은 층에서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한다. 다만, 다수의 여론조사에서 드러나듯 20대 등 젊은 층에서는 지지 정당 없음이라고 응답하는 비율이 자민당 지지율보다 높게 나오는 경우가 많고, 이들 무당층의 대부분이 투표에 소극적이기 때문에 젊은 층에서 자민당의 득표가 상대적으로 높게 나오는 것일 뿐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한 여론조사에서 연령별 자민당 지지율을 보면 70대 이상이 가장 높았고, 다음으로 60대, 50대, 40대 순이었으며 30대 이하의 지지율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에 속했다. 한편, 무당층의 비율은 30대 이하에서 가장 높았다.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2013년 제23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 비례대표 후보자를 지원한 종교 단체는 다음과 같다.

일본 자유민주당의 역사관은 종종 해외 역사학자들에게 극우적인 역사 왜곡이라고 여겨진다.




#Article 223: 옴의 법칙 (227 words)


옴의 법칙()은 도체의 두 지점사이에 나타나는 전위차(전압)에 의해 흐르는 전류가 일정한 법칙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두 지점 사이의 도체에 일정한 전위차가 존재할 때, 도체의 저항(resistance)의 크기와 전류의 크기는 반비례한다. 는 도선에 흐르는 전류로 단위는 암페어(A,ampere), 는 도체에 양단에 걸리는 전위차로 단위는 볼트(V,volt), 그리고 는 도체의 전기저항(resistance)으로 단위는 옴(Ω, ohm)이다. 특히, 옴의 법칙에서 저항 R는 상수이고, 전류와 독립적이다.

회로망에서 저항은 두 노드(node) 사이에 존재한다. 옴의 법칙은 다른 회로 법칙과 함께 회로 해석에 중요한 요소이다. 저항은 물리적으로 특정 형태를 갖는 일정한 길이의 물체로 존재하므로, 전체 전위차가 저항체의 길이 전체에 나누어 분포한다. 그러나 회로망 해석에서는 두 노드 사이에 존재하는 한 점으로 모델링하여 전체 저항값(상수값)을 저항의 대표값으로 취급하여 해석한다.

옴의 법칙은 전자기학의 법칙 중 하나이다. 이름은 독일의 과학자 게오르크 옴의 이름을 딴 것이다.그러나 후에 저항이 없는 물질이 발견됨에 따라 옴의 법칙이 모순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옴의 법칙은 미시적으로 다음과 같다.

J는 전류 밀도이며, σ 는 전기전도율 (비등방성 물질에서 텐서일 수도 있음)이고, E는 전기장이다.

이 방정식은 오직 전도체의 기준계에서만 유효하다. 만약 물체가 자기장 B에 대해 v의 속력으로 움직인다면 이 방정식은 다음과 같이 바뀐다.

이 식은 로런츠 힘과 관계를 가지는데, 이로써 옴의 법칙을 로런츠 힘과 (전하 운반체의 속력에 비례하는) 항력이 있다는 가정 아래 유도할 수 있다.

옴의 법칙의 미시적인 형태에서 전기장과 도선의 전압, 도선의 길이간에 상관관계를 통해 다음과 같은 옴의 법칙의 거시적인 형태를 얻을 수 있다.

여기서 는 전류 밀도를 적분한 전류이고, 은 비저항 을 적분하여 얻은 저항이고, 는 전기장을 적분하여 얻은 전압이다.




#Article 224: 데즈카 오사무 (359 words)


데즈카 오사무(, 1928년 11월 3일~1989년 2월 9일)는 일본의 만화가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자이자, 오사카 대학을 졸업한 의사이기도 하다. 본명은 데즈카 오사무(手塚 治)다. 《우주소년 아톰》과 《밀림의 왕자 레오》의 작가로 알려졌다. 그의 다작 성향, 선구적 테크닉, 장르의 혁신적인 정립으로 일본 만화의 아버지, 일본 만화의 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선조는 헤이안 시대 말기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가신 데즈카 미쓰모리(手塚光盛)이며, 고조, 증조 할아버지도 대대로 에도 시대의 난학자였다.

오사카 제국대학(大阪帝国大学) 부속 의학전문부(医学専門部) 재학 중이던 1946년 1월 1일에 4컷 만화 『마아짱의 일기장』（マアチャンの日記帳, 『소국민신문』(少国民新聞) 연재)으로로 만화가로 데뷔한다. 1947년 사카이 시치마(酒井七馬)가 원안을 그린 만화 단행본 『신보물섬』(新寶島)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오사카에서 아카혼(赤本) 붐을 일으켰다. 1950년부터 만화잡지에 등장, 『우주소년 아톰』(鉄腕アトム), 『정글대제』(ジャングル大帝), 『리본의 기사』(リボンの騎士) 등 히트작을 잇달아 발표한다.

후지코 후지오(藤子不二雄, 藤子・F・不二雄、藤子不二雄A)、이시노모리 쇼타로(石ノ森章太郎)、아카츠카 후지오(赤塚不二夫)、요코야마 미쓰테루(横山光輝)、미즈노 히데코(水野英子)、야시로 마사코(矢代まさこ)、하기오 모토(萩尾望都) 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데즈카 오사무로부터 영향을 받았거나 접촉이 있었던 만화가로 알려져 있다.

데즈카 오사무(본명 오사무治)는 1928년 11월 3일, 일본 오사카부(大阪府) 도요노 군(豊能郡) 도요나카 정(豊中町, 지금의 도요나카시豊中市)에서 데즈카 유타카(手塚粲, 1900년 - 1986년 5월 14일)와 어머니 후미코(文子)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날이 마침 메이지 천황의 생일인 메이지세쓰(明治節)이었기에 「메이지」(明治)에서 한 글자를 따서 「治」를 이름으로 짓게 되었다.

이 시기에 오사무의 동급생 이시하라 마코토(石原実, 오사카 요도야바시淀屋橋 이시하라 시계점石原時計店 사장)와 친해졌고, 그의 영향으로 곤충이나 과학, 천문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데즈카 집안의 넓은 정원에는 곤충 창고가 있었고、또 주위의 전원지대에서도 많은 곤충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곤충 채집에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환경이었으며, 곤충에 대한 지식과 그에 대한 생각의 깊이를 더하게 해 주었다. 그는 친구들로부터 빌린 히라야마 슈지로(平山修次郎)의 『원색천종곤충도보』(原色千種昆蟲図譜)를 읽으며 딱정벌레목 딱정벌레류(オサムシ)의 존재를 알았고, 이 시기부터 그의 필명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를 쓰기 시작하였다. 1950년 무렵까지는 「治虫」는 그대로 「오사무시」로 읽었다.

데즈카는 서양에서 수입된 영화와 소설에서 서양 문학을 일본적인 양식으로 도입한 것과 창의적인 스토리로 유명하며, 초기 작품은 《밤비》와 같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스타일을 포함하고 있다. 데즈카가 어린 시절에 읽은 밀트 그로스의 초기 그래픽 노블인 《히 던 허 롱》(He Done Her Wrong)의 영향을 받은 데즈카의 영화적인 컷 배치는 후에 데즈카의 족적을 따르는 만화가들의 일반적인 특징이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데즈카 오사무가 사망하자, 만화가로서 데즈카가 세운 업적을 전면 긍정하였지만,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애니메이션 작가로서의 데즈카가 일본의 애니메이션사에서 차지한 역할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특히 TV 애니메이션 초창기에 데즈카가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자사(무시 프로덕션) 제작 프로그램을 원가에 가까울 정도로 낮은 가격에 팔아치운 것이, 현재까지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비가 극도로 낮게 책정되는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 발언은 여러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Article 225: 우주소년 아톰 (424 words)


《우주소년 아톰》은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가 1952년부터 1968년까지 《쇼넨》(少年)지에 연재한 SF만화이다.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21세기의 미래를 무대로 소년 로봇 아톰의 활약상을 그렸다. 원제는  철완 아톰()이다. 고단샤에서 23권의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여러 차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데즈카 오사무는 일본 만화계의 대표적 작가로, 일본의 만화는 오사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오사무는 1951년 발표한 〈아톰대사〉(アトム大使)에서 아톰 캐릭터를 선보였고 이 캐릭터를 살려 1952년 《쇼넨》에 철완 아톰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톰을 알아본 오차노미즈 박사에 의해 구출되어 일본으로 돌아간다. 이후 도쿄를 위협하는 악당들과 맞서 싸우게 된다.

아톰에서 보기 드문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주제로한 내용이었으며 배경은 하와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일행이 과거로 갔을때 유적에 직접 새겨둔 문양을 현대에 돌아와 다시 확인하고, 유식한 박사의 시간 여행이 사실임을 확인하며 웃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가까운 미래,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인해 사람들은 큰 산을 떼어내어 구름의 윗부분으로 올려버린다. 이렇게 탄생한 메트로시티는 로봇과함께 번성한다. 메트로 시티의 로봇문명을 탄생시킨 텐마 박사는 정부의 압력으로 전투로봇인 '피스키퍼'를 만들게 되고, 이것을 보고 싶어한 텐마 박사의 아들 '토비'는 실험을 보다가 호기심에 실험현장에 너무 가까이 가서 폭주한 '피스키퍼'에 흡수당해 죽는다.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 텐마 박사는 아들과 똑같은 로봇을 만들게 되고, '토비'의 DNA와 블루 코어를 넣어 로봇을 탄생시킨다. 그러나 로봇이 '토비'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텐마 박사는 로봇을 버린다. 가출한 로봇은 블루 코어 에너지를 노린 '스톤 총리'의 추격 때문에 '서페이스'로 떨어지게 되고, 그곳에서 아이들의 대부인 헴에그와 코라를 만나게 된다. 코라 일행과 함께 살던 '아스트로' 로봇 혁명단을 만나고, 토목공사용 로봇인 '조그'를 되살리게 된다. 그러나 '조그'를 끌고오는 과정에서 아스트로가 로봇임을 안 '헴에그'는 로봇 격투장에서 아스트로를 계략에 빠뜨린 후 격투대회에 참가시킨다. 그러나 '아스트로'는 나오는 로봇을 족족 부숴버리고, 화가 난 '헴에그'는 '아스트로'를 공격한다. 그 순간 하늘에서 메트로 시티 전함이 나와 아스트로를 끌고 간다. 다시 '텐마 박사'와 대면한 아스토로는 블루 코어가 빠져 작동 정지 되고, 블루 코어는 '스톤 총리'의 손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총리가 '아스트로'를 장난감이라고 한 것에 대해 화가 난 '텐마 박사'는 블루 코어를 빼돌려 '아스트로'를 부활시킨다. 부활한 아스트로는 과학청을 탈출하고, 분노한 스톤 총리는 레드코어를 '피스키퍼'에 장착, '아스트로'를 잡고 블루 코어를 되찾아 오게 한다. 그러나 폭주한 '피스키퍼'는 오히려 '스톤 총리'를 흡수하고, 도시를 공격한다. 한편 도시를 탈출한 '아스트로'는'피스키퍼'가 도시를 파괴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고, 유리 청소 로봇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시로 돌아가 '피스키퍼'와 격전을 벌이게 된다. 한편 '서페이스'에서는 아이들이 헴에그를 붙잡아 에어카를 탈취하고 메트로 시티로 향한 후 위기에 빠진 '아스트로'를 구하지만 쫓아온 '피스키퍼'가 발전소를 파괴해 메트로 시티가 추락할 위기에 놓인다. '아스트로'는 코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메트로 시티를 위기에서 구한 후 다시 '피스키퍼'와 대결하지만 '피스키퍼'의 로봇팔에 잡히고 중심부로 끌려들어간다. 하지만 블루 코어와 레드 코어의 충돌로 둘은 튕겨진다. 이후 텐마 박사한테서 레드 코어와 블루 코어가 충돌하면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낸 아스트로는 '피스키퍼'의 중심부로 돌진하여 동반자살한다. 이후 살아난 스톤 총리는 경찰에 체포되고 아스트로는 에너지를 '조그'한테서 받아 다시 부활한다. 그러나 이때 외계인이(?) 메트로 시티를 공격하고 아스트로는 '외계인'에게 펀치를 날린다.




#Article 226: 소거법 (247 words)


소거법(消去法, )은 연립방정식(특히 연립일차방정식)을 풀이하는 간단한 기법이다. 미지수의 개수를 줄여나가는 것은 소거법의 관건이며, 아래와 같은 서로 비슷한 여러 방법 중 하나를 사용한다.

소거법을 통해 연립방정식의 해가 만족해야 할 일련의 필요조건들을 얻을 수 있다. 만약 그들 중 어떤 조건이, 연립방정식의 해가 될 충분조건이기도 하면, 그 조건이 곧 연립방정식의 정확한 해이다. 만약 필요조건들이 모순이라면, 연립방정식의 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임의의 연립일차방정식은 소거법만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부정, 불능 여부 등에 대한 판단 없이는 다소 맹목적이다. 가우스 소거법은 소거법의 실질을 추상화하여 얻어진 연립일차방정식의 풀이법이다.

소거법은 일반적인 연립방정식의 해법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소거법만으로 풀이되는 특별한 연립방정식은 연립일차방정식 이외에도 존재한다.

이원일차 연립방정식

을 가감법으로 풀이할 것이다. 두 방정식을 더해서(즉 ) 를 소거하면

이를 첫번째 방정식에 대입하면

따라서 이다. 당연히 이므로, 튜플 이 바로 (유일한) 해이다. 다르게는, 만약 대입법과 등치법에 의해 를 소거한다면, 그 과정은 각각 다음과 같을 것이다.

삼원일차 연립방정식

은,  그리고 을 통해 얻은 이원일차 연립방정식

에서 를 구해서 에 대입하면 해 를 구할 수 있다.

다음 예시는 앞선 것들과 조금 다르다.

반대로

따라서 정확한 해는, 임의의  꼴의 튜플이다.

해일 수 있는 튜플에 대한 반대 방향으로의 검증은, 해의 구조를 미리 알면 어느 정도 생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지수와 방정식의 개수가 같은 연립일차방정식에 대해서는, 만약 계수행렬의 행렬식이 0이 아니면, 해가 유일하다는 결론이 있다.

자유낙하 시의 속도-시간, 변위-시간 관계식

으로부터, 를 소거하여, 속도-변위 관계식

를 얻을 수 있다.

가우스 소거법은, 소거법을 구체화, 정형화하여 얻는, 연립일차방정식의 해법이다. 소거법은 엄밀히는 연립일차방정식이 성립할 필요조건만을 제시하므로, 정확한 해집합을 구하기 위해선 해의 후보에 대한 검증이 뒤따라야 하지만, 가우스 소거법은 원래와 동일한 해집합을 갖는 연립일차방정식으로 전환시키기에 그럴 필요가 없다.




#Article 227: 가우스 소거법 (499 words)


선형대수학에서, 가우스 소거법(Gauß消去法, )이란, 연립일차방정식을 풀이하는 알고리즘이다. 풀이 과정에서, 일부 미지수가 차츰 소거되어 결국 남은 미지수에 대한 선형 결합으로 표현되면서 풀이가 완성된다. 가우스 소거법은 보통 행렬을 사용하며, 첨가 행렬을 그와 풀이가 같은 더 간단한 행렬로 변환하여 풀이를 완성한다. 가우스 소거법은 행렬식과 역행렬의 계산에도 응용된다.

체 에 대하여, 개의 미지수에 대한 개의 방정식으로 구성된 연립일차방정식

이 주어졌다고 하자. 여기서

은 주어진  행렬이고,

은 개의 미지수를 포함하는 열벡터이다. 즉, 이는 풀어서 쓰면 다음과 같다.

이 경우, 이 연립방정식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연산을 가할 수 있다. 이들을 기본 행 연산(基本行演算, )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다리꼴행렬(Echelon matrix,에쉴론 메트릭스, 또는 행사다리꼴행렬)은,

 행렬 에 대하여, 이라고 하면, 를 번째 행의 선행 계수(先行係數, )라고 한다. 선행 계수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행렬 이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면, 을 행사다리꼴행렬(사다리꼴行列, )이라고 한다.

 행렬 이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면, 을 기약행사다리꼴행렬(旣約行사다리꼴行列, )이라고 한다.

즉, 행사다리꼴행렬은 행렬의 항들이 대략 위에는 사다리꼴, 밑에는 0인 형태의 행렬이다. 기약행사다리꼴행렬 조건은 행사다리꼴행렬 조건보다 더 강한 조건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행렬은 행사다리꼴행렬이다.

다음과 같은 행렬은 기약행사다리꼴행렬이다.

가우스 소거법은  행렬 을 기본행연산을 가하여 행사다리꼴행렬로 만드는 알고리즘이며, 다음과 같다. 먼저 첫번째 행을 다음과 같이 처리한다.

그 뒤, 두번째 행을 다음과 같이 처리한다.

뒤에 오는 다른 행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위와 같이 처리한다. 일반적으로, 번째 행은 다음과 같이 처리한다.

만약 어떤 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번째 행에서 멈춘다. 만약 항상 를 찾을 수 있다면, 모든 번째 행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위와 같이 처리하며, 으로 둔다.
기약행사다리꼴행렬을 원한다면, 찾았던 모든 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다음과 같은 단계를 추가로 거친다.

여기서 이며 인 데 주의하자. 사실, 이는 행렬의 계수이다.

세 가지 기본행연산은 모두 가역 연산이다.

두 연립일차방정식의 첨가 행렬이 하나에 기본행연산을 가하여 다른 하나를 얻을 수 있다면, 행동치라고 한다. 첨가 행렬이 행동치라면, 연립방정식의 풀이는 서로 같다.

기본 행렬은 단위 행렬에 기본행연산을 한 번 가하여 얻는 행렬이다. 이에 따라, 세 가지 기본행연산은 기본 행렬 곱셈과 같다.

가우스 소거법 알고리즘에서 알 수 있듯, 모든 연립일차방정식의 첨가 행렬은 그와 같은 해를 갖는 행사다리꼴행렬 및 기약행사다리꼴행렬로 변환할 수 있다. 따라서, 연립일차방정식의 풀이는 행사다리꼴행렬 및 기약행사다리꼴에 대한 풀이로 귀결된다.

 행사다리꼴행렬 에 대한 연립일차방정식 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해가 존재하는 의 경우,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달리 말해, 해가 존재하는 의 경우,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가우스 소거법을 사용하여 정사각행렬의 행렬식을 계산할 수 있다. 이는 정사각행렬에 대하여 다음 사실들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가우스 소거법을 사용하여 정사각행렬의 역행렬을 계산할 수 있다.  행렬 의 역행렬은 다음과 같이 계산한다. 에  단위행렬을 추가하여  행렬로 만든다.

이 행렬에 기본행연산을 가하여

로 만든다면, 행렬 은 과 같다.

가우스 소거법을 사용하여 행렬의 계수를 계산할 수 있다.  행렬 의 계수는 가우스 소거법을 가하여 얻는 행사다리꼴행렬에서 0이 아닌 행의 계수(즉, 선행 계수의 개수) 이다.

다음과 같은 선형 방정식이 주어졌다고 하자.

첫 번째 열을 사다리꼴로 놓기 위해, 다음과 같은 기본행연산을 가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다.

두 번째 열을 사다리꼴로 놓기 위해, 다음과 같은 기본행연산을 가한다.
 둘째 식의 1배를 셋째 식에 더한다.
그러면 다음과 같다.

이제 행렬이 사다리꼴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미지수들을 가장 밑의 행으로부터 순서대로 대입하여 계산할 수 있다. 이것을 후방대입(back substitution)이라 한다.

(식 2와 3을 바꾸어 해결한다)

(해가 없는 경우도 있다.)

다음과 같은 행렬 의 역행렬을 계산한다고 하자.

기본행연산을 가하면, 다음과 같다.

따라서 은 다음과 같다.




#Article 228: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뫼비우스 (107 words)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뫼비우스(, 1790년 11월 17일 ~ 1868년 9월 26일)는 독일인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다.

오늘날 작센안할트주 나움부르크 근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요한 하인리히 뫼비우스()였으며, 아버지는 춤 강습을 직업으로 삼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마르틴 루터의 후손이었다. 1820년 도로테아 크리스티안 율리안 로테와 결혼했으며 딸과 두 아들을 두었다.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813년 괴팅겐 대학교의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를 만나서 공부했다. 1815년 라이프치히 철학학과에서 하빌리타치온을 통과했다.

일반에게 가장 유명한 업적은 요한 베네딕트 리스팅과 같은 시기에 독립적으로 발견한 뫼비우스의 띠이며, 그는 주로 기하학과 역학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를 했다.

저서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이 외에도 수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다수의 짧은 논문도 발표했다. 그의 이름이 붙은 것으로 뫼비우스 함수, 뫼비우스 변환, 뫼비우스의 띠 등이 있다.




#Article 229: 이승엽 (981 words)


이승엽(1976년 10월 11일 (음력 8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선수이자, 현 KBO 홍보대사, 이승엽야구재단 이사장, SBS와 SBS 스포츠의 야구 해설위원이다.그리고 타이기록 달성(56호홈런)은 현재는 깨졌지만 한국 프로야구 최다 홈런 기록이다.

중앙초 감독이 그의 아버지와 협상했다가 불발됐고 그는 야구를 시작할 때까지 단식하겠다고 하여 그의 아버지를 설득시켜 야구를 시작했다. 투구와 타격 모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좌완 투수로 좀 더 이름을 알렸다. 그는 경상중학교 재학 당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고,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 1993년 청룡기 대회에서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다. 1994년 청소년 국가 대표로 선발된 그는 투타에서 고루 활약을 펼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가 타자로 전향하자 ‘좌승엽 우승관’으로 불리며 기대를 받았던 입단 동기 내야수 김승관은 상대적으로 기회가 줄어 2004년 롯데에 트레이드된 후 2007년에 방출돼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타자로 완전히 적응하며 프로 첫 해부터 가능성 있는 모습을 보였다. 점차 그는 거포로서의 재능을 뽐내며 붙박이 3번 타자 겸 1루수로 자리매김했지만 내야수 이동수에게 밀려 데뷔 첫 해에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다. 프로 입단 3년차인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타격이 정점을 찍기 시작하면서 그는 아시아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로 거듭났다.

FA 자격을 취득한 후 2003년 12월에 계약했다. 연봉은 2억엔이었는데, 당시 팀 멤버 중 그를 제외하고 2억엔이 넘는 선수는 마무리 투수인 고바야시 마사히데밖에 없었음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런 파격 대우 때문에 팀 내 다른 선수들이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팀이 타 선수들의 대우를 전면적으로 개선하는 것으로 진정됐다. 이듬해인 2004년 3월 27일 개막전 4번 타자로 선발 출장했고 세이부의 에이스 투수였던 마쓰자카로부터 2루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좋았던 첫 시작과 달리 시즌 후 14홈런, 2할대 타율, 50타점이라는 비교적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시범 경기에서 타율 0.100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며 2군으로 강등됐다. 그러나 4월 초 1군으로 복귀해 팀의 중심 타선으로 정착했다. 하지만 상대팀 선발 투수가 좌완일 때 선발 타선에서 제외되는 플래툰 시스템에 의해 기용됐다. 시즌 최종 타율은 2할대 타율이었지만 홈런 수가 팀 내에서 최다인 30개(이 기록은 지바 롯데 마린스의 현 홈 구장인 QVC 마린 필드 개장 이후 동양인으로서는 최초의 기록)로, 전년도에 비해 장타력 부분에서의 제 기량을 찾았고, 팀의 플레이오프 진입에도 공헌했다.
재팬 시리즈에서 처음 맞붙은 센트럴 리그 소속의 한신 타이거스 투수들에게 매우 강한 면모를 보였는데, 1차전에서 만난 한신 타이거스의 에이스인 이가와 게이로부터 홈런을 기록했고, 2차전에서도 에구사 히로타카로부터 홈런을 기록했다. 3차전은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됐지만 4차전에서는 스기야마 나오히사로부터 선제 홈런을 쳐 내는 등의 맹활약을 펼치며 팀이 재팬 시리즈 챔피언에 등극하는데 크게 공헌했으며, 이마에 도시아키에게 밀려 제팬 시리즈 MVP 수상에 실패했다.

당시 감독이었던 하라 다쓰노리는 그를 개막전 4번 타자로 파격 기용했는데, 이에 부응해 일본 진출 이후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반면 그의 맹활약과는 반대로 팀은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부진과 부상자가 속출해 2005 시즌에 이어 2년 연속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가 기록한 2006년 성적은 타율 2위, 타점 1위(108), 홈런 1위(41개)를 기록해 공격 전 부문에서 리그 정상급의 활약을 펼쳤다. 특히 홈런에서는 일본 진출 이후 최다 홈런을 기록했는데 6월에는 44홈런을 몰아치며 리그 홈런 1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8월 중순 경 발생한 무릎 부상 이후 홈런 페이스가 주춤했고, 시즌 중반부터 페이스를 높여 온 주니치 드래곤즈의 타이론 우즈에게 홈런 숫자에서 추월당해 결국 리그 최다 홈런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타율은 주니치 드래곤즈의 후쿠도메에게 밀리고 홈런과 타점은 타이론 우즈에게 밀렸지만 시즌 내내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며 최정상급의 기량을 뽐냈다.

이듬해 2007년 1월, 모친상 소식을 일본에서 전해 들었고 왼쪽 엄지손가락에 염증이 생기는 부상 등 시즌 내내 고전했다. 외다리 타법을 고쳐보기도 했지만 성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7월 중에는 스스로 2군행을 자처하기도 했다. 시즌 후반기에는 요코하마와의 첫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치는 등 부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으며, 시즌 후반에는 승부에 결정적 기여를 한 홈런을 여러 개 쳐 내며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홈런을 한 개도 치지 못하는 등 장타력이 실종된 모습을 보이며 시즌을 마감했다. 종합적으로 2007 시즌에는 타율 0.274, 30홈런, 74타점을 기록하였다.

시즌 초반에는 지난 시즌 후 받은 손가락 수술로 인해 심각한 슬럼프에 빠지며 2군으로 강등됐다. 그러던 중 8월에 있었던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해 대한민국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특히 그는 4강전인 일본전에서 투런 홈런을, 쿠바와의 결승전에서도 투런 홈런을 쳐 내며 자신의 건재함을 보였다. 그러나 그 해 45경기에 출장해 2할대 타율, 7할 5푼 5리의 OPS를 보였으며, 8홈런 27타점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일본 시리즈에서도 극도의 부진을 드러냈다. 그 해 일본 시리즈는 퍼시픽 리그 우승 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 진행했는데 여기에서 7경기 동안 홈런과 타점 없이 18타수 3안타(타율 0.167), 12삼진이나 당하는 등 극심한 부진에 시달리기도 했다.

전년도 시즌을 아주 저조한 성적으로 마친 그는 스스로 WBC 불참을 선언하며 시범 경기에서만 8홈런을 기록하는 등 2009년 시즌에 대한 기대를 하게 했다. 기대에 부응하듯 시즌 초 3할 타율, 장타율 1위 등에도 오르는 등 나아진 모습을 보였으나 갈수록 페이스가 떨어졌고, 7월에는 시즌 처음으로 2군에 내려갈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팀이 정규 시즌 우승 헹가래를 칠 때도 자리에 없었고, 결국엔 2군에서 정규 시즌을 마감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2경기에 선발 출장을 했으며, 그 외의 경기엔 대타로 주로 출전했다.

타격 면에서 예년에 비해 크게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시즌 내내 2군과 1군을 오가면서 최종 성적 5홈런, 11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시즌 막판 1군 레귤러 멤버에 다시 포함된 뒤 팀의 센트럴 리그 클라이막스 시리즈 명단에 포함됐으나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시즌후 2010년 11월 16일에 방출 통보를 받았다.

방출 후 2010년 12월 2일 1년간 1억 5,000만엔에 옵션이 포함된 연봉을 계약했다. 이 때 투수 박찬호와 같은 팀이 됐다. 이로써 2005년 이후 6년만에 다시 퍼시픽 리그로 돌아와 등번호도 3번으로 정해졌다. 그는 연봉을 대폭 낮추는 등의 백의종군 모습을 보였지만 시즌 전 반발력이 적은 공인구로 교체해 찾아온 극심한 투고타저의 영향을 받아 2할대 타율로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팀의 꼴찌가 확정된 후반기 들어 맹활약하며 시즌 총 15홈런을 쳐 퍼시픽 리그 홈런 순위 8위에 오르는 기대 이상의 모습도 보여줬으나 타율은 리그 전체 최하위였다. 규정 타석 미달로 인해 순위권에 들지 못했다.

이승엽은 2017년 시즌 시작 전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2017년 5월 21일 송창식을 상대로 KBO 리그 첫 450호 홈런을 기록했고, 2달 뒤인 7월 29일에는 김성민을 상대로 KBO 리그 최초로 4000루타를 달성했다. 시즌 후반기부터 소속 팀을 제외한 9개 구단에서 그를 위해 은퇴 투어를 진행했고 그 여정이 끝난 10월 3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대구 홈 경기를 끝으로 공식 은퇴했다. 그 경기에서 한현희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그의 은퇴를 바라보는 이들을 아쉽게 만들었다. 경기 후 팀은 그에 대한 성대한 은퇴식을 열었고, 그의 등번호인 '36번'은 구단 역대 세번째로 영구 결번 처리됐다. 그는 은퇴 후에는 야구 관련 직종에 종사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히며 야구장 안팎에서 야구 관련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Article 230: 한국야구위원회 (120 words)


사단법인 한국야구위원회 또는 KBO(Korea Baseball Organization), 또는 KBO 사무국(Office of the Commissioner, KBO)은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사단법인으로 KBO 리그를 총괄하는 기구이다. 야구를 통하여 대한민국 프로스포츠 발전에 기여하고 각종 국제 대회의 참가로 국제친선에 공헌할 목적으로 1981년 12월 11일 창립 총회를 열고 출범하였다. 원년출범부터 한국야구위원회(韓國野球委員會)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2015년 브랜드 통합에 따라 명칭을 KBO로 변경하고 리그와 구분하기 위해 KBO 사무국이라는 명칭도 사용된다. 사무실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강남대로 278에 있다.

한국야구위원회는 총재를 정점으로 사무총장과 운영본부장이 관할하는 사무국, 마케팅 사업을 벌이는 자회사 KBOP, 심판위원회, 기록위원회, 기술위원회, 육성위원회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비상설 기구로 상벌위원회, 규칙위원회와 야구원로자문위원회(위원장 어우홍)를 두고 있다.

KBO 총재는 KBO를 대표하고, 관리 통할하는 자리이다. 임기는 3년이며 총재가 결정하는 지시, 재정, 재결, 제재는 최종 결정이며 위원회에 속하는 모든 단체와 개인에게 적용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다.




#Article 231: 언어학 (334 words)


언어학(言語學, )은 인간의 언어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언어학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기능과 본질을 과학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법과 같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인 지식을 체계화, 규칙화하는 것에 그 연구 목적이 있다.

언어학의 연구 분야를 나누는 가장 큰 구분 중의 하나는 어떤 한 순간의 언어 상태를 연구하는 공시언어학과 시간에 따른 언어의 변화를 연구하는 통시언어학을 구분하는 것이다.

다음은 언어학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론 분야이다. 이러한 구분은 언어가 낮은 단계의 소리에서 높은 단계의 뜻까지 위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점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한 위계적인 구조 속에서 어떠한 대상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가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위에서 형태론과 통사론을 문법론으로 묶기도 한다.
다음 분야들은 그 연구의 역사가 매우 오래된 분야들로 전통언어학의 분야로 인식되기도 한다. 어휘론은 단어들의 체계를 연구하는 분야에 해당하고 어원론은 언어의 시간적인 변화, 방언학은 언어의 공간적인 변화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어떠한 차원에서 언어를 연구하는가에 따라 다음과 같은 분야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구분은 위에 제시된
대상들을 어떠한 입장에서 또는 어떠한 방법론을 가지고 연구하는가를 구분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차원에서 음운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역사음운론, 전산적인 차원에서 의미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전산의미론, 이론적인 관점에서 통사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이론통사론 등으로 불린다.

논리학, 수학, 컴퓨터 과학, 통계학 등의 방법론을 이용한 접근법들도 존재하며 이들은 순수한 언어학이 아니라 학제간 연구로 인식되기도 하며 때로는 실용적인 성격이 강해 응용언어학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또한 언어의 어떤 측면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학이라는 학문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분야도 존재한다. 언어학의 방법론에 대한 추상적인 연구를 하는 메타언어학과 언어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언어학사가 있다.

이외에도 언어학의 하위 분야로 인식되기도 하고 문학의 한 분야로 인식되기도 하는 문체론과 수사학, 철학의 한 분야로 인식되는 기호학 등이 있다. 

언어와 관련된 실질적인 분야를 다루는 응용언어학에는 언어 관련 교재 개발, 교수법, 번역과 통역, 사전 편찬, 언어치료, 언어정책, 전산처리 등 다양한 분야가 존재한다.

언어학은 연구 주제에서 문학, 철학, 인류학, 심리학, 인지과학 등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언어를 연구하는 분야들은 서로 겹치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어느 특정 학문 분야의 하위 분과로 분류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분야들은 흔히 학제적연구라고 불린다. 이들은 언어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들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으며 일부 분야는 언어에 관련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어학자들에 의해서는 거의 연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고려대학교, 부산대학교, 서울대학교, 충남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등과 같이 주요 언어학에 대한 커리큘럼을 가진 언어학과들은 전공 학위에서 문학사로 분류하고 있다.




#Article 232: 한국정보올림피아드 (347 words)


한국 정보 올림피아드(, KOI)는 고등교육을 받은 청소년이 참가하는 대한민국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대회이다. 알고리즘 설계 능력을 평가하는 경시 부문과 학생이 개발한 소프트웨어의 창의성을 평가하는 공모 부문으로 나뉜다. 부문별 우승자는 각각 국제 정보 올림피아드와 국제과학기술경진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얻는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주최하고, 한국정보화진흥원과 14개 교육청에서 주관하며, 한국정보과학회에서 후원한다.

이 첫 대회에서 황당한 일이 일어났는데, 오전 10시 20분에 체육관 전체가 정전되어 참가자와 관계자를 비롯해 모든 컴퓨터가 꺼진 것이다. 항의가 쏟아지자 대회 마감 시각이 12시 20분에서 2시간 연장되어 14시 20분으로 미루어졌다.

정전 원인은 전두환 대통령의 방문이었다. 전두환이 예정에 없이 대회장을 갑작스레 방문하게 되자 대통령 경호실이 경비 체계를 점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회장의 전원을 내려버렸다. 응시생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처사였지만, 한편으로는 일개 대회에 대통령이 직접 찾아갈 만큼 관심을 보였다는 것에서 정부의 정보화에 대한 열망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전두환은 경진대회 입상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서 점심도 함께 먹었다.

정전만큼이나 놀라운 일은, 컴퓨터를 고작 10개월밖에 배우지 않은 초등학생 하형진(대구 계성국민학교 6학년)이 기라성 같은 중, 고등학생들을 다 제치고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이었다. 하형진은 여러 차례 신문에 소개되었는데, 이때 핵물리학자가 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후 한국과학기술원에 입학했고, 지금은 게임회사 KOG에서 프로그래머로 재직 중이다. 퍼스널컴퓨터 경진대회는 13회까지 열린 후 1996년부터 현재와 같이 정보올림피아드로 이름을 바꿔 개최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시 부문은 수학적, 논리적 사고력을 바탕으로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부문이다. 지역 예선 필기를 통과하면 전국 본선에 진출한다. 2016년 이전에는 시 단위 지역 예선을 통과하고 또 시 도별 지역 본선도 통과해야 했다. 경시부문 우수자(통상 금상 이상)에게는 국제 정보 올림피아드에 참가할 자격이 부여된다.

예선은 필기 시험으로 치른다. 수학적 규칙을 찾는 능력과 작성된 코드를 파악하는 능력을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둔다.

컴퓨터로 직접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실기로 치른다. 2016년에 예선과 통합되면서 사라졌다.

실기로 치른다. 문제는 대체로 네 개가 출제되고, 시험시간은 3시간 가량이다. 구체적인 시상 규모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중·고등부 대상 수상자에 한하여, 지도교사에게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이 수여된다. 장려상은 0점자와 미참자를 제외한 모든 참가자에게 시상된다. 항상 위 표대로 시행되는 것은 아니며, 매년 세부 시행계획에서 시상내역이 변경될 수 있다.

공모 부분은 학생이 스스로 개발한 창의적인 소프트웨어를 평가하는 것으로, 시·도별 추천작품이 본선에 올라간다. 지역 예선 대회 개최 여부는 시·도마다 다르다. 공모부문 우수 시상자에게는 국제과학기술경진대회(ISEF)의 컴퓨터 공학 부문에 참가할 자격이 부여된다. 다음은 그 시상 규모와 내용이다.

경시부문과 마찬가지로, 초·중·고등부 대상 수상자에 한하여 지도교사에게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이 수여된다. 심사위원회의 심사에 따라 수상인원은 변경될 수 있다.




#Article 233: 베이직 (215 words)


초심자용 다목적 기호명령부호(初心者用 多目的 記號命令符號，Beginner's All-purpose Symbolic Instruction Code), 약자 베이직(BASIC, )은 프로그래밍 언어의 하나이다. 절차형 언어로 1964년 다트머스 대학교의 존 케메니(John Kemeny)와 토머스 커츠(Thomas Kurtz)가 개발했다.

교육용으로 개발되어 언어의 문법이 쉬우며, 다트머스의 최초 제품 이래로 인터프리터 방식이 많았으나 최근에는 컴파일러 방식도 많다. 현재는 다양한 종류의 베이직이 존재하며 서로 문법도 많이 차이가 난다. 서로 다른 종류 사이의 소스 코드는 호환되지 않는다.

아래 예는 모든 ANSI/ISO 호환 베이직과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마이크로 컴퓨터에 설치된 대부분의 베이직에서 동작한다.
 10 PRINT Hello, world!
 20 END
이러한 기종에 설치된 베이직은 줄번호가 생략된 즉각 모드로 실행할 수도 있다. 다음 예를 실행할 때에는 RUN 명령어가 필요없다.
 PRINT Hello, world!
 ? Hello, world!
이후의 베이직은 구조화 프로그래밍을 지원하며 코드에서 줄번호가 사라졌다. 다음 예는 현대적인 베이직의 거의 대부분에서 RUN 명령으로 실행할 수 있다.
 PRINT Hello, world!
 END
많은 베이직에서 End 선언문은 빼도 된다.

Class stars
    Sub Main()
        Dim UserName, Answer, stars As String ' UserName$, Answer$, stars$ may be used as well.
        Dim NumStars, I As Integer
        Console.Write(What is your name: )
        UserName = Console.ReadLine()
        Console.WriteLine(Hello {0}, UserName)
        Do
            Console.Write(How many stars do you want: )
            NumStars = CInt(Console.ReadLine())
            stars = New String(*, NumStars)
            Console.WriteLine(stars)
            Do
                Console.Write(Do you want more stars? )
                Answer = Console.ReadLine()
            Loop Until Answer  
            Answer = Answer.Substring(0, 1)
        Loop While Answer.ToUpper() = Y
        Console.WriteLine(Goodbye {0}, UserName)
    End Sub
End Class




#Article 234: 인터프리터 (253 words)


인터프리터(, )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소스 코드를 바로 실행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또는 환경을 말한다. 원시 코드를 기계어로 번역하는 컴파일러와 대비된다. 인터프리터는 다음의 과정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 기능을 가진 프로그램이다.

인터프리터는 고급 언어로 작성된 원시코드 명령어들을 한번에 한 줄씩 읽어들여서 실행하는 프로그램이다. 고급언어로 작성된 프로그램들을 실행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프로그램을 컴파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프로그램을 인터프리터에 통과시키는 방법이다. 인터프리터는 고급 명령어들을 중간 형태로 번역한 다음, 그것을 실행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컴파일러는 고급 명령어들을 직접 기계어로 번역한다.

컴파일된 프로그램들은 일반적으로 인터프리터를 이용해 실행시키는 것보다 더 빠르게 실행된다. 그러나 인터프리터의 장점은 기계어 명령어들이 만들어지는 컴파일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는데 있다. 컴파일 과정은 만약 원시 프로그램의 크기가 크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인터프리터는 고급 프로그램을 즉시 실행시킬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터프리터는 종종 프로그램의 개발단계에서 사용되는데, 그것은 프로그래머가 한번에 적은 양의 내용을 추가하고 그것을 빠르게 테스트 해보길 원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인터프리터를 이용하면 프로그래밍을 대화식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의 교육용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인터프리터와 컴파일러는 둘 다 대부분의 고급언어에 적용이 가능하지만 BASIC 이나 LISP과 같은 일부 언어들은 개발 당시에는 특별히 인터프리터에 의해서만 실행되도록 설계되었다. 그 외에도 포스트스크립트와 같은 페이지 기술 언어 들도 인터프리터를 사용한다. 모든 포스트스크립트 프린터는 포스트스크립트 명령문을 실행할 수 있도록 인터프리터가 내장되어 있다.

최초의 인터프리트 방식의 고급 언어는 리스프였다. 리스프는 1958년 스티브 러셀이 IBM 704 컴퓨터에 최초로 구현하였다. 러셀은 존 매카시의 논문을 읽고 리스프의 eval 함수가 기계어로 구현될 수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맥캐시를 놀라게 했다. 작업 중인 리스프 인터프리터가 그 결과 만들어졌으며 리스프 프로그램의 실행, 더 정확히 말해, 리스프 식의 평가에 사용될 수 있었다.




#Article 235: 라이프 게임 (698 words)


라이프 게임() 또는 생명 게임은 영국의 수학자 존 호턴 콘웨이가 고안해낸 세포 자동자의 일종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세포 자동자 가운데 하나이다.

미국의 과학 잡지 사이언티픽 어메리칸 1970년 10월호 중 마틴 가드너의 칼럼 〈Mathematical Games(수학 게임)〉란을 통해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소개되어 단순한 규칙 몇가지로 복잡한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관심과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라이프 게임은 컴퓨터 과학에서도 의미가 있는데, 왜냐하면 라이프 게임이 범용 튜링 기계와 동등한 계산능력을 가진 세포 자동자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알고리즘에 의해 계산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이를 이용하여 계산할 수 있다.

이 ‘게임’은 사실 게임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게임의 진행을 결정하는 일반적인 게임과는 약간 많이 다르다. 라이프 게임의 진행은 처음 입력된 초기값만으로 완전히 결정된다.

라이프 게임은 무한히 많은 사각형(혹은 ‘세포’)으로 이루어진 격자 위에서 돌아간다. 각각의 세포 주위에는 인접해 있는 여덟 개의 ‘이웃 세포’가 있으며, 또 각 세포는 ‘죽어’ 있거나 ‘살아’ 있는 두가지 상태 중 한가지 상태를 갖는다(‘켜져’ 있거나 ‘꺼져’ 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격자를 이루는 세포의 상태는 연속적이 아니라 이산적으로 변화한다. 즉, 현재 세대의 세포들 전체의 상태가 다음 세대의 세포 전체의 상태를 결정한다.

각각의 세포가 다음 세대에서 갖는 상태는 현재 자신의 상태와 이웃하는 여덟 개의 세포들 중 몇 개가 살아있는 상태인지만을 따져서 결정된다. 존 호턴 콘웨이의 규칙들이다.

존 호턴 콘웨이는 규칙을 다음의 기준에 따라 설정하였다.

라이프 게임에는 전혀 변화가 없는 고정된 패턴(정물 靜物, still life), 일정한 행동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패턴(진동자, oscillator — 정물은 주기가 한 세대인 진동자라고 한다.), 한쪽 방향으로 계속 전진하는 패턴(우주선, spaceship) 등 여러 패턴이 존재한다. 아래에 간단한 예가 있다. 살아 있는 셀은 검은 색으로, 죽어 있는 셀은 흰색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무한히 이을 수 있는 패턴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배(boat)는 무한정 이을 수 있다.

진동자 또는 정물로 수렴하기까지 많은 세대가 필요한 패턴도 있는데, ‘methuselah(므두셀라)’라고 불린다. 고대 로마에서 유래된 펜토미노 퍼즐의 모양 중 R-펜토미노(R-Pentomino)는 세포는 5개이지만 1130세대가 지나서야 안정화된다. (이는 6개 미만 세포 패턴 중 가장 활동적인 패턴이다.) ‘다이하드(diehard)’는 130세대가 지나서야 사라진다. ‘도토리(acorn)’는 5206세대가 지나서야 13개의 글라이더(glider)와 수많은 진동자 또는 정물을 남기고 안정화된다. 지금까지 발견된 패턴 중 진동자 또는 정물로 수렴하기까지 가장 많은 세대를 거친 패턴은 리드카(Lidka)로, 무려 29,055 세대가 지나야 안정화된다.

라이프 게임이 처음 소개된 〈Mathematical Games〉에서, 콘웨이는 세포 수가 무한히 많아지는 패턴을 찾은 사람에게 상금을 걸었다.

해커 빌 가스퍼(Bill Gosper)가 1970년 11월에 처음 그러한 패턴들을 찾아 상금을 탔다. 패턴들 가운데에는 ‘글라이더’나 ‘우주선’을 발사하는 ‘총’과 안정화한 패턴들을 꼬리에 남기며 전진하는 ‘기관차’, 그리고 양쪽을 다 행하는 ‘갈퀴’ 패턴이 있었다. 그는 또한 제곱 비례로 성장하는 패턴인 ‘사육사’ 패턴도 찾아냈는데, 이것은 ‘총’ 패턴을 꼬리에 남기며 앞으로 전진한다. 이 후로 글라이더를 이용한 논리 게이트, 가산기, 소수 발생기와 라이프 게임을 더 큰 스케일과 느린 속도로 모방하는 단위 세포 등 다양한 패턴들이 만들어졌다.

맨 처음 발견된 ‘총’이 여전히 알려진 가장 작은 총이다:

가스퍼의 글라이더 건

무한히 성장하는 더 단순한 패턴들이 그 후에도 발견되었다. 아래의 세 패턴은 모두 무한히 성장한다. 처음 것은 10개의 살아있는 세포만을 가지며 이보다 적은 세포를 가진 무한 성장 패턴은 존재하지 않음이 증명되었다. 두 번째 것은 5x5의 정사각형 안에 포함되는 패턴이고, 세 번째는 두께가 1인 패턴이다.

여러 개의 글라이더가 합성되어 재미있는 결과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두 개의 글라이더를 적당한 방법으로 블록에 충돌시키면, 블록은 글라이더가 발사된 곳을 향해 한 칸 다가간다. 세 개의 글라이더를 다른 방법으로 충돌시키면 블록은 발사된 곳의 반대 방향으로 한 칸 다가간다. 이것은 ‘움직이는 블록 메모리’라고 불리며 카운터를 모방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글라이더를 이용해 AND, OR, NOT 게이트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두 개의 카운터와 연결된 유한 상태 오토마타를 만들 수도 있는데, 이것은 만능 튜링 기계와 똑같은 계산능력을 가지며, 이는 라이프 게임이 무한한 메모리를 가진 어떤 컴퓨터와도 동등한 계산능력을 가짐을 의미한다. 글라이더 건의 패턴을 이용하여 새로운 개체를 조합하는 것도 가능하며, 원본의 복제물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만능 건축사’ 패턴은 튜링 머신과 동등한 컴퓨터를 만들 수 있으며, 이것은 더 복잡한 여러 가지 개체를 만들어내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라이프 게임을 시작으로, 몇 가지 새로운 규칙을 가진 변종들이 존재한다. 원래의 라이프 게임은 3개의 이웃 세포가 살아있을 때 태어나며, 2개 또는 3개의 이웃 세포가 살아있을 때 생존하고 나머지 경우에는 사망한다. 이 규칙은 ‘23/3’으로 표시할 수 있다. 앞쪽 숫자들은 세포가 생존하기 위한 숫자를 의미하며, 뒤쪽 숫자들은 세포가 새로 태어나기 위한 숫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16/6’은 6개의 이웃이 존재할 때 세포가 새로 태어나고, 1개나 6개의 이웃이 존재할 때 생존하며 나머지 경우 사망하는 규칙을 가짐을 의미한다. 하이라이프(HighLife) 규칙은 원래 규칙에 6개의 이웃이 존재할 때 새로 태어난다는 규칙이 추가되며, 이는 ‘23/36’으로 표시된다. HighLife는 ‘복제자’ 패턴들로 유명하지만, 이 규칙의 대부분의 패턴들이 너무 복잡하거나 황폐한 패턴들을 생성한다.

Life32/game of life 프로그램에 따름.




#Article 236: 도조 히데키 (408 words)


도조 히데키(동조 영기 ,1884년 12월 30일 ~ 1948년 12월 23일)는 일본 제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1941년 10월 18일부터 1944년 7월 18일까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육군대신, 내무대신, 외무대신, 문부대신, 상공대신, 군수대신 등을 지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으로 손꼽힌다.

그는 군사 행정가이자 야전 사령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고, 빠르게 승진해 1935년에는 관동군 헌병대 사령관, 1937년에는 관동군 참모장이 되었다. 이때 도조에게 붙은 별명이 면도날()이었는데, 이는 그의 빠른 일 수행 능력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하지만 당시 미국 정부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일본군 전면 철수를 요구하였던 와중에는 도조가 이에 강경하게 반대하면서 오히려 고노에 내각을 붕괴시켰다. 1941년 10월 18일 내대신 기도 고이치 등의 추천으로 내각을 조직해 제40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고, 권력 강화를 지향해 관례를 깨고 내무대신, 육군대신, 참모총장 등을 겸임하면서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였다. 이 해에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라는 가르침을 담은 전진훈(戦陣訓)을 만들기도 하였다.

도조는 이로써 내각을 장악해 군사 국가 체제로 일본 제국 전역을 군사강국화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습격을 명령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며, 1942년 외무대신, 1943년 문부대신, 상공대신, 군수대신을 겸임하고, 그 해 대동아회의를 개최하여 일본 주도하의 아시아 국가들의 단결을 도모하였다.

전쟁을 계속해서 수행해 전쟁 초반에는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전선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으며, 1944년 국무와 통수의 일치 및 강화를 주장해 육해군 통수부 총장의 경질을 단행하고 스스로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 후반에 이르러 점점 전황이 악화되자 일본군은 수세에 몰렸고, 1944년 마리아나 제도를 연합군에게 빼앗기자 그 책임을 지고 내각총리대신 직에서 물러났다.

도조는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후, 권총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병원에 잠시 입원하였다가,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1948년 11월 12일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도이하라 겐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무토 아키라, 기무라 헤이타로, 마쓰이 이와네, 히로타 고키 등과 함께 A급 전범으로 사형을 선고받아 그 해 12월 23일 0시 1분에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도조는 처형되기 전까지도 전혀 참회하지 않으면서 불교에 귀의해 욕망의 이승을 오늘 하직하고, 미타(彌咤)의 곁으로 가는 기쁨이여... 라는 유언시를 남기기도 했다. 교수형 후, 도조 히데키 등 전범들의 사체는 유족에게 반환되는 일 없이, 요코하마시의 한 화장터로 이송되어 화장되었고, 유골은 분쇄되어 유회와 함께 항공기에 의해 태평양에 투기되었다. 그러나, 고이소 구니아키의 변호사와 그 화장터 근처에 있는 한 절의 주지가 화장터 직원의 안내로 잠입해, 잔회두는 곳에 버려진 7명의 유회와 유골의 작은 조각을 회수하였고, 회수된 유골은 아타미의 고아 관음(興亜観音)에 옮겨져 숨겨졌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의 A급 전범 14명의 합사는, 1966년 구 후생성(지금의 후생노동성)이 제신명표(祭神名票)를 야스쿠니 신사 측에 보내 1970년 야스쿠니 신사 숭경자 대표회(靖国神社崇敬者総代会)에서 결정되었고, 1978년 합사되었다.

우지 도시히코는 자신의 책에서 도조는 어려서부터 권위주의자였으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군수대신과 참모총장을 겸임해 정치와 전략의 일원화를 추구한 독재자이자 철저한 전쟁 수행자라는 입장을 보였다. 또한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중국, 한국 등 주변 국가의 입장에서 도조 히데키는 영원히 ‘전쟁 범죄자’로 기억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Article 237: 한국철도공사 (148 words)


한국철도공사(, , 약칭 한국철도 또는 철도공사 또는 코레일())는 대한민국의 국유 철도 영업과 관련 사무를 담당하는 국토교통부 산하의 공기업이다. 본사는 대전광역시 동구 중앙로 240 (소제동 철도기관 공동사옥)에 있으며 한국철도공사법에 의거하여 설립되었다.

여객객차 및 발전차는 2017년 기준 나머지는 2020년 기준이다.

한국철도공사에서는 2011년 2월 7일 철도문화재 관리 지침을 제정하여 사(社) 소유의 철도 유물을 철도기념물과 준철도기념물로 지정하고 있다.

철도사적으로 보존가치가 있는 철도유물 중에서 한국철도공사의 사장이 지정한 것이다. 다만, 문화재청장이 이미 등록한 문화재는 제외한다.

향후 역사적, 기술적, 교육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것 중에서 한국철도공사의 사장이 지정한 것이다.

현재 운행 중인 차량만을 기술하였다.

자료는 2010년 한국철도공사/국가철도공단 연보이다. 승하차 승객수 순위 50위 이상인 곳을 정리하였다. 통근열차 역시 여객사업본부 소속 열차지만 그 기본적 역할이 광역도시권의 승객 수송이므로 제외하였다.

참고자료는 코레일/국가철도공단 철도통계연보기준이다. 일반열차(새마을호·무궁화호)는 감소추세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KTX는 이용객이 소폭 증가하는 추세이다.

자료는 2006년 한국철도공사/국가철도공단 연보이다. 승하차 승객수 순위 50위 이상인 곳을 정리하였다. 통근열차 역시 여객사업본부 소속 열차지만 그 기본적 역할이 광역도시권의 승객 수송이므로 제외하였다.




#Article 238: 대한민국의 교통 (851 words)


이 문서는 대한민국의 교통에 대해 서술한다.

한국의 도로 교통은 삼국시대의 역원제로 시작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의주, 경흥, 평해(지금의 울진), 동래, 제주, 강화 등 6개 방면으로 발달되었다. 1900년대 초에 옛길이 신작로(새길, 포장로)로 바뀌고 1911년에 관용 자동차가 도입되며 1912년 택시와 버스가, 1928년부터는 화물자동차가 등장했다.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의 건설과 함께 고속 버스가 등장하고, 이후로 전국 각지에 고속 도로가 건설됨에 따라 대한민국의 도로 교통은 질적·양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현재 거의 모든 도시 내부 및 도시간의 주요한 대중 교통 수단으로 각종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경제성장으로 국민소득이 증가하고 생활·소비패턴이 변화함에 따라 자동차의 보유대수는 급격히 증가한 반면에 도로화율은 점차 둔화되고 있어 심각한 적체·정체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교통사고 등 안전사고율 또한 해마다 질·양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2003년 9월말 현재 전국의 자동차 대수는 총 1,449만 6,844대로 1998년 1,046만 9,599대에 비해 약 1.4배, 2000년 대비 1.2배 증가를 나타냈다. 업종별로는 영업용이 74만 5,912대로 전체 차량의 5.1%를, 비영업용이 1,375만 932대로 94.9%를 차지하고 있다. 차종별로는 승용차 1,020만 2,813대, 버스 125만 6,728대, 화물자동차 299만 3,280대, 특수차량 4만 4,023대로 나타났다. 동년기준으로 운수업체 수는 총 29만 8,148사이며, 종별로는 시내버스 390사, 시외버스 159사, 고속버스 21사, 전세버스 462사, 택시 1,832사, 노선화물 23사, 구역화물 등화물 1,305사, 용달 605사, 장의자동차 404사 등이다. 운수업체 종사자수는 총 54만 6,214명이며, 이 중 운전자는 버스업종 7만8,823명, 택시업종 25만3,370명, 화물업종 16만명이고 정비원은 1만2,477명, 기타 3만8,898명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고속국도, 일반국도, 특별시도·광역시도, 지방도, 시도, 군도, 구도 등의 7종의 종류로 도로를 구분하며, 나열한 순서대로 등급을 설정하고 있다. 도로의 정의에 관해서는 《도로법》을, 도로에서의 안전 수칙 등과 관련해서는 《도로교통법》의 적용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버스는 대한민국에서 운행하는 모든 버스를 일컫는다. 잘 발달된 도로망을 이용해, 대부분의 지역이 버스 운송망으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최초의 시내 버스는 일제 강점기에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2006년 현재 각급 버스의 인킬로는 48003105384.3725명킬로미터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버스 기업체는 경기고속으로, 577개의 일반 시내버스, 15개의 광역버스, 340개의 시외버스, 56개의 고속버스 노선을 운영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 자동차운수사업법에 의하면, 택시는 정식적으로는 택시여객 자동차운송사업이라 말하며, 1개의 계약으로 승차 정원 6명 이하의 자동차를 이용, 승객을 운송하는 사업이라고 하며 특정한 면허를 취득하지 못하면 택시를 운행할 수 없다. 운수회사에 속한 회사택시와 개인이 영업하는 개인택시가 있는데, 개인택시의 경우 법에서 정한 자격요건에 맞아야 한다. 지역별로 택시 색이 지정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2009년 12월4일 하이브리드택시가 서울에 도입되었다. 서울시는 2020년까지 모든 택시를 하이브리드카로 바꿀 예정이다.

전통적인 장거리 대량운송 수단인 철도는 자동차·항공운송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여객·화물수송에서의 지위는 확고하다. 그러나 시설의 노후화, 서비스의 부재, 경영의 진부화 등으로 한때 심각한 재정악화와 퇴조현상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1980년대에 지속적인 노후시설대체, 서비스개선, 경영합리화 작업으로 모습을 일신하고 있고 도로수송의 적체, 항공수송의 고운임에 비해 저운임·신속·대량수송의 장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2002년 말 현재 궤도 총연장 6,819km로 영업노선이 45개 노선에 3,101.2km고, 이 중 복선화율은 28.4%, 전철화율은 18%이다. 한편 간선 철도망과 간선 고속도로망의 길이는 약 3000km로 거의 같은데, 이는 다른 세계 주요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철도 인프라 과소 현상이라는 지적이 철도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철도수송장비는 동력차가 총 2,851량으로 디젤기관차 482량, 전기기관차 96량, 디젤동차 610량, 전기동차 1,662량, 증기기관차 1량이며, 객차는 총 1,678량, 화차는 1만 4,113량으로 역(驛)은 총 631개이다.

대한민국의 대도시들은 자체적인 철도 교통망을 갖추고 있거나 갖출 계획을 세우고 있다. 서울특별시에는 현재 9개의 광역전철과 지하철 노선이 있으며, 1개 노선이 건설 중, 여러 개의 경전철을 추가로 계획 중이다. 이 노선은 현재 한국철도공사와 서울메트로, 서울도시철도공사의 세 회사가 운영하고 있다. 이를 수도권 지역의 것까지 합치면 현재 운영되고만 있는 것만 해도 11개, 지선과 건설되고 있는 것을 합치면 26개나 된다. 또한 수도권을 비롯한 주요 지방도시에서도 지하철들이 건설되어 인천광역시 (2개 노선), 대구광역시 (3개 노선), 대전광역시 (1개 노선), 부산광역시 (6개 노선), 광주광역시 (1개 노선) 등이 운행 중인데, 도시의 수송력을 분담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이 경우에는 각각의 도시에서 세운 공기업이 운영하고 있다. 단 부산에 있는 부산김해경전철은 민간기업이 운영한다

지하철 및 광역전철을 제외한 대부분의 철도는 코레일이 운행한다. 이 철도는 전국 각지를 연결하고 있다. 한편 증기기관차는 1980년대 이후 몇몇 지방도시에서 관광열차로 운행되고 있으며, 1995년에는 협궤 철도가 사라졌고, 경부선의 과다한 여객 수요를 분산시키기 위해 2004년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되었고, 정부에서는 호남고속철도의 건설을 추진 중이다. 또한 2007년에는 대한민국 유일의 사설 철도인 인천공항철도가 개통되었다. 다만 협궤 철도는 수인선이 공식적으로는 영업 정지 상태여서 철도 통계에는 존재한다. (현재 선로가 철거되었으며, 표준궤로 복선 전철화 공사가 진행 중이다. )

과거에는 서울전차, 부산전차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선되었다.

수출입화물운송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해운업은 선박의 노후화, 선원부족, 비용가중이라는 내부적 문제에 비국적선 취항증가로 경영압박을 받고 있다. 2002년 말 전국의 항만수는 총 49개항이며, 이 중 무역항이 27개, 연안항이 22개항이다. 이들 항만의 연간 하역능역은 2억7,259만5,000톤으로 1988년의 1억7,077만톤보다 약 1.6배 증가했다. 선박등록현황은 총 763만 7,549톤(6,792척)이며, 이 중 여객선 12만 4,513톤(190척), 화물선 521만 4,636톤(725척)이고, 외항선박들의 주요정기항로 취항현황을 보면 북미 25척, 동남아 48척, 한일항로 55척 등이다.

대한민국에는 8개의 국제공항과 7개의 국내공항이 국내외 항공 교통을 담당하고 있다. 항공교통은 광복 후 1946년 대한국민항공사(KNA)가 설립되어 국내선을, 1954년 이후 국제선을 운항하였다. KNA는 1962년에 대한항공공사로 개칭하고 국영으로 운영되다가, 1969년 3월에 민영화 정책으로 한진상사가 인수하여 대한항공으로 개명하고 1970년대 여객·수출입화물의 증가로 본궤도에 올라 고속성장을 지속해온 업종이었다. 1988년 대한항공의 독점을 마무리하고, 제2민간항공사업이 허가됨으로써 금호그룹의 아시아나항공과 함께 경쟁체제로 바뀌었다. 1988년 12월 아시아나 항공이 국내선에 취역함으로써(국제선취역은 1990년 1월) 본격적인 경쟁에 돌입하였다. 2002년 말 현재 항공기보유대수는 총 295대로 수송기 183대, 경비행기 28대, 헬리콥터 60대이었다. 국제항공노선은 26개국 63개 도시에 79개(16개 중복노선)노선이 개설되어 있었으며, 이 중 여객노선은 69개 노선이었다. 대한항공은 2007년 기준으로 약 100억 톤의 화물을 처리하였다.

현재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외에도 진에어, 제주항공, 이스타항공, 티웨이항공, 에어부산 등 많은 저가항공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일본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일본과의 항공 교통이 발달하였다. 대한민국의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과 일본의 일본항공, 전일본공수, 스카이마크 항공 등의 항공사가 한국의 인천국제공항 등 4개 공항, 일본의 나리타 국제공항 등 25개 공항을 통해 많은 정기 및 전세기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노스웨스트항공, 델타항공, 유나이티드항공은 인천국제공항에서 나리타 국제공항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정기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Article 239: 존 맥스웰 쿳시 (200 words)


존 맥스웰 쿳시(, 1940년 2월 9일 ~ )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작가로, 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존 마이클 쿠체(John Michael Coetzee)이다. 그는 네덜란드계 백인의 후손인 아프리카너이며, 아프리칸스어도 사용했으나, 영어권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작품도 영어로 썼기 때문에, 그의 이름도 영어식인 존 맥스웰 쿳시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케이프타운 대학교에서 수학과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1960년대 초 영국으로 이주하여 IBM을 거쳐 영국의 컴퓨터 하드웨어 업체인 ICL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이 때의 경험은 《Youth》(2002)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 대학교에서 언어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8년 ~ 1971년 뉴욕주 버펄로의 뉴욕 주립 대학교 버펄로에서 영문학을 강의했다. 버펄로에서 첫 작품 《어둠의 땅(Dusklands)》을 착수하였다. 그 사이 그는 미국 영주권을 신청했으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영주권 발급이 허락되지 않자 곧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돌아와 케이프타운 대학교의 영문학 교수로 2001년까지 재직했다.

두 차례 부커상 수상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회의 모순과 갈등, 인종차별의 허구, 서구문명의 위선 등을 우의적으로 그려내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고, 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국외자의 놀라운 관여를 수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한 것이 노벨 문학상 수상 사유였으며, 아프리카 대륙 출신으로는 네 번째,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으로는 두 번째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다. 그는 케이프타운 대학교 정년퇴임 후 2002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들레이드로 옮겨, 애들레이드 대학교의 영문학부 명예 연구원이 되었고, 2003년 미국 시카고 대학교의 교환교수를 겸임했다. 2006년, 오스트레일리아 국적도 취득했다.




#Article 240: 특별시 (542 words)


특별시(特別市)는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이다.

대한민국의 특별시는 서울특별시가 유일하다. 1947년 미군정 시대에 경기도 경성부를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시켜 경기도에서 분리하였으며, 대한민국 출범 후 1949년에 특별자유시를 특별시로 개칭하였다. 광역시 및 특별자치시 및 도와 동급인 광역지방자치단체이지만, 특별시장은 차관급인 광역시장 및 도지사보다 더 높은 장관급이다.

부산의 특별시 승격 주장이 나온 계기는 서울의 특별시 승격이었다. 경기도에 예속됐던 서울이 1946년 8월 16일 수도임을 명분으로 내세워 특별시가 되자 부산에서도 특별시 여론이 조성되었다. 여론 조성의 중심에는 1946년 7월 10일 출범한 부산상공회의소가 있었고 부산상공회의소 초대와 2, 3대 회장을 지낸 김지태(1908∼1982)가 있었다.

승격 여론 조성의 다른 축은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다. 1949년 6월 14일 부산상공회의소와 동회연합회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는 관과 유지가 총망라된 범시민적 조직이었다. 회장 김지태, 부회장 김용준, 이사 김낙제, 김달범, 신덕균, 권인수 등이 선임돼 거시적 승격운동 조직을 갖추었다.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는 1949년 6월 25일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부산을 정부 직할의 특별시로 승격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다.

부산시는 한국 전쟁 중에 임시수도가 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불어났다. 이를 바탕으로 부산시의 시세(市勢)가 강해졌고 부산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부산시를 특별시로 지정해야하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전후에 서울특별시와 서울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반발하여 무산되었다. 4.19 이후 다시 '부산특별시 승격안'이 주장되었으나 장면 내각은 이를 묵살하였다. 하지만 경부축을 발판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자하는 박정희의 의지로 부산시는 특별시보다 한 단계 낮은 직할시로 지정되었다.

이에 대해 앞서 토론한 박동철 경남신문 편집국장도 “부산의 목적은 신항만 독자 운영을 위한 진해권역 편입”이라며 “부산은 진해 웅동·용원동 일대만 손에 넣어도 크게 만족할 것”이라며 적극 대응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허남식 부산광역시장은 독자적으로 해양개발에 나설 수 있고 해양부처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 부산이 국제적으로도 경쟁력 확보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으며 최우용 동아대학교 교수는 해양특별시 법률안의 제정방안은 국가균형발전과 해양도시의 국가경쟁력 확보차원에서 추진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행정수도 이전 논의가 정리되지 않은데다 타 시도와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추진에 난항이 예상된다.

유 의원은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차등적 분권과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부산을 해양특별시로 만들어야 한다며 동북아의 유수한 경쟁 항만들의 독주를 막고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부산이 살고 나라가 잘 살게 되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하여 울산광역시청은 '정치인의 주장으로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울산 상공계에서도 부산과 울산을 통합하겠다는 발상은 다분히 부산을 염두에 둔 인기영합적인 발언이라고 비판하고 정치적인 면은 제쳐두고라도 인구만 봐도 부산의 3분의 1에도 못미치는 울산이 부산과 대등한 통합이 가능하겠느냐면서 만에 하나 양도시가 통합된다면 울산은 부산을 먹여 살리는 생산기지창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한편, 해운대구청은 한발 나아가 관광특별시의 시너지 효과 극대화를 위해 인근 구군과의 통합을 제안할 계획이지만 해당 지역의 반응은 냉소적이다. 정부의 지방행정체제 개편 추진이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관련 지방자치단체와의 아무런 협의 없이 해운대구청 독단적으로 내린 결정이라는 것이다. 해운대구와 맞닿아 있는 기장군의 오규석 군수는 해운대관광특별시 조성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부터 묻고 싶다며 통합을 이야기하면서 주변 지자체와 아무런 논의도 없었다는 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현욱 수영구청장 또한 주변 지방자치단체와의 통합을 논하기 하기 전에 해운대구 안에서 벌어지는 지역간 불균형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해운대구청의 독단적인 관광특별시 발표에 불쾌함을 나타냈다. 더욱이 최근 수년 동안 논란이 되어온 부산지역의 동서 간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는 비난의 목소리도 일고 있다. 서부산시민협의회 김영주 공동대표는 부산지역 내 동서 간 불균형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해운대구가 관광특별시 조성을 추진한다는 것은 지역 이기주의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며 이같은 계획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서부산에 그에 걸맞은 혜택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주발전협의회 황윤기 회장은 “경주 특별시 지정이 대선공약에 포함될 수 있도록 각 정당을 순회방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국해양대학교 김성국 박사는 이 '남해안해양특별시'가 성공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기획재정부의 경제자유구역의 관리권 이관,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의 조선산업 관리기능 이관,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 및 해양수산부)의 도서 및 해양과 이어진 육지부분 개발권 이관,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의 행정구역개편 등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라선특별시와 남포특별시,개성특별시가 특별시로 설치되어 있다. 라선시는 2010년 1월 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특급시'에서 특별시로 승격시킴으로써 생겨났다.




#Article 241: 팔도 (132 words)


팔도(八道)는 1895년까지의 조선의 광역 행정 구역을 이르는 명칭이다. 1413년 태종은 한반도를 여덟 개의 도로 분할하였는데, 팔도는 조선 시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대체적으로 그 행정 구역을 유지하였다. 1895년(고종 32년)에 23부제를 시행해 급진적으로 해체되었다가, 이듬해인 1896년에 팔도 중 남부 3개 도와 북부 2개 도를 남·북도로 나눈 13도제가 시행되었다.

'팔도'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한반도의 여러 지방'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쓰이며, 여러 지방의 아리랑이 '팔도 아리랑'으로, 여러 지방의 김치가 '팔도 김치'로도 불린다. 그러므로 '팔도'라는 말은 '한민족의 전통 문화'라는 의미로도 쓰인다고 할 수 있다.

각 도의 이름은 그 도의 대표적인 도시의 이름의 첫 두 글자로 만들었다. 예를 들면, '충청'은 충주의 '충'과 청주의 '청'을 따서 만들었다. 경기도만 예외적으로 '수도(京) 사방 500리 이내로 임금이 직접 관할하는 땅'이란 뜻으로 '기(畿)'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래의 표는 도청 소재지와 지방 이름에 대하여 고산자 김정호가 1857년에 제작한 동여도(東輿圖) 및 1896년의 행정구역 개편을 따라서 정리한 것이다.




#Article 242: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 (241 words)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大韓民國의 行政 區域)은 대한민국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지역에서 1개의 특별시, 6개의 광역시, 8개의 도, 1개의 특별자치도, 1개의 특별자치시로 구성된다. 이상 총 17개의 행정구역은 광역지방자치단체로 분류된다.

특별시는 자치구로, 광역시는 자치구와 군으로, 도는 자치시와 군으로 하위 행정구역을 둔다. 이상의 행정구역은 기초지방자치단체로 분류된다. 특별자치도와 특별자치시에는 기초지방자치단체를 두지 않으며, 특별자치도에는 자치시가 아닌 행정시를 둔다. 행정시는 특별자치도지사 직속으로 그 역할을 하며 기초지방자치단체로서의 권한이 없다. 2016년 10월 기준으로 특별시와 6개 광역시에는 총 69개의 자치구가 설치되어 있으며, 또한 6개 광역시와 8개 도에는 총 75개의 자치시와 82개의 군이 설치되어 있다.

특별시와 광역시를 제외한 인구 50만명 이상의 특별자치시와 자치시 (특정시)에는 일반구(행정구)를 둘 수 있다. 일반구는 기초지방자치단체로서의 권한이 없어, 특별·광역시에 설치된 자치구와 구별된다. 일반구의 구청장은 일반직 지방공무원으로 보(補)하고 시장이 임명한다. 구청장은 시장의 지휘·감독을 받아 소관 국가사무 및 지방자치사무를 맡아 처리하고 소속 직원을 지휘·감독한다.

시(자치시, 행정시)와 구(자치구, 일반구)는 읍·면·동으로, 군은 읍·면으로 하위 행정구역을 둔다. 다시 읍·면은 리로, 동은 통으로 나뉜다. 통 및 행정리는 말단 행정 구역인 반으로 나뉜다.

자료: 행정안전부 지방자치단체 행정구역 및 주민등록 인구 (2019년 2월 기준)

경기도는 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28시 3군을 남부와 북부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현재 경기남부는 수원시에 소재한 경기도청에서, 경기북부는 의정부시에 소재한 경기도청북부청사에서 각종 행정업무를 주관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으며, 휴전선 이북 지역도 대한민국의 영토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휴전선 이북 지역의 행정 구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을 인정하지 않고 1945년 광복 당시의 행정 구역 구분을 따르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북5도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행정안전부 산하에 이북5도위원회를 두고 있으며 도지사 및 시장·군수, 읍·면장을 임명하고 있다.




#Article 243: 가와바타 야스나리 (645 words)


가와바타 야스나리(, 1899년 6월 14일 ~ 1972년 4월 16일)는 일본의 소설가다. 오사카부 오사카시 기타구의 차화정(此花町, 지금의 덴진바시 부근)에서 태어났다.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요코미쓰 리이치 등과 함께 『분게이지다이(文藝時代)』를 창간하여 당시 유럽의 허무주의, 미래파, 표현주의 영향을 받아서 생긴 문학 유파였던 신감각파(新感覺派)의 대표적 작가로서 활약하였다. 『이즈의 무희()』, 『설국』, 『천 마리의 종이학()』, 『산소리()』, 『잠든 미녀()』, 『고도()
』 등 죽음이나 유전 속 '일본미(日本美)'를 표현한 작품을 발표했고, 1968년(쇼와 43년)에 일본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72년(쇼와 47년)에 만 72세(향년74세)로 사망하였다.

작가에 뜻을 두게 된 것은 중학교 2년때의 일로 1916년(다이쇼 5년)부터 『교한신보(京阪新報)』에 단편, 『분쇼세카이(文章世界)』에 단가를 투고하게 되었다. 1917년(다이쇼 6년)에 졸업하자 도쿄로 상경해 아사쿠사 구라마에(蔵前)의 사촌 집에서 얹혀 살면서 예비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여 제1고등학교의 1부 을(乙) 영문과에 들어갔다. 이듬해 가을에 이즈를 여행하다가 떠돌이 예인과 만나 교유한 경험은 훗날 『이즈의 무희』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 뒤 10년 동안 유가시마(湯ヶ島) 온천 여관을 드나들게 되었다.

초기에는 왕조문학이나 불교 경전의 영향을 받아 허무한 슬픔과 서정성이 넘치는 작품을 많이 썼다. 이후 비현실적인 미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설국」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37년 「설국」이 일본의 문예간담회상을 수상하였고, 1944년(쇼와 10년)에 「고향(원제: )」, 「석일(원제: )」 등의 작품으로 기쿠치 간 상을 수상한다. 이 무렵 미시마 유키오가 가져온 「담배(원제: )」를 호평하였는데, 미시마에게 있어 가와바타는 그를 문단에 데뷔시킨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1945년(쇼와 20년) 4월에 일본 해군보도반(海軍報道班) 반원(소좌 대우) 자격으로 가지마(鹿島)까지 따라가 가미카제를 취재하기도 했다. 이때 함께 갔던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는 그 자신의 작가관까지 바뀔 정도의 충격을 받았고, 가와바타는 이때의 일을 토대로 「생명의 나무(원제: )」를 집필하였다. 그 뒤 「천 마리의 종이학」, 「산소리」 등을 단속적으로 발표하면서, 패전 뒤인 1948년에는 일본 펜클럽 제4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1957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에서 주최국 일본측의 회장으로서 활약하여 이듬해에 기쿠치 간 상을 또 한 번 수상한다. 1958년에 국제 펜클럽 부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1962년 세계평화 어필 7인 위원회에 참가하였고, 1963년에는 새로 생긴 일본근대문학관()의 감사(監事)역을 맡게 되었다. 1964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에 출석하였다. 단속적으로 작품 「단포포()」의 연재를 『신조()』에 시작하였다. 1965년에 일본 펜클럽 회장직을 사임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맹장염으로 도쿄대학 병원에 입원하였다.

무려 12년간이나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설국》은 가와바타의 미의식이 절정을 이루는 작품으로, 그 문학성이 인정되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68년 10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일본인의 심정의 본질을 그린, 몹시 섬세한 표현에 의한 서술의 탁월함(for his narrative mastery, which with great sensibility expresses the essence of the Japanese mind).이 노벨상 위원회의 수상평이었다. 12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수상식에서 가와바타는 연미복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수여한 문화 훈장이 달린 몬쓰키하오리하카마(紋付羽織袴) 차림으로 수상에 임했고, 기념 강연 「아름다운 일본의 나() 그 서론」을 행했다.

이후 1969년부터 1974년에 걸쳐 신초샤에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전집」(전19권)이 간행되었고, 타이베이의 아시아 작가 회의뿐 아니라 1970년에 한국에서의 서울 국제펜클럽 대회에 출석하였으며 일본 근대 문학관의 명예 관장으로도 취임했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 뒤에 발표한 작품은 단편 몇 개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노벨상 수여에 따른 중압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2012년 9월 4일, 스웨덴 아카데미가 NHK의 공개 청구에 응하여 개시한 노벨 문학상 전형 과정의 자료를 통해 가와바타가 노벨상을 수상하기 7년 전인 1961년에 이미 노벨상의 후보로 결정되어 있었음이 밝혀져 NHK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

노벨 문학상 3년 뒤인 1972년 4월 16일, 가나가와현 즈시시의 맨션 「즈시 마리나」의 자택 작업실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가스에 의한 자살. 향년 73세였다. 계명은 문경원전고산강성대거사(文鏡院殿孤山康成大居士), 대도원수예문화강성거사(大道院秀藝文華康成居士). 1973년에 재단법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기념회에 의해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이 제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5년에는 이바라키 시립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관'이 개관했다. 또한 이바라키시 명예 시민으로도 임명되었다.

이 외 다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문학사에 찬연히 빛나는 수많은 명작을 남긴 근현대 일본 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쓴 작가로 소개되곤 한다. 주요 작품은 대부분 문단의 연구 대상이 되었고 본인도 전문 잡지 등에 기고한 창작에 관한 수필 등에서는 약간 요설(饒舌)에 기술하는 것이 있었기에 작품 속에 다소 각색된 모델이나 로케이션, 등장 사물이 순전한 창작(가공의 사건)에 의한 것은 아니었음이 구체적으로 판명된 경우도 많다.

사망 당시 그의 사인은 자살로 보도되었고 이것이 통설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가와바타의 사망 전후 상황으로 볼 때 자살이 아닌 사고사가 아니냐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상이 가와바타의 자살 동기로서 거론되는 정황 증거들이지만, 자살설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첫 번째 증거는 일시가 너무 떨어져 있고 두 번째 증거는 자살 동기로서는 너무 약하고, 세 번째 증거는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문예 평론가의 해석일 뿐 구체적 증명은 없으며 네 번째 증거도 주관적 기술에 불과하며 사실 검증은 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Article 244: 보사노바 (110 words)


보사노바(, 새로운 성향)는 브라질 대중음악의 한 형식으로 1960년대에 브라질의 세계적인 작곡가 안토니오 카를루스 조빙(Antonio Carlos Jobim), 보사 노바의 신이라 불리는 주앙 지우베르투(João Gilberto)가 발전시켰다.

삼바(Samba)에서 나온 음악 형식이지만, 삼바보다 멜로디가 더 감미롭고, 타악기가 덜 강조된다. 이 장르는 재즈에서 큰 영향을 받았고, 1960년대에 미국, 브라질에서 크게 유행했다. 1959년 영화 《흑인 오르페우(Orfeu Negro)》(수록곡 카니발의 아침(Manhã de Carnaval))가 1960년 아카데미 외국 영화상을 수상한 이후 스탠 겟츠(Stan Getz)와 조아웅 지우베르뚜가 함께 녹음한 앨범 Getz/Gilberto와 그 앨범의 수록곡이며 아스트루지 지우베르뚜(Astrud Gilberto)가 부른 The Girl from Ipanema가 1965년 미국 빌보드, 그래미 어워드를 휩쓸며 전 세계적으로 보사 노바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독일 재즈 평론가 요아힘 E 베렌트는 저서 '재즈북'에서 보사 노바는 삼바와 쿨 재즈가 합쳐진 것이라고 규정했다.




#Article 245: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353 words)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안토니우 카를로스 조빔, 1927년 1월 25일, 리우 데 자네이루 ~ 1994년 12월 8일 뉴욕)은 브라질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가수, 피아니스트로 보사 노바(Bossa nova)의 전설을 만든 인물이다. 통 조빔(Tom Jobim)이란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섬세한 멜로디와 하모니로 유명한 조빙의 곡들은 브라질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음악가들에 의해 연주되었다. 조빙이 주로 같이 작업한 가수로는 보사 노바의 또다른 창시자로 불리는 주앙 지우베르투(João Gilberto)와 엘리스 헤지나(Elis Regina), 세르지우 멘데스(Sergio Mendes),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Astrud Gilberto), 스탠 게츠(Stan Getz), 프랭크 시나트라 등을 들 수 있다.

조빙의 음악적 뿌리는 1930년대 현대 브라질 음악의 시효가 되었던 전설적인 음악가 피싱기냐(Pixinguinha)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조빙은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인 클로드 드뷔시와 재즈의 영향도 받았다.

조빙이 브라질에서 이름을 알린 것은, 시인이자 외교관인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Vinicius de Moraes)와 1956년 연극 《Orfeu de Conceição》의 음악을 맡았을 때였다. 이 극에서 가장 유명해진 곡은 〈Se todos fossem iguais a você〉(내 삶을 밝혀줄 누구)였다. 이후 이 연극을 원작으로 프랑스 제작자인 Sacha Gordine가 영화 《흑인 오르페우》(Orfeu de Negro)를 만들 때 Gordine은 새로운 곡으로만 영화를 채우고 싶어 했고, 모라이스와 조빙에게 새로운 곡을 써주길 부탁한다. 그러나 모라이스는 제작당시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 머물고 있었고, 둘은 전화를 통해서 단지 3개의 곡만을 만들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곡이 〈A Felicidade〉, 〈Frevo〉, 〈O Nosso Amor〉이다.

이 둘의 작업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이후에도 모라이스는 조빙의 곡 중 가장 유명한 곡들의 가사를 써 주었다. 편곡가이자 지휘자, 작곡가인 클라우스 오거만(Claus Ogerman)은 조빙의 많은 곡들을 편곡해 주었다. 조빙은 그래미상을 수상한 1963년 《게츠/질베르투》GETZ/GILBERTO 앨범으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 앨범인 아스트루드 질베르투가 부른 대히트곡 〈The Girl from Ipanema〉가 수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조빙은 수많은 아름다운 앨범을 작곡한다.

조빙과 그의 작품들은 전 세계의 많은 음악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예를 들면 미국의 재즈가수 엘라 피츠제럴드 와 프랑크 시나트라는 각각 《Ella Abraça Jobim》 (1981) 와《Francis Albert Sinatra  Antonio Carlos Jobim》(1967)란 앨범에서 조빙의 곡들을 불렀다. 조빙의 앨범인 《Wave: The Antonio Carlos Jobim Songbook》(1996)은 오스카 피터슨, 허비 행콕, 칙 코리아, 투츠 틸레망 등의 연주를 수록하고 있다.

조빙은 세계적으로 20세기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1994년 12월 8일 죽음에 이를 때까지도 그는 계속 음악을 만들었으며, 마지막 앨범인 《Antonio Brasileiro》은 사후 발매되었다.

조빙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상 조앙 바치스타(São João Batista) 묘지에 묻혔으며,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의 이름은 1999년 그를 기념하여 갈레앙-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공항(Galeão - Antônio Carlos Jobim)으로 바꾸었다.




#Article 246: 블로그 (639 words)


블로그()는 정보 공유나 의견 교환을 목적으로 올리는 글을 모아 월드 와이드 웹상에 게시하는 웹사이트의 일종이다.

블로그라는 말은 웹(web)과 로그(log, 기록)를 합친 낱말로, 스스로가 가진 느낌이나 품어오던 생각, 알리고 싶은 견해나 주장 같은 것을 일기처럼 차곡차곡 적어 올리는 형식을 취한다. 이를 다른 사람도 보고 읽을 수 있으며, 보통 시간 순서대로 가장 최근의 글부터 보인다. 그러나 글 쓴 시간을 수정할 수 있는 블로그의 경우에는 시간을 고쳐 글 순서를 바꿀 수 있다. 여러 사람이 쓸 수 있는 게시판(BBS)과는 달리 한 사람 혹은 몇몇 소수의 사람만이 글을 올릴 수 있다. 블로그를 소유해 관리하는 사람은 블로거(blogger)라고 한다.

블로그는 개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인터넷을 통해 기존의 어떤 대형 미디어에 못지않은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1인 미디어'라 부른다.

블로그의 시초는 원래 컴퓨터 통신 게시판에 자신의 이야기를 올리던 것이며, 인터넷이 발달하여 개인적으로 게시판을 운영할 수 있게 되는 서비스와 환경이 제공됨으로써 인기를 끌게 되었다. 처음에 나왔던 블로그에는 단순히 텍스트인 글을 올리고 읽는 기능만 있었으나, 사진, 음악, 플래시, 동영상 등을 포함할 수 있도록 발전하였다. 또한, 블로그에 댓글(Reply)과 트랙백(Trackback)을 달 수 있게 함으로써 독자와 블로거 사이의 의사소통이 확장되었다. RSS나 Atom으로 손쉽게 구독할 수 있도록 하는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텍스트 중심에서 분화되어 멀티미디어 자료를 구독할 수 있는 팟캐스트도 발전하고 있다.

초기의 블로그는 간단한 프로그래밍이나 HTML 편집만으로도 가능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리에 힘이 들어가게 되었고 곧 워드프레스, 무버블 타입, 블로거 나 라이브 저널 같은 블로그 소프트웨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기존의 웹 서비스나 포털 서비스에서도 이러한 블로그 기능이 추가되어 개인화한 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 후 2003년 미-영 연합군의 바그다드 폭격에 한 이라크인이 블로그를 통하여 평화를 주장하여 블로그는 대중화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2002년 11월 최초의 블로그 서비스 blog.co.kr이 시작되었으며, 2003년 네이버, 다음 등 포털이 블로그 서비스를 시작했다. 다음에서 블로거뉴스라는 메타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하고 포털 첫화면에 신문 기사와 함께 개인 블로그 포스트를 노출시키면서 블로그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졌다.

국적으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인터넷 접속은 국가 제약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블로그 분류에 국적을 고려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인터넷 검열 때문에 티스토리 등 블로그 서비스에 접속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주로 회원가입 또는 웹호스팅이 필요한지 여부로 블로그를 분류한다.

가입형 블로그는 회원 가입만 하면 손쉽게 블로그를 생성할 수 있다. 포털, 신문사, 인터넷 서점, 블로그 전문 웹사이트 등이 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한다. 커뮤니티(관심, 즐겨찾기, 이웃 등) 형성, 콘텐츠(뉴스 기사, 책 정보 등) 퍼가기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HTML, CSS를 고칠 수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다.

설치형 블로그는 서버에 블로그 저작 소프트웨어를 설치해서 운영할 수 있다. 서버의 다른 공간에 위키나 게시판을 운영할 수도 있고 플러그인 등을 사용할 수도 있다. 서버 컴퓨터를 운영하거나 웹호스팅을 해야 한다. 그래서 별도의 비용이 생기며, 컴퓨터, 네트워크 지식이 필요하다. 설치형 블로그 소프트웨어로 텍스트큐브, 워드프레스, 텍스타일, 무버블 타입 등이 있다.

블로그와 비슷한 인터넷 서비스들로 카페, 개인 홈페이지, SNS 등이 있다. 이러한 서비스 유형들이 고정된 것은 아니다.

인터넷 이전 시대인 1980년대부터 유즈넷이나 상업적인 전자게시판 서비스를 통해 동호회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하였다. 한국에서는 천리안, 하이텔과 같은 유료 PC 통신에서 여러 가지 동호회 기능을 서비스하고 이들 동호회에서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보는 것이 활성화 됐다. 이러한 게시판에 글이 자주 올라왔고, 회원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글이 자연스레 생김으로서 온라인 커뮤니티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호회나 카페 등 커뮤니티는 집단적이라는 점에서 블로그와 다르다.

PC 통신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에서부터 시작해 다음의 카페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기반 서비스’만이 평정해왔던 한국 인터넷 서비스의 패러다임을 개인으로 처음 옮겨온 것은 네띠앙이다. 네띠앙은 개인 홈페이지 호스팅 서비스를 제공해주었다. 개인 홈페이지 사이의 관계 맺기 기능이 제공되지 않는 단점으로 인해 네띠앙은 점차 몰락한다. 블로그는 댓글, 트랙백, RSS 등 교류 기능을 기본적으로 제공해주고, 편리하게 내용을 고칠 수 있다. 그러나 개인 홈페이지는 편집이 어렵고 다른 사용자와 의견을 나누기도 까다롭다.

네띠앙이 쇠락하고 싸이월드의 미니홈피가 인기를 끌었다. 미니홈피와 비슷한 것으로 미국에는 페이스북, 마이스페이스 등이 있다. 이런 곳들을 통틀어 SNS라고 한다. SNS는 주로 오프라인 인맥에 기반하고 사생활들이 다뤄지기 때문에 대체로 블로그보다 폐쇄적이다. SNS도 댓글 기능이 있지만, 트랙백, RSS 기능은 없다. SNS 중에 트위터, 미투데이, 요즘(yozm) 등과 같이 마이크로 블로그로 불리는 것들은 글자 수 제한이 있는 대신 RSS 기능이 제공된다. 미투데이와 요즘(yozm)은 각각 2014년, 2013년 서비스를 종료했다.

블로그에 광고를 포함시켜 수익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서 많은 수입을 얻지는 못한다.




#Article 247: 구심력 (236 words)


구심력(求心力, )은 원운동에서 운동의 중심 방향으로 작용하여 물체의 경로를 바꾸는 힘이다. 힘의 방향은 물체의 순간의 운동방향과 늘 직교하며, 방향은 곡면의 중심이다.

원운동은 운동방향이 늘 바뀌므로 등속도 운동이 아니다. 원운동 하는 물체의 경우 운동의 방향이 늘 바뀌므로 가속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뉴턴의 운동 제1법칙에 따라 힘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힘을 구심력이라고 한다. 구심력은 물체의 속도 벡터에 수직으로 작용하므로, 물체의 속도의 방향만을 변화시키고 속도의 크기는 변화시키지 않는다. 또한 구심력은 물체와 물체의 운동의 중심을 잇는 선과 그 작용선이 항상 평행하므로, 구심력에 의한 돌림힘은 0이 된다. 따라서 구심력 외에 다른 힘이 작용하지 않는 등속 원운동의 경우, 각운동량 보존 법칙이 성립한다.

원운동을 하는 관찰자는, 구심력과 정반대 방향의 힘이 자신에게 구심력과 같이 작용하여 힘의 평형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구심력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작용된다고 생각하는 가상의 힘을 원심력이라고 한다.

질량이 m 인 물체가 v 의 속도로 반지름 r 의 원운동을 할 때 받는 구심력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는 구심 가속도이다. 원운동을 하는 물체가 받는 힘의 방향은 원의 중심이다. 힘이 속도의 제곱에 비례하므로 속도가 2배가 되면 힘은 4배가 된다. 반지름이 힘에 반비례 하므로 반지름이 절반이 되면 같은 속도를 내기 위해선 힘이 두배가 되어야 한다. 구심력은 각속도 omega; 로도 표현할 수 있다. 각속도와 속도의 관계는

이므로 다음과 같다.

공전주기 T 를 이용하여 식을 표현할 수도 있다. 공전주기와 각속도의 관계는

이므로 다음과 같다.

입자가속기에선 입자가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되므로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라 관성이 커지므로 똑같이 가속시키기 위해선 더 많은 힘이 필요할 것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을 고려하면

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gamma;는




#Article 248: 원심력 (189 words)


원심력(遠心力)은 회전하는 좌표계에서 관찰되는 관성력으로, 회전의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관찰된다. 하지만 다른 관성력과 마찬가지로 실제 존재하는 힘은 아니다.

가속하는 계(비관성좌표계) 안의 물체들은 관성에 따라 운동하려하기 때문에, 계를 기준으로 하여 계가 받는 가속도의 반대방향 가속도를 설명하기 위한 가상의 힘이 관성력이다. 원심력은 관성력 중에서도 회전하고 있는 계 안의 관찰자가 느끼는 가상의 힘이다.

관성좌표계에서 물체는 관성에 따라 등속도 운동을 한다. 그러나 원운동하는 좌표계는 가속도 운동을 하기 때문에, 관성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고 원운동하는 계 안의 관찰자는 물체가 마치 바깥쪽으로 힘을 받는 것처럼 느끼고 이를 원심력이라 한다. 관성좌표계에서 이 가상의 힘을 원심력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오류이다. 관성좌표계에서 관찰했을 때 이 물체에 대해 바깥쪽으로 작용하는 힘은 없으며, 물체는 단지 관성에 따라 등속도로 운동하려는 것뿐이다.

또한, 구심력은 실제 존재하는 힘이나, 원심력은 다른 관성력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힘이다.

관성좌표계에서는 원심력은 관찰되지 않고, 구심력과 그 반작용만 존재한다. 관성좌표계에서는 원심력이란 개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공을 줄에 매달아 손으로 회전시키는 경우를 보자.

관성좌표계에서 관찰시, 회전하는 공에는 줄을 통하여 구심력이 작용되고 이로 인해 회전운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작용 반작용 법칙에 따라 반작용력은 손에 전달된다. 이 반작용력은 공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 필요하지 않으며, 이를 원심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쉽게말해 원심력은 나가려는 힘, 구심력은 당기는 힘이다.




#Article 249: 유니코드 (168 words)


유니코드()는 전 세계의 모든 문자를 컴퓨터에서 일관되게 표현하고 다룰 수 있도록 설계된 산업 표준이며, 유니코드 협회(Unicode Consortium)가 제정한다. 또한 이 표준에는 ISO 10646 문자 집합, 문자 인코딩, 문자 정보 데이터베이스, 문자들을 다루기 위한 알고리즘 등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유니코드의 목적은 현존하는 문자 인코딩 방법들을 모두 유니코드로 교체하려는 것이다. 기존의 인코딩들은 그 규모나 범위 면에서 한정되어 있고, 다국어 환경에서는 서로 호환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유니코드가 다양한 문자 집합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하면서 유니코드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국제화와 지역화에 널리 사용되게 되었으며, 비교적 최근의 기술인 XML, 자바, 그리고 최신 운영 체제 등에서도 지원하고 있다.

유니코드에서 한국어 발음을 나타날 때는 예일 로마자 표기법의 변형인 ISO/TR 11941을 사용하고 있다.

유니코드의 기원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 때 제록스의 조 베커와 애플의 리 콜린스, 마크 데이비스가 통일된 문자 집합을 만드는 것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1988년 조 베커는 유니코드라는 이름의 국제/다언어 문자 인코딩 시스템(international/multilingual text character encoding system, tentatively called Unicode)를 위한 초안을 출판하였다.

유니코드는 2가지 매핑 방식이 있다: 유니코드 변환 형식(Unicode Transformation Format, UTF) 인코딩, 국제 문자 세트(Universal Coded Character Set, UCS) 인코딩.

UTF 인코딩은 다음을 포함한다:




#Article 250: 언어 (204 words)


언어(言語)에 대한 정의는 여러가지 시도가 있었다. 아래는 그러한 예의 일부이다.

언어학은 이러한 언어가 발현되는 부분, 즉 음성, 의미, 문법, 형태 등을 연구하는 경우도 있고, 언어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삼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접근하며 연구하는 학문, 즉 비교언어학, 언어유형학(유형론) 등까지를 포괄한다.

언어는 자연어와 인공어로 나눌 수 있는데, 자연어는 인류의 각 민족이 오래전부터 생활 속에서 사용해 왔던 언어이고, 컴퓨터나 수학 등 다른 학문의 분야에서 상호 효과적인 의사교환을 위해 고안된 것을 인공어라고 한다.

자연어 중에 세계적으로 많은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는 다음과 같다. 사용하는 인구가
많은 순으로 나열하였으며 괄호 안은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나타낸다.

자연어는 어족 별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언어와의 친족 관계가 알려진 것이 없는 것은 고립된 언어라고 한다. 한국어는 현재 고립된 언어로 분류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일본어와 알타이어와 유사하다는 견해도 있다.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라틴어는 사어가 아닌 47억 기독교신도들의 종교언어이고,

지자체적 측면에서 보면 만주어는 사어가 아닌 둥베이, 프리몰, 하바롭의 공용어이다.

차가타이어란 차가타이(남서튀르크)어파의 공통조어로, 옛 대원제국의 차가타이汗국의 공용어였다. 지금은 사어로 판명.

손의 모양으로 의사 소통하는 수화도 언어의 일종이며 음성언어와 대비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인공어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지고 사용되는 언어가 아닌,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의사소통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말한다. 인공어를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나, 대부분의 경우 기본적으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이다.

유인원과 인간을 구분해주는 특성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언어:사람이 하는 목소리




#Article 251: 심리학 (1124 words)


심리학(心理學, )은 인간의 행동과 심리과정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경험과목으로서, 인문과학에서부터 자연과학, 공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에 공헌을 하고 있다. 인간이 관계된 모든 분야에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인간의 행동과 사고에 관한 연구인 심리학의 학문적 뒷받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특히 고도의 정보화 사회가 되어가면서 인간의 삶의 질과 관계된 문제들이 점점 더 그 중요성을 더하고 있고 이러한 문제에는 감각, 지각, 사고, 성격, 지능, 적성 등의 인간 특징들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과 기저 원리를 밝히는 심리학은 미래 사회에서 그 중요성을 점점 더해갈 것이다.

심리학은 연구 분야에 따라 크게 심리학의 기초 원리와 이론을 다루는 '기초심리학'과 이러한 원리와 이론의 실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응용심리학'으로 나뉘며, 2020년 현재, 한국의 경우에는 14개 분과, 미국의 경우 본과 제외 56개 분과가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행동과 정신과정, 영혼에 대한 학문” 이라고 정의되는 심리학은 다양한 접근방법 만큼이나 조금씩 그 정의의 폭을 달리할 수 있겠으나 과학적인 절차를 수용하기 시작한 근대의 심리학 이후에서는 적어도 '행동에 대한 과학'이라는 협의의 정의를 빼놓을 수는 없겠다.

기원전부터 '심리학'에 대한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 심리학에 대한 생각은 쭉 있어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심리학의 정립 이전의 심리학은 그 경계가 모호하였으며 철학자들이 다루는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일찍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식론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으며 그에 대한 논쟁은 르네상스이후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데카르트는 유명한 심-신 문제에 있어서 이원론을 주장함으로써 마음과 몸이 별개의 실체임을 주장하여 마음에 대한 경험과학적 탐구를 중시하는 현대 심리학의 입장과는 사뭇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파티마 칼리파조의 선구적인 과학자 이븐 알하이탐은 1010년 출간된 그의 《광학》에서 실험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심리학적 개념으로서 시각을 설명하고 있다.

독일 스콜라 철학자 루돌프 괴켈(라틴어 이름: 루돌프 고클레니우스)는 1590년 출간한 그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조건을 사용한 심리 실험을 다루고 있다. 이 보다 60년 전 크로아티아의 휴머니스트 마르코 마루릭은 조건을 사용한 그의 작업 목록을 남겼으나 그 내용은 소실되었다.

독일의 형이상학 철학자 볼프가 그의 저서 《심리 실험과 심리 추론(Psychologia empirica and Psychologia rationalis, 1732년-1734년)》을 출간함으로써 조건을 사용한 실험은 일반적인 심리 실험의 방법이 되었다. 디드로는 이러한 심리 실험과 심리 추론의 차이점에 대해 그의 《백과사전》에 기술하였고 비랑에 의해 프랑스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의 의사 윌리스(1621년 - 1675년)는 정신과적 치료의 목적으로 뇌의 기능을 연구하면서 정신의 법칙을 다루는 학문으로서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로써 이후 19세기에 이르러 심리학은 철학에서 완전히 분화되어 과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게 되었다.

형태주의 심리학(또는 게슈탈트 심리학)은 1910년에서 1912년에 걸치는 기간 동안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시기는 독일 심리학자 베르트하이머(M. Wertheimer)가 자신의 논문 (Experimental studies on the perception of movement)을 통해 일상적인 지각 현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시기이다. 게슈탈트 심리학의 창립에는 물리학자인 마흐, 철학자 에렌펠스, 칼 슈툼프(Carl Stumpf)의 세 사람이 큰 영향을 끼쳤다. 마흐는 특정한 공간-형태는 더 기본적인 요소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에렌펠스는 형태질의 존재를 주장하여 특정한 경험의 질은 개별적 감각요소 이상임을 역설했다. 슈툼프(Stumpf)는 분트(Wundt)와의 논쟁 과정에서 숙달된 청자들이 그렇지 않은 일반인들보다 음악적 관찰자로서 더 적합함을 주장하였다. 이후의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은 이들의 영향 아래 성장하였다.

베르트하이머는 가현운동(apparent motion)에 주목하였으며, 여기서 실제로는 없었지만 지각된 움직임을 '파이(phi)운동'이라 불렀다. 이를 토대로 그는 부분 과정 자체가 전체의 고유한 성질에 의해 결정된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연구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문을 연 연구로 평가받고 있다. 베르트하이머의 피험자였던 코프카(Koffka)와 콜러(Kohler) 역시 게슈탈트 심리학자였으며, 모두 슈툼프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특히 코프카는 게슈탈트 심리학을 미국으로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콜러는 이후 게슈탈트 이론의 보급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특히 게슈탈트 현상이 어떤 원리로 조직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여 연구하였으며, 이 연구들로 밝혀진 것들을 게슈탈트 체제화 원리(Gestalt organizing principles)라 이름붙여 발표하였다. 이 원리는 근접성, 유사성, 좋은 연속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레빈(Lewin)은 여러 가지 이력을 지닌 이색적인 심리학자였다. 그는 사회심리, 발달심리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사회심리학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그의 장 이론(field theory)은 생활공간이라는 개념을 핵심으로 하며, 이에 따르면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은 환경과 사람 모두이다. 레빈은 이를 B=f(P,S)라 나타냈다. 또한 그는 위상기하학을 차용하여 자신의 개념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곤 했다. 이외에도 리더쉽 연구, 개별 사례 연구 등의 업적을 남겼다.

인지심리학에 대한 현대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감각정보를 변형하고, 단순화하며, 정교화하고, 저장하며, 인출하고 활용하는 등 모든 정신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역사적으로는 장 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으로 거슬러올라갈수있겠으나 20세기 후반(196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일어난 이른바 '인지혁명'은 심리학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당대를 지배하고 있던 행동주의 심리학은 인간을 단순한 자극-반응의 체계로 보았는데, 이로 인해 행동주의 심리학은 '블랙박스 심리학'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관찰,측정이 가능한 것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로 인해 인간의 심적, 내적 과정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이러한 자극-반응이 어떠한 경로와 기제를 통해 일어나는지를 거의 규명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엄 촘스키 등 언어학자들과 앨런 튜링,폰 노이만 등의 컴퓨터과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인지혁명이 시작되었다. 특히 촘스키는 심리학의 연구 대상은 인간의 내적 심리과정이어야 함을 주장하여 행동주의 심리학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당대 심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자 현재 심리학계의 가장 중요한 흐름 중 하나인 인지주의 심리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인지심리학은 행동주의 심리학과 달리 내적인 심리과정을 중시하며 이에 대한 연구를 주된 목표로 삼는다. 특히 인지심리학의 주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심리과정을 컴퓨터의 정보처리과정에 비유하여 이해한다는 것인데 이는 인접 학문들의 영향을 받은 결과다. 이로 인해 인지심리학은 흔히 인간정보처리론(human information processing)이라고도 불린다. 인지심리학은 현재 인접 학문들-철학, 컴퓨터과학, 신경과학, 언어학 등-과 협력하여 인간 인지과정의 신비를 벗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서 크게 간학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인지주의 심리학의 거장으로는 알버트 엘리스,아론 벡등이 거론된다.

심리학도 다른 사회과학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질적 연구방법과 양적 연구방법,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한다. 전자는 주로 임상가들에 의해, 후자는 주로 기초 분야 전공자들에 의해 많이 사용되나 양자가 혼용되는 경우도 많다. 양적 연구방법은 연구 대상의 특성을 수치화, 계량화하기 용이한 경우에 많이 사용되는데 이러한 연구방법이 적합한 사례로는 반응시간(response time)연구, 지능 연구와 같은 것이 있다. 양적 연구방법은 통계학의 지식들을 이용하여 연구 대상의 특성을 기술하고, 예측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심리학에서 주로 사용되는 양적 연구방법론에는 IRT(문항반응이론), 다층 모형(Multilevel model), 구조방정식모형(Structural equation model), 경로분석(path analysis), 요인분석(Factor analysis)등이 있다. 양적 연구방법론의 가장 큰 강점은 일반화하기에 용이하다는 것이다. 질적 연구방법은 이와는 다르게 소수의 사례를 깊이있게 분석하는 것이 주된 목적으로, 임상가들에 의해 주로 사용되고 있다. 질적 연구방법론에서는 상담, 질문지 작성 등의 방법을 주로 사용하며 내담자나 연구대상의 심리적 상태를 심도있게 기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심리학이 사용하는 방법의 과학성은 심리학을 경험과학답게 만들어 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과학자형 모델로 대표되는 기초 심리학은 심리학의 학문적 바탕의 확립을 목표로 기초적 지식과 심리적 기제를 실험을 통해서 연구한다. 주로 인지 심리학, 지각 심리학, 발달심리학,사회심리학,생리심리학,신경심리학 등이 포함되며  이는 귀납적 사고를 주로 사용하는 자연과학과는 달리 연역적 사고도 이용한다. 한편 이러한 주요한 과학자형 모델에는 구성개념을 전제로 하는 심리통계,심리측정 및 검사등의 수학적 접근이 포함된다.

전문가형 모델로 대표되는 응용 심리학은 심리학의 실재 현장 장면의 적용을 목표로 적용 방법과 원리를 연구한다.
심리학의 방법과 결과를 실제 생활이나 실제 문제에 응용하려는 학문으로 심리학의 한 분야이다. 산업 심리학, 임상 심리학, 교육 심리학, 범죄 심리학, 건강 심리학,여성심리학등이 이에 속한다.

임상 심리학은 정신건강에관한 정신적 이슈가 다루질 필요성에서 이를 대상으로 하는 심리학이다. 심리검사 및 심리평가뿐만아니라 심리연구를 포함하는 과학자-전문가 모델을 전제한다. 취약성-스트레스 모델등 통합적으로 의학적 조건(medical conditions)과 임상 과정(clinical process) 및 인지주의 또는 행동주의심리학등 여러 심리학적 접근을 다룬다.

상담 심리학은 정신적 이슈를 가진 사람들을 진단하거나 심리적 부담을 지원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고 이전보다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가진 심리학 분야이다. 약물 처방권을 가진 정신과 의사와 비교해서 상담심리사는 생리심리학이나 약물심리학 또는 건강심리학등을 고려해 다양한 치료기법과 기술을 통해 환자에게 도움을 줄수있다. 특정상황을 고려한 정신건강의 이슈에따라 이의 개선을 위해 약물치료와 상담치료가 병행되거나 약물치료가 잠정적으로 중단될 수 있다. 또한  다른 심리학처럼 심리검사 및 심리평가뿐만아니라 심리연구를 포함하는 과학자-전문가 모델을 전제한다.




#Article 252: 잠 (311 words)


잠() 또는 수면(睡眠)은 동물이 일정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의 활동을 쉬면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있는 것이다. 의식은 없거나 줄어들고, 감각 기관이 상대적으로 활동을 중단하며, 거의 모든 수의근의 움직임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자극에 대한 반응이 줄어드는 것으로 각성과 구별되며, 쉽게 의식을 되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겨울잠이나 혼수상태와는 구별된다. 수면 중에는 동화 상태가 고조되며, 성장과 면역, 신경, 뼈, 근육 계통의 회복이 두드러진다. 수면은 모든 포유류와 조류, 다수의 파충류, 양서류, 어류에서 발견된다.

수면의 목적과 기제는 부분적으로만 확인되었으며, 활발한 연구의 대상이다. 잠은 종종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실제로는 신진대사를 약 5~10%만 줄일 뿐이다. 겨울잠을 하는 동물들은 겨울잠 중에 대사 저하가 보이긴 하지만, 잠을 자야 하며, 이를 위해 저체온에서 발열 상태로 돌아온다.

렘(REM, Rapid eye movement, 급속 안구 운동) 수면은 신체적, 심리적인 회복, 단백질 합성 및 기억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보고되고 있는 역설수면이다.
역설수면(逆說睡眠)은 몸은 잠을 자고 있으나 뇌파는 깨어 있을 때의 알파파(α波)를 보이는 수면 상태이다. 자율신경성 활동이 불규칙적인 수면의 시기로, 보통 안구가 신속하게 움직이고 꿈을 꾸는 경우가 많기에 램수면으로 언급된다.
한편 영아기에는 렘수면이 수면의 50%를 차지하다가 점차 줄어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은 어릴수록 하루에 자는 시간이 길고 자랄수록 짧아진다. 생후 1주에는 18~20시간, 만 1세에는 12~14시간, 만 10세에는 10시간 정도를 잔다. 성인은 하루에 대략 5시간~8시간 정도를 잔다. 사람은 의도적으로 수면 시간을 조절하기도 한다. 15세 이상 사람의 평균 수면 시간은 대한민국을 예로 들면, 6시간 15분 정도, 미국은 7시간 정도다. 잠이 부족하면 피로를 느끼고 감정이 날카로워져 짜증이나 화를 내기 쉬워진다. 또한, 잠이 부족한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면 심혈관계 질환이나 정신 질환 등 여러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건강에 유익하고 수명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 최적의 수면 시간은 연구에 따라 다르다. 7시간 정도가 가장 적절하다는 연구 결과가 많은데, 5시간~6시간 30분을 잘 때 수명이 가장 길다는 연구도 있다. 또한, 적절한 수면 시간에는 개인차가 있다. 연령대별로 얼마만큼 자야 적당한지 차이가 있기도 하다. 예컨대 미국수면재단에 따르면 26-64세 성인은 7-9시간을 권장하며, 6-10시간이면 적당하고, 6시간 이하 또는 10시간 이상이면 수면시간을 조절하는 것이 좋다. 취침 시간, 수면 시간이 매일 달라지면 당뇨병 등의 대사성 질환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




#Article 253: 마약 (393 words)


마약(痲藥, )은 향정신성 의약품의 출물로서 환각과 중독을 일으키는 알칼로이드만을, 즉 아편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마약이다.라고 말한다. 일반인들은 거의 대부분의 향정신성 약품 및 중독성이 있는 알칼로이드 모두를 일컫는 말로 사용한다.

즉 한국에서는 관례적으로 인간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것으로서 이를 사용할 경우 인체에 심각한 위해가 있다고 인정되는 물질로 분류되지 않은 민간제조약과 향정신성의약품, 대마 등을 말하며. 거의 대부분 진정쌍떡잎식물군에 속한 식물이기도 하다.

일부 대한민국에서 마약으로 분류된 물질 중에서는 환자의 고통을 줄이는 등 의학적인 목적으로도 쓰이지만, 일반인이 마약을 복용할 경우 신체에 손상을 주고 중독 증세와 함께 심하면 사망을 유발할 수 있어서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환자가 아닌 이상 전혀 효과가 없다. 대한민국에서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을 통해 관리하고 있다.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면서 오용하거나 남용할 경우 인체에 심각한 위해가 있다고 인정되는 약물을 의미한다. 같은 종류의 약물이라도 약물에 따라 작용부위 및 작용기전이 달라 다른 효과를 나타내기도 하여 여러 분류에 속하는 경우도 있다.

흥분제로 중추 신경계(이하 CNS)를 흥분시켜 감각 및 운동기능을 항진시키는 약물이다.

소량 투여시 정신이 명료해지고 기분이 약간 고양되며 심장이 빨리 뛰고 혈압이 올라간다.
과량 투여시 환각 및 다행감 또는 신경이 예민해져 불안감을 유발하여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인 양상을 띄게 된다.
기분 고조로 인해 주관적으로는 강해진 것 같고 우월감을 느끼게되며 객관적으로는 말이 많아지고 초조해하며 불안해지고 과민상태가 된다.

진정제로 중추신경을 억제시키며, 진통 효과가 있다.

시각과 촉각 및 청각 등의 감각을 왜곡하여 지각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사람은 기분 좋은 상태로 느끼는 반면 불쾌감, 우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 법률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마약류는 마약, 향정신성의약품, 대마를 뜻한다.
마약은 양귀비, 아편, 코카잎 및 그의 알칼로이드와 화학적 합성품을, 향정신성의약품은 인간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여 오남용시 심각한 위해를 끼칠 수 있는 물질을 뜻하며 대마는 대마초{칸나비스 사티바 엘(Cannabis sativa L.)}와 그 수지(수지) 및 대마초 또는 그 수지를 원료로 하여 제조된 모든 제품을 말하나, 대마초의 종자(종자)·뿌리 및 성숙한 대마초의 줄기와 그 제품은 제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편을 제외한 마약은 마약류관리법에서 다루나 아편은 형법에서 규정 중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마약과 관련된 형법 조항은 형법 347조인데, 50g 이상의 마약을 제조 판매했을 때 15년 이상의 징역, 최고 사형까지 선고된다. 특히 1kg 이상의 마약을 유통하다 적발되면 예외 없이 사형을 선고함.

독일의 경우 스스로 마약을 사용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건강 침해에 대해서는 형법상 처벌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소비를 위해 무허가로 마약을 소지하는 것은 마약법 제29조 제1항에 의해 처벌 대상

일부 아편제제, 암페타민, (ADHD 치료제의 성분이다.)합성마약류, 코카인 등이다.
응급의학에서 사용하는 약물로는 모르핀과 메페리딘이 있다.

코데인은 다른 진통제의 진통 효과를 상승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일반적인 마약이다.
이 혼합물을 사용한 예는 코데인 함유 아세트나미노펜이다.

바륨이 들어간 항우울제, 흥분제 및 진정제가 이에 속한다.

코데인을 함유한 진해제, 아편을 함유한 지사제 등이 이에 속한다.




#Article 254: 고전적 조건형성 (709 words)


고전적 조건형성(古典的條件形成, Classical Conditioning)은 행동주의 심리학의 이론으로, 특정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던 자극(중성자극)이 그 반응을 무조건적으로 이끌어내는 자극(무조건자극)과 반복적으로 연합되면서 그 반응을 유발하게끔 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반 파블로프의 개 실험이 이에 관하여 잘 알려져 있다.

고전적 조건형성이론(古典的條件形成理論)은 특정한 자극에 따라 생기는 반응은 그와 다른 성질의 자극으로도 똑같이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습 이론으로 러시아의 생리학자 이반 파블로프가 주장하였다.

중성 자극 직후에 무조건 자극을 주는 것을 반복하면 중성 자극만으로 무조건 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을 《고전적 조건형성》이라고 한다.

고전적 조건형성에 따른 자극을 〈조건 자극〉 (CS; Conditioned Stimulus)이라고 하며,

고전적 조건형성에 따른 반응을 〈조건 반응〉 (CR; Conditioned Response)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고전적 조건형성이 학습된 개에게 소리를 들려주는 것은 조건 자극이며,

이 소리에 반응하여 침을 분비하는 것은 조건 반응이다.

이반 파블로프는 조건 형성이라는 과정을 통해 행동의 수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조건 형성이란 평소 특정한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던 자극(중성자극, Neutral Stimulus : NS)이

무조건적인 반응(무조건반응, UnConditioned Response : UR)을 이끌어내는

자극(무조건자극, UnConditioned Stimulus : US)과 연합하는 과정을 말한다.

조건 형성이 이루어지면 중성자극은 조건 자극(Conditioned Stimulus : CS)이 되어

조건 반응(Conditioned Response:CR)을 이끌어낸다.

이 과정을 이반 파블로프의 조건 형성 실험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이런 고전적 조건 형성이 일어나는 이유는 어떤 유기체가 조건자극(CS)을 제공받으면 곧이어 무조건자극(US)도 함께 제공받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즉, 조건자극을 무조건자극이 제공된다는 신호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고전적 조건 형성을 실험한 예는 위의 예 말고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WatsonRayner(1920)는 알버트라는 아이가 흰쥐에게 공포를 느끼도록 하였다. 

이 아이는 본래 흰쥐에게 공포를 느끼지 않던 아이였다. 

하지만 알버트가 흰쥐에게 다가가거나 만질 때마다 갑작스런 큰 소리를 들려주었고, 

결국 알버트는 흰 쥐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사람은 원래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놀라는 반응을 한다. 여기서 큰 소리는 무조건자극이 되고, 놀라는 반응은 무조건반응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무서움을 느끼지 않았던 흰쥐(중성자극)와 큰소리(무조건자극)를 지속적으로 연합하면 흰 쥐(조건자극)만 보아도 놀라는 반응(조건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또한 고전적 조건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조건자극은 본래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중성자극이었다. 그러나 조건 형성이 이루어지고 나면 무조건자극과 같이 반응을 이끌어내게 된다. 이렇게 조건 형성이 된 자극은 다른 중성자극도 조건 형성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데, 위의 이반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 조건 형성이 된 종소리와 함께 파란 불빛을 보여주면 파란 불빛만 봐도 침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이차적 조건 형성(Second-order Conditioning)이라고 하며 그 이상의 조건 형성을 삼차적 조건 형성, 사차적 조건 형성 등등 고차적 조건 형성(Higher-order Conditioning)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삼차적 조건 형성 이상은 일어나기 힘들다. 이런 고차적 조건 형성에서는 조건자극들이 연달아 제공되고, 음식이 제공되지 않아 소거의 과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소거(Extinction)는 조건 형성이 풀어져 조건자극이 다시 중성자극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반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 조건자극인 종소리만 들려주고 계속해서 음식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개는 조건자극인 종소리를 듣고도 침을 흘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즉, 조건자극과 함께 무조건자극을 계속해서 제공하는 수반성을 제거한다면 조건반응은 잘 형성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수반성은 일관성과 관계있다.

그러나 소거가 되었다고 해서 조건반응 자체가 소멸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소거가 일어난 이반 파블로프의 개에게 종소리(조건자극)를 갑자기 제시하면 침(조건반응)을 흘린다. 이런 과정을 자발적 회복(Spontaneous Recovery)이라고 한다. 이 자발적 회복은 학습이 영속적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우리가 배운 내용을 잊어버렸다고 해서 두뇌에서 아예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계기에 의해 문득 떠오르기도 하는 것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다.

또한 소거가 일어난 이반 파블로프의 개에게 다시 함께 종소리와 음식을 제공한다면 종소리는 중성자극에서 다시 조건자극으로 회복되며 종소리(조건자극)와 음식(무조건자극)의 연결은 더욱 단단해지게 될수도있다.

한편 수반성은  자극 제시의 시간간격과 횟수에서 일관성이 없는 경우에서도 약화될 수 있지만 여러 자극의 강도 차에서도 수반성을 약화시킬수있는 확률적 관계가 있는것으로도 알려져있다.

자발적 회복(Spontaneous Recovery)
소거절차가 이루어진 후에도 음식물과 연합시키지 않은 채 다시 종소리만 반복적으로 개에게 들려주었을 때, 소거되었던 종소리에 침을 흘리는 반응이 재훈련 없이 다시 나타난다. 이를 조건반응의 자발적 회복(Spontaneous Recovery)이라 한다. 이때 반응의 강도는 전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으나, 자발적 회복은 학습이란 영원히 소멸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해 주고 있다.

자극일반화(Stimulus Generalization)란, 조건자극과 유사한 다른 자극에 동일한 조건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바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우리 속담이 가지는 의미와 같다. 갈치구이를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린 적이 있는 아이가 식사 때마다 생선을 피하려는 모습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가시가 많지 않거나 씹어 먹으면 되는 생선통조림을 우연히 먹은 아이는 다시 생선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이런 현상을 변별(Discrimination)이라고 한다.

변별(Discrimination)
자극을 구분하여 반응하는 것을 변별이라 한다. 즉, 자극일반화는 자극 변별에 실패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고전적 조건 형성은 보통 수차례 반복이 되어야 자극 간의 연합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가르시아 효과라는 것이 있는데, 쥐에게 먹이를 주고 어느 정도 후에 열을 가해 매스꺼움과 구토등을 유발시켰더니 그 후에도 그러한 종류의 먹이를 피한다는 것이다. 차례 반복을 통한 연합이 아니라 단 한 번의 강렬한 경험으로 바로 조건반응을 일으키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Article 255: 발달 심리학 (206 words)


발달 심리학(發達 心理學, )은 사람의 출생부터 사망까지 일생 동안 연령 및 환경에 따른 정신과정과 행동상의 변화를 다루는 심리학의 한 분과이다.

개인의 지적·정서적·사회적 과정의 전개에 관심을 둔다. 발달 원리는 신체적·지적 변화가 급속히 이루어지고 행동 유형이 형성되는 생후 20세까지의 시기에 적용되는 것과 함께 이러한 발달의 향상적인 기간뿐만 아니라 이후 발달의 복합적이고 지속적인 면까지도 발달과정으로 보는 전생애적인 발달과정을 다루는 것이 발달심리학의 관심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정체성, 인간관계, 창의력 등을 삶의 중요한 세 영역으로 본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인간의 발달을 8단계로 구분하고 각 단계별로 형성되는 특성을 설명하면서 각 시기마다 접하는 환경과 상황에 따라 자기 자신과 사회에 대한 인식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연구 영역은 신체적·지적·정의적(情意的)·사회적 발달로 나누기도 하고, 태아기·영아기·유년기·소년기·청년기·장년기·중년기·노년기로 나누기도 한다. 또는 어떤 특수 영역, 예를 들어 뇌의 발달, 양심의 발달, 성격의 발달 등으로도 나눌 수 있다.

운동능력의 발달, 인지발달, 성격 발달 등 심리학 분야의 다양한 연구방법과 주제를 포괄하기도 한다. 변화는 크게 질적 변화(구조적 변화, 단계적 변화)와 양적 변화(연속적 변화, 비단계적 변화)로 나눌 수 있다. 발달이 선천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지, 후천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분분했으나, 최근에는 반응의 범위 모형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장 피아제는 그의 인지발달론에서 동화와 조절의 개념으로 적응을 설명하면서 발달의 중요한 면을 언급한바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자신과 환경의 상호작용에있어서 동화는 자신에게 맞추어 환경을 받아들이려는 태도라면 조절은 환경에 자신을 맞추어나가는 과정으로 기술된다.

에릭슨의 성격 발달 이론은 전생애에 걸친 발달을 강조한다.




#Article 256: 피아제의 인지 발달론 (994 words)


인지 발달론(認知發達理論, Theory of cognitive development)은 인간의 인지 발달을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한 피아제의 이론이며, 심리학의 인지이론에 있어서 영향력 있는 이론이다.

피아제는 심리학자이면서 생물학자였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생물학과 인식론에 그 뿌리를 두게 되는데, 여기서 인식론은 인간이 발생학적으로 인식하는 존재로 타고난다는 것이다. 인지 발달론 또한 생물학과 인식론에 그 뿌리를 두고 인간의 지적 능력은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피아제는 한 사람의 아동기가 사람의 발달 과정에서 핵심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기능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인지 발달은 신체적 성숙과 환경적 경험으로부터 비롯되는 정신적 과정의 점진적 재조직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인지 발달은 유기체로서의 인간의 핵심에 있으며 언어는 인지 발달을 통해 습득된 지식을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알프레드 비네의 실험실에서 아동지능검사와 관련하여 일한바 있다고 알려져있다.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한다는 말은 파란 신호일 때 길을 건너는 것, 구구단을 외우는 것 등을 말한다. 즉 인간의 지적 능력은 타고난 것이되, 그것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인지의 발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피아제는 도식과 적응이라는 개념을 설정했다.

예를 들어 5세 유아가 날아다니는 물체는 새라고 배웠다고 생각해 보자. 이를 통해 이 아이는 날아다니는 물체는 새와 같다는 도식을 보유하게 된다.

몇 가지의 도식은 인간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이미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빨기 도식이나 잡기 도식과 같은 것인데, 빨기 도식의 경우 그러나 그 기능면에서 변화된 것은 아니라서 적응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도식을 개발하고, 기존의 것을 변형시키면서 발전하게 된다.

적응은 우리에게도, 또 동식물에게도 흔히 찾을 수 있다. 홍관조의 수컷은 선명한 붉은색인 반면에 암컷은 눈에 띄지 않게 엷은 갈색을 띠면서 종의 생존에 대한 위협을 줄인다. 이런 식으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말하는데 인지적으로는 도식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경우, 새로운 도식을 만들거나 기존의 도식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위에서 날아다니는 모든 물체를 새라고 배운 아이는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보면서도 새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아이는 이것이 털도 없고, 날개도 펄럭이지 않는 등 기존에 알고 있던 새와는 다르다고 느끼게 되면서 불평형의 상태가 된다.

피아제에게 동화는 외부적 요소를 생활 또는 환경, 혹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던 것들의 구조에 통합하는 것을 의미했다. 동화는 사람이 새로운 정보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이고 새로운 정보를 기존의 인지 도식에 맞추는 과정이다. 새로운 경험에서의 동화는 기존의 개념에 맞추거나 조절하기 위해 재해석되며 동화는 사람들이 새롭거나 친숙하지 않은 정보에 직면하여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이전에 학습한 정보를 언급하는 것이다.
조절은 만약 새로운 경험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도식에 맞지 않을 때, 유기체는 불평형의 상태를 겪게 되는데 이 상태에서 평형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도식을 변경하거나 새롭게 만들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

불평형의 상태가 되었던 아이는 이제 새가 아니라고 결론짓고, 그것에 대해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 과정을 조절이라고 한다. 혹은 누군가가 그것은 새가 아니라 비행기라고 일러 줄 수도 있다. 이런 과정을 조절이라고 하는데, 조절의 과정에서는 도식의 형태에 질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조절은 특정 환경에서 새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이고 기존의 도식을 새 정보에 들어맞게 하기 위해 대체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도식(지식)이 작동하지 않을 때 발생하고 새 대상이나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변화되길 요구한다. 피아제는 사람의 두뇌는 평형화를 위한 진화를 통해 짜여졌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동화와 조절을 통한 내/외부적 과정에 의한 구조들에 영향을 미친다.

피아제는 동화와 조절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독단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이해하였다. 하나의 대상을 기존의 정신 도식에 동화하기 위해 어느 정도 이 대상의 특징을 설명하고 조절해야 한다. 가령, 사과를 사과로 알게 되기(동화시키기) 위하여 그 대상의 외양에 집중(조절)해야 한다. 이를 위해 그 대상의 크기를 개략적으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발달은 두 기능 사이의 평형화를 증대시킨다.

아까 새와 비행기를 구분하게 되었던 아이는 이제 날아다니는 대상의 하위 범주로 새와 비행기를 조직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조직화를 거듭함으로써 인지적인 발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직화는 인지적 발달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피아제는 인간의 인지 발달은 네 단계를 통하게 되며, 질적으로 다른 이 단계들은 정해진 순서대로 진행되고 단계가 높아질수록 복잡성이 증가된다고 한다(Piaget,1954).

감각적 동작(Sensorimotor Stage)의 시기 : 출생 직후 ~ 2세

감각운동기에는 신생아의 단순한 반사들이 나타나는 출생에서 초기의 유아적 언어가 나타나고, 상징적 사고가 시작되는 2세 경에 끝난다. 이 단계에서 아동의 행동은 자극에 의해 반응하는 것에 불과한데, 이는 언어가 발달하기 이전의 단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동은 시각이나 청각 등의 감각과 운동기술을 사용해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하게 된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대상영속성(Object permanence)을 보유하게 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대상이 보이지 않더라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초기의 아동은 어떤 대상이 눈 앞에서 사라지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시기가 지나게 되면 눈 앞에서 사라져도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8개월 무렵부터).

또 이 시기가 지나면 모방이나 기억이 가능한, 정신적 표상을 형성하게 되며 초기의 단순한 반사행동은 사라지고 점차 자신의 의도에 따라 계획된 목적행동으로 바뀌게 된다

전조작기(Preoperational Stage)의 시기 : 2세 ~ 6, 7세

조작이란 어떤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조작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즉, 전조작기란 조작이 가능하지 않은 이전의 단계라는 의미이다. 이 시기에는 대략 언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이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표상을 여러 형태의 상징으로 표현하게 된다. 전조작기 사고의 주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concrete operational stage

보존 개념(conservation)이란, 모양이 넓은 같은 모양의 컵에 같은 양의 우유를 보여준 뒤, 한 컵의 우유를 모양이 다른 긴 컵에 부어도 긴 컵과 넓은 컵의 우유의 양은 같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즉, 동일성, 보상,역조작의 개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또한 수의 개념에서도 달걀과 컵을 나란히 놓은 뒤 어느 것이 더 많으냐 하면 컵과 달걀의 수가 같다고 대답하지만
달걀이나 컵을 한쪽으로 모아놓으면 달걀과 컵의 수가 다르다고 생각했던 전조작기의 특성에서 벗어나게 된다.
전조작기 아동은 같은 양의 진흙으로 만든 두 개의 공을 보여준 뒤 아동 앞에서 하나를 핫도그처럼 길게 만들면 어느새 양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보존개념을 획득한 구체적 조작기에는 모양이 달라져도 그 양이나 수는 보존된다는 개념을 획득한다.

같은 모양의 구슬을 보고 쇠구슬과 유리구슬을 구분할 수 있게 됨

연역적 사고가 가능하게 됨

분류,서열 등 집합적 관계에서뿐만아니라 공간적이거나 인과적인 관계를 이해하게 된다.

Formal operational stage

새로운 상황에 직면 했을 때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통해 가설적 상황을 설정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전에 일련의 계획을 세우고 체계적으로 시험하면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게 된다.

현실 상황에는 없는 여러가지 추상적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현실에는 없는 개념도 상상하고 그려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자신과 다른사람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이상적인 기준에 따라 자신의 주장과 타인의 주장을 비교, 분석 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긴다.

현실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도 언어적 진술에 의한 명제의 논리를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맥락의 연대기적인 개인 연령수준에서의 인지 발달론 유형과는 대조적으로 피아제의 인지발달론이 다루지 못하는 인간 상호간의 섬세하고 협동적이라고 할수있는 사회적 문화 전달 측면에서 인지 발달을 다루는 레프 비고츠키의 사회문화이론이 언급되고있다.

피아제(Jean Piaget)와 비고츠키(Lev S. Vygotsky)의 인지발달이론을 중심으로,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제18권 제3호)(송지성, 이성애. (2012). 인지발달적 상호작용이 유아 디자인교육에 미치는 영향. 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18(3), 215-227.)




#Article 257: 생태계 (259 words)


생태계(生態系, )는 상호작용하는 유기체들과 또 그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주변의 무생물 환경을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생태계를 연구하는 학문을 생태학(ecology)이라고 한다.

같은 곳에 살면서 서로 의존하는 유기체 집단이 완전히 독립된 체계를 이루면 이를 '생태계'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말은 곧 상호의존성과 완결성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는 뜻이다.

하나의 생태계 안에 사는 유기체들은 먹이사슬을 통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경우가 많다. 이 먹이사슬을 통해 영양물질이 여러 유기체에 걸쳐 순환하고 에너지도 같이 이동하는데,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다양한 생태계가 생겨난다.

'생태계'라는 용어가 서구 사회에 정립된 것은 1930년 로이 클라팸이라는 학자에 의한 것으로서 그는 환경 전반의 유기체와 생물들의 연관성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였다. 후에 영국의 생태학자 아서 탄스리가 앞서 정리한 로이의 연구 결과를 정제하여 발표한 것이 현재의 생태계(Ecosystem)이다. 생태계란 기본적으로 살아있는 유기체 간의 상호작용이 이뤄지는 체계라고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개념은 모든 자연환경 상에 있어 모든 생물이 그물처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간계의 생태학적 개념이란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작은 미생물에서부터 거대한 동물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용이 서로 밀접한 위치에 있음을 상징한다. 생태계의 예로는 크게 육상 생태계, 연안 생태계, 육수 생태계로 나뉜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생태계가 모든 생산의 원천이자 상품과 용역의 기초가 된다고 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목재나 유제품과 같은 제품들이다. 야생동물에서 얻은 육류는 생태학적 관념을 적용하면 훨씬 더 환경과의 조화를 꾀하고 수초를 보호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다고 케냐와 남아프리카 일대의 연구에 보고된 바 있다. 그러나 사실 야생 생태계의 구조를 이용한 상업구조는 이렇다 할 성과가 많이 나오는 분야는 아니다. 생태 관광이라고 불리는 자연환경을 이용한 관광 산업이 가장 성공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생태 관광은 자연환경을 보존하면서도 인간이 자연에서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윈윈 전략이라고 여겨진다.




#Article 258: 유전자 (324 words)


유전자(遺傳子, 영어: gene)는 유전의 기본단위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유전자에는 생물의 세포를 구성하고 유지하고, 이것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는 데 필요한 정보가 담겨있으며 생식을 통해 자손에게 유전된다.

현대 유전학에서 유전자는 게놈 서열의 특정한 위치에 있는 구간으로서 유전형질의 단위가 되는 것으로 정의된다. 게놈 서열 안에서 유전자는 DNA 서열의 일부분을 이루며 조절 구간, 전사 구간, 기타 기능이 부여된 구간 등으로 구성된다. 일반적으로 유전자를 대립형질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대립형질은 유전자 서열에 의해 나타나는 유전형질의 한 종류이다.

유전자의 개념은 유전학의 발전과 함께 많은 변화를 겪었다. 유전학의 창시자인 그레고어 멘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유전적 특질이 통계적으로 예측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를 단순히 특질이라고 불렀다. 이후 멘델의 특질은 유전자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1950년대 DNA가 발견되면서 유전자의 물질적 토대가 해명되었다.

모든 생물은 유전자에 의한 다양한 유전형질을 갖고 태어난다. 눈 색깔, 혈액형과 같은 것을 비롯하여 특정한 유전적 질환과 같은 것도 유전된다. 뿐만 아니라 생명활동에 관여하는 수 천 가지의 생화학 작용도 유전자를 기반으로 한다. 극소수의 경우, 유전자가 세포주기의 간기때 유전정보가 잘못복제되어 돌연변이를 일으킴으로인해 기존의 형질과 다른 새로운 유전형질을 갖고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세포 내에서 유전자는 DNA 서열 가운데 정보를 갖는 부분을 뜻한다. DNA의 대부분은 정보가 없는 무작위 서열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비부호화 DNA 서열이라 한다. 인간의 게놈 가운데 99%가 비부호화 DNA 서열에 해당한다. 한편, 생쥐의 비부호화 DNA 가운데 80%가 인간의 것과 상동성을 보인다. 이는 진화의 과정에서 두 종이 공통조상으로부터 분화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에 반해 유전자는 부호화된 DNA 서열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전자에 의해 진행되는 전사 (생물학)등의 과정을 통해 유전형질이 발현되는 것을 유전자 발현이라 한다.

유전자의 발현은 개체의 발생과 성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 개체와 자연환경의 상호작용은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한다. 이렇게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인해 개체에 발현된 특징을 발현형질이라한다. 발현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초창기 멘델의 발견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1889년 휘호 더프리스가 《세포간 범생설》(Intracellular Pangenesis)을 출간하면서 멘델의 이론을 소개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더프리스는 멘델이 제시한 유전학 개념의 용어를 정리하여 유전형질, 발현형질과 같은 용어를 고안하였다. 유전자()라는 용어는 덴마크의 유전학자 빌헬름 요한센이 최초로 사용하였다.

유전자 전체의 서열을 게놈이라 한다. 2007년 8월 햅맵 프로젝트는 인간의 게놈 지도를 판독하였다. 개체차를 반영한 인간의 게놈 판독 결과는 2008년 네이처에 발표되었다.




#Article 259: DNA (4061 words)


DNA(, 데옥시리보핵산, 디옥시리보 핵산)는 뉴클레오타이드의 중합체인 두 개의 긴 가닥이 서로 꼬여있는 이중나선 구조로 되어있는 고분자화합물이다. 세포 핵에서 발견되어 핵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지만 미토콘드리아 DNA와 같이 핵 이외의 세포소기관도 독립된 DNA를 갖고 있는 것이 있다.

DNA는 4 종류의 뉴클레오타이드가 중합 과정을 통해 연결된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닥은 사이토신, 구아닌, 아데닌, 티민는 독특한 핵염기로 구분되기 때문에 흔히 DNA 염기서열이라고 부른다. DNA 염기서열은 유전정보를 나타내는 유전자 구간과 그렇지 않은 비부호화 DNA 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과거에 기능을 가진 유전자였더라도 돌연변이를 통해 기능을 상실한 슈도진이 되면 비부호화 DNA가 된다.

DNA는 스스로를 복제하고 유전정보를 통해 유전자 발현이 일어나게 한다. 유전자는 DNA 사슬의 특정 구간으로 실제 단백질 형성과 같은 발현에 관여하는 엑손 구간과 그렇지 않은 인트론을 포함한다. DNA가 직접 유전자 발현을 실행하는 것은 아니며 실제 발현 과정은 DNA에서 전사된 전령 RNA(mRNA)가 지닌 코돈에 의해 진행된다. 코돈은 세 개의 염기서열이 묶인 유전단위로 시작 코돈과 종결 코돈 그리고 그 사이에 실제 아미노산 결합을 지시하는 코돈들로 이루어져 있다. mRNA는 리보솜에서 효소와 같은 단백질을 합성하게 한다.

DNA는 1869년 스위스의 프리드리히 미셔가 처음 발견했다. 그는 세포 핵 안에서 발견한 산이라는 의미로 뉴클레인이라고 불렀다. 이후 DNA는 유전의 원인으로 오랫동안 지목되어 왔으며 1944년 오즈월드 에이버리의 형질전환 실험을 통해 DNA가 유전물질임이 확인되었고 1952년 앨프리드 허시(Alfred Hershey)와 마사 체이스의 허시-체이스 실험으로 확정되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는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1953년 네이처지에 실은 논문에서 처음으로 밝혔다. 그러나 DNA가 이중나선 구조를 가졌다는 결정적인 증거인 DNA의 X선 회절 사진은 로절린드 프랭클린이 찍은 것이었으며, 그녀와 앙숙이었던 동료 과학자 윌킨스가 프랭클린의 사전 허락 없이 회절사진을 분석하고 왓슨과 크릭에게 제공함으로써 왓슨과 크릭의 연구가 가능했기에 이후 그들은 프랭클린의 영광을 도둑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프랭클린은 암으로 1958년에 사망하여 노벨상 후보에 오르지 못하였다.

DNA는 뉴클레오타이드 중합체 두 가닥이 서로 꼬여있는 이중나선 구조로 되어있다. DNA를 이루는 뉴클레오타이드는 디옥시리보스를 중심으로 한 쪽에는 인산염이 결합되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4 종류의 핵염기 가운데 하나가 결합되어 있다. 디옥시리보스와 인산기가 중합 과정을 통해 사슬 한 가닥의 뼈대를 이루고 핵염기들이 서로 상보적인 수소 결합을 통해 염기쌍을 이루며 이중나선을 만든다. 한편 이러한 DNA의 상보성은 한쪽만으로 상대편을 예측할 수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이중나선 구조는 DNA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필수적이다. 뉴클레오타이드의 핵염기는 유전정보를 저장하는데 수소 결합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쉽게 풀렸다 닫힐 수 있다. 이 때문에 이중나선은 유전자 발현을 위해 일부분이 풀렸다가 닫힐 수도 있고 세포 분열 과정에서 완전히 풀리면서 복제될 수도 있다. 일부 또는 전체가 풀린 이중나선은 유전자 발현이 종료되거나 복제가 끝나면 다시 닫히게 된다. 한편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는 진화의 원인이 된다.

뉴클레오타이드는 디옥시리보스를 중심으로 한 쪽은 인산염이 다른 한 쪽은 핵염기가 결합되어 있는 DNA의 단위체이다. 생체에는 여러 종류의 뉴클레오타이드가 있으며 저마다 독자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예를 들어 아데노신은 결합된 인산염의 수에 따라 아데노신일인산, 아데노신이인산, 아데노신삼인산과 같은 형태로 존재한다. 아데노신삼인산은 인체의 모든 세포에 화학적 에너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 세포의 에너지 동전이라고도 불린다. 이데노신삼인산에서 인산염 하나가 분리되어 아데노신이인산이 되면서 에너지를 전달한다. DNA를 이루는 것은 이것보다 인산염 하나가 더 적은 아데노신일인산이다.

DNA를 이루는 뉴클레오타이드의 핵염기는 시토신(C), 구아닌(G), 아데닌(A), 티민(타이민)(T)의 네 종류이다. 이들 핵염기와 연결된 뉴클레오타이드는 마치 레고 블럭처럼 DNA를 이루는 기본 단위가 된다. 구아닌은 시토신과 아데닌은 티민과 서로 상보적으로 결합하여 염기쌍을 이룬다. 염기의 모양과 화학구조 때문에 상보적인 두 핵염기만이 꼭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DNA 가닥의 한쪽 염기서열만 알면 다른쪽은 자동적으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쪽 가닥의 염기서열이 -A-C-G-T- 라면 다른 쪽 가닥의 염기서열은 -T-G-C-A- 가 된다.

아데닌(A)과 티민(T)은 두 개의 수소 결합으로 연결되고 구아닌(G)과 시토신(C)은 세 개의 수소 결합으로 연결된다. 수소결합의 개수 때문에 A-T 결합은 G-C 결합보다 결합력이 약하고 상대적으로 파손되기 쉽다. 생명체가 죽으면 DNA 역시 여러 이유로 손상을 입기 시작하는데, 상대적으로 결합력이 약한 A-T 쪽이 먼저 파괴되는 경향이 있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티민은 계속적인 손상을 입어 우라실로 대체되며 이렇게 손상을 입은 DNA는 소변을 통해 배출된다.

대부분의 생물은 위 네 핵염기만이 DNA의 단위체이지만 바이러스의 일종인 일부 박테리오파지는 우라실도 단위체로 사용된다. 박실루스 슈브틸리스(Bacillus subtilis) 종에 속하는 박테리오파지 PBS1과 PBS2 그리고 예르시니아(Yersinia) 박테리오파지 piR1-37 의 DNA는 티민이 우라실로 대체되어 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생물에서 우라실은 RNA의 단위체로서만 관여한다.

DNA가 나선 모양으로 꼬이는 것은 일차적으로 디옥시리보스와 인산의 중합 형성으로 생기는 구조 때문이다. 리보스와 디옥시리보스는 모두 탄소 5개로 이루어진 오탄당으로 단원자 산소를 매개로 오각형의 구조를 이룬다. 단원자 산소에서 시계방향으로 각 탄소마다 1번에서 5번까지 번호를 붙여 위치를 나타낸다. 뉴클레오타이드에서 디옥시리보스의 1번 탄소는 핵염기와 결합하고, 2번과 3번은 하이드록시기(-OH)와 결합하며 4번 탄소와 연결된 5번 탄소가 인산염과 결합한다. 그리고 다른 뉴클레오타이드와 결합하는 것은 5번 탄소에 연결된 인산염이다. 따라서 DNA 염기서열 사슬은 언제나 인산염을 사이에 두고 5번 탄소와 3번 탄소가 연결되게 된다. 이를 5' → 3' 연결 방향성이라고 부른다. 인산염의 결합 위치때문에 DNA 가닥은 3차원에서 나선 구조를 지니며 꼬이게 된다. 한편, 두 가닥의 염기서열 뼈대에 연결된 핵염기가 상보적이기 때문에 한 쪽 가닥 말단이 3번 탄소라면 상대쪽은 5번 탄소이게 되고 그 반대로 한 쪽의 말단이 5번 탄소라면 상대쪽은 3번이게 된다. 그 결과 A-T 및 G-C 두 염기서열 뼈대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란한 역평행성과 상보성을 보인다. 이와 같이 하여 DNA는 두 개의 염기서열 뼈대가 서로 꼬인 이중나선 구조가 되고 두 사슬의 핵염기가 마치 사다리처럼 상보적으로 결합하여 안정적 구조를 유지하게 된다.

DNA 이중나선은 대개 오른 나사 방향으로 꼬이는 B형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꼭 그것만이 유일한 구조는 아니다. 널리 알려진 유형으로는 A-DNA, B-DNA, Z-DNA가 있다. DNA 이중나선은 나선 사이에 홈이 패이게 되는데 넓게 패이는 주홈과 좁게 패이는 부홈을 구분할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B-DNA의 경우 한 번 감긴 나선 마다 10개의 염기쌍이 놓인다. 그런데 A-DNA는 나선의 기울기가 수직축을 기준으로 30°정도 기울어져 있어서 더 큰 폭으로 회전한다. 이 경우 나선 사이의 홈도 비슷하게 패여서 주홈과 부홈을 구분하기 힘들게 되며 나선 하나에 놓이는 염기쌍도 11개로 B형 보다 1개 더 많다. 한편 Z-DNA는 나사의 회전 방향이 B-DNA와 거울상 대칭을 보이고 나선 하나에 12개의 염기쌍이 놓이게 된다. 그 결과 Z-DNA는 B-DNA보다 길고 홀쭉하게 보이게 된다.

DNA는 대부분 B형을 보이지만 매우 긴 DNA 사슬은 여러 형태의 DNA 사슬구조가 섞여 있다. 구아닌(G)과 시토신(C)이 반복하여 염기서열을 이룰 때 Z형 나선을 이루는 경향이 있으며 유전자와 인접한 Z형 나선은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친다.

오랫동안 DNA 이중나선은 기다란 끈 모양으로 여겨져 왔지만, 전자현미경 관찰을 통해 많은 경우 양 끝이 공유결합을 통해 고리 모양을 이루는 환형 DNA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DNA 이중나선 역시 다시 한 번 꼬여서 초나선을 이룰 수 있다. DNA가 이렇게 고리 구조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슬의 방향성 때문에 한쪽 끝의 3' 말단이 반대편 끝의 5'말단과 공유결합을 하는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하려면 DNA 사슬 자체가 1 회 이상 더 회전하여야 한다. DNA 사슬의 나사 진행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여 고리를 만든다면 나선을 더 단단히 조이는 효과가 일어나고 이를 양성 초나선이라고 한다. 반대로 DNA 사슬의 나사 진행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회전함으로 인해서 고리를 만든다면 DNA 나선을 풀어주는 효과가 나타나고 이를 음성 초나선이라고 한다. 실제 DNA는 그것의 나선 1회전 당 염기쌍 수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구조를 변형하여 초나선에 의한 영향에 맞선다. 예를 들어 B-DNA는 나선축이 휘어져 나선 1회 당 10개의 염기쌍 주기를 유지한다.

DNA의 위상적 구조가 갖는 생물학적 기능은 아직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게다가 DNA 구조는 늘 일정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풀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면서 변한다. DNA 회전효소는 초나선 현상을 완화하는 효소로, 공유결합된 말단을 풀어 고리를 끊고 너무 꼬여버린 줄을 풀어준다음 다시 연결한다.

DNA에는 생물의 유전정보가 담겨있다. 그러나 DNA의 염기서열 모두가 유전자 발현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유전형질의 발현에 관여하는 염기서열을 유전자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을 비부호화 DNA라고 한다. 비부호화 DNA 가운데에는 예전에는 유전자로 기능하였으나 돌연변이 등으로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슈도진이 포함되어 있다.

유전자가 직접 생물을 이루는 물질을 만들지는 않는다. 유전자에는 어떤 것을 어떻게 만들 지에 대한 정보만이 담겨있다. 따라서 DNA는 생물의 설계도를 담고 있는 청사진이라기 보다는 마치 요리책 처럼 해야할 작업을 순서대로 적은 레시피에 가깝다. DNA의 정보는 여러 단계를 거쳐 가공되고 처리되어 최종 결과물 생성에 관여하게 된다.

따라서 DNA의 기능은 다음의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유전자는 DNA의 일정 구간에 걸쳐 있는 염기 서열이다. 유전자에는 실제 유전정보가 담겨있는 엑손 구간과 발현에 관여하지 않는 인트론 구간이 있다. 엑손 구간의 시작은 촉진유전자(Promoter, 프로모터)에서 시작한다. 촉진유전자는 DNA 나선 두 가닥 중 어느쪽이든 있을 수 있다.

DNA에 있는 유전자는 정보만을 지정하고 실제 단백질의 형성과 같은 일은 리보솜과 같이 세포 핵 밖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둘 사이의 정보 전달이 필요하다. 이 정보 전달은 전령 RNA(messenger RNA, mRNA)라고 불리는 전령이 담당한다. 촉진유전자는 바로 이 전령이 생성되는 시작점으로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지 DNA의 두 가닥 가운데 어느 쪽을 이용해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읽어야 하는지와 같은 정보를 지정한다. 촉진유전자의 염기 서열 자체가 한 방향으로만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거꾸로 읽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전령인 mRNA는 RNA 중합효소에 의해 DNA에서 전사되어 형성된다. RNA 중합효소는 전사 시작 위치인 촉진유전자에 결합하는데 촉진유전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RNA 중합효소가 정확히 착륙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일단의 염기서열이 있다. RNA 중합효소는 이 유도 표지를 따라 접근하여 정확한 시작위치에 결합한 다음 DNA 사슬을 풀고 DNA와 상보적으로 형성되는 RNA 사슬을 엮는다. DNA와 달리 RNA는 아데닌의 상보적 핵염기로 우라실(U)이 사용된다. RNA 중합효소가 지나가면 DNA는 스스로 다시 감긴다. RNA 중합효소는 계속하여 mRNA를 결합하다가 종결 위치를 만나면 전사를 멈춘다. 종결 메커니즘은 복잡하고 한 종류 이상이다.

유전자가 전사된 mRNA는 염기서열 세 개가 모여 하나의 코돈을 이루는데 실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 코돈이다. 코돈은 시작 코돈, 아미노산 지정 코돈, 종결코돈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우라실 셋이 모인 코돈 UUU는 아미노산의 하나인 페닐알라닌을 지정한다. 네개의 염기가 짝을 이루어 하나의 코돈을 이루는 경우의 수는  이므로 모두 64가지의 코돈이 있지만, 코돈이 다르더라도 동일한 아미노산이 지정되는 경우도 있어 실제 지정되는 아미노산은 모두 20개이다. 또한 코돈에는 한 개의 시작 코돈과 세 개의 종결 코돈이 있다.

진핵생물의 경우 전사는 두 단계를 거친다. DNA에서 곧바로 전사된 1차 전사체는 엑손 부분과 인트론 부분이 함께 전사되며 있다. 최종 형성되는 mRNA는 이 가운데 인트론 부분을 잘라내 버린다. 대개의 경우 인트론 전사체 RNA의 절단은 전사가 종결된 뒤 핵 안에서 이루어지고, 핵 안에는 잘려진 다양한 크기의 RNA 분자가 남게 된다. RNA 절단에 관여하는 소자는 스프라이소좀으로 유전자 서열 자체에 어느 부분이 절단될 것인지를 지정하는 염기서열이 따로 있어서 매우 정교하게 잘라내어 접합한다. 잘려나가는 부위는 때로 전체 전사체의 90%에 달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형성된 mRNA는 리보솜으로 옮겨가 번역된다. 리보솜은 세포내의 공장으로 실제 컨베이어 벨트에 자리한 조립공처럼 일한다. mRNA에는 리보솜 결합 부위라는 번역 개시 신호가 있어 어디서부터 아미노산 결합을 시작할 지 지시한다. 리보솜은 mRNA를 읽어들이고 그에 맞는 아미노산을 달고 있는 운반 RNA(transfer RNA, tRNA)를 받아들인 후 아미노산은 펩티드 결합에 사용하고 tRNA는 방출한 다음 다음 코돈을 읽는다. 이런 과정을 종결 코돈이 있을 때까지 반복한다. 비유하자면 mRNA는 작업지시서, tRNA는 운반도구, tRNA에 결합한 아미노산은 재료가 되는 셈이다.

tRNA는 독특한 접합이 있는 RNA로 한쪽 끝엔 mRNA와 상보적인 안티코돈이 있고 다른 한쪽엔 특정 아미노산과 결합할 수 있는 구간을 지니고 있다. DNA에는 tRNA를 만들 수 있는 전사 구간이 별도로 존재하며 이 역시 유전자의 하나이다. tRNA는 세포 내에서 자신과 짝을 이루는 아미노산과 결합해 있다가 근처의 리보솜에 끌려들어가 아미노산 합성에 참여하고 방출된 뒤에는 다시 아미노산과 결합한다. 이 과정은 세포 내 물질의 밀도에 의존한다.

유전자 발현에서 단백질 합성의 재료가 되는 아미노산은 대부분 체내에서 합성되어 있다가 mRNA가 전달한 정보에 따라 단백질로 결합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동물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아미노산 전체를 모두 체내에서 생성하지는 못한다. 이때문에 반드시 음식을 통해 섭취해야 하는 필수 아미노산이 있다. 사람의 경우 20개의 아미노산 가운데 트립토판, 메티오닌, 발린, 트레오닌, 페닐알라닌, 류신, 이소류신, 리신의 8 개는 체내에서 합성하지 못한다. 이들 8개의 필수 아미노산은 우유, 계란, 고기 등에 풍부하므로 육식을 할 경우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채식주의자의 경우엔 콩이나 두부, 기타 여러 곡물 등을 혼합하여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해 지지 않도록 식단에 주의하여야 한다.

결국 DNA에서 전사되어 형성된 mRNA와 DNA의 다른 구간에서 형성된 tRNA가 재료인 아미노산을 이용하여 리보솜에서 아미노산 사슬을 만들어 내는 것이 유전자 발현의 핵심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아미노산 사슬은 단백질 접힘과정을 거쳐 특정한 기능을 갖는 단백질이 된다. 대표적인 단백질로는 효소가 있다. 효소는 체내의 생화학 반응을 매개하는 촉매로서 3차원 구조가 기능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효소가 작용하는 부위를 효소의 활성자리라고 하는데 효소의 구조가 변하면 이 활성 자리 역시 바뀌어 다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유전자의 염기서열 어느 한 곳에 돌연변이가 일어났다고 가정하면 그 돌연변이의 결과 코돈이 바뀌게 되고 그에 따라 최종 형성되는 아미노산 역시 바뀌게 된다. 그 결과가 치명적이지 않다면 대개의 아미노산 변형은 자식에게 유전된다. 돌연변이는 자연적으로 계속하여 생성되며 방사선을 쬐거나 화학물질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생물은 DNA 수선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어서 문제가 되는 돌연변이를 계속 수정한다. 그러나 모든 돌연변이를 다 수정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유전정보의 변이가 발생한다. DNA에는 유난히 돌연변이가 자주 일어나는 구간이 있으며 메틸화된 핵염기를 치환하면서 오류를 보인다. 유전 정보를 담지 않는 비부호 염기서열도 동일하게 이러한 돌연변이를 겪을 수 있는데, 미토콘드리아 DNA의 조절 부위는 별다른 유전자 발현을 하지 않으면서 돌연변이가 빈번하여 집단의 친연관계를 추적하는 도구로 이용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유전자의 동일한 위치를 놓고 원래의 유전정보 A와 변형된 유전정보 A'가 서로 경쟁하게 된다. 즉 어느 유전자가 후손에게서 더 많이 발현될 수 있는 가 하는 대립형질 발현빈도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이렇게 발생한 대립형질에 우열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환경이 어느 한 쪽 형질에 유리할 경우 점차 유리한 형질만이 살아남게 되어 생물 집단 전체의 유전형질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진화의 기본 조건은 계속하여 발생하는 돌연변이라고 할 수 있다.

DNA는 스스로를 복제한다. 생물은 생장과 발달을 포함한 생애 전 단계에서 끊임 없이 세포분열을 필요로 한다. 세포가 분열될 때에는 그 세포가 갖고 있는 유전 정보 역시 빠짐 없이 나누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DNA 복제가 일어난다.

DNA 사슬이 어떻게 풀리고 복제되는 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지만 1957년 메튜 메셀슨과 프랭클린 스탈의 실험을 통해 두 가닥이 풀린 후 각 가닥마다 새로운 상보적 염기서열이 형성되어 두 개의 DNA가 형성되는 반보존적 복제가 이루어짐을 확인하였다. 즉, 복제된 DNA 두 개는 각자 원래의 DNA 가닥 가운데 하나를 포함하고 있게 된다.

DNA 회전효소가 DNA 이중나선이 풀리면서 생기는 과도한 꼬임을 방지하기 위해 이중나선에 결합한다. 그 후 헬리카아제가 실제 이중나선의 결합을 푼다. 이중나선이 풀리면 DNA 중합효소가 복제를 시작한다. 하지만 DNA 복제에는 RNA로 이루어진 프라이머가 필요하다. DNA 복제를 진행하는 DNA 중합효소가 DNA의 시작점부터 직접 복제를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효소의 하나인 프리마아제가 열려진 DNA의 한쪽 가닥에 프라이머를 결합시킨 뒤 떨어져 나가면 그 자리에 DNA 중합효소가 결합하여 새로운 이중나선을 만들기 시작한다.

한편, 새로운 DNA 이중나선은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생성된다. 원래의 DNA 나선에 DNA 회전효소가 지나가며 지퍼를 열듯이 나선을 분리하면 이렇게 열리는 방향과 같이 진행되는 선도 사슬(Leading strand)는 진행 방향을 따라만 가면 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지연 사슬(Lagging strand)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원래의 DNA 이중나선이 풀리고 충분한 길이의 새로운 염기서열이 확보 되어야 계속해서 복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프리마아제가 헬리카아제의 뒤에 연결되어 임시로 토막토막 끊어지는 프리미어 RNA를 만들고 뒤에 거꾸로 향하는 DNA 중합효소가 절편을 만들며 잇는다. 이를 발견자의 이름을 따 오카자키 절편이라 한다.

이러한 복제 과정을 거치면 지연 사슬의 끝은 더 이상 프리미어를 놓을 자리가 없게 되고 그 결과 DNA 사슬의 말단 일부는 복제되지 않은 채 남는다. 이 때문에 복제가 거듭되면 염색체의 끝부분인 텔로미어가 점점 짧아지게 된다. 텔로미어가 짧아지는 현상은 노화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한편,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은 자식 세대의 재생산을 위해 감수분열을 한다. 정자와 난자같은 생식세포는 유전자 재조합을 거치는 감수분열을 통해 성체가 가지고 있는 원래 유전 정보의 절반을 갖게 된다. 진핵생물의 세포에는 DNA와 핵 이외에도 여러 세포소기관이 있는데 미토콘드리아와 같은 대개의 세포소기관은 난자에서 기원한 것이다. 관행적으로 생식세포의 유전체를 n, 수정 이후의 유전 정보를 2n으로 표기하여 동수의 유전정보가 암수에게서 온다고 이해하고 있었으나 적어도 포유류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자의 염색체만을 두배로 하여 2n이 되도록 하거나 난자의 염색체만을 두배로 하여 발생을 유도한 실험 모두에서 정상적인 발생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무엇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일부 유전자는 반드시 정자를 통해 와야하고 또 다른 일부 유전자는 반드시 난자를 통해 유전되어야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DNA는 염기서열의 형태로 유전정보를 담고 있다. 한 생물이 지니는 DNA 염기서열 전체를 게놈이라고 한다. 한편, 세포 분열 과정에서 DNA 사슬은 염색체를 형성한다.

한 생물이 지니는 DNA 염기서열 전체를 게놈이라고 한다. 게놈은 유전자(Gene)와 염색체(chromosome)를 합성하여 명명한 낱말로 1920년 함부르크 대학교의 식물학 교수 한스 빙클러가 제안하여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한국어 번역어로는 유전체(遺傳體)가 쓰인다. 게놈의 길이는 생물마다 천차만별이다. 가장 먼저 게놈이 해독된 예쁜꼬마선충의 경우 게놈의 크기는 1억 쌍의 염기서열 정도이지만, 2003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이 완료된 인간 게놈의 경우 DNA 한 가닥당 3,234.83 Mb(메가베이스)의 염기서열로 이루어져 있어 두 가닥을 합친 총 염기서열 양은 6,469.66 Mb이 된다. 각각의 세포마다 들어있는 게놈의 길이는 약 1.8 m에 달한다. 그러나 사람의 세포 핵의 크기는 5 μm에 불과하기 때문에 DNA는 매우 가늘고 긴 사슬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식물의 경우 매우 거대한 게놈을 갖기도 한다. 백합의 게놈은 인간보다 18배나 더 크다.

게놈이 해독되었다고 모든 유전자의 위치와 기능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유전자의 기능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DNA는 평소 세포 핵 내부에서 단백질과 결합하여 염색질을 이룬다. 염색질은 매우 가늘고 긴 실과 같으므로 전자현미경을 통해서나 관찰이 가능하다. 그러나 세포분열 과정에선 염색체 단위로 뭉치게 되어 광학현미경으로 쉽게 관찰이 가능하다. 염색체는 생물 종마다 수와 크기가 다르다. 인간의 경우 22 쌍의 상염색체와 1쌍의 성염색체가 있다. 상염색체는 1번 염색체, 2번 염색체와 같이 번호로 불리고 성염색체는 x 염색체와 y 염색체 등으로 불린다.

성염색체는 동물마다 달라 어류는 ZO 성결정 체계를 따른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의 성결정은 XX인 경우가 암, XY인 경우가 수로 수컷이형을 보이지만, ZO 성결정 체계는 Z 유전자 하나만 있을 경우 암, ZZ인 경우 수로 암컷이형을 보인다. XY 성결정 체계와 달리 ZO 성결정 체계는 암수의 유전적 구별이 보다 유연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성전환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류의 경우 400여 종에서 생애 주기에 따라 성전환이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감성돔은 모두 수컷으로 태어나지만 2~3년이 지나면 암컷으로 성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5~6년생이 되면 모두 암컷이 된다. 한편 조류의 경우엔 ZW 성결정 체계를 따른다.

염색체는 DNA 사슬이 염색질을 단위로 뭉친 것이다. DNA 사슬은 단백질의 일종인 히스톤을 실패삼아 감긴다. 히스톤은 모두 다섯 종류로 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히스톤 H2A, H2B, H3, H4 가 각 한 쌍씩 8개가 팔량체를 이뤄 실제 실패와 비슷한 구조를 만든다.. 히스톤 실패에 감긴 DNA를 뉴클레오좀이라 하는데 이것이 DNA 저장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된다. 146개의 염기쌍이 히스톤 실패를 1.65번 감는다. 한편 실패를 이루지 않는 히스톤 H1은 실패 밖에서 DNA를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뉴클레오좀은 다시 꼬여서 더 두꺼운 코일을 형성하는데 나선 1회전에 6 개의 뉴클레오좀이 감긴다. 이렇게 만들어진 코일은 또다시 접혀져 루프를 만들고 이렇게 여러차례 겹쳐 만들어진 루프가 염색체를 이룬다.

염색체는 세포분열 과정에서 두 개의 염색분체가 동원체를 중심으로 묶여 있는 모습이 된다. 이 염색분체들은 세포분열 말기에 각자 다른 딸 세포의 극으로 끌려가 새로운 세포 핵을 형성하게 된다. 염색체는 동원체를 중심으로 긴 팔과 짧은 팔이 구분되데 긴 쪽을 q 팔, 짧은 쪽을 p 팔이라고 한다. q와 p는 염색체 위에서 유전자의 위치를 정할 때 기준이 된다. 동원체에서 가까운 쪽에서 부터 q1 또는 p1과 같이 번호를 붙이며 멀수록 p20 또는 q40과 같이 큰 번호가 부여된다. 1p1은 1번 염색체의 짧은 팔에서 동심원에 가장 가까운 위치를 뜻하게 된다. 예를 들어 ABL2 효소 합성을 지시하는 ABL2 유전자는 1번 염색체의 1q25.2 에 위치해 있다. 아래의 다이어그램에서 오른쪽 중간쯤에 그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염색체 위의 유전자 위치를 밝혀내는 지도 작성은 매우 길고 복잡한 DNA 염기서열의 해독을 필요로 한다. 거대한 염기서열 전체를 한 번에 보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제 지도 작성은 적당한 크기로 잘린 DNA 절편을 이용한다. 자잘하게 잘린 절편들은 겔 전기 영동법과 같은 방법으로 분리되어 염기서열이 해독된다. 동일한 정보를 갖는 여러 가닥의 DNA를 사용하면 직소 퍼즐을 맞추듯이 서도 들어 맞는 절편들을 차례로 이어 붙일 수 있다. 하나의 절편은 상보적 결합을 이용해 대량으로 복제하여 유전자 라이브러리를 만들 수 있고 이를 이용하면 해독의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1983년 중합효소 연쇄반응(polymerase chain reaction, PCR)이 고안되어 소량의 시료로부터 라이브러리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삽입한 핵염기가 분리될 때 발생하는 광자를 직접 검출하는 방식이 개발되어 더욱 빠른 해독이 가능해졌다.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는 독자적인 DNA를 갖는다.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DNA에는 2 개의 RNA 유전자, 22 개의 tRNA 유전자, 13 개의 단백질 합성 유전자가 있다. 린 마굴리스는 진화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 별개의 생물인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가 진핵 생물의 조상과 공생을 이루었다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엽록체 DNA는 보통 120~150여개의 유전자가 배열되어 있으며 염기서열은 약 150 kb 내외이다.

DNA는 1869년 스위스의 프리드리히 미셔가 처음 발견했다. 그는 세포 핵 안에서 발견한 산이라는 의미로 뉴클레인이라고 불렀다. 미셔가 핵산을 발견한 직후 세포 핵에서 막대모양의 구조를 매우 진하게 염색시키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1879년 발터 플레밍은 핵에서 염색되는 물질을 설명하기 위해 염색질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세포 분열 과정에서 뭉쳐저 염색체가 된다는 것도 발견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셔의 뉴클레인과 플레밍의 염색질은 동일한 물질임이 확인되었다. 이 시기에 이미 많은 학자들이 염색질이 유전에 관여한다고 추측하였고 많은 실험들이 이루어졌다.

염색체 위에 놓인 유전자가 유전형질을 결정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학자들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는 지를 놓고 가설을 세웠다. 영국의 아치볼드 게로드는 하나의 유전자가 하나의 효소를 지정한다는 1유전자 1효소설을 주장하였고, 1941년 조지 비들과 E. L. 테이텀이 붉은빵곰팡이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이를 입증하였다. 이들은 곰팡이에 엑스선을 쬐어 특정한 아미노산을 형성하지 못하는 돌연변이를 얻었다. 이렇게 하여 발생한 점돌연변이 때문에 돌연변이 곰팡이는 다른 기능이 정상이더라도 합성하지 못하는 아미노산을 외부에서 공급하지 않으면 효소를 만들지 못했다.

프레더릭 그리피스는 1928년 그리피스 실험을 통해 형질전환을 발견하였다. 폐렴쌍구균은 면역반응에 걸려 병을 유발하지 못하는 R형과 폐렴을 유발하는 S형이 있는데, S형이라 할지라도 열을 가해 균을 죽이면 폐렴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죽은 S형 균을 R형 균에 섞어 넣었더니 R형이 모두 S형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리피스는 S형의 어떤 요소가 R형에게 전달되어 형질변환이 일어났다고 결론지었지만 그 요소가 무엇인지 특정하지는 못했다. Downie AW (1972). Pneumococcal transformation—a backward view. Fourth Griffith Memorial Lecture. J. Gen. Microbiol. 73 (1): 1–11. PMID 4143929. 1944년 오즈월드 에이버리는 그리피스의 실험을 훨씬 정교하게 통제하여 열처리한 S형 균을 탄수화물,단백질, DNA로 구분하여 R형 균에 투입하였고, 그 결과 DNA가 형질변환의 원인임을 밝혀내었다.

에이버리의 실험 이후에도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물질이 무엇인지를 놓고 논쟁이 계속되었다. DNA는 처음부터 계속하여 강력한 후보였으나 단백질 역시 만만찮은 후보였다. DNA와 단백질 가운데 어떤것이 유전 요인인지를 확실히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1952년 알프레드 허시와 마사 체이스가 더욱 정교한 통제 조건으로 허시-체이스 실험를 실시하였다. 허시와 체이스는 박테리오파지의 단백질과 DNA에 방사성 동위원소 표식을 달아 대장균에 주입한 후 무엇이 유전에 관여하는 지를 관찰하고 그것이 DNA임을 확정하였다.

DNA의 역할에 대한 논란과는 별개로 DNA의 구조 역시 오랫동안 여러 가설만이 제시될 뿐이었다. 1935년 러시아 출신의 미국 생화학자 피버스 레빈은  뉴클레오타이드가 인산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당시 과학자들은 고분자 화합물인 DNA의 크기를 제대로 알 수 없었고, 실제로는 핵염기의 구성비 역시 제각각일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레빈은 DNA를 이루는 핵염기 4종이 모두 같은 비율로 존재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들이 짝을 이루는 사각형 구조를 가설로 제시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실제 DNA의 핵염기 비율은 4종 모두가 똑같지는 않기 때문에 레빈의 가설은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생화학자 어윈 샤가프는 DNA의 핵염기가 모두 동일한 양을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아데닌과 티민, 구아닌과 시토신은 언제나 동률을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샤가프 스스로는 이 발견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지만, DNA 핵염기의 상보성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윌리엄 로런스 브래그가 이끄는 캐임브리지 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는 1948년부터 X선 회절을 이용해 DNA의 구조를 직접 관찰하고자 하였다. X선도 일종의 빛이기 때문에 굴절, 반사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며 회절은 작은 물질을 지나가는 빛이 물질의 그림자 영역까지 애돌아 나가는 현상이다. 결정의 모양에 따라 회절 모양도 달라지게 되므로 역으로 이용하면 물질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X선을 결정에 조사하면 브래그 법칙을 만족하는 방향으로만 X선이 회절되어 결정구조가 반영된 패턴을 남긴다. 1952년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이후 DNA의 구조 파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진 51을 촬영하였다.

프랭클린의 사진 51은 프랜시스 크릭을 거쳐 제임스 왓슨에게 전달되었고 둘은 사진을 보고 DNA가 이중나선을 이룬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사진 51은 DNA의 구조가 이중 나선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데이터로서 1953년 왓슨과 크릭은 《네이처》지에 사진 51과 함께 이중나선 구조를 설명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둘이 발표한 내용은 오늘날 익히 알려진 것과 같이 핵염기들이 A-T, G-C의 상보적 결합을 이루며 두 가닥의 사슬이 서로 꼬여 이중나선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DNA는 구조가 규명되자 마자 그것이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물질임을 암시하였다. 핵염기는 오직 하나의 상보적 짝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DNA 사슬의 뼈대를 이루는 두 가닥이 분리되면 곧바로 새로운 이중나선을 구성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아서 콘버그는 이러한 DNA의 복제가 효소에 의해 통제될 것이라고 추측하였고 1953년 DNA 중합효소를 발견하였다.

DNA 사슬 두 가닥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복제된다. DNA 이중나선이 풀리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선도 진행과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지연 진행이 있다. 선도 진행이 연속적인 복제 과정을 거치는 것과 달리 지연진행은 DNA 이중나선의 물리적 특징 때문에 간헐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1968년 부부였던 오카자키 레이지, 오카자키 츠네코를 비롯한 일본의 과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지연 진행되는 DNA 사슬이 일정한 크기의 절편 단위로 복제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카자키 절편은 DNA 복제 과정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개념이다.

유전자 가위로 DNA의 원하는 부분을 절단하면 그것을 대장균과 같은 세균의 DNA에 주입하여 대량으로 복제시킬 수 있다. 이렇게 원하는 유전자를 대량으로 복제하는 기술을 클로닝이라고 한다. 클로닝은 DNA 감식, 유전자 편집 등 여러 용도에 두루 활용된다.

유전자 가위와 클로닝 기술은 유전자 변형 생물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곡물이나 구근 식물은 농업의 주요 품종으로 여러 이유에서 유전자 변형이 연구되었으며 2002년 말 16개국에서 유채, 옥수수, 감자 등 15작물 68품종이 재배되고 있다. 유전자 변형 생물의 안전성 문제는 뜨거운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유전자 편집은 식물 뿐만아니라 동물도 적용 가능하다. 실험 동물에 특정한 유전형질을 발현시키기 위해 유전자 편집이 사용되기도 한다. 한편 2018년 중국에서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유전자 편집이 시도되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DNA 염기서열에 있는 수 많은 유전자들이 발생의 어느 시점에서 발현하고 어느 시점에서 분화되어 고정되는 가 하는 주제는 발생유전학의 중요 관심사이다. 다세포 생물은 발생과 발달 과정에서 일정 시기를 지나면 세포 마다 발현될 특징이 결정된다. 피부에선 피부 세포만이 발현되고 간에선 간 세포만이 발현되어야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분화가 결정된 세포는 때어내어 다른 곳에 이식하여도 결정된 대로 발달한다. 줄기 세포는 아직 그 역할이 결정되지 않아 무엇으로건 분화할 수 있는 상태의 세포이다. 배아의 발생단계에서 미분화한 배아줄기세포와 성체가 되었지만 일부 계속해서 남아있는 성체줄기세포가 있다. 배아줄기세포는 미분화한 배아의 세포에서, 성체줄기세포는 혈액, 골수 등에서 얻는다. 줄기세포는 각종 질병 치료를 위한 목적으로 연구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미분화한 줄기세포를 특정 방향으로 분화시키는 메커니즘을 알지 못한다.

DNA는 매우 큰 정보량을 갖고 있으며 개인 마다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어 DNA를 통해 신원을 특정할 수 있다. DNA 감식에는 보통 STR 분석이 쓰이는데 특정 염기서열의 짧은 반복구간이 개인마다 다른 점을 이용한다. 유전자 감식은 각종 사건 사고의 신원확인, 실종자 확인과 같은 수사에 이용되며 전쟁이나 학살과 같은 오래된 역사적 사건의 유해 감식에도 쓰인다.

DNA 감식은 범죄의 증거로도 체택된다. 감식의 결과 동일인으로 판정되면 충분히 해당 개인을 특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대한민국에서는 유죄 확정된 범죄자의 DNA 시료를 채취하여 등록하고 있다.

DNA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가 원인이 되어 발현하는 질병을 유전성 질환이라고 한다. 유전성 질환은 자식 세대에 유전되는데 우성/열성에 따라 발현이 되지 않고 유전 인자만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널리 알려진 유전성 질환으로는 백색증, 혈우병, 겸형 적혈구 빈혈증, 샤르코 마리 투스 질환과 같은 것들이 있다.




#Article 260: RNA (393 words)


리보핵산(RiboNucleic Acid, RNA) 은 오탄당의 일종인 리보스를 기반으로 뉴클레오타이드를 이루는 핵산의 한 종류이다. 하나의 나선이 길게 꼬여 있는 구조를 지니며 DNA의 일부가 전사되어 만들어진다.

RNA는 단백질을 합성하는 과정에 작용하며 일부 바이러스는 DNA 대신 RNA를 유전물질로 갖기도 한다.

핵염기로 DNA와 달리 티민 대신 우라실을 갖는다.

최근 RNA 스스로 효소와 같은 기능을 가질 수도 있음이 발견되었다. 이것을 리보자임(ribozyme)이라 한다.

RNA는 오탄당인 리보스를 기반으로 사슬구조를 이룬다.

오른쪽 그림에서와 같이 리보스에 있는 다섯개의 탄소에 번호를 붙였을 때 1번 탄소가 핵염기와 연결되며(이 그림의 경우 구아닌) 3번과 5번은 인산에 연결된다. 1번 탄소에 연결되는 핵염기는 구아닌 이외에도 아데닌, 우라실, 시토신이 있다.

인산은 당과 당 사이를 연결하여 사슬을 이룬다.

핵염기는 보통 다음과 같은 약자로 쓰인다.

핵염기는 수소결합에 의해 서로 짝을 이루어 결합할 수 있다. 아데닌은 우라실(DNA의 경우 티민)과 구아닌은 시토신과 상보적인 짝을 이룬다.

RNA는 DNA와 달리 1개의 폴리뉴클레오타이드로 이루어진 단일 가닥이며, 자체적으로 상보적 염기쌍을 형성해 접힘으로써 고유의 입체 구조를 가질 수 있다.

RNA에 존재하는 리보스의 2번 탄소에 결합된 하이드록시기는 당-인산 골격의 인산이에스터 결합을 분해하는데 관여한다. 따라서 RNA는 DNA보다 빠르게 가수 분해되어 덜 안정하다.

RNA는 분자구조와 생물학적 기능에 따라 9가지로 나뉜다.

이외에도 형태에 따라 단일 가닥은 ssRNA, 이중 가닥은 dsRNA라는 약자로 표기하기도 한다.

바이러스와 같은 일부 미생물에서 RNA는 유전자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진핵생물과 다세포생물은 DNA가 유전자의 역할을 하고 RNA는 세포에서 단백질 형성 과정에서 DNA와 리보솜 사이의 통신을 맡는 역할을 한다. 

세포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의 형성에는 RNA, DNA, 리보솜, 효소 등이 관여한다. 단백질의 형성과정은 다음과 같다.

DNA의 유전자의 염기서열에 상보적인 뉴클레오타이드를 순서대로 연결하여 RNA 사슬을 형성하는 중합반응을 전사라 한다.

전사의 과정에는 RNA 중합 효소가 관여한다. RNA 중합효소는 DNA 염기서열 중 전사를 시작할 곳을 찾아 DNA의 이중나선을 열고 두 가닥 중 한쪽을 사용하여 상보적인 염기서열대로 mRNA를 전사한다. 전사의 종료를 알리는 지점까지 도달하면 전사를 마치고 DNA 이중나선을 닫는다.

전사의 시작 지점을 알리는 DNA의 위치는 프로모터()라 하는데 전사 시작을 알리는 특정 염기서열과 첫 번째로 전사될 염기 및 전사를 조절하는 염기서열로 구성되어 있다.

코돈은 mRNA에서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세개의 뉴클리오드 염기 순열이다. 생물의 단백질을 이루는 아미노산은 모두 20종으로 이를 지정하는 mRNA의 코돈은 아래의 표와 같다.

mRNA 순열중 UAA, UAG, UGA 는 아미노산 연결 종료를 지시한다.

tRNA는 75 - 95개의 뉴클레오타이드로 이루어진 작은 RNA 분자이다. 비교적 짧은 RNA 사슬이 접혀있는 모습을 갖고 있다.

tRNA의 주요 역할은 리보솜에 들어온 mRNA에 따라 아미노산을 연결하는 것이다. 아미노산이 20종 이므로 세포 속에 있는 tRNA의 종류도 20종이다.

tRNA의 말단은 아미노산과 연결되어 있고 접혀있는 특정 부분은 안티코돈이 된다. 예를 들어 왼쪽 그림의 페닐알라닌 tRNA의 안티코돈은 AAG로 리보솜에서 mRNA의 UUC코돈과 연결된다. (RNA 핵염기의 상보성은 A(아데닌)-U(우라실), G(구아닌)-C(사이토신)이다.)




#Article 261: 리보솜 (176 words)


리보솜()은 아미노산을 연결하여 단백질 합성을 담당하는 세포소기관으로 리보솜 RNA와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다. 리보솜은 대단위체와 소단위체로 분리되어 있으며, 두 단위체가 결합하여 단백질 합성을 수행한다.

리보솜은 지름이 약 20 nm(200 Å)이고 65%의 리보솜 RNA와 35%의 리보솜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다. 고균, 진정세균 및 진핵생물의 리보솜은 서로 다른 다양한 단백질과 RNA로 구성되어 있다. 리보솜은 전령 RNA의 코돈을 번역하여 운반 RNA에 연결된 아미노산을 배열하여 단백질을 형성한다. 리보솜은 별도의 막이 없는 세포소기관이다.

단백질과 RNA로 이루어진 리보솜과 조금다른 리보자임은 효소처럼 작용하는 RNA분자이다. 이것에 의해 RNA 세계 기원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단백질을 형성하지 않는 동안 RNA는 내부 원형질인(세포기질cytosol) 때에는 RNA로부터 구성되는데, 이는 RNA 세계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리보솜은 1950년대 중반 루마니아 생물학자인 게오르그 에밀 팔라데에 의해 최초로 관찰되었다. 팔라데는 전자현미경을 이용하여 세포를 관찰하던 중 리보솜을 발견하였고, 이 공로로 1974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리보솜이라는 이름은 1958년 리처드 B. 로버트가 명명하였다.

세균의 리보솜은 세포질에 있는 유전자인 오페론을 전사하여 생성된다. 진핵생물의 경우 세포핵 안에 있는 핵소체에서 4 종류의 리보솜 RNA가 만들어지며 리보솜 단백질과 결합되어 리보솜이 생성된다.

리보솜이 mRNA의 코돈을 인식하여 단백질을 합성하는 과정을 번역이라 한다. 리보솜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 생성과정은 다음과 같다.

리보솜에서 일어나는 번역 과정의 에너지원 는 GTP의 가수분해이다.




#Article 262: 바이러스 (685 words)


바이러스(, , )는 다른 유기체의 살아 있는 세포 안에서만 기생, 증식하는 전염성 감염원이자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적 존재(비세포성 반생물)이다. 초현미경적, 여과성 병원체(미생물)이기도 하다. 증식을 위해서는 숙주가 필요하다. 바이러스는 박테리아와 동물을 포함한 동물과 식물에서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생물체를 감염시킬 수 있다. 러시아의 식물학자 드미트리 이바노프스키(Dmitri Iosifovich Ivanovsky)의 1892년 연구가 다루었던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 이래로 진행된 연구들에서 바이러스는 감염된 세포 안에 있지 않거나 세포를 감염시키는 과정에 있는 동안 독립적인 입자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비리온이라고도 하는 이 바이러스 입자들은 DNA나 RNA로 만들어진 유전 물질을 보호하는 두 개 또는 세 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전자 외피와 단백질 외피를 둘러싸는 긴 분자인 이 바이러스 입자들의 모양은 몇몇 바이러스 종들을 위한 단순한 나선형과 타원형 형태에서부터 다른 종들을 위한 더 복잡한 구조까지 다양하다. 대부분의 바이러스 종들은 너무 작아서 광학 현미경으로 볼 수 없다. 평균적인 비리온은 평균적인 박테리아 크기의 약 100분의 1이다.

생명의 진화 역사에 있어서 바이러스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어떤 바이러스는 박테리아로부터 진화했을 수도 있는 세포들 사이를 이동할 수 있는 DNA의 플라스미드 조각들로부터 진화했을 지도 모른다. 바이러스는 진화 과정에서 수평적인 유전자 전달의 중요한 수단으로, 이는 유전적 다양성을 증가시킨다. 바이러스는 유전 물질을 운반하고, 생식하고,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하기 때문에 생명체의 한 형태라고 간주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명체로 분류하는데 필요한 주요 특성(예를 들어 세포 구조)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이 바이러스는 생명체로서의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생명의 가장자리에 있는 유기체 및 복제 물질로 묘사되어 왔다.

루이 파스퇴르는 광견병의 병원체를 찾을 수 없어서 현미경을 이용하여 매우 작은 병원균을 발견해내는 것에 대하여 궁리하였다. 1884년에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찰스 챔버랜드는 박테리아보다 더 작은 구멍을 지닌 필터를 발명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필터를 통해 박테리아를 포함한 용액을 통과시켜 이 용액으로부터 이들을 걸러낼 수 있었다. 1892년에 러시아의 생물학자 드미트리 이바놉스키(Ivanovskii, D. I.)는 이 필터를 이용하여 현재의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를 연구하였다. 그의 연구는 감염된 담배잎으로부터 으깬 잎 추출물이 필터 과정을 거쳤더라도 감염성이 유지되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바놉스키는 이 감염이 박테리아가 만들어낸 독성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 생각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진 않았다. 당시, 모든 감염체들은 필터를 통해 존속되어 영양배지에서 증식시킬 수 있다고 여겨졌고, 이는 질병의 배종설(매균설)의 일부가 되었다. 1898년에 네덜란드의 미생물학자 마루티누스 베이제린크(Martinus Beijerinck)는 이 실험을 되풀이하였고 필터 처리된 용액에 새로운 형태의 감염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는 이 감염체가, 분리된 세포에서만 증식되는 것을 발견하였으나 그의 실험을 통해 그것이 입자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를 contagium vivum fluidum로 불렀으며 이 낱말을 바이러스(virus)라 하였다. 베이젠리크는 바이러스가 자연 상에서는 액체 상태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이 이론은 나중에 웬들 스탠리가 바이러스가 미립자성을 띠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같은 해에 프리드리히 뢰플러와 프로시는 최초의 동물성 바이러스(구제역을 일으키는 아프타바이러스)를 비슷한 필터를 통해 걸러내는 데 성공했다.

두 번째 가설은 그들이 생존을 위해 핵산을 필요로 하는 세포내 기생체로부터 유래하였다는 가설이다. 바이러스가 숙주세포 내로 들어가면 핵산을 비롯하여 바이러스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숙주세포로부터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 가설은 바이러스가 세포로부터 방출되었기 때문에 복제를 위해 숙주세포로 되돌아가야 하는 유전자라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숙주의 종류에 따라서 식물 바이러스·동물 바이러스 및 세균 바이러스(파지)로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생물 증식의 근원이 핵산에 있으므로 핵산의 종류에 따라 분류하게 되었다. 즉, 2종류의 핵산 중에서 어느 것을 가졌는가에 따라 DNA바이러스 아문과 RNA바이러스 아문으로 나뉘며, 이들은 다시 강·목·과로 세분화된다. 바이러스는 증식에 필요한 효소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다른 생물에 기생하면서 숙주가 가진 것을 이용하여 증식한다. 천연두나 수두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나 대장균에 기생하는 T파지는 DNA바이러스이다. 이에 대해, 유행성 이하선염(항아리손님)·홍역·광견병·소아마비·일본뇌염 등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RNA바이러스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데이비드 볼티모어는 바이러스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바이러스는 RNA나 DNA의 유전물질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단백질 껍질(capsid, 캡시드)로 구성되는 매우 간단한 구조를 가진다. 단백질 껍질(캡시드)은 구슬 모양의 단백질(capsomere, 캡소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바이러스는 단백질 껍질 이외에 지질로 이루어진 막을 가지기도 한다. 위의 그림에서 하단의 바이러스가 지질로 이루어진 층을 가지는 Enveloped Virus(외피로 둘러싸인 바이러스)이다. 이 지질층은 숙주세포의 세포막에서 유래한 것이다.

바이러스는 일반적인 영양 배지에서는 배양할 수 없지만 살아 있는 세포에서는 선택적으로 기증 ·증식한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바이러스를 증식시키기 위해서, 미생물학자들은 1900년대 초, 페트리 접시에서 자라는 세포층에서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방법(세포배양)을 개발하였다. 발견 초기에는 누구나 바이러스가 무생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생물학자들 사이에서는 바이러스가 생물인지 무생물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이는 바이러스가 통상적인 세포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고전적인 생물학 차원에서 무생물(비생물)로 분류하기도 했지만, 생물과 무생물의 특징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 단계로 분류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바이러스의 복제 경로 또는 생활환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숙주 세균을 파괴하는 바이러스. 항생제의 급격한 사용으로 슈퍼박테리아가 탄생했다. 하지만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하면(파지 요법)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파지 요법 연구가 중단되었지만,항생제 때문에 요즘 다시 파지 요법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Article 263: 김성수 (언론인) (6299 words)


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 ~ 1955년 2월 18일)는 대한제국의 교육인 겸 언론인·기업인·근대주의 운동가였으며, 대한민국 초기 정치인, 언론인, 교육인, 서예가였다. 전라도 고창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한성부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전라도 부안 줄포에서 성장하였다. 본관은 울산이며 조선조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이다. 자(字)는 판석(判錫), 아호는 인촌(仁村)이다.

사후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한편,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언론계 친일파로 수록된 이후, 대법원에서 거짓서훈으로 인정, 2018년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박탈되어 논란이 되었다.

김성수는 1891년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 부안면 인촌리에서 동방 18현의 한 사람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으로 출생했다. 당시 군수를 역임한 낙재 김요협(金堯莢)의 둘째 아들 김경중(金暻中)과 장흥 고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 김기중(金祺中)의 양자가 되었다. 어릴 적 이름은 판석(判錫)이었다.

김경중과 장흥 고씨는 인촌 위로 아들 셋을 두었으나 모두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병사를 하였다. 따라서 그가 사실상의 장남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다시 아들을 낳기를 갈망하여, 유교를 하는 집안임에도 어떤 중의 말을 따라 고창군 흥덕(興德)의 소요암에 가서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생모 장흥고씨의 꿈에 개천에서 한뼘이나 되는 새우가 헤엄치는 것을 보고 뛰어들어 치마폭으로 잡아 가지고 언덕에 올라와보니 길이가 석자나 되어보이는 잉어였다고 한다.

유년기에 큰 부자였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 김기중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가계상 문정공파(文正公派) 신평파(莘坪派)에 속하는데, 파조 김계현(金繼賢)은 비변랑(備邊郞) 김익서(金翼瑞)의 차자로 하서 김인후의 6대손이다.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역시 김인후의 후손으로 먼 일족이다.

큰어머니이자 양모였던 전주 이씨는 조선 태종 이방원의 차남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경의(李景儀)의 딸이었다.

그의 가계는 하서 김인후의 선조인 민씨 부인이 태종비 원경왕후의 친족으로 태종 때 외척을 제거하자 화를 피하여 낙향,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낙담(落膽)하면서부터 전라남도 장성군에 새 본거지로 삼아 가문이 융성하였다. 그 뒤 하서 김인후가 다시 관직에 올라 한성(漢城)에 거주하였으나 다시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내려와 이후 대대로 거주하였다. 이후 그의 증조부 김명환(金命煥)이 자신의 셋째 아들 낙재 김요협을 전라북도 고창군의 거부인 연일 정씨(延日 鄭氏) 정계량(鄭季良)의 무남독녀와 혼인을 맺음으로써 처가인 전라북도 고창군에 정착하게 되었다. 증조부 김명환은 노인직으로 통정대부 첨지 중추부사가 되었다.

김요협은 관직에 진출하여 선공감감역 등을 지냈으며, 처가의 유산을 물려받아 재력을 형성하였다. 할아버지 김요협은 인촌 김성수의 가계를 실질적으로 일으킨 사람이라 한다. 감역으로 시작하여 참봉, 봉사, 도사, 별제, 주부 등의 경관직을 지내고 화순군수, 진안군수, 군위군수 등을 지냈으며, 처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1,200석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요협은 자신의 두 아들에게 유산을 분배할 때 장남인 김기중에게는 1천 석의 농토를, 차남인 김경중에게는 2백 석을 물려주었으나 이재에 능한 김경중은 형보다 더 많은 토지를 갖게 되었다 한다. 김요협의 두 아들인 김기중과 김경중 역시 관직에 진출하여 군수를 지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의 부의 축적과정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는데, 그의 아버지와 생부 형제가 벼슬길에 있을 때 관권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했고, 심지어는 중국·일본과 밀수를 하여 돈을 모았다고 한다.

조부 김요협은 전북 고창 부안면에 집을 짓고 거주하였고, 김기중과 김경중 형제는 줄곧 그 곳에서 거주하였으며 김성수 역시 조부가 세운 집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의 김성수는 조부 김요협 내외와 부모 김기중 내외, 생부모 김경중 내외와 함께 거주하였다. 양가와 생가는 한 마을에 울타리를 하나 두고 있었다. 할아버지 대에 가세를 일으켰지만 할아버지 김요협은 근검과 절약을 강조하였고 사치스러운 모습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맏손자인 인촌에게만큼은 회초리를 들기도 했다.

생가와 양가는 한울타리를 둔 집으로, 어린 김성수는 밤중에 생가를 찾아가곤 하였다. 그러나 생모(生母) 장흥고씨는 어머니(양어머니 전주이씨)의 허락을 받아오기 전까지는 안 된다며 단호하게 돌려보냈다. 유년기의 김성수는 장난기가 심한 소년이었다 한다. 엽전을 삼켰다며 병이 나으려면 호두를 먹어야 된다고 하였다가, 집안 일가가 호두를 가져오자 엽전을 먹은것은 내가 아니라 내 주머니였노라고 하기도 하였다. 소년기에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석재 서병오의 권유로 아호를 인촌(仁村)이라 지었다. 7세때까지 집에서 부모에게 글을 배우고 어머니에게서 선행가언을 배우며 한문교양을 쌓다가 7세 때 훈장을 모셔와 사설 서당을 차려서 한학을 배우게 되었고, 동리 아이들을 함께 공부하게 하였다. 소년 판석은 어린아이임에도 동네 아이들 중에 공부를 하고 싶으나 생활이 어려워 못하는 아이들을 불러다가 같이 공부하게 하였고 수업료와 지필묵도 사서 나눠 쓰기도 했다. 형편이 어려운 동리 아이들이 많았음에도 그는 아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비하, 모욕을 주지 않았다.

그는 유년기때 부모로부터 양반이 갖춰야할 예의범절과 한문 등을 배웠다. 9세 무렵 생부 김경중 내외에게 다섯째 아들이자 친동생인 김연수가 태어났다. 한편 백부 김기중의 소실인 공주김씨에게서도 서자이자 그의 서제인 김재수가 태어난다.

서당에서 그는 명심보감(明心寶鑑), 소학(小學),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고 이어 자치통감과 공자, 맹자, 중국의 역사 등을 배웠다. 이어 당시(唐詩), 유학철학 등을 공부하여 성리학을 익히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사마천의 사기열전과 삼국지를 탐독하였다. 풍족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사치를 모르고 성장하였다.

그중에서도 차분하고 내성적이었던 송진우는 그의 사람됨됨이를 알아보고 깊은 신뢰를 하게 된다. 송진우는 조선총독부와 협상하는 일과, 김성수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자신이 대신 나서서 처벌을 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등 그를 앞장서서 도와주었다고 전해진다.

영학숙 재학 중 인촌 김성수가 먼저 초립동이인 송진우에게 허교를 제의했다.

다른 사람들은 통성명만 하면 허교하고 자네니 내지 했지만 고하와의 허교는 상당한 시일을 요했다. 그로부터 훨씬 뒤의 일이었다. “이제 우리 허교하지” 하고 송진우가 김성수를 향해 허교를 제의했다. 이 무뚝뚝한 소년 고하의 제의에 인촌은 무척 반가웠다.

후일 김성수는 송진우의 첫인상을 두고 이르기를, 쉽게 속마음을 열지는 않았으나 심지가 깊은 청년이라고 회상하였다.

이때 만난 송진우는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평생을 그와 함께 언론, 사회 활동, 정치 활동을 하는 정치적 동지가 된다. 그 뒤 그는 송진우와 함께 가족 몰래 비밀리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인 상인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일본 상인들이 면제품, 농기구, 냄비, 석유, 물감, 비누, 유리그릇, 거울, 가위, 사탕 등을 가게에 들여오거나 차에 싣고 산간벽지를 다녔다. 일본 상인이 싣고온 문물에 호기심을 보이자 할아버지 김요협은 그런 물건들은 삼강오륜을 해치는 이물(異物)이라 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게 했으나, 호기심이 많던 김성수는 가게 같은 곳에 다니며 이것저것 살펴보았다. 한편 부산에서 온 박모라는 이와 어울려 화투에 빠졌고, 개화문물을 구경하느라 경성을 돌아다녔다. 그가 지방에서 온 건달과 어울린 것을 알게 된 할아버지 김요협은 대노하여 가족을 소집하고, 나라의 형편이 어떠한데 왜놈의 놀음에 정신을 팔고 있다며 김성수를 마당에 엎드리게 한후 볼기를 쳤다.

청년기에 김성수는 문맹 백성들을 보며 스스로 먼저 신학문을 배우고 그것에 기초해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동포에 전수시킴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켜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신념 하에 동경유학을 결심 했다. 그는 무식함과 무지함이 조선의 멸망의 원인이라 확신하고 먼저 배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계몽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그의 유학을 반대하였다. 1908년 10월 상투를 단발하고, 상투를 자른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사죄의 편지를 부모에게 남기고 송진우와 함께 비밀리에 일본(日本)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가정 사정 때문에 백관수는 중도에 포기했지만 김성수는 송진우와 길을 떠났는데, 집안에서는 병환을 핑계로 노비를 보내 그를 불렀으나 자신을 부르려는 계획임을 간파하고는 하인을 돌려보낸 뒤 급히 전라북도 옥구군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일본 도쿄에 도착한 김성수는 도쿄 시내에 하숙하며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敎)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영어와 수학 등을 배웠는데, 일본어 실력이 다소 부족했던 김성수는 별도의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일본어 회화를 배웠다. 고향에서 부쳐주는 학비 외에 시내에서 송진우와 함께 점원 등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과 학비를 조달하였다. 1909년 4월 송진우와 함께 긴조중등학교(錦城中等學敎) 5학년에 편입학했다. 이곳에서 영어를 주로 집중해서 배웠으며, 1910년 3월 긴조중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 4월 김성수는 역시 송진우와 함께 일본 동경의 와세다 대학교(早稻田大學敎)에 입학하였다. 이후 와세다 대학교 예과(豫科)에서 수학하던 중, 8월 29일 대한제국이 강제로 병합되자 충격을 받은 송진우는 귀국하였고, 김성수는 홀로 일본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다. 1911년 와세다 대학교 예과를 마치고, 와세다 대학교 본과에 입학, 정경학부에서 공부했다. 김성수는 집안에서 부치는 학비 등으로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하였다. 와세다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은 설산 장덕수, 해공 신익희, 민세 안재홍, 가인 김병로, 낭산 김준연 등이었다.

공부에만 몰두하지 않고 그는 정치강연회가 있으면 먼길이라도 찾아서 참석하였고,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제창한 비폭력 무저항운동인 간디이즘에 감격하여, 생활에 있어서는 간디이즘을 신조로 하여 물품과 물, 전기 등을 절약했고 나를 위한 소비를 최소한도 줄이고 그 남은 것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희사하였다.

유학 당시에도 그자신 역시 유학생의 신분으로, 김성수는 불우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학생들을 찾아 지원해주었고, 대신 학비를 납부해 주기도 하였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한 뒤 그해 7월 귀국하였다. 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승문에 의하면 인촌의 도움을 받은 확인된 사람만도 유학생 50여명을 포함 73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때 김성수는 일본에서 산업자본의 골간이 되는 부분들을 눈여겨 봐둔 뒤, 기업·학교·언론 등을 통해 현실적인 힘을 마련하겠다 고 다짐하였다. 당시 식민치하의 조국에는 자원이 빈약하다는 것을 인식한 그는 구국운동의 방략으로 그는 세가지 목표를 설정 '인재배양'(人材培養), '경제자립'(經濟自立), '언론창달'(言論暢達)이라는 목표를 수립하였다.

이때 경영난에 빠졌던 중앙학회가 그에게 중앙학교의 운영을 맡아달라고 요청한다. 1915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있던 중앙학교로부터 운영을 맡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왔고, 김성수는 그 제안을 수락하였다. 그의 생부모는 지나친 모험이라고 반대하였으나 양아버지 김기중만이 그의 의견에 처음부터 지지하였다. 어렵게 생가 부모를 끈질기게 설득 인수 비용을 얻어내 1915년 4월 경영난에 허덕이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냈다. 중앙학교에 편입학생이었던 이희승은 '인촌과 만남으로서 학교가 교세가 뻗어 나가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안창호의 영향을 받은 그는 교육 계몽활동에 종사하면서, 교육과 문화의 힘으로 실력을 키워서 독립을 이룩하자는 '실력양성론'을 강조하였다.
중앙학교의 인수와 동시에 자신도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경제학 원론 교과목을 가르치면서 교재가 없었던 터라, 김성수는 학생들에게 일일이 필기를 시키고 이를 꼼꼼히 지도하였다. 어려운 고학생들의 장학사업도 지원하였다. 1915년 9월에는 부모를 여의고 학비곤란으로 귀국한 이광수를 후원하여 일본으로 유학시켜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시키기도 했다. 이광수는 당시 형편상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이때 김성수는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본 사람들에게 식민통치를 당하는 것은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며, 알려면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이 자주독립을 할 수 있다. 지금 유행하는 학문이 계속 빛을 보리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20년, 30년 후에는 바뀔 수가 있다. 문학보다는 과학에 관심을 가지라.'고 학생들에게 훈육하였다. 그의 감화를 받은 학생 정문기는 후에 수산학자가 된다. 장로인 박관준으로부터 개신교 입교를 권고 받았으나, 그는 기독교에 관심은 있다고 대답하였다. 일부 교인들의 끈질긴 선교노력에 일시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기는 하였으나 신앙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또한 이론 교육 외에 체육활동에도 관심을 갖고 윤치영이 운영하는 중앙학교 야구부, 축구부의 활동에도 적극 지원했다.

식민 치하의 조선 백성들이 일본제 무명, 비단 등을 수입하며 일본제 제품이 한국에 유행던 시절, 마하트마 간디의 경제 자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민족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국내자본 육성 계획을 세웠다. 김성수는 중앙고보의 학생들로 하여금 국산 무명옷을 교복으로 입게하였다. 1917년 방직기술자인 이강현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제 당국은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으나 결국 그의 사업을 승인해주었다. 1917년 10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광목제조 회사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윤치소 등으로부터 인수하였다.

일본의 방직회사들이 조선에 진출해 있는 상황에서 그가 시장진출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창안해낸 것은 조선인 지사들을 주주로 공모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외부 자본의 침투는 민족의 경제를 갉아먹고, 외환의 유출을 촉진한다는 점을 들어 조선인 인텔리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상하이에서 한인청년단이 1919년에 열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측 대표자를 파견한다는 것을 접하고, 범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각계의 참여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김규식이 자신의 활동을 위해서는 누군가는 호응하여 사건을 벌여야 된다고 하자 이를 입수한 그는 송진우와 함께 천도교와 기독교 세력의 포섭과 협력을 주선했다.

한편 김성수는 자신의 거처를 독립지사들에게 제공, 이승훈·한용운·최남선·최린 등이 그의 자택에서 3·1 운동을 준비했다.

그는 중앙학교를 인수할 때부터, 한양이라는 이름을 미리 짓고 전문학교(전문대학)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3.1운동으로 계획은 무산되고 차선으로 언론사 설립을 계획한다. 그러나 그는 조선총독부 당국에 비협조적이었고, 총독부 당국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출범 이후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해 익명으로 임정에 후원금을 비밀리에 송금하였다. 그의 자금송금은 후일 안창호, 김구 등이 알게 되었다. 익명으로 임시정부에서 밀파한 독립단(獨立團)이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 중, 한번은 그의 서울 계동 자택에 찾아와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하였다. 그는 대답없이 자신의 금고문을 열고속을 뒤적거리며 일부러 객에게 알린 뒤, 자신은 소변보고 온다 하고는 자리를 비켰다. 독립단원들은 품에 안을 만큼의 자금을 품은 뒤 사라졌다.

김성수는 동아일보 사장이던 고하를 통해 김좌진 장군에게 3백 ~ 4백 명 규모였던 독립군의 무기구매와 훈련 등에 쓰도록 비밀리에 황소 백마리를 살 수 있는 1만 원정도씩 네 차례나 군자금을 보내주었다.

미국과 일본의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옷감의 생산량은 증가하였다. 이는 그가 동시에 경영하는 의류회사 중앙상공의 의류 생산과 다른 의류업체에 납품하는 물량 역시 증가하였고, 3년만에 소수에 불과하던 국내 옷감, 의류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했다.

한편 김성수는 경성방직의 초대사장에 박영효(朴泳孝)를 영입하였는데, 이는 그가 당대의 거물친일파 박영효를 끌어들인 것은, 박영효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총독부와 조선 내 유지세력들을 사업에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풀이할 수 있다. 경성직뉴를 인수하고 경방을 창립키 위해 인촌(仁村)은 설립허가서를 총독부에 제출했으나 그들은 당장 허가를 내주지 않고 질질 끌었다. 그 이유는 조선인의 방직회사 건설로 그때까지 폭리를 취해 오던 일본계 방직회사가 조선내의 시장을 빼앗길 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더구나 1919년 그 해에는 일본의 재벌이 부산에 조선방직회사를 설립하던 해여서 경방이 맞서게 되면 불리한 여건이었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상황이 어려워서 늘 사재를 털어서 보충해 나가는 중에 1926년 이후에 동생 김연수가 경영에 능하고 재능이 있어서 성장시겼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일본계 언론의 활동과, 외신 기자들의 출입을 본 그는 국내 언론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20년부터 언론사 창간 활동을 준비한다. '민족언론'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그는 송진우와 서울 시내에 지인을 통한 홍보활동으로 주주와 창간발기인을 모은 뒤 1920년 4월 1일 양기탁·유근·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발기인 대표로서 창립을 주관했다. 한때 동아일보의 기자로 활약했고 한겨레 신문을 창간했던 언론인 송건호는 당시 발기인 대표였던 그가 20대의 청년이라는 사실이 놀랍다고 평가하였다. 전국 각지를 다니며 홍보를 하여 각지의 지역유지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20년 동아일보 주필로 활동 했다. 일제의 민간지 발행허가 계획에 따라 창간된 동아일보는 근본적으로는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했다고는 하나 식민지시대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기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면 조선인이 스스로 자각, 깨우쳐서 실력을 양성해야 되는 것이었다. 기술을 배워서 익히고, 식품과 생산품을 자체 조달할 수 있어야 되며, 경제력을 바탕으로 실력을 양성해야 된다고 봤다.

특히 김성수의 개량주의 노선은 이같은 동아일보 노선의 사상적 골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1920년대 초반부터 총독부에 대해 조선인 자본의 보호를 요구하였고, 김성수는 1922~1926년 기간에 사이토 총독과 13번이나 만났다. 신문사 정착과 사회활동을 위해서는 총독부의 허가를 얻는 일이 필요했고, 조선인의 시각에서 조선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언론이 몇 개 쯤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이유로 총독부 공보국을 설득하였다.

송진우 출감후 김성수는 그와 함께 동아일보를 경영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송진우와 손잡고 단군릉 수축, 이순신 장군의 유적보존 및 사당 건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1920년 4월 15일 조선총독부는 평양에서의 반일시위를 보도했다는 이유를 달아, 창간 직후의 동아일보에 판매와 배포를 금지처분하였으나 김성수는 중단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이후 총독부에 의해 기사 삭제, 압류, 배포금지, 정간 등 끝없는 탄압을 받아야 했다. 김성수는 송진우, 장덕수와 함께 수시로 총독부 공보담당 부서에 출입하며 보도내용을 해명해야 했다.

기독교선교사들의 농촌 계몽 운동에 자극을 받은 김성수는 1930년부터 농촌 계몽 및 문맹자 교화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지원하였고, 1931년부터는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브나로드 운동을 추진하였다.

김성수가 세운 동아일보에서 외국상인·외국상품 배척을 주장하던 시기에, 역시 김성수가 세운 경성방직에서는 일본 기업과의 경쟁을 피해 북부지방으로 진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에서는 북진정책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지만, 실상은 일본기업과의 경쟁을 피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실력 양성이 독립의 길이라고 생각한 그는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배우고 깨달아야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곧 민족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며 조선에서 나는 물산을 구매해줄 것을 호소하며, 국산품 애용 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국산 애용을 권고하면서도 경성방직 제품을 홍보하거나 광고하지는 않았다. 그의 국산 제품 애용 운동은 호소력을 얻어 조만식, 송진우, 이상재 등이 동참했다.

경방에서 22년 3월에 출시한 태극성 광목은 조선 기술로는 최초로 대량 생산된 광목을 출하하였다. 이 때에 신제품의 상표인 태극성표(太極星標)의 태극 마크가 태극기라는 이유로 그를 소환하여 추궁하였다. 그러나 그는 상표의 가운데 둥근 원은 회사의 무궁한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고, 원 가운데의 S자는 영문의 방직을 뜻하는 'spinning'의 첫머리를 따서 방직회사를 뜻하며, 주위의 별8개는 조선팔도를 나타내어 광목이 조선팔도에 퍼져나가 잘 팔려 달라는 소원이 들어 있을 뿐이라고 답변하고, 이 상표가 아무런 하자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특허국의 허가를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항변하자 조선총독부는 그를 되돌려보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에 감화된 그는 간디와 서신을 주고 받으며 자문을 구하였고, 1926년 10월의 편지에서 그는 간디에게 식민지하 조선을 위한 고언을 자문, 간디는 1927년에 보낸 답신에서 조선은 조선의 것이 되길 바란다는 답신을 발송하였다.

농촌지역은 문맹과 기아, 질병이 만연하였으므로 농촌을 계몽하겠다는 이상을 품은 대학생들이 방학, 혹은 휴학기간을 이용해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최용신, 심재영, 심훈 등이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했고, 사회주의자들도 브나로드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학무국과 경무국으로부터 반일사상 고취를 의심하여 방문, 소환, 전화 항의 등을 받았으나 별다른 혐의접이 없어 브나로드 운동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이는 1938년 일제 당국의 탄압을 받고 중단되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대학의 농촌 봉사활동 (농활) 운동으로 이어진다.

한글학회 학자들에게 조용히 자금도 대주고 지원해 주었고, 연세대 한글 학자 외솔 최현배는 '인촌을 울다'라는 기고를 통해서 그내용을 말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창간 후에는 문맹퇴치에 목표를 두고 많은 기획들을 실천했다. 한글을 좀더 아름답게 문법도 발전시키도록 한글학회 학자들과 연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중에 일제 식민정부는 많은 압박을 가했지만 지혜롭게 대처도 하고 폐간도 방어해 나가면서 우리나라와 민족의 문화적 지도자로서 고뇌하면서 나라를 지켜나가셨다. 일본 내선일체 정책인 창씨개명에는 끝까지 동조하지 않고 일본 이름만은 끝까지 만들지 않았다. 늘 드러나지 않게 은미하게 교육인으로서 지내고 싶어했으며 고려대학교는 직접 경영도 하면서 학교에 애착을 갖고 돌보셨다. 세계의 명문대들을 둘러본 후에 고려대학교 건물 모양을 듀크대학교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그 모습으로 미학적으로 학교건물도 짓고 손수 나무도 사재로 심고 가꾸면서 교육인으로 살고자 했다. (참고문헌:Choong Soon Kim.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A Life History of Kim Sŏngsu 1891-1955.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8)

그해 6월 보성전문학교 제10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이용익이 창설한 이래 계속 재정난을 겪다가 손병희가 맡았으나 여의치 못해 그가 인수하게 된 것이며, 1946년 종합대학 고려대학교(高麗大學)으로 승격하여 오늘날의 고려대학교가 되었다. 보성전문학교 인수 이후 그는 교사를 정비하고 건물을 신축한다. 부친 상중에도 그는 친히 현장을 와서 현장감독들을 독려하곤 했다. 1934년 4월 길에서 문일평을 만났다. 일본 유학시절 도쿄에서 한 집에 하숙하였고, 함께 하숙집 주인의 딸을 연모하기도 했다. 김성수는 문일평의 손을 잡고 어찌하여 세상 일이 여기에 이르렀소, 지조를 지키는 사람은 끝내 보기 어려운 것이오. 라고 탄식했다. 그는 문일평 등에게도 따로 생활비를 지불하기도 했고, 안창호 등에게도 자금을 보냈다. 1934년 동생 김연수와 함께 해동은행의 대주주였다. 늘 드러나지 않게 은미하게 교육인으로서 지내고 싶어했으며 고려대학교는 직접 경영도 하면서 학교에 애착을 갖고 돌보셨다. 세계의 명문대들을 둘러본 후에 고려대학교 건물 모양을 듀크대학교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그 모습으로 미학적으로 학교건물도 짓고 손수 나무도 사재로 심고 가꾸면서 교육인으로 살고자 했다.(참고문헌:Choong Soon Kim.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A Life History of Kim Sŏngsu 1891-1955.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8)

보성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그는 조선어(한글)와 한국사, 교련 과목을 의무,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도록 지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그가 조선어(한글)와 한국사, 교련을 필수 이수 과목으로 지정한 것을 두고 불령선인 양성 목적이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 트집삼았으나 그는 조선의 역사와 언어를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며 다른 뜻은 없다며 학무국 측을 무마하였다.

그러나 항일독립운동의 온상이자 불령선인의 양성소, 불순언론으로 지목되어 보성전문학교와 동아일보가 총독부의 압력으로 경영난에 빠지게 되자 그는 한강 철교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은 그의 투신기도를 접한 조선총독부 경찰의 제지로 실패한 적이 있었다. 경영난으로 다시 한번 한강에 투신자살을 기도하였다가 그의 투신 기도를 누군가 목격, 전화연락으로 접한 친구 박용희(朴容喜)와 장현식(張鉉軾)이 달려와 그를 말리고 각각 자산 500석을 희사하여 경영난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김성수는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았고, 동아일보는 수시로 폐간을 당하여 마찰을 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기부터 일제 식민지 정책이 중일전쟁 (1937-1945)에 때맞춰서 민족말살정책으로 펼쳐지면서 더 많은 압제정책으로 한국의 지성인들을 강압적으로 동원하는 과정에서 암흑기였지만 독립을 멀리 내다 보시면서, 일본 식민지 정부가 우리나라 정부였기 때문에 강경하게 맞서지 않고 온화하게, 거부하지 않고 일본의 강압적인 동원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일제 식민정부는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사람들을 더 압박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에 김성수는 학병을 모집하는 연설을 하도록 강요 받았고 전쟁물자 지원에도 앞장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일장기 말소사건의 후유증으로 동아일보는 강제폐간 당했다가 1937년6월 3일 복간하였다. 동아일보는 네 번 강제 폐간 당했고, 김성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불려가 수차례 협박과 멸시,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한편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된 직원들의 생계도 살피고, 그들에게 생활비도 지불하여 주었으며 복직시킬 수 있는 직원들은 다시 복직 시키고, 불가능한 경우에는 다른 일자리를 주선. 추천하여 주기도 했다. 그래서 해고당한 직원들도 그에게 앙심이나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국내 각지를 순찰하던 그는 경기도 전곡(全谷)의 농장을 거쳐서 경성부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그가 1930년 12월 30일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보낸 편지가 일부 공개되었다.

그러나 김성수의 성명으로 발표된 것이 자의에 의한 발표인지, 단순 명의 도용인지 여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후일 1946년 한국독립당 당원이었던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 교육 부문에는 김성수의 명의로 된 칼럼으로 인해 '선(先)항일, 후(後)친일'인사로 분류되어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군상》에 수록된 것은 물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 대한민국 정부기관 『친일진상반민족행위규명위원회 보고서』에도 친일파로서 수록되었다.

반면, 김성수는 이광수나 서정주와는 달리 총독부의 창씨개명(創氏改名) 요구에 대해서는 끝까지 거부했고, 일제로부터 훈장이나 작위를 받은 경력은 없다. 김승학의 《친일파 명단》에 김성수는 警察(경찰)의 迫害(박해)를 면하고 身邊(신변)의 安全(안전) 또는 地位(지위), 事業(사업) 等(등)의 維持(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 다닌 者로 유억겸과 함께 분류되었다. 1937년 도산 안창호가 고문후유증과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중일 때 안창호의 가족들이 그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했을 때 김성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거절하였다가 뒤로 몰래 사람을 보내 거액의 자금을 도산 안창호에게 전달했다는 증언이 있다. 유진오는 그의 회고록 《양호기》에서 김성수의 이름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학도병' 기사는 매일신보사 기자 김병규가 유진오와 상의한 뒤에 대필하여 승인을 받은 글이라 주장하였다.

한민당 내에서도 일부 찬탁 주장이 나왔으나 그는 반탁노선을 주장하였다. 1946년 1월 한반도 내 총선거를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는 한민당 내에서도 미소공위에 반대했고, 공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덕수와 갈등하였다.

김성수가 개인 김성수로 그치지 않고 '김성수 계열'이라고 하는 하나의 집단을 형성한 데는 김성수 개인의 독특한 개성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예전부터 잘 알고 지냈던 송진우를 동반했고, 이후에도 백관수, 장덕수 등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김성수는 주위의 유능한 젊은 지식인들에게 재정 지원을 해주었다. 결국 그는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하여 해방 이후 대표적인 우익 정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을 창당할 수 있었다. 송진우와 백관수, 장덕수 등은 모두 한국민주당의 중요한 대들보가 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놓고 한국민주당은 당론으로 찬성하여 반대하자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 중 장덕수와 허정은 미소공위 찬성론을 주장했고, 그는 미소공위 참가에 반대하였다. 미소공위 참여를 놓고 갈등하던 중 그는 미소공위에 대한 입장 표명을 유보한다.

김성수는 임시정부의 법통 아래 이승만·김구·김규식의 삼자 합작에 의한 독립정부의 실현을 정치목표로 설정했다. 이를 위해 한민당과 한독당이 통합함으로써 민족 진영이 대동단결해야 한다. 는 것이 그의 정치적 신념이었다. 그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삼자회담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김성수는 자신이 이끄는 한민당과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합당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승만을 고문으로 하며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로써 양당의 합당이 이루어지는 듯하였으나 끝내 입장차이로 결렬되었다.

송진우가 암살되면서 당을 사실상 떠맡았고, 임시 당수로 원세훈을 천거했으나 반발이 있자 그는 당수직은 장덕수에게 맡겼다. 그러나 장덕수마저 암살되자 그는 한민당의 당수직까지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수직을 원치 않았고, 조소앙 등과 통합을 추진했다. 또한 김규식과도 교섭, 그에게 당수직을 제의했으나 김규식은 한민당 당수직을 거절했다.

한편 남북협상론이 대두되자 그는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하였다. 조소앙 등은 방북을 중단할 것을 설득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8년 3월 5일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소집한 민족지도자 33인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4월,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긴 하지만 한반도에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 5월 10일 국회의원 총선거에 참여를 결정한다.

해방 직후 한민당의 당수인 송진우와 장덕수, 근로인민당수 여운형 등이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거나 신탁통치, 미소공위 개최에 찬성하다가 암살당했다. 공주군 갑부인 김갑순의 사위 윤명선은 강도의 침입으로 피습, 절명했다. 김규식과 안재홍 역시 테러와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박헌영과 김원봉은 전국 각지에 거처를 마련하고 거처를 옮겨다녔다. 혼란의 와중에도 일제 강점기때부터 가택에 사설 경호원을 고용해 두고 있었고, 미군정이 추가로 보낸 병사들의 경호를 받은 그는 안전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보고서 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 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 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암살 기도 가 미수로 끝났다. 미군정 하지 중장에게 김규식이 일방적으로 김구가 송진우도 암살하고 김성수도 암살하려고 했다고 다른 사람들이 영어 못하는 점을 악용해서 보고 했으나, 김구가 그랬는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이때 그는 김구나 한독당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지만, 한민당측은 김성수 암살 기도의 실패 이후 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된 뒤 1948년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직을 잠시 지낸 것과 1951년 5월부터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부통령직을 맡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결코 앞에 나서지 않았다. 김성수는 종교와 가깝게 밀착하지 않았다. 근대 이후 한국의 정치 세력들과 정치가들은 대부분 종교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 즉, 김구와 김성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개신교, 천주교, 유교, 불교 등 종교와 연관을 맺고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새 정부가 수립되면 김구, 김규식 이외에 총리 내정자로 지목된 것은 그였다.

정부수립 직전까지만 해도 내외의 관측은 그가 국무총리 임명이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7월 22일 이윤영을 총리서리로 내정했고, 이는 한민당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김성수는 내각 책임제를 가장 이상적인 정치 제도로 생각했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가치관과 권위주의적인 사고관이 아직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대통령이 절대권력을 행사하면 독재를 할 수 있다고 봤다. 조선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그때가지도 생존하고 있었고, 대통령을 황제나 왕으로 생각하는 국민들도 존재했다. 그는 이 점을 들어 대통령 중심제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그는 이승만을 찾아 내각 책임제를 수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정부 수립 초기, 이승만의 반대가 거세자 그는 혼란 수습을 위해 일단 자신의 이상을 뒤로 미루고, 한민당원들을 손수 설득하였다.

일단 한민당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내각제가 이상적인 정치 체제라는 그의 신념은 바뀌지 않았다.

김성수는 자신과 한민당원 전 의원이 이범석의 총리인준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각료 8석을 요구했다. 이범석은 당시 12개 부와 4개 처의 조직에서 장관 8석은 지나친 요구라고 했으나, 곧 김성수의 제의를 수용하였다. 이범석은 국방부장관 직을 겸하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그는 이승만에게 한민당에서 지명한 인물을 천거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이 생각해둔 인사가 있다 하여 그의 부탁을 받은 이범석의 8명 중 3명만을 입각시켰다.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그 초안을 김성수에게 보여주어야 했는데, 제86조의 농지개혁 조항이 문제였다. 고려대학교의 교수이던 유진오가 그를 찾아 '농지 개혁이 공산당을 막는 길'이라고 설득하였다. 주변에서는 반발이 있었으나 김성수는 쾌히 유진오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민족진영강화위원회에 참여하면서 그는 김규식에게 민주국민당을 맡아줄 것을 청하였으나 김규식은 이를 거절한다. 1950년 5월 그에게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라는 권고가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부덕함을 이유로 대통령 후보직을 사양하였다.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서울시내에 은신해 있다가 정부가 있는 대전으로 남하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를 따라 대전에서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부산피난지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몸수색을 당하였으나 한번도 불쾌한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전쟁중이던 1952년 5월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한국민주당에서 이시영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때 러닝메이트가 되어 부통령 후보에 출마하였다.

김성수는 처음에 부통령직 제의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승만정부의 실정(失政)에 대한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김성수는 그러나 동료들의 끈질긴 간청으로 부통령직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성수는 부통령이 되자마자 이승만이 신성모를 주일본한국대사로 임명하는 것을 정실인사라며 반대하여 이승만과 충돌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이승만이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발언을 한 것도 정치도의를 어긴 것이라 여겼고, 이승만과의 사이에 점차 불협화음과 감정이 생겨나게 되었다.

부통령 재임 중 김성수는 자신에게 '폐하'라고 부르는 관료를 보고 충격을 받고, 고관이나 고위장성에게 흔하게 쓰이던 '각하'의 칭호를 없앴다. 부통령 당선 후 대통령 이승만을 견제하다가, 인사문제 등으로 이승만과 갈등하던 중 1952년 6월 이승만은 재선 목적으로 헌법을 개정했다. 또한 이승만을 신적으로 미화하고 맹목적으로 추앙, 추종하는 자유당 부하들을 질타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다른 한 사람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행위를 혐오하였다. 자신을 과도하게 추켜세우는 한민당, 민국당원들에게도 자제하라고 경고를 주었다.

이승만의 재선 목적으로 헌법이 개정되면서 부산 정치파동 사건이 터지자, 김성수는 이 사건에 대해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동'이라면서 강하게 반발하였고 부통령 퇴임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던 5월 29일, 이승만을 규탄하는 장문의 사퇴서를 발표한 뒤 중도 사임하였다. 이후 부산의 국제구락부에서 열리기로한 반독재민주구국 선언대회에 참석하여 그는 '민주주의 수호만이 대한민국을 지키는 길'이라는 내용을 준비하여 연설을 하려 하였으나, 이정재를 비롯한 정치폭력배들이 회의장에 난입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제출한 사표는 7월 6일에 수리되었다.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사람을 보내 공산당이 아니라는 성명서를 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대한민국의 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봉암은 굴욕감을 느꼈지만 순순히 받아들여 인촌이 그리 하기를 원한다면 내가 그리하겠다. 하고 '자신은 공산당이 아니다'라는 성명서를 언론에 발표했다.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려던 조봉암은 김성수를 찾아가 자신이 전향했음을 거듭 확인시키기도 하였다. 조봉암과의 면담에서 그가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상이라는 것을 역설하는 것을 듣고 그는 조봉암 영입 결심을 굳혔다.

호헌동지회가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찬성하는 서상일, 박기출, 장택상과 반대하는 장면, 김준연, 김도연, 조병옥 등으로 나뉘었을 때 신익희는 한발 물러서 있었다. 논쟁이 벌어졌으나 김성수는 조봉암의 참여를 공개적으로 적극 찬성하였다.

후일 윤제술은 '김준연과 조병옥이 조봉암을 받아들이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하자, 신도성은 김준연이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것을 격렬히 비난했고, 조병옥이나 신익희는 어물어물 할 다름이라고 증언했다. 이 문제에서 신익희는 회피하였다. 김성수는 민주대동이라고 했으면 그대로 해야지, 왜 딴소리들을 하느냐. 해공의 책임회피가 문제야.라며 양쪽 모두 공박하였다.

김성수는 민주국민당이 조봉암의 신당 참여문제로 알력이 심하였을 때, 민주대동의 입장에서 조봉암과 합작할 것을 보수파에 권고하였다. 보수파들은 김성수의 정치적 영향력에 마지못해 조봉암이 반공주의노선을 견지하겠다는 것을 공적으로 약속한다면 좋다는 태도로 나와,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태도를 명확히 표명해줄 것을 권고하였다. 조봉암은 새로운 성명서를 작성해서 2월 22일 발표하였으나 김성수는 조봉암의 새로운 성명서는 보지 못하고 말았다.

병중에도 그는 야당인사들의 단결과 단합을 주문하였다.

그는 신경쇠약증, 만성기관지염, 근류머티스 등으로 고생하다가 환갑을 맞은 해에는 뇌혈전으로 병상에 쓰러지기도 했다. 1955년 1월 다시 뇌일혈로 고생하던 중, 2월초 병세에 호전을 보이던 그는 보행연습을 하다가 갑자기 위출혈을 일으켰다. 위궤양에 의한 출혈이었다. 치료 끝에 수그러드는 듯 했으나 2월 15일 밤 11시경 두 번째로 크게 위출혈을 일으켰다. 혈관 질환도 악화되었고, 간장 역시 나빠졌다.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응급 이송되었다.

수일간 혼수상태에 있던 그는 2월 18일 오전 11시경에 깨어났다. 그의 위독소식을 듣고 장면이 찾아왔다. 혼수상태에서 의사의 지시로 아무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장면은 이아주를 통해 천주교에 입신하도록 권고하였다. 오전 11시경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그는 이아주로부터 장면의 권유를 전해듣고 수긍하였다. 부인의 연락을 받은 장면은 12시경 가회동 성당의 박병윤(朴炳閏) 신부와 함께 계동으로 찾아갔다. 김성수는 신부에게서 조상봉사를 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영세를 받았다. 세례명은 바오로라 하였다

허정은 김성수의 죽음을 아쉬워하였다. 조국이 그를 가장 필요하게 여길 때, 꼭 있어야 할 인물인 그가 이 나라를버렸다는 것은 일종의 원망과 질책이 어린 슬픔이요 아쉬움이었다. 65세라는 원숙한 나이를 생각할 때 그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얼마나 훌륭한 일을 더욱 많이 이룩했을 것인가라며 탄식했다.

국민장은 노제를 거쳐 서울운동장에서 치러진 뒤 고려대학교 경내 본관 뒷편 공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소는 초기에 고려대학교 경내에 안장되었다가 뒤에 경기도 남양주시로 이장되었다.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고려대학교와 중앙고등학교 본관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후, 19세기에 할아버지 김요협이 지었던 그의 생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가 출범을 고대하던 민주당은 조봉암을 제외한 채 출범했고 이후의 민주당계 정당의 모태가 되었다.

김성수 사후 바로 인촌김성수기념사업회가 출범했고, 1965년 재단법인 인촌기념회로 재창립되었다. 1965년 그를 추모하는 인촌기념상이 수립되었고, 1973년에는 각계 문화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인촌문화상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교내 민족 해방 계열 학생들에 의해 친일 자본가로 매도당하면서 고려대학교 경내에 안장되었던 그의 묘소와 고려대 경내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수난을 당하기도 한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학도병 참가를 권유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하여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국회의원과 시민단체 등이 친일파 708명의 명단을 발표했던 2002년 3월 신원미상의 한 사람이 인촌 동상에 빨간 페인트로 '김성수는 친일파'라고 써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2005년 고려대학교의 총학생회와 고려대학교 민주동호회 등으로 구성된 고려대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그러나 명의 도용이라는 유진오 등의 증언과 반론이 있어 논쟁의 여지가 있다. 2009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일제 강점기부터 그를 알고 지냈으며, 해방 후 대통령 권한대행과 국무총리를 지낸 허정(許政)은 '인촌은 이해로써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감언이설로 현혹시키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단지 굽힘 없이 주장하면서 이 정도로 실현할 방안을 제시하는 떳떳한 태도로 일관했다. 누구나 그의 사심없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설득에는 남과는 다른 힘이 있었다. 덕망이 뒷받침하는 설득은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설득인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인간적으로도 매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담백하고 때로는 천진난만하기조차 해서 그를 대하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놓이고 믿음이 앞섰다. 그러므로 마음을 활짝 열고 그와 의논을 하고 함께 일을 해 나갈수 있었다.'고 평하였다.

허정은 '인촌에게는 개인적인 야심이 없었다. 그에게 명예나 권세를 추구할 야심만 있었다면, 그는 해방 후 자신의 야심을 손쉽게 달성할 많은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예나 권세에는 조금도 뜻이 없었다. 어떤 곤경이나 위기를 맞아, 자칫하면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을까 해서 다른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자리를, 맡아 위기를 수습하고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곤 했다.'는 것이다.

추기경 김수환은 1991년 10월 11일 '인촌 탄생 100주년 추념사'에서 인촌 선생은 한 시대를 이끌어 온 각계의 훌륭한 일꾼을 수없이 길러낸 ‘민족사의 산실’과 같은 존재라고 하였고, 함께 민주당 창당활동을 하였던 조병옥은 1958년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를 일제 암흑정치하에서도 민족의 실력 배양을 위해 교육기관 언론기관 산업기관 등을 창설해 우리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의 위대한 선각자였다고 평가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시작해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이어져 가던 한반도 해방정국의 좌익적 급류를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방향으로 우선회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정치지도자들 중 '비정치적'인 정치지도자 라는 평가도 있다.

중앙중·고등학교에서 7년간 근무한 김형석은 '그와 함께 지내게 된 것을 평생의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성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애국심과 대인관계의 지혜로움을 본받고 싶다'고 회상하였다. 김성수의 친일 의혹에 대해 김형석은 '과거사 재조명을 하면서 김성수를 친일분자로 몰고 가는 것을 보면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며 일제 강점기에 인촌 같은 이가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자주독립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흑백논리적 잣대로 역사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라 하였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중석은 그의 저서 '조봉암과 1950년대(상)(역비한국학연구총서 15)'에서 김성수가 민주당 창당 전까지 살아 있었더라면 범야신당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박태균은 김성수 자신이 앞에 나서려 하지 않던 점을 들어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하고 주도권 장악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한국현대 정치인들에게는 귀감이 된다고 평가하였다.

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은 후일 토론에서 그가 호헌동지회에 조봉암을 영입하려 한 것은 연구대상이라 하였다. 그는 한민당의 창당 주역의 한사람이었던 점을 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인품에 감화를 받아 일부 재력가들과 유지들은 교육사업과 방직회사 설립에 뛰어들기도 했다. 전 국회의원 김성곤은 평소 '인촌 김성수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였다고 하며, 그의 인품에 감화받아 김성수의 인격·사상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은 김성수, 김연수 형제가 만주에 설립한 남만방직주식회사에서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노동착취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그때 사람들은 김성수의 돈 뭉치를 서울에서 만주 봉천까지 깔아도 못 다 깐다고 했다며 생동한 비유를 했다. 이어서 이들은 이 공장의 생산품들은 모조리 일본군으로 납품했는데, 전쟁이 발발한 이후 노임을 주는 노동자들 보다 학생들을 상대로 의무노동을 강요했다고 비판한다.

김성수는 독립을 위한 방법으로 실력 양성을 부르짖었다. 안창호(安昌浩)의 감화를 받은 그는 실력 양성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그는 교육, 물산 장려, 언론 육성을 제시하였다.
교육을 통하여 문물을 배우고 기술을 익혀 일본이나 주변국보다 뛰어난 우수한 두뇌를 길러내 학자와 기술자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교육 육성을 위해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중앙중학교와 보성전문학교 등을 인수하였고, 사립 전문학교 설립을 여러 번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학비 조달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비를 스스로 지원해주기도 하였다. '일찍부터 동경유학을 결심했던 까닭은 스스로 먼저 신학문을 배우고 그것에 기초해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동포에 전수시킴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키는 것이 조국의 자주독립에 도움이 되리라는 인식에 도달했던데 있다. 이점에서 그는 자강론자들의 애국계몽주의적 실력배양론의 입장에 서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물산 장려를 통해 국내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의 원료와 자재를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조달하여 생산하고, 국내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장려하여 국가의 산업자본과 경제력을 육성하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일본에서 면과 마의 원료를 수입하는 것을 보고 국내에서 면직물과 마직물을 생산하는 회사 설립을 추진하여 경성직뉴를 인수한 뒤, 경성방직회사로 규모를 키우게 되었다. 또한 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여 국산품을 애용하는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올바른 언론의 육성을 통해 정보의 전달과 민족의 입장을 대변할 통로를 열자는 것이었다.

임종 직전에 장면의 권고로 천주교에 귀의하기 전까지 그는 별다른 종교적인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유년기에 할아버지 김요협의 가르침과 선조들의 가훈을 이어 유교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중시하였으나 유학 이후 성리학과는 거리를 두었으며, 일시적으로 전도 권고로 기독교 교회에 출석하기도 했으나 신앙과는 거리가 있었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의 세례와 병자성사를 받았다.(세례명: 바오로)

그는 제2대 부통령 재임 중 각하 라는 호칭을 삭제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가 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각하 라는 호칭은 다시 부활했고, 1960년 제2공화국 때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각하 라는 경칭은 5.16 군사 정변 이후 다시 부활, 1987년 당시 대통령후보자 노태우가 6.29 선언을 통해 공약, 당선이후 공식, 비공식 석상에서 각하라는 호칭을 삭제하도록 지시할 때까지 항상 각하 라는 경칭이 계속 통용되었다.

그는 억지로 꾸밈이 없었고, 부유함을 내세워 화려하게 꾸미려 하지 않았다. 겉을 보기 보다는 그 사람의 내면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였다. 화려한 것 보다는 내실이 있는 것을 좋아하였다. 물건을 하나 고르더라도 외양이 화려한 것보다는 실속이 있는 것을 선호하였다.

허정은 후일 회고담에서 그의 첫 인상은 매우 솔직하고 소박하다 고 평하였다.

공선사후(公先私後) 또는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주장하였다. 개인 사적인 것보다 공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여기게 하였다. 또한 신의일관(信義一貫)도 그의 좌우명이었다. 또한 쓸 곳에 쓴다, 돈은 잃어도 사람을 잃으면 안 된다는 좌우명도 있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한다. 또한 그는 꾸밈없고 솔직한 성격으로 억지로 겉치레를 하는 것을 상당히 싫어하였다. 자신을 자랑하거나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송진우, 장덕수가 연이어 암살당하면서 정계에 직접 나서게 되었다.

사람을 대할 때 조건을 제시하거나 차별하지 않았고, 한번 신뢰한 사람은 끝까지 신뢰하였다. 허정은 그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다른사람의 뒤통수는 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호남 만석꾼의 장손으로 태어났음에도 검소하였고 사치하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엄격하였다.

그는 무슨 일에서나 항상 뒤에서 돕기를 좋아했다. 허정은 이것은 철저한 자기 희생의 정신과 이타심(利他心)이 없으면 범인으로서는 흉내조차 내기도 어려운 인촌의 미덕이었다.„고 주장했다.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꺼리고 주저하는 성격이었지만, 그는 뒤에 숨어서 얄팍한 술수를 써서 다른 사람을 조종하지는 않았다 한다. 허정에 의하면 인촌은 이해로서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감언이설로 현혹시키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단지 정도를 굽힘 없이 주장하면서 이 정도를 실현할 방안을 제시하는 떳떳한 태도로 일관했다. 누구나 그의 사심없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설득에는 남과는 다른 힘이 있었다.고 평하였다.

성격은 솔직한 편이었다. 허정은 그는 인간적으로도 매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담백하고 때로는 천진난만하기조차 해서 그를 대하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놓이고 믿음이 앞섰다. 그러므로 마음을 활짝 열고 그와 의논을 하고 함께 일을 해 나갈수 있었다.고 했다. 술이 건해지면 천진난만한 주사도 심했던 인촌 김성수 라고 회고하였다.

그는 사심이 없었는데, 허정은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인촌에게는 개인적 야심이 없었다. 그에게 명예나 권세를 추구할 야심만 있었다면, 그는 해방 후 자신의 야심을 손쉽게 달성할 많은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예나 권세에는 조금도 뜻이 없었다. 어떤 곤경이나 위기를 맞아, 자칫하면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을까 해서 다른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자리를 맡아 위기를 수습하고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곤 했다. 그에게는 실제로 양부에게서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이 있었으나, 그는 이를 독립운동과 보성전문학교, 중앙학교, 동아일보 등에 대부분 투자했다.

이중재(李重載)의 회고에 의하면 '보전에 들어가려고 친구 들과 원서를 받으러 갔더니 허름한 영감이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 원서를 가지고 나오다 보니 잔디밭이 좋길래 들어가 앉아서 노닥거렸다. 그랬더니 그 영감이 와서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해서 나왔다. 그 후 보전 입학식에서 훈시하는 교장선생님을 보니 바로 그 영감님이었다' 한다.

한만년(韓萬年)의 회고에 의하면 '선친(한기악)께서 중앙학교를 나오셨다. 내가 보통학교 3학년 봄에 우리는 중앙학교 교내로 이사를 가 살게 되었다. 저녁 때가 되면 한복을 입은 허술한 아저씨가 나와 운동장도 쓸고 잔디도 깎고 했다. 학교 수위 같았다. 그 해 여름이었는데 이사간 지도 얼마 안 되고 어린 데다가 친구도 없어서 저녁을 먹고 학교 구내에서 놀다가 김기중 선생 동상 밑에서 잠이 들었다. 그때 누가 와서 깨웠는데 그 분은 바로 잔디 깎는 수위였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죄송하단 생각이 들었는데 그 어른은 꾸중을 안 하시고 찬 데다 뺨을 대고 자면 입이 비뚤어지는 법이다. 이런데서 자지 말고 집에 가서 자라고 타이르셨다. 그래서 어찌나 황송하고 미안했던지 지금도 그 일이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 수위가 다름 아닌 仁村 선생이었다.' 한다. 사진이 10년동안 그대로 사용하였다. 새로운 사진을 왜 장만하지 않느냐는 주변의 질문에 만날 그 모습이 그 모습인데 새로이 할 필요가 굳이 없지 않는가, 혹은 그런데 돈을 들이려거든 그보다 더 긴요한데 쓰는게 좋다고 대답하였다.

부통령 재임 시 '각하'라는 호칭을 폐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허정에 의하면 술이 거나해지면 천진난만한 주사도 심했다고 한다. 한편 허정은 그의 인물평을 하면서도 스스로 '나는 그를 평가할 자리에 있지 않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맡아야할 것이다.'라고 하기도 했다. 허정에 의하면 그 평가가 어떻든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탁월한 인물 인촌에 대한 추모의 정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것이다.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직 중에도 그는 이희승, 한만년, 허정, 윤치영, 윤일선, 김원봉, 이현상 등 다양한 학생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검소하고 겸손한 태도로 대하여 학생들의 반발을 사지 않았다. 광복 이후 그는 1940년대 후반에 촬영한 사진을 줄곧 사용, 10년여 동안 같은 사진 한장으로 사용하였다. 지인이 그에게 '그때그때 사진 한장쯤 왜 장만하지 않느냐'며 묻자 그는 '일 그얼굴이 그얼굴일진대 새로이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며 응대하였다.

조선 총독도 함부로 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고이소 구니아키 총독은 당시 보성전문학교 이철승의 징병 거부 면담을 하면서 이철승의 스승을 물어보며 김성수 군은 물샐틈 없는 인물이지.. 하며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구는 우익 정당 통합 노력을 추진했고, 김성수는 김성수 대로 조소앙에게 우익 정당의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조소앙은 범 우익 정당의 단결에는 원칙적으로 동조하였으나, 통합의 방법을 놓고 김성수와 대립하게 되었다. 1947년 12월의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범우익 정당 통합 노력은 깨지고 말았다.

김성수는 송진우의 피살로 인해 부득이 한민당을 맡았으나, 정당의 당수를 안 하고 임정 요인들과 합쳐서 당의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구상을 세웠다. 당시 우익 학생운동가였던 이철승(李哲承)은 김성수와 조소앙의 사이의 연결을 주선했다. 뒷날 이철승은 '제일 존경했던 조소앙 선생하고 또 한민당의 인촌 선생과 합작이 이뤄지길 기대하면서 학생의 신분이었지만, 두 분을 만나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겁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남북협상 뒤에도 일부 한민당원의 꾸준한 반대에도 김성수는 조소앙을 끌어들여야 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김성수는 조소앙이 남북협상의 실패를 인정하고 공산당의 프락치를 축출한 뒤에도 조소앙에게 여러 번 통합 제의를 했다.

계동의 김성수의 집에서는 채식주의자였던 그의 입맛에 맞도록 인촌의 부인 이아주가 손수 음식을 장만하면서까지 두 차례나 만나게 되었는데, 이철승의 표현에 의하면 '애석하게도 인촌 선생의 한민당과 조소앙 선생의 사회당과의 합당은 성사되지 못했'다고 회고하였다. 김성수와 조소앙 간의 회함에서 당의 명칭과 중앙위원들의 숫자는 합의됐지만, 토지 개혁정책 때문에 결국 그 합당문제가 실패하고 말았 다.

송진우, 장덕수 등의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던 김구는 김성수 암살 미수의 배후로도 지목되었다.

미 군정의 보고서 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 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암살 기도 가 미수로 끝나면서 한민당측은 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김성수는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내심 분개했고, 김구에 대한 한민당과 그 후신들의 시선 역시 곱지 않게 되었다.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고 만년에는 야당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사치하지 않았고, 전용차량 대신 인력거, 버스, 택시 등의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다. 메이지 대학 재학 당시 간디이즘에 감격한 그는 자신을 위한 소비를 줄이고 남은 것으로 타인을 돕는 것을 자신의 신념이자 의무로 여겼다. 기독교의 개화운동에 자극을 받아 민립대학기성회, 농촌계몽운동, 문맹자 퇴치운동 등에 뛰어들기도 했다.

허정은 그에게 가해진 비판 중 업적을 남긴일이 없다는 비판에 대해 반론을 달았다. '만일 그가 고위 현직에 앉아 큰 업적을 남긴 일이 없다고 해서 인촌이 한 일이 무엇이냐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혹시라도 있다면, 그는 그야말로 '나무를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분야에서 그가 다음어 놓은 초석이 우리 문화의 발전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가는 아는 사람은 우리 현대사에 남긴 그의 업적을 소홀히 다루지 못할 것이다.'는 것이다. 한편 불우이웃과 고학생을 소문없이 뒤에서 도우는 것, 등으로 인망을 얻어 호남의 어른, 고창의 어른, 전북의 어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해방 이후 줄곧 매년 1월 1일이면 이승만을 찾아 세배를 드렸고, 정치적으로 갈라선 뒤에도 병석에 눕기전까지 그를 찾아 세배를 드리곤 했다.

정치인 이중재는 1952년 부산 피난시절 부통령인 그의 개인비서로 정계에 입문 하였다.




#Article 264: 심근 경색 (588 words)


심근 경색(心筋梗塞, , ) 또는 대중적으로 심장 마비(心臟痲痺, )는 허혈성 심질환의 하나이다. 흔히 심장마비라고 하나, 이는 심근 경색만을 지칭하는 용어는 아니다.

심장 근육은 관상동맥이라 부르는 3가닥의 혈관을 통해서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일생 동안 혈액을 전신으로 펌프질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따라서 관상동맥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에는 심장 근육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관상동맥의 구조를 살펴보면, 그 가장 안쪽 층을 내피세포가 둘러싸고 있는데 내피세포가 건강한 경우에는 혈전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고지혈증, 당뇨병, 고혈압, 흡연 등에 의해서 내피세포가 손상을 받게 되어 죽상경화증이 진행되고, 관상동맥 안을 흐르던 혈액 내의 혈소판이 활성화되면서 급성으로 혈전이 잘 생기게 된다. 이렇게 생긴 혈전이 혈관의 70% 이상을 막아서 심장 근육의 일부가 파괴(괴사)되는 경우가 심근경색증이고, 괴사되지는 않지만 혈관 내 혈액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가슴에 통증 이 생기는 것이 협심증이다.

이 같은 상황을 잘 유발시킬 수 있는 위험인자들은 다음과 같다.

환자는 대부분 갑자기 가슴이 아프다고 호소한다. 대개 '가슴을 쥐어짠다', '가슴이 쎄한 느낌이 든다'고 호소하며 주로 가슴의 정중앙 또는 약간 좌측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증상 없이도 '명치가 아프다' 또는 '턱끝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비전형적이기는 하지만 흉통 없이 구역, 구토 증상만 있는 경우도 있고, '소화가 안 된다', '속이 쓰리다'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흉통은 호흡곤란과 같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으며 왼쪽 어깨 또는 왼쪽 팔의 안쪽으로 통증이 퍼지는(방사) 경우도 있다. 흉통은 대개 30분 이상 지속되며 니트로글리세린 설하정을 혀 밑에 투여해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흉통을 호소하기도 전에 갑작스런 실신이나 심장마비로 응급실에 실려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광범위한 부위에 걸쳐서 급성으로 심근경색증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심근경색증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상태로 구별할 수 있다.

심근경색증의 치료는 크게 막힌 혈관을 넓히는 관혈적 치료와 이후 약물치료로 나뉜다. ST절 상승 심근경색의 경우에는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막힌 혈관을 넓히는 시술 또는 약물이 요구된다. 비 ST절 상승 심근경색증의 경우에는 쇼크가 동반되는 경우와 같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약물 치료 후 안정화된 상태에서 시술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여러 대형 병원에서 응급 심혈관성형술, 스텐트삽입술, 혈전용해술을 시행하여 경과 및 예후가 많이 향상되었다. 심혈관성형술, 스텐트삽입술은 요골 또는 대퇴동맥을 통하여 심혈관 조영술을 시행하여 막힌 혈관을 찾아낸 후, 혈관 안으로 도관을 삽입하여 풍선으로 넓히고 스텐트라는 철망을 삽입하여 혈관을 수리하는 시술이다.심근경색증에 의한 합병증이 없다면 대부분 병원에서 1주일 이내에 퇴원할 수 있다. 그러나 시술 직후 흔히 재관류에 의해 심장 근육에 2단계 충격이 오기 때문에 시술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경과를 낙관할 수는 없다. 심혈관 조영술 결과 심혈관성형술, 스텐트삽입술을 시행하기에 적합하지 않거나 다혈관 질환일 경우에는 관상동맥 우회로 수술을 시행할 수 있다.

심근경색증에 대한 약물 치료는 향후 협심증 또는 심근경색증이 재발하지 않도록, 심근경색증으로 인한 심실의 변화를 방지하도록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한 스텐트를 삽입한 경우에는 스텐트에 혈전이 생겨서 혈관이 다시 막히는 상황을 예방하는 것도 중요한 약물 치료 목적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스텐트 혈전증의 치사율이 50%에 달할 정도로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혈전 억제제인 아스피린과 플라빅스를 포함하여 심장 보호 효과가 부가적으로 있는 혈압약을 복용하게 되며, 고지혈증 약물 그리고 당뇨가 있는 경우에는 경구 혈당 강하제, 인슐린을 처방받게 된다. 또한 니트로글리세린 등의 혈관 확장제가 추가될 수도 있다.

아직까지는 심근경색증 치료 중에 죽은 심장 근육을 획기적으로 회생시키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서울대학교병원을 비롯하여 유럽과 미국의 연구팀들이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심장 근육을 재생시키는 연구 결과를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고, 현재도 대규모의 환자를 대상으로 개선된 프로토콜로 임상시험에 환자를 등록하고 있어서 그 성과가 크게 주목되는 바이다. 특히 서울대학교병원 심혈관센터에서 시행하는 매직셀(MAGIC-CELL) 프로그램은 다른 나라에서 시행하는 골수를 직접 채취하는 방법이 아니라, 싸이토카인을 이용해서 골수 줄기세포를 말초혈액으로 동원한 후 이를 말초혈액에서 쉽게 채취하는 방법으로서, 환자 부담을 줄인다는 장점이 있으면서 심기능 호전 효과가 뚜렷하여, 2004년도 Lancet, 2005년도 Canadian Medical Association Journal, 2006년도 Circulation, 2007년도 American Heart Journal, 2008년도 Heart와 같이 심혈관계의 세계 최고 권위지에 매직셀 프로그램의 장기 결과가 계속 발표되고 있다.
점점 그 추이가 늘고있다.

개도 물론 심근경색에 걸릴 수도 있다. 강아지 심근 경색의 원인은 가족력, 면역력, 스트레스, 과로, 운동 후유증, 지속되는 분리불안증 등이 주된 이유가 있다.




#Article 265: 대구광역시 (1123 words)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는 대한민국 동남부 내륙에 있는 광역시이다. 동쪽으로 경상북도 경산시, 영천시, 서쪽으로 고령군, 성주군, 북쪽으로 청송군,  군위군, 남쪽으로 경상남도 창녕군과 인접한다. 팔공산과 비슬산 등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으로 인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기온이 높은 편에 속하는 도시이며, 대구 특수형 기후 지역으로 분류된다. 조선시대에는 경상 감영 소재지로서 영남 지방의 중심지였다. 섬유 산업을 중심으로 도시가 성장하면서 1981년 7월 1일 대구시가 달성군 월배읍·성서읍·공산면, 칠곡군 칠곡읍, 경산군 안심읍·고산면을 편입하여 직할시로 승격되었고, 1995년 3월 1일 달성군을 편입하였다. 동성로와 중앙로를 중심으로 도심을 형성하고 있다. 시청 소재지는 중구 동인동 1가이고, 행정구역은 7구 1군이다.

대구시의 로고는 「팔공산과 낙동강」의 이미지를 형상화 한 것으로 미래지향적 진취성과 세계지향적 개방성을 추구하는 활기에 가득찬 친환경적인 도시를 표현한다.

색채가 “다양한, 다채로움”을 의미하여 젊고, 밝고, 멋지고, 화려하고, 활기찬 도시 이미지를 제공하여 다양한 모습의 발전적인 대구를 나타낸다.

조선 시대에는 대구도호부의 영역이 현재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구, 서구, 동구(안심동 제외), 북구(옛 칠곡동 지역 제외), 수성구(고산동 제외), 달서구, 달성군(현풍면, 유가면, 구지면 제외), 청도군 각북면, 풍각면, 각남면에 이를 정도로 넓었다.

일제 강점기에 대구는 일본어로 다이큐()라고 불렀다.

대구광역시는 한반도 동남부 내륙에 위치한 광역시이다. 대구는 영남 지방 내륙 지방의 중앙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경상북도 경산시, 영천시, 서쪽으로 고령군, 성주군, 북쪽으로 군위군, 칠곡군, 남쪽으로 청도군, 경상남도 창녕군과 경계를 접한다.

대구는 높고 규모가 큰 산줄기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북쪽에는 팔공산(1,193m)의 산줄기가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비슬산(1,084m)의 높은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하천으로는 신천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북쪽에서 금호강과 합쳐진다. 대구 시가지는 신천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다.

대구는 전체적인 강수량이 적은 소우지이다. 최고기록기온이 40˚C, 최저기록기온이 -20.2˚C에 달한 적이 있었다. 대구는 대한민국에서 여름 평균 기온이 높은 편이다. 1942년에 기록한 40도는 관측 이래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최고 기온 기록이기도 하다. 이런 특수한 기후로 인해 지리적 기후 구분으로는 남부 내륙 중에서도 '대구 특수형 기후'에 속한다. 이러한 여름 기온으로 인해 인터넷 커뮤니티를 시작으로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였고, 최근에는 언론, 방송 등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대도시권 교통관리에 관한 1특별법 시행령(대통령령)의 별표 1(대도시권의 범위(제2조관련))에 의하여 대구광역시, 경상북도의 구미시, 영천시, 경산시, 군위군, 청도군, 고령군, 성주군, 칠곡군, 경상남도의 창녕군이 대구권으로 규정되어 있다.

택지개발사업은 대구도시공사, 한국토지주택공사 등에서 공영개발 방식으로 추진하고 있다. 무주택 시민에게 양질의 택지를 저렴하게 공급하기 위하여 도로·수도·전기·통신·도시가스·난방 등 생활기반 시설을 모두 갖추고 있고, 공원·학교·녹지·운동장 등 공공시설과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대구광역시의 일반행정은 대구광역시청이, 유·초·중등교육행정은 대구광역시교육청이 담당한다.

두드리소는 경상도 사투리의 정감이 느껴지면서, 민원을 두드리면 언제든지 들어주고 해결해 주는 공간이라는 의미의 대구광역시의 민원 서비스이다. 두드리소( ) 인터넷, 모바일, 콜센터, SNS로 신청한 모든 민원과 제안의 처리과정을 신청방법과 상관없이 한 곳에서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대구광역시의 연도별 인구 추이

대구광역시 대표 축제에는 컬러풀대구페스티벌, 국제오페라축제, 치맥페스티벌, 국제뮤지컬페스티벌이 있다. 컬러풀대구페스티벌은 매년 5월에 열리는 대구광역시의 대표적인 시민축제로 다양한 문화 예술 체험행사와 화려한 퍼레이드를 자랑하는 대구만의 페스티벌이다.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로 선정된 대구는 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을 통해 대구시민은 물론 세계인과 함께 뮤지컬을 향유할 수 있도록 2006년부터 매해 개최하고 있다. 국제뮤지컬페스티벌은 대한민국 유일의 국제 뮤지컬 페스티벌이다. 치맥페스티벌은 대구를 대표하는 치킨과 맥주를 모토로 탄생한 페스티벌이다. 매년 1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고, 치킨과 맥주 그리고 체험 공간까지 있어, 관광객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페스티벌이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 대구오페라하우스의 개관을 계기로 하여 매년 9~10월경에 열리며, 지역의 풍부한 음악적 역량을 활용하고 문화콘텐츠 개발을 통하여 타 도시와 차별화된 축제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대구광역시가 개최하고 있다. 

대구광역시의 테마별 관광코스로는 '대구 속 시간여행 코스', '이렇게 좋을 수가 코스', '금수강산 느림보 코스', '팔공산 힐링 코스'이 4가지 권역별 관광코스가 있다.

대구시의 관광자원을 널리 홍보하기 위하여 2000년 12월 2일 시작된 시티투어는 각종 문화유적, 관광지, 시정현장 등을 순회하며 대구의 문화와 역사, 관광지 등을 둘러볼 수 있는 관광 체험 프로그램이다.

대구광역시가 선정한 대구 12경으로 팔공산, 비슬산, 강정고령보(디아크), 신천, 수성못, 달성토성, 경상감영공원, 국채보상기념공원, 동성로, 서문시장, 그리고 대구스타디움이 있다. 

대구광역시 10미에는 육개장, 막창 구이, 뭉티기(소 생고기), 동인동 찜갈비, 논메기매운탕, 복어불고기, 누른국수, 무침회, 야끼우동, 납작만두가 있다.

대구는 버스와 도시철도가 주요한 대중교통 수단이다. 외부 지역 및 국가와는 철도, 버스, 항공 등으로 연결된다.

아시아 고속도로 1호선이 대구를 관통하고 있으며, 경부고속도로 등 7개 고속도로 노선 및 5개 국도 노선이 시가지를 방사형으로 연결하고 있다. 신천대로, 앞산순환로, 신천동로 등 도시고속도로로 확충되어 있다.

중형택시의 경우 기본요금 2km까지 3,300원으로, 이후 거리요금은 144m당 100원으로, 시간요금은 34초당 10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소형택시의 경우 기본요금 2km까지 2,200원으로, 이후 거리요금은 144m당 50원으로, 시간요금은 34초당 5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경형택시의 경우 기본요금 2km까지 1,800원으로, 이후 거리요금은 144m당 20원으로, 시간요금은 34초당 2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대구역과 동대구역에서 경부선, 경북선, 대구선, 동해선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KTX와 SRT는 동대구역에서만 이용할 수 있다.

동구 지저동에 대구국제공항이 있다. 대구국제공항은 제주국제공항, 인천국제공항 등 국내외 도시와 연결되어있다. 대구국제공항의 항공편은 매년 동계항공기간이 끝나면 대폭 늘어난다. 대구공항에서는 국내선 제주․김포 2개 노선이 매주 215편 운항하고 있으며, 국제선은 매주 중국(상하이, 베이징, 싼야) 24편, 일본(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삿포로, 오키나와, 구마모토, 사가) 177편, 동남아(홍콩, 세부, 방콕, 타이베이, 다낭, 마카오, 하노이) 148편, 대양주(괌) 14편,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14편이 운항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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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농업은 1995년 달성군과의 도농 통합으로 비중이 높아졌다. 2015년 기준 농가호수는 16,571호, 농가인구는 44,542명, 농경지면적은 8.291ha이다. 낙동강과 금호강을 끼고 있는 달성군 지역에서 쌀이 많이 생산되었으나, 현재는 근교농업과 낙농업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대구는 옛날부터 교통의 요충지에 있어 영남지방 상권의 중심지로 발달하였고, 조선시대에 이미 전국 3대 시장의 하나인 서문시장과 약령시가 이름을 떨쳤다. 2017년 기준 대구에는 9개의 백화점과 21개의 대형마트, 7개의 쇼핑센터, 151개소의 등록시장, 1개의 종합유통단지가 있다.

대구는 한국의 대표적인 내륙공업지역으로 주종산업인 섬유·금속·기계 공업 부문을 통해 지속 성장해 왔다. 과거 섬유업체 수가 전채 사업체 중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섬유공업에 편중된 구조였으나. 2017년 대구시 전체 산업단지 내 업체 수는 기계·금속공장이 3,882개소로 섬유공장 1,736개소보다 비중이 크다.

대구는 미래첨단의료 선도도시, 미래형 자동차 선도도시, ICT․IoT 기반의 스마트시티 조성, 청정에너지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을 통한 미래 신성장 산업 육성을 추진하고 있다.

의료산업 분야는 2018년까지 국책연구기관 15개, 의료기업 130개, 양질의 일자리 창출 4,300개, 의료관광객 유치 25,000명을 목표로 「메디시티 대구」 조성에 매진하고 있으며, 첨단의료복합단지의 글로벌 수준 발전과 의료관광의 확대 등을 통해 대구를 세계적인 메디시티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미래형 자동차산업 분야에서는 전기상용차 생산공장 건립 투자협약, 대동공업-르노삼성 컨소시엄을 통한 1톤급 전기상용차 개발 및 생산 확정, 자율주행자동차 시범운행단지 지정(국토부), 전기자동차 보급 및 충전인프라 구축 등 미래형자동차 선도도시로서의 기반을 조성하고 있다.

스마트시티 분야에서는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지역혁신플랫폼인 ‘대구형 스마트시티’ 조성하기 위하여 ICT·IoT(사물인터넷) 융합기술 경쟁력확보, SW융합 산업육성, ICT융복합스포츠산업 육성을 추진하고 있다.

대구시는 스마트시티 조성을 위한 인프라 건설과 운영체계 구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고 그 결과 2020년 1월 22일 영국 왕립 표준협회(BSI)로부터 스마트시티국제표준 인증서 ISO 37106 인증을 받았다.

스마트시티국제표준은 2018년 ‘ 국제표준화기구 (ISO)’가 마련한 기준으로, BSI가 비전, 시민중심, 디지털, 개방 및 협력 등 4개 기준에 맞는 도시에 인증서를 발급하고 있다.
한국 내 광역지자체 중에서는 대구가 처음으로 ISO인증을 받았다.

대구광역시는 청정에너지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을 위해 2030년까지 신재생 에너지 보급률 20% 이상, 에너지 소비 15% 절감 목표로 에너지 신사업 Test-bed 구축. 분산전원 및 에너지 효율 극대화, 지역에너지 관련 산업 육성 등을 지속해서 추진하고 있다.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전역을 방송권역으로 하는 민영 방송사인 TBC, 공영 방송사인 KBS대구방송총국, 대구문화방송이 주요 방송사이다. 그 밖에 라디오 방송사는 대구교통방송, CBS 대구방송, 대구극동방송, 대구가톨릭평화방송, 대구불교방송, 대구원음방송, 대구국악방송 등이 있다. 케이블 방송사는 CMB 대구방송, HCN 금호방송, TCN 대구방송, 한국케이블TV푸른방송 등이 있다.

주요 신문사로는 매일신문과 영남일보, 대구신문, 대구일보 등이 있다.

프로야구단 삼성 라이온즈와 2002년에 창단된 K리그1 대구 FC가 대구를 연고지로 한다.

한강 이남에서는 대전권(대전, 계룡, 논산)과 함께 주요 국방 도시이기도 하다. 제2작전사령부, 제50보병사단, 제5군수지원사령부 등의 육군 부대와 K2 공군비행장에 공군공중전투사령부, 제2중앙방공통제소, 공군군수사령부, 제11전투비행단 등과 주한 미군 부대 캠프 워커, 캠프 헨리가 대구에 주둔하고 있다.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의 전진기지 중 하나였으며 지금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대구광역시는 다음 도시와 자매결연 또는 우호협력 관계를 맺었다.




#Article 266: 미터 (119 words)


미터(, , , 기호  m)는 길이나 거리의 SI 단위이다. 이 단위는 현재 진공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거리로 정의되어 있다. 이러한 정의는 최근에 측정 기술이 길이와 단위를 매우 높은 정확도로 재현할 수 있게 되면서 제안된 것으로, 시간의 경우에는 1013의 정확도로 재현할 수 있다.

미터(m)라는 단어는 ‘’으로부터 유래하였으며, ‘단위’를 뜻하는 ‘’가 그 기원이다.

참고로 전체 자오선 길이가 아닌, 적도에서 북극점까지 거리인 10,000km를 십진법상의 표준이 된 이유는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 남반구 지역에 관측소를 설치하는 것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지리적으로 1m는 적도에서 극점까지 거리의 1000만분의 1을 기준으로 하게 되었다.

초기의 1m의 표준 원기는 금속 물질로 제작했으나, 금속의 특성상 온도와 습기 등의 환경에 따른 미세한 변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미터를 정의하는 방법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었다.

SI 접두어를 갖는 미터는 다음과 같이 사용한다.




#Article 267: 이토 히로부미 (2090 words)


이토 히로부미(, 1841년 10월 16일 ~ 1909년 10월 26일)는 에도 시대 후기의 무사(조슈 번사)이자 일본의 헌법학자, 정치가이다. 아명은 리스케()로, 후에는 슌스케(, , )로 불렸다. ‘슌보’()나 ‘소로카쿠슈진’() 등이라고 불렸으므로, ‘슌보 공’()이라고 쓴 것도 많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 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제5대·제7대·제10대 일본 제국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또한 초대·제3대·제8대·제10대 추밀원 의장,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귀족원 의장, 관선 효고현 지사 등을 지냈다. 입헌정우회를 결성해 원로로 활동했다. 대훈위 종1위()를 받고, 작위는 백작이며, 사후 공작으로 추증되었다. 영국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유학하여 화학을 공부하였으며, 훗날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원래는 존왕양이 운동을 전개하다가 개화파로 전향했고, 개국론·부국강병론을 전개했다. 1887년부터 1889년 2월까지 약 3년간에 걸쳐 일본 제국 헌법 제정 작업에 참여하였고, 1886년부터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일본 내에서 각 학교에서 여자 학생을 받아들이고, 여자 대학을 창설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일본 제국 헌법 제정 과정에 참여하여 개혁 정책을 전개했다. 일본 제국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조선통감부의 통감을 역임했으며, 1909년에 만주 하얼빈에서 대한제국의 군인·독립 운동가인 안중근이 쏜 총탄에 맞아 암살당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10월 16일 조슈 번 스오 국 구마게군(지금의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야마구치의 스오구니 촌()에서 농민 출신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의 이름은 임이조 조선인 이고 그의 성은 하야시 즉, 하야시 가문 출신이었다. 이토의 아버지의 이름은 하야시 주조()였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어릴 때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였다. 아버지가 조슈 번의 주겐()계급인 이토 다케베()의 양자가 되면서 성을 하야시에서 이토()로 바꾸었고, 그 역시 양조부의 성을 따서 이토로 성을 바꾸었다. 후에 이토 다케베가 최하급 무사 신분인 아시가루가 되면서 이토도 무사 신분을 얻게 되었다.

어려서 가난한 생활을 하였지만 아버지가 무사인 이토 다케베의 양자가 되면서 그의 가정은 어느정도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미천하였고, 그는 입신양명을 꿈꾸게 된다.

이어 구루하라 료조는 요시다 쇼인에게 이토를 소개하는 소개장을 써주어서 보냈다. 1857년 요시다 쇼인()을 만나 그의 사상에 감화받고, 요시다가 운영하는 쇼카손주쿠()에 입학하여 수학하게 되었다. 이후 10대 후반까지 번의 하급 무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요시다 쇼인의 학당에서 수학하였고, 한편으로 기도 다카요시,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과 교제하게 된다.

신분이 미미하였던 탓에 쇼카손주쿠 생활 초기에 문벌가문 자제들로부터 무시와 박대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승 요시다는 신분에 구애됨 없이 그의 재능을 높이 샀고, 그는 요시다의 사상에 감복하여 더욱 학업에 정진하였다.

이때 이토의 짐은 단순하여 1862년에 발행된 오류 투성이인 영일 번역 사전 1권과 잠옷 뿐이었다 한다. 그러나 영국에 간 이후 그는 놀라운 속도로 영어를 익혀 기본적인 회화가 가능하였다. 런던 도착 후 화학자인 알렉산더 윌리엄슨 런던 대학교 교수의 저택에서 하숙하면서 그는 영어와 영국식 예의 범절의 지도를 받았다. 런던에서 영어 공부와 함께 박물관과 성곽을 방문하고 해군 시설, 공장 등을 견학하여 견문을 넓혔다. 그는 유교적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이론자였으나 영국 유학 중 영국과 일본의 너무 압도적인 국력의 차이를 목격하고 개국론으로 사상을 전환하게 된다.

그러나 1년간 영국의 신문물을 견학하고 익혔으나 조슈 번과 외국 함대의 전쟁 소식을 듣고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1864년 6월에 귀국하였다. 이후 이노우에 마사루와 함께 전쟁을 막으려고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한다. 귀국 후 요코하마 도착 후 영국 공사 존 올칵과 통역관 어니스트 새토()를 만나 협상, 중재를 부탁하였으나 거절당한다. 이후 그는 번에 양이 노선 중지를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유리아라스 호로 함장 쿠퍼와의 강화회의에 다카스기의 통역으로 참가했다. 강화회의 직후 이때 양이 파의 암살 계획을 알고 다카스기와 함께 피신해 있기도 했다. 1864년 12월, 조슈 번이 막부와의 싸움에서 막부에 공손한 자세를 보이자 보수파를 타도하기 위한 다카스기 신사쿠의 거병에 참여했다.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번의 토막() 정책을 수행하였다.

이후 강력한 천황제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막부 타도 운동에 가담하였고, 막부 세력의 타도를 위한 정변을 계획한다. 이때 다카스기 등이 청년 무사 조직을 이끌고 거병한다. 이때 다카스기에게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이토였다. 이후 군인들도 참가하는 등 각처에서 세력을 늘려 보수파와 막부 지지세력과 투쟁을 시작, 혁신파 정치 세력을 구성한다. 이후 꾸준한 투쟁 끝에 막부 지지 세력을 타도하고 천황 친정체제 구축에 가담한다. 이후 이토는 이 때를 일컬어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자랑할 수있는 것이 있다면 이 때 가장 먼저 다카스기 씨에게 달려온 것이다고 말했다.

막부 세력과 지방의 번들을 토벌하는데 성공한 개화파 세력은 전권을 천황에게 양도한다. 이로써 메이지 유신 시대가 열리게 된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이토 히로부미로 개명하고, 조슈 번의 유력자로 영어 등에 통달한 것을 인정받아 정계 입문, 외국 사무국 판사, 관선 효고현 지사, 초대 공부성 장관 등 정부의 요직을 역임했다. 1871년부터 73년까지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양 각국을 시찰했다. 귀국 후 정한론에서는 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함께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논쟁에서 오쿠보와 기도, 이와쿠라 등의 사이를 오가며 만남을 주선하고 계책을 제시해 내치파의 승리에 기여했다.

논쟁이 내치파의 승리로 끝난 직후, 이토는 내각 참의 겸 공부성경이 되었다. 정한 논쟁 이후에는 오쿠보 도시미치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1874년에 오키나와 원주민 피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대만 침략을 결정했는데 청국과의 전쟁을 우려하며 반대했던 기도는 이에 반발해 사임하게 된다. 하지만 오쿠보로서도 조슈파의 리더인 기도의 협조를 원했기 때문에 이토는 1875년 1월 오사카에서 오쿠보와 기도의 만남을 주선했다(오사카 회의). 이러한 정치적 활동들을 통해 이토는 오쿠보를 비롯한 여러 선배 정치가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면서 정치적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쿠마의 딸과 부정한 행위가 발각되어 그의 권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 입헌제 도입에 앞서 내각 제도가 창설되면서,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다. 총리대신으로 있으면서 헌법 및 황실전범의 초안을 완성했으며, 1888년 5월 8일에는 헌법 초안을 심의할 추밀원이 신설되자 스스로 총리를 사임하고 초대 의장이 되었다. 1889년 2월에 헌법이 발포 되자 헌법 제정 공로로 욱일동화대수장()을 받았다.

메이지 헌법 제정 이후 실시된 의회제에서는 1890년 귀족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한편 의회제 시행 이후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부는 야당의 예산삭감 투쟁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에 굴복해 마쓰카타 내각이 1892년 중의원을 해산하자 이토가 다시 총리로 선출되어 제 2차 이토 내각을 조직했다. 이후 총리로서 청일 전쟁을 지휘하고 1895년 청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그가 총리로 있는 동안 임명한 미우라 고로 주한 일본 공사에 의해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귀국 후 12월 야당의 공세에 중의원이 해산되자 1898년 1월 12일에 총리로 임명되면서 제 3차 이토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총선 후 제 1당이 된 자유당과 제 2당인 진보당이 손잡고 정부의 증세안을 부결시키자 6월 10일 의회를 해산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당 결성의 필요성을 느낀 이토는 신당 창당을 추진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반대에 직면하자 6월에 총리를 사임했다.

당시 일본은 비밀리에 영국과의 동맹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이토는 개인적으로 러시아와의 만한교환 협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11월 28일 러시아에서의 협상은 성과 없이 끝났고 반면 다음 달 영국 방문에서는 환대 속에 영국 외상과 영일동맹 문제에 관한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이토가 1902년 1월 23일 유럽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30일 영일 동맹이 성립되었다. 1903년 7월에 다시 추밀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1904년 2월 4일에는 원로로서 어전회의에서 러일 전쟁 개시를 결정했다. 전쟁 개시 이후인 3월에는 서울을 방문해서 고종을 알현하고 일본에 대한 협조를 강요했다.

러일 강화 조약 체결 이후 1905년 10월 27일 한국과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손에 넣는다는 고무라 주타로 외상의 구상이 내각 회의에서 통과된 이후 이토는 한국 정부에 조약을 강요하는 일을 맡았다. 그 해 11월 17일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켰다. 1905년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는 수원 관광을 갔다가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을사늑약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청년 원태우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원태우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스스로 통감을 맡았다.

그리고 1906년 3월 이토가 초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해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1907년 5월 22일 을사늑약에 공을 세운 이른바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하는 새 내각을 조직하도록 했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불러들여 궁내대신으로 삼은 이 내각은 총리대신 이완용,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무부대신 권중현,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군부대신 이병무,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 또는 李載崐) 등으로 구성되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그는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의 스승을 자처한다. 유교적 학식이 있었던 그는 이은의 보호자이자 스승이라는 명목으로 그를 데리고 도일한다. 이토는 일본어와 군사 지식을 직접 가르쳤다 한다.

이토의 추궁에 대해 이완용은 우선 이번 사건은 내각에서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극구 변명하며 선처를 빌었다. 이에 대해 이토는 나 역시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본국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는 몸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라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완용은 이토 앞에서 몸둘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다가 거듭 사죄하고 물러 나왔다.

이토는 이어 7월 3일 오후 일본 해군 연습함대의 장교들을 데리고 황제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도 문제의 친서라는 것을 고종에게 보이며 책임을 추궁했다. 이토는 이와 같은 음흉한 방법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는 것은 차라리 일본에 대해 대해 당당하게 선전포고하는 것만 못하다.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황제가 져야 하며 이런 행동은 일본에 대해 적대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으로 협약을 위반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한국에 선전을 포고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총리대신에게 통고했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사건으로 이토가 일시 궁지에 몰린 듯한 것은 사실이다. 일본 신문들이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은근히 한국정부에 대한 감독을 소홀히 한 이토의 책임을 거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토와 일본은 이 사건을 오히려 한국 정부의 주권을 말살하기 위한 호기로 역이용하기로 작정하고 우선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선전포고 운운의 협박을 한 것이다. 이후 이완용은 고종에게 순종의 황제 대리청정을 진언하였고, 고종은 처음에는 그의 대리청정 주장을 거부하다가 수용한다.

고종은 순종에게 양위하기 직전 순종에게 이완용의 진언대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게 한다. 그리고 고종은 그해 말 양위한다. 이토는 고종의 양위식에 참석하였다. 이완용은 조칙이 내려진 19일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의식을 집행해야 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이를 반발해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음으로서 식을 치룰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완용은 자신이 스스로 궁내부대신 임시서리가 되어 7월 19일 황제 대리 의식을 강행했다.

순종의 황제 대리 의식이 있던 7월 19일 그 시간에 반일 단체인 동우회 회원들이 덕수궁에서 2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이완용의 남대문 밖 중림동 집으로 몰려가 집을 완전히 불살라버렸다. 이 사건으로 가재도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서적 등이 모두 타버려 이완용은 10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

강제 합병 방침이 결정된 이후 이토는 1909년 6월 14일에 통감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날 추밀원 의장에 임명됐다.

이토는 바로 하얼빈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 출혈로 10월 26일 오전 11시 경 사망했다. 죽음이 확인된 뒤, 그의 시신은 열차편으로 오전 11시 40분 하얼빈 역을 출발하여 오후 6시 장춘 역에서 쉬다가 다시 장춘을 떠나 1909년 10월 27일 밤 다롄에 도착, 만철 병원으로 옮겨졌다. 만철병원의 영안실에서는 방부제인 포르말린 액이 투입되고, 총탄에 뚫린 세 군데에는 반창고를 붙였다. 이어 시신은 일본 천황이 보낸 회나무관에 들어갔다. 일본제국 군함 아키쓰시마()로 운구되었다. 시신은 동해를 출발, 현해탄을 건너 일본 시모노세키와 모지() 사이의 관문해협으로 들어섰다. 이어 11월 1일 오전 11시 도쿄 근처 항구 요코스카 부두에 입항했다.

시신이 도착하기 전, 요코스카 항에는 인파가 몰려 운구가 지체됐다. 11월 1일 오후 1시경 시신은 인파를 비집고 6량으로 편성된 포차(砲車)에 실려, 2일 오후 1시경 신바시 역에 닿았다. 신바시 역 광장은 약 2천명의 출영자로 붐볐다. 시신은 2일 오후 2시 40분경 아카사카 구() 영남판() 추밀원 의장 관저에 도착했다. 이 관저는 이토의 국장 기간 중 국장 사무소로 쓰였다.

추밀원 회의와 내각 회의는 이 장례를 국장으로 결정했다. 시신이 도쿄로 운구되는 동안 장례식 준비는 완료됐고, 호송 의장병 책임자로는 일본 제국 육군 대장이, 국장의 건축 설계자로는 일본 근대건축의 원로인 내장두() 가타야마()가 임명됐다.

당시 정권 강화와 일본 내부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권 안정화를 위하여 일본 국민들을 그의 장례식으로 단결시키기위하여 국장을 강제로 진행하였다.

국장일인 1909년 11월 4일, 관은 오전 9시에 관저를 출발했고 노제는 히비야 공원에서 치뤘다. 오전 10시 반 히비야 공원에서 유럽식으로 열린 이 국장의 참배객들은 대부분 서양복을 입었으며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및 러시아인 외교관들과 내외빈의 조사가 낭독됐다. 50년 친구라는 후작 이노우에 가오루는 '낙담이 아주 격했다'는 내용의 조사를 낭독했다. 메이지 천황은 '왕정 복고, 유신 공헌, 헌법 초창, 조선 지도 등 공헌'의 결과로 이토를 충정군()으로 추봉하고, 백작에서 공작으로 추증했다.

식이 끝나자 이토의 시신은 마차에 옮겨졌다. 영구는 장지인 도쿄도 임원군() 대정정자 곡수분영(, 지금의 도쿄시 시나카와 구() 곡수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묘역은 묘역 1천5백 평을 도쿄시 예산으로 사들였다. 장남인 농상무 서기관 이토 분키치()가 앞장섰고, 시신은 오후 2시 30분 묘지에 도착했다.

매장이 끝나고 유족과 일부 대관들은, 묘역에서 가까우며 천황이 1906년 이토에게 준 저택인 오모리()의 은사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현재 시나가와 구에 속하고 광우구락부()가 되어 있다(일본광학공업의 소유). 그 집 앞길은 ‘이토 도로()’라고 불린다.  임시증간호 은 장례 후 6일뒤인 1909년 11월 10일에 발행됐는데 이 책에 이토의 무덤이 실렸다.

대한제국 순종은 11월 4일, 궁내부대신 민병석과 조선민족 대표 조중응을 이 국장에 보내고, 대한제국 황실을 대표해서 이토 가족에게 은사금으로 10만원을 전달했다. 그러나 한국 황실의 이와 같은 반응은 이미 국권이 대부분 넘어간 상황인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고, 일제의 계산된 공작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후 경성부 종로에 이토를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남산 근처에는 대형 신사인 박문사가 건립하며 조선 각지에 이토의 동상을 세웠으나, 이 동상들은 1945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한 후에는 모두 파괴됐다.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국방력과 국력의 향상에 기여했으며, 일본 근대 헌법의 제정과 일본 양원제의 확립에 기여했다. 1963년 11월 1일에 발행된 세 번째 1,000엔 지폐의 도안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초상화가 사용되었으며, 이는 1984년 11월 1일에 인물이 나쓰메 소세키로 바뀔 때까지 유통됐다.

이토 히로부미의 본래 성씨인 하야시 가문은 뿌리가 오토모(大友) 일족의 파생된 일족, 또는 지역 명에 따온 성이라고 한다. 히로부미 이후에는 이토 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히로부미의 장남 이토 분키치는 1909년 11월 10일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분키치의 이복형제인 이토 히로쿠니()는 공작에 올랐다.

유교의 춘추대의와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이론자였으나, 국비 시찰단으로 영국에 파견된 이후 영국과 일본의 국력차이에 절망하고 이후 개화론자로 사상을 바꾸게 된다. 이후 그는 영국과 미국과의 수교와 개항, 무역론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또한 일본 각지를 다니며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한 결과 일본의 각 학교에서는 여학생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자 교육자인 쓰다 우메코는 이토와 함께 이와쿠라 사절단의 한사람으로 도미 때 함께 다녀온 뒤로 그와 교류가 있었다. 일본으로 되돌아온 뒤 우메코는 이토에게 영어 교육과 통역을 위해 고용해 이토 집에 머물면서, 이토는 물론 이토의 딸의 가정 교사가되어, 또한 복숭아 여성 학원에 영어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우메코는 1885년 이토의 추천으로 여성 학습원에서 독립하여 설립된 여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활동하며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우메코는 이토의 부국강병론에도 적극 동의하게 된다.

안중근의 이 지적은 1조와 15조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이토가 통감으로 있던 시기의 행위와 일치하며, 안중근이 수차 밝힌 내용과 대동소이함을 감안하면 안중근의 저격은 오랜 기간에 바탕한다 하겠다. 이는 20세기 초반의 한국인들이 이토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 보았는지를 알리는 자료이다. 제1조의 민황후는 명성황후를 지칭한다.




#Article 268: 대한민국의 국기 (692 words)


대한민국의 국기는 태극기(太極旗)라 부르며, 태극기는 흰 바탕의 기 위에 짙은 적색과 남색의 태극 문양을 가운데에 두고 검은색의 건·곤·감·리 4괘가 네 귀에 둘러싸고 있다. 태극기의 최초 도안자는 대한제국의 
고종이다. 태극기는 1882년 고종이 조선의 군주를 상징하는 어기(御旗)인 '태극 팔괘도'를 일부 변형하여 직접 만들었고, 1882년 5월 22일 조미 수호 통상 조약과 9월 박영효 등 일본 수신사 일행에 의해 사용되었다. 태극기는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공식 국기로 사용되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 정식 국기로 사용되고 있다.

조선은 국기가 없었으며, 조선군주를 상징하는 어기는 있었다. 태극기는 조선군주의 어기인 '태극팔괘도'를 일부 변형하여 고종이 직접 도안하여 제작하였다.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를 만들게 된 계기는 청나라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에서 조선이 독립국이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라는 글과 함께 4개의 발을 가진 용 모양을 제시해 놓은 데에서 비롯된다.

미국 전권특사 슈펠트 제독은 만약 조선이 청나라의 '황룡기'와 유사한 깃발을 게양한다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려는 자신의 정책에 위배되는 처사라고 생각해, 조선 대표인 신헌과 김홍집에게 국기를 제정해 조인식에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태극기는 1882년 고종의 명을 받아 어기를 일부 변형하여 제작하였다. 1882년 고종은 태극기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하여, 백성을 뜻하는 흰색과 관원을 뜻하는 푸른색과 임금을 뜻하는 붉은 색을 화합시킨 동그라미를 그려넣은 기를 제작하게 하였다. 이는 고종이 계승하고자 했던 정조의 군민일체(君民一體) 사상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깃발은 다소 일본 제국의 국기와 비슷하다고 하여, 김홍집은 “반홍반청(半紅半靑)의 태극 무늬로 하고 그 둘레에 조선 8도를 뜻하는 팔괘를 그리면 일본 국기와 구분이 될 것”이라 하여, 태극기 문양이 정해졌다.

이에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김홍집은 고종의 명을 받들어 역관 이응준에게 지시하여 직접 배 안에서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하도록 하였고, 9월 박영효 등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어 갈 때에도 일본의 증기선 메이지마루 배 안에서 직접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하였다. 1882년에 고종의 명을 받아 처음 제작되고 사용되었던 태극기 는 1883년 3월 6일(고종 20년 음력 1월 27일) 정식으로 '조선국기'로 채택되었다.

일제강점기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이 발발하며 전국적인 만세 시위에 태극기가 사용되자 태극기는 항일 운동의 상징으로 각인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도 태극기를 사용하였으나 임정 수립 초기에는 태극기를 국기라 칭하지는 않고 단체의 깃발로 사용하다가 1942년부터 한국의 국기를 ‘태극기’라고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태극기는 《주역》의 계사상전(繫辭上傳)에서 나와 있는 태극→양의(兩儀)→사상(四象)→팔괘(八卦)라는 우주 생성론을 나타내는 태극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조선의 태극 팔괘도는 복희 선천 팔괘(伏羲先天八卦)가 아닌 문왕 후천 팔괘(文王後天八卦)이다.

원이 나타나는 태극은 만물을 생성시키는 근원을 의미하며 도교에서는 태소(太素), 탄드라밀지에서는 카르마무드라라고 하며 사고의 개입이 없는 순수하고 완전한 행위를 의미하는 무아전위(無我全爲)의 우주일체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상징한다.

원 안의 모양은 음양 양의를 나타나고 4괘는 팔괘(八卦)를 대표하는 사정괘(四正卦)를 나타내는 것과 동시에 그 하효(下爻)와 중효(中爻)로 태양(太陽)·소음(少陰)·소양(少陽)·태음(太陰)이라는 사상(四象)도 나타낸다.

사괘는 본래 팔괘 중에서 넷을 선택한 것인데, 팔괘는 중국에서 삼황으로 떠받들고 있는 태호 복희가 만든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복희는 동이족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그가 팔괘를 처음 만든 사람이라고 밝힌 것은 《주역》 계사전이 최초이다. 다만 조선에 복희 선천 팔괘가 아닌 그것을 고쳐서 만든 문왕 후천 팔괘를 따르는 까닭은 복희가 팔괘를 만든 까닭이 우주 생성 원리를 설명하려 함인 반면 문왕은 우주 생성 원리를 인간의 치세 원리에 반영(“선천 변위 후천도”에서 이르는 〈“자연조화의 체”를 “인사의 용”에 적용〉한다는 사상)하려고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종래 주장에서는 팔괘에서 “넷을 제하여” 만들었다고 하였으나, 근래에는 “선천 변위 후천도”에서 선천 팔괘와 후천 팔괘의 관계를 밝히어 팔괘 가운데 넷을 선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태극기의 규격은 다음과 같다.

태극기의 공식 색상은 대한민국국기법 시행령에 지정되어 있다. 현재의 공식 색상은 1997년 10월 25일에 정해졌다.

국경일과 그밖의 지정하는 날에 게양한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공공단체의 청사, 학교, 공항·호텔 등의 국제적인 교류 장소 등에는 연중 국기를 게양하도록 되어 있다.

국기는 24시간 게양할 수 있으며, 야간 게양 시에는 적절한 조명을 해야 한다.
강우, 강설, 강풍 등으로 인해 국기의 훼손이 우려될 경우에는 하기 해야한다.

국기를 해가 뜬 동안에만 게양하고자 하는 경우, 다음 시각에 맞추어 게양하고 강하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들 대다수는 태극기는 6.25 전쟁 때 북한군과 중공군, 그리고 소련군과 맞서 싸울 때 사용했던 반공국기의 의미도 있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 당시 한반도의 친일파와 일제군 장교들과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맞서 싸우면서 항일투쟁의 의미를 담고 있는 국기가 태극기인데, 친일파 잔재들을 살려 놔서 논란이 되었던 이승만 대통령과, 만주에서 대한 독립군을 때려 잡던 일본군 장교 출신 유신 친일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을 두둔하는 대한민국 보수 단체들이 태극기를 들고 시위를 일으키는 이상한 행동 등으로 전 대한민국 국민들 대다수에게 매우 심한 비난을 받고 있다.

심지어 동해랑 독도를 한국 땅이라 공식 표기하고, 한국 위안부 소녀상이나 한일 과거사 문제에서도 한국 편을 들어주는 이스라엘 현지 유대인 주민 분들도, 왜 저 보수 집단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한일 위안부 합의로 한국에서 친일 논란으로 비난 받고 있는 박근혜의 피켓을 들면서, 태극기와 성조기랑 더불어 왜 자기 이스라엘 국기를 흔들고 다니는지 이해를 못 한다고 한다.




#Article 269: 알고리즘 (269 words)


알고리즘(, )은 수학과 컴퓨터 과학, 언어학 또는 관련 분야에서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해진 일련의 절차나 방법을 공식화한 형태로 표현한 것, 계산을 실행하기 위한 단계적 절차를 의미한다.

알고리즘은 연산, 데이터 마이닝(기계 학습) 또는 자동화된 추론을 수행한다. 산법(算法), 셈법, 계산 절차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알고리즘은 9세기 페르시아의 수학자인 무함마드 알콰리즈미의 이름을 라틴어화한 알고리스무스()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영어로 의 발음 기호는  또는 이며 을 '알고리즘'으로 표기하는 것은 를 '지스'로,  을 '리즘'으로 표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알고리즘이라는 표기가 알고리듬이라는 표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정지 문제의 결과로 알고리즘이 정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일반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알고리즘에 대해 단순한 직관을 만족하는 형식적인 정의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알고리즘의 공식적인 정의는 없다.

대부분의 알고리즘은 유한한 수의 규칙에 따라 구별 가능한 기호들을 조작하여 입력 정수에서 출력 정수를 생성하기 위한 일반화된 작업을 정의한다. 다음은 좋은 알고리즘의 특징이다.

알고리즘은 자연어, 의사코드, 순서도, 프로그래밍 언어, 인터프리터가 작업하는 제어 테이블, 유한 상태 기계의 상태도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다음은 알고리즘 개발의 정형적인 단계이다.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기술에는 운용 과학의 방법, 을 이용하는 방법 등이 있다. 대부분의 알고리즘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구현되지만, 전기 회로나 생물학적 신경 회로를 사용하기도 한다.

입력의 크기가 일 경우, 점근 표기법 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낸다.

대문자 O 표기법의 정의상 아래의 복잡도는 그 위의 복잡도를 포함하므로, 대부분의 알고리즘은 의 수행 시간을 가진다.

가장 단순한 알고리즘 가운데 하나는 임의로 나열된 숫자들 가운데 가장 큰 수를 찾는 것이다. 다음은 목록 안에 있는 모든 수를 살펴보는 알고리즘이다.

   Input: A list of numbers L.
   Output: The largest number in the list L.

   if L.size = 0 return null
   largest ← L[0]
   for each item in L, do
     if item  largest, then
       largest ← item
   return largest




#Article 270: 위키책 (144 words)


위키책(Wikibooks)은 위키백과의 자매 프로젝트로 2003년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프로젝트는 공동으로 집필한 책 형태의 공개 교과서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이트는 미디어위키 기반이며, 따라서 누구나 편집단추를 눌러 위키책의 내용을 고칠 수 있다.

프로젝트는 영어 위키백과 사용자인 가 고급교육의 기회를 모든 이들에게 확대하기 위해 비용과 제한이 없는 열린 콘텐츠의 생화학, 물리학 등의 교과서를 올려놓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에 따라 만들어졌다.

프로젝트의 범위(교과서만 할 것인가, 모든 책을 대상으로 할 것인가)와 사이트의 내용에 대한 저작권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 것인가, 프로젝트의 이름, URL)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버지니아 주의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의 학생들은 위키책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교재를 직접 편집, 교재로서 사용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교과서의 대체제로서의 가능성이 주목된다고 밝혔다.

위키주니어(Wikijunior)는 위키책의 서브프로젝트(subproject)로서, 어린이용 책을 다루는 위키이다. 이 프로젝트는 잡지와 웹사이트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 네덜란드어, 독일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아랍어, 영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중국어, 카탈루냐어, 터키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핀란드어판 위키책에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위키주니어는 벡 재단()에서 지원을 받고 있다.




#Article 271: MySQL (469 words)


MySQL(마이에스큐엘, )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오픈 소스의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RDBMS)이다. 다중 스레드, 다중 사용자 형식의 구조질의어 형식의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으로서 오라클이 관리 및 지원하고 있으며, Qt처럼 이중 라이선스가 적용된다. 하나의 옵션은 GPL이며, GPL 이외의 라이선스로 적용시키려는 경우 전통적인 지적재산권 라이선스의 적용을 받는다.

위와 같은 지원 방식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이 프로젝트에 저작권을 적용하는 방법과 비슷한 JBoss의 모델과 유사하다. 그러나 기반코드가 개인의 소유자에게 저작권이 있고 커뮤니티에 의해 개발되는 아파치 프로젝트와는 다르다.

MySQL AB는 또한 MaxDB라고 불리는 MySQL AB와는 기반코드가 다른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을 판매했으나 2007년 이래로 MaxDB는 SAP AG가 소유하고 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에 10억 달러에 인수되었으나,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오라클에 인수되며 같이 넘어갔다.

MySQL은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RDBMS)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관리하거나 자료를 관리하기 위한 GUI 관리툴은 내장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용자들은 명령 줄 인터페이스 도구들을 이용하거나 또는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관리하고, 데이터를 백업하는데, 상태를 검사하고, 데이터베이스 구조를 생성하는데, 또는 데이터 레코더를 작성하는데 있어서 MySQL 프론트엔드 데스크톱 소프트웨어나 웹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해야 한다. 공식적인 MySQL 프론트엔드 툴인 MySQL 워크벤치는 오라클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공식 툴인 MySQL 워크벤치는 사용자에게 MySQL 데이터베이스 관리를 그래픽적으로 지원하게 하며, 데이터베이스 구조의 설계도 시각적으로 하게 해주는 MySQL AB에 의해 개발된 자유로운 집적 환경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전의 패키지 소프트웨어였던 MySQL GUI 툴즈를 대체하였다. 여타의 제3자 패키지와 유사하지만, MySQL 현장에서 신뢰할 수 있는 툴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것은 이용자가 데이터베이스를 설계하고, 모델링, SQL 관리(MySQL 쿼리 브라우저 대체) 그리고 데이터베이스 관리(MySQL Administrator 대체)까지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MySQL 워크벤치는 2가지 판이 존재하는데, MySQL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을 수 있는 보통의 자유, 공개 소스인 ‘커뮤니티 판’(Community Edition)과 커뮤니티 판을 확장하여 개선시킨 유료의 ‘스탠더드 판’(Standard Edition)이 존재한다.

응용 프로그램에서 MySQL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하기 위해 다수의 프로그래밍 언어로 된 API를 사용할 수 있다. 이들 API는 언어에 종속적이다.

MySQL은 공식적으로 아래의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한다.

MySQL은 MyODBC라고 불리는 ODBC 인터페이스를 지원해서 다른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한다. 그 예로 ASP와 콜드퓨전을 들 수 있다. MySQL은 대부분 ANSI C로 구현되었다.

MySQL은 미디어위키와 드루팔과 같은 인기있는 웹 애플리케이션에 사용된다. 그리고 LAMP, MAMP, WAMP (리눅스/매킨토시/윈도-아파치-MySQL-PHP/펄/파이썬) 플랫폼의 데이터베이스 구성체로서 작동하며 버그질라와 같은 오픈소스 버그 추적 도구에도 사용된다.

웹 애플리케이션으로서의 MySQL의 인기는 PHP의 인기도와 맞물려 있다. PHP는 종종 MySQL과 결합되며, 다이내믹 듀오(Dynamic Duo)라는 별칭이 붙었다. 인터넷 상의 여러 웹사이트, 혹은 서적을 통해서 MySQL과 PHP의 연동에 대한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최근의 플랫폼에서는 이들의 연동을 자동으로 해 주는 경우가 있다.

또한 SUN 인수 이후, 중소기업이나 개인용 사이트뿐만 아니라 대기업에서도 점차 관심을 보이고 있다. 위키백과, 구글(검색 엔진은 제외), 페이스북, 트위터, 플리커, , 유튜브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버전 별 두드러진 특징은 다음과 같다.

MySQL 서버 6.0.11-알파가 6.0 라인의 최신 판으로 2009년 5월 22일 발표되었다. 이후의 MySQL 서버 개발은 새로운 릴리스 모델을 사용할 것이다. 6.0은 미리 출시판으로 통합될 것이다.

MySQL 5.6은 새로운 출시판의 시금석이 될 예정으로 2011년 MySQL 이용자 컨퍼런스에서 소개되었다. 새로운 특징으로 쿼리 옵티마이저에 대한 성능 향상과 InnoDB의 고성능 트랜잰션 결과, 새로운 NoSQL-스타일 메모리 캐시된 API, 대용량 테이블의 조작과 퀘리를 위한 파티셔닝의 성능 향상, 복제와 성능 모니터링 개선을 PERFORMANCE_SCHEMA를 통해 데이터 확장으로 나은 성능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Article 272: 비주얼 베이직 (966 words)


비주얼 베이직(, )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 베이직 프로그래밍 언어의 일종으로,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스튜디오 제품군의 하나이다. 비주얼 베이직은 사건 기반 프로그래밍의 3세대 프로그래밍 언어이면서, 또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컴포넌트 오브젝트 모델에 따른 풍부한 구성 요소를 가진 통합 개발 환경 및 RAD을 가리키기도 한다. 비주얼 베이직은 초보자가 접근하기 쉬운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시각적인 개발 환경과 더불어 베이직 언어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으로 간주된다.

비주얼 베이직은 베이직의 영향을 받았으며, GUI 응용 프로그램의 RAD개발을 가능하게 해 주며,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접근을 데이터 액세스 오브젝트, 원격 데이터 오브젝트, 또는 ActiveX 데이터 오브젝트들, 그리고 Active X컨트롤과 개체의 생성을 통해 가능하게 한다. 비주얼 베이직 포 애플리케이션이나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와 같은 스크립트 언어들은 문법적으로 비주얼 베이직과 유사하지만, 그 기능은 다르다.

프로그래머는 비주얼 베이직에서 제공하는 구성 요소를 응용 프로그램에 삽입할 수 있다. 또한 비주얼 베이직으로 만든 프로그램은 윈도 API를 사용할 수 있으나, 추가적인 외부 함수 선언이 필요하다.

비주얼 베이직의 마지막 버전은 1998년에 출시된 비주얼 베이직 6.0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연장 지원 기간은 2008년 3월에 끝났으며, 공식적인 후계 제품은 비주얼 베이직 닷넷이다.

프로그래밍 언어 베이직과 마찬가지로, 비주얼 베이직은 쉽게 배우고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비주얼 베이직은 간단한 GUI기반의 응용 프로그램의 개발 뿐만 아니라, 복잡한 프로그램의 개발까지도 가능하게 한다. 비주얼 베이직에서의 프로그래밍은 폼(Form)위에 놓인, 시적으로 정렬된 GUI 위젯(비주얼 베이직에서는 컨트롤이라고 한다)들의 조합이다. 이 컨트롤들은 특별한 속성과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기능의 확장을 위해 추가적인 코드의 입력이 가능하다.

기본적인 속성과 역할이 이들 컨트롤에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간단한 프로그램의 경우 프로그래머는 그다지 많은 코딩 없이 만들 수 있다.

성능상의 문제가 이전 버전에서 많이 보고되었지만, 기술의 발전에 따른 컴퓨터 성능 향상과 원시 코드(Native Code) 컴파일을 통해 이 문제는 많이 사라졌다.

비주얼 베이직 5.0부터 원시 코드로 컴파일된 실행 파일 작성이 가능해 졌지만, 비주얼 베이직으로 작성된 실행 파일은 여전히 1메가바이트 정도 크기의 라이브러리 파일을 필요로 한다. 이 파일은 윈도우 2000과 이후 윈도 버전에서 기본적으로 설치되었지만, 그 이전의 윈도우 95, 윈도우 98, 윈도우 NT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때문에 비주얼 베이직으로 만든 실행 파일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 라이브러리 파일 또한 함께 배포하여야 했다.

폼은 끌어다 놓기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커서를 통해 텍스트 상자, 단추 등과 같은 컨트롤들을 폼 위에 놓는다. 컨트롤들은 속성을 가지며, 이벤트 처리자를 통해 서로 연결된다. 기본값들은 컨트롤이 만들어질 때 함께 제공된 것이지만, 프로그래머에 의해 변경될 수 있다. 많은 속성값들은 프로그램이 실행 중일 때, 응용 프로그램의 사용자의 조작이나 외부 환경의 변화에 의해 변경될 수 있으며, 이것은 동적인 응용 프로그램을 가능하게 해 준다. 예를 들면, 창의 'Resize(크기 변경)' 이벤트 처리자에 컨트롤들의 위치를 재조정하는 코드를 삽입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특정 컨트롤이 계속해서 창의 중앙에 위치하게 하거나, 창 전체를 다 채우는 등의 제어를 할 수 있게 된다. 텍스트 상자의 'KeyPress(키 눌림)' 이벤트 처리자에 코드를 삽입함으로써, 해당 응용 프로그램은 자동적으로 입력된 문자의 대소문자를 변환하거나, 특정 문자의 삽입을 막을 수도 있다.

비주얼 베이직은 실행 파일, ActiveX 컨트롤, DLL 파일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비주얼 베이직의 가장 기본적인 사용 용도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용 응용 프로그램과 데이터베이스 조작 프로그램의 개발에 있다. 덜 기능적인 대화 상자들은 팝업 능력에 사용된다. 프로그래머가 추가적인 코드를 적당한 이벤트 처리자에 삽입해야 하긴 하지만, 컨트롤들은 응용 프로그램에 기본적인 기능성을 제공한다. 예를 들면, 문자열의 입력이 가능한 드롭 다운 리스트 컨트롤은 자동적으로 자신이 가진 목록을 보여주며, 사용자가 항목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사용자에 의해 항목이 선택될 때, 이벤트 처리자가 호출되며, 이 이벤트 처리자는 프로그래머가 추가적으로 코딩한 코드를 처리하는데, 이때 사용자가 선택한 항목의 관련 항목의 출력과 같은, 사용자의 컨트롤에 대한 구체적인 동작에 따른 처리를 할 수 있다.

한편, 비주얼 베이직으로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존재하지 않는 프로그램이나 추가적으로 제공되는 컴포넌트 오브젝트 모델을 통한 Active X 개체를 구성할 수도 있다. 이것은 서버 측면에서의 처리나 추가 모듈을 가능하게 해 준다.

비주얼 베이직은 레퍼런스 카운팅을 통한 쓰레기 수집을 수행하며, 방대한 규모의 추가적인 라이브러리들과, 기본적인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을 지원한다. 대다수의 일반적인 위젯들이 초기 프로젝트 구성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비주얼 베이직 프로그래머가 추가적인 라이브러리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다른 대다수의 프로그래밍 언어와는 달리, 비주얼 베이직은 일반적으로 대소문자 구분을 하지 않으며, 대신에 키워드를 표준 대소문자 설정으로 변환한 뒤, 강제로 변수명의 대소문자를 기호 테이블의 내용으로 변환시킨다. 문자열 비교에 관해서는 대소문자 구분을 하지만, 프로그래머가 원한다면 대소문자 구분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비주얼 베이직의 컴파일러는 다른 비주얼 스튜디오 제품군(C, C++)과 호환성이 있지만, IDE상의 제한으로 인해 윈도 모델 DLL이나 스레드의 사용 등은 불가능하다.

비주얼 베이직은 C 언어 계열의 언어들과 비교했을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비주얼 베이직 1.0은 1991년 5월 발표되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 개발에 있어서의 끌어다 놓기 방법은 앨런 쿠퍼가 개발한 프로토타입 폼 제작기에서 온 것이며, 쿠퍼가 재직했던 회사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트라이포드라고 불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 3.0용 프로그래밍 가능 폼 제작 시스템의 개발을 위해 쿠퍼의 개발팀과 계약 한 후, 프로젝트의 코드네임을 루비라고 명명하였다. (루비 프로그래밍 언어와는 관계 없다.)

트라이포드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비주얼 베이직을 만들기 위해 루비와 베이직 언어를 합치기로 결정했다.

루비 인터페이스 개발기는 비주얼 베이직의 시각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이것은 다시 마이크로소프트의 취소된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인 오메가용으로 설계된 EB(임베디드 베이직 엔진)와 합쳐졌다. 루비는 또한 훗날 비주얼 베이직 확장(VBX)이라고 명명될 추가적인 컨트롤들을 포함하기 위한 DLL 로드 기능을 지원하였다.

버전 5.0에서 Win16 코드와의 호환성을 버리고 전반적인 기능을 강화했다. 버전 6.0에서는 인터넷 관련 기능이 대폭 강화되었다.

비주얼 베이직 닷넷은 기존 버전과 다르게, 닷넷의 일부분으로 동작하고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이 강화되었다. 또한 기존 버전과의 호환성이 없기 때문에 기존 비주얼 베이직 코드를 비주얼 베이직 닷넷 코드로 옮겨 주는 마법사가 있다.

그러나 네이티브 비주얼 베이직은 버전 6.0 이후로 마이크로소프트가 완전히 포기하여 사라진 언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2011년 현재, 프로그래밍 입문 언어로서 시스템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변수, 메모리 등)이 없이도 프로그래밍의 시작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또, 액셀 등 오피스에서 사용되는 VBA 의 문법이 비주얼 베이직 6.0 버전과 호환됨에 따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입문용으로도 또 실무용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여러 스크립트 언어들은 비주얼 베이직으로부터 파생한 것이다. 비주얼 베이직 자체는 베이직과 강력한 연관성을 가지며, 결과적으로 닷넷 프레임워크 플랫폼 버전으로 대체되었다.

다음 언어들은 비주얼 베이직에서 파생한 것이다:

다음은 이 언어의 예제 코드이다. 창이 호출되면 Hello, World! 메시지 상자를 표시한다:

Private Sub Form_Load()
    ' Hello, World라는 내용의 메시지 상자를 띄웁니다.
    MsgBox (Hello, World!)
End Sub

아래 코드는 Count 변수가 1초에 1씩 올라가도록 한다.(작동을 위해서는 타이머 컨트롤이 필요하다)

Option Explicit
Dim Count As Integer
Private Sub Form_Load()
    Count = 0
    Timer1.Interval = 1000 ' 밀리초 단위
End Sub
Private Sub Timer1_Timer()
    Count = Count + 1
    lblCount.Caption = Count
End Sub




#Article 273: 디버그 (137 words)


디버깅() 또는 디버그()는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 단계 중에 발생하는 시스템의 논리적인 오류나 비정상적 연산(버그)을 찾아내고 그 원인을 밝히고 수정하는 작업 과정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디버깅을 하는 방법으로 테스트 상의 체크, 기계를 사용하는 테스트, 실제 데이터를 사용해 테스트하는 법이 있다.

버그(bug)와 디버깅(debugging)이라는 용어는 1940년대 그레이스 호퍼가 기원이다. 그러나 기술적 오류라는 문맥에서의 버그는 적어도 1878년과 토머스 에디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프트웨어 버그 문서 참고)

디버거()는 디버그를 돕는 도구이다. 디버거는 주로 원하는 코드에 중단점을 지정하여 프로그램 실행을 정지하고, 메모리에 저장된 값을 살펴보며, 실행을 재개하거나, 코드를 단계적으로 실행하는 등의 동작을 한다. 고급 디버거들은 메모리 충돌 감지, 메모리 누수 감지, 다중 스레드 관리 등의 기능도 지원한다.

안티 디버깅(Anti-Debugging)이란 디버깅을 방해하고 분석을 방해하는 기술이다. 

디버깅을 당한다면 해당 디버거 프로그램을 종료시키거나 에러를 발생시키는 방법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분석을 방해한다. 안티 디버깅 기술에는 수 많은 방법이 존재하며 발전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이를 우회하는 기술도 계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Article 274: 춘천시 (811 words)


춘천시(春川市)는 대한민국 강원도 중서부에 있는 시이자 강원도청 소재지이다. 태백산맥의 서쪽에 위치하며, 영서 지방의 거점 도시이다. 경춘선 철도의 시·종점이고, 중앙고속도로와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교차한다. 해발고도 1,000m 이상의 태백산맥 지맥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봉의산(301m)을 등지고 북한강과 소양강이 합류하는 충적지에 도심을 이룬다. 소양호, 춘천호, 의암호 등 호수가 많아 하류의 홍수 조절과 관광지 및 내륙수로 역할을 한다. 시청은 옥천동에 있고, 행정 구역은 1읍 9면 15동이다.

춘천 지역은 고대 부족 국가인 맥국의 수도로서 후일 신라에 정복되었으며, 637년(선덕여왕 6년)에 우수주(牛首州)라 부르고 군주(君主)를 두었다. 673년(문무왕 13년)에 수약주(首若州)로 개칭하였고, 경덕왕 때 삭주(朔州)로, 후에 광해주(光海州)로 고쳤다. 940년(고려 태조 23년) 춘주(春州)라 칭하고 고려 성종 14년(995년), 단련사(團練使)를 두어 안변부에 예속, 신종 6년(1203) 도호부로 승격, 지춘주사(知春州事)로 격하되었다. 태종 13년(1413) 춘천으로 고쳐 군이 되고 1415년 도호부, 고종 24년(1887) 춘천 유수군(留守郡)을 두고, 이궁(離宮)을 신축하여 위급할 때의 피난지로 지정했다.

춘천시는 강원도의 중서부에 있으며, 북한강 지류, 소양강 본류와의 합류점에 가까운 남안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인제군, 양구군, 서쪽으로 경기도 가평군, 북쪽으로 화천군, 남쪽으로 홍천군과 접한다. 시의 동 · 서 · 남쪽에는 넓은 춘천 분지가 전개되어 있다. 춘천은 북한강 침식 분지의 중심에 위치하며, 시가는 호수 가운데 발달하여 수향 도시를 이루며, 호반의 도시라 별칭된다. 시의 중앙부에는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鳳儀山)이 솟아 있다.

춘천시의 기후는 냉대 동계 소우 기후(Dwa)와 냉대 습윤 기후(Dfa)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기후이기도 한다.

춘천시의 행정 구역은 15동 1읍 9면이다. 면적은 1,116.35 km²이고, 이 중 시내 동 면적은 52.66 km²이다. 인구는 2017년 3월 31일 기준으로 116,273세대, 282,439명이다. 성별 인구는 남성 139,427명, 여성 144,092명이다.

춘천시(에 해당하는 지역)의 연도별 인구 추이

춘천시·군(춘성군)의 대통령 선거 투표 성향은 여타의 강원도 지역과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전국 득표율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경우도 가끔씩 있었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윤보선이 41,774표를 얻었고 박정희가 28,984표를 얻었다. 다만 춘성군 지역에서는 박정희에 투표한 비율이 더 높았다. 이런 성향은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 후보가 약 2천여표 차로 줄어드는 변화를 겪다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가 48,607표를 얻고 김대중이 38,802표를 얻는 등 강원도의 일반적인 성향과 유사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직선제 개헌으로 1987년 16년 만에 직선으로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태우가 65,431표를 얻었고 김영삼이 34,751표를 얻었으며 김대중이 12,220표를 얻어 전국적으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득표율이 비등했던 과는 달리 노태우 후보가 상대적으로 많은 표를 얻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이 46,580표를 얻었고 김대중이 18,716표를 얻었으며 정주영이 44,675표를 얻어 전국 개표 결과와는 달리 김영삼과 정주영이 거의 유사한 득표율을 보였다.

가장 최근에 치러진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새누리당 박근혜가 93,414표를 얻었으며 민주통합당 문재인은 69,365표를 획득하였다.

현재 시의원 선거구는 총 8개 선거구로 되어 있으며 한 선거구당 1~3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되어있다. 2019년 현재 춘천시의회는 제10대 시의회이다. 1991년 초대 춘천시 · 춘성군의회가 개원하였으며 1995년 통합 시의회가 출범하였고 제2대 의회가 개원하였다.

춘천시의회 정당별 의석 수는 다음과 같다.

경지 면적 7,015㏊ 중 논 2,222㏊, 밭 ,793㏊이며, 농가 가구 5,878, 농가 인구 15,272이다. 도시인을 상대로 하는 고등채소 및 과일류 등의 근교 원예농업이 활발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콩·저류다.

춘천·의암·소양강·화천(華川) 등의 수력발전소에서 약 40만kW의 전력을 공급받는데다가 공업용수와 노동력이 풍부하여 좋은 공업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상수원보호구역, 군사구역 등 각종 규제때문에 개발이 제한되어있다. 1969년부터 춘천경공업단지가 조성되었으며, 73년 5월 공업장려지구로 지정되었다. 후평공단은 69년 조성된 공업단지로 전자·식품·섬유 등의 약 30개 업체가 입주해 있고, 1985년에 창촌(倉村), 1989년에 퇴계·당림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식품·섬유·조립금속기계장비 등의 제조업체가 입주해 있다. 2008년에 거두리 농공단지, 2013년 수동 농공단지가 준공하였다.

금·은·형석 등이 매장되어 있으나, 사북면에 신포형석광이 가행되고 있을 뿐이며, 연간 8천 톤 내외를 채굴하여 주로 일본에 수출한다. 수력자원으로서는 시설용량 4만 5천kW의 의암발전소와 5만 7,600kW의 춘천발전소, 20만kW의 소양강 발전소가 준공되어 대한민국 주요 전력공급지로서 산업 성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중앙시장·풍물시장 등 6개 시장이 있는데 연간 거래액은 2조여 원에 달하며 그중 약사명동에 위치한 중앙시장이 역사도 오래거니와 규모나 거래액에 있어서도 제일 크며 최근 낭만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010년 약사천 복원사업으로 인해 약사동에 위치하였던 풍물시장이 온의동 경춘선 하부 공간으로 이전하였다. 시내에 생산업체가 없기 때문에 생필품은 대부분 서울에서 반입하며 그 밖에 아케이드·백화점이 여러 곳 있어 각종 의류와 귀금속·일용 잡화가 매매되고 있다. 또 사농동에 농산물도매시장이, 퇴계동에 수산물 유통센터가 있어 신선한 농수산물이 싼 값에 신속히 공급되고 있다.

해마다 5월에는 소양제가 열린다. 호반의 도시라는 특성을 살리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는데, 봉의산제, 민속놀이, 수상불꽃놀이, 보트 경주대회, 국악경영 등이 진행된다. 봉의산제는 고려 때 몽골군의 침입을 막으려고 봉의산성에서 싸우다 전사한 선현의 넋을 달래는 추모제이다.

춘천은 의암호·춘천호·소양호로 인해 호반 도시로 전국에 널리 알려져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데, 연간 1000만여 명에 달하여 관광 수입도 많다. 소양강댐의 주운을 중심으로 내설악의 관광루트가 개발되어 관광도시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하고 있다. 관광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고 항공편을 비롯한 각종 교통이 편하다. 호수 외에 공지천 유원지·고산 소금강·추곡약수·등선폭포·구곡폭포 등의 경승지가 있다. 그 밖에 춘천호반에는 중도선사유적지를 비롯해 남이섬, 청평사 등의 관광지가 있다.

과거, 서울과 춘천 사이를 잇는 철도 노선인 경춘선이 있어 수도권에 접근하는 교통이 비교적 편리한 편이었으며, 2010년 12월 21일, 경춘선이 복선 전철화 개량사업이 완료됨과 동시에 수도권 전철 노선으로 개편되면서, 서울로의 접근성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되었다. 2012년 2월 25일에는 ITX-청춘이 경춘선에서 운행을 시작하였다. 춘천에서 출발하여 대구광역시를 거쳐 부산광역시까지 이어지는 중앙고속도로가 2001년 개통되고, 2009년, 서울특별시에서 출발하여 춘천을 거쳐 양양군으로 이어지는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개통되는 등, 타 지역과의 도로 연결망도 잘 갖추어진 편이다. 2016년 7월 8일 서울∼춘천~속초간 동서고속화철도 건설사업이 최종 확정되어 기존 경춘선 복선전철 연장되어 속초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강원 FC는 2016년 12월 성남 FC와의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여 2017년 K리그 클래식으로의 승격에 성공한다. 2017년 부터는 평창 알펜시아 스키점프장을 홈 경기장으로 사용한다. 이후 스플릿 라운드부터 다시 송암레포츠타운을 홈구장으로 사용중이다.

대한민국 육군 2군단 본부 및 그 예하 부대가 위치한다.




#Article 275: 협업 소프트웨어 (252 words)


협업 소프트웨어, 혹은 그룹웨어(groupware)는 여러 사용자가 각기 별개의 작업 환경에서 통합된 하나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소프트웨어이다. 로터스 소프트웨어의 로터스 노츠 (Lotus Notes)가 그 효시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협업 소프트웨어의 가치는 증대되었다. 예를 들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일정을 기록함으로 인해 일정 기록이 매우 유용해진 것처럼 말이다.

그룹웨어의 확장으로 협업 미디어가 있을 수 있는데, 이는 여러 명의 사용자가 동시에 웹사이트 내의 정보를 생성하고 관리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이다. 협업 미디어의 예로는 위키와 슬래시닷 (slashdot)을 들 수 있다.

그룹웨어는 협업의 수준에 따라 세 개의 범주로 나뉘어 설명하기도 한다. 이 세 범주는 각각 커뮤니케이션 도구, 회의 도구, 그리고 협업 관리도구이다.

협업 소프트웨어들은 웹 기반일 수도 있고, 데스크톱 PC 상의 소프트웨어일 수도 있다.

또한 최근에는 모바일 사용이 늘어남에 따라 모바일에서의 업무처리 및 커뮤니케이션이 늘어나고 있다.

방법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영역 별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협업 소프트웨어를 도입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쓰도록 유도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소프트웨어에 익숙해지기까지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피고용자들이 협업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기여하는 데에 대한 대가가 있어야 하며, 그 대가는 금전적이거나, 심리적인 형태로 주어진다.

많은 경우 협동작업은 회사의 사내문화와 잘 맞지 않을 수 있으며, 따라서 협업 소프트웨어의 도입이 오히려 불화를 일으킬 수 있다. 경쟁적인 것에서 협동적인 것으로 사내 문화를 바꾸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며, 대부분의 경우 최고경영자를 포함한 조직의 모든 단계의 변화가 요구된다

그룹웨어는 클라우드 기반 협업 서비스 개념으로 발전을 하고 있다. 해외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Office 365와 구글의 G.Suite등이 서비스를 하고 있고 최근에는 페이스북도 Worksplace라는 서비스를 내놓으면서 차세대 그룹웨어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국내의 경우 통신사형 그룹웨어, 호스팅형 그룹웨어, 개발형 그룹웨어가 있다.




#Article 276: 인류학 (1103 words)


인류학(人類學, )은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연구의 대상과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다. 19세기 이후 학문으로서 체계화되었으며 미국과 유럽에서 서로 다른 관심을 갖고 발전되어 왔다. 오늘날 인류학은 보다 전문적인 여러 하위 학문으로 나뉘어 있다. 하위 학문으로는 형질인류학, 고고학, 문화인류학 등이 있다. 형질인류학의 연구분야로는 인간의 기원과 진화를 다루는 분야와 현대 인류의 다양성을 연구하는 분야가 있다. 고고학은 선사시대와 같은 오래된 인류의 유적 등을 연구하여 당시의 문화 등을 규명하는 것을 주요 연구분야로 삼고있다. 문화인류학은 오늘날 다양하게 존재하는 여러 문화들에 대해 총체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여전히 석기를 사용하는 문화에서부터 현대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에 대해서 가족, 친족관계, 경제생활, 정치생활, 종교생활과 같은 여러 문화적 생활을 연구하여 해당 사회의 내적 규칙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밖에도 민족학(ethnology), 민속학(folklore) 등을 인류학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오늘날 인류학이라고 하면 사회문화인류학을 지칭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인류학과 연관된 사회나 문화를 중심으로한 연구분야는 많은 현대이론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으며 핵심적 기초과학 학문이다.

인류학의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문화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비교문화론·총체적 접근(holistic approach)이 그것이다. 문화상대주의는 자신만의 관점으로(자신의 문화를 기준으로) 타문화를 평가하는 것을 경계하며 특정한 가치를 절대 기준으로 삼지 않아야 함을 뜻한다. 문화상대주의와 반대되는 용어로는 자민족중심주의 또는 자문화중심주의(ethno-centrism)이다. 비교문화론(또는 비교문화론적 접근)이란 연구대상이 되는 문화를 다른 문화와 상호 비교하여 서술하는 것을 말한다.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없고, 있다 하더라도 문화라는 추상적 대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할 방법은 없다. 오직 다른 문화와의 비교를 통해 서술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인류의 공통적인 문화라는 것에 대하여 그 뿌리나 원리(the root and the nature)를 탐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총체적 접근이란 근대의 다른 학문들처럼 특정한 주제에 한하여 연구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적·기계적 관점으로 인간과 사회를 보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을 뜻한다. 이를 통하여 문화인류학자들은 복잡한 실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문화인류학은 총체론적 관점에서 사회와 문화를 정치·종교·역사·경제·법·제도·예술 등등이 기계적으로 통합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총체로서 종교가 곧 정치이고 정치가 경제이며 경제가 역사라는 안목을 강조한다. 즉 하나의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 개개인의 관념과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이 어떻게 전체와 연결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보통 형질인류학, 문화인류학, 고고학, 언어인류학으로 분류된다. 다양한 민족들에 관한 자연 그대로의 설명과 해석이 인류학의 특징이지만 그 주제나 연구방법이 고유한 것은 아니다. 인류학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역사와는 다르다. 이는 인류학이 민족·제도·종교 또는 관습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를 배제하기 때문이 아니라 문서자료를 통한 설명보다 인간, 인간의 활동, 인간의 생산물에 대해 가능한 한 직접 관찰을 중요시 한다. 또한 이런 모든 연구 결과를 인간에 관한 총체적인 기록의 일부로 볼 뿐 아니라, 인류의 생물학적·문화적인 발전과 관련된 복합적인 과정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본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신체·정신의 다양성과 집단적인 차이를 연구한다는 측면에서 인류학의 접근방법은 생리학 또는 심리학과도 다르다. 인류학자들은 인류의 전역사에서 시간과 공간의 측면에서 특정 집단과 활동이 갖는 고유한 특성을 연구하고 해석하려 한다.

형질인류학 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진화학적 틀에서 연구한다. 인간이 어떻게 지구상에 넓게 퍼져 살게 되었는가가 관심분야이며 어떻게 지역적으로 인류가 다르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등 종족으로서 인류를 연구한다.

문화인류학 은 문화와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민족지같은 현장에서 참여하며 관찰하는 것을 중요시 한다.

고고학 은 물질적 인간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유물을 통한 연구가 주로 이루어진다.

언어인류학 혹은 인류학적 언어학은 인간의 의사소통과정을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음성이나 비음성적인 다양한 언어를 시간과 공간, 사회적 언어의 사용 그리고 언어와 문화와의 관련을 연구한다.

인류학은 영국에 전통을 둔 사회인류학, 미국에서 발전해 온 문화인류학,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민족학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대 인류학은 수많은 갈래로 퍼져나가고 있으며, 그중 21세기 초기에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분야 학문 중 개발인류학, 의료인류학 등이 있다.

현대 인류학은 대륙발견시대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기술적으로 발전해 있던 유럽 문화는 다양한 토착문화와 폭넓게 접촉하게 되었는데, 유럽인들은 이 문화들을 일괄적으로 '야만' 또는 '원시' 문화로 규정했다.

같은 시기에 마르크스와 그 영향을 받은 사상가들은 그와는 다른 사회진화론을 주장했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한 사회의 경제적인 생산양식이 일련의 지배원리를 결정한다. 이 지배원리는 생산양식이 변한 후에도 한동안 지체되는 것이 특징이며, 그결과 지배원리와 생산양식 사이에 갈등이 일어남으로써 새로운 사회질서가 생긴다. 이러한 통일된 이론들은 여행가·상인·선교사 들이 수집한 지식을 바탕으로 씌어진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 The Golden Bough〉(1890) 같은 대중적인 저서와 달리 몇 년 안 되어 학문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문화인류학이 독자적으로 하나의 성숙한 사회과학 분과로 발전하는 동안 형질인류학은 자연현상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위치를 규정하고, 인간과 다른 영장류 사이의 차이를 알아내고, 다양한 인종의 신체적인 차이를 분류하는 일에 계속 관심을 두었다. 19세기 후반 다윈의 진화론이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가운데, 형질인류학자들은 고대인류를 추적하는 데 고고학자들과 고생물학자들의 발굴 성과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모스는 프랑스의 레비스트로스, 영국의 말리노프스키와 래드클리프브라운과 같이 이질적인 접근방법을 꾀한 이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말리노프스키는 계속 엄격한 기능주의적인 접근방법을 추구했으며, 래드클리프브라운과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 원리를 발전시켰다. 두 학파는 사회사를 사회이론의 토대로 보지 않는 점을 제외하고는 별개의 방향으로 발전했다. 기능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단 하나의 타당한 방법은 그 현상이 사회에서 수행하는 기능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반면 구조주의자들은 사회구성원들이 신화와 상징을 통해서만 인식하는 폭넓은 현상의 구조적 성격 및 대상을 알아내려 했다.

현대인류학의 관심과 기법은 물리학·생물학·행동과학·사회과학 등 폭넓은 전문분야에 걸쳐 있다. 예를 들면 원자물리학 덕분에 고고학적인 발굴물의 상대적인 연대를 측정하기 위한, 방사성 탄소를 이용한 연대측정법과 같은 기술이 발전했다. 여러 민족의 지리적인 기원을 알아내기 위한 연구에는 인간의 유전을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이 개발한 방법이 이용되고 있다. 유럽 집시들이 원래 인도 태생이었다는 추측을 입증할 수 있었던 것은 유전학 기술을 응용해 혈액형을 조사함으로써 밝혀진 사실이다. 여러 민족들의 가족관계, 근친상간 금기와 같은 종교적·법적인 관습을 이해하는 데에는 정신분석이론에 주로 바탕을 둔 심리학의 원칙이 채택되고 있다.

인류학자는 현지조사(fieldwork, 현지연구, 현장연구, 현장조사 등으로 번역됨)를 통해 연구대상에게 다가간다. 이러한 방법론은 문헌연구의 허구성을 통렬히 반박하며 발로 뛰는 학문으로서 인류학의 실천적 성격을 형성하여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무문자사회를 연구하는 경우 1년 이상 현장 연구하는 것이 기본인데, 1년이란 기간은 지구상 대부분의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활의 주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인류학자는 먼저 해당 사회의 언어를 습득하고 라포르(rapport), 즉 현지인들과의 신뢰관계를 몇 개 월을 걸쳐서 먼저 확립하고, 실질적인 조사는 그 다음에 시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로 문화인류학이라고 하면 무문자사회 또는 미개사회를 연구하는 것이라는 편견도 있다. 그러나 이때 무문자사회라는 것도 반드시 문명과 동떨어진 사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가 있더라도 문자로 기록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연구를 수행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무문자사회'의 개념이 확장된 이유는 20세기 들어 국민교육이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하면서 무문자사회가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문자가 있는 사회나 심지어는 예컨대 서구와 같은 문명사회에 대한 조사를 할 경우도 있다. 그러한 경우, 현지조사 이전에 문헌조사를 하는 것이 권장된다.

현지조사는 내실적으로 참여관찰, 인터뷰, 설문조사법 등이 포함되는데, 그밖에 지도 그리기, 물질문화 수집, 영상촬영 및 녹음 등등의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또 현지조사를 할 경우에는 자신의 입장이 내부자적 입장인지 외부자적 입장인지에 따라 현지조사의 결과물인 민족지(ethnography, 문화기술지/민족지)의 서술 전략이 달라지므로 스스로의 입장에 대한 고민과 반추가 요구된다.

모든 학문은 당대의 관념을 반영하며, 특히 인류학처럼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은 사회와 각종 영향관계가 폭넓고도 깊다.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인류학은 인종주의와 서구 중심주의(우월주의)의 근거를 제공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인류학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제국주의·식민주의 자체의 특성이며, 국민국가 형성기에 벌어진 타자화의 과정 속에서 다른 학문들 모두가 함께 저지른 과오이다. 그러나 인류학은 여느 학문과 달리 상대론적 세계관을 재빨리 확립하였고, 이어서 연구대상들에 대한 인간적인 관계 맺음을 통해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시작하였다. 즉 진화주의의 오류를 극복하고, 문화를 현상적으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의 각종 논리와 사고의 연구에 집중하면서 오늘날에는 지구촌 차원에서 모든 인간들이 서로 평등함을 인식케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소수민족 연구는 현대 도시 내에서의 타자로 전락한 수많은 마이너리티들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의 기반이 되었으며, 오늘날 인류학은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에 앞장서서 각종 의제를 던지고 기존의 거대담론이 갖는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Article 277: 워드 커닝햄 (142 words)


워드 커닝햄(Ward Cunningham, 1949년 5월 26일 ~ )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위키의 개념을 만든 사람이다.

그는 1995년에 Portland Pattern Repository라는 최초의 위키 사이트를 만들었다. 여전히 운영중인 그 사이트는 사람, 프로젝트, 패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프로그래밍과 관련한 아이디어들의 비공식적인 역사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패턴 언어에 대한 정보라든지, extreme programming의 방법론 등을 담고 있는 사이트이다. 커닝햄 자신은 위키의 개념을 착안한 것이 1980년대 후반이었으며, 그 개념을 처음으로 구현한 것은 하이퍼 카드(HyperCard) 스택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하이퍼카드를 사용해서 매킨토시에서 작동하는 위키의 전신인 패턴브라우저라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그는 (Bo Leuf와 함께) The Wiki Way의 공동 저자이기도 하다.

워드 커닝햄은 커닝햄커닝햄 사의 설립자이다. 그는 또한 Wyatt Software 사의 개발 책임자로서 근무했었고, Tektronix Computer Research Laboratory에서 선임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워드는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방법론의 일종인 익스트림 프로그래밍에 관련된 공헌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는 힐사이드 그룹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워드 커닝햄은 현재 인디애나주 미시간 시티 (인디애나주)에 살고 있다.




#Article 278: 자유 저작물 (116 words)


자유 저작물()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 복사, 수정 및 재배포할 수 있도록 특별한 제한이 없는 작품이나 창작물, 정보를 말한다. 자유 소프트웨어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자유의 개념을 모든 저작물로 확장한 개념이다.

자유 저작물은 저작권이 소멸된 퍼블릭 도메인은 물론, 저작권이 있지만 위 기준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허락된 저작물도 포함한다.

자유 저작물은 저작물의 내용을 수정한 후에도 역시 같은 제한을 가진 라이선스로 배포해야 하는 카피레프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수정한 버전은 다른 조건으로 (때로는 자유 저작물이 아닌 조건으로) 배포할 수도 있다.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는 카피레프트 라이선스의 대표적인 예이고, BSD 허가서는 카피레프트가 아닌 라이선스의 예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로 배포된 작품의 경우, 비영리나 변경금지 제한이 없는 경우는 자유 저작물에 해당한다. 하지만 비영리 혹은 변경금지 제한이 있는 경우에는 자유 저작물에 속하지 않는다.




#Article 279: 쑹메이링 (725 words)


쑹메이링(, 1897년 3월 5일 ~ 2003년 10월 23일) 여사는 전부 근대 중국의 출현 동안 눈에 띈 세 명의 쑹 자매중에 막내로 중화민국 총통인 장제스의 부인이다.  상하이 출신으로 권력을 사랑한 여인으로도 알려진 그녀는 쑹아이링·쑹칭링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중국의 부유한 감리교도인 쑹 자매의 부친 찰스 존스 쑹은 미국에서 수학하였고, 쑹메이링을 로 유학을 보내어 그녀는 석사와 함께 1917년 졸업하였다.  장제스는 1927년 그녀에게 결혼하는 데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자신의 첫 부인과 이혼하였다.  쑹메이링 여사는 활동적으로 중국의 정치에 참여하게 되어 신생활 운동을 일으키고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중화민국 입법원의 회원과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중국 항공 정세 위원회의 사무총장을 지냈다.  자신의 남편이 대원수와 국민당의 당수가 되는 데 상승하면서 쑹 여사는 그의 영어 통역, 비서와 조언자로서 활동하였다.

미국에서 그녀의 경험들은 그녀를 유능한 대변인으로 만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동안 그녀는 넓게 여행을 다녀 중국의 곤경을 알리고 일본군에 대항하는 성원을 유도하였다.  1943년 그녀는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데 첫 중국 국적이자 두번째 여성이었다.  1948년 쑹 여사는 국민당의 성원을 위하여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호소하러 미국에 갔다. 1949년 타이완에서 중화민국 임시 정부의 설립 후, 그녀는 장제스 총통의 부인으로서 중화민국의 정치에서 현저한 역할을 하였다.  25년 가까이 그녀는 미국의 10명의 가장 존경받는 여성들의 명단에 포함되었고, 2번이나 타임 잡지의 표지에 나왔으며 한번은 남편과 함께, 한번은 용의 여성 타이틀 아래 혼자였다.  1975년 장제스의 사망 후 그녀는 106세의 나이에 자신의 사망까지 미국에 거주하였다.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화민국에 의존할 때 도운 공로로 1966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훈1등)을 수여받았다.

본적은 하이난섬 원창으로 상하이에서 감리교로 개종한 하카인 가족에게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 쑹자수는 영어로 된 이름 찰스 존스 쑹을 이용하여 미국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부유한 사업가이자 성경을 출판한 목사였으며 쑨원의 친구이자 재정적 성원자였다.  쑹메이링은 6명의 자식들 중에 셋째로 그녀의 첫째 언니는 쑹아이링, 자신 위의 언니는 쑹칭링이었고, 3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쑹칭링은 후에 쑨원에게 결혼하였다.

메이링의 첫째 언니 쑹아이링은 조지아주 메이컨에 있는 에서 수학하러 미국으로 건너갔다.  쑹메이링은 8세의 나이에 상하이에 있는 미국인 사립 학교인 모타이어 스쿨에 입학하였다.  1913년 그녀는 자신의 언니들의 모교 웨슬리언 여자 대학교에서 대학을 시작하였으나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던 자신의 남동생 쑹타에원에게 가까워지기 위하여 웰즐리 칼리지로 옮겼다.  1917년 6월 19일 쑹메이링은 영문학에서 주요 전공과 철학에서 소수 전공과 영예들과 함께 졸업하였다.  그녀는 33명의 듀랜트 장학생들 중의 하나로서 인정을 얻었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결과로서 그녀는 후에 미국의 관중들과 자신의 연결을 도움을 준 발음된 조지아주 말투와 함께 가장 좋은 영어를 하였다.

쑹메이링 여사는 신생활 운동을 일으켜 중국 정치에서 활동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녀는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중화민국 입법원의 회원, 그리고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중국 항공 정세 위원회의 사무총장이었다.  1945년 그녀는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자신의 남편이 대원수와 국민당의 당수가 되는 데 상승하면서 쑹메이링 여사는 그의 영어 통역, 비서와 조언자로서 활동하였다.  그녀는 그의 명상, 그의 전망, 그의 청각이며 특히 그의 가장 충성적인 옹호자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동안 쑹메이링 여사는 중국의 대의를 촉진하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과 이오시프 스탈린과 동등하게 자신의 남편을 위하여 유산을 구축하는 데 노력하였다.  중국과 서양 양쪽의 문화에서 정통한 그녀는 중국과 해외 양쪽에서 인기있게 되었다.  그녀의 두드러짐은 자신이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돼야 할 기행으로 조지프 스틸웰을 이끌었다.

쑹메이링은 중국을 위한 재료와 군사 성원을 위하여 수도 없이 미국을 방문하였다.  거기서 그녀는 30,000명의 사람들 만큼 큰 관중들을 끌었고, 두번이나 타임 잡지의 표지에 나왔으며, 처음에 올해의 남성과 아내로서 자신의 남편과 함께, 그리고 용의 여성 타이틀 아래 홀로였다.  남편과 부인은 둘다 국민당을 위하여 미국의 대중으로부터 돈과 성원을 모으는 데 자주 노력한 타임 잡지의 상급 편집자이자 공동 창립자 헨리 루스와 함께 좋은 조건들에 있었다.  1943년 2월 18일 그녀는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데 첫 중국 국적이자 2번째 여성이 되었다.

쑹메이링 여사는 11월 장제스가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직접 만나는 데 카이로 회담에서 남편을 동행하였다.  3명의 정상들은 일본이 침입한 영토들의 통치를 포기하고, 타이완과 만주가 중국으로 반환되고 한국이 완전한 독립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동의하였다.  그녀는 또한 일본에 대항하는 데 중국을 성원하고 있던 스틸웰 중장과 장제스 사이에 의사 소통을 하였다.

장제스와 국민당은 타이완에서 중화민국 임시 정부를 설립하였다.  쑹메이링 여사는 지속적으로 국제적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중화민국과 그 이익들을 대표하러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장려자, 영국 중국 기금 원조 연합의 명예 의장과 권리 기념 사회의 첫 명예 회원이었다.  장제스가 노인이 되기 시작하면서 쑹메이링 여사는 통역의 역할을 취하여 권력을 말하였다.  25년의 세월 가까이 그녀는 미국의 10명의 가장 존경받는 여성들의 명단에 포함되었다.

쑹메이링 여사는 자신의 오랜 동맹들 중에 성원을 강화하는 데 1988년 장징궈의 사망에 타이완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총통으로서 장징궈의 후임자 리덩후이는 그녀보다 정치에서 더욱 능숙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녀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시안, 쿠데타〉 (1937), 〈이것이 우리의 중국이다〉 (1940), 〈중국은 다시 상승해야 한다〉 (1942)와 〈확실한 승리〉 (1955)를 포함한 다수의 기사와 몇몇의 책들을 썼다.

그해 쑹메이링 여사는 자신의 롱아일랜드 사유지를 팔았고, 맨해튼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그레이시 스퀘어 아파트에서 나머지 일생을 보냈으며 자신이 지나가면서 로비를 청소한 검은 양복의 경호원들에 의하여 둘러싸였다.




#Article 280: 찰스 디킨스 (1090 words)


찰스 존 허펌 디킨스(, , 1812년 2월 7일 - 1870년 6월 9일)는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한 영국의 소설가이다.

화가 시모어(Robert Seymour)의 만화를 위해 쓰기 시작한 희곡 소설 《The Pickwick Papers(원제:The Posthumous Papers of the Pickwick Club)》(픽윅 보고서)를 분책(分冊)으로 출판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그는 특히 가난한 사람에 대한 깊은 동정을 보이고, 사회의 악습에 반격을 가하면서, 사회에 대한 실제의 일들의 묘사를 이야기 형식으로 완성했다. 후기 소설에는 초기의 넘치는 풍자는 약해졌으나, 구성의 치밀함과 사회 비평의 심화는 주목할 만하다. 그의 작품으로 자전적 요소가 짙은 《데이비드 코퍼필드》 《위대한 유산》 등을 비롯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럴》 《두 도시의 이야기》 등이 있다.

찰스 디킨스는 영국의 포츠머스에서 해군 경리국의 하급 관리였던 존 디킨스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배로의 슬하 여덟 아이 가운데 둘째 아들로 1812년 2월 7일 태어났다. 찰스가 다섯 살 때, 가족은 채텀(Chatham)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그가 열 살 때, 가족은 다시 런던의 캄덴으로 이사했다.

사립학교에서 약간의 교육을 받았지만, 경제관념이 부족했던 아버지가 채무 관계로 갇히면서 가세가 점점 기울었다. 디킨스는 공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으나, 부모님의 권유로 돈을 벌기 위해 12살 때 런던의 한 구두약 공장에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루 10시간의 노동을 해야 했다. 이로 인해 디킨스는 어른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이 경험은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으며, 자서전적인 소설인 《데이비드 코퍼필드》(1849∼1850)에는 중산층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어린 찰스가 노동자로 전락하여 느끼는 고통스러운 좌절감이 잘 나타나 있다. 자본주의 발흥기(勃興期)에 접어들던 19세기 전반기의 영국 대도시에서는, 번영의 이면에 무서운 빈곤과 비인도적인 노동(연소자의 혹사 등)의 어두운 면이 있었다.

디킨스는 중학 과정의 학교를 2년 정도 다니다가 15세때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환을 했으며 다음해 1828년 법원의 속기사를 거쳐서 신문사 속기 기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여러 신문사에 글을 기고하게 되는데, 1834년 《아침 신문》의 의회 담당 기자가 되어 처음으로 ‘보즈’라는 필명으로 런던의 삶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을 발표했고, 1835년 조지 호가스가 편집인인 《저녁 신문》에 〈런던의 풍경〉 등 여러 글을 기고했다. 디킨스는 조지 호가스와 인연을 맺으면서 그의 딸인 캐서린과 결혼하게 되었고, 처제인 메리를 데리고 첼시에 정착하는데, 메리가 1837년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순수했던 메리에 대한 그리움은 나중에 《골동품 가게 이야기》(1840∼1841)에서 어린 넬로 재현된다.

소설의 인기로 많은 돈을 벌게 된 디킨스는 가정적으로는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 결국 거듭된 과로로 인해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을 완성하지 못하고, 1870년 6월 9일 58세의 나이로 개즈 힐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후 디킨스는 성공회 교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들의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디킨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노동자들은 주막에서 “우리의 친구가 죽었다”고 울부짖었다 한다. 디킨스의 사망 소식에 당시 신문과 잡지들은 며칠 동안 그의 일대기로 지면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한 신문의 부고는 디킨스의 소설이 갖는 시대적 의미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들을 몇 작품 든다면,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퍼필드》, 《올리버 트위스트》, 《니콜라스 니클비》, 《크리스마스 캐럴》 등이 있다. 그의 사후에 출판된 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이 아닌, 본받음의 대상으로 따르려고 하고 있다. 그의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쓴 책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그의 대표적인 소설이며 자서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Little Dorrit》은 신랄한 풍자로 이루어진 명작이다.

디킨스의 소설들은 사회적인 기록을 작품으로 옮긴 것들이었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빈곤과 사회 계층에 대한 신랄한 비평가였다.

디킨스는 세상에서 탈출하는 한 수단으로 연극에 매료되었고, 이러한 연극과 연극인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의 작품 《니콜라스 니클비》에 녹아 있다. 디킨즈 자신도 자신의 작품의 장면들을 대중들 앞에서 매우 자주 낭독하여 연출가로서의 역량을 보여 주었다. 그는 공연 투어를 통해 영국 전역과 미국을 널리 여행했다.

디킨스의 작품 스타일은 현란하고 시적이다. 영국 귀족주의의 속물근성에 대한 그의 풍자 — 그는 그의 작품 속에서 그러한 인물을 “고귀한 냉장고”라고 부른 바 있다 — 는 사악할 정도로 익살맞다. 그의 소설속에 나오는 인물 중의 몇몇은 괴기스럽기까지 하여, 그의 작품중에는 유령이 등장하거나, 유령 이야기가 나열되는 작품들이 있다. 예를 들면 [하나의 성탄절 벨]에는 일곱 명의 유령이 등장하는 데, 그에 맞서 싸우는 스크루지가 묘사된다.

그와 동시대 작가 중 몇몇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작품들 중 몇 가지는 반유대주의로 비판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올리버 트위스트》의 패긴이라는 인물은 메부리코와 탐욕스러운 눈을 가진 전형적인 유대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물론 디킨즈가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기 이전의 사회에 살았음은 기억해두어야 한다. 그리고 단지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해서 그러한 인물을 설정했다는 것에도 일견 타당성이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 등장하는 악역인 스크루지는 동양과 서양이 섞인 혼혈인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 작품을 통해, 디킨스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유지하고, 상류사회에 대한 회의를 간직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실업자, 성 노예자 등의 인물에 대한 연민을 찾아 볼 수 있다.

디킨스의 탁월성은 대중성과 사회 현안에 대한 성찰에 있다. 디킨스의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대중과의 연애였다. 그는 평생 대중과 연애하듯이 그들에게 충심을 다했고 그의 모든 일이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그는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소설 낭독을 위해 영국 곳곳과 미국을 여행했다. 가는 곳마다 대대적인 성공이었고 대중들의 눈물 어린 환대와 지역 유지의 영접을 받았다. 그의 낭송 여행은 개인적 이벤트로 생각되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공적이며 국제적인 행사로 받아들여졌다. 디킨스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여 경탄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사랑을 받았고 친구로 여겨졌다. 디킨스는 마치 현대의 최고 할리우드 스타가 누리는 만큼의 대중적 인기를 소설가로서 누렸고, 현대 주요 일간지가 사회 현안에 미치는 영향만큼이나 그의 의견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찰스 디킨스는 다시 말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이다.

찰스 디킨스는 가난에 대한 경험, 부의 경험도 누려본 작가로서 둘에 대한 비판을 수월하게 해내였다. 하지만 요즘에 화두에 오르는 매체에 의하면 찰스 디킨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구걸할 때에는 귀찮다는 식으로 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루머일 뿐, 찰스 디킨스의 디킨지안(dickensian) 소설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디킨스는 전통 피카레스크 소설, , 감상 소설 등에서 다양한 문학적 영향을 받았다. 영국 전기 작가 는 디킨스가 가장 중요한 영향을 ‘아리비안 나이트’에서 받았다고 말한다. 피카레스크 소설의 중심은 풍자와 아이러니다. 코미디도 피카레스크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으며 로렌스 스턴, 헨리 필딩, 이 주축이 된 영국 전통 피카레스크 소설을 이끌었다. 필딩의 ‘기아 톰 존스의 이야기(The History of Tom Jones, a Foundling)’는 디킨스를 포함한 19세기 후반 소설가들에게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디킨스는 필딩의 책을 유년시절에 읽고 그의 아들에게 ‘헨리 필딩 디킨스’ 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디킨스의 문체는 언어적 창의성이 풍부하다. 캐리커처에 재능이 있는 디킨스는 풍자를 실감나게 잘한다. 초기 평론가들은 디킨스가 예리하고 실용적인 감각으로 유쾌한 삶을 포착해내는 점이 로코코 시대의 영국의 화가 윌리엄 호가스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호가스와 다르게 디킨스는 동시대의 인기 있는 극장의 관습을 반영하여 내용을 다양한 계층 언어로 표현하였고 이에 극찬을 받았다. 디킨스는 독자들을 사로잡을 등장인물의 이름을 창작해는 것에 집중하였는데 독자들이 연관성을 느끼고, “우화적 자극”으로 소설의 의미를 주제에 담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예시들 중 하나를 가져오자면 책 ‘데이비드 코퍼필드(David Copperfield)’ 에서의 등장인물 ‘에드워드 머드스톤(Edward Murdstone)’은 쌍둥이가 암시한 살인(murder)과 돌(stone)처럼 차가운 냉기를 떠오르게 한다. 또한 디킨스의 문체는 환상과 현실이 조화롭게 어울린다. 디킨스가 영국의 귀족적 속물 근성을 풍자한 것은 유명하다. (그는 한 인물을 “고귀한 냉장고” 로 불렀다) 환상의 비행이라고 극찬 받은 비유에는 고아를 주식/배당금에, 사람들을 줄다리기에, 저녁 만찬 손님을 가구에 비유한 것이 있다.

디킨스는 삽화가들에게 전체적 스토리를 먼저 제공하여 등장인물 및 설정을 그가 생각한대로 정확히 그려 낼 수 있게 했다. 삽화가에게 1달분의 삽화 계획을 미리 준 후 디킨스는 글을 썼다. 책 “”의 삽화가인 마커스 스톤은 디킨스를 회상하며 그가 “한 등장인물의 아주 작은 특징과 내가 창작해 낸 인물의 생애를 세세하게 묘사할 준비”를 강조했던 것을 기억한다.




#Article 281: 오픈오피스 (926 words)


아파치 오픈오피스(, 이전 이름: OpenOffice.org)는 다양한 운영 체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오피스 제품군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97-2003 포맷을 비롯한 다양한 포맷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데이터 교환을 위한 고유 파일 포맷으로 ISO 표준인 오픈도큐먼트 포맷(ODF)을 지원한다.

오픈오피스는 스타디비전이 개발하고 1999년 8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지금의 오라클)가 인수한 스타오피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높은 품질의 대안을 제공함으로써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지배적인 시장 점유율을 줄이려는 목적으로 2000년 7월에 스타오피스의 소스 코드를 공개하였다. 이후 오픈오피스 커뮤니티(OpenOffice.org)에서 오픈오피스 개발 및 관련 활동을 책임지고 있고,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오픈오피스 커뮤니티에 소스 기여/자금 기여/인력 기여 등을 통해 오픈오피스 개발과 활동을 지지하는 관계로 변하였다. 그리고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그렇게 개발되는 오픈오피스를 기반으로 전용 구성 요소를 추가한 스타오피스를 판매하였다. 그 뒤 현재는 아파치 소프트웨어 재단이 이 소프트웨어 제품군을 관리하고 있다. 오픈오피스는 아파치 라이선스 2.0을 따르는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이다.

원래 독일 회사인 스타디비전이 스타오피스라는 독점 소프트웨어로 개발했으나 1999년에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코드를 인수했다. 1999년 8월에는 스타오피스 버전 5.2를 무료로 제공하였다.

오픈오피스는 2.0.3 버전부터 업데이트, 기능 향상, 버그 수정을 배포하기 위한 배포 주기를 종전의 18개월에서 3개월로 변경했다. 현재, 새로운 기능을 포함한 버전(feature release)은 그 사이에 나오는 버그 수정 버전(bug fix release)과 번갈아 가며 6개월마다 배포된다.

썬은 오픈오피스를 기반으로 한 상용 독점 소프트웨어 스타오피스를 위해 오픈오피스 개발을 보조하고 있다. 스타오피스는 버전 6.0 이후로 오픈오피스 소스 코드를 기반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추가 독점 구성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오픈오피스는 OpenOffice.org XML 파일 포맷을 포함하여 스타오피스의 많은 기능을 물려받았는데, 이 포맷은 버전 2에서 ISO 표준인 오픈도큐먼트 포맷(ODF)으로 바뀔 때까지 유지되었다.

선언문을 보면, 오픈오피스 프로젝트는 “모든 주요 플랫폼에서 동작하고, 오픈 컴포넌트에 기반을 둔 API와 XML에 기반을 둔 파일 형식을 통해서 모든 기능과 데이터에 대한 접근을 제공함으로써 세계를 선도하는 오피스 제품군을 만드는 커뮤니티가 되는 것”이다.

오픈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경쟁하고,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비슷한 외관과 느낌을 구현하는 것을 지향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를 비롯한 많은 다른 응용 프로그램들이 사용하는 파일 형식 중 대부분을 읽고 쓸 수 있다. 이는 많은 사용자에게 꼭 필요한 기능이다. 오픈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이전 버전 파일뿐만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에서 열지 못하는 손상된 새 버전의 파일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전 매킨토시 워드 파일(MCW)은 열 수가 없다.

오픈오피스는 리눅스, 윈도, OS X, 솔라리스, FreeBSD, OpenVMS, IRIX에서 사용할 수 있다. 현재 가장 중점적으로 지원되는 플랫폼은 윈도, 리눅스, 솔라리스이다. 오에스 텐용 버전의 경우 2.x버전의 경우 X11이 설치되어 있어야만 제한적인 기능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나 3 버전부터는 OS X의 아쿠아 인터페이스에서 네이티브로 작동하는 향상된 버전으로 제공되고 있다. 그 외로 OS X 전용으로 개발된 네오오피스도 있다. 네오오피스는 오픈오피스에서 떨어져 나간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오픈오피스 2.X 시절부터 아쿠아 버전의 오픈오피스를 제공하였다.

오픈오피스는 최신 오피스 제품군에서 제공하는 기능들을 제공하는 응용 프로그램들이 모여 있으며, 그 안에 들어있는 각 프로그램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많은 구성 요소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호환되도록 설계되었다. 구성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윈도와 리눅스에서 컴퓨터 시작 시 구동되는 프로그램이다. 컴퓨터가 시작될 때 오픈오피스를 위한 핵심 파일들과 라이브러리들을 로드하여 나중에 제품군의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할 때 빨리 시작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픈오피스 응용 프로그램들의 시작 시간은 1.0 버전의 제품군에서 공통된 불만이었으며, 퀵스타트는 이런 종류의 문제의 해결 방법으로 나온 것이다. 버전 2.2에서는 이 부분에서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다.

사용자의 동작을 기록하여 이를 OOoBasic(오픈 오피스 오브젝트 베이직)을 이용하여 재생함으로써 작업의 자동화에 도움을 주는 다이알로그 프로그램으로
매크로 기록기는 다이알로그 인터페이스외에도 오픈오피스베이직의 베이직 에디터(The Basic Editor)를 제공하는데 이는 직접적인 프로그래밍언어로 조작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매크로 기록기는 오픈오피스베이직으로 소스코드에의한 직접적인 사용방법도 가능하다.
내장된 오픈오피스(오브젝트)베이직(OpenOfficeBasic)이 기본으로 구동되지만 파이썬,빈 쉘(Bena Shell),자바 스크립트등도 연동시킬수있다.
윈도에서는 이들 구성 요소를 따로따로 설치할 수는 있어도 별개로 다운로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 리눅스 배포판에서는 이 구성 요소들을 패키지로 쪼개서 배포하며 따로따로 다운로드하고 설치할 수 있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은 스타오피스 베이직에 기초한 프로그래밍 언어로 응용 프로그램용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베이직(VBA)과 비슷하다. 오픈오피스 2.0 노벨 에디션은 추가로 마이크로소프트 VBA 매크로를 지원하며, 이 기능은 주 버전에서도 곧 통합될 것으로 기대된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은 라이터(Writer)와 칼크(Calc) 응용 프로그램에서 쓸 수 있다. 이는 서브루틴이나 매크로를 부르는 함수로 쓰이며, 각 매크로는 한 문단에서 단어 수를 세는 것과 같은 서로 다른 일을 수행한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은 특히 프로그램 안에 내장되지 않은 반복 작업을 하는 데 유용하다.

오픈오피스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인 베이스는 라이터를 이용해 리포트와 폼을 만들기 때문에, 베이스 또한 오픈오피스 베이직으로 프로그램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의 프로그래밍작업은 같이 제공되는 베이직 에디터(The Basic Editor)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다음은 라이터(Text Document)에서 다수의 매쓰(Fomula)오브젝트들을 삽입한후 글자크기,폰트,가운데정렬을 위한 일괄 패치 매크로 소스이다.

REM ***** BASIC *****

Sub Main
   embeddedObjects = ThisComponent.getEmbeddedObjects()
   elementNames = embeddedObjects.getElementNames()
   for i=0 to UBOUND(elementNames)
      element = embeddedObjects.getByName(elementNames(i)).Model
      if (element.supportsService(com.sun.star.formula.FormulaProperties)) then
         element.BaseFontHeight = 11
         element.FontNameVariables= Noto Serif CJK KR,Italic
         element.FontNameFunctions = 나눔명조
         element.FontNameNumbers= Noto Serif CJK KR
          element.Alignment =com.sun.star.style.TabAlign.CENTER

      endif
   next i
   ThisComponent.reformat()
End Sub

오픈오피스 베이직의 프로퍼티를 구성하는 API는 사용자가 거의 대부분의 오픈오피스 자원에 접근할 수 있게 도와준다.

오픈오피스를 대규모로 쓰는 사용자는 싱가포르 국방부, 그리고 영국의 브리스톨 시청 등이다. 프랑스에서는 오픈오피스가 소프트웨어 조달을 합리화시키면서도 안정되고, 기록 보관을 위한 표준 파일 형식을 원하는 지역과 국가 행정부의 관심을 끌었다. 리눅스를 쓰는 인도 대법원과 알라하바드 고등법원은 완전히 오픈오피스에 의존하고 있다.

스타오피스 말고도, 오픈오피스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상업 제품들도 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SISSL 라이선스로 개발되었다(오픈오피스 2.0 베타 2까지 유효하다.). 대체로 이들은 지역 특화 또는 틈새 시장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음성 인식 모듈, 자동 데이터베이스 연결, 또는 더 나은 CJK 지원과 같은 전용 애드-온이 들어 있다.

예전에 오픈오피스는 자유 소프트웨어가 아닌 자바 런타임 환경에 의존성이 커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선 마이크로시스템이 자바 창시자이자 오픈오피스의 선도 후원자라는 사실은 이 기술 채택에 숨은 뜻이 있다는 비판을 낳았다. 버전 1은 몇몇 보조 기능을 위하여 현재 사용자 컴퓨터에 있는 자바 런타임 환경(JRE)에 의존하지만, 버전 2에서는 자바 사용이 늘어나면서 이 제품군은 JRE를 요구한다. 그에 대응하여, 레드햇은 자유 자바 구현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늘렸다. 레드햇의 페도라 코어 4(2005년 6월 13일 출시)는 GCJ와 GNU Classpath에서 동작하는 오픈오피스 버전 2를 포함하고 있다.

오픈오피스의 한국어화 작업은 처음 썬마이크로시스템의 의뢰로 미지리서치가 스타오피스를 한국어화하고 그 결과물을 오픈오피스에 반영하였다. 이후 한국어판은 썬마이크로시스템의 지역화 팀에서 계속 관리하고 있는데, 2008년 4월 배포된 2.4판 이후부터는 오픈오피스 한국어 팀이 참여하였다.

현재까지 한국어 오픈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리눅스, OS X에서 사용할 수 있다.




#Article 282: 리눅스 (4450 words)


리눅스()는 1991년 9월 17일 리누스 토르발스가 처음 출시한 운영 체제 커널인 리눅스 커널에 기반을 둔 오픈 소스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 계열이다. 리눅스는 일반적으로 리눅스 배포판 안에 패키지 처리된다.

배포판에는 리눅스 커널과 지원 시스템 소프트웨어, 그리고 라이브러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들 가운데 다수가 GNU 프로젝트에 의해 제공된다. 수많은 리눅스 배포판은 배포판 이름에 리눅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은 GNU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름에 일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GNU/리눅스(GNU/Linux)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저명한 리눅스 배포판에는 데비안, 페도라, 우분투가 포함된다. 상용 배포판에는 레드햇 엔터프라이즈 리눅스(RHEL), 수세 리눅스 엔터프라이즈 서버가 포함된다. 데스크톱 리눅스 배포판에는 X11이나 웨이랜드 등의 윈도잉 시스템, 그리고 그놈, KDE 플라스마 등의 데스크톱 환경이 포함된다. 서버용 배포판은 그래픽스 기능이 제되어 있거나 LAMP 등의 솔루션 스택이 포함될 수 있다. 리눅스는 자유로이 재배포가 가능하므로 누구든지 어떠한 목적으로든 배포판을 만들 수 있다.

리눅스는 처음에는 인텔 x86 아키텍처에 기반한 개인용 컴퓨터용으로 개발되었으나 그 뒤로 기타 운영 체제 외에 더 많은 플랫폼으로 이식되었다. 스마트폰에 안드로이드(리눅스 기반임)가 우세해지면서 리눅스는 또한 모든 범용 운영 체제 가운데 가장 많은 설치 기반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데스크톱 컴퓨터 중 대략 2.3%만이 리눅스를 사용하지만, 리눅스 커널 기반 크롬 OS를 구동하는 크롬북은 미국 K-12 교육 시장을 지배하며 미국 내 300달러 미만 노트북 컴퓨터 가운데 20%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 리눅스는 서버 시장에서 주도적인 운영 체제이며(상위 100만 대 웹 서버 운영 체제 중 96.4% 이상이 리눅스이다), 메인프레임 컴퓨터 등의 기타 빅 아이언 시스템을 주도하며 TOP500 슈퍼컴퓨터에 쓰이는 유일한 운영 체제이다.(2017년 11월 이후로 모든 경쟁자를 점차적으로 제거하였다).

리눅스는 또한 일반적으로 운영 체제가 펌웨어로 빌드되면서 시스템에 높은 수준으로 맞추어진 임베디드 시스템에서도 동작한다. 여기에는 라우터, 자동화 컨트롤, 스마트 홈 기술(예: 구글 네스트), 텔레비전(삼성전자, LG전자의 스마트TV는 각각 타이젠과 웹OS를 사용함), 자동차(예: 테슬라, 아우디, 메르세데스-벤츠, 현대자동차, 도요타는 모두 리눅스에 의존함), 디지털 비디오 레코더, 비디오 게임기, 스마트워치가 포함된다. 팰컨 9와 드래곤 2의 항공 전자기기는 커스터마이즈된 리눅스 버전을 사용한다.

리눅스는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협업의 매우 저명한 예시들 가운데 하나이다. 소스 코드는 누구든지 GNU GPL 등 개별 라이선스에 따라 상업적으로나 비상업적으로 이용, 수정, 배포가 가능하다.

유닉스 운영 체제는 1969년 미국 ATT의 벨 연구소에서 켄 톰프슨, 데니스 리치, 더글러스 매클로이, 조 오사나(Joe Ossanna)에 의해 착안되어 구현되었다. 1971년 처음 출시된 유닉스는 온전히 어셈블리어로 작성되었으며 당시 어셈블리어로 작성하는 것은 일상적이었다. 1973년 주된 선구자적 접근으로 데니스 리치가 일부 하드웨어 및 입출력 루틴을 제외하고 C 프로그래밍 언어로 재작성하였다. 유닉스의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 구현체의 이용이 가능하게 되면서 다른 컴퓨터 플랫폼으로 이식이 더 용이해졌다.

유닉스의 컴퓨터 사업 진입을 금지하던 초기 미국의 독점금지법으로 인해 ATT는 운영 체제의 소스 코드를 모든 요청자에게 라이선스할 필요가 있었다. 1984년, ATT는 벨 연구소와 분리되어 자유 라이선스를 요구하는 법적 책무를 면제하였고 벨 연구소는 유닉스를 사유 제품으로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여기서 사용자는 유닉스 수정이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1983년 리처드 스톨먼이 시작한 GNU 프로젝트는 온전히 자유 소프트웨어로 구성된 완전한 유닉스 호환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만드는 목표를 두었다. 작업은 1984년 시작되었다. 나중에 1985년, 스톨먼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을 시작하였고 1989년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GNU GPL)를 작성하였다. 1990년대 초, 운영 체제에 필요한 프로그램들 다수(예: 라이브러리, 컴파일러, 문서 편집기, 유닉스 셸, 윈도 시스템)가 완성되었으나 장치 드라이버, 데몬, GNU/허드라는 이름의 커널 등 저급(low-level) 요소들이 정체되거나 완성되지 못하였다.

리누스 토르발스는 1991년 당시 GNU 커널을 이용할 수 있었다면 자기 스스로 개발을 결정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법적 문제로 인해 1992년까지 출시되지 못했음에도 NetBSD, OpenBSD, FreeBSD의 기원이 된 386BSD의 개발이 리눅스의 개발의 토대가 되어주었다. 또, 토르발스는 386BSD가 당시 이용 가능했더라면 아마 리눅스를 개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언급하였다.

미닉스는 컴퓨터 과학 교수 앤드루 타넨바움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운영 체제의 원리를 학습하고자 한 학생들과 다른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소형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로서 1987년 출시되었다. 미닉스의 소스 코드 전체가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했음에도 라이선스 조항으로 인해 2000년 4월 라이선스 변경이 될 때까지 자유 소프트웨어로 자리잡지는 못하였다.

토르발스는 미닉스에서 리눅스 커널의 개발을 시작했으며 미닉스용으로 개발된 응용 프로그램 또한 리눅스에서 사용되었다. 나중에 리눅스는 성숙하여 더 나아가 리눅스 커널 개발이 리눅스 시스템에서 이루어졌다. GNU의 응용 프로그램들 또한 모든 미닉스 구성 요소를 대체하였는데, 그 이유는 미숙한 운영 체제에 GNU 프로젝트에 자유로이 이용 가능한 코드를 사용하는 것이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GNU GPL로 라이선스된 코드는 동일하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로 출시하는 한 다른 컴퓨터 프로그램에도 재사용이 가능하였다. 토르발스는 상용 재배포를 금지하였던 자신의 오리지널 라이선스로부터 GNU GPL로의 전환을 시작하였다. 개발자들은 GNU 구성 요소들을 리눅스 커널로 통합하는 일을 시작함으로써 온전히 기능하는 자유 운영 체제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리누스 토르발스는 자신의 발명품을 Freax로 호칭하길 원했는데 이는 free, freak, x(Unix의 암시)의 혼성어였다. 그가 시스템에 자신의 일을 시작하는 동안 프로젝트의 makefile 중 일부에 약 6개월 동안 Freax라는 이름이 포함되었다. 토르발스는 이미 이 이름을 리눅스(Linux)로 고려하였으나 처음에는 이 이름이 너무 독선적인 단어로 일축하였었다.

개발을 용이케 하기 위해 파일은 1991년 9월 FUNET의 FTP 서버(ftp.funet.fi) 에 업로드되었다. 헬싱키 공과 대학교(Helsinki University of Technology, HUT)의 토르발스의 동업자 아리 렘케(Ari Lemmke)는 당시 자발적인 FTP 서버 관리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Freax는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이 프로젝트의 이름을 토르발스와 상의 없이 서버상에서 Linux로 명명했다. 그러나 나중에 토르발스는 리눅스의 명칭 사용에 동의하였다.

토르발스가 쓴 뉴스그룹 게시물에 따르면, Linux라는 용어는 ( -리눅스-로 발음하는 것이 좋겠다고 언급되었다. 어떻게 리눅스가 발음되는 것이 좋을지를 추가로 증명하기 위해 그는 커널 소스 코드에 오디오 가이드()를 포함하였다.

호비스트들에 의해서만 사용되지 않고 운영 환경에 리눅스를 채택하는 일은 1990년대 중반 슈퍼컴퓨팅 커뮤니티에서 처음 불붙기 시작했는데, NASA(미국 항공 우주국) 등의 단체들이 점차 비용이 많이 드는 자신들의 기계들을 리눅스 구동의 저렴한 일상 컴퓨터 클러스터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델과 IBM, 이후 휴렛 팩커드가 데스크톱 운영 체제를 독점하던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해방되고자 리눅스 지원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리눅스 시스템은 임베디드 시스템에서 사실상 모든 슈퍼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컴퓨팅 전반에 사용되며, 대중적인 LAMP 애플리케이션 스택 등 서버 설치본에 자리잡았다. 가정과 기업 내 리눅스 이용은 증가되고 있다. 리눅스 배포판은 넷북 시장에서 대중화되기도 했으며 수많은 장치들에 커스터마이즈된 리눅스 배포판이 미리 설치되었고 구글은 넷북용으로 설계된 자신들의 크롬 OS를 출시하였다.

소비자 시장에서 리눅스의 가장 위대한 성공은 모바일 장치 시장으로 볼 수 있는데, 안드로이드는 스마트폰의 가장 지배적인 운영 체제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태블릿, 그리고 최근에는 웨어러블에서도 매우 대중화되었다. 리눅스 게이밍은 리눅스 지지를 표방하고 자체 게이밍 지향 리눅스 배포판인 스팀OS를 출시한 밸브의 성장과 함께하고 있다. 리눅스 배포판들은 또한 다양한 지역, 그리고 브라질 연방 정부 등 국가 정부들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다.

그레그 크로하트맨(Greg Kroah-Hartman)은 리눅스 커널의 주도적인 유지보수자로서 개발을 가이드하고 있다. 윌리엄 존 설리반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의 이사로서 GNU 구성 요소들을 지원하고 있다. 개인과 기업들은 GNU가 아닌 서드파티 구성 요소들을 개발한다. 이 서드파티 구성 요소들은 커널 모듈과 사용자 애플리케이션, 라이브러리를 포함하는 경우가 있다.

리눅스 벤더들과 커뮤니티들은 커널, GNU 구성 요소, GNU가 아닌 구성 요소를 리눅스 배포판이라는 형태로 추가적인 패키지 관리자와 결합하여 배포한다.

수많은 오픈 소스 개발자들은 리눅스 커널이 설계된 것이 아니라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된 것임에 동의한다. 토르발스는
유닉스의 설계가 발판 역할을 하였음에도 리눅스는 수많은 돌연변이와 함께 성장했으며 돌연변이는 무작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DNA의 알파 입자보다 더 빠르고 더 자발적인 방향이었다고 생각한다.
레이먼드는 리눅스의 혁명적인 면모를 기술이 아닌 사회적인 것으로 본다. 리눅스 이전에 복잡한 소프트웨어를 소규모 단체들에 의해 주의깊게 설계되었으나 리눅스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화하였다. 거의 처음부터 인터넷을 통해서만 조직화되는 상당한 수의 자발적 이용자들에 의해 무심코 해킹되었다. 품질은 엄격한 기준이나 독재적으로 관리되지 않았고 수일 동안 사용자 수백 명으로부터 피드백을 받아 매주 릴리스하는 단순한 전략을 취함으로써 개발자들이 도입한 돌연변이의 빠른 다윈 선별 정렬 방식을 만들어냈다. 리눅스 기반 시스템은 모듈 방식의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이며 1970년대와 1980년대 중 유닉스 안에서 구축된 원리로부터 기초적 설계 대부분을 가져왔다. 이러한 시스템은 프로세스 제어, 네트워킹, 주변기기 접근, 파일 시스템을 관리하는 모놀리식 커널을 사용한다. 장치 드라이버는 커널에 직접 통합되어 있거나 시스템 실행 중에 로드되는 모듈로 추가된다.

GNU 유저랜드는 리눅스 커널에 기반한 대부분 시스템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안드로이드가 바로 주목할만한 예외이다.
프로젝트의 C 라이브러리의 구현체는 커널 사용자 공간 인터페이스에 필수적인 리눅스 커널의 시스템 호출의 래퍼로서 동작하며 툴체인은 리눅스 커널을 빌드하기 위해 사용되는 컴파일러 모음집이며 코어유틸리티는 수많은 기초적 유닉스 도구들을 구현한다. 이 프로젝트는 또한 저명한 CLI 셸인 Bash를 개발하고 있다. 대부분의 리눅스 시스템에 쓰이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는 X 윈도 시스템 구현체 위에 빌드된다. 근래에 리눅스 커뮤니티는 X 윈도 시스템 대신 새로운 디스플레이 서버 프로토콜로서 웨이랜드 사용을 추구한다. 수많은 기타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프로젝트가 리눅스 시스템에 기여한다.

설치되는 리눅스 시스템 구성 요소는 다음이 포함된다:

셸로 알려진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명령 줄 인터페이스(CLI),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 또는 임베디드 시스템에 일반적인 관련 하드웨어에 부착된 컨트롤일 수 있다. 데스크톱 시스템의 경우 기본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일반적으로 그래픽이지만 터미널 에뮬레이터 창이나 별도의 가상 콘솔을 통해 CLI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CLI 셸은 텍스트 기반 사용자 인터페이스이며 입출력을 위해 모두 텍스트를 사용한다. 리눅스에 사용되는 저명한 셸은 Bash(본 어겐 셸)이며 본래 GNU 프로젝트용으로 개발되었다. 유저랜드의 다양한 부분을 포함하는 가장 낮은 단계의 리눅스 구성 요소들은 예외적으로 CLI를 사용한다. CLI는 특히 반복적이거나 지연되는 작업의 자동화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매우 단순한 프로세스 간 통신을 제공한다.

데스크톱 시스템에서 가장 대중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GUI 셸이며 KDE 플라스마, 그놈, 메이트, 시나몬, LXDE, Pantheon, Xfce 등 확장 데스크톱 환경과 함께 패키징되지만 다양한 추가 사용자 인터페이스들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대중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들은 이른바 X로 불리는 X 윈도 시스템에 기반을 둔다. 네트워크 투명성을 제공하며 특정 시스템에서 실행 중인 그래픽 애플리케이션이 다른 시스템에서 표시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사용자가 애플리케이션과 통신할 수 있다. 그러나 X 윈도 시스템의 특정 확장 기능들은 네트워크를 경유하여 동작하지 못한다. 참고 구현체를 포함(가장 대중적인 것이 X.Org 서버)하여 일부 X 디스플레이 서버들이 존재한다.

서버 배포판은 개발자와 관리자들을 위해 명령 줄 인터페이스를 제공할 수 있으나 시스템의 특정 목적을 위해 설계된, 최종 사용자를 위한 사용자 지정 인터페이스를 제공한다. 사용자 지정 인터페이스는 다른 시스템에 상주하는 클라이언트를 통해 접근되며 꼭 리눅스 기반일 필요는 없다.

일부 유형의 창 관리자는 X11용으로 존재하며, 틸팅, 동적, 스택, 컴포지트 방식이 포함된다. 창 관리자는 개별 애플리케이션 창의 위치와 모습을 제어하는 수단을 제공하며 X 윈도 시스템과 통신한다. 더 단순한 X 윈도 관리자, 이를테면 dwm, ratpoison, i3wm, herbstluftwm과 같은 것들은 미니멀리스트적 기능을 제공하지만 FVMM, 인라이튼먼트, 윈도 메이커 등의 더 세련된 창 관리자들은 내장 작업 표시줄, 테마와 같은 더 많은 기능들을 제공하지만 데스크톱 환경들과 비교할 때 여전히 가벼운 편에 속한다. 데스크톱 환경에는 자체 표준 설치본의 일부로서 Mutter(그놈), KWin(KDE), Kfwm(kfce) 등의 창 관리자를 포함하지만 사용자는 원하는 경우 각기 다른 창 관리자를 골라서 쓸 수 있다.

웨이랜드는 X11 프로토콜을 대체할 목적으로 개발된 디스플레이 서버 프로토콜이다. 2014년 기준으로, 폭넓게 채택되지는 못한 상황이다. X11과 달리 웨이랜드는 외부 창 관리자와 컴포지트 관리자가 필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웨이랜드 컴포지터는 디스플레이 서버, 창 관리자, 컴포지트 관리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웨스턴(Weston)은 웨이랜드의 참조 구현체이지만 그놈의 Mutter와 KDE의 KWin이 독립적인 디스플레이 서버 형태로 웨이랜드에 포팅되고 있다. 인라이튼먼트는 이미 버전 19부터 성공적으로 이식되었다.

리눅스는 현재 비디오 입력 장치를 관리하기 위한 2개의 현대적 커널 유저스페이스 API를 갖추고 있다: 비디오 스트림과 라디오를 위한 V4L2 API, 디지털 TV 수신을 위한 DVB API.

장치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이유로, 또 해당 API가 관리하는 수많은 포맷과 표준들로 인해 이 기반 구조는 다른 장치들과 더 잘 호환할 수 있도록 개선이 필요하다. 또, 양호한 유저스페이스 장치 라이브러리는 유저스페이스 애플리케이션들이 해당 장치들에 의해 지원되는 모든 포맷과 성공적으로 동작시키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리눅스는 부팅 수준에서 GRUB 등을 통해 여러 OS로 부팅하는 것을 지원한다.

또한 리눅스는  GRUB를 통해 콘솔모드 부팅뿐만 아니라 콘솔 모드에서 X 윈도 시스템 환경인 GUI 모드와 상호 변환을 완벽히 지원한다.

리눅스 커널은 원래 IA-32 아키텍쳐의 Intel 80386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위해 설계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양한 컴퓨터 아키텍처를 지원한다. 리눅스는 광범위한 아키텍처에 포팅된 운영 체제 중 하나이며, 포팅뿐 아니라 이러한 장치를 위한 배포판 또한 존재한다. 그래서 HP 아이팩과 같은 PDA에서부터 메인프레임 최신 장비인 IBM zEnterprise System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스템에서 이용된다.

리눅스와 기타 수많은 대중적인 당대 운영 체제들과의 주된 차이점은 리눅스 커널과 기타 구성 요소들이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라는 점이다. 리눅스는 이러한 관점에서 유일한 운영 체제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가장 널리 사용되는 운영 체제이다. 일부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는 카피레프트의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카피레프트로 된 소프트웨어에서 파생된 작품은 그 자체가 카피레프트여야 한다는 논지이다. 가장 일반적인 자유 소프트웨어 라이선스인 GNU GPL은 카피레프트의 일종이며 리눅스 커널과 GNU 프로젝트의 구성 요소들 가운데 다수에 사용되고 있다.

리눅스 기반 배포판들은 개발자들이 다른 운영 체제 및 기반 컴퓨팅 표준들과의 상호 운용성을 위해 고안되었다. 리눅스 시스템은 POSIX, SUS, LSB, ISO, ANSI 표준을 가능한 준수하지만, 오늘날까지 오직 하나의 리눅스 배포판인 Linux-FT만이 POSIX.1 인증을 받았다.

협업을 통해 개발된 자유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는 개인이 독자적으로 개발되기도 한다. 소프트웨어 라이선스가 명시적으로 재배포를 허가한다는 사실은 그러나 독립적인 프로젝트에 의해 개발되는 소프트웨어를 대형 프로젝트들이 수집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마련하며 이 모든 것들이 한 번에 리눅스 배포판 형태로 이용될 수 있게 한다.

수많은 리눅스 배포판들은 네트워크 연결을 경유하여 다운로드와 설치를 통해 원격에서 시스템 소프트웨어와 응용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수집하고 관리한다. 이를 통해 사용자들은 저만의 필요에 따라 운영 체제에 순응해나간다. 배포판들은 개인, 유동적인 팀, 자발적인 단체, 상업 단체들에 의해 유지보수된다. 배포판은 설치된 리눅스 커널의 기본 구성, 일반 시스템 보안, 각기 다른 소프트웨어 패키지들을 하나의 일관된 패키지로 통합하는 일을 떠맡는다. 배포판은 일반적으로 apt, yum, zypper, 팩맨, portage 등의 패키지 관리자를 사용하여 특정 지점으로부터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설치, 제거, 업데이트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

리눅스 커널은 널리 이식된 운영 체제 커널로서, 휴대 전화에서부터 슈퍼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여러 장치에서 이용이 가능하다.
매우 다양한 범위의 컴퓨터 아키텍처 위에서 동작하는데, 여기에는 휴대용 ARM 기반 iPAQ와 IBM 메인프레임 시스템 z9이나 시스템 z10이 포함된다. 주류에서 조금 벗어난 아키텍처를 위한 특수한 배포판과 커널 포크(fork)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ELKS 커널 포크는 인텔 8086이나 인텔 80286 16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에서 동작하는 반면 µClinux 커널 포크는 메모리 관리 장치(MPU)가 없는 시스템에서 동작할 수 있다. 커널은 또한 매킨토시 컴퓨터(파워PC와 인텔 프로세서 모두), PDA, 비디오 게임기, 휴대용 음악 플레이어, 휴대 전화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제조사가 만든 운영 체제의 이용을 염두에 둔 아키텍처 위에서 동작하기도 한다.

프리덤HEC와 같이 리눅스 하에서 다양한 하드웨어의 지원을 유지보수하고 개선하는 일을 맡은 여러 산업 협회들과 하드웨어 콘퍼런스가 존재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리눅스에서 각기 다른 하드웨어의 지원이 개선되었으며 호환성 개선이 이루어졌다.

데스크톱과 서버에 쓰이는 범용 목적으로 설계된 리눅스 배포판 외에도 각기 다른 다음과 같은 목적을 위한 특수 제작된 배포판도 존재한다: 컴퓨터 아키텍처 지원, 임베디드 시스템, 안정성, 보안, 특정 지역이나 언어로의 지역화, 특정 사용자 그룹 타게팅, 실시간 애플리케이션 지원, 주어진 데스크톱 환경에 대한 기여. 게다가 일부 배포판은 자유 소프트웨어만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2015년 기준으로 400개가 넘는 리눅스 배포판들이 현재 개발되고 있으며 그 중 약 12개 정도의 배포판이 범용 목적으로 대중화되어 쓰이고 있다. 한국형 리눅스 배포판 가운데에는 하모니카 등이 포함된다.

표준 데스크톱 컴퓨터와 노트북에서 리눅스의 인기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현대의 대부분의 배포판들은 그래픽 사용자 환경을 포함하며, 2015년 기준으로 가장 대중적인 환경으로는 KDE 플라스마 데스크톱과 Xfce, 이렇게 2가지가 있다.

단독의 공식 리눅스 데스크톱은 존재하지 않는다. 데스크톱 환경과 리눅스 배포판은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풀에서 구성 요소를 선택하며 어느 정도는 유연한 디자인 가이드를 구현하는 GUI를 구성한다. 이를테면 그놈은 인간 인터페이스 가이드라인을 디자인 가이드로 삼고 있어서 인간-기계 인터페이스를 중요한 역할로 제공하는데, 단순히 그래픽 디자인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장애가 있는 사람들까지 염두에 두며 보안에도 초점을 둔다.

자유 소프트웨어 개발의 '협업'이라는 특징 덕분에 여러 곳에 분산된 팀들이, 사유 시스템의 지역화가 비용 효율적이지 않은 일부 리눅스 배포판의 언어 지역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한 예로 싱할라어 버전의 Knoppix 배포판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 XP를 싱할라어로 번역하기 전까지 중요한 수준으로 취급되며 이용되었다. 이 건과 관련하여 랑카 리눅스 유저 그룹이 대학교 교수, 언어학자, 지역 개발자들의 노력이 한데 어우러져 지역화 시스템을 개발하는 일에 주된 역할을 하였다.

데스크톱에서 리눅스 성능은 논란의 주제로 되고 있다.
예를 들어 2007년 콘 콜리바스는 서버 위주로만 성능을 우선시한다는 이유로 리눅스 커뮤니티를 고소하였다. 그는 데스크톱에 초점을 아예 두지 않는 것에 실망감이 들어 리눅스 커널 개발을 그만두었으며 이 주제에 관한 진실을 모두 폭로하는 인터뷰를 했다. 그 뒤로 데스크톱 경험 개선에 초점을 둔 상당한 개발이 진척되었다. systemd와 Upstart(2014년 구식화됨)과 같은 프로젝트들은 더 빠른 부팅 시간에 초점을 둔다. 웨이랜드(Wayland)와 미르(Mir) 프로젝트는 X11을 대체하는 대신 데스크톱 성능, 보안, 화면 표시 부분을 개선한다.

수많은 대중적인 애플리케이션들이 다양한 운영 체제에서 이용이 가능해졌다. 예를 들어 모질라 파이어폭스, OpenOffice.org/리브레오피스, 블렌더는 모든 주요 운영 체제에서 다운로드가 가능한 버전이다. 게다가 예를 들어 피진과 GIMP과 같이 일부 애플리케이션은 처음부터 리눅스용으로 개발되었는데, 이것들은 인기의 상승으로 인해 윈도우, macOS 등 다른 운영 체제들에도 이식되었다. 또, 상당한 수의 사유 데스크톱 애플리케이션 또한 리눅스에서 지원되는데, 이를테면 하이엔드 애니메이션 및 시각 효과 분야의 오토데스크 마야, 더 파운드리스 누크가 있다. 상세 내용은 리눅스용 사유 소프트웨어 목록()을 참고할 것. 자신들만의 또는 다른 기업들의 게임을 리눅스로 이식하는 여러 기업들 또한 존재하며, 리눅스는 저명한 스팀과 Desura 디지털 배급 서비스의 지원 플랫폼이 되었다.

그밖에도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macOS용으로 이용 가능한 수많은 유형의 애플리케이션들이 리눅스에서도 실행된다. 공통적으로 자유 소프트웨어 애플리케이션은 다른 운영 체제에서 보이는 애플리케이션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고 해당 애플리케이션이 리눅스에서 동작하는 버전을 갖추고 있는 경우도 있다.(예: 스카이프, 그리고 도타 2와 팀 포트리스 2 등의 일부 비디오 게임) 게다가 와인 프로젝트는 수정되지 않은 기존 윈도우 애플리케이션들을 리눅스에서 실행할 수 있는 윈도우 호환성 계층을 제공한다. 와인의 상용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코드위버스를 포함한 상업체들에 의해 후원을 받는다. 2009년 이후로 구굴은 와인 프로젝트에 자금을 제공하고 있다. 오픈 소스 와인 프로젝트에 기반한 사유 솔루션 크로스오버(CrossOver)는 윈도우 버전의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Intuit 애플리케이션(예: Quicken, 퀵북스), 어도비 포토샵 버전들(CS2),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등 수많은 대중적인 게임들의 실행을 지원한다.
탁상출판, 프로페셔널 오디오와 같은 부문에서 일부 소프트웨어의 리눅스 포팅판이 없는 경우에서도 리눅스에서 이용 가능한 동등한 수준의 소프트웨어가 존재한다. 또, 안드로이드용으로 개발된 애플리케이션은 Anbox를 사용하는 다른 리눅스 버전에서 실행이 가능하다.

X 윈도 매니저와 같은 쉽게 볼 수 있는 구성 요소들 외에 D-Bus나 펄스오디오와 같은 freedesktop.org가 호스팅하는 프로그램들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2개의 주요 데스크톱 환경들인 그놈과 KDE는 이것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각기 그에 상응하는 툴킷(GTK나 Qt)을 사용하여 개발된 그래피컬 프론트엔드를 제공한다. 디스플레이 서버는 오랜 기간 X11 디스플레이 서버 프로토콜로 클라이언트와의 통신을 맡은 또다른 구성 요소이다. X11 통신을 하는 저명한 소프트웨어로는 X.Org 서버와 Xlib이 있다. 번거로운 X11 코어 프로토콜에 대한 실망, 특히 수많은 확장 기능으로 인해 웨이랜드라는 새로운 디스플레이 서버 프로토콜이 탄생하게 되었다.

리눅스에서 소프트웨어를 설치, 업데이트, 제거하는 일은 시냅틱 패키지 매니저, 패키지킷, Yum 익스텐더와 같은 패키지 관리자를 이용하여 수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부분의 주요 리눅스 배포판들은 광활한 저장소를 갖추고 있고 수천 수만의 패키지를 보유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리눅스에서 실행할 수 있는 모든 소프트웨어를 공식 저장소로부터 받아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사용자는 비공식 저장소로부터 패키지를 설치하거나 웹사이트로부터 직접 미리 컴파일된 패키지를 다운로드하거나 직접 소스 코드를 컴파일하여 쓸 수 있다. 이 모든 방식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수준의 난이도가 있다. 소스 코드를 컴파일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신규 리눅스 사용자들에게는 도전 과제로 간주될 수 있으나 현대의 대부분의 배포판에서는 꼭 필수적으로 간주되지는 않으며 리눅스에 특화된 방식 또한 아니다.

리눅스 배포판들은 넷북 시장에서도 대중화되었으며 여기에는 커스터마이즈된 리눅스 배포판이 설치된 Asus Eee PC, Acer Aspire One이 포함된다.

리눅스 배포판은 서버 운영 체제로서 오랜 기간 사용되어 왔으며 해당 분야에서 상당한 저명도가 있다. 넷크래프트는 2006년 9월 가장 신뢰성 높은 인터넷 호스팅 기업 10곳 중 8곳이 해당 기업들의 웹 서버에 리눅스 배포판을 구동하였다고 보고함으로써 리눅스를 최상위로 두었다. 2008년 6월, 리눅스 배포판들은 상위 10개 중 5개, FreeBSD는 10개 중 3개, 마이크로소프트는 10개 중 2개를 차지했다. 2010년 2월 이후로 리눅스 배포판들은 상위 10개 중 6개, FreeBSD는 10개 중 3개, 마이크로소프트는 10개 중 1개를 차지하여 리눅스가 최상위를 유지했다.

리눅스 배포판들은 개발자들 간 대중성을 달성하고 웹사이트 호스팅의 일반적인 플랫폼 가운데 하나가 된 LAMP 서버 소프트웨어 결합(리눅스, 아파치, 마리아DB/MySQL, 펄/PHP/파이썬)의 초석이다.

리눅스 배포판들은 메인프레임에서 대중성이 높아지고 있는데, 부분적으로는 저렴한 가격과 오픈 소스 모델 때문이다. 2009년 12월, 거대 컴퓨터 기업 IBM은 자사가 주로 메인프레임 기반 엔터프라이즈 리눅스 서버의 마케팅과 판매를 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리눅스콘 노스아메리카 2015에서 IBM은 리눅스와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실행을 위해 설계된 메인프레임 시리즈 리눅스원을 발표했다.

리눅스 배포판들은 슈퍼컴퓨터용 운영 체제로도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2017년 11월 기준으로 500 목록에 오른 모든 슈퍼컴퓨터들은 일부 유형의 리눅스를 구동한다.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 가정 자동화(예: 구글 네스트) 등의 스마트 장치, 스마트TV(삼성전자와 LG 스마트 TV는 각각 타이젠과 웹OS를 사용함), 차량용 인포테인먼트(IVI) 시스템(예: 오토모티브 그레이드 리눅스)에 쓰이는 일부 운영 체제들은 리눅스에 기반을 둔다. 이러한 시스템을 위한 주된 플랫폼으로는 안드로이드, 파이어폭스 OS, Mer, 타이젠이 포함된다.

안드로이드는 스마트폰의 지배적인 모바일 운영 체제가 되었는데, 2013년 2/4분기 중 전 세계에 판매된 기기 중 79.3%가 이 운영 체제를 구동한다. 또, 안드로이드는 태블릿의 대중적인 운영 체제이기도 하며 안드로이드 스마트 TV와 차량용 인토테인먼트 시스템 또한 시장에 등장하였다.

안드로이드가 수정된 버전의 리눅스 커널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리눅스 배포판이라는 용어가 안드로이드에 적용될 수 있는가에는 동의하지 않는 의견이 있다. 리눅스 재단, 구글의 오픈 소스 관련 주요 인물 크리스 디보나, 여러 기자들에 따르면 안드로이드는 리눅스 배포판이다. 구글 엔지니어 패트릭 브래디와 같은 기타 인물들은 안드로이드가 전통적인 유닉스 계열 리눅스 배포판 측면의 리눅스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안드로이드는 GNU C 라이브러리를 포함하지 않으며(대체 C 라이브러리로 바이오닉을 사용) 리눅스 배포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타 구성 요소 중 일부 또한 사용하지 않는다. 아스테크니카는 안드로이드가 리눅스 커널 위에 빌드되긴 하지만 이 플랫폼은 전통적인 데스크톱 리눅스 스택과 공통성이 거의 없다고 썼다.

오픈 소스 플랫폼 위에서 리눅스를 구동하는 전화와 PDA들은 2007년부터 일상화되었다. 그 예로 노키아 N810, 오픈모코의 Neo1973, 모토로라 ROKR E8을 들 수 있다. 추세에 힘입어 팜(나중에 HP가 인수)은 새로운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 webOS를 제작하여 Palm Pre 스마트폰 계열에 도입되었다.

최초의 모바일 운영 체제 가운데 하나인 노키아의 마에모는 데비안 기반이었다. 나중에 또다른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인 인텔의 모블린과 병합되어 MeeGo가 탄생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나중에 모바일 장치를 대상으로 하는 운영 체제인 타이젠을 선호하게 되면서 종료되었다. 타이젠은 리눅스 재단 내의 프로젝트의 하나이다. 일부 삼성전자 제품들은 이미 타이젠을 구동하고 있는데 가장 저명한 예가 삼성 기어 2이다. 삼성 Z 스마트폰은 안드로이드 대신 타이젠을 사용한다.

MeeGo의 종료에 따라 Mer 프로젝트는 모바일 지향 운영 체제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Meego 코드베이스를 포크하였다. 2012년 7월, Jolla는 Mer 기술에 기반을 둔 자신들만의 운영 체제인 세일피시 OS를 발표했다.

모질라의 파이어폭스 OS는 리눅스 커널, 하드웨어 추상화 계층, 웹 표준 기반 런타임 환경, 사용자 인터페이스, 통합 웹 브라우저로 구성되어 있다.

캐노니컬은 이 모바일 운영 체제와 데스크톱 상응 운영 체제 우분투에서 사용자 경험을 컨버전스(집중)하기 위해 우분투 터치를 출시하였다. 또, 이 운영 체제는 외부 모니터와 연결될 때 온전한 우분투 데스크톱을 제공한다.

Librem 5는 Purism이 개발한 스마트폰의 하나이다. 기본적으로 회사가 만든 리눅스 기반 PureOS를 사용하지만 다른 리눅스 배포판도 구동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우분투 터치처럼 PureOS는 컨버전스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으므로 데스크톱 프로그램들이 스마트폰에서 실행될 수 있다. 한 예로 데스크톱 버전의 모질라 파이어폭스를 들 수 있다.

또다른 스마트폰은 컴퓨터 제조업체 파인64가 제조한 파인폰이다. 파인폰은 우분투 터치, 포스트마켓OS와 같은 다양한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를 구동할 수 있다.

낮은 비용과 커스터마이즈의 용이성 덕분에 리눅스는 임베디드 시스템에 자주 사용된다. 모바일이 아닌 통신 장비 부문에서 고객 댁내 장치(CPE) 하드웨어 대부분은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를 구동한다. OpenWrt는 OEM 펌웨어 릴리스 다수에 기반을 둔, 공동체가 운영하는 한 예시이다.

예를 들어 대중적인 TiVo 디지털 비디오 레코더 또한 커스터마이즈된 리눅스를 사용하는데, 이는 시스코/링크시스 등 제조사들의 여러 네트워크 방화벽과 라우터들 또한 그러하다. Korg OASYS, Korg KRONOS, 야마하 모티프 XS/모티프 XF 뮤직 워크스테이션, 야마하 S90XS/S70XS, 야마하 MOX6/MOX8 신시사이저, 야마하 모티프-랙 XS 톤 제네레이터 모듈, 롤랜드 RD-700GX 디지털 피아노 또한 리눅스를 구동한다. 또, 리눅스는 WholeHogIII 콘솔 등 무대 조명 제어 시스템에도 사용된다.

과거에 즐길 수 있는 리눅스용 게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근래 수년 간 AAA 타이틀 게임 일부를 제외한 더 많은 게임들이 리눅스 지원과 함께(특히 인디 게임) 출시되었다. 리눅스 커널을 사용하는 대중적인 모바일 플랫폼 안드로이드는 많은 개발자 관심을 받았으며 아이폰과 아이패드 장치용 애플 iOS 운영 체제와 더불어 모방리 게임 개발을 위한 주된 플랫폼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일부 리눅스 사용자들은 와인이나 크로스오버 리눅스를 통해 윈도우 게임을 즐길 수 있다.

리눅스의 유연성, 커스터마이즈 기능, 자유-오픈 소스의 특징 덕분에 특수 목적을 위해 상당한 튜닝을 거친 리눅스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특수 리눅스 배포판을 개발하기 위해 2가지 주된 방식이 존재한다:

이러한 목적에 쓰이는 배포판들은 데비안, 페도라, 우분투(그 자체가 데비안 기반임), 아치 리눅스, 젠투, 슬랙웨어를 포함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예 처음부터 개발되는 리눅스 배포판들은 범용 기반을 두지 않는다. 그 대신 필수적인 구성 요소만 포함하되 배포판의 이용에 과도한 것으로 간주되는 구성 요소로 인해 발생되는 자원 부하를 회피하는 JeOS 철학에 초점을 둔다.

홈 시어터 PC(HTPC)는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특히 홈 시어터 시스템으로 주로 사용되는 PC를 말한다. 텔레비전에 보통 연결되며 추가적인 오디오 시스템이 포함되기도 한다.

미디어 센터 소프트웨어 Kodi를 통합한 리눅스 배포판 OpenELEC는 HTPC용으로 개발된 운영 체제이다. JeOS 철학을 고수하여 개발된 이 운영 체제는 매우 가벼운 편이며 HTPC 범주에서만 사용 시 매우 적절하다.

우분투의 특별판인 Mythbuntu 등 MythTV 미디어 센터 소프트웨어를 포함하는 특수 에디션인 리눅스 배포판도 존재한다.

칼리 리눅스는 디지털 포렌식과 침투 시험을 위해 설계뙨 데비안 기반 리눅스 배포판이다. 보안 취약점의 침투 시험 및 식별을 위한 여러 응용 소프트웨어가 사전 설치되어 있다. 우분투 파생판 백박스는 도덕적 해킹(화이트 해킹)을 위해 보안 및 네트워크 분석 도구들이 사전 설치되어 있다. Arch 기반 BlackArch는 침투 및 보안 연구를 위한 도구 2,100개가 포함되어 있다.

프라이버시, 기밀, 네트워크 익명성, 정보 보안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수많은 리눅스 배포판들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Tails, 틴햇 리눅스, 틴포일 햇 리눅스가 포함된다. 라이트웨이트 포터블 시큐리티는 아치 리눅스 기반 배포판의 하나로서, 미국 국방부가 개발한 것이다. Tor-ramdisk는 네트워크 익명 소프트웨어 토르의 호스팅 전용 목적으로 개발된 초소형 배포판이다.

리눅스 라이브 CD 세션은 고장난 컴퓨터 시스템으로부터 데이터를 복구하기 위한 도구로서, 또 시스템을 수리하기 위한 도구로서 오랜 기간 사용되어 왔다. 이 아이디어에 기반을 두고 이 목적을 위한 여러 리눅스 배포판들이 등장했는데, 이 중 다수가 파티션 편집기 GParted, 그리고 추가 데이터 복구 및 시스템 수리 소프트웨어를 포함하고 있다:

스페이스X는 팰컨 9 로켓의 장애 허용 디자인에서 여러 비행 컴퓨터를 사용한다. 각 멀린(Merlin) 엔진은 3대의 보팅(Voting) 컴퓨터에 의해 통제되며 컴퓨터 1대당 2개의 물리적 프로세서는 다른 컴퓨터의 작동을 지속적으로 검사한다. 리눅스는 태생적으로 장애 허용이 아니지만 비행 컴퓨터 소프트웨어는 이 목적을 위해 장애를 허용한다. 유연성을 위해 방사능 내성 부품 대신 출하 대기 부품들과 시스템 방사능 허용 디자인이 사용된다.

우주 정거장에서는 임무에 중요하지 않은 노트북에는 윈도우가 운영 체제로 채용되었으나 나중에 리눅스로 대체되었다. 우주의 최초의 휴머노이드 로봇 Robonaut 2 또한 리눅스 기반이다.

제트 추진 연구소는 무인 우주 비행 및 심해 탐험 구성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해 수년에 걸쳐 리눅스를 사용해 왔다. NASA는 화성 탐사로봇의 로봇공학에 리눅스를 사용하며 위성으로부터 오는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해 우분투 리눅스를 사용한다.

리눅스 배포판은 학생들이 직접 코딩과 소스 코드를 다루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라즈베리 파이와 같은 장치용으로 개발되었다. 실제 장치를 개발하는 것 외에 실제 작동 원리를 학생에게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다.

우분투 파생판 에듀분투와 리눅스 스쿨 프로젝트, 데비안 파생판 스콜리눅스는 교육 지향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제공한다. 여기에는 학교 컴퓨터실과 컴퓨터 기반 교실을 관리하고 만드는 도구들이 포함되어 있다.(예: 리눅스 터미널 서버 프로젝트/LTSP)

인스턴트 웹키오스크와 웹컨버저는 브라우저 기반 리눅스 배포판으로, 주로 키오스크와 디지털 사이니지에 사용된다. 씬스테이션은 씬 클라이언트용으로 설계된 미니멀리스트 배포판이다. 록스 클러스터 디스트리뷰션은 HPCC에 최적화되어 있다.

특정 언어나 지리에 속한 사용자처럼 특정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범용 리눅스 배포판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중국어 사용자를 대상으로는 우분투 기린이,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대상으로는 블랙온(BlackOn)이 있다. 직무 특화 배포판들로는 미디어 제작을 위한 우분투 스튜디오, 생물정보학을 위한 DNA리눅스를 들 수 있다. 이슬람 지향 배포판 Sabily는 일부 이슬람교 도구를 제공한다. 특정 기관들은 조금 더 특수한 형태의 리눅스 배포판들을 사용하는데, 프랑스 육군 현병대(National Gendarmerie)에 쓰이는 GendBuntu, 구글에 내부적으로 사용하는 Goobuntu, 러시아군용으로 개발되는 아스트라 리눅스가 있다.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의 여러 양적 연구는 시장 점유율과 신뢰성을 포함한 주제에 초점을 두며 수많은 연구가 리눅스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리눅스 시장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리눅스를 구동하는 서버, 데스크톱, 소프트웨어 패키지들의 소득은 2008년 35,700,000,000 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었다. 분석가들과 지지자들은 리눅스의 상대적 성공을 보안, 신뢰성, 낮은 비용, 벤더 락인으로부터의 자유를 꼽았다.

토르발스는 리눅스 커널이 GPL 버전 2에서 버전 3로 이동되지 않을 것이라 언급하였다. 그는 디지털 권리 관리 내에서 소프트웨어의 이용을 금지하는 새로운 라이선스를 싫어하였다. 수천에 달하는 모든 저작권 보유자들로부터 권한을 취득하는 것이 비현실적이기도 했다.

모든 코드 줄의 절반 이상이 GPL로 라이선스되었다. 리눅스 커널 그 자체는 2,400,000개 줄로 구성되며 전체의 8%를 차지한다.

이후 연구에서 동일 분석이 데비안 버전 4.0에 대해 수행되었다(2007년 출시). 이 배포판은 283,000,000줄의 소스 코드가 포함되었으며 전통적인 수단으로 개발한다고 보았을 때 인간 나이로 대략 7300년의 개발 시간, US$( 달러)의 비용이 들 것으로 추산되었다. 

미국에서 리눅스라는 이름은 리누스 토르발스가 등록한 상표명이다. 처음에 누구도 등록하지 않다가 1994년 8월 15일 윌리엄 R. 델라 크로스 주니어는 리눅스라는 상표를 신청한 다음 리눅스 배포자들로부터 로열티를 요구했다. 1996년, 토르발스와 일부 영향을 받은 단체들은 상표가 토르발스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고소했으며 1997년 논쟁이 해결되었다. 상표의 라이선스 부여는 그 뒤로 리눅스 마크 인스티튜트(LMI)가 관리하고 있다. 토르발스는 오직 다른 사람이 해당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명칭을 등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LMI는 원래 상표의 일부로서 리눅스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명목적 2차 라이선스 비용을 청구하였으나 나중에 무료의 계속되는 전 세계적 2차 라이선스를 선호하게 되면서 이를 변경하였다.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SF)은 운영 체제 전반을 가리킬 때 GNU/리눅스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리눅스 배포판을 FSF의 회장 리처드 스톨만이 1983년 시작한 GNU 운영 체제의 일종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리눅스 커널 기반 운영 체제이기도 한 안드로이드 OS에 대해 안드로이드라는 이름에 대해 문제를 분명히 제기하지 않았는데, GNU가 그 일부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스톨만과 FSF 외 소수의 유명 인사와 소프트웨어 프로젝트, 특히 데비안(1996년까지 FSF의 후원을 받음) 또한 운영 체제 전반을 가리킬 때 GNU/리눅스를 사용한다. 대부분의 매체와 일반 이용 시에는 운영 체제 계열을 말할 때 단순히 리눅스라고 부르며 이는 수세 리눅스, 레드햇 엔터프라이즈 리눅스처럼 수많은 대형 리눅스 배포판을 가리킬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유 소프트웨어만을 포함하는 리눅스 배포판들은 GNU/리눅스 또는 단순히 GNU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를테면 Trisquel GNU/Linux, Parabola GNU/Linux-libre, BLAG Linux and GNU, gNewSense를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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